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피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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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atest Frenchman

※ 2005년 프랑스의 공영방송인 프랑스 2가 발표한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 명단이다.

TOP 10
1위
2위
3위
4위
5위
콜뤼슈
6위
7위
8위
9위
10위
11위~100위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장 가방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엠마뉘엘 수녀
장 물랭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볼테르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크리스찬 카브롤
쥘 페리
루이 뤼미에르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샤를 트르네
미셸 사르두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하룬 타지프
에리크 타바를리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다비드 두이예
앙리 살바도르
쟝 자끄 골드만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야니크 노아
달리다
레옹 지트론
니콜라스 윌로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시몬 베유
파트리크 푸아브르 다르보르
프랑시스 카브렐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르노
베르나르 쿠슈네르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미셸 세로
미셸 드러커
라이무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레이먼드 풀리도르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질베르 베코
조제 보베
장 페라
리오넬 조스팽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뤽 베송
티노 로시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세르지 레기아니
프랑수아즈 돌토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아베 피에르
Abbé Pierre


파일:external/cdn-parismatch.ladmedia.fr/Un-timbre-a-l-effigie-de-l-abbe-Pierre_article_landscape_pm_v8.jpg

본명
앙리 마리 조제프 그루에
Henri Marie Joseph Grouès
출생
1912년 8월 5일
프랑스 제3공화국 리옹
사망
2007년 1월 22일 (향년 94세)
프랑스 파리
국적
[[프랑스|

프랑스
display: none; display: 프랑스"
행정구
]]

종교
로마 가톨릭교회
직업
사제, 정치인, 사회 운동가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어록



1. 개요[편집]


프랑스의 가톨릭 신부. 잠시 하원의원[1]을 지냈던 정치인이자 빈민구제운동에 헌신했던 성직자로, 프랑스 현대사에서 가장 존경받은 인물로 불린다. 대체로 '피에르 신부'로도 불린다.

2. 생애[편집]


1912년 8월 5일 리옹에서 견직물 상인의 8자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앙리 그루에였다. 1930년 카푸친 작은형제회에 입회하여 "필립"이라는 수도명으로 수도생활을 하였다. 1938년 8월 24일 소속을 바꾸어 그르노블 교구 소속의 프란치스코회 재속사제로 사제서품을 받고, 그르노블 대성당에서 사목활동을 시작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활동에 가담하기 시작하면서 아베 피에르[2]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때 유대인들을 스위스로 피신시키는 일에 앞장서기도 했다. 1945년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의원 생활 중에는 월급 전액을 빈민활동에 썼고, 1954년 노숙자들의 숙소를 짓기 위해 엠마우스 재단을 세워 종교를 초월한 빈민, 노숙자 등 사회적 약자들을 구제하는 사회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1988년에는 엠마우스 운동을 더 확산시키기 위해 본인의 이름을 딴 '아베 피에르 재단'을 설립하였다.


3. 평가[편집]


그의 활동이 국제적으로 부각되지 않아서 한국에서는 지명도가 거의 없는 인물이지만[3], 프랑스인을 상대로 '위대한 프랑스인', '가장 존경받는 프랑스인' 설문조사를 할 때 샤를 드 골과 함께 가장 먼저 언급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정치적으로는 전후에 샤를 드 골이나 기독교 민주주의 정당과 함께 하기도 했다. 하지만 반핵, 반민족주의[4] 운동을 하기도 했고, 인도차이나 전쟁에 반대하고 해방신학 계열의 사제들과도 교류하며 말년에는 사회당을 지지하는 등 중도좌파적 성향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적극적인 정치활동 및 사회활동이 껄끄러웠던 프랑스 가톨릭교회의 높으신 분들이나 교황청으로부터 "오만함을 주의하라"는 지적을 종종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혁신적인 모습과는 별개로 가톨릭교회의 급진적인 개혁을 원하는 우리가 교회다조직에 대해 비판하기도 했다.

4. 어록[편집]


'세상에 있는 돈을 가지고 사람을 만들지는 않지만, 사랑하는 사람들과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Avec tout l'argent du monde, on ne fait pas des hommes, mais avec des hommes et qui aiment, on fait tout)


'굶주린 자는 빵을 갖게 하고, 빵을 가진 자는 정의와 사랑에 굶주리게 하라(Que ceux qui ont faim aient du pain ! Que ceux qui ont du pain aient faim de justice et d'amou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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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5 ~ 1951년 재임. 뫼르트에모젤 지역구.[2] 우리말로 번역하면 '베드로 신부님'이라는 뜻.[3] 그나마 대중서적이라 할만 한 것 중에서 홍세화의 저서에서 관용과 인류애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잠시 언급되던 삐에르 신부, 이원복현대문명진단에서 레지스탕스 및 빈민구제 이력을 간단히 소개한 정도 뿐이다.[4] 물론 자유주의 등도 반민족주의를 지지하므로 반민족주의를 지지했다는 사실만으로 좌파라고 보기는 어렵긴 하나, 이 사람은 해방신학 계열 사제와 교류하거나, 프랑스 사회당을 지지하는 등, 진보주의자로서의 면모를 과감히 드러낸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