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앵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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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내용
2.1. 배경
2.2. 진행
2.3. 강화 내용
3. 파기



1. 개요[편집]


1802년 3월 25일 프랑스 제1공화국영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 이 조약을 통하여 영국은 공식적으로 프랑스 제1공화국을 승인하였고[1], 이를 통하여 1798년부터 진행되어 온 제2차 대프랑스 동맹전쟁이 종결된다. 아미앵 조약은 1802년 3월부터 다음해인 1803년 5월까지 약 14개월 가량 유지되는데, 이는 프랑스 혁명 전쟁이 발발한 1792년부터 나폴레옹 전쟁이 종결된 1815년 사이에 유럽 전역에서 전쟁이 없던 유일한 기간이다.


2. 내용[편집]



2.1. 배경[편집]


1798년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을 강행하지만 호레이쇼 넬슨이 이끄는 영국 해군이 나폴레옹의 원정군과 동행한 프랑스 해군을 격침시키면서 이집트에 그대로 갇히고 만다. 한 편 이틈을 틈타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에 대한 공세를 재개하였고, 이는 상당한 성과를 거둔다. 결국 나폴레옹은 혈혈단신으로 프랑스로 귀국하고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다. 나폴레옹이 복귀하면서 전세는 다시 변화했고, 마렝고 전투 이후 결국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프랑스와 루네빌 조약을 체결하고 대 프랑스 동맹 전선에서 이탈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영국 입장에서 혼자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진행하는 것은 상당히 부담스러워졌다.[2] 프랑스 역시 혁명 이후 정치적 혼란과 끊임없는 대외전쟁으로 인하여 경제를 비롯한 사회 문제의 해결이 급선무인 상황이다. 마침내 양국은 강화를 위한 교섭을 시작하게 된다. [3]


2.2. 진행[편집]


1801년 11월 콘월 후작이 강화 교섭을 위해 프랑스로 파견된다. 프랑스 측에서는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탈레랑이 참가. 중간중간에 조약이 틀어질 뻔한 위기 상황도 몇번 있었지만[4][5] 양국 모두 평화를 요구하는 내부의 압력이 거셌기 때문에 마침내 1802년 3월 25일 강화 조약이 체결된다. 강화 체결은 특히 영국에서 환영받아서, 수도인 런던에서는 강화를 기념하는 축제가 열렸지만 정작 강화 회담을 담당한 콘월 후작은 불만을 표하면서 잔혹하고 희망없는 전쟁이 재개될 것(renewing a bloody and hopeless war)이라고 코멘트했다.


2.3. 강화 내용[편집]


주요 강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양국에 억류된 전쟁 포로의 즉각적인 석방
  • 이집트에서의 영국군 철수
  • 교황령나폴리 왕국에서 프랑스군 철수
  • 영국은 서인도 제도의 식민지를 다시 네덜란드에게 반환할 것
  • 영국군은 몰타를 비롯한 지중해 일대 섬에서 철수하며, 이 섬들은 중립을 유지할 것.


3. 파기[편집]


애초에 아미앵 조약은 항구적인 평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음 전쟁을 위한 숨고르기 목적으로 체결된 만큼 오래 지속되기 힘든 운명이었다. 나폴레옹은 아미앵 조약과 루네빌 조약의 내용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스위스, 이탈리아, 범 독일권, 네덜란드 등 중부유럽 곳곳에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는데, 특히나 독일권에 대한 간섭은 신성 로마 제국선제후겸하고 있는 국왕을 모시고 있는[6] 영국으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행태였다. 결국 1803년 5월 영국은 몰타를 재점령하고 아미앵 조약의 파기를 선언하면서 프랑스와의 전쟁을 재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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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전까지 영국은 프랑스에 대한 영국의 왕위 상속권을 주장하고 있었다. 물론 백년전쟁 시기처럼 전쟁까지 불사하면서 주장했던 것은 아니지만.[2] 또한 당시 영국 수상이었던 윌리엄 피트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위한 비용 마련을 위해서 소득세를 거뒀는데 이는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거기에 전쟁 자체로 인한 인플레이션까지 겹쳐버리면서 당시 영국 내부에서는 전쟁의 중단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매우 커졌다.[3] 영문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루네빌 조약 이전이었던 1799년부터 나폴레옹은 계속 영국에게 화해의 제스쳐를 취했지만, 나폴레옹을 신뢰하지 못하던 소(小) 윌리엄 피트를 비롯한 당시 영국 정치인들이 퇴짜를 놓았다고 한다.[4] 특히 나폴레옹이 1802년 1월에 이탈리아의 대통령 직을 수락했던게 가장 큰 고비였다. 루네빌 조약에 따르면 프랑스는 이탈리아의 정치적 독립을 보장해줘야했는데, 나폴레옹의 이러한 행위는 루네빌 조약을 그냥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리는 행위였기 때문.[5] 또한 영국은 프랑스와 전쟁을 시작한 이래, 압도적인 해군력을 바탕으로 프랑스의 해외 식민지를 상당수 차지해버렸는데, 프랑스가 이것을 토해낼 것을 요구했던 것도 강화 회담에서 상당히 뜨거운 의제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실랑이가 벌어졌던 사안은 바로 지중해의 요충지인 몰타에서 영국군이 철수하는 문제.[6] 19세기 초반 당시 영국은 하노버 왕국동군연합 관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