로알 아문센 vs 로버트 스콧

최근 편집일시 :

1. 탐험 동인
2. 후원 단계
3. 남극 대륙 도착
4. 준비작업
5. 탐험 일지
6. 10월: 출발
8. 12월: 아문센 남극점 도착
9. 1월: 스콧 남극점 도착, 아문센의 귀환
10. 2~3월: 스콧의 죽음
11. 전략 비교 분석
12. 옷
13. 이동 수단
13.1. 아문센의 개썰매
13.2. 아문센의 스키
13.3. 스콧의 설상차
13.4. 스콧의 조랑말
13.5. 스콧의 인력
13.6. 스콧의 개썰매
14. 식량과 물자
14.1. 페미컨과 고열량 식품들을 비축한 아문센
14.2. 통조림 및 가공식품을 들고 간 스콧
14.3. 연료와 열량
14.4. 저장고
15. 경로와 스케줄
16. 탐험대 구성
16.1. 아문센
16.2. 스콧
16.3.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
17. 시행착오
18. 탐험과정
19. 악천후에 대한 대처법과 관점의 차이
20. 설맹 대비책
21. 자금력
22. 목숨을 건 오기
23. 부질없는 자존심
24. 결론
25. 반응
26. 영국의 반응
27. 영국을 제외한 세계 각국 반응
28. 노르웨이의 반응
29. 번외-시라세 노부
30. 국내 위인전에서
31. 관련 문서

으아아아아 빽빽이 적기 싫노 ㅠㅠ

마 뭘 야리노

1. 탐험 동인[편집]


원래 아문센은 북극을 목표로 삼았다. 일찍이 북서항로를 개척하여 영광을 얻었지만, 더욱 위대한 이름을 얻고 싶었다. 북극은 지리적으로 노르웨이와 가까웠으며, 고국의 선배 탐험가 프리드쇼프 난센이 실패한 곳이기 때문에, 아문센은 난센이 쓰던 '프람' 호를 물려받자, 프람 호로 북극을 정복할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1909년 미국인 탐험가 로버트 피어리 미합중국 해군 공병 소장이 세계 최초로 북극점에 도달했다고 주장하여[1] 아문센은 어쩔 수 없이 미개척지인 남극 정복으로 목표를 수정했다. 이 때 아문센은 피어리 제독이 거기서 죽었어야 했다고 저주할 정도로 크게 분노했고, 자신이 남극점을 정복하고 저술한 책 《남극》에서도 북극점의 반대편인 남극점을 정복한들 누가 반대편에서 얻은 영광을 좋아하겠느냐고 탄식할 정도였다.

영국 해군의 스콧 대령은 이미 1901년에서 1904년에 걸쳐서 남극 탐험대를 지휘해 남극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1차 탐험대의 대원이던 어니스트 섀클턴1908년 12월에 남극점 100마일 전방(남위 88도 23분)까지 갔다가 돌아오자, 스콧은 남극을 정복하는 영광을 빼앗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조바심이 났다. 스콧은 섀클턴의 탐험보도를 보고 "다음 번에는 성공하겠군." 하였다고 한다.

게다가 1910년 3월 3일, 미국의 전국 지리학회(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를 발행하는 그 곳이다.)가 1911년 12월부터 남극탐험을 시작하여 1년 뒤에 남극을 정복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내놓았다. 탐험대장은 1909년 4월 북극을 정복한(것으로 알려진) 피어리가 될 예정이었다. 정작 이 미국 탐험대는 엎어지고 말았지만, 이 도전장을 받은 영국 탐험대는 조바심을 내며 탐험 준비를 서둘렀다.

2. 후원 단계[편집]


아문센은 과학조사를 위해서 북극 탐사를 떠난다고 공식 발표하여 진짜 목표를 숨기는 연막작전을 펼쳤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경쟁자가 생겼음을 알면 영국인들이 자극받아 스콧의 진영에 후원을 쏟아부을 것이 분명했으며, 막 독립한 신생국 노르웨이 정부가 강대국 영국과 경쟁하기를 두려워하여 아문센 후원을 중단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이 작전은 성공하여 아문센은 무사히 노르웨이 왕실의 후원을 받아 수월하게 탐험을 준비할 수 있었다.

스콧도 당시 정부 예산을 쉽게 따내지 못했고, 그래서 여러 회사의 이사회장과 강연장을 돌아다니며 기금을 모으고 다녔으며, 『타임즈』에 영국 탐험대의 찬란한 성과가 답보하고 있어 안타깝다는 기사와 스콧의 호소문을 실었다. 결국 영국 정부는 기금을 내놓았고, 회사들도 동참하였다. 특히 본사 상표가 지명도 높은 탐험사업으로 유명해지길 바라는 식품회사들이 많이 참여했다. 덕분에 아문센보다는 자금에 여유가 있었다.

3. 남극 대륙 도착[편집]


1910년 6월 15일 세돛대 포경선을 개조한 테라 노바(Terra Nova) 호가 사우스웨일즈의 카디프에서 출항했다. 스콧은 모금 활동을 하다가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에서 테라 노바 호에 합류했고, 인도양을 가로질러 오스트레일리아로 향했다.(참고로 당시에는 전부 영국 영토였다.)

아문센은 8월 9일 프람 호를 타고 노르웨이를 떠났다. 원래 혼 곶(Cape Horn)을 돌아 아메리카 대륙 서해안을 따라 올라가 북극 지방으로 갈 예정이었으나, 9월 6일 마데이라 제도에 도착하여 식수와 보급품을 챙긴 다음 선원들에게 북극으로 간다는 건 거짓말이고, 진짜 목적은 영국의 스콧 탐험대를 앞질러 남극 정복을 이루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아문센이 밝힌 가짜 계획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정비를 마친 뒤 알래스카를 거쳐 북극 탐사를 하는 것'이었는데, 당시에는 파나마 운하를 한창 파고 있어서 4년이나 지난 1914년에나 완공했기에. 북미 서부까지 배를 몰아서 최소한 남아메리카까지는 남하했다가 다시 북으로 올라와야 했으므로 이러한 속임수가 가능했다.

아문센은 형 레오 아문센에게 10월에 이 사실을 전보로 알리도록 부탁해 두었으며, 이제 노르웨이 탐험대의 목표 변경이 세계에 알려졌다. 희대의 레이스가 막을 연 것이다. 10월 12일 저녁, 스콧은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 항에 도착해 아문센이 남극으로 가고 있다는 전보를 받았다. 스콧을 지원한 클레멘츠 마컴(Clements Markham) 경은 아문센을 가리켜 '지저분한 기만술을 쓴 불량배'라고 비난했다. 어니스트 섀클턴조차 아문센이 스콧의 영향권에서 겨울을 나고 있다고 경멸하는 논조의 의견을 냈다. 난센은 이에 타임즈에 아문센을 위해 변명하는 글을 기고했다. 스콧은 1911년 1월 4일 로즈 섬에 상륙했고, 아문센은 1월 14일 그레이트 아이스 보빙 지역에 상륙하여 배의 이름을 따서 그 이름을 '프람하임'이라 지었다.


4. 준비작업[편집]


3개월이 남은 남극의 여름 동안 두 팀은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탐험대의 예정로에 따라 최대한 멀리까지 식량, 연료, 예비 피복 등 각종 물자들을 쌓아 놓은 보급기지(depot)들을 미리 만드는 것이다. 시작부터 탐험 끝까지 필요한 물자를 전부 가지고 출발하는 것은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영국 탐험대는 남위 79도 30분까지 나아가 엄청난 양의 식량을 쌓아놓고 '1톤 보급소'라는 이름을 붙였다. 노르웨이 탐험대는 남위 80도·81도·82도상의 여러 군데에 보급소를 설치하였다. 남극 480마일(772.5㎞) 반경 이내에 보급소를 설치하여 총 1.5톤을 보관하였다. 또한 펭귄바다표범을 사냥하여 기지의 식량을 쌓아두었다.

두 베이스 캠프는 서울-부산 거리의 1.5배 정도인[2] 약 650㎞ 남짓 떨어져 있었지만 가끔 두 탐험대가 우연히 마주치기도 했다.

서로의 베이스 캠프의 위치는 짐작할 수 있고 베이스캠프에서 준비하는 동안 그들이 타고 온 배는 놀고 있었으므로, 남극해안 탐사를 하러 해안을 끼고 항해하다 보면 서로의 베이스캠프를 지나가거나 상대의 장비 및 준비 상태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큰 갈등은 없었고 나름대로 우호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노르웨이인들은 영국인들을 다정하게 대해주었고, 영국인들은 노르웨이인의 강인함과 훌륭한 장비에 놀라워했다. 또한 서로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신경전도 없지는 않았는데 영국팀은 하역 실수로 바다에 빠져 버린 설상차가 무사히 내렸다고 말하는 등 블러핑을 쳤다. 스콧은 어느 날 갑자기 침낭에서 벌떡 일어나서, 아문센이 영국 영토에 침범한 것이므로 붙잡아서 배를 태워 귀국시킬 수 있었는데 기회를 놓쳤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스콧은 그레이트 아이스 보빙 지역이 자신과 섀클턴이 직접 탐사한 곳이므로 대영제국의 일부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영국인 입장에서 하는 일방적인 주장이었지만…

참고로 당시의 남극은 주인이 없는 땅이었고, 한 50년 쯤 뒤인 1959년남극조약이 맺어지면서 그 누구도 영유권 주장을 할 수 없는 공유지로 남게 되었다.

1911년 4월 21일, 남극 대륙에서 해가 사라지는 긴 겨울밤이 찾아왔다. 극지방은 기울어진 자전축으로 인해 여름과 겨울에 낮이 계속되는 백야와 밤이 계속되는 극야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 그래서 두 팀은 베이스 캠프에서 겨울을 났다. 4달이 지난 8월 24일이 돼서야 해가 다시 떠올랐다.

9월 8일, 아문센은 초조함을 견디지 못하여 한 차례 프람하임을 떠나 8명의 대원과 함께 남극으로 향했지만, 너무 빨리 출발했기에 추운 날씨를 견디지 못한채 참담한 실패를 맛보고 돌아와야 했다. 아문센은 이 사건 때문에 선배 탐험가 요한센과 갈등을 겪었고, 요한센을 추방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사실 이 탐험대를 구성한 실질적인 대장은 아문센이었으나 낙하산으로 내려온 요한센이 딴지를 걸 수 있고, 심지어 지휘체계가 이중화될 수도 있는 구도였으며 거기다 요한센은 당시 알코올 중독이기도 했으므로 탐험에는 거의 도움은 되지 않고 걸림돌에 불과한 상황이라 아문센도 할 말은 있긴 했다.

아무튼 아문센은 이 실패를 잊지 않고, 왜 실패했는지 그 이유를 끈질기게 생각하였다. 단순히 추위로 실패했으니 더 생각할 게 있겠냐 싶겠지만, 한 번 실전 경로를 밟아본 이상 이를 기반으로 실제 이동 가능거리나 식량 및 열량 소모, 악천후 대응 등을 최대한 검토해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스콧은 거의 2달 후에 출발했음에도 무지막지한 악천후에 시달렸다.

5. 탐험 일지[편집]


내셔널 지오그래픽 홈페이지에서 두 팀의 경로를 볼 수 있다.#


6. 10월: 출발[편집]


아문센은 1911년 10월 20일 대원 5명과 4대의 썰매, 48마리의 개와 함께 남극점으로 다시 출발했다. 협곡을 지날 때 어려움이 있기는 했으나 대체로 순조롭게 진행하였고, 10월 24일에는 남위 80도에 구축해 둔 보급소에 도착했다.


7. 11월: 마지막 보급[편집]


11월 1일, 스콧이 베이스 기지에서 아문센보다 13일 늦게 출발했다. 출발 때부터 설상차가 말썽을 일으키다가 5일 뒤에는 완전히 멈춰버려서 포기해야 했다. 아문센은 문제 없이 하루 20마일(32㎞)씩 전진했으나, 스콧은 일진이 좋은 날에도 10마일(16㎞)을 채 가지 못했다.

11월 7일, 아문센은 남위 82도에 마련한 최후의 보급소에 도착했다. 최후 보급소에서 가져온 식량은 100일치로, 1912년 2월 6일까지도 버틸 수 있는 양이었다. 아문센 일행은 액슬하이버그(Axel Heiberg) 빙하의 얼음봉우리를 넘어 남극 고원에 이르기까지 보급품 1톤을 끌고 갔다.

스콧 일행은 비어드모어 빙하의 기슭에서 로런스 오츠(Lawrence E. G. Oates) 육군 기병대위가 마지막 조랑말을 잡았다. 이제부터 스콧 일행은 짐 약 700파운드(약 317.5㎏)가 실린 썰매를 사람의 힘으로 끌고 가야 했고, 남극까지 갔다가 기지로 돌아가는 왕복 거리는 1,000마일(약 1,600㎞)이었다. 하루 10마일도 못 가는 스콧 일행으로서는 남극점으로 한 걸음 뗄 때마다 생존율이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지고 있는 상황. 스콧도 이때 포기했더라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슨 근자감인지, 아니면 알고도 자존심 때문에 그랬는지, 스콧은 이미 가망도 없이 전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참고로 어니스트 섀클턴도 이런 상황이 되자 탐험을 포기했는데, 그가 남극점까지 남긴 거리는 이때의 스콧보다도 살짝 가까웠지만 섀클턴은 무리하게 전진하는 것을 포기하여 과감하게 돌아섰고, 목표를 이루지 못한 대신 휘하 탐험대 전원을 살려서 돌아왔다. 탐험가로서 스콧의 수준이 당시의 경쟁자 아문센은 고사하고, 위대한 실패자 섀클턴에도 쫓아가지 못하는 함량 미달자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물론, 여기서 돌아섰다면 스콧은 본국의 후원자들 및 기타 다른 사람들에게 비아냥을 들었겠지만, 그래도 동료들과 자신의 목숨은 건졌을 것이다.


8. 12월: 아문센 남극점 도착[편집]


12월 8일, 아문센은 어니스트 섀클턴이 기록한, 인류가 도달한 최남단 지역인 88도 23분을 넘어섰다. 남극점까지는 100마일(160㎞)이 남았을 뿐이었다. 개들은 굶주림과 피로에 시달렸고, 팀원들의 얼굴에는 부스럼과 동상 자국이 있었다. 남극에 가까이 갈수록 노르웨이 탐험대는 혹시나 스콧이 먼저 남극에 도착하지 않았을지 걱정했다.

비욜란은 12월 14일에 자신의 일기에 "우리가 거기서 영국 국기를 보는 것이 아닐까? 신이시여, 우리를 보호하소서. 난 그걸 믿고 싶지 않다."라고 적었다.

1911년 12월 14일 오후 3시, 아문센 일행은 남위 90도 남극점에 도착했다. 아문센 탐험대의 대원들은 남극점 도달 직전에 아문센에게 "개들은 누가 앞에 가는 걸 좋아합니다." 하고 우기면서 선두에 세웠다. 그래서 아문센은 문자 그대로 인류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한 사람이 되었다. 그곳에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사람이 있었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일행들은 인류 최초로 남극점에 도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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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문센 일행은 노르웨이의 국기와 프람 호의 깃발을 남극점에 꽂았다. 좌측부터 로알 아문센, 헬메르 한센(Helmer Hanssen), 스베르 하셀(Sverre Hassel), 오스카르 비스팅(Oscar Wisting).

그리고 4일 동안 남극점에 머물면서 지자기 측정 · 인증샷 촬영 등 작업을 하고, 행여 스콧 일행이 도착했을 때 그들이 물자 부족에 시달리지 않을까 해서 식료품 약간과 순록 가죽으로 만든 털옷을 남겨두었다. 그리고 아문센의 예측은 정확했다. 스콧이 남극점에 도착할 즈음에는 이미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콧 탐험대는 장갑을 잃어버린 보워스가 장갑 한 쌍을 챙긴 것 말고는 자존심 때문에 아문센이 남기고 간 물자를 쓰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아문센이 남극점에 머무는 동안 찍은 사진의 상당수가 귀환길에 카메라 고장으로 유실되어 버렸기에, 이 당시 탐사대가 남긴 사진은 비욜란이 자신의 카메라로 찍은 사진 몇 장만이 전부다.

아문센 일행은 12월 18일 온 길을 다시 돌아 프람 하임으로 돌아가는 여행길에 올랐다. 왔던 길을 정확히 찾아갈 수 있었던 것도 그동안 일정한 간격으로 깃발을 꽂아 두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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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점 정복 인증샷. 노르웨이 국립 문서보관소 소장.#

여기서 아문센은 한 가지 빗나간 예측을 했다. 아문센은 한센에게 "난 영국인을 잘 알아. 그들은 일단 시작하면 포기하지 않아. 스콧은 앞으로 하루 이틀 내에 여기에 도착할 거야." 하고 말하였다. 포기해야 할 땐 포기할 줄 아는 영국인도 있다 그 때 스콧은 360마일(579.4㎞) 뒤처져 비어드모어 빙하를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남극점에 도착하리란 예측은 맞았으나, 날짜를 틀린 것이다.

이때, 비어드모어 빙하를 오르던 스콧과 내려가던 아문센은 100마일도 되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그와 별개로 저 시작하면 포기하지 않는다는 발언은 본의 아니게 스콧의 죽음을 예견한 셈이 되어버렸다.


9. 1월: 스콧 남극점 도착, 아문센의 귀환[편집]


1월 3일, 스콧은 남극까지 150마일이 남은 곳에서 팀원 8명을 반으로 나눠서 남극으로 도착할 일행을 선발했다. 마지막까지 스콧과 함께한 사람은 로렌스 오츠 영국 육군 기병 대위, 헨리 보워스(Henry R. Bowers) 해병 소위, 에드거 에번스(Edgar Evans) 해군 중사, 스콧의 친구이자 민간인 탐험가 에드워드 윌슨이었다.

1월 16일, 스콧 일행은 충격적인 것을 발견하였다. 썰매 지지목과 수많은 개 발자국, 그것은 노르웨이인들이 자신들을 앞서 남극점에 갔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1월 17일, 스콧 일행은 남극점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곳에는 노르웨이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또 아문센이 쳐놓은 텐트와 남겨둔 장비, 식량, 그리고 아문센이 스콧 앞으로 보내는 편지를 발견하였다.

친애하는 스콧 대령님께.

당신이 우리 다음으로 이 지역에 도착한 첫 번째 사람이 될 것 같으므로 이 편지를 호콘 7세께 발송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텐트 속에 남아 있는 물건들 중에서 쓸모 있는 것이 있으면 부담 가지지 말고 사용하도록 하십시오. 무사히 귀환하시기를 빌며.

-로알 아문센.

아문센은 혹시라도 자신이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할 경우에 대비하여 스콧에게 증거품을 남겨두려는 의도로 편지를 남긴 것이었지만, 갖은 고생을 하며 도달했는데 1등을 뺏긴 스콧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자신들을 조롱하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1월 26일, 아문센 일행은 프람하임에 도착했고, 나흘 뒤 남은 개 39마리와 함께 오스트레일리아로 출발했다. 3월 7일, 아문센 일행을 태운 프람 호는 태즈메이니아 섬의 호바트에 도착했다. 그리고 아문센의 남극 정복 업적을 전 세계 신문이 대서특필했다.

이후, 아문센 일행은 2주 가량 호바트에 머물렀고, 그 동안 남극의 미탐사 지역 탐험을 준비하던 오스트레일리아 탐험대의 대장 더글러스 모슨과 만나 탐험과 관련된 조언을 해주었다. 그리고 호바트를 떠나기 전에는 모슨에게 탐험에서 살아남은 개들 중 21마리를 선물로 주었다. 불행히도 모슨이 이끌었던 탐험조인 파 이스턴 파티는 악천후와 잇따른 사고로 탐사에 실패했고, 대원 두 명과 개를 모조리 잃어 모슨 혼자서만 가까스로 생환했다.

아문센은 탐험계의 슈퍼 스타가 되었고, 각지에서 강연 요청이 빗발쳤으며 남극 탐험 과정을 책으로 집필하였다. 그리고 세계는 도대체 스콧 탐험대는 어디로 갔길래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지 의문을 품었다.


10. 2~3월: 스콧의 죽음[편집]


스콧 일행은 자신들이 패배했음을 깨닫고 힘겹게 귀환을 서둘렀다. 하지만 남극점에 도달하기 전부터 부족하던 식량과 연료 사정은 이제 스콧 탐험대의 생존을 위협하였다. 연료를 담아둔 용기에 함석으로 땜질해둔 부분이 있었는데, 극저온 때문에 함석이 떨어져 나가면서 연료가 고스란히 새어버리는 것도 모자라서 식량까지 못먹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2월 16일, 비어드모어 빙하에서 에번스가 쓰러져 사망했다. 탐험 도중 크레바스에 3번이나 빠졌고 머리에 심한 충격을 3번이나 받았다. 결국 3번째 사고때 뇌손상으로 인사불성이 돼서 갈길 바쁜 스콧 탐험대의 앞을 가로막고 아무말 대잔치를 하는 등,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한다. 남은 일행은 한 달 동안 그레이트 아이스 보빙 지역을 내려갔다.

3월 17일, 보어 전쟁 때 입은 다리의 총상이 동상으로 도져 절뚝거리던 오츠는 자기가 빨리 못 걷기 때문에 동료들의 발목을 잡는다고 생각하여 살신성인의 희생을 하였다. 오츠는 "텐트 밖으로 좀 나갔다 오겠다.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르겠다." 하는 말을 남긴 채, 침낭 하나만 챙겨들고 눈보라 속으로 걸어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스콧은 오츠의 용감한 행동을 일기에 적었다.

머지 않아 힘겹게 한 걸음씩 전진하던 스콧 탐험대는 끝내 기력이 다했다. 윌슨, 보워스가 먼저 죽음을 맞았다. 마지막 생존자가 된 스콧은 최후까지 견뎠으나 식량이 완전히 바닥나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진짜 '식량'은 진작에 바닥났고 식량 대용으로 연료 없이 생으로 씹어먹던 '홍차잎'도 모두 소진되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끝까지 버텨볼 생각이다. 하지만 몸이 점점 쇠약해져서 이제 끝이 멀지 않았다. 정말 안 된 일이다. 나는 더 이상 쓸 수 없다. R. 스콧.

추신: 신이시여, 우리 국민을 보호해주소서.

1912년 3월 29일, 스콧은 마지막 일기를 쓰고 식량 부족과 동상으로 끝내 동사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보급소에서 17.7㎞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들이 사망한 장소는 보급소에서 고작 800m 떨어진 곳이었다. 문제는 이게 그냥 안 보인 게 아니라 스콧이 보급소를 눈에 쉽게 띄게 만드려는 노력을 게을리했기 때문이였다는 점이다.

아문센이 고국으로 돌아오고 대영광을 만끽하고 나서도 스콧 탐험대가 돌아오지 않자, 구조대가 파견되었으나 4월에 남극의 여름이 끝났기 때문에 수색은 진행될 수 없었고, 10월 말이 되어서야 수색대가 출발하여 11월 12일에 들어 수색대가 스콧 일행의 텐트를 발견하여 그 곳에서 윌슨·보워스·스콧의 시체를 발견하여 수습/확보했다. 그러나 살신성인한 오츠의 시체는 발견하는데 실패했다. 그래도 오츠가 들고 나갔던 침낭은 발견할 수 있었다. 그나마 수습한 침낭을 보면 그 와중에 어떻게든 살려고 애쓴 정황이 보인다고 한다.


11. 전략 비교 분석[편집]


아문센은 목표를 달성하고 돌아와 영광을 만끽했고, 스콧은 배고픔과 추위 속에서 절망에 빠져 생을 마감했다. 밑에서도 서술하겠지만, 아문센과 스콧의 대결은 시작부터 이미 승자가 정해졌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아문센은 북유럽 노르웨이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스키를 즐기며 동계활동에 친숙하였다.[3] 또한, 북서항로 탐험 등을 하면서 오랫동안 북극 근처의 혹한지에 거주하던 이누이트들을 찾아가 친하게 지냈으며[4] 그들의 생활방식을 배웠다. 이와 관련되어 아문센 자신도 모계로 이누이트 혈통이 섞였다는 설도 있다.

그 외에 극지방 현지인들이 주로 먹는 페미컨 같은 전통 보존식품이나 순록의 털가죽으로 만든 코트와 장화, 개썰매를 주로 쓰는 현지적응방식을 완벽히 터득했으며, 심지어는 이글루를 만드는 방법까지 배웠다. 추운 곳에 적응하는 법은 추운 곳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잘 안다고 봤던 것이고 그것이 적중했던 것. 또한, 이전의 탐험가들(주로 영국)의 기록을 상세히 조사했으며, 동시에 그들의 문제점과 한계를 고찰하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탐험계획과 기술을 신중하게 보완하였다.

반면에 스콧은 경로도, 장비도 모두 어니스트 섀클턴과 동일한 방식을 그대로 답습했다. 그러면서도 섀클턴이 고전하고 결국 실패한 이유에 대해서는 제대로 연구하지 않았다. 그리고 섀클턴보다 훨씬 크게 실패했고, 그 대가는 훨씬 참혹했다. 제대로 써먹지도 못한 설상차, 통조림 정도를 제외하면 새로운 시도도 거의 없었고 이전의 탐험기술을 답습했던 것이다.

즉, 극한의 남극 대륙에서는 스콧이 택한 대영제국의 첨단 기술보다, 아문센이 택한 이누이트들의 전통이 더 도움이 되었다. 그 당시, 대영제국의 소위 "첨단 기술"이라는 것은 영국 주변에서만 검증되었기에 현지에서 생활하는 극지 주민들의 전통 생존법을 따라가지 못했다.

스콧의 접근법은 아마추어 스포츠맨십이란 말이 어울리고 아문센은 생존투쟁에 가까웠다. 그리고 남극의 가혹한 환경은 후자의 손을 들어 주었고, 스콧은 안일한 판단의 대가를 목숨으로 지불해야 했다.

거기다가 차라리 스콧이 남극을 탐험하는게 처음이라면 처음이라서 몰랐다는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스콧은 이미 남극에 아문센보다도 먼저 다녀간 적이 있다. 그러니까 이미 스콧은 남극에서 다녀간 적이 있고 그것도 해안가만 깔짝대고 끝난게 아니라 82도 17분까지 갔을 정도로 깊숙히 들어가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스콧은 그런 경력치고 지나치게 안일하게 준비했다.


12. 옷[편집]


아문센은 이누이트가 입는 털가죽 방한복을 준비했고, 스콧은 영국 신사가 야만인의 추한 옷을 입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영국제 모직 방한복을 고집했다. 여기서부터 스콧이 얼마나 남극점 정복에 대해 안일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차라리 '검증되지 않았다' 같은 이유로 안 입었다면 판단 미스라고 평가받을지언정 안일했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다른 이유도 아닌 '추하다'는 이유였다.

이누이트의 털가죽 옷은 외부의 물을 먹지 않고 땀을 밖으로 발산할 수 있는데, 고어텍스가 개발되기 전까지는 그런 기능을 할 수 있는 옷은 털가죽으로 만든 옷 뿐이었다. 심지어 보온성능 면에서는 현재 기술로도 털가죽 옷을 따라갈 수 없으며, 무게 때문에 다운[5]이나 중공사[6]로 충전된 패딩을 대신 사용할 뿐이다.

스콧 탐험대의 방한복은 버버리 사가 개발한 트렌치 코트에 쓰이는 개버딘 천으로 만들었다. 영국에서 상상할 수 있는 추위라면 방한 성능이 충분하였고, 털가죽 옷보다 훨씬 가벼웠다. 모직의류가 비록 흡습성이 조금 있지만, 면 등 다른 직물에 비해서는 낮은 편이어서 원래 겨울 옷으로 많이 쓰이기도 했다. 게다가 남극이 워낙 건조하므로 흡습성은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생각하였다. 남극은 사막으로 분류되며 강수량이 상당히 적고 공기 중 수증기가 죄다 얼어버려서 습도가 심하게 낮기 때문.

하지만 남극의 혹독한 추위는 에서 나오는 수증기조차 외투에 흡입 동결하게 할 정도였고, 이는 옷이 아니라 그냥 옷 모양 얼음을 입고 있는 셈이 되어버려 점점 체온을 빼앗는 것도 모자라서 나중에는 보온능력도 없애버렸다. 결국 스콧은 남극 내륙의 혹한에 시달린 뒤에야 비로소 이누이트식 가죽옷이 있었으면 좋았으리란 생각을 일기에 적었지만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그럼에도 이누이트식 가죽옷이 좋은 거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자기 자존심이 먼저였는지 후술한 대로 아문센이 남겨준 옷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1924년, 조지 말로리에베레스트 등반을 하다가 실종되었을 때도 스콧 탐험대와 마찬가지로 개버딘으로 만든 등산복을 입고 있었다. 물론, 여전히 개버딘은 겨울나기에 훌륭한 재질이지만, 극한지에서의 상상 이상의 추위를 견디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말로리의 실패는 현대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조악한 방한복 수준이 가장 큰 원인이 된다. 자세한 것은 조지 말로리 문서 참조.


13. 이동 수단[편집]



13.1. 아문센의 개썰매[편집]


아문센은 개를 잘 다루는 한센과 개썰매 대회 우승 경력이 있는 스바레 하셀을 최종 팀원으로 넣을만큼 개썰매에 많은 신경을 썼다. 그리고 예상대로 잘 훈련된 개들은 아문센 일행이 순조롭게 눈 위를 나아가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아문센은 썰매를 끄는 동물로 그린란드견을 선택했다. 극지방 교통 수단으로 검증된 개썰매가 최고라고 생각한 것이다.

파일:Frost.jpg

아문센은 이 여정에서 약해지거나 죽은 개가 있다면 가차없이 식량 자원으로 재활용하는 철저한 계획성을 보였다. 반대로, 스콧에겐 개를 먹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문센은 애초에 탐험 계획단계부터 언제쯤 죽은 것을 얼마만큼 먹을지 계획하였다. 그리고 그 개고기를 남은 개에게 먹이로 주기도 했다.[7] 한센은 썰매개 관리 담당이었던 만큼 개들을 무척 아껴서 개들을 죽여 잡아먹는 행위에 거부감을 느꼈지만, 생존을 위한 것임을 알았기에 먹기를 거부하지 않았다. 아문센이 귀환한 후 영국 기자단이 이 부분을 꼬투리 잡아 아문센을 비방했으나, 아문센은 “그녀석들은 우리를 위해 명예롭게 죽었다”며 그런 말이야말로 개들의 희생을 모욕하는 거라며 분노를 표하고는 덧붙여 "당신들이라면 극한의 상황에서도 개고기를 안 먹고 버티겠느냐"라고 일갈했고, 개들을 아꼈던 한센 역시 아문센을 거들면서 기자들에게 반발했다.

어차피 원래 그린란드견, 시베리안 허스키 등 북극의 썰매개들은 원래 본능적으로 같이 썰매 끄는 동료가 약해지면 집단으로 공격하여 잡아먹는 습성이 있다. 말라뮤트시베리안 허스키 같은 견종들은 혹독한 환경 하에 인간과 공존하기 위하여 오랜 세월에 결쳐 사나운 개체들을 모두 도태시켰기 때문에 순하다고 알려졌으나, 그건 애완견이나 스포츠를 위한 개썰매 개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경악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극지방에서 삶을 영위하는 개들이 동료를 잡아먹는 일은 흔하며 극한의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방법의 하나다. 사람도 할 수 없으면 이런 짓을 하기도 하고. 당시로부터 1세기 전에 실종된 존 프랭클린의 탐험대 일부의 시신을 21세기에 조사한 결과 극한까지 몰리자 아예 인육을 먹은 흔적도 있었다.

따라서 아문센의 개를 이용한 식량 보충은 그 환경에선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또한, 개썰매에 신경을 많이 쓴 만큼 아문센의 개들은 철저히 훈련받았다. 개썰매를 모는 요령도 뛰어났고 전속력으로 달리던 개 수십 마리들이 명령을 듣자마자 곧바로 멈춰설 정도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스콧 탐험대의 개들은 개썰매 전문으로 훈련받지 않았으므로 수준을 감히 비교하기 어려웠다. 스콧이 개를 등한시한 이유는 개썰매를 신뢰하지 않아서였다. 첫 번째 탐험에서 스콧은 훈련되지 않은 썰매개들 때문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대신, 스콧은 야쿠트 조랑말에 기대를 걸었다. 아문센은 이를 알고 기겁하여 개를 쓰라고 권유했으나 스콧은 듣지 않았다. 그래도 아문센은 스콧이 마지막에 마음을 바꿔 개를 선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개 구입 대리인에게 다른 곳에서 주문이 온다면 자신에게 먼저 알려달라고 미리 지시를 내렸을 정도였다. 그러나 스콧은 마음을 바꾸지 않았고 이는 스콧의 치명적인 실책 중 하나가 되었다.

스콧이 개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로 해군 출신인 스콧은 동물을 사랑하고 자립심을 중시하는 영국 해군의 전통을 답습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스콧은 아문센과 경쟁하기 전에 저명한 지리학회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다.

피어리 씨의 북극탐험 이후, 개를 이용한 탐험이 늘고 있지만 사실 개의 유무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개 없이도 탐험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게다가 개썰매를 이용한 탐험이 개에게 얼마나 잔혹한지 아십니까?그럼 조랑말은?[8]

얼마 전, 탐험에서 개썰매를 끌도록 썰매개 열여덟 마리가 동원되었지만 단 한 마리만이 살아남았습니다. 굶어 죽고 과로로 죽어갔고 그 시체는 다른 썰매개들의 먹이로 사용되었죠. 결론적으로 썰매개를 사용한 탐험은 너무나 잔혹한 탓에 지양되어야 마땅합니다.


그 말에 박수갈채가 일었지만[9] 그 학회에 동석하고 있었던 탐험계의 대선배 프리드쇼프 난센이 반박했다.

나는 개를 사용한 탐험도 해봤고 개를 사용하지 않고도 탐험을 해봤소. 스콧 씨는 개를 사용한 탐험이 잔혹하다고 했고 실제로 잔혹한 것은 사실이오.[10]

그렇다면 묻겠는데, 만약에 사람이 무거운 썰매를 끌도록 강요하는 것은 어떻다고 생각하시오? 이게 몇 배나 더 잔혹한 일 아니오?


난센의 이 반박은 후일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스콧 본인은 말을 전부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결국에는 잡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고장난 설상차와 죽어버린 말 탓에 스콧의 탐험대는 썰매를 직접 끌고 갔다. 심지어 말을 저렇게 해놓고 사실은 개도 끌고 갔는데, 그렇다고 제대로 써먹지도 못했다. 이로 인한 문제는 정말 심각 그 자체였는데 밑에 보면 알겠지만 계산 오류+연료 부족+식량 부족+기타 등등의 콤보에 이 일로 인해서 열량은 더 많이 필요한데 연료와 식량이 부족하니 버틸 수가 없었다.

거기다 스콧과 대원들은 모두 죽었다. 그에 반해 아문센이 데려간 48마리의 개 중에서 11마리가 살아서 남극점에 도달했다.

먹이 면에서도 개가 말에 비해 크게 유리했다. 개는 잡식동물이라서 어지간하면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여차하면 인간이 반대로 개 먹이를 먹어서 어떻게든 버티기가 가능하기에 조랑말처럼 전용 먹이를 챙겨줄 번거로움도 없다. 그리고 고기를 날로 먹는 것도 문제없으니 개를 위해 음식을 조리하느라 연료 낭비를 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여행내내 대부분 극도로 아끼며 먹긴했지만 페미컨과 식량, 이것조차도 적다며 출발전에 간간히 사냥해온 동물 고기들을 날로 씹을 때, 개와 인간의 음식 공유에 큰 걱정이 없었다.

썰에 따르면 아문센이 남극이 아닌 북극점을 목표로 했을 때 곰썰매를 이용하려고 독일의 유명한 동물 거래상 카를 하켄베크를 통해 북극곰을 얻어 조련사의 도움을 받아서 훈련시켰지만 조련사가 탐험에 불참을 선언하자, 결국 곰썰매를 포기하고 예전처럼 개썰매를 이용하기로 한다. 이 썰이 사실이라면, 이라는 동물의 위험성을 생각했을 때 천만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위험성도 위험성이지만, 설령 말을 잘 듣는다 해도 먹이를 너무 많이 먹고 개뿐만 아니라 스콧이 데려간 조랑말보다도 무게가 훨씬 많이 나가서 크레바스에 빠지기라도 하면 답이 없다.


13.2. 아문센의 스키[편집]


아문센 탐험대는 전원 스키에 능숙했다. 스키 대회 세계 챔피언 올라프 비욜란도 끼어 있었다. 물론, 일반적으로 스키 하면 떠올릴 알파인 스키가 아니고 노르딕 스키, 즉, 크로스컨트리 스키다. 발과 스키가 꽉 물려 있어서 경사를 빠르고 안정적으로 내려올 수 있는 알파인 스키와는 달리, 노르딕 스키는 발뒤꿈치가 떨어져 있어서 걷듯이 이동할 수 있다.

그러나 스콧 탐험대는 스키에 능하지 못했다. 눈 위를 이동할 때 걸어가는 게 나을지 스키를 타고 가는 게 나을 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물론, 스콧도 스키를 타려고 시도해본 적이 있었다. 1901년부터 1904년까지 어니스트 섀클턴 등과 함께 했던 디스커버리호 탐험 중에 스키를 타보려고 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스키를 제대로 탈 줄 몰랐기 때문에 오히려 걸어가기가 더 편할 정도로 실수를 거듭했고, 결국 스키를 때려치웠다. 다만, 스콧은 난센의 충고를 받아서 트뤼그베 그란(Tryggve Gran)이라는 노르웨이 출신 파일럿을 데려와 스키를 가르치게 했다. 문제는 스키 배우기를 대원들에게 의무적인 과업으로 지시하지 않아 몇 명 배우지도 않았고, 결정적으로 스키가 능숙한 그란을 탐험에 참가시키지 않았다. 이유는 그란이 노르웨이 사람이어서일 가능성이 높다. 스콧의 시체를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이 바로 그란이었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만약 그란이 만약 탐험에 참가했으면 최소한 스콧은 살아 돌아올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스콧을 위해 변명하자면 지금이야 스키가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스포츠지만 이 무렵 유럽에서 스키는 그리 널리 알려진 기술이 아니었다. 이제 막 스포츠화돼서 알려지기 시작했던 무렵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웨덴이나 노르웨이같은 북유럽 일대가 아니면 스키에 능숙한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스키가 무슨 '비장의 기술'도 아니었다. 정말로 하려고 한다면 북유럽 국가 출신으로 스키에 능숙한 사람을 찾아서 대원이나 스키 교육자로 영입할 수 있었다. 이미 스콧은 스키 타는 법을 가르칠 수 있는 그란을 영입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단순 전진과 정지, 가속과 감속 정도의 기본적인 기술들은 1주, 넉넉잡아 2주 정도 하루 두 시간 정도만 투자해서 열심히 배우면 처음 타는 사람도 어렵지 않게 익힌다. 스콧은 군인이니까 말할 것도 없고 남극 탐험을 가게 된 탐험대원들도 운동신경이나 신체조건이 좋았을 터이니 더 빨리 배웠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스콧은 실패 한 번에 크게 실망했는지 스키를 제대로 배우지도, 스키에 능숙한 사람을 대원으로 삼지도 않았다. 개썰매 건도 그렇거니와 스콧은 전반적으로 한 번 맘에 안 들었으면 그대로 포기해버리고 반대로 한 번 꽂히면 무슨 삽질을 해서라도 끌고 가는 등 리더로써는 영 함량미달인 모습을 자주 보였다.
랄로 화이팅


13.3. 스콧의 설상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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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이 탐험에 이용했던 설상차는 빙판 도하를 고려해서 메인프레임을 목재로 제작해 경량화를 꾀했으며 2~30도 이상의 등판능력도 있었다. 1회 주유시 최대 주행거리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최대 적재 중량 및 견인 중량은 300㎏에 달했다고 한다. 비록 증기기관차가 아직 현역으로 굴러가던 1900년대 초반이라는 시대적 한계 때문에 잘해야 시속 30㎞에 불과한 속도밖에 낼 수 없어 시속 100㎞도 간단하게 낼 수 있는 요즘 설상차와는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제대로 굴러갔다면 스콧 탐험대에게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당시 세계 언론, 특히 영국 언론은 유럽 몇몇 강대국들만 보유하고 있는 이 최첨단 장비를 집중보도했고, 그들은 이런 화려한 장비를 보유한 스콧 탐사대가 당연히 이기리라고 예상했다.

문제는 이 설상차가 제몫을 하기는 커녕 오히려 바퀴 달린 고철덩어리가 되어버렸다는 것. 기온이 설계 당시 예상보다도 너무 낮아서 연료가 얼어버린 것이다. 스콧이 아무 검증도 없이 설상차를 가지고 갈 정도로 아주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고 이 설상차는 혹한기 스코틀랜드 평원에서 많은 테스트를 거쳐 실용성을 검증받은 물건이었다. 그러나 남극의 한파는 스코틀랜드의 한파 "따위"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 치명적인 오류였다.

그리고 이 고장난 설상차의 처분에 대해서도 스콧은 어리석은 판단을 내린다. 스콧은 설상차 수리 기술을 가진 대원과 마찰을 빚은 끝에 그가 떠나 버렸기에 설상차를 고칠 수도 없었다. 만약 동행했더라도 연료가 응고될 정도의 혹한에서는 수리가 불가했을 확률도 크고, 그렇다면 아무런 쓸모도 없고 무겁기만 한 고장 설상차를 그냥 버리고 갔어야 했다. 그러나 비싼 장비를 그냥 버릴 수 없다고 하여 그걸 인력으로 끌고 가는 짓거리를 벌인다. 결국 오래 가지 못해 설상차 두 대가 모두 극심한 추위 속에 얼어서 움직이지 않거나 물에 빠져 쓸 수 없게 되었다. 제대로 된 탑승물을 타도 체력 소모가 엄청난 남극에서 체력을 보전할 생각은 안 하고 정말 쓸데없이 힘만 빼는 짓을 저지른 것이다.

우습게도 스콧은 탐험 전에 일기장으로 개썰매를 폄하하면서 설상차의 장점을 찬양했는데, 반대로 아문센은 설상차를 보고 저게 추위 속에서 정말 제 몫을 하는지 실험이라도 해봤는지 모르겠다며 실패를 예상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100년 뒤인 21세기 초의 최첨단 설상차로도 크레바스 등의 자연적 요소로 인해서 남극에서 안전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아문센의 생각이 정확했다고 할 수 있다.


13.4. 스콧의 조랑말[편집]


스콧은 한파에 강하다는 야쿠트 조랑말을 데려가고, 말을 돌볼 전문 인력도 겸할 수 있는 오츠를 대원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을 19마리나 데려간 것은 결과적으로 치명적인 오류였다. 심지어 이 중에서 9마리는 탐험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바다에 빠져 익사해버렸으며 생존한 나머지 10마리도 남극에 당도하자마자 전부 동사하거나 크레바스에 빠져 죽어버렸다.

어니스트 섀클턴 문서에 랄로 화이팅
나온 계산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견인력과 식량 소모량의 비를 계산하면 말이 개보다 효율이 5배나 높은 것이 맞다. 문제는 이게 인간이 살 수 있는 동네 기준으로나 그렇다는 것에 있다.

우선 말 사료인 건초는 인간이 먹을 수 없다. 맛이 없는 문제는 둘째치고 인간의 위장은 셀룰로스를 분해할 수 없어서 소화를 못하므로 아무리 극한 상황에 몰려도 인간은 건초를 식량으로 쓸 수 없다. 즉, 건초는 말먹이 외의 용도가 없고 기껏해야 불쏘시개, 아니면 보조적인 보온재로 쓰거나 임시로 장비 보수에 이용하는 정도로밖에 쓸 수 없다. 게다가 말도 건초를 그대로 먹으면 소화가 느려서 힘을 제대로 낼 수 없으므로 말죽을 끓여서 먹이는 것이 좋은데[11], 연료도 연료지만 남극의 극한에서는 말이 먹기도 전에 말죽이 다 얼어버릴 것이 뻔하다.

반면, 개는 잡식동물이므로 인간과 같은 음식을 대부분 먹을 수 있다. 개에게 인간의 식량을 먹일 수도 있고, 만에 하나의 최악의 상황이 발생한다면 인간이 개사료를 먹어도 큰 문제는 없다. 즉, 개의 식량은 개와 인간이 나눠 먹을 수 있어서 보급이 자연스레 일원화되어, 돈과 물자, 운반을 위한 수고의 낭비를 막는다. 또, 개는 개고기를 먹을 수 있지만, 말은 초식동물이라 말고기를 먹지 못한다.

10인분의 식량과 말 10마리 분의 건초를 보급받았는데 말 1마리가 죽으면 말 1마리 분의 건초는 그냥 버리거나, 다른 말들이 먹을 때까지 쓸데없이 지고 가야하는 잉여물자가 되지만, 20인분의 식량을 받아서 개와 인간이 같이 먹으면 개 1마리가 죽고 나서 그 개 1마리분의 식량은 인간이 먹을 수 있다. 맛이 있을지는 좀 다른 문제지만 극한 탐험 중에는 일단 먹을 수만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살아남지 못한다. 실제로도 어니스트 섀클턴 탐험대가 조난되었을 때, 먹은 것이 개먹이였던 개 페미컨이였다. 개먹이였기 때문에 맛은 끔찍하게 없었다고 하지만 일단은 먹고 살 수는 있었다.

말의 배설물을 연료로 활용하기도 하나, 남극에서는 그렇게 쓰지 못했다. 사실, 배설물은 그 자체에 수분이 많기 때문에 연료로 쓰려면 반드시 바싹 건조시켜야 한다. 하지만 남극에서는 수분이 증발하긴 커녕 되려 얼어버린다. 그렇다고 말리지 않고 그냥 바로 태워서 쓰면 폭발해버린다. 대충 얼어있던 배설물에 갇혀서 봉인되어있던 가스가 녹으면서 해방되며 새어 나오고 그 새어나온 가스에 당연히 불의 열기가 접촉한 다음, 구멍에서 빛이 나면서 터진다.

그리고 살인적인 한파에 말들은 금세 얼어죽었다. 물론 스콧이 아예 아무런 생각도 안 한건 아니고, 가혹한 추위로 유명한 시베리아의 환경에 적응한 품종인 야쿠트(Yakut) 종 말을 고르긴 했다. 현지에서는 사하 아타라고 불리는 품종으로 국내 다큐에서도 몇번 소개되었던 적이 있다. 영하 50도의 맹렬한 한파에도 끄덕 없으며 강인한 체력으로는 세계 제일이라서 현지에서 짐마차를 끄는 짐말로 쓴다. 한 코사크 장교는 해당 품종의 애마로 한겨울 동안 시베리아의 눈밭과 얼음을 헤치며 극동까지 약 8천㎞를 주파했던 적이 있다는 기록도 있다.[12]

그러나 시베리아가 아무리 춥다고 한들 남극의 한파는 급이 다르다. 시베리아는 그래도 냉대기후에 속하는 곳으로 사시사철 얼어붙게 추운 것이 아니라 여름에는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가고 따뜻한 지역에는 침엽수림도 있지만, 남극은 빙설 기후24시간 365일 내내 영하이며 인간이 기지에서 기르는 경우를 빼면 지의류 정도밖에 살지 못한다. 말은 털이 짧아서 보온력이 약하고, 인간을 제외하면 거의 유일하게 땀을 흘려서 체온을 조절하는 포유류라서 힘을 쓰기 시작하면 이내 온 몸에 땀이 나는데, 남극에서 상시 몸 여기저기에 수분이 생기면 어찌 될 지는 뻔하지 않은가. 결국 말이 흘린 땀이나 타액이 찬바람에 순식간에 얼어붙어 고드름이 매달려서 동상까지 입었고, 이런 탓에 스콧 탐험대는 캠프를 치고 나면 휴식을 취할 여유도 없이 일일이 말의 몸에서 얼음을 털어주고, 추위를 막기 위해 담요를 씌워주고, 눈으로 벽을 쌓아 임시 마굿간을 만들어서 바람을 막아줘야 했다.

이처럼 말에게 '휴식 여건'을 마련해주는 것조차 엄청난 부담이었는데, 위에서 아문센의 그린란드견 품종의 개에서 설명했다시피 극지방에서 개는 눈을 파고 그 안에 웅크리고 들어가는 식으로 추위를 피할 수 있었다. 정 개가 힘들어 보인다 싶으면 개가 웅크릴 정도의 구덩이를 파는 건 사람에게는 어렵지 않으니 대신 파 줘도 되고, 그 뒤에 추위를 막기 위해 담요를 덮어주는 것도 간단한 절차다. 정 여건이 안된다면 사람이 쉬는 텐트로 데려와서 쉬게 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린란드견 자체가 그런 생활에 최적화된 품종이기도 하고…

하지만 말은 덩치가 너무 커서 구덩이에 들어가 쉴 수 없는 동물이고, 설령 가능하다 하더라도 말 덩치만한 구덩이를 파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인간이 쉬는 텐트에도 들어올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결국 스콧의 탐험대는 하루 종일 고된 행군으로 녹초가 된 와중에도 편히 쉬지 못하고 임시거처를 정한 다음, 위에 서술된 중노동을 매일 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이들이 아문센처럼 효율적으로 눈벽돌을 만들어 설치하는 기술을 익힌 것도 아니었으니 정말 쌩으로 눈벽을 쳐야 했다.

극지방에서 말을 돌보는 일은 이처럼 손이 무지하게 많이 가서 스콧 일행에게 커다란 부담을 안기고야 말았다. 육군 기병 장교 출신으로 말 돌보기가 전문인 로런스 오츠(Lawrence E. G. Oates) 대위가 "어차피 조랑말은 관리가 너무 힘드니까 죽을 때까지 질질 끌고가다가 죽으면 그거라도 먹자"고 조언했지만, 스콧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조랑말 문제로 인해서 스콧 일행은 비어드모어 빙하까지 아문센 쪽보다 인원이 더 많이 필요했다.

또 남극을 탐험하다보면 크레바스에 빠지는 등 돌발상황을 많이 겪는데, 말은 개보다 훨씬 크고 무겁기 때문에 구조하기 힘들었다. 극도로 기력이 소모되는 남극 탐험에서 이런 체력 소모는 최대한 피해야 하는데 고생을 사서 하는 격이다.

조랑말과 설상차는 바로 섀클턴 탐험대가 3년 전인 1909년 남극점 탐험에 나설 때 썼다가 똑같이 낭패를 본 이동수단이었다. 스콧은 새클턴의 경험에서 전혀 배우지 않았고, 섀클턴과 똑같은 과정으로 실패한 대가를 죽음으로 치러야 했다. 섀클턴도 난센으로부터 개썰매의 장점을 듣고도 "그래봐야 개는 더 많이 먹는 주제에 짐을 그다지 많이 옮기지도 못한다."며 반대하고 조랑말을 데리고 갔고 실패, 돌아오고 나서는 개썰매가 낫다고 인정했다.

아문센은 개 대신 조랑말을 동원한 스콧의 결정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아문센과 스콧이라는 책에 실린 일화에는 아문센이 스콧 탐험대가 조랑말을 데리고 간다는 소리를 듣자, "조랑말은 안된다. 내가 개를 많이 끌고 왔으니, 원한다면 절반을 주겠다."라고 충고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문센은 비록 스콧이 자신의 라이벌이지만 스콧을 존중했고, 무엇보다 승패를 떠나서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를 조언한 것이다. 그러나 그 조언은 깔끔하게 무시당했다.

훗날 아문센이 탐험에 성공하고 영국에 강연을 갔을 때 개를 선택한 것이 탐험 성공의 가장 큰 요인이었다고 하자, 영국왕립학회에서 면전에 대고 “개들에게 만세 삼창을”이라고 하면서 아문센을 비꼬았다. 아문센은 자서전에 이 때를 언급하며 굉장한 모욕감을 느꼈다고 서술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내심 영국인들도 스콧이 개를 데려갔어야 했다고 생각했는지 포츠머스 항구에 스콧의 동상을 세우면서 발치에 썰매개도 같이 넣어 세웠다는 것이다.


13.5. 스콧의 인력[편집]


'개들과 함께 하는 여행에서는 사람들이 자력으로 하는 어려움, 위험, 가난을 무릅쓸 때의 그런 높은 모험정신에 도달할 수 없다.'
- 로버트 스콧

'그들은 개가 끄는 썰매를 타고 편안한 여행을 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처럼 사람이 비참하게 썰매를 끌어야 하는 여행은 하지 않은 것 같다.'
- 오츠의 일기, 위로부터 몇 달 후

스콧은 원래부터 비어드모어 빙하까지 조랑말이 썰매를 끌게 하고, 그 뒤에는 조랑말을 잡아 식량으로 한 다음 인간이 썰매를 끌고 가는 것으로 계획하고 있었다. 이것은 위의 발언에서 보듯이 스콧이 탐험에서의 극기정신과 인력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마저 원래 계획과는 달랐다. 원래는 조랑말을 식량으로 쓴다는 계획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는 무모한 계획이었다. 스콧이 처음 캠프를 세운 로스섬에서 남극점까지 직선거리로만 대략 1,357㎞, 실제 이동거리는 거의 1,381㎞다. 알기 쉽게 비교하자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경부고속도로를 따라 가는 최단거리[13]를 기준으로 한 401㎞와 비교했을 때, 무려 3.4배에 달한다. 탄탄하게 손질된 고속도로를 타고 걸어가도 끔찍할 정도로 먼데, 그곳은 남극이었다. 남극 고원은 춥기도 엄청나게 춥거니와 해발고도도 수천 미터나 되고 식물류가 없어 산소도 부족해서 체력이 훨씬 빨리 소모된다. 스콧 일행은 이 기나긴 거리를 생존에 필수적인 많은 물자를 운반하며 이동해야 했다. 남극 고원의 무자비한 환경에서는 인간의 육체를 극한까지 몰아넣는 선택이었다. 거기다 스콧은 동물도 아니고 기계 설상차를 끌고갔으면서 정작 나중에 힘들어지자 개썰매 운운하며 인간의 극기정신을 설파하니 어불성설이라 할 수 있겠다.

거기다 결국 최후에는 인간의 힘만으로 간다는 생각도 멍청하기 짝이 없다. 충분히 가능성이 검증된 곳에서 했다면 또 모르겠는데 남극이라는 미지의 장소에서 했다. 예시로 남극에서 300 클럽이라는 기행을 벌이는 사람이 있지만 이것 역시도 당연히 다른 구조 인원이나 의약품을 충분히 충원한 상태에서, 이런걸 할 만한 사람들, 즉 강인한 남극점 기지의 연구원이 한다. 애초에 300 클럽은 스트레스 해소가 목적이고 그들이 뛰는 곳은 이미 아문센과 스콧이 지나간 남극에 세운 아문센-스콧 남극점 기지이며, 기지에서 남극점까지는 약 100미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100미터 질주만으로도 꽤 고통스럽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13.6. 스콧의 개썰매[편집]


그렇다고 스콧의 탐험대가 개와 개썰매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스콧의 설득으로 탐험에 참가한 러시아 출신의 드미트리 기레프(Dmetri Girev)와 시베리아 산 개를 구입해 온 세실 미어스(Cecil Meares)가 개썰매와 개 32마리를 지휘했다. 그럼에도 스콧은 개썰매를 베이스캠프와 전초 저장 창고를 구축하는 데에만 사용하고 정작 남극점 정복에 투입하지 않았다. 결국 이는 적극적으로 개와 개썰매를 탐사에 활용하여 남극점 정복에 주력했던 아문센의 탐험대에게 뒤쳐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14. 식량과 물자[편집]



14.1. 페미컨과 고열량 식품들을 비축한 아문센[편집]


물품의 준비와 비축 계획은 겉으로 보면 서로 큰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자금 지원은 스콧이 더 빵빵하게 받은 만큼 준비 과정에서는 더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1910년 10월 19일에 출발한 노르웨이 탐험대는 개 52마리가 끄는 개썰매에 800㎏이 넘는 온갖 물품을 가득 실었다. 아문센은 식량 저장고들을 만들면서 높은 깃발을 꽂아서 멀리서도 보이기 쉽도록 해두었다. 각 저장고들에는 기본적으로 페미컨 12상자, 바다표범 고기 30㎏, 비계 50㎏, 마가린 한 상자, 초콜릿 20상자, 비스킷 12상자, 등유 25갤런(약 114 L),[14] 붕대 및 구급품과 담요 같은 만일의 사태를 위한 물품들을 꼼꼼하게 비축해 두었다. 아문센 탐험대는 이외에도 과일 설탕절임이나 , 치즈 등도 비축하고 있었지만, 이들 물품이 탐험에는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기지였던 프람하임에 그대로 남겨두었다. 이는 의외로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다. 절임이나 잼은 액체인 특성상 담고 갈 용기가 필요했는데 병조림유리라는 특성상 무겁고 약했으며, 통조림은 비싸고(그 당시), 깡통따개가 필요하며, 무엇보다도 은 의외로 냉기에 약해서 영하 30도를 넘기면 달걀 껍데기마냥 부서져 버리는데, 이곳은 알다시피 지구상에서 가장 추운 지역이다. 치즈도 예외는 아니다. 퐁듀가 왜 생겼는지 생각해보라.

아문센이 선택한 페미컨과 바다표범 고기는 대단히 효과적이었는데, 조리할 필요 없이 그냥 생으로 먹어도 되기 때문이다. 극지방에서 비타민 등을 섭취하려면 고기를 익히지 않고 그냥 먹는 게 낫고, 일반적인 상황에서 생식을 '위험한 것'으로 만드는 세균이나 해충은 죄다 얼어죽고 없는 극지라서 생식이 오히려 좋다. 고기 대부분을 생으로 먹으니 조리에 연료를 소모할 필요가 없어 그만큼 연료를 아낄 수도 있었다. 이 또한 극지방의 이누이트에게 배운 방식이었다.

페미컨은 극지방에서 무려 수십 년 동안 보존할 수 있는데다가 가볍고, 당시의 발달되지 않은 기술로 만든 통조림과는 달리 납에 중독될 염려도 없는 데다 영양분도 풍부했다. 새클턴 탐험대가 남긴 페미컨은 백 년 정도 지났을 때도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더군다나 아문센 탐험대의 페미컨은 에너지바처럼 말린 야채나 과일, 오트밀을 섞어서 만든 개량형이라, 기존 페미컨보다 더 맛도 좋고 다양한 영양소를 섭취할 수 있었다.

아문센 탐험대가 먹은 바다표범 고기는 현지에서 출발전 준비기간 동안 사냥으로 조달했다. 당연히 남극의 내륙에는 바다표범 같은 동물이 없지만, 해안가에는 아주 많이 살았다. 아문센은 이들을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으로 보았고, 대원들은 바다표범을 볼 때마다 열심히 사냥해서 주식을 바다표범 고기로 하고 자신들이 가져간 식량은 바다표범이 잡히지 않을 때와 별미로만 먹었다. 이러니 식량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식량 비축을 위해서 사냥을 하기는 했지만, 아문센은 개인적으로 사냥을 즐기지는 않았으며 동물은 자연 상태 그대로 살아있는 것이 더 아름답다고 여겼다. 재미없는 남극에서 따분해진 탐험대원들이 사냥에 재미를 붙여서 필요 이상으로 동물들을 잡아대자, 쓸데없이 동물을 잡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했다.

거기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극한까지 몰아넣는 극지탐험 중에 따분해졌다는 소리가 나오는 상황 자체가 탐험 과정에서 절대 무리하지 않도록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대로 움직여 여유가 남을 정도로 순조롭게 진행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물론, 인간은 스트레스가 쌓일수록 어떻게든 무슨 여가 활동을 해서라도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싶어하지만, 극지 탐험 정도의 극한 상황에서는 그저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것만으로 기력을 완전히 상실할 위험이 있으니 어지간해서는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는 아문센 일행의 스트레스와 체력이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서 뭔가 했을 만큼 적정한 선까지 잘 유지되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또한 비스킷의 재질도 아문센의 꼼꼼함이 두드러지는데, 아문센은 비스킷을 고를 때 고운 밀가루제를 피하고 호밀귀리, 이스트가 많이 들어간 것을 선택했다. 이런 비스킷은 식감이 거칠지만, 섬유질이 풍부하고 도정하지 않은 곡물에 많이 포함된 비타민 B 복합체도 섭취할 수 있다. 아문센은 그 동안에 한 여러 탐험 동안 밀가루빵이나 비스킷보다는 자신들이 많이 먹었던 잡곡류가 극지방 탐험에서도 유용함을 경험으로 익혔기 때문에 각기병의 위험도 피할 수 있었다. 노르웨이같은 고위도 지방에서는 주식으로 잡곡을 많이 먹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꼼꼼하게 식량을 고르고 또 준비한 덕분에, 아문센 탐험대는 식량의 가짓수를 최소한으로 줄여갔으면서도 스콧 탐험대가 시달린 영양실조를 피할 수 있었다. 이렇듯 가장 기본적인 식량의 영양분 파악 및 조사까지 스콧은 아문센을 이길 수 없었다.


14.2. 통조림 및 가공식품을 들고 간 스콧[편집]


보급품 비축에 있어서는 스콧도 아문센 못지않게 신경을 썼다. 저장고마다 통조림 24상자, 훈제 고기 25㎏, 마가린 6상자, 초콜릿 40상자, 비스킷 30상자, 홍차[15], 등유 8 갤런(약 36 L), 구급품을 비축했다. 비축품 중에서 식량은 아문센과 비교해도 더 많아 보이지만, 지방구성이 적었고 결정적으로 연료가 부족했다. 이는 아문센팀의 1/3 수준밖에 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스콧 탐험대는 고질적인 연료 부족에 시달렸다. 아문센 탐험대는 연료를 효율적으로 아낄 수 있게 신경 썼는데도 스콧 탐험대보다 연료를 더 챙겼으니, 스콧 탐험대가 연료 부족에 시달릴 것은 명약관화였다. 그리고 바로 후술하겠지만, 이 연료 부족은 스콧 탐험대를 전원 죽음으로 몰아넣은 가장 치명적인 요인이 되고 말았다.

채소를 먹지 못한 것으로 인한 여러 가지 불리함은 있지만 사실 극지방 탐험에서 채소는 그렇게 크게 필요한 물건이 아니었다. 스콧 탐험대가 남극에서 기지를 세우자마자, 겨울을 보내면서 가장 많이 남았던 음식이 바로 피클이었다. 채소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가져왔는데,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극지에서는 몸 자체가 피클 같은 음식을 거부하는 것 같다."라고 탐험대원이 증언했을 정도. 사실 무리도 아닌 게, 피클은 기본적으로 소금물이나 식초에 절이는 음식인지라 그냥 상온에 뒀다 먹어도 차갑다. 그런데 그걸 극지에서, 당장 추위에 벌벌 떠는 가운데 집어먹는다고 생각해보자. 얼음을 씹는 거랑 별다를 바 없이 느꼈을 것이다.

채소와 피클만 먹지 못했다면 사실 그다지 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스콧 일행이 그토록 많이 준비한 식품 중 상당수를 먹지 못하게 되었다는 데 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단백질지방 보급을 위해서 잔뜩 비축해둔 통조림이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렸다. 이것도 스콧이 잘못 계획한 것인데, 극지방 정도의 추위라면 무엇이든 바짝 마른 물건으로 통일시켜야 마땅했다. 수분이 조금이라도 들어가면 일단 무게가 무거워지는 데다가, 극지방의 추위에 얼어붙어 터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분이 있는 물건은 데워 먹지 않으면 마른 음식보다 신체 체온에 더 큰 영향을 미치므로 보온에도 매우 불리하다. 데워 먹는다면야 마른 음식보다 체온을 유지하기 유리하겠지만 상술했듯이 스콧의 탐험대는 연료가 너무나 부족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통조림은 무거웠고, 기술적인 한계로 깡통에 을 땜질해 밀봉했기 때문에, 몇 달 동안 계속 통조림만 먹다가는 납에 중독되어 버린다. 이는 19세기존 프랭클린 제독의 탐험대가 저지른 오류다. 하지만 이에 대한 다른 해석으로 스콧 탐험대가 주석 땜납을 실험적으로 적용한 통조림을 가져갔다는 기록에 근거해서 납 중독이 아니라 주석 페스트 현상 때문에 땜납이 부스러져서 터졌다는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실제로 다른 탐험가들의 통조림은 온전한 형태로 발견된 사례도 있다.

게다가 통조림은 기본적으로 보존식품이었는데, 남극에 입성할 즈음부터는 적당히 말리거나 훈제 처리만 했다면 1년 가까이는 별다른 보존이 필요없을 정도로 남극은 춥다. 짐승 시체가 썩지 않고 미라가 되어 천 년을 가는 지경이니 평범한 식품도 고작 수 개월 사이에 식용이 불가능할 정도로 산패하는 일은 있기 힘들었다. 즉, 애시당초부터 통조림을 선택할 필요가 없었다.

스콧이 통조림을 선택한 이유는 해당 통조림을 제조한 회사에서 스폰서 형식으로 무상지급을 해줘서라는 말도 있지만 이는 근거가 없다. 이러한 주장대로라면 스콧은 통조림을 위주로 한 물자로만 남극 탐험을 해야 했을텐데 그러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무엇보다도 스폰서를 할 정도 되는 회사가 그러한 제약 조건을 걸었음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일단 탐험이 성공해야 스폰서도 그 반사이익을 누릴 수 있으니, 탐험에 제약을 거는 방식으로 후원할 리가 만무하다.

스콧이 바다표범 사냥을 하지 않고 통조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영국의 식문화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실제로 노르웨이 등 북유럽권 국가들에서는 현재도 생식을 하는 문화와 관련된 음식이 많이 발달했다. 그러나 영국을 포함한 서유럽권에는 날고기를 먹는 문화가 없었다. 그들의 관점으로는 날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존을 위해서라도 날고기를 먹기 위해 바다표범을 사냥해 고기를 비축한다는 발상을 떠올리긴 어려웠을 것이다. 회 문화가 상당히 대중적인 대한민국이나 일본에도 생선회육회 중 한쪽 혹은 전부 먹지 못하는 사람이 제법 있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생식 문화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국가에서 고기를 날로 먹는다는 행위가 얼마나 받아들이기 힘든 것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부터 반세기도 지난 20세기 후반에서나 국제교류의 발달로 서유럽이나 동유럽권에서도 스시나 생선회 등을 먹는 사람이 생긴 정도다.

그렇다면 조리해서 먹으면 되지 않나 싶지만 한정된 자원만으로 탐험을 이어나가는 여정에서 조리를 위해서 연료를 소모하는 것도 큰 모험이다. 게다가 위에서도 설명했듯 스콧 일행은 연료가 모자랐다. 현대에도 혹한지 탐험에서 연료를 사용하는 것은 큰 부담이다.# 하물며 그 옛날의 시대에 연료를 단순히 고기를 조리하기 위해 사용하기란 여러모로 무리였다.[16] 어차피 휴식 중엔 난방을 해야 하니 불을 피우긴 해야 하므로 겸사겸사 난방 겸 조리도 가능은 하지만, 당연히 조리시엔 난방만 할 때보다 연료가 더 필요하다. 아문센 일행은 조리없이 날고기를 자주 먹긴 했어도 수시로 불을 피워 조리를 해 스프 등을 끓여 먹었는데, 당연히 연료를 풍족히 비축해둬서 별 문제가 없었다.

통조림만 터졌다면 내용물들은 오염되지 않은 눈밭에 떨어져 변질되지는 않았을 테니 금속 잔해들을 치우고 내용물만 주워다 어떻게 먹을 수도 있기는 했을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 옆에 같이 저장해둔 등유통들도 같이 터지며 내용물들을 오염시켜 그마저도 먹을 수 없게 되어버린 치명적인 사태가 발생했다. 어떻게 보면 저장고를 만들 때도 실수를 했다고 할 수 있는데, 물품을 배치하는 높이를 조절한다든지, 식량을 배치하는 공간과 등유를 배치하는 공간을 나누는 식으로 등유가 새더라도 식량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배치했다면 식량을 더 많이 회수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영국인답게 홍차도 챙겨갔는데, 스콧 탐험대의 오판과 비참한 최후 때문에 이것 또한 평가절하당하지만 사실 남극에서 차 종류는 상당히 도움이 되는 물건이다. 섀클턴도 위험천만한 길을 가는데 홍차를 가지고 갔으며 실제로 섀클턴과 여정을 함께한 워슬리는 홍차를 마시며 살아갈 의지를 얻었다고 한다. 항해불능이 된 배의 목재를 연료로 썼다고 한다. 남극같은 극한의 자연환경 속에서 마시는 따뜻한 차 한 잔은 피로에 지친 심신을 빠르게 회복시키고 마음을 위로해주는 유일한 즐거움이 될 수 있다. 야채가 부족한 식단에서 비타민을 조금이나마 얻을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차 300mL를 끓이는 데 필요한 찻잎의 양은 2~3g 정도다. 고작 몇백 그램 정도만 챙겨가면 긴 탐험기간 내내 차를 마실 수 있으니 필요한 양도 매우 적다. 얼음과 눈이 지천에 깔렸으니 물 구하기도 매우 쉽다.

하지만 스콧 탐험대는 그놈의 연료 부족 때문에 쉬는 동안에도 불을 피우지 못하고 찻잎을 생으로 씹어먹어야 했으니, 스콧이 한 수많은 실수와는 달리 개중에서는 좋은 선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활용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홍차 한 잔이 마음을 위로해줄 수 있다지만 차로 못 마시고 생 홍차잎을 씹어먹는 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게다가 연료 부족은 바로 식수 부족 문제로도 연결되었다. 물론, 수만 년 동안 한 번도 오염되지 않은[17] 청정수가 얼어 만들어진 눈과 얼음이 사방에 널렸으니 굳이 식수를 따로 챙길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이런 자원을 바로 옆에 두고도 연료가 부족해서 그걸 물로 만들 수가 없으니 그야말로 사막 한가운데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고통이 추위 등의 각종 문제와 함께 영국 탐험대를 덮친 셈이다. 억지로 눈을 입에 넣어 녹여 어떻게든 수분을 보충할 순 있었지만, 연료가 부족해서 당장 추위와 동상으로 고통받는 마당에 억지로 얼음까지 먹어야 하는 영국 탐험대의 고통은 대단했을 것이다.

게다가 추울 때 찬 것을 먹게 되면 위장 운동에 영향을 주게 돼 소화불량, 위장 장애가 생길 확률이 높다. 게다가 입안 온도도 크게 변하다 보니 치아에도 손상이 갈 수도 있다. 날씨가 추울 때는 체온을 잘 유지하기 위해 몸이 따뜻해야 하는데 지나치게 찬 게 들어가면 몸의 기초 체온 조절 중추에 혼란이 오게 된다! 내부 온도가 떨어지면 외부로부터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침투가 쉽고, 면역이 떨어지게 된다.# 그 결과, 눈과 얼음은 녹이기 위해서 머금은 입 속을, 그럼에도 충분히 데우지 못했을 물은 식도를 망가트려 버렸을 것이다. 천하의 베어 그릴스도 한대지방 탐험 시엔 무조건 얼음이나 눈을 녹이고 데워서 마시지, 절대로 얼음과 눈을 그대로 먹지는 않는다. 얼음을 그대로 먹게 되니 체온이 떨어져 저체온증이 오기 쉽고 저체온증이 오면 당연히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하는데, 누차 말하지만 스콧의 탐험대는 연료가 부족했다.

게다가 아문센이 통밀과 귀리가 들어간 비스킷을 선택한 반면 스콧은 자신들이 영국에서 먹던 밀가루 비스킷을 싣고 갔다. 스콧이 챙겨간 식료품 목록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스콧 탐험대의 식량은 비타민과 무기질이 상당히 결핍되었다. 아마 이러한 부족한 영양소는 과일 통조림 등으로 해결하려는 생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위에서 설명했듯 스콧이 준비한 통조림은 대부분 터지고 손상되어 먹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결국 이런 영양 불균형은 탐험 중반 이후에 이들이 고전하게 되는 큰 원인이 되었다. 다리에 총상을 입었던 오츠가 계속 약해진 것도 동상 외에 각기병을 비롯한 영양실조까지 같이 겪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영양불균형은 스콧의 잘못만은 아니다. 이 시기 영국인들의 식사 자체가 영양적으로 매우 불균형했기 때문에, 영국 탐험가들은 똑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서방 국가 탐험가들에 비해서 영양실조나 괴혈병 등을 앓는 비율이 더 높았다. 당시 영국 선원과 해군 수병들이 괴혈병에 잘 걸렸던 까닭도 이에 기인한다. 오죽하면 영국 정부에서조차도 자국 선원이나 해군 수병들에게까지도 괴혈병 예방을 위해 채소와 과일 섭취를 권고했을 정도였다. 물론 처음으로 제임스 린드가 괴혈병 치료법으로 과일을 제시했을 때는 개무시했다 제대로 챙겨갔어도 영양적으로 불균형한데 이 문제점 투성이 식품마저도 부족했으니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영양소 균형을 등한시한 당시 영국식 식생활의 문제점은 스콧의 탐험에서도 치명적인 폐해를 가져왔다.


14.3. 연료와 열량[편집]


연료의 저장량 면에서도 스콧은 열세를 보이고 있었는데, 위에 쓴 대로 영국 탐험대는 각 저장고에 등유 8 갤런(약 36L)을 들여놓았다. 반면에 아문센은 등유를 스콧보다 세 배나 많은 25갤런을 각 저장고마다 비축해두었다. 이것부터 아문센 일행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아문센 일행은 등유를 3배나 많이 비축하여 추위가 불어닥치면 불을 펴서 몸을 녹이고 여유롭게 쉴 수 있었으나, 스콧 일행은 연료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당시에 납 리벳으로 만든 연료용기는 혹한에 작은 틈이 생겨 등유가 스며나오는 일이 있었는데, 앞선 탐험대에서 이런 현상을 보고한 바 있었으나 스콧은 이를 간과하였다. 결국, 스콧은 탐험일지에 "비축해둔 등유가 줄어들어 있어서 기존에 쓰려던 양보다 부족하다." 하고 한탄하는 처지가 된다.

반대로 아문센은 이러한 선발대의 온갖 실패 경험을 꼼꼼하게 조사하여 등유가 최대한 유출되지 않도록 연료통을 두툼한 가죽으로 덮는 것과 같은 여러 노력을 했고, 그러고도 연료가 새거나 증발하는 경우도 생기기에 좀 더 많이 가져가는 등 스콧과 차원이 다르게 준비했다.

극지에서 인간이 겪는 피로와 열량 소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스콧 일행은 하루에 4000㎉를 소모한다고 예상하고 식료품을 준비했지만, 현실은 그보다 배는 더 많은 평균 6000-7000㎉부터 많게는 11,000㎉였다. 한술 더 떠 스콧 탐험대는 설상차가 고장나고 말들이 죽어나가 썰매를 사람 손으로 끌고 다니느라 열량 소모가 더욱 극심했다. 현대 미군의 평시 하루 권장 배식 열량이 3800㎉, 한국군이 3100㎉이고[18], 미군이 만든 혹한지용 전투식량인 MCW의 끼니당 열량은 1540㎉, 하루치 패키지당 4500㎉이다. 사용처로 상정한 혹한지조차도 남극보다는 따뜻한 지역임을 감안하면, 스콧이 계산한 4000㎉는 지나치게 낮은 수치였다. 물론 이 무렵의 식품영양학은 걸음마 단계였음을 감안해야겠으나 남극 탐험을 처음 한 것도 아닌데도 너무 계산을 날로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실책이다. 반면에 아문센은 저장고에 무려 3톤이나 되는 식량을 미리 준비했으니 스콧이 계산했던 1톤에 비하면 세 배에 달하였다. 아문센 탐험대는 저렇게 챙겨갔는데도 식량 소모가 예상보다 많아 나중에는 개를 죽여 먹어야 했다. 덕분에 아문센 일행은 건강하고 심지어는 좀 더 살찐 채로 돌아왔다. 스콧보다 열량 소비는 적으면서 식량을 더 많이 가져갔으니 당연했다.

따라서 연료를 너무 적게 준비한 것은 스콧 탐험대의 가장 치명적인 실수 중 하나로 꼽을 만한 것이다. 연료만 충분했다면 상술한 내용처럼 스콧 일행이 준비한 식량과 통조림, 식수 분야의 문제는 물론, 체온 유지 문제 역시 대부분 해결된다. 바꿔 말하면 연료 부족 하나 때문에 그나마 살릴 수 있는 장점도 하나도 못 살리고 오히려 이미 나열한 수많은 단점을 죄다 보완하기는 커녕 악화시키기만 해 결국 탐험대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14.4. 저장고[편집]


두 탐험대는 저장고 시설부터 꽤 차이가 컸는데 일단 시설 자체는 스콧 쪽이 우세했다. 아문센 쪽은 목재와 이글루 등으로 급조한 반면, 스콧 쪽은 돈을 들여 더 꼼꼼하고 더 튼튼하게 지었다. 문제는 아무리 저장고가 좋다 한들 어디 있는지 모르면 의미가 없다는 데 있다. 아문센이 큼지막한 깃발을 꽂아서 저장고가 잘 보이도록 한 반면에, 스콧은 그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 남극의 날씨는 매우 험악하므로 눈보라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서 저장고가 안 보일 수도 있고, 눈이 저장고를 덮어버려서 위치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실제로 스콧의 사망 지점으로부터 고작 서쪽 800m 지점에 스콧이 만들어 둔 저장고가 있었으니, 갖은 끔찍한 실패와 타격에도 불구하고 남은 세명, 혹은 마지막까지 살아있던 스콧 단 한명이라도 살아올 가능성마저 이 실책 탓에 사라진 셈이다. 어처구니없을지도 모르지만 남극에 불어닥치는 상상을 초월하는 눈보라를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또한, 남극에서는 눈보라가 불지 않더라도 하늘과 땅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심한 화이트아웃 현상 때문에 눈 앞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대로 방향감각을 상실하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항해술 숙련자와 이정표가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콧은 항해술을 아는 본인만으로 충분했다고 여겼는지 다른 항해술 숙련자를 대원으로 데리고 가지도 않고 이정표를 설치하지도 않았다. 참고로 그들이 죽고 나서 몇 달이 지난 다음에 온 수색대는 기지에서 12마일(19.2㎞) 떨어진 저장고는 빨리 찾아냈지만 저장고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이들의 시체를 찾는 데는 무려 한 달이 넘게 걸렸다.

아무리 극지방이 가혹하고 이미 지칠 대로 지쳤다 한들, 이미 그런 끔찍한 환경에서 수천 킬로미터를 걸어서 돌파한 사람이라면 고작 800m도 못 가서 주저앉았을 가능성은 적다. 하지만 목표까지 800 m 떨어진 것만 알 뿐이지 위치를 모른다면? 단순 계산으로도 5㎞(1600π미터) 이상의 거리를 '돌아봐야' 목표를 찾을 수 있을 가능성도 있다. 더구나 '대략 이 근처' 인 것만 알고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면? 말 그대로 목표를 찾기 위해 이동해야하는 거리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따라서 남은 탐사대는 저장고가 근처에 있었겠지 하면서 떠돌았거나, 아니면 아예 저장고가 어딨는지도 모르는 채로 그저 남극 바깥으로 나가기만 하려다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저장고 800m 앞에서 주저앉은게 결정타긴 했지만, 애초에 저장고의 위치를 알아보기 쉽게 만들었다면 다른 저장고 역시 상대적으로 쉽게 찾을 수 있었을테니 돌아오는 동안 이렇게 지치다가 죽었을 가능성도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거기다 아문센은 돌아올 때 역시 후각이 좋은 가 여전히 살아있었다. 알아서 고기 냄새를 맡고 저장고로 달려갈테니 설령 잘 안 보여도 상대적으로 찾기가 수월했다.

물자 보관 상태도 아문센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위에 서술했듯이 아문센의 물자는 대체적으로 손실이 적었지만 스콧의 물자는 통조림이 터지거나 연료가 새는 등의 다양한 문제를 일으켰다. 배고프고 지친 채로 겨우 행군한 결과 기껏 찾은 저장고의 기름이 터져나와 식량까지 못 쓰게 된 걸 본 스콧 일행의 좌절감은 엄청났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저장고가 터진 것은 아니고 물자가 온전히 남은 곳도 있었다. 스콧 탐험대의 시신을 발견하고 15개월이 지난 1913년 8월, 미국 탐험대가 스콧 탐험대가 남긴 저장고를 발견했는데 저장고 안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새나간 등유 정도를 제외하고 보급품 대부분이 보존되어 있었다. 문제는 이런 곳을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쳤다는 것이다. 아무리 부실한 물자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저장고를 잘 보이게 만들지 않은 것은 큰 실수였다.


15. 경로와 스케줄[편집]


아문센은 남극점으로부터 1335㎞ 떨어진 웨일스 만에 프람하임 기지를 세워 1911년 10월 19일에 출발한 반면, 스콧은 1448㎞ 떨어진 맥머도 만에 있는 에번스 곶에 윈톤 기지를 만들어 동년 11월 1일에 출발했다. 출발거리부터 113㎞씩이나 차이가 난 데다 아문센이 13일이나 빨리 출발했으니 스콧이 압도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아문센은 개썰매와 스키 등의 이동수단이 있었고 이를 끝까지 유지했지만, 스콧은 설상차가 고장나고 말도 다 죽으면서 마지막에는 걸어가야만 했다. 거기다 걸어가야 했던 시점에서 이미 둘의 거리는 500㎞나 차이가 났다.

그 대신 아문센은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길로 간 탓에 자신이 직접 길을 개척해야 했고 스콧은 어니스트 섀클턴이 개척한 길을 그대로 따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스콧은 섀클턴이 아니었다. 그리고 아문센이 택한 루트는 스콧과는 달리 비어드 모어 빙하처럼 위험한 지역은 없었다. 비어드 모어 빙하에서 스콧 일행이 데리고 갔던 조랑말 중 한 마리가 크레바스에 추락해서 죽은 적도 있었다.


16. 탐험대 구성[편집]



16.1. 아문센[편집]


아문센은 스키 선수 및 어릴 적부터 추운 곳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추위에 적응되면서 살아온 이들을 골라서 데려갔다. 참고로 노르웨이 탐험대에 소속된 다른 일원들의 직업 및 특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보면 알겠지만 모두 각자 맡은 일이 극지방 생존에 필수적인 기술을 갖춘 인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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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헬메르 한센(Helmer Hanssen, 1870-1956) - 노르웨이 극지방 출신이라서 어린 시절부터 한파에 강했다. 물론, 스키 실력도 있었고, 빙해도선사로 일할 만큼 극지방 항해술에도 뛰어나 아문센이 북서 항로를 개척할 때부터 탐험에 참가했다. 이 기간 중 아문센과 함께 이누이트들에게 개썰매 모는 법을 배웠고, 이후 아문센에게 추가 스카웃된 스베레 하셀과 함께 개들의 관리와 개썰매 조종을 담당했다.
남극점에서 귀환할 때, 아문센이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서 정든 개들을 쏴 죽이는 것을 슬퍼했지만, 상술했듯 아문센이 살육을 즐기지 않을 뿐더러 개고기를 좋아해 잡아먹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하며 아문센을 비난하지도 않았다. 1980년대 한국 위인전에서는 아문센이 개를 쏴 죽일 때 곁에서 개들의 명복을 빌며 울면서 기도했다고 나오기까지 했다. 당연히 귀환 이후에 노르웨이 탐험대가 개고기를 먹었다고 야만인이라며 비꼬던 영국 기자들에게 가장 강하게 항의했다. 이후, 아문센과 한 번 더 북동 항로 개척 탐험에 선장으로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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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스카르 비스팅(Oscar Wisting, 1871-1936) - 16세 때부터 선원 생활을 시작했고, 노르웨이 해군에 입대해 오랫동안 극지방에서 근무했던 인물이라서 역시 한파에 강했다. 스키 실력은 대원들 중에서는 좀 서툰 편이었지만 그래도 노르웨이인답게 탈 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해군 시절 포수여서 탐험 준비 기간에는 사냥을 담당했고, 바다표범 고기를 저장고에 비축해 비상식량 보충에 큰 기여를 했다. 게다가 대원들 중 요리를 가장 잘해서 남극점 정복 후 돌아오는 길에 개를 도살할 때, '이걸 어떻게 먹을 수 있을까'하고 고민하던 대원들에게 개고기 수프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남극탐험 후 아문센이 북극 횡단 비행을 할 때도 동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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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라프 비욜란(Olav Bjaaland, 1873-1961) - 세계대회 스키 챔피언. 게다가 자신의 스키 장비를 직접 만드는 능란한 목수이기도 해서, 탐험 준비 기간 중에 무게 88㎏의 조립식 썰매를 마개조22㎏으로 대폭 감량시키면서 내구성은 거의 떨어뜨리지 않았다. 덕분에 아문센 탐험대의 개들은 한층 가벼워진 썰매를 빠른 속도로 끌고 갈 수 있었다. 아문센 탐험대 참가자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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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베레 하셀(Sverre Hassel, 1876-1928) - 비스팅과 마찬가지로 일찍부터 선원 생활을 했고, 오토 스베르드루프가 이끈 그린란드 일주 탐험에 참가하는 등 극지방 탐험 경력도 갖고 있었다. 이후에는 세관원으로 근무하다가 개썰매 대회에 참가해 우승하며 개썰매를 준비하던 아문센으로부터 관심을 받고, 무급 휴가를 받아 아문센 탐험대에 참가했다. 한센과 함께 탐험 중 개의 관리와 개썰매 조종을 맡아 탐험 성공에 큰 기여를 했다.


16.2. 스콧[편집]


스콧은 탐사대를 해군 장교인 스콧 대령 자신을 비롯해 군인과 과학 및 여러 전문가 위주로 편성했다. 물론, 목적은 남극점 도달 외에도 과학 탐사를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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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렌스 오츠 (Lawrence Oates, 1880-1912) - 육군 기병장교 출신으로 여기있는 대원 중에서 가장 유능한 인물이다. 탐험에 필요한 조랑말들을 돌보는 것이 주 임무였는데, 나중에 조랑말 관리가 너무 힘드니까 스콧에게 그냥 관리를 포기하고 죽을 때까지 일을 시키고는 죽으면 잡아먹자는 제안을 했으나 무시당했다.
보어 전쟁 당시에 총상을 입어 발목 뼈에 총탄이 박혀 있었고, 이 총상이 악천후와 영양실조에 겹쳐 심해지자, 결국 자신이 탐험대의 귀환을 늦추고 있다고 생각해서, 살신성인으로 눈보라가 칠 때 텐트 밖으로 나가서 죽음을 맞이했다. 안타깝게도, 다른 대원들과는 달리 시체를 끝내 찾지 못했고 구조대는 겨우 오츠가 들고 나간 침낭만 발견할 수 있었다.
스콧과는 여러가지 마찰과 의견 충돌이 많았었다. "스콧의 조랑말들에 대한 무지는 엄청나다.", "나는 스콧이 너무 싫기 때문에 이것이 영국의 탐험이라는 것이 아니었으면 벌써 때려쳤을 거다." 라는 말을 하는 등 그의 일기에는 스콧에 대한 비난이 많이 적혀 있었다. 스콧 역시 그를 비관주의자라고 비꼬았다. 그러나 정작 오츠가 스스로 탐험대를 발목잡지 않기 위해 홀로 텐트 밖으로 떠나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을 때, 스콧은 일기에서 진정 영국 신사다운 행동이었다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였다. 공교롭게도 그가 죽은 날은 딱 32번째 생일인 3월 17일이었다. 그는 일행들에게 '잠깐 밖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유언으로 눈보라가 치는 텐트 밖으로 스스로 걸어나갔다. 스콧 일행은 그걸 다 보면서도 뭐라고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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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헨리 로버트슨 보워스 (Henry Robertson Bowers, 1883-1912) - 해병 장교 출신이다. 대원들 중에서 가장 체구가 좋고 힘이 셌다고 한다. 남극 탐험에는 조금도 경험이 없지만 왕립지리학회의 회장의 추천을 받아 스콧과 함께 남극으로 동행했고, 나중에는 탐험대에 투입됐다. 하지만 이것은 큰 실수였다. 정상까지 짐을 끌 목적으로 가장 완력이 좋은 보워스를 차출했던 것 같지만 애시당초 채집한 물건이며 탐험에 도움도 안되는 것을 안버린 스콧의 고집이 원인이었다. 원래는 4명이 쓸 식량과 연료를 5명이 쓰게 되자, 물자가 부족해졌다. 대원 2명이 죽고 나자, 마지막에 스콧, 윌슨과 함께 텐트에서 얼어죽었다.
친절하고, 활기차고, 부지런한 성격으로 동료 대원들에게 칭찬이 자자했다. 스콧도 그를 높이 평가했으며 죽기 전 그의 어머니에게 쓰는 편지에 "나는 이 탐험의 마지막을 두 용감하고 고귀한 신사들과 끝내고 있습니다. 그 신사 중 한 명은 당신의 아들입니다. 그는 나의 가장 친하고 믿음직한 친구가 되었으며, 나는 그의 올곧은 성품이 굉장히 마음에 들고, 힘든 상황에도 그는 끝까지 용기있게 활기찬 모습으로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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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드거 에번스 (Edgar Evans, 1876-1912) - 해군 부사관 출신으로, 스콧도 있었던 어니스트 섀클턴의 디스커버리호의 탐험에 간 경험이 있었다. 남극점에 도착하기 전에 손을 베이고, 손과 얼굴에 동상을 입는 부상으로 몸과 정신이 심하게 지치기 시작했다.
2월 14일에 비어드모어 빙하를 내려오던 중, 크레바스에 세 번이나 빠지면서 심한 뇌진탕을 겪었다. 스콧의 일기에 따르면 이때부터 길을 갑자기 막거나,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중얼거리는 등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고, 결국 2월 16일 쓰러져서 대원들은 그를 썰매에 태워서 갔지만, 결국 혼수상태에 빠지고 그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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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드워드 아드리안 윌슨 (Edward Adrian Wilson, 1872-1912) - 의사 및 과학자 출신으로 에번스처럼 섀클턴의 티스커버리호의 탐험에 동행한 적이 있다. 에번스와는 달리, 섀클턴, 스콧과 함께 남극 탐험을 하다 돌아온 적이 있다.
남극에서 황제펭귄 연구를 했는데, 이때 얼어죽을 뻔했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자세한 것은 로버트 스콧 문서 참조. 다만 이런 위험천만한 계획을 강행한 스콧도 잘한건 없지만 펭귄알을 채집하러 가자고 스콧을 설득한 것은 윌슨이라서 윌슨도 책임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스콧과 보워스와 함께 마지막에 얼어죽은 인물로, 스콧이 가장 의지했던 대원이다. 스콧은 일기에 그의 칭찬을 아끼지 않았었다.
보다시피 이들은 각자 군 장교와 부사관 및 지질학자, 기후학 및 여러모로 학문과 과학분야에서 전문가들이기는 했지만 그것 뿐이었고, 극지방 생존에선 압도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프로 대 아마추어인 상황이었다.


16.3.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편집]


아문센 탐사대와 스콧의 탐사대는 길찾기 능력에도 차이가 있었다. 특별히 이정표가 될 만한 지형지물이 드물고 미리 만들어진 지도도 없는 남극인 만큼 태양과 달 및 별의 위치를 보아 계산함으로써 현재의 위치와 앞으로 갈 길을 알아낼 수밖에 없었다. 즉, 천문항법을 발휘해야 했다.

아문센 탐험대는 천체측정에 작고 가벼우며 계산도 간편한 육분의[19]를 이용했으며 아문센부터가 선장으로서 북서항로를 개척할 정도로 노련한 뱃사람이며 탐험대 구성원 전원이 천문항법에 숙달된 덕분에 모두가 길을 계산할 수 있었다. 숙달된 여럿이 힘을 합쳤으니 계산 속도도 빠르고 오차 범위도 굉장히 줄일 수 있었다.

그러나 스콧 탐험대에서 천문항법을 갖춘 길잡이는 해군장교인 스콧밖에 없는 탓에, 다른 일행은 스콧만 바라보며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스콧이 사용한 경위기는 천체나 지구 표면의 물체의 고도와 방위각을 재는 장치로, 조그만 망원경이다. 천체의 고도와 방위각을 재는 데 필요한 자눈이 새겨진 바퀴가 붙어 있다. 경위기는 육분의보다 정확도가 높다. 계측 오차나 실수가 없다고 가정했을 때, 육분의는 오차범위가 ±1.5~5㎞ 정도로 잡히는 반면, 경위기는 ±1~2㎞ 정도다. 그러나 경위기는 크고 무거웠으며, 계산을 더 많이 해야 했다. 스콧은 숙련된 탐험가이기는 했지만 아무리 재주가 좋아도 5명이 힘을 합치는 것보다는 계산이 느릴 수밖에 없었고 실수도 가끔 저질러서 탐험이 지연되곤 하였다.

여담으로 섀클턴은 아문센의 남극점 도달 이후 남극 횡단 도전때 그냥 육분의와 경위기를 모두 챙겼고, 이는 드레이크 해협을 뚫고 사우스조지아 섬으로 향하는 구조요청길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낸다.

아문센 탐험대는 남극으로 향하면서 8㎞마다 깃발을 꽂아두었고, 돌아올 때 눈보라로 인해 길을 잃지 않기 위한 이정표가 되었다. 이동 경로마다 깃발을 튼튼하게 박아넣어서 스콧처럼 극심한 눈보라를 겪더라도 보급기지를 놓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았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설령 깃발을 못 보더라도 아문센에게는 개가 많이 있었고, 개의 후각은 매우 민감하기에 저장고에 있는 페미컨이나 바다표범 고기 냄새를 찾아서 달려가면 됐다.

그에 비해서 스콧 탐험대는 이러한 준비를 하지 않았고, 이정표는커녕 어니스트 섀클턴이 갔던 길만 그대로 따라가기를 고집했으며, 시야마저 가리는 강한 눈보라가 수시로 휘날리는 통에 근처에 있던 저장고도 찾지 못하고 지나쳐버리는 등의 실수를 거듭했다. 결국 길을 잃고 우왕좌왕하다가 스콧 탐험대 자신들이 설치한 식량 저장소를 겨우 800 m 남겨둔 매우 가까운 곳에서 전원이 얼어 죽었다.

스콧 일행의 원래 계획은 귀환 도중 82.30도에 위치한 보급소에서 예비대가 끌고 오는 개들과 합류할 예정이었지만 보급을 온 일행 중에 항해술을 익힌 자가 없었다. 사실 보급품을 가지고 온 예비대에 항해술을 익힌 기상학자가 있었으나 다른 탐사에 필요하다고 하여 합류를 거부했으며 결국 예비대는 약속 지점까지 이동을 하지 않았다. 스콧의 일지에 보면 해당 지점에서 개들을 마주하기를 목을 빼고 기대했으나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실망을 하는 대목이 있다. 그리고 본인이 위치를 잘못 계산해 엉뚱한 위치에서 기다린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을 한다.

아문센 일행에 전문 의사는 없었지만 아문센이 어머니의 강요로 의과대학에 다닌 경험이 있어서 간단한 의료조치는 취할 수 있었으므로 큰 문제는 없었다.

아문센은 탐험에 필요한 모든 기술을 자기 자신이 스스로 갖추려고 노력했다. 항해사의 기술을 갖췄고, 자의는 아니지만 의학을 배워 의사처럼 대원을 돌볼 수 있었으며, 독학으로 지자기 측정, 기상학 등을 배워 과학자 역할도 부분적으로 할 수 있었다. 탐험에 필요한 모든 기술을 스스로 배우고자 했던 아문센은 나중에는 항공기 조종법까지 익혔다.


17. 시행착오[편집]


아문센은 일단 처음에 스콧에게 남극점 점령을 빼앗길까봐 조바심을 내서 무턱대고 달려들었다가 대원들 전원이 동상에 걸리는 등의 고생을 했다. 그래서 아문센은 복귀한 후 한 달 동안 푹 쉬면서 뭐가 잘못되었는지 연구를 했고, 대원들끼리 연구한 내용을 검토하기를 반복하거나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는 등 문제점을 최대한으로 수정하거나 보완했다.

또한, 아문센은 생존 투쟁을 중요시한 탐험가답게 거친 성격에 고집이 매우 강해서 이 과정에서 당시 대원들 중 요한센과 자주 다투었다. 사실 요한센이라는 인물은 일개 대원이라고만 볼 수는 없었다. 아문센보다 선배였고 난센과 함께 유명한 북극 탐험에 나섰던 베테랑 탐험가였던 것이다.[20]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한 조직에 머리가 둘이니 당연히 지휘권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아문센이 '내가 대장이다'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여[21], 남극점 탐험에서 요한센을 배제시키고 주변 섬 탐험으로 돌려버리자 요한센은 화를 참지 못하고 노르웨이로 돌아가고 말았다. 아문센은 남극점 도달에 성공하고 귀국한 이후에도 앙금이 남았는지 언론과의 인터뷰 등에서 요한센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결국 요한센은 이후 노르웨이에서 푸대접을 받다가 우울증에 빠져서 자살하고 말았다. 하지만 아문센만 탓할 수도 없다. 요한센은 난센과의 북극 탐험 이후, 이런저런 개인적인 일이 실패한 뒤 알코올 의존증에 시달렸다. 남극탐험도 기술고문의 자격이자, 높으신 분의 강요 때문에 데리고 온 것이었다. 이런 사람을 리더로 삼아서 탐험에 나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거기다 이번 탐험은 원래부터 아문센이 기획한 것이었으니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는 격이었다.

물론, 이것만 가지고 아문센이 빌런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 불화 사건은 나중에 1등 자리를 빼앗기고 열폭하던 영국이 아문센을 깎아내리는 수단으로 쓰기도 했다.[22] 그러나 스콧도 이런 갈등이나 여러가지는 다를 게 없었다. 아니, 본인의 무능함에 의한 질투나 열폭으로 다른 이들을 폄하하던 걸 보면 훨씬 더하다. 거기에 더해 대원들을 선정할 때 필요의 유무조차 구분 못했다. 스콧도 이런저런 불화로 많은 인원들을 잘랐다. 특히나 섀클턴을 자르고 척을 진 것은 매우 유명한 이야기. 만약 섀클턴과 함께 했거나 그의 조언을 듣거나 둘 중 하나만 했어도, 남극점 정복은 알 수 없다 한들 스콧 일행의 전원 사망이라는 운명은 바뀌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아문센은 탐험에서 필요없는 대원 하나를 뺀 것 또한 생존의 원동력이 되었다. 일단 귀중한 물자를 필요없는 대원이 축내는 것을 막았고, 극지에서 가장 중시되는 덕목인 단합이 깨지지 않았다. 알다시피, 서바이벌에서 단합은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조건이다. 단합이 깨지는 순간, 그 집단은 생존 가능성이 극도로 희박해지기 때문이다. 정작 스콧은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설상차를 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유일한 기술자를 내쫓았고, 스키 전문가 그란이나 개썰매 전문가 드미트리 기레프 & 셰실 미어스 듀오를 멀리하여 최종 탐험대에 동참시키지 않는 등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해 꼭 필요한 인재를 스스로 거르는 자충수를 저질렀다. 반면 셰클턴은 제국 남극 횡단 탐험대 당시 밀항자인 퍼스 블랙보로를 내치지 않은 것은 물론(정작 블랙보로는 마치 처음부터 탐험대의 일원이었던 것인 양 대원들과 잘 화합하여 셰클턴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거기다 대원들과 마찰을 빚던 존 빈센트를 동행시켜서 엘리펀트 섬에 남은 대원들과 떼어놓고, 자신의 오른팔 프랭크 와일드를 자신이 부재하는 동안 섬에 남길 대원들을 지도할 수 있게끔 하는 등 훌륭한 용인술을 보이는 등, 비록 원래 계획은 처참하게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탐험대 전원을 살려서 돌아가는 기적을 일으켜 불후의 명성을 남겼다.

반면에 스콧은 섀클턴이 귀환했다는 소식을 듣자 "다음에는 (섀클턴이) 성공할 것이다."라고 발언했지만, 정작 자신은 섀클턴이 '이미 실패했던' 그 루트를 따라서 탐험을 한 것은 물론 섀클턴이 '이미 실패한' 장비들을 그대로 똑같이 가지고 갔다. 조랑말과 설상차도 이미 섀클턴이 가지고 갔다가 실패한 기록이 있다! 심지어 조랑말을 데려가려던 스콧을 아문센이 말렸듯 섀클턴 역시도 난센이 말린 바 있다. 당연히 섀클턴도 스콧이 그랬듯 대부분의 말이 얼어죽었고 그나마 남은 말마저 비어드모어 빙하에서 죽었으며 설상차 역시도 작동이 멈춰서 일행들이 끌고가야 했다. 이후 섀클턴이 개썰매가 확실히 조랑말보다 나았을 것이라고 회고했던 만큼 조랑말을 데려가는 것은 효용성이 없었다. 다른건 몰라도 말과 설상차의 실패는 남극에 이런걸 가져갔다간 실패한다는걸 명백히 보여주는데도 스콧은 답습한 것이다.

도중에 귀환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점이나 위험을 인식했다는 뜻인데도, 스콧은 그저 근성이 부족하고 좀 덜 과감해서 한계에 부딪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섀클턴이 덜 과감했다는 말 자체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전원의 생존이었다. 목표 달성과 생존의 갈림길에서 생존을 선택한 대가로 섀클턴 일행은 남극점 도달에 실패했으나 인간 대원 전원이 무사 귀환했고, 열악한 상황에도 조금 더 과감한 결단을 내린 스콧 일행은 전원 사망이라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아래 "목숨을 건 오기" 문단에서도 보듯 목숨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것 역시 탐험가의 필수 덕목이다. 상술했듯이 아문센이 초반에 그렇게 '과감하게' 나갔다가 실패를 겪었는데도 말이다.

요약하자면 아문센은 비록 동료와 심각한 다툼이 벌어지고 그에 대한 갈등은 있었지만, 과감한 판단으로 극지 탐험에 있어서 해가 되는 존재는 가차없이 제거하는 등 하나라도 극지 생존에 유리한 요인을 더 추가시켰다. 반면에 스콧은 섀클턴이 패배한 이유를 분석하지도 않았고, 하다 못해 현재의 상황을 받아들일 준비도 되어있지 않는 등, 결국 마지막까지 아문센과의 대결에서 패배를 인정하지 못했고 그 결과는 죽음이었다.


18. 탐험과정[편집]


아문센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대로 진행했으며 중간에 고비는 있었을지언정 모든 것을 그야말로 순조롭게 진행해 별다른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고 끝내 생존에 성공했다. 그러나 스콧은 감당하기 힘든 실수를 여러 차례 연발했고 끝내 그 실수가 쌓이고 쌓여 죽음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물론 고비란게 반드시 있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둘의 결정적 차이는 극지에서의 상황 판단 능력이었다. 아문센은 고비에 직면해도 냉정하고 현명한 판단으로 남극점 정복에 성공하고 전원 무사 귀환했지만, 스콧은 이런 고비에서 모두 최악의 선택만 내린 것도 모자라 그 선택에 대한 실수도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대원들 전원 사망이라는 비극을 맞이했다.

우선 스콧이 저지른 치명적인 오류는 남극으로부터 260㎞ 떨어진 비어드모어 빙하로 돌입하기 직전에 일곱 명의 지원대를 기지로 돌려보내면서 24마리나 되는 많은 개들도 같이 돌려보낸 것이었다. 이 개들을 최대한 이용했다면 사람이 썰매를 끌고 빙하를 넘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르며, 그렇게 해서 돌아갈 때 필요한 체력을 보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콧은 여기서 더욱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는데, 스콧 일행이 데려간 나머지 8마리 개들이 굶주림과 피로로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자 잡아먹을 생각도 하지 않고 불쌍히 여겨 풀어주는 어리석은 판단을 하고야 말았다! 풀어준다고 한들 남극 얼음덩이 한복판에서 개들이 무슨 자연으로 돌아간 것 마냥 사냥이라도 하며 살 수 있을 리가 없었고, 결국 이 개들도 탐험대와 마찬가지로 결국은 추위와 굶주림으로 죄다 죽어버렸다. 이러니 스콧이 이 개들을 다 데리고 갔다고 해도 결국 제대로 써먹지는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남극 한가운데에서 개들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었던 것도 아닐테고 결국 스콧은 자신이 데리고 있던 개들이 어떻게 하든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설령 쇠약해졌지만 살아있는 개를 도축하진 못하더라도 죽은 후에라도 그 고기를 먹는 결단을 해야만 했다. 그래도 도저히 개를 못 먹겠다면 차라리 아문센이 남기고 간 물자로라도 목숨을 연명했어야 했다. 이미 남극점에 도달했을 때 노르웨이 깃발을 목격했는데, 자존심을 지킨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지 않은가.

아문센의 탐험대는 개를 잡아먹은 것은 물론이고 탐험 도중 발견하는 펭귄이나 바다표범같은 모든 동물들을 사냥해서 그 동물들의 고기도 식량에 포함시킬 만큼 철저하게 살아남기 위한 노력을 했지만 스콧의 탐험대는 이러한 노력도 없었다. 아문센이 남극 탐험에서 괜히 작살을 구비한 것이 아니었다.

스콧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보워스 소위를 마지막 탐험조에 합류시켰다. 원래 스콧의 계획은 150마일(240㎞) 지점에서 4명이 최종팀으로 남극점 정복을 나서는 것이었지만, 보워스가 합류한 것 때문에 인원은 5명이 되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비어드모어 빙하에 도달했을 때 일행의 체력 소모가 너무 심해서, 남극을 정복하려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인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결정은 탐험 계획을 뒤틀리게 만들어서 안 그래도 여유없이 빠듯한 식량과 연료를 무려 1인분만큼 더 소모하는 결과를 낳았고 스콧 탐험대의 물자 사정을 악화시켰다. 이 명령에 따른 보워스도 목숨을 잃었다.

스콧은 남극점의 온갖 광물도 관심을 가지고 수집하여 가져왔다. 말과 개를 모두 잃고 사람만 힘겹게 오는 와중에 16㎏이나 되는 이러한 물건은 탐험대원들에게 무거운 짐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이로 인해 스콧이 살아돌아오는데 실패했음에도 탐사 분야에서 나름대로 기여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다. 아문센이 오로지 남극점만을 목표로 한 것과는 달리, 스콧은 탐험일지에 기후와 여러 가지 자연 현상들을 죽기 직전까지 꼼꼼하게 기록했고, 이 기록과 수집품들은 남극의 과학적인 조사에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스콧은 남극점을 정복하러 온 것이지 과학적 조사를 하러 온 것이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국 전원이 사망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탐험의 목적을 하나로 좁히지 않은 것조차도 스콧의 실책이다.

비록 스콧은 처음에 선택을 잘못해서 이 레이스에서 승리를 아문센에게 빼앗겼지만 살아서 생환할 수 있는 많은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이 많디 많은 기회를 스콧이 스스로 포기하거나 실수로 죄다 놓치면서 결국 남극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19. 악천후에 대한 대처법과 관점의 차이[편집]


인간이 어찌할 수 없었던 악천후도 두 탐사대의 운명에 큰 영향을 주었다. 노르웨이 탐사대는 그다지 혹독한 눈보라를 만나지 않았고, 행여나 눈보라를 만났다고 해도 꼼꼼하게 준비해둔 연료로 큰 문제는 겪지 않았다. 하지만 스콧의 탐험일지에 따르면 영국 탐험대는 며칠이고 계속 불어대는 지독한 눈보라인 블리자드에 수시로 노출되었고, 안 그래도 몸을 녹여줄 연료도 조금밖에 없었던 그들에게 이는 재앙이었다. 스콧의 일기를 보면 영하 40~50도의 추위 및 눈보라에 시달렸다고 적혀 있다. 준비도 덜 된것도 모자라 운까지 따라주지 않았던 것이다.

2002년에 미국 기상학자 수잔 솔로먼이 당시 아문센과 섀클턴, 스콧 탐험대가 기록한 기상 조건과 기후를 조사해 발표한 연구 자료에 따르면, 아문센 탐험대가 가장 운 좋게 강추위를 피한 반면, 스콧 탐험대는 가장 운 나쁘게 내내 추위와 눈보라에 시달렸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이쯤하면 하늘조차 스콧 탐험대의 편이 아니었던 건가 싶을 정도다. 스콧 탐험대가 참고한 날씨예측표는 무려 한 세기나 지난 21세기 기준으로도 정확한 물건이고 그에 따라 행동계획을 세워 행동한 건데, 하필이면 15년만의 한파를 만났으니 운이 나빠도 너무 나빴다. 평년 기온 정도를 유지했다면 1등은 못했어도 살아 돌아올 수는 있었을지도 모른다.

스콧 탐험대가 겪은 불운한 사건은 또 있었는데, 애써 튼튼히 구축한 저장고를 천신만고 끝에 찾아냈지만 캔버스 천으로 두른 코크 연료 용기에서 등유가 새어나와 옆에 쌓여있던 식료품들을 오염시켜 상당수를 먹을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고 한다. 스콧 탐험대가 전멸하고 나서 파견된 다른 탐험대원들이 이 저장고들을 정밀 조사했는데, 연료 저장에 사용한 코크 용기는 매우 튼튼하고 추위에도 강한 물건이라서 이렇게 터진 것이 그야말로 최악의 수난이었다고 기록했다. 물론 이도 수난이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다. 위에서 언급했듯, 애당초 잘못된 관리 등으로 인해 발생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당시 스콧 탐험대의 심신 상태가 극도로 약화됐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악천후가 불가항력이라도 그것만으로 스콧의 탐험 실패에 대한 면죄부가 되기는 힘들다. 앞에서 언급했듯 어디를 가더라도 악천후는 필히 나타나는 것이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남극이니 어떤 악천후가 시시각각 들어닥칠지 아무도 모른다. 중점은 그 악천후 및 기상악화와 같은 환경변화를 어떻게 대처하는지, 아니면 그 변수를 어떻게 최소화하는지에 있다. 아문센만 해도 등유가 새어나올 것을 걱정하여 단단하게 밀봉한 등유통에 가죽을 덧씌워가며 철저하게 대비했다. 그야말로, 이 항목에 나온 두 탐험대 준비성을 봐도 압도적으로 아문센이 시행착오를 몸소 겪어가며 극과 극으로 철저하게 준비했다.

게다가, 근본적으로 이런 탐험에서 악천후를 피해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문센처럼 기후가 좋을 때 가능한 한 빠르게 이동하여 탐험 시간 자체를 줄이는 것 또한 철저한 대비나 마찬가지다. 따지고 보면 나쁜 날씨는 언제든지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악천후를 원망하기보다는 날씨가 좋을 때 빨리빨리 행동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아문센도 조급하게 9월에 출발했다가 혹독한 추위에 시달렸고 심지어 동상까지 입었는데, 그렇다고 탐험을 강행하지 않았고 몰살당하기는 커녕 탐험대 전원이 살아왔다.

스콧의 일기를 보면 저장고에 비축한 비스킷이나 고기가 한두 명 분량이나 줄었다고 경악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스콧과 일행도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적어놓고 있다. 앞서 말한 대로 막판에 보워스가 합류했으니 당연히 식량이 부족한 상황이었음에도 이것조차 파악하지 못했으며 스콧이 당시 추위에 생각조차 못했던 게 아닌가 싶다. 저장고의 식량이 줄어들만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스콧 탐험대는 극지 공격대 5명 외에도 3명이 더 있었는데, 이들은 남극에서 150마일 떨어진 지점에서 극지탐험대 5명과 헤어진 후 먼저 돌아왔다. 그들 역시 스콧과 마찬가지로 예상보다 훨씬 많은 칼로리를 소모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므로, 그들이 저장고에 들러서 식량 일부를 꺼내 먹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그것은 돌아올 때 그들이 소비할 몫이였으니까 딱히 문제될 것도 없었다. 이렇듯 스콧은 가장 기본적인 식량 계산조차도 실패했다.

그리고 스콧 본인이 일지에 적은 불운담은 어느 정도 걸러 들을 필요가 있다. 일단 스콧 일행은 근본적으로 정신적, 육체적으로 극도로 약해진 상태였으며, 이런 상황에서는 건강한 상태에서는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악천후 역시 몇 배 더 강하게 느낄 수 있다. 또한 스콧 자신이 상당히 감정적이라서, 성향 자체가 탐험 중의 여러 문제를 '불운'으로 돌리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당시 스콧은 탐험 도중에 겪어야했던 심각한 문제로 인해 모든 것을 절망적으로 느꼈을 것이고, 날씨 문제 역시 정확한 측정 결과라기보다는 스콧이 '주관적으로 느낀 어려움'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반대로 아문센은 상대적으로 건강하고 활력 있는 상태로 탐험을 했기 때문에 이러한 어려움을 적게 느꼈을 것이다.

요약하자면 악천후에 대한 관점과 대처능력에서도 아문센의 비교 불가 완승이었다. 애당초 아문센은 처음부터 최대한 악천후를 피하는 쪽으로 탐험을 택했으니 이러한 위험성이 적었고, 그걸 감안하고 더 철저하게 물량을 배치했기에 생존 가능성이 더 높았던 것이다. 반면 스콧 일행은 안 그래도 지독한 악천후에 본인들의 식량 부족과 가장 결정적인 패착인 연료 부족을 비롯하여 본인들이 저지른 각종 실수들과 이런저런 부정적인 요인들이 겹치면서 끝내 생존하지 못했다.


20. 설맹 대비책[편집]


눈(雪)에 반사되는 자외선은 여름의 해수욕장보다 4배나 더 강하다. 모래사막의 알베도(빛 반사율)가 30%가 안되는 것과는 달리, 갓 내린 눈은 최대 85%까지 육박하며, 눈이 쌓인지 오래되어 알베도가 떨어진 경우에도 40%를 넘는다. 현대에도 이 원리로 생기는 스키장 자외선을 피부미용의 적으로 여겨서 경계하는데, 이 자외선은 너무 강렬하기 때문에 계속 받다보면 시력이 손상된다. 이것이 현대에도 극지 탐험대나 스키어를 괴롭히는 설맹 증세고 스키장에서 고글을 쓰는 이유다. 강한 자외선을 계속 안구에 조사하면 자외선의 높은 에너지가 안구의 단백질을 변형시키고 칼슘염을 침착시켜서 백내장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아득한 옛날부터 이런 걸 겪어본 이누이트는 가는 구멍을 낸 나무판이나 뼈로 편광 선글라스의 원조격 되는 도구를 만들어서 쓰고 눈길을 오고갔다.이누이트가 쓰던 선글라스.

아문센은 이누이트의 생존 방식을 배우며 이 도구도 적극적으로 도입해 아문센과 대원들이 단체로 착용한 채 찍은 사진이 남아있다. 1911년 8월 28일에 찍은 아문센과 동료들이 쓴 이 선글라스 착용사진. 참고로 당시 동료이던 할머 한센이 쓰던 이 선글라스는 지금도 남아 노르웨이 스키 박물관이 전시중이다. 또한, 가고 있는 앞쪽에 태양이 떠 있을 때는 쉬고, 태양이 등 뒤에 있을 때가 (한겨울이나 한여름이 아닐 때에는 밤이) 되었을 때만 움직이는 수칙을 정해 지켰다. 이것은 눈밭이 햇빛을 반사하여 지나치게 많은 빛이 눈을 괴롭히고 시력을 떨어뜨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스콧은 이 문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스콧 탐험대는 자외선에 무방비하게 계속 눈을 혹사시켰고, 그로 인해 스콧 본인을 비롯해 탐험대 모두가 설맹 때문에 고전했다고 탐험일지에 실려있으며[23] 스콧 구조대인 앱슬리 체리개러드(Apsley Cherry-Garrard)도 증언했다.


21. 자금력[편집]


이것만큼은 스콧 탐험대가 더 유리했다. 당시 노르웨이는 독립국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문센은 그다지 많은 자금을 지원받지 못한 반면, 그 당시 최고 선진국 중 하나였던 영국 자체는 물론 많은 기업들이 스콧에게 자금을 지원해줬다. 그러나 지금까지 서술했듯이 방한복, 통조림, 설상차, 저장고 등 영국 원정대의 의식주가 모조리 불량했던 것을 감안하면, 압도적인 자금력으로 '그들 기준에서' 최첨단 장비들을 구입했으니 아무 문제 없을 거라며 방심한 것에 가깝다. 장비의 성능을 시험해 본다고 해도 영국 최북단에서나 적당히 해보고 말았고 결국 스콧 본인은 목숨을 잃고 후원자들의 거금은 날아가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22. 목숨을 건 오기[편집]


여기까지 글을 다 읽은 사람이면 스콧이 그 악상황과 오판에도 불구하고 어찌어찌 남극점까지 도착이라도 했다는 사실이 굉장히 흥미로울 것이다. 하지만 어떤 탐험이라도 탐험의 성공과 실패보다 '목숨'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은 모든 탐험사에 있어서 상식이다. 실패했지만 탐험대는 전원 생존한 어니스트 섀클턴의 사례도 있고, 프리드쇼프 난센도 그랬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망망대해에서 반란이라도 발생하면 모든 게 끝이었기에 날마다 거짓말로 선원들을 안심시켜 가며 아메리카에 도착한 사례도 있고 똥고집을 부린 건 스콧과 같지만 적어도 콜럼버스는 물자가 부족해서 굶어죽지는 않았다. 바다 위인 만큼 물자가 떨어지면 물자를 구할 수단도 있다.

식량 부족이나 체력 한계, 위기를 고려하지 않고 '목숨을 버리기로 결심했다면 목표에 도달할 수 있었던' 탐험가는 사실 무수히 많았지만 결코 목숨보다 중요하진 않기 때문에 포기하였다. 이는 일상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특히나 등산은 물량이나 체력이 부족하다거나 혹은 등산을 늦게 시작해서 거의 저녁 무렵이 돼서야 산 정상에 도착하는 등산객이 꽤 있다. 겨울 산행은 빠르면 4-5시부터 이미 해가 지기 시작하고 여름 산행도 저녁 7시부터는 해가 지기 시작한다. 상식적으로 저녁이 되기 전에 하산을 마치는 것이 기본 상식이다. 그 시간대가 지나서 산행을 진행한다면 설령 정상에 도달한다 하더라도 조난당할 위험이 매우 높다. 애당초 정상에 도달할 확률도 매우 낮다. 그리고 조난당하게 되면, 최악은 저체온증으로 인한 사망이다. 스콧이 여러 오판에도 불구하고 남극점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스콧이 거기까지 간 것 자체가 바로 탐험대의 생명을 앗아가버린 가장 중대한 '오판'이었다고 봐야 한다.

심지어 산악은 일반 평지와는 달리, 지형의 고저차 및 식생으로 인한 태양광 차단까지 더해져 심각할 정도로 기온이 낮고, 기온차 및 기후 변화가 심해서 조금이라도 추위에 노출되면 바로 저체온증으로 이어진다. 더군다나 산악 등반으로 인해 몸에 땀으로 가득 차 있는 상황이라면, 저체온증을 더욱 악화시킬 뿐만 아니라 저체온증의 위험성을 더욱 크게 높인다. 저체온증이 심각해지면 심장마비로 이어지며, 심한 경우 사망에 이르기까지 불과 2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스콧 탐험대의 상태는 상식적인 상황이었으면 불과 하루 이틀 사이에 사망에 이르렀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스콧은 이러한 점을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일반인들이 가볍게 운동을 하거나 등산을 할 때도 '무리하지 않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으로 여기고, 운동선수만큼 쥐어짜듯 운동을 하는 경우에는 충분히 몸을 회복할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이 갖춰져 있다는 전제가 있다. 생명이야말로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콧은 탐험 과정에서 이 원칙을 망각했거나 무시했기 때문에 어설픈 준비에도 불구하고 남극점에 도달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스콧 탐험대가 겪은 어려움을 먼저 겪은 게 바로 섀클턴의 탐험대다. 조랑말과 설상차를 썼다가 낭패를 본 것도 그렇고, 인간의 힘으로 썰매를 끌며 비어드모어 빙하를 넘어야 했던 것도 그렇다. 심지어 스콧 탐험대의 코스까지도 섀클턴이 먼저 간 길을 따라간 것이었다. 이 정도면 섀클턴 탐험대에도 희생자가 다수 나와야 마땅했다. 하지만 섀클턴은 대원을 단 한 명도 잃지 않았다. 남극점까지 156㎞를 남겨둔 시점, 돌아갈 길을 포기한다면 인류 최초의 남극점 정복자가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식량 부족 때문에 더 이상 전진하면 살아서 집에 못 돌아간다'고 순순히 인정하고는 발걸음을 돌렸던 것이다. 이후 섀클턴은 이 부분을 회상하며 아내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죽은 사자보다는 산 당나귀가 낫다.


섀클턴 역시 아문센과 마찬가지로 물러설 때를 알았던 것이고, 그 결정이 섀클턴과 대원들을 살렸다. 사자처럼 용감하게 나가다가 죽느니, 당나귀처럼 바보 취급을 받을지언정 살아서 돌아가는 게 낫다는 판단을 내린 것. 돌아가던 중에도 추위와 굶주림으로 고생하기는 했지만, 전원이 살아서 귀환한 것이다. 극도로 위험한 극지 탐험, 그것도 아직 아무도 탐험한 적이 없는 남극 탐험을 시도했다가 전원이 무사히 돌아온다는 것은 탐험의 성공 여부 이전에 그 자체로 굉장한 업적이었기에 섀클턴은 남극점 정복에 실패했음에도 칭송받았다. 아문센의 남극점 도달 이전에는 남극점을 정복한다는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남극이 극한지역이었음을 기억하자. 그런 극지에서는 '생존' 그 자체만으로도 명성을 얻을 만하다고 볼 수 있다. 어차피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착하지도 못했을 것이니, 특정 지역에 도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환경에 적응하는 법'을 터득했다는 말이다. 이런 판이니 사실 몇명 쯤 죽어도 안 이상한게 가본 적 없는 극지 탐험이고, 살아돌아온다는 보장도 사실 없었다. 하지만 그런 난관에도 불구하고 사망자 한 명 없이 전원 귀환한데다, 남극점까지 도달하지 못했을 뿐이지 당시로는 가장 남극점에 접근한 탐험대였으며 여러가지 과학적 성과를 올렸으니 실패를 했다 한들 칭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영광은 스콧의 열폭에 한몫해서 결국 스콧이 남극점으로 떠나게 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아문센이 남극점을 정복한 이후 섀클턴은 제국 남극 횡단 탐험대를 이끌었는데, 이때 그는 과거의 실패를 교훈삼아서 개썰매, 패미컨, 육분의 등 아문센이 유용하게 쓴 장비들을 도입했다. 불운하게도 웨들해 한가운데서 얼어붙은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대원 27명과 함께 조난당하지만, 스콧과 반대로 이번에도 탐험대원 전원을 생환시킴으로써 불멸의 명성을 얻었다. 심지어 이 탐험대원 중에는 원래 계획에서는 고려하지도 않은 밀항자 한 명까지 있었는데, 섀클턴은 이 사람까지 포함해서 전원을 살려서 돌아왔다.

어떻게 보면 스콧은 공연한 열폭으로 자신과 부하 일동의 목숨을 팔아 자신의 남극점 도착 명성을 샀다고 볼 수 있다. 그에 비해 스콧보다 먼저 남극점 정복에 시도했다가 실패한 섀클턴은 '이대로 가다간 우린 다 죽는다'고 판단하자, 깔끔하게 돌아가면서 단 한 명의 대원도 잃지 않은 것으로 명성을 얻었고 그 뒤에도 다른 업적으로 실패를 극복하고 명성을 계속 쌓아나갔다. 설령 남극점 정복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더라도, 스콧은 이후에 다른 명성을 쌓을 기회를 포기한 것과 같다. 애초에 스콧 자체가 제대로 된 탐험대장으로는 실격인 인물인지라 이거 아니면 딱히 명성을 쌓을 길이 있었을지도 의문이다. 섀클턴에 대한 태도를 보면 본인도 이 부분을 인지하고 있었다.

더 극단적으로 설명하자면, 아무리 아문센에게 패배했더라도, 스콧이 '인류 최초'라는 타이틀에 집착하지 않고, 도박수나 무리 없이 나아갔더라면 그 역시 남극탐험가 역사상 두 번째로, 영국인으로선 최초로 남극 정상을 정복한 전무후무한 탐험가로 명성을 올리는 업적을 쌓았을 것이다. 더욱이 스콧이 아문센보다 과학 탐사에 더 적합한 멤버를 이끌고 갔다는 것을 고려하면,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아문센과는 달리 최초로 남극에 대한 자세한 과학적 조사를 행한 사람으로는 대접할 수 있을테니 결국에는 단순히 남극점에 도달만 한 아문센과 대등하거나 심지어 아문센을 뛰어넘는 명성을 얻었을 수도 있다. 탐사 면에서는 몰라도 과학적인 조사 면에서만은 아문센보다는 확실히 우위였으니 말이다. 스콧이 향후 아문센은 물론이고 섀클턴보다도 낮은 평가를 받은 이유는 결국 생존이라는 가장 중요한 전제를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탐험을 강행한 판단 착오로 인해 그나마 이룩한 것마저 저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결국 초창기에는 찬사를 받았던 스콧이 낭만주의보다는 합리주의가 자리잡은 21세기에 들어서는 결국 무책임한 리더의 대명사라는 불명예까지 뒤집어쓰고 만 것이다. 탐험대의 대장은 대원들의 목숨에 책임이 있는 리더다.

1956년 영국 지질학자인 레이먼드 프리슬리(1886~1974)는 늘그막에 세 사람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아문센, 섀클턴, 로버트 스콧 세 사람을 모두 만나보고 같이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세 사람은 각자 특징이 있더군요. 우선 스콧은 과학탐사대를 이끌 대장으로서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겁니다. 다음으로 아문센은 빠른 움직임과 꼼꼼한 준비로 전문적인 속전속결 탐험대장으로 누구도 따라가지 못하죠. 하지만 절망적인 상황에서 살아날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무릎을 꿇고 섀클턴을 보내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23. 부질없는 자존심[편집]


스콧 탐험대가 남극점에 도착한 후, 아문센 탐험대가 일부러 남기고 간 식량과 순록가죽으로 만든 의복을 발견했다. 식량 부족과 추위에 시달리는 스콧 탐험대에게는 큰 선물이었지만, 스콧은 여기에 일절 손을 대지 않았다.

여기에는 반론도 있다. 남극점에 남은 것 중에 식량은 없었고, 돌아가는 데 필요없다고 판단하여 버린 여분의 장비 뿐이었으며, 스콧 탐험대를 위해 일부러 남긴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문센은 남극점에 도달하는 순간까지 영국의 설상차를 비롯한 충분한 보급과 '영국인' 스콧의 집념에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아문센 역시 귀로에 식량 사정으로 고생을 한 만큼 만일 남겼더라도 스콧을 위한 동정심 같은 목적은 아니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보면 필요할 때 물자를 살 수 있는 편의점이 남극점에 있는 것도 아니고, 버리고 싶으면 그때그때 버릴 수 있었음에도 쓰라며 남겨둔 것은 엄연히 성의다. 설사 영국탐험대가 별 필요 없었다 하더라도 만약을 위해 물품을 두고 가는것과 탐험에서 그냥 버리고 가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또한 돌아가는 데 필요없다고 판단했던 것은 복귀에 지장이 생길 것 같아서이지, 못 쓰는 것이라 생각해서는 아니다. 쓸모없다면 진작에 버렸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극지 탐험을 위해 준비한 물품이니만큼, 탐험에 쓸 수 없는 물품이 존재할 수 없다. 아문센 일행이 남긴 물자 중에서 가죽장갑 한 쌍은 남극점에 오는 도중 장갑을 잃어버린 보워스가 가져갔음을 확인할 수 있듯, 남겨둔 물건이 탐험에 쓸모없는 물건들은 아니었다.

여튼 아문센이 버렸든 성의로 준 것이든 공짜로 얻을 수 있는 물자를 그냥 놔두고 간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 특히 스콧 일행은 위에 나왔듯 옷이 방한 효과가 거의 없어지다시피 했으며 아문센처럼 가죽옷이 있었어야 했다고 할 정도였으니 마침 남겨진 가죽옷은 큰 도움이 되었을 텐데 스스로도 가죽옷이 있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했으면서 가져가지 않았으니, 본인의 알량한 자존심이 부른 큰 실수다.


24. 결론[편집]


스콧의 죽음을 확인한 이후, 옹호자가 급격히 늘어났다. 죽음이 닥쳐오는 가운데서도 끝까지 걸어간 스콧 탐험대의 여정은 합리적으로 볼 때 자살행위였지만, 당시에는 아직 낭만주의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었고 결론적으로 감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또한, 스콧과 영국의 언론플레이가 뛰어났고 그가 남긴 일지도 대단히 명문이었기 때문에 영미권 사람들에게는 특히 큰 감명을 주었다.

물론, 아문센도 탐험일지를 정리해서 '남극'이라는 책으로 출판하긴 했지만, 아문센의 기록은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아문센의 문필력이 독자들에게 형편없었다는 게 아니라, 그가 실용적인 성품이어서 매우 담담하고 객관적인 내용으로 글을 쓴 탓에, 일반 대중 독자들에게 아문센의 글은 심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탐험이 너무 순조로워서 대중들이 좋아하는 고난, 희생, 극복, 비극 같은 극적인 요소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일거수일투족을 다 꼼꼼하게 준비한 덕분에 루트부터 고난이 없었고, 고난이 없었기에 희생이 없었고, 극복할 위기도 없었고, 너무나도 무난하게 돌아온 지라 비극도 아예 없었다. 심지어 상술된 바 있는 날씨운 같은 비운의 요소조차도 없었다. 대원들이 심심하다며 바다표범 사냥을 과하게 한 것 때문에 아문센에게 경고를 받을 정도로 탐험 자체가 지루할 정도에, 살도 더 쪄서 돌아왔다는데 더 말이 필요한가. 물론 위에 언급했듯이 아문센과 대원들도 몸에 크고 작은 동상과 부스럼이 일어나고 지독한 추위와 피로에 시달렸지만, 남극이란 인류가 가본 적이 없는 극한지에서 고작 이 정도로 끝나고 살아서 생환한 건 사실 고난이 없다고 말해도 좋을 수준이다.

그래서 스콧은 '위대한 패배자', '안타까운 제2인자' 정도로 불리며, 영미권에서 유명한 인물이었기에 오히려 세계에 널리 알려지고 호평도 받았다. 상대적으로 아문센은 그 자신도 '냉혈한', '스콧을 죽게 내버려두었다.'는 비난 때문에 고통받았다. 그러나 위에 있는 내용을 읽어보자면 아문센은 자기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스콧을 많이 배려했고 승부를 떠나 생명을 살리려 했다. 그걸 듣지 않고 비극을 자초한 스콧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의 세계적 영향력이 감소하고 영국보다는 훨씬 객관적인 관찰자라 할 수 있는 미국의 영향력이 증대되면서 평가는 반전되었다. 스콧처럼 사람이 죽을 상황에서 용기를 보임을 칭송하기 이전에 사람이 자신이 죽을 비극적인 상황으로 스스로를 몰고 가지 않는 게 더 낫지 않느냐는 이성적인 주장이 대두되었기 때문.[24] 특히나 20세기 후반에 이르며 합리주의가 기본적인 이념으로 대두되고, 냉전 해체 이후로 전세계가 시장경제 체제로 재편되어 기업을 필두로 한 민간영역에서 리더십 열풍이 불면서 과거 아문센을 그리도 비하하며 그의 죽음을 축하하기까지 했던 영국마저 아문센을 인정하게 되었고, 스콧은 실패한 리더의 표본으로 박제되고 말았다. 이는 냉전이 시작되면서부터 더 이상 국력이 예전같지 않음을 실감한 영국이 '우리가 무조건 세계 최초 타이틀을 차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게 된 데서도 기인한다. 과거에는 '낭만'으로 평가되었던 스콧의 탐험은 점차 무계획·무책임·징징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고, 아문센의 계획적인 탐험활동이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두 사람의 대결을 빅토리아 시대낭만주의에 대한 현대의 합리주의의 승리라고까지 평가하기도 한다. 심지어 스콧의 죽음 자체에 대해서도, 어떻게든 살려고 하면 살 수도 있었지만 패배자로 살아남기보다 사람들이 자신을 '숭고한 순교자'처럼 기억하기를 원해서 동료들까지 같이 죽음에 몰아 넣었다는 극단적인 평가까지 있다.

스콧은 낭만주의적인 생각에 빠져 기사도 정신 등을 내세우고 실용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으며 오판에 오판을 거듭한 끝에, 냉혹한 남극의 추위 속에서 죽고 말았다. 그는 동료들을 팔아 넘기지도, 자신의 명예만을 위한 도구로 생각하지도 않았으나, 그의 눈을 가린 자존심과 낭만주의는 그에게 처참한 실패를 안겨 주었다. 하지만 당시 대영제국 영국의 자존심은 스콧의 실패를 단순히 '부족한 리더의 자질'로 남도록 허락할 수 없었으며, "개들을 잡아먹으면서 추악하게 쉬운 길로 남극점에 도달한 아문센과 기사도 정신과 명예를 좆아 남극의 고난에 정면으로 맞서고 영광스러운 최후를 맞은 스콧" 이라는 얼토당토않은 비교까지 나올 정도로 스콧을 비극의 영웅으로 감성팔이 하며 아문센을 빌런으로 몰아가는 졸렬한 감성팔이를 했다.

마찬가지로 섀클턴 역시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위대한 리더의 본보기로 널리 칭송받고 있다. 섀클턴이라는 대체재의 발굴(?)을 통해 영국인들이 아문센 고평가 ≠ 영국 패배라는 퇴로를 확보한 점도 스콧-아문센 재평가에 꽤 영향을 미쳤다. 더군다나 아문센을 폄하하던 당시의 영국에서 섀클턴은 드물게 아문센을 칭송했던 사람이었으니 아문센을 칭송하는게 자기모순에 빠지지도 않으며, 특히나 섀클턴을 고평가하면 할수록 스콧의 찌질함이 한층 두드러지는 효과도 있다.

이러한 각 인물에 대한 세간의 평가의 변천사는 역사는 객관적으로 적히더라도 그것이 모두 객관적인 사실의 서술이 아니라 수많은 개인과 집단의 이해관계가 얽힌,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25. 반응[편집]


북극 정복에서 로버트 피어리와 쿡 의사 간에 논쟁이 있었던 것처럼, 아문센은 탐험의 중요성뿐이 아니라 탐험 결과를 홍보하는 언론의 중요성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남극에 도착했을 때는 철저하게 지자기 관측 결과 등의 인증자료를 뽑았고, 북극 정복 때처럼 논쟁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

심지어 며칠 머무는 동안 여러차례 육분의로 관측을 해서 자신들이 처음 도착한 자리가 정확한 극점이 아니라는 걸 알고 새로 측정한 '남극점'에까지 가서 인증샷 시도를 했을 정도였다. 사진은 귀환 도중 카메라 파손으로 망실되었지만 정확한 관측자료를 남겼기 때문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스콧의 일기도 증거품이었다. 스콧은 남극점에 아문센이 먼저 도달했음을 비통한 심정으로 기록했는데, 스콧이 아문센을 위해 거짓말을 할 이유는 전혀 없으므로 확실한 증거가 될 수밖에 없었다.


26. 영국의 반응[편집]


아문센의 성공 소식이 알려지자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왕 조지 5세는 호바트에 있는 아문센에 축하전보를 보냈는데, 특히 조지 5세는 아문센이 귀환하는 첫번째 기항지가 대영제국의 영토였던, 오스트레일리아인 것에 대해 특별한 기쁨을 표현했다.

영국에서는 아문센의 승리에 대한 언론의 반응은 자제되었으나 일반적으로 긍정적이었는데, 아문센의 성공에 재정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데일리 크로니클(Daily Chronicle)과 일러스트레이트 런던 뉴스(Illustrated London News)의 아문센에 대한 열광적인 보도 뿐만 아니라, 맨체스터 가디언(Manchester Guardian)지는 노르웨이인의 용기와 결단력에 의해 모든 비난의 원인이 지워졌다고 보도 했으며, 영 잉글랜드(Young England)지 역시 독자들에게 용감한 노르웨이인이 얻은 명예에 대해 원망하지 말것을 권고 했다. 또 The Boy's Own Paper지는 모든 영국의 소년들이 아문센의 탐험기록을 읽어야 한다고 추천했고, 더 타임즈 특파원은 아문센이 너무 늦게 스콧에게 알리지 않은것에 대해 가벼운 질책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문센의 성실성을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그가 극점에 도달했다고 말했기 때문에 믿을 수밖에 없다"고 평론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왕립지리학회 (Royal geographical society)의 고위직은 아문센의 업적에 대해 특히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전 왕립지리학회 회장이었던 클레멘츠 마컴 (Clements Markham, 1830~1916) 경은 아문센의 주장이 사기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며 진실을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며 평가 절하하였고, 1912년엔 아문센이 왕립지리학회에서 연설할 때엔 학회 회장인 조지 커즌 (George Curzon, 1859~1925) 경으로부터 '개들을 위한 건배'를 요구받자 아문센은 자신이 무시당한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새클턴은 아문센의 승리를 폄하하는데 동참하지 않았는데, 그는 아문센에 대해 "오늘날 가장 위대한 극지 탐험가"라 칭송했다. 로버트 스콧의 부인인 캐슬린 스콧(Kathleen Scott, 1878~1947) 역시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기 전 아문센에 대해 "그의 여정은 매우 훌륭한 위업이었다. 짜증이 나기는 해도 감탄할 수밖에 없다."며 그를 인정하였다.


27. 영국을 제외한 세계 각국 반응[편집]


세계인들은 아문센의 승리에 찬사를 보냈다. 노르웨이의 친척 국가이자 비슷한 글뤽스부르크 왕가가 다스리던 덴마크도 축하했다. 그 중에서도 영국과 앙숙인 프랑스가 더욱 즐겁게 환호성을 울렸다. 스페인도 프랑스만큼 극단적이지는 않았지만 풍악을 울리며 아문센을 크게 축하해줬으며 심지어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인도에서도 우리나라의 국권을 강탈한 원수 영국놈들을 북유럽 먼 나라 출신의 탐험가가 영국에서 독립하지 못한 우리나라를 대신해서 이겨줬다며 아문센의 남극점 정복에 훈훈한 반응을 보인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이 두 나라는 아문센이 죽고 영국의 지배에서 독립한 이후에 아문센을 남극점의 최초 정복자로 기록하며 스콧을 남극점의 최초 정복자라고 역사왜곡을 하며 우기던 지배국인 영국과 다른 모습을 보였다.


28. 노르웨이의 반응[편집]


왕실에서 훈장까지 수여했을 정도로 환호했다. 노르웨이 입장에서는 국가적으로도 영광스러울 것이다. 상대가 대영제국이고 자국은 이 때로부터 10년도 안 된 1905년에 갓 독립한 신생국임을 감안하면, 어찌 되었든 간에 신생 독립국이 세계 대제국을 이긴 것이니 말이다.

남극 탐사를 할 때 아문센을 후원했던, 노르웨이가 독립할 때 막 왕위에 올랐던 국왕 호콘 7세도 개인적으로 아문센을 좋아했는지, 15년 뒤에 북극을 비행선으로 탐험하려던 아문센이 자금이 부족하다고 하소연하자 "노르웨이를 세계에 알린 당신의 부탁을 왜 마다하겠소?" 라며 기꺼이 비행선을 사줬다. 이후에 아문센이 행방불명되고 결국 죽음이 공표되자, 국왕도 명복을 빌며 대리인을 보내어 국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29. 번외-시라세 노부[편집]


아문센 vs 스콧의 경쟁이 치열해지자, 일본 제국도 육군장교인 시라세 노부(白瀬 矗 1861-1946)를 중심으로 자기들도 남극점을 정복해 보겠다고 뛰어들었다. 남극의 ㄴ자도 모르고 그냥 남이 장에 간다니까 거름 지고 간다는 식으로 뛰어든 이 무모한 남극점 도전은 1912년 1월 28일 남위 80도선에서 끝났다. 이때 시라세 노부는 자신이 지나온 지역을 일본령으로 선포하고, 해당 지역을 야마토 유키하라라고 명명했는데, 이곳의 위치는 루스벨트 섬 남쪽에 위치한 로스 빙붕, 즉, 바다였다.

당시 시라세는 탐험한 곳에서 암석 하나 줍지 못하여 의아해했는데, 바다 위에 두껍게 뒤덮인 얼음 지대니 당연히 암석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이런 곳에 암석이 있으려면 운석 밖에 없다.

말할 것도 없이, 남극 조약과 무관하게 영토로 인정받을 수 없는 곳이라서 일본의 영유권 주장은 그냥 붕 떠버렸다. 영토로 인정받으려면 영주권을 부여해야 하고 그 남극의 광활한 영토에 대해 영주권으로 국가령 선포할 수준 되려면 1만명을 데려와도 어려운데 남극에 1년 동안 제일 많이 사람이 있는 시기에도 4000명밖에 안 온다. 그래도 로버트 스콧과는 반대로 죽지는 않고 살아 돌아왔지만, 모든 탐사비용은 시라세에게 청구했다. 왜냐하면 후원회가 돈으로 자기들 먹는 거랑 유흥비에 쓴 게 탄로나서(...). 덕분에 그는 30년도 넘게 지나 1946년 9월 향년 만 85세로 죽을 때까지도 끝내 빚을 갚지 못했다. 참고로 금액은 4만엔 상당(현재 돈으로 약 1억 5천만엔). 대원들 월급 주는 것조차 불가능해질 지경이 돼서 평생 강연도 돌아다니고 남극 사진집도 팔면서 갚으려고 시도했지만 말년에 죽을 땐 그런 사람이 같은 마을에 있다는 사실조차 마을 사람들은 몰랐다.

다만, 그의 무모한 도전은 일본 남극탐사선 시라세(しらせ)가 이름을 따는 것으로 흔적을 남겼다. 시라세의 무모한 탐험에는 아이누족의 도움이 그나마 한줄기 빛이 되었다. 그 덕분에 그저 야만인 취급되던 아이누족이 처음으로 관심을 받게 되는 나비효과도 남았다. 공교롭게도 아문센에게 북극에서의 생활방식을 가르쳐준 이누이트처럼 아이누족 역시 북극 문화권 민족이다.


30. 국내 위인전에서[편집]


어린이용 위인전기 책에서는 그냥 "아문센이 이겼어요 끝."이라고 나오고 스콧 일행의 죽음들은 생략하기 때문에 나중에 커서 스콧의 최후를 알고 충격을 받는 경우들이 있었다. 그럴만도 한 것이 스콧 탐험대의 최후는 어린이용에 그대로 싣기엔 다소 충격적인 내용이기도 하다. 그밖의 아문센의 탐험과정도 생존을 위한 철두철미한 준비성이 돋보이고 그로 인해 다소 심심하게 진행된 탐험이라는게 어른들의 시각이지만, 개에게 중노동을 시키다가 죽으면 그대로 식용으로 먹거나 하는 등 어린아이들에게 있는 그대로 말해주기에는 동심파괴 정서적으로 논란이 될만한 부분도 꽤 많다보니 최대한 둥글둥글하게 뭉갤 수 밖에 없다.

청소년용 위인전에는 스콧의 최후 정도는 소개한다. 왜 실패했는가도 어느 정도 나온다. 그 실패의 배경에 얼마나 비합리적인 요소들이 있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않을 뿐…70~80년대 출간된 대부분의 위인전기 책들도 그랬다.

스콧이 말을 잡아 말고기를 먹고 아문센이 개를 잡아 개고기를 먹었다는 이야기들도 누락한 경우도 많이 있다. 그나마 어린이용 책 중에는 로버트 피어리가 북극점을 정복했다는 설이 정설이었던 시기에 발간된 Why 시리즈의 ≪남극과 북극≫편이나 ≪탐험대장 떡철이≫가 스콧의 죽음을 간략하게 다뤘다.

어린이용과 청소년용의 중간즈음에 있는 책인 살아남기 시리즈는 남극을 소재로 다루기도 했는데, 작품의 내용이 남극에서의 조난을 다루다 보니 필연적으로 아문센과 스콧의 이야기도 실어넣었다. 스콧의 실책도 그런대로 실어 넣었지만, 만화 이외에 글로 된 보론 정도로 소개해서 아마 읽은 사람은 거의 없을듯하다. 오히려 살아남기라는 컨셉 때문인지 어니스트 섀클턴의 일화가 훨씬 더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게다가 어린이용 책 중 여러 인물들을 함께 다루는 위인전류에서는 스콧에 대해서도 다룬다. 물론 이런 책들은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다루다 보니 간략하게 설명하는 데다, 어린이용이라 스콧의 부실한 준비, 탐험에 관한 실상은 상당 부분 생략되는 경우들이 많다. 적당히 '스콧은 열정은 있었지만 계획을 제대로 세우지 않았다.' 정도로만 표현한다.

Why에서는 스콧 탐험대가 겪은 일을 전부 적었다가는 더는 아동용 만화가 아니게 되는지라 사실을 최대한 순화해서 '조랑말을 몰고 기계를 들고 갔다가 조랑말은 다 죽고 기계는 싹 다 얼어붙어서' 사망했다고 써놨다. 떡철이에서는 떡철이의 꿈에서 떡철이가 동사하기 직전 스콧의 묘비를 보면서 울부짖는 컷으로 묘사했다. 이 이야기의 내용이 떡철이가 죽은 지 72시간 후에 되살아나는데, 얼굴은 고스란히 썩어서 해골 상이 된 탓에[25] 수술을 받아 다시 원래의 얼굴로 돌아오는 장면에서 꿈을 깨는 등 지금 기준으로도 약을 한 사발 들이킨 듯한 묘사가 많다.

그 외에도 ≪노빈손의 남극 어드벤처≫는 스콧 일행의 참담한 현실과 그나마의 학술적 성과를 나름대로 묘사했지만, 스콧의 각종 오판들은 역시나 대부분 생략했다. 자신이 멍청했다고 자책하는 스콧에게 그러게 왜 그렇게 했냐고 깐족거리는 노빈손의 모습으로 간단하게 묘사하긴 하지만…

하지만 1980년대에 나온 책이나 만화에서는 제법 상세하게 설명한 적도 있었다. 이게 왜 그러냐면 1970~80년대에는 국내 출판계가 아무 생각없이 일본에서 나온 전집을 직역 수준으로 번역해서 그대로 출간했기 때문이다.


31.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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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지만 아문센이 죽은 이후 반세기도 넘은 1996년 이후에 진행한 이 주장을 검증하기 위한 여러 연구 결과 연구자 대부분이 '로버트 피어리는 북극점에 매우 가까이 갔을 뿐이었고 최초로 북극점을 정복한 사람 역시 아문센이다' 고 인정한다.[2] 시발점으로 따지는 광화문을 기점으로 서울-부산은 약 428㎞, 경부고속도로 시점인 양재IC를 기점으로 했을때는 약 401㎞ 정도(네이버 지도 계산 기준)다. 물론 부산에서도 세부적인 위치에 따라 거리는 다르게 나올 수 있다.[3] 경사를 내려가는 알파인 스키가 유명하지만 크로스컨트리 스키처럼 평지에서 타는 스키도 있다. 북유럽 국민들 대다수가 어린 시절부터 스키와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한다. 동계 올림픽에서 이 나라들의 선수들이 메달을 휩쓰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4] 다문화 아이도 만들었다는 설도 있는데 유전자 검사 결과 아문센은 혐의를 벗었고 대원 중 한 사람이라고 한다. 출처. 당시 일부 지역 이누이트들이 자신의 아내를 손님의 침실에 들이는 풍습(외지인의 혈통을 얻기 위해서라고 한다. 아마 고립된 외지에서 사는 소수 집단 내에서 근친혼의 부작용이 일어날 것을 예방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이 있었으니 딱히 그 대원을 욕할 이유는 없다. 물론 어디까지나 외지인이 좀처럼 없고 인구가 적은 곳이나 이럴 뿐이다. 아마존이나 아프리카에도 극히 인구가 적고 외지인이 없는 부족들이 비슷한 풍습을 유지하였다.[5] 오리털, 거위털 등의 보온성이 좋은 새의 솜털.[6] 中空絲, 속이 비어 있는 합성 섬유. 특수 공정으로 실을 뽑거나 실에 비활성 기체를 첨가하는 등의 방법으로 만들며, 가볍고 보온성이 높다. 주로 인공 신장을 만드는 데 쓴다.[7] 어떤 위인전에서는 이를 조금 순화해서, 더 이상 달릴 수 없을 정도로 약해진 개들을 짐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죽였다고 표현했다. 게다가 옛날 위인전에서는 죽고 나서 자신의 고기까지 바친다면서 개의 충성심을 극찬하기도 했다.[8] 사실, 어떻게 보면 이 발언만 봐도 스콧이 남극 탐험을 굉장히 우습게 봤음을 엿볼 수 있다. 아무도 도달하지 못한 곳에 가는지라 본인의 생존조차 알 수 없는 마당에, 개들의 안전을 걱정하는 등 방심이 하늘을 찔렀던 것.[9] 뭔가 대단해보이겠지만 위에 나왔듯 여기는 탐험가들을 모아놓고 한 강연도 그렇다고 탐험에 대해서 뭘 아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한 강연도 아니다.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대다수가 지리학자나 지리학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들뿐일 것이다. 즉, 탐험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것. 물론, 난센이 있으니 얘기가 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대다수는 탐험에 대해 잘 모르는 비전문가였을 것이다. 결국 스콧은 탐험가라면서 이 비전문가와 동급의 수준이라는 말밖에 더 안된다.[10] 당연하지만 위에 나왔듯 체력이 떨어진 개는 동족들에게 먹히고, 기본적으로 동물을 부리는 것이 결코 동물들에게 편할 리가 없으니 맞는 말이긴 하다.[11] 전래동화 같은 것에서 봤을 법한, 시골에서 밭갈기를 시키는 소에게 쇠죽을 끓여 먹이는 것은 간식이 아니라 여물의 소화 효율을 올려주기 위함에서 기인된다. 게다가 극한에서 짐이 가득한 썰매를 끄는 말의 체력소모는 보통 환경에서보다 몇 배나 심한 것은 당연하다.[12] 출처: 말의 전쟁, 최강 기마대의 기록.[13] 경부고속도로 시점인 양재IC부터 종점인 구서IC까지[14] 영국 갤런을 리터로 환산하여, 소수점 첫째 자리에서 반올림한 수치이다. 아문센이든 스콧이든 미국 갤런을 기준으로 물품을 기록했을 리가 없으므로 영국 갤런일 것이다.[15] 당시 스콧 탐험대가 남극에 가져간 것에 가깝게 블렌딩한 홍차는 영국의 대형 유통업체로 유명한 테스코에서 제조한다. 한국에서도 테스코의 자회사인 홈플러스에서 '캡틴 스콧 블렌드'라는 이름으로 된 홍차를 구할 수 있었다. 홈플러스가 MBK파트너스에 매각된 이후로는 더 이상 신규 물량이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 홍차는 다른 홍차에 비해 맛이 매우 진한 편이라 밀크티를 만들기에 적합하며, 판매 수익금 중 일부는 스콧 탐험대의 전초기지였던 남극 캠프를 관리하는 영국 남극유산기금(Antarctic Heritage Trust)에 기부된다.[16] Huxley, Scott's Last Expedition, Vol. I[17] 단, 오늘날 남극에 거주하는 사람은 당장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면 절대 얼음과 눈을 녹여 식수로 쓰지 않는다. 그 안에 어떤 바이러스나 박테리아가 얼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18] 다만 이 수치는 어디까지나 권장량일 뿐이고, 실제로는 이보다 더 먹는다고 보면 된다.[19] 두 점 사이의 각도를 정밀하게 재는 광학기계. 태양, 달, 별 등의 수평선상의 각도를 재어 관측 지점의 위도를 간단하게 구하는 데에 쓴다.[20] 물론, 위인전은 난센만 있고 극화에서는 대부분 콩라인으로만 묘사된다. 아무래도 아문센 사건 이후의 행보 때문에 그런 듯하다.[21] 아문센은 회고록에서 자신이 선장 면허까지 딴 이유가 탐험대에서 선장과 탐험대장이라는 두 리더가 있으면 각자 의견 충돌로 팀이 무너질 가능성이 너무 높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남극점 레이스 이전 북서항로 개척 이후 한 말이다.[22] 남극일기란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된 스콧의 일기 번역자 박미경도 서문에서 아문센의 불화 사건을 들먹이며 빌런같이 묘사하는 오류를 저질렀다. 배경지식 없이, 또는 교차검증을 하지 않고 작업할 작품만 읽고 몰입해서 번역 작업을 할 때 흔히 저지르는 오류다. 엄밀히 해당 도서 서문은 아문센의 남극점 정복 이전의 사전측량작업조차 '애초에 쉬운 길을 골랐다'는 표현을 쓰는 등 양 측 탐험대에 대한 중립적 서술 측면에서 결함이 존재한다. 자신이 떠날 길조차 제대로 사전에 알아보지 않고 목숨을 걸 만한 여정을 떠나는 탐험가가 세상에 어디 있으며, 자신이 지도하는 훌륭한 집단의 통솔력을 갑자기 다른 리더를 들여와 흐려버리며 집단을 망치는 결정을 내릴 리더가 어디 있단 말인가?[23] Apsley Cherry-Garrard, The Worst Journey in the World - Antarctic 1910-13, Chapter X.[24] 이러한 관점은 냉전 이후 미국이 명예훈장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볼 수 있다. 누군가 명예훈장을 수여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 희생이 필요한 상황이 발생했다는 뜻이므로, 오히려 장병이 자기 희생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처음부터 작전을 잘 짜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것이다.[25] 어차피 개그만화라 별 의미는 없겠지만 극지방에서는 시신이 얼어붙으면 몰라도 썩지는 않는다. 애초에 극지방이 아니라 웬만큼 더운 곳에서도 시신이 72시간 만에 뼈가 드러날 정도로 부패가 진행되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