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샤르 알아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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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아랍공화국 대통령



시리아 아랍 공화국 제6대 대통령
바샤르 알아사드
بشار الأسد | Bashar al-Assad


본명
바샤르 하페즈 알아사드
بشار حافظ الأسد
Bashar Hafez al-Assad
출생
1965년 9월 11일 (58세)
시리아 다마스쿠스주 다마스쿠스
국적
[[시리아|

시리아
display: none; display: 시리아"
행정구
]]

재임기간
제6대 대통령
2000년 7월 17일 ~ 현직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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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후리야 고등학교[1] (졸업) (~1982)
다마스쿠스 대학교 (의학 / M.D.) (1982~1988)
병역
시리아군 원수 (1988~)[2]
종교
이슬람 시아파(알라위파)[3]
신체
190cm
정당
(시리아)


1. 개요
2. 생애
2.1. 집권 이전
2.2. 대통령 집권과 정책 전반
3. 외교
4.1. 서방측 시각
4.2. 수정주의적 시각[2]
4.2.1. 아사드와 민주화 운동의 이면
6. 가족 관계
6.1. 아내
7. 기타
7.1. 아사드는 ISIL 준동의 원흉인가?
7.2. 알아사드가 여전히 건재한 이유?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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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시리아의 제6대 대통령이자 독재자.

제5대 대통령인 하페즈 알아사드의 둘째 아들이며, 2000년 하페즈가 죽자 시리아 대통령직을 세습받아 사실상 2대 독재자가 되었다.

다만 바샤르 개인에 대한 평가는 후술되어있듯 꽤나 갈리는 편인데, 이는 바샤르가 그나마 독재자치고는 영국 유학까지 한 인텔리에 상대적으로 온건적인 성향이라는 점도 있고[3], 반대로 말하면 알아사드의 주요 정적들이 지금에 와서는 이슬람 근본주의에 물들어버린 막장 세력이 되어버린지라 빅똥보다는 그나마 똥(...)이라는 식의 심정도 있다.

결과적으로 10년이 넘는 시리아 민주화 운동, 시리아 내전을 거치면서 독가스까지 동원한 반인륜적 학살공습으로 인해 수많은 시리아인들이 사망하고 난민이 되었다는 점에선 그 역시 결코 책임을 피할 수 없지만[4], 이러한 면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종교적으로 매우 복잡한 이유로 시리아 내의 기독교, 알라위파, 드루즈 등 소수종파[5], 시리아 바트당 지지자들, 이슬람 근본주의를 싫어하는 세속적 수니파 무슬림[6]들에게는 매우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는 복합적인 인물이다.


2. 생애[편집]



2.1. 집권 이전[편집]


1965년 9월 11일 다마스쿠스에서 당시 공군사령관이었던 하페즈 알아사드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1982년 다마스쿠스 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하여 1988년 졸업했다. 1992년 영국 런던에 있는 웨스턴 안과 병원(Western Eye Hospital)으로 유학하여 안과 전문의 과정을 수료했다. 훗날 그의 영부인이 될 영국의 런던에서 태어난 수니파 무슬림 아스마 알 아사드와는 안과 수련의 시절에 알게 되었다. 2000년 시리아 대통령에 취임 이후 12월에 그녀와 결혼하여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즉, 처음에는 가족과 권력 투쟁하기 싫어 의사로 조용히 살 생각이었던지라 정치가가 될 생각이 없었으며, 아버지 하페즈 알 아사드 또한 자신의 장남이자 바샤르의 인 바셀을 후계자로 생각하고 이미 일종의 후계자 수업도 받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1994년,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 일대 사건이 일어나는데, 바로 형 바셀 알아사드 중령교통사고사망한 것이었다.

이에 바샤르는 비보를 접한 후 귀국하여 시리아 육군에 입대해 다마스쿠스 북부에 있는 홈스의 군사학교에 들어갔고, 다마스쿠스의 티슈린 군병원에서 육군 군의관으로 복무했으며 1999년 1월 육군 군의대령으로 승진하였다. 바샤르는 바셀의 사고사로 인해 하페즈의 새로운 후계자가 되어 후계자 수업을 처음부터 받으며 동생인 마헤르 알 아사드의 권력 기반이었던 시리아 '공화국 수비대'의 실질적인 지휘권을 장악하였다. 누나 부쉬라는 여성이었고, 바샤르의 두 남동생들은 정신병이 있거나(마지드) 선천적으로 포악하고 과격하여(마헤르)[7] 대권을 잇기에는 부적합했다.

그러나 바샤르 알 아사드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만 40세 미만은 대통령에 출마하지 못하도록 한 헌법이었다. 이에 시리아 의회는 바샤르를 위해 나이 제한 조항을 뺀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2000년 아버지 하페즈가 심장 마비로 사망하자 바샤르는 바트당과 시리아군의 지도자에 임명되었고, 누구의 반대도 받지 않았다고 추정되는 압도적인 지지율(유효표 중 97.2%)로 부친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2007년 5월 27일, 또다시 타 후보자가 없이 치러진 대선에서 97.6%의 득표율로 7년 임기의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2.2. 대통령 집권과 정책 전반[편집]


만약 사회의 운영이 하나의 종교, 하나의 정당, 혹은 하나의 그룹에 편중된다면, 그 사회에는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시민, 시민 한사람 한사람에게 사회의 발전과 근대화에 나서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세가지 사항이 중요합니다. 우선, 모든 과제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그다음으로, 현실에 걸맞지 않는 낡은 생각을 버리고, 새로운 생각을 도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존의 생각을 개선하는 것입니다. (중략)

이를 위해 다음의 여러가지 측면이 필요로 해집니다. 창조적인 사고, 건설적인 비판, 설명 책임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중략)

정치제도의 개혁을 위해서는 민주적인 사고방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투명성이 요구됩니다. 국가가 개인을, 개인이 국가를 존중하기 위해서 우리는 법의 지배를 지켜야만 합니다. 법의 지배가 우리의 자유를 지켜줍니다. 낭비와 부패에 대해서도 싸워야 합니다. 행정개혁은 더이상 기다릴 수 없는 과제입니다. 무책임하고 부패하며 악한 짓을 행하는 것은 법의 단죄를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현 상황에 안주하는 것을 더이상 용납할 수 없습니다.


바샤르 알 아사드는 2000년 7월 취임연설에서 국민의 광범위한 정치적 참여와 민주주의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연설을 했고 국민들은 처음에는 이를 당혹스러워했다. 하페즈 알 아사드 시대에는 그런 것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체포되고 고문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새로운 사회분위기를 자각하고 다마스쿠스의 지식인 99명이 치안유지법의 철폐와 민주화 개혁을 요구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아사드가 대통령이 됐을 때 시리아인들은 그를 ‘희망’이라고 불렀다. 아버지의 억압적인 통치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였다. 아사드는 영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하며, 컴퓨터와 정보통신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취임 후에는 정치범을 석방하고 국영기업의 민영화와 경제 개혁을 추진했던 것 때문이었다. 바샤르는 시리아컴퓨터협회 회장직을 맡아 시리아에 인터넷과 휴대폰을 도입하고 각급 학교에 컴퓨터를 보급하는 등 이른바 ‘현대화의 기수’로 행세하는 한편, 아버지의 오랜 측근이었던 마르무드 알 조흐비 총리를 숙청하는 등 대대적인 반부패 캠페인도 전개했다.

하지만 정치개혁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미 바샤르의 온건노선에 대항하는 바트당 보수파들이 있기도 했지만 2001년 9/11 테러로 인하여 미국의 시리아에 대한 태도가 극도로 악화되었으며 아사드 정권을 전복시키겠다는 강경한 발언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일들로 인해 민주주의로의 시민 토론이 활발했던 "다마스쿠스의 봄"은 시민단체의 운동 방향이 반정부로 흘러가면서 건수를 잡은 당국에 의해 체포 및 수감되면서 무너지고 말았다. 또 이웃나라인 이라크가 침공당해 파멸하고 저항 세력이 준동하며 난민들이 계속해서 시리아로 밀려들어왔으며 미국의 요청으로 국경 통제에도 진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어 내부적인 치안첩보의 완화를 급격하게 추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분이 완화되었다. 하페즈 알 아사드 시대에는 무카바라트라고 불리는 정보 치안당국의 가혹한 지배가 이루어졌고 시민 내부에 침투하여 감시했으며 의심이 가면 누구든지 영장 없이 연행되었고 고문도 자주 이루어졌다. 하지만 바샤르 알 아사드 통치 초기에는 민주화 운동가나 반정부 인사와 같은 확신범이 아니라면 매우 유연해졌다. 외국 기업이나 기관에 근무할 경우 정기적으로 당국에 출두하여 허가증 기한 연장에 대한 절차와 보고를 하는 것이 의무화되어 있었으나 바샤르 시대부터는 형식적인 절차가 되었다. 또 밀고에 대해서도 강압적인 자세가 사라지고 무조건 입건부터 시키고 보는 것은 사라졌다.

알라위파만이 고위직에 오른다는 아사드 정권의 전통을 깨기도 했다. 자신이 오랫동안 회장을 맡았던 컴퓨터과학협회의 구성원들을 다수 활용함은 물론 하페즈 시대에는 다마스쿠스 대학 출신 학자만을 내각에 임명했는데 지역감정을 깨고 알레포 대학 출신 학자들을 임명하기도 했다. 구 바트당 위주의 인사에 대비되어 기술관료의 입지가 높아졌고 자유경제 전문가이고 비당원인 압둘라 다르다리가 경제부총리로 임명되었으며 계획경제 전문가인 아메르 루트피와 협력하여 시리아 경제체질 개혁을 이끌어 나가기도 했다. 수니파인 무함마드 오타리가 총리를 맡기도 했고, 특히 군부의 요직인 국방장관에 2011년 취임한 다우드 라지하는 기독교도, 정권의 기둥 치안정보기구(GSD)의 수장을 2005년부터 2010년까지 맡았고 2012년 7월에 재취임한 알리 마물루크는 수니파이다. 시리아 내전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는 공화국수비대 104공수여단장인 잇샴 자헤라딘 준장은 드루즈파이다.

아사드 가문 친인척이라고 해도 부정부패가 있으면 엄중히 처벌되었다. 레바논에서 활약하며 왕처럼 행동했던 가지 카나안은 바샤르의 냉대를 받고 권총 자살했으며 세관국장으로 광범위한 탈세를 해온 모친 계열의 일족 하산 마클루프는 2009년에 해임 및 체포되었다. 이러한 일족 처벌을 반대하고 하산 마클루프의 구명에 나선 숙부 자밀 아사드는 바샤르의 무시를 당하고 진노하여 둘의 관계는 오랫동안 소원해졌을 정도이다. 이러한 인사 조치들과 함께 알라위파에 대한 수니파 국민들의 증오는 상당히 누그러들었고 내전이 발발한 이후에도 수니파 60%가 아사드를 지지한 원동력 중 하나가 되고 있다.

경제 부문에 있어서의 개혁의 골자는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탈피와 자유경제 활성화였다. 이에 대한 바트당 보수파의 반대를 무릅쓰고 2000년 사립학교의 설립을 자유화했고,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유지하며 소매점 이상의 개인 상공업을 금지하는 법안을 완화하였으며 2005년 6월에는 바트당 보수파를 물리치고 당대회를 열어 자유경제정책을 골자로 하는 10차 5개년 계획을 통과시켰다. 이러한 개혁정책에 의해 관광업을 비롯한 민간 업종의 성장이 조금씩 이루어져 2006년 3.5%, 2007년 4.3%, 2008년 4.5%, 2009년 5.9%로 지속적인 상승을 기록했다.

한편 바샤르는 2007년 대선에 단독 출마해 97.6%의 득표로 재선됐는데, 투표장마다 정권의 친위대인 공화국 수비대원들이 깔려 있었고, 투표소 안에는 ‘찬성란에 동그라미를 치면 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2007년부터 심각한 가뭄과 이상기후로 인하여 시리아 인구 20%가 종사하는 농업이 큰 타격을 받았고, 상대적으로 상공업 위주의 경제정책을 펴던 시리아 정부는 농업을 소홀히 대하는 경향이 있어 대책도 미봉책 수준이었다. 이에 따라 파탄난 농촌경제를 뒤로 하고 도시로 상경하는 이촌향도 현상이 심화되어 결과적으로 실업률 증가로 이어졌다. 2011년 기후 정상화로 농업 생산량은 회복되기 시작했으나 이때는 시리아 전체가 난리가 났고 이후 내전으로 인해 시리아의 경제개혁은 완전히 주저앉아버린 상황이다.

2023년 9월 21일 항저우 아시안게임 개막식에 맞춰 초청 받아 항저우에 도착했다. 이후 중국 시진핑 주석과 만나 정상회담을 가졌다.##

3. 외교[편집]


서방국가에는 전향적인 자세를 취했다. 영국 이중국적자인 부인을 대동하고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과 만나기도 했고 자크 시라크, 니콜라 사르코지 당시 프랑스 대통령들과 정상회담을 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미국에게도 전향적인 외교 정책을 취했으나 당시에 여러 이유로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90년대 미국은 사담 후세인 대통령 통치하의 이라크에 대한 경제 재제가 시리아의 대 이라크 무역으로 인해 실효성이 낮아진다면서 바샤르 알 아사드 취임 이후에도 항의했으나 시리아 입장에서 경제적 이익이 걸린 무역을 줄일 수는 없었다. 9.11 테러 이후 시리아 정보기관은 알 카에다와 지하디스트 관련 정보를 미국에 적극적으로 제공하면서 협력하였고 이라크 국경 관리에도 만전을 기울였지만 CIA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계는 시리아에 대한 불만스러운 발언을 쏟아냈다. 2003년 101공수사단장 데이비드 페트라우스와의 협력 이후로 지속적인 국경 관리에 대해 미국 군부는 호평을 하였으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불만투성이었고 2007년 이라크 안보를 위한 주변국 회의에서 시리아도 출석하여 알 카에다가 100여회의 자폭공격을 국경초소에 시도했음을 토로하고 외교 대표단에게 자국의 국경을 시찰하도록 허용하였고 시찰단이 국경의 관리에 대해 호평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계는 계속해서 불만을 쏟아냈다.

이것은 시리아가 근본적으로 친 이란, 친 러시아, 친 하마스/헤즈볼라, 반 이스라엘이라는 외교 기조를 버리지 않은 데에도 이유가 있었다. 특히 미국은 시리아가 헤즈볼라에 계속해서 자금과 무기를 지원하는 것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졌으며 시리아를 테러 지원국으로 지정하기도 했다. 시리아도 외교와 첩보에서 미국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데도 시리아의 외교적 처지를 이해해주지 못하고 무조건적으로 미국의 방침에 따라줄 것만 바라는 미국 정계에 실망하고는 협력을 중단했다. 미국은 한편 시리아가 핵개발을 한다며 비난의 자세를 높였고 결국 이스라엘이 2007년 9월 시리아의 핵시설이라고 주장하는 알 키바르의 건물을 폭격해버림으로써 양자의 관계는 도로 소원해졌다.

터키와는 본래 소원한 사이였다. 하타이주를 둘러싼 영토분쟁과 특히 시리아의 농업의 명줄을 쥐고 있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의 수자원을 터키가 통제하고 있는 문제, 쿠르드족 문제로 인해 1990년대 양국은 군사적 긴장상태를 유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총리의 취임 이후 그의 친 아랍, 반 이스라엘 정책으로 인하여 급격한 정치 경제적 접근을 이룩했다. 2004년 1월 바샤르 알 아사드는 터키에 공식 방문하여 정부 각료들과 회담하고 긴장관계를 크게 완화시켰다. 군사 합동훈련과 국경지대 지뢰제거에 대한 협력, FTA체결 등이 이루어졌고 바샤르 알 아사드는 아랍국가들의 왕따를 대신할 새로운 경제 정치적 공동체를 구상하였으며 지중해, 흑해, 카스피해, 페르시아만을 아우르는 사해공동체를 구상하였다. 이는 시리아 이란 터키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통해 경제 정치적인 발전과 안전망을 구축하려는 시도였다. 2009년 10월에는 고위급 전략회의를 통해 비자면제 협정이 체결되었고 또 2010년 5월 터키 소속 가자지구 지원 선박을 이스라엘이 격침시키자 터키는 이스라엘과의 군사협력을 중지함으로써 시리아와의 관계는 매우 밀접해졌다. 그러나 현재는 시리아 내전에서 터키가 반군을 지지하고 쿠르드를 저지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함에 따라 관계가 얼어붙었다.

레바논에 대한 외교는 분명한 실책으로 평가된다. 시리아의 영향력은 원래 압도적이었다. 시리아와 레바논은 원래 같은 국가라고 해도 될 정도로 친인척 관계가 밀접하기도 했지만 레바논 내전 때부터 시리아가 군대를 파견하였고 시리아의 정재계 인사들이 현지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거의 속국 수준의 영향력을 발휘할 정도였다. 젊어서 사우디아라비아로 이주하여 왕의 총애를 받아 큰 부를 획득하고 1992년부터 1998년까지 레바논 총리를 맡은 라피크 하리리는 본래 시리아 정부 인사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하페즈 알 아사드의 동지인 압둘 카담 부통령, 시리아군의 히크마트 쉬하비 참모총장, 시리아 주둔군 첩보기관 책임자인 가지 카나안 등이 협력자였다. 그러나 바샤르 알아사드 취임 이후 이들이 레바논에서 자행해 온 월권행위가 점차 드러나자 취임 전인 98년 카담 부통령을 해임하였고, 가지 카나안도 레바논에서의 왕과 같은 행동에 대해 혐오감을 가진 바샤르 알 아사드에 의해 직접 대면하는 위치에서 집사가 대응하는 수준으로 격이 떨어지자 수치심을 느끼고 권총 자살하였다. 이로 인하여 라피크 하리리는 시리아와 밀접하게 연결된 인맥을 대부분 잃어버렸고 바샤르 알 아사드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된다.

한편 2004년 에밀 라후드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오자 시리아는 레바논 정계에 대한 영향력이 추락하고 또 당시 테러와의 전쟁 등의 복잡한 국제정세에 의해 레바논 정계가 반 시리아로 돌아설 것을 우려한 나머지 군사력을 드러내어 대통령 임기를 강제 연장시킨다. 이에 레바논 민심이 크게 반발하고 시위가 벌어지는 가운데 라피크 하리리는 총리 자리를 항의성으로 사임한다. 2005년 2월 14일 새벽 라피크 하리리는 자동차 폭탄 암살로 사망하고 레바논에서는 시리아의 내정 간섭에 반대하는 '시더(삼나무/백향목) 혁명'(Cedar Revolution, ثورة الأرز) 이 일어나 반 시리아 세력이 확대되고 정권도 친 시리아 성향에서 반 시리아 성향으로 바뀌게 되었다. 국제 사회의 반발에 의해 결국 29년간 레바논에 주둔해온 시리아군은 전면적으로 철수했다. 이때 막대한 자본금도 다시 시리아로 회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방 사회에서는 영향력 상실을 우려한 바샤르가 반 시리아의 거두이자 정계의 거물인 하리리 총리를 암살하여 정세를 역전해보고자 했다가 독박을 뒤집어쓴 실패한 도박 정도로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내적으로는 젊은이답게 권력 남용을 혐오하던 바샤르가 정의감에 불타 근시안적으로 주요 인사들을 섣불리 하야시켰다가 통제 불능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 정보국이 독단적으로 사태를 해결하려고 암살사건을 일으킨 것에 대해 분노하여, 군대뿐만 아니라 자본까지 싹다 회수하여 향후 레바논 내정간섭의 여지 자체를 아예 없애버린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4. 시리아 민주화 운동, 시리아 내전[편집]


"우리는 우리 국민을 죽이지 않았다. 미친 놈이 통치하지 않는한, 어떤 정부도 자신의 국민을 죽이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 나는 당신을 믿지 않는다. 알카에다와 연관된 테러리스트들, 종교적 극단주의자, 범죄자들이 폭력을 자행했지, 군인들이 아니다."

- 12월 5일 ABC방송의 유명 언론인 바버라 월터스와 가진 인터뷰 중에서


시리아군이 총알과 미사일, 폭탄을 써도 통폭탄을 사용한다는 건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시리아군은 요리할 때 냄비조차 안 씁니다.[8]



4.1. 서방측 시각[편집]


바샤르 알 아사드는 시리아 민주화 운동 이전에도 무자비한 철권 통치를 했다. 초창기에는 독재가 완화된 것으로 안 시민들이 정치범 사면 검열 폐지 등을 주장하고 나서자 바샤르는 집권 이듬해부터 비판적 언론인과 인권운동가들을 체포하는 등 강압정치로 회귀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바샤르 알 아사드 통치시기에는 시리아 곳곳에서는 비밀경찰이 상주하면서 시민들의 행동을 감시하고, 정치적 반대파라면 자신의 친척이라도 상관없이 숙청하며 정치범들을 고문하고 감금하는 등 인권탄압이 계속되었다. 다만 아이러니한 사실은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을 수호하기 위해 깔아놓은 비밀 경찰과 사복 경찰들이 쫙 깔려 있어서 오히려 중동 국가 중에 치안이 좋기로 소문이 나있을 정도였다. 실제로 시리아로 관광을 갔던 한국인 관광객의 증언에 의하면 한국어로 아사드라는 단어 자체를 거론했다가 시리아 경찰이 이를 알아듣고 사복 경찰이 따라왔다는 이야기가 있었을 정도다.

그래서 시리아는 2009년 인권 단체 '휴먼 라이트 워치'로부터 인권 부문에서 세계 최악의 국가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휴먼 라이트 워치'는 시리아의 인권 상황이 아버지 때보다 더 나빠졌다고 평가했고, 알 자지라 방송은 "시리아 당국이 인권 운동가 등을 계속 체포하고, 웹사이트를 검열하며, 반체제 성향의 블로거들을 구금하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2008년에도 차단했으며 2011년 2월까지 일시적으로 인터넷을 차단하기도 했다. 즉 시리아 민주화 운동은 이러한 아사드 정권의 폭압적인 독재와 시리아 내의 경제난과 여러가지 원인이 겹쳐 아사드에 대한 시리아인들의 불만이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불만들이 한 순간에 폭발하는 사건이 터진다. 출처1 출처2 출처3 출처4 출처5 출처6

2011년 1월 26일 첫 시위가 발생했지만 그냥 흐지부지 끝났다. 이에 2011년 1월 31일 시리아 정부는 SNS에 대한 자국 내 접속 차단을 해제하고 지방 선거 실시와 비정부기구의 권한 확대, 언론 자유를 더 보장하는 미디어법 제정 등의 유화책을 펼쳤다.

그러나 아랍의 민주화 열기는 결국 시리아에도 영향을 끼쳤고 2011년 3월 20일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에서는 1만명의 반정부 시위가 모여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했다. 또한 남부 도시 다라에서도 수천명이 시위를 벌여 무력충돌이 발생했는데 놀랍게도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은 시위가 일어난 첫날부터 실탄을 발포하고 무자비한 강경진압을 단행했고 이 시위에서 최소 1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정치적 자유와 반정부 구호를 외치면서 1973년 선포된 국가 비상사태법의 해제를 촉구했다. 그러자 시리아 보안군은 다시 시위대에 실탄을 발포했고 이 시위에서 최소 4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자 2011년 3월 19일과 20일 열린 희생자들의 장례식에서 또 다시 대규모 시위로 확산됐다. 시위대들은 “우리 순교자의 피는 절대 잊혀지지 않을 것” “우리가 원하는 것은 부패를 끝내는 것”이라고 외쳤다. 기사

2011년 3월 25일에는 국제 엠네스타가 지난 1주일 간 시리아 남부도시 다라를 중심으로 벌어진 반정부 시위로 지금까지 55명이 사망했다고 밝혔으며 "당국이 시위대 탄압에 대한 철저한 진상조사를 약속한지 하루 만에 사나메인에서 보안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수도 다마스쿠스에서는 시위대 일부가 강제 연행됐다"고 전했다. 다라 지역 한 거주민은 5만여 명의 시위대 2011년 3월 24일 부타니아 샤반 대통령 보좌관이 밝힌 개혁 약속을 비난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또 다마스쿠스 인근 두마 지역에서는 수천 명이 시위를 벌이다 보안군에 체포되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시위를 벌이며 아사드 정권의 퇴진을 촉구했다. 기사

이후에도 무자비한 시리아 군의 강경진압으로 인해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고 시위대에 계속해서 실탄을 발포하여 시위대를 사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결국 2011년 3월 29일 시리아 내각이 총사퇴했고 새 내각이 결성될 때까지는 기존 인원들이 그대로 업무를 볼 예정이며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그대로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던 중 2011년 3월 31일 바샤르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는 반정부 시위와 관련해 음모론을 제기했으며, 게다가 예상과 달리 국가 비상사태법 폐지도 거부해 시리아 정국 혼란은 가속화되었다.

심지어 시위대가 요구했던 국가비상사태 해제 결정은 연설에서 말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2011년 3월 중반에 50년 가까이 지속된 국가 비상사태법 폐지를 약속했던 상황이였으며 이 선언 이후에도 시위가 누그러지지 않자 2011년 3월 29일 내각을 해산하고 새 정부를 구성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바샤르 알 아사드가 내각 사퇴 결정을 한 지 고작 하루 만에 입장을 바꿔 사실상 개혁안 제시를 거부한 것이다, 즉 자신은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대놓고 드러낸 것이였다. 이에 시위대는 정부가 어떤 약속을 하든 관계없이 대규모 시위를 벌이겠다고 밝히며 시리아 민주화 운동 사태는 더 악화되었다. 기사 기사2

그리고 더욱 더 시리아 정부군의 시위대에 대한 공격은 더욱 더 잔혹해졌다. 2011년 4월 8일에는 시리아군이 남부 도시 다라에서 수천명의 시위대에 실탄을 발포해 최소한 13명이 숨지고 수십명이 부상당했고, 기사 2011년 4월 8일 반정부 시위 도중 보안군의 발포로 37명이 사망한 사람들을 기리는 2011년 3월 9일 장례 행렬에도 실탄이 발사돼 여러 명이 부상당했다.기사

꽁꽁 묶인 시위대를 무차별적으로 구타하는 장면을 담은 동영상이 공개돼 아사드 정권에 대한 분노가 더욱 확산되었다. 영상에 의하면 두 손이 묶인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폭력이 가해졌고, 발로 얼굴을 차는 것도 모자라 막대기로 피해자를 사정없이 내려쳤으며, 한 보안군은 자신이 한 짓이 자랑스럽기라도 한 듯이 아예 시위대 등 위에서 마구 뛰어서 피해자를 밟기까지 했다. 이러한 정부의 강경진압이 계속되면서 시위대의 분노는 극에 달했으며, 이에 시위대는 바샤르 알 아사드, 하페즈 알 아사드의 동상을 부수며 분풀이를 하며 아사드의 퇴진을 촉구했다. 기사 기사2

2011년 4월 14일에는 시리아 정부가 "시위 진압 땐 한번에 20명 넘게 살해 말라"라는 비밀문건이 공개되기도 했다. 문건에서는 바샤르 알 아사드를 "우리의 최고 존엄"으로 지칭하면서 "이에 도전하는 어떤 행위에도 관용을 베풀어서는 안 된다"고 적혀있었으며, 문건은 대책회의의 목적을 "이집트튀니지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라고 규정하며 시위대를 탄압해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는데 2011년 3월 23일 작성된 것으로 보이며 즉 아사드 정권이 시위 초기에 이미 타협할 생각이 없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기사

심지어 2011년 4월 29일 시리아 보안군에 체포됐던 13세 소년 함자 알 카티브가 고문 치사로 숨진 사건이 벌어져 시위가 격화되었다. 카티브는 반정부 시위에 동참했다가 보안군에 체포됐으며 시신은 그야말로 참혹 그 자체였다. 얼굴은 폭행으로 두꺼비처럼 부어올랐고, 온 몸에서 채찍질 자국이 발견됐으며 손과 발에는 전기고문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다가 배에서는 권총에서 발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1발의 탄환까지 발견됐다. 그것도 모자라 성기 부분이 예리한 흉기로 완전히 잘려나가 있었다. 그러나 소년의 유족들은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 '시신의 상태에 대해 침묵을 지킨다'는 함구의 각서를 썼다고 한다. 이에 더욱 분노한 시민들이 항의하자 더욱 더 강경 진압에 나섰으며 시리아인들이 조직적인 고문 및 학살을 당한다는 보도도 나왔다. 이후 상황은 거의 똑같았다, 시리아 정부군이 탱크를 동원, 민간인 거주지역을 포격하거나 무자비한 강경 대응으로 맞섰다.

이러한 아사드의 무자비한 만행에 수많은 언론과 단체들이 아사드는 학살을 멈추고 당장 시위대와 타협하라는 성명들이 쏟아졌다. 그러나 아사드는 이를 거부하고 더욱 더 강경하고 무자비하게 시위대를 탄압했다. 심지어 민간인 여성들을 성폭행하라고 정부군이 강요했다는 정황까지 나왔다. 기사

바샤르 알 아사드는 2011년 5월 31일 무슬림형제단을 포함해 정치운동단체의 모든 회원들을 사면한다고 밝혔으며 1982년 아사드 대통령의 아버지 하페즈 알 아사드에 대항한 무장봉기를 주도했던 무슬림형제단의 가입은 사형선고를 받을 수 있었지만, 이번 사면조치로 31일 이전에 저질러진 일반 범죄자들에 대한 형량도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기사 그리고 시리아의 집권 바스당이 시위 사태 해결을 위해 전국민 대화위원회를 48시간 안에 구성하겠다고 현지 언론이 보도했다. 친정부 성향의 일간지 알 와탄은 바스당의 2인자인 모하메드 사이드 브크헤탄이 모든 정파와 정치 경제사회 등 각 분야의 인사들이 참여하는 대화위원회를 구성할 것이라고 말했으며 또 대화의 방식 등 구체적인 내용이 48시간 안에 발표될 것이라고 말했다. 기사 문제는 이러한 여러 조치들 이후에도 여전히 시리아인들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후에는 아예 헬기와 탱크를 동원한 강경진압에 나섰다.

또한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은 2011년 6월 20일 개헌을 논의하기 위한 국민 대화를 제안했지만 반정부 시위대에 비난의 화살을 돌리면서 실질적인 개혁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은 이날 시리아 다마스쿠스대학에서 대국민 TV 연설을 통해 "시리아의 미래는 모든 정파가 참여하는 국민 대화에 달려 있다"며 "국민 대화는 헌법 개정이나 새로운 헌법의 제정을 이끌어 낼 수도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번 반정부 시위는 파괴활동가들의 선동에서 비롯됐다"며 반정부 시위대에 대한 비난했으며, 그는 "파괴활동가들이 정권에 도전하면서 부당한 요구를 하고 있다"며 "파괴와 혼란 속에서는 어떤 개혁도 있을 수 없으며 파괴활동가들을 고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기사

아사드는 현재의 시위 사태는 소수 '난동꾼들'(saboteurs)의 짓이라며, 파괴 활동으로는 개혁을 이룰 수 없을뿐 아니라 경제 활동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고 비난했다.심지어 아사드는 "우리는 자비를 베풀 수 없다. (시위로 인한) 피해는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서 시위대를 "병균"(germs)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에 시리아 시민들은 아사드에 대해 "거짓말쟁이!"라는 함성으로 대응했다. 시민들은 거리로 몰려나와 그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특히 수도 다마스쿠스에서는 수많은 시위대가 거리로 몰려나왔으며, 알레포와 데라, 하마 등 지방 도시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대는 "시리아 민중은 정권 퇴진을 원한다" 등의 구호를 외쳤으며, "우리는 오직 한 가지를 원한다. 정권을 몰아내는 것이다"라고 쓰여진 플래카드를 두르고 행진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특히 다마스쿠스는 전통적으로 아사드 부자에 대한 지지가 높은 지역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는 시리아 민중의 마음이 정권에서 얼마나 돌아섰는지 보여준다는 관측이라고 한다. 기사

심지어 시리아군이 아사드 반정부 시위가 벌어진 마을에 의료진이 접근하는 것을 차단해서 부상자가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저러한 아사드에 대한 평화적 시위 이후에도 이러한 학살을 계속되었다. 이에 바샤르 알 아사드는 절대로 평화적인 방법으로 몰아낼 수 없다는 여론이 강하게 제기되었고 결국 이러한 아사드의 무자비한 탄압은 점차 내전으로 번져 현재 악명높은 시리아 내전이 발발하게 되었다.

물론 시리아 민주화 운동 당시에 써먹었던 고문과 학살을 계속 자행하고 있으며 미국의 경고를 무시하면서 무자비한 학살과 고문 탄압 정책으로 아사드는 현재까지 어찌어찌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시리아 민주화 운동, 시리아 내전 문서 참고.


4.2. 수정주의적 시각[9][편집]


서방측에서는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저항을 바샤르가 무차별 학살로 대응하였고 이로 인하여 전국민적 저항이 내전을 발생시켰다는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사실은 훨씬 복잡한 전개과정을 가지고 있다. 아랍의 봄 정서를 타고 2011년 1월부터 산발적으로 벌어지던 민주화 시위가 있었으며 시리아 남부의 다라(Da'raa)시에서 발생한 중학생 13명의 낙서 사건으로 학생들이 입건되자 3월 18일 3,000명의 시위대가 횡포로 미움을 받던 치안책임자 아테프 나지브(Atef Najib)와 주지사의 해임을 요구하며 행진을 벌이자 당황한 보안군이 발포하여 4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왔다. 시리아 국영 SANA(Syrian Arab News Agency) 방송에서는 시민을 가장한 폭도들이 혼란을 일으키려 하여 보안군이 이를 진압했다는 보도가 이루어졌다. 이런 보도에 의해 분노한 민중들이 19–20일 내내 다마스쿠스와 다라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때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은 지방자치장관인 타메르 히제와 다라 출신의 명망높은 외무차관 파이살 메크다드를 파견하여 장례식에 참여시켰으며 체포되었던 중학생 13명은 즉각 석방되었고, 아사드는 발포명령을 내린 책임자를 사형시켰으며 주지사와 보안책임자 아테프 나지브를 해임시켰다.

하지만 23일 국영 SANA보도의 내용은 다라에서 무장단체가 구급차와 의료원, 보안군을 습격해서 살해했다는 것이었고 이는 정권의 적반하장으로 받아들여져 시위는 홈스와 바니야스 등 지방 도시에도 퍼져나갔고 아사드 대통령은 3월 24일 민주화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여기에는 다당제 도입, 진상규명 약속, 국민들을 옭아매던 비상사태법의 폐지와 시위대에 대한 실탄 발포를 금지하는 훈령이 함께함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이스라엘이나 해외 위성방송(알 자지라)를 비롯한 해외 세력이 시리아를 망치려는 음모를 꾸미고 개입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실탄 발포 금지령이 내려졌음에도 일선에서는 시위대에 대한 총격이 계속해서 빈발하였다. 때문에 다라를 비롯한 전국에서는 여전히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으며 특히 다라 지방에서는 치안군과 경찰서를 습격하는 무장 그룹의 활동 또한 관측되기 시작했다.

아사드 대통령은 3월 29일 무함마드 알 오타리 총리의 내각을 퇴진시키고 4월 16일 신규 내각을 조직하면서 더 확대된 민주화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무국적자 취급당하며 차별대우를 받고 있던 쿠르드족에 대한 시민권의 무조건 부여, 비상사태법의 완전한 폐지, 국민과의 소통 강화 및 부정부패 척결을 약속했으며 4월 21일에는 비상사태법과 악명높은 고등치안재판소를 철폐하고 시위의 자유를 보장하는 법률을 도입했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시위대의 충돌은 진압은 더욱 격화되어 시리아 군대가 출동하여 탱크를 내세워 강경 진압을 시작했다. 아사드 대통령은 배후에서 활동하는 이스라엘과 종교 과격파 세력, 즉 알 카에다와 무슬림 형제단이 암약하면서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며 비판하였다. 여기에 미국은 4월 29일 시리아 정부 간부들에 대한 특별경제재제를 시도하였고 프랑스와 카타르의 언론 알 자지라는 시리아 반정부측 편을 노골적으로 들면서 시위를 선동하였다. 다라에서 행방불명되었다가 시체로 돌아온 함자 카티브라는 소년에 대해서 반정부측은 아사드 정권의 악랄한 고문으로 잔인하게 살해당했다고 주장하며 프랑스와 알 자지라는 이 내용을 곧이곧대로 보도했으나 시리아 정부는 즉시 애도 방송을 편성하며 반박자료를 배포하고 함자 카티브는 총에 맞아 죽은 것일 뿐 신원확인이 안되어 장기간 신원파악을 위해 시체가 보관되었을 뿐이라는 검시보고서를 공개했다.

6월 6일에는 정체불명의 무장 세력에 의해 이들리브 주 지슈르 앗슈구르 시에서 경찰 및 보안군 120여명이 사살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반정부측은 정부군의 무장 진압에 반대하는 탈영병과 정부군 사이의 교전이었다고 주장했으나 정부는 수백명의 반체제 무장군이 정부군과 교전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전열을 정비하고 공격을 가해 지슈르 앗슈구르 마을을 평정하고 1개월 반만에 주변 지역의 치안을 회복시켰다. 이 사태는 최초의 무장단체 등장이자, 시리아 정부군이 정규 군사 작전을 실행한 최초의 사례였다. 이러한 사태에 의해 6월 20일에는 마침내 아사드 대통령이 공개 연설을 통해 시리아 사태에 배후에는 범죄자, 이슬람 과격주의자, 해외 세력, 민주주의 시민이 있으며 민주주의 시민의 요구는 듣겠지만 범죄자는 처벌하고 이슬람 세력과는 싸우겠다고 선포했다. 더불어 시리아 내부에서 이슬람 보수파의 거두로 정권에 의해 온갖 불이익을 받았던 무슬림형제단의 차별대우를 철폐할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7월 8일 하마(Hama)시에서는 최대규모인 시위대 추산 50여만명의 시위대가 거리로 나왔으며 미국과 프랑스 대사는 시리아 정부의 동의 없이 하마를 방문하여 시위대를 격려했다. 시리아 정부의 항의를 무시하자 정부를 지지하는 다마스쿠스 시민들이 모여 프랑스와 미국 대사관, 그리고 알 자지라가 반정부 왜곡보도를 한다면서 카타르 대사관에 돌을 던지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시위에 대한 정권의 강경한 자세에 의해 9월 들어 시위는 눈에 띄게 줄어들어 치안도 안정권에 접어들었다. 아사드 대통령은 국민화해를 위한 국민대화를 출범시켰다. 하지만 각계각층의 출석에도 불구하고 야권세력의 불참 선언에 의해 큰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12월 19일에는 아랍연맹의 요구를 받아들여 국제감시단의 활동을 허락했다. 감시단장 모하메드 다비가 시리아의 내부 상황이 평온하다는 보고를 올리자 아랍연맹은 이를 부정하였고 감시단의 활동기간을 1개월 연장하며 아사드 대통령이 파루크 샤라아 부통령에게 위임하고 하야할 것을 요구했다. 아사드 대통령이 이를 거부하자 아랍연맹은 감시단을 철수시켰다.

2012년 2월 26일 전체 유권자의 57.4%가 참여한 국민투표를 거쳐 27일 비준된 신 헌법에는 바트당의 지도적 권위를 부정하고 다당제와 대통령 임기를 7년 2선제로 제한하는 신규 헌법을 통과시켰으며, 이런 일련의 행동은 아버지인 하페즈 알 아사드 대통령 시대와 비교하면 상상도 못할 정도로 선진적인 법안이었다. 5월 7일에는 신 헌법에 의거한 국민의회 총선거가 이뤄졌으며 투표율 51.26%로 총선이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2012년 이후부터 기존의 시위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형태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2011년 12월 23일 아침 10시 치안본부 건물 앞에서 벌어진 2대의 차량에 의해 벌어진 폭탄 테러로 44명이 사망하였고 2012년 1월 6일 다마스쿠스 교외에서도 같은 형태의 폭탄테러가 벌어졌다. 2월 10일 알레포의 치안 당국을 노린 자폭 테러가 발생하자 자유 시리아군이 자신의 전과임을 발표했으나 2012년 3월경 알 카에다가 이 작전들이 자신의 소행임을 발표했다. 5월 10일에도 400명의 사상자를 내는 자폭 테러가 발생했으며 알 카에다가 자신의 소행임을 발표했다. 다마스쿠스를 비롯한 시가지에서의 자폭 테러와 2012년 7월부터 수준이 다른 조직화된 무장 공격과 더불어 시리아 정부에서는 "알 카에다 테러리스트" 들이 본격적으로 개입했다면서 강경 대응책을 천명했다. 2012년 7월 말에 마침내 반군 세력이 수도 다마스쿠스에 전면 공격을 개시함으로써 시리아 민주화 운동은 내전으로 확대되었다.


4.2.1. 아사드와 민주화 운동의 이면[편집]




알레포의 민주화 사태의 이면을 증언하는 천주교 신부, 시민, 여대생 등의 증언과 영상을 취록한 Aleppo Earthquake 다큐멘터리.

시리아 민주화 운동을 대하는 바샤르 알 아사드의 행동은 얼른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바샤르 본인은 시위대의 안전을 보장하고 민주주의 개헌을 약속했으면서도 시위의 책임을 범죄자, 이슬람 원리주의자와 해외 세력에게 돌리며 보안군의 강경 진압은 하나도 완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갈수록 무장 진압의 수준이 증가하였으며 내전으로 비화되기 전부터 대규모 교전이 벌어질 정도였다. 이런 이유로 반정부측은 아사드가 겉과 속이 다른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하였으며 서구 국가의 인식도 이와 다르지 않다.

여기에는 복잡한 내막이 있다. 흔히 바샤르 알 아사드를 무소불위의 권세를 가진 철권 독재자로 여기며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태의 통제권이 아사드에게 있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바샤르는 단지 바트당 세력의 한 축일 뿐이다. 대통령으로써 구심점이기는 하지만 군부를 장악한 동생 마헤르 알 아사드, 그리고 바트당 보수파의 견제를 받으며 이들과의 협의를 통해 정책을 꾸려나간다. 바샤르의 모친 아니사 마후로프의 친족이며 시리아 통신회사인 시리아텔을 운영하는 부패한 사업가로 알려진 라미 마클루프가 뉴욕 타임스와 2011년 5월 인터뷰한 내용 중 "정권 중추부는 가일층 결속을 굳게 하고 있으며 대통령이 최종 결단을 내리지만 실질적으로는 합의제이며 모두가 결정하고 있다" 라는 내용은 그것을 잘 말해준다. 실제로 바샤르의 언급과는 반대로 마헤르가 이끄는 군부는 과격 진압을 시행하여 대통령의 방침을 대놓고 무시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어 시리아의 정치지형을 잘 아는 관찰자들은 바샤르가 권력을 잃은 것이 아닌가 추정하기도 했다. 즉 바샤르 알 아사드는 시리아의 대통령으로써 정권의 대표자이기는 하나 다른 정권 구성체들을 제압하고 통제할 만큼의 권력까지는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바트당에게 있어서 최대의 현안은 정권 보위이며, 이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그 점에서 바트당은 강경 대응을 할 만한 여러 이유가 존재했다.

일단 2015년에도 공고한 반군 거점인 시리아 북부 알레포 지방은 바트당의 불구대천의 원수 무슬림 형제단의 주요 거점지역이었다. 바트당 집권 이후 사회주의 경제정책에 의해 알레포 지방의 대지주 플렌테이션 농업은 무상 토지 몰수에 의해 완전히 주저앉았고 알레포 지역의 유력자들은 바트당에 반대하는 무슬림형제단과 협력하였다. 이미 오스만 시대부터 알레포와 다마스쿠스는 따로 돌아가는 지역이었을 뿐인데 사이크스-피코 협정의 부산물로 인해 시리아라는 국가로 독립한 것일 뿐이었다. 이런데 다마스쿠스의 정부에 의해 알레포 지역이 큰 피해를 입었기에 알레포 지역은 원래 반정부적인 정서가 강했다. 1982년 하마 사태 이후로 시리아 정부는 무슬림형제단에 대해 강경한 자세를 취하여 오랜 기간 무슬림형제단은 고개를 들지 못했지만 2008년부터 바트당 정권은 무슬림형제단의 영향력이 점진적으로 강해지는 것을 포착했다. 2008년 7월 다마스쿠스 교외 사이드나야 교도소에서 벌어진 무슬림형제단 수감자들의 폭동은 생각외로 조직적인 단체 활동과 외부와의 연락 흔적이 발견되어 치안당국에 충격을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2009년에는 여성들이 전신을 덮는 전통의상 니캅을 입고 외출하는 빈도가 늘어나고 무슬림형제단의 활동범위가 늘어난다는 첩보가 있었다. 2010년에는 알레포 시에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카지노가 들어서자 이슬람 보수파들은 율법에서 금하는 도박행위를 공공연히 하는 곳을 허가해준 정부에 더 큰 반감을 품기 시작했다.

결국 2011년 민주화 시위를 맞이하여 알레포, 홈스, 하마에서 대규모의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고 바트당 정권은 이들의 배후에 무슬림 형제단이 존재하고 있다고 파악했다. 무슬림 형제단은 전임 대통령 하페즈 알 아사드를 암살하려고 시도했으며 바트당의 이념인 세속주의와 정면 충돌하는 이슬람 원리주의 샤리아 통치를 추구하는 집단이었으며, 절대 타협이 있을 수 없었다. 여기에 위키리크스에서 공표된 레바논 베이루트 주재 미 대사관 전문 내용 폭로에 의하면 암살당한 라피크 하리리 전 총리의 차남이자 2011년까지 레바논 총리였던 사드 하리리가 미 대사에게 아사드 정권을 끌어내리고 무슬림형제단 정권을 세우는 것이 낫다고 주장했다고 하는 등 해외 세력이 무슬림형제단을 지원하는 증거도 포착되었다. 이것이 바샤르 알 아사드로 하여금 이슬람주의자가 사태의 배후라고 주장하게 만든 숨은 원인이었다.

더군다나 시위가 모두 평화 시위였던 것도 아니고 지속적인 교전은 계속해서 발생하였다. 2012년 봄 자국의 보도방침에 항의하여 사임한 알 자지라 베이루트 지국장에 의하면 이미 시위 초반인 2011년 4월 일련의 무장 그룹이 레바논 국경을 넘어 시리아로 넘어가는 것을 목격했으며, 5월경에는 정부군과 교전하는 현장을 보고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또 휴먼 라이트 워치가 2012년 3월에 밝힌 바에 의하면 2011년 9월 이후로 시위대의 폭력적인 경향이 극대화되었다고 말하고 있으며, 주시리아 일본 대사를 역임했던 구니에다 마사키는 2011년 8월 자신의 현지 친구의 조카가 현지 반체제 세력에 붙들려 시민 5명을 총살했다는 거짓 자백을 강요받고 참수당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러한 반체제 무장그룹의 활동이 바샤르 알 아사드가 범죄자라고 언급한 자들의 실체였다.

또한 2015년 12월 정부가 장악하지 못하고 있는 시리아 남부 다라(Da'raa)지방은 민주화 시위 때부터 수많은 사건의 중심지였다. 이곳은 원래 요르단의 아랍 유목민들과 같은 부족민들의 지역이었고 이들 입장에서는 그냥 양치고 살았는데 갑자기 멀쩡한 땅에 국경선을 그어놓고서는 반 강제로 시리아 국민이 되어버린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시리아가 독립하여 정부를 수립한 이후에도 부족적인 독립성을 항상 유지하고 살았으며 요르단과 꾸준한 교류를 해왔다. 그래서 다마스쿠스 정부의 통제를 거부하는 정서가 있었으며 2011년부터 민주화 시위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들은 본질적으로 유목 부족이며 자신들끼리의 단합력이 매우 뛰어나 초반에 진압하지 않으면 수복이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특히 2011년 민주화 시위가 격화되면서 시리아 정부 비난에 앞장섬은 물론 반정부 세력을 반군화시켜 내전으로 몰아간 해외 세력의 존재도 절대로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카타르와 터키는 바샤르 알 아사드를 물심양면으로 돕고 정치 경제적 교류를 아끼지 않는 우호국가였으나, 시아파 정권으로 이란 편을 들던 아사드 정권을 끌어내리고 수니파 정권으로 교체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시리아 반체제 세력을 집중적으로 지원하였다. 사우디아라비아도 입장은 같았지만 특히 사우디 국적을 가지고 레바논 총리로 활약했던 라피크 하리리 총리를 바샤르 알 아사드가 암살했다고 보았기에 시아파 바트당 정권을 끌어내리기 위해 카타르, 터키와 보조를 맞추었다. 이들은 아랍연맹의 감시단을 시리아가 수용할 것을 요구하였고 감시단의 활동 결과 시리아는 안정적이라는 보고가 나오자 카타르 국왕이 말도 안된다고 분노하며 아랍연맹 군대의 파병을 공공연하게 제시할 정도였다. 심지어는 바샤르 알 아사드에게 부통령에게 위임하고 퇴진할 것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카타르는 자국의 언론사 알 자지라를 이용하여 대대적인 흑색선전에 돌입하였고 이는 프랑스의 France 24 방송 등도 마찬가지였다. 미국도 대사가 직접 시위현장을 방문하고 시위대들을 격려하는 등 심각한 외교적 결례를 범하였다. 이로 인해 당시 아랍민중들과 서구인들은 바샤르 알 아사드 정부가 이집트처럼 순식간에 무너질 거라고 생각했고 시위가 쓸데없이 장기화되다가 내전으로 이어지는 일차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이것이 바로 바샤르 알 아사드로 하여금 시리아를 음해하기 위한 해외 세력이 존재하며 이들이 시위를 조장한다고 주장하게 만든 원인이었다.

이러한 위험이 민주화 운동 당시에는 드러나지 않았으나 바트당과 바샤르 알 아사드는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해외 세력, 이슬람 세력, 범죄자를 논하였으나 당시에는 이러한 세력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기에 적반하장으로 책임을 떠넘기는 행동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리고 위험을 함께 인지하되 바샤르와 바트당 보수파, 군부의 수장 마헤르 알 아사드의 방침은 각기 일치하지 않았다. 바샤르는 정치적인 해결, 바트당과 군부는 타협 없는 조기 진압이었다. 그래서 바샤르는 개정헌법을 통과시키고 총선을 하면서도 바트당과 군부는 강경 진압을 고수하는 서로 손발이 안 맞는 듯한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2015년 12월 기준 이러한 언급들은 최악의 형태로 현실화된지 오래이다. 시리아 북부 이들리브, 알레포 지방을 장악한 최대 실력을 갖춘 이슬람주의 반군 이슬람 전선(Islamic Front)은 무슬림형제단에서 출발한 조직이다. 남부 다라 지방은 부족들이 연합하여 자유시리아군 남부전선을 결성하였으며 부족적 단합력을 바탕으로 수차례의 정부군 공세도 어렵잖게 막아낸 전력이 있었고 2015년 후반기 공세에서 정부군이 승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다수의 지역을 남부전선이 통제하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심각한 형태로 악화된 것은 해외 세력들의 간섭이다. 2012년부터 암약한 해외 지하디스트 세력은 최악의 전쟁범죄와 이슬람 신정국가 건설을 추구하고 있다. 알 카에다 소속 알 누스라 전선,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가 그 대표이다. 터키, 카타르는 투르크멘족 반군, FSA의 조직을 후원했으며 미국, 사우디 등이 반군 조직에 무기와 자금을 공급하여 내전을 장기화시키는 중대한 원인 제공자들이다.


5. 평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바샤르 알아사드/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가족 관계[편집]



  • 아니사 마후로프 (어머니) - 2016년에 사망

  • 부슈라 알아사드 (누나) - 장녀가 아닌 차녀다. 위에 동명의 언니가 있었으나 태어난지 얼마 안되어 사망.

  • 아세프 샤우카트 (매형) - 2012년에 폭탄테러로 사망

  • 부수라 샤우카트 (조카)

  • 마헤르 샤우카트 (조카)

  • 바셀 샤우카트 (조카)

  • 나야 샤우카트 (조카)

  • 아니사 샤우카트 (조카)

  • 바셀 알아사드 (형) - 1994년에 교통사고로 사망

  • 마지드 알아사드 (남동생) - 2009년에 사망

  • 마헤르 알아사드 (남동생)

  • 파와즈 아크라스 (장인)

  • 사하르 (오크리) 알 아크라스 (장모)

  • 아스마 (아크라스) 알아사드 (아내)

  • 하페즈 알아사드 2세 (장남) - 2001년생. 아버지의 민간인 학살행위를 보다못해 2012년 8월 28일 페이스북에 “미국, 빨리 공격하길”라는 글을 올렸다가 사라졌다. 당시 나이는 12세였다. # 이후 2018년 루마니아에서 열린 국제 수학 올림픽에 참여한 것이 확인되었다. 2020년에 미국에서 하페즈를 제재했다. 이는 하페즈가 해외에서 가족들을 위한 통로가 되는 걸 막기 위해서라고 한다.#

  • 제인 알아사드 (장녀) - 2003년생.

  • 카림 알아사드 (차남) - 2004년생.


6.1. 아내[편집]


파일:2G5DAXLRRNYVIPVS5TOHNP42FY.jpg
이름
아스마 알아사드(Asma al-Assad)
생년월일
1975년 8월 11일
학력
킹스 칼리지 런던 (1996년)
신체
170cm, 55kg



영국에서 태어난 시리아의 퍼스트 레이디.

참고로 부모님인 파와즈, 사하르 부부는 시리아의 수니파 명문 가문 출신으로 중동계 영국인이다.

2000년 시리아에서 갓 대통령이 된 바샤르 알 아사드와 결혼했으며, 결혼하기 전에는 J.P 모건에서 투자전문가로 일하기도 했다. 자녀로는 2남 1녀로 아들인 하페즈 2세와 카림, 딸 자인이 있다.

화려한 패션으로 패션잡지 보그(VOGUE)에 실리기도 했으며, 샤넬 선글라스를 쓰고 팔콘900 제트기를 타고 여행을 다닐 정도로 사치스럽다고 한다.

보도된 바에 따르면 수천달러짜리 디자이너 브랜드 제품을 사들이며, 프랑스 파리에서 테이블과 샹들리에, 아마존닷컴을 통해 퐁듀 세트를 주문하는데 10,000파운드(약 18,000,000원)를 썼다는 내용이 공개되기도 했다. 한편 부인이 쇼핑을 즐기는 동안 바샤르 알 아사드는 아이패드로 인터넷에 접속하고 아이튠즈에서 음악을 내려 받으며 여가를 즐기고 있었다고 영국의 가디언지에서 보도했다. 기사

아사드가 가장 밀리던 시기[10]조차도 정신 못차리고 사치에 열중했다고 한다. 오죽 사치가 심하면, 시리아 국민들 사이에서 아사드 부인이 전사자들 시체의 장기들을 밀매해서 해외에서 명품 가방들과 옷들을 산다는 카더라까지 돌아다닐 정도다. 물론 장기는 죽는 순간부터 신선도가 하락해 품질이 떨어지므로 밀매는 불가능하다.

최근 2018년 시리아 대통령실 발 소식으로 근황이 알려졌는데 유방암에 걸려 입원치료를 받고 있다고 한다.

2021년 3월 8일에 아사드 대통령과 함께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영국 경찰이 아스마 알아사드가 테러를 조장했다는 혐의에 대해 예비 수사에 착수했다.#


7. 기타[편집]


  • 표면상 시리아의 유일한 권력자이지만 실제로는 군부를 직접 장악하지는 못하고 공화국수비대 사령관이자 동생인 마헤르 알 아사드가 군부를 장악했으며 이자가 바샤르 알 아사드를 지지함으로써 정권이 성립할 수 있다는, 즉 보이지 않는 연립정권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마헤르 알 아사드는 과격한 성격으로 1999년에는 언쟁중 매형 아셰프 샤우카트를 권총으로 쏴버릴 정도로 자기 행동을 통제하지 못하는 버릇이 있지만 바샤르 알 아사드에게는 잘 따르는 편. 그러나 고집불통이고 감정적이라 바샤르 알 아사드의 시위대 진압 자제명령을 대놓고 무시하며 보안군에게 발포를 명령한 장본인이라는 소문이 있다.

  • 한편 바샤르와 마헤르의 관계를 Good cop & Bad cop 즉 바샤르는 착하고 자비로운 이미지를 유지하고 마헤르가 악역을 도맡아할뿐 둘다 그놈이 그놈이라는 분석도 있다.

  • 가족력인지 키가 190cm로 키가 아주 큰 장신이며, 외국어를 잘한다고 하는데, 영어를 능통하게 구사하고 프랑스어로 일상 대화가 가능하다고 한다. 또한 컴퓨터와 정보통신 쪽에도 관심이 많았다. 1998년 시리아 최초의 웹사이트를 개설했다고 한다.

  • 중동계 인물 중 요르단 국왕 압둘라 2세 처럼 눈이 파란색이다. 슬하의 자식들은 유럽계 백인에 가까운 외형인 편이다. 사실 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타인, 요르단 같은 아랍의 레반트 지역 (이른바 구 로마 제국 지역)[11] 자체가 인종적으로 지중해 인종이어서 아사드나 아사드 자식들도 외형으론 남유럽 백인에 가깝다.

  • 미국 신문 워싱턴 포스트(The Washington Post)의 주간지 "퍼레이드"에서 세계 최악의 독재자 순위 12위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 나이에도 불구하고 30대로 보일 정도로 상당한 동안이다. 오히려 젊은 시절에는 콧수염을 길렀었기 때문에 젊었을 적 사진을 보면 왠지 지금보다 더 늙어보인다.

  • 시리아 내전을 둘러싼 정치적 배경과 민주화 운동의 전개에 대한 국내의 사실상 유일한 책으로 일본 외교관으로써 주 시리아 일본 대사를 역임한 구니에다 마사키가 2011년 쓴 "시리아: 아사드 정권의 40년사''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을 쓴 구니에다 마사키 전 대사는 서방측의 과다한 선전선동으로 시리아 사태의 본질이 흐려질까 우려해 이 책을 썼다고 하며, 시리아 독립부터 민주화 운동에 이르기까지의 시리아의 문화나 국민정서, 정치지형을 설명하고 민주화 운동 이면의 문제들을 서술한 책이다. 아사드 정권도 까긴 하지만 반정부 측의 자기 기준 오점도 꽤나 적나라하게 지적하는 모양. 리뷰1 리뷰2 리뷰3

  • 2012년에 개정된 시리아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 임기가 7년 중임이 되었기 때문에 2014년, 2021년에 연이어 재당선된 바샤르는 2028년까지만 재임하고 대통령직에서 내려와야 한다. 문제는 바샤르가 임기를 끝까지 마쳤다는 것을 가정했을때 과연 2028년에 그가 순순히 물러나겠냐는 것이다. 북한처럼 3대 세습을 하기에는 장남 하페즈 알 아사드 2세가 2001년생으로 아직 어려서 (시리아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35세가 되어야 한다) 중간에 바지 대통령을 내세울수도 있다. 아니면 시진핑이나 에모말리 라흐몬처럼 개헌을 통해 임기 제한을 없애버릴 가능성도 있다.

  • 시리아 최대 통신사인 시리아텔의 소유주이자 시리아 최대 부호인 사촌 라미 마흘루프와 갈등 관계가 있다.#

  • 여타 독재자들이 그렇듯 바샤르 알 아사드 찬양 가요도 있다. 제목은 '알라와 시리아, 그리고 바샤르.' 내지 '우린 당신 사람이오, 바샤르!'이고 강한 중독성과 신나는 뽕짝으로 유명하다. 한글자막.

  • 아내와 코로나19에 확진되었다.# 이후, 본인은 러시아에서 스푸트니크 V 백신을 접종받았다.

  • 스웨덴의 뉴스에서 그에 관한 뉴스를 보도할 당시에 방송사고로 야동이 나와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7.1. 아사드는 ISIL 준동의 원흉인가?[편집]


결론부터 말하면 아사드는 결코 IS 준동의 원흉은 아니다. IS 조직 특성상 IS는 거하게 준동했을 조직이었기에, 아사드가 IS 준동의 원인이라고는 할수 없다. IS는 그 전신이 되는 유일신과 성전1999년에 이미 조직되었고, 이라크에서 미군과 교전하며 이슬람 국가 성립을 그 이전부터 계속해서 시도했기 때문이다. 다만 혼란스러운 이라크 시리아 내전의 영향상 지하조직이던 IS가 대규모 테러리스트로 커진 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아사드 반대파들은 초기에 아사드가 깔끔하게 물러났더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말하나 상술한 친정부 세력의 견해와 같이 아사드가 그냥 물러나면 최대 권력조직인 바트당 군부세력이 살아남으며, 이집트가 무바라크 없는 군부 독재로 회귀한 것처럼 시리아도 아사드 없는 바트당 독재로 다시 돌아갔을 가능성이 높으며 바트당 군부가 건재하면 IS가 감히 등장하지도 못했겠지만, 결국 시리아 정치는 달라지는 것이 하나도 없게 된다. 오히려 바트당 보수파를 숙청하며 온건 정책을 지속해왔던 바샤르 알 아사드가 물러나면 하페즈 알 아사드 시대의 철권통치로 되돌아가게 되며 시리아 국민들의 상황은 더 나빠진다.

내전에서 반군이 승리하는 것을 가정한다 하더라도 단지 아사드와 바트당 없는 내전상황이 지속될 뿐이며 리비아도 카다피를 시민군 세력이 붕괴시켰으나, 현재는 분열로 인한 내전, 그리고 그 틈을 타고들어와 IS리비아 지부가 발흥하였다.[12] 애초에 시리아에는 지역에 뿌리를 내린 야권세력이라고는 알레포를 근거지로 하는 무슬림형제단 뿐이며 이들은 훨씬 크고 견고한 이집트 무슬림형제단보다 세력이 미약하며 샤리아 통치를 근본 목표로 한다. 이런 점 때문에 이미 이집트 무슬림형제단은 군부의 쿠테타 이전에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잃고 엄청난 비난만 받을 뿐이었으며 시리아 무슬림형제단도 결과는 같을 수밖에 없다. 시리아의 세속주의 세력이라는 FSA도 수백개의 민병대 연합체일 뿐이며 그 세세한 민병대 명칭을 보면 이들리브 순교자 여단이니 하는 종교적 색채가 극도로 짙은 민병대들이 아주 많다. 무슬림형제단 계열 반군이 2013년 이슬람 전선(Islamic Front)를 결성하고 자유 시리아군을 탈퇴하여 고작 4–6만명 수준밖에 되지 않는 자유시리아군 내부에서조차 구성 민병대의 수준이 이렇다. 더군다나 내전의 배경에 알레포와 다마스쿠스의 뿌리깊은 지역감정이 있다는 것을 두고 보면 결국 시리아에서 세속주의가 설 자리는 없고 자생 이슬람세력과 해외 지하디스트 세력간의 헤게모니 다툼이 제2의 내전으로 변질되며 IS는 어떻게든 준동할 수밖에 없게 된다.

결국 IS의 발흥은 단순히 바샤르 알 아사드가 권좌를 지키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닌, 시리아의 배경에 의해 발생하는 문제이다.


7.2. 알아사드가 여전히 건재한 이유?[편집]


알아사드는 시민을 살해하고 아동을 학살하며 국민들에게 독가스를 살포하는 사악한 독재자로 알려져 있었으나 내전이 장기간 진행되면서 드러난 정보들을 보면 다양한 이유로 국제사회의 암묵적 승인과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첫째로 민주화 운동 초반만 해도 아사드의 종파인 알라위파에서조차 반 아사드 기치를 내거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자유시리아군이 결성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아사드가 아내를 따라 수니파로 개종하고 알라위를 배신했다'라는 헛소문도 한 몫 했으나, 장기집권과 경제위기에 대한 염증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 군대로 알려졌던 자유 시리아군 내부에 조직폭력배, 수니파 극단주의 정치세력인 알 누스라, 하라캇 아흐라르 알 샴 알 이슬라미야를 비롯 무슬림형제단 계열의 군대가 상당량 포진하고 있었고, 이들이 라타키아 침공작전에서 200명의 알라위파를 학살하면서 종파적 차별주의를 전면에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알라위파들은 아사드 지지로 회귀했다. 이 문제는 아사드 정권과 깊은 관계를 맺은 기득권층 뿐만 아니라 세속주의, 서구화와 자유로운 생활을 추구하는 도시 지역 수니파와 기독교도들에게도 똑같이 다가왔다. 실제로 현재 아사드 지지자들 가운데는 과거 반정부 운동을 했던 사람들도 존재하며, 일부 자유시리아군은 반군끼리의 내분이나 이슬람 원리주의의 확산 탓에 정부군으로 전향한 경우도 있다. 쿠르드족 민병대의 경우 반군 사이에서 원리주의가 확산되자 정부군과 사실상의 동맹을 체결하고 정부군과 함께 싸우고 있다.

둘째로 시리아 사태가 내전으로 발전한 것은 미국, 터키, 카타르, 사우디, 프랑스, 요르단 등이 협력하여 추진한 아사드 하야 프로그램이 주 원인이었다는 사실이 인지되면서부터이다. 기존에는 독재자 아사드가 국민을 학살하자 분노한 국민들과 병사들이 무기를 들고 정부군에 맞서 싸웠다는 것이 원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터키나 카타르, 사우디가 아랍연맹 명의로 다양한 압박과 회유를 가한 사실이 드러나고 조사단을 파견했다가 평온하다는 결과가 나오자 철수시키고 연맹에서 퇴출시키고, 터키는 자유시리아군 창설을 리야드 알아사드 대령을 통해 주도하고[13] 훈련 캠프와 무기를 제공했다. 제일 큰 문제는 카타르는 무슬림형제단 계통을, 사우디는 살라피즘 계열의 자이쉬 알 이슬람을 집중 지원하여 시리아 반군이 원리주의자 일색이 되는 원인을 제공했다. 이에 따라 아사드는 권좌를 위해 국민을 죽인 학살자라는 기존의 인식에서, 해외 세력의 내정 간섭에 맞서 시리아를 지켜낸 수호자라는 이미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 반군을 미국이 지원하기 시작하면서 반미정서가 극도로 강한 시리아 국민들 사이에서는 역시 미국이 이 사태를 일으킨 배후라는 인식이 퍼져나간 것도 아사드 지지가 늘어난 원인이다.

셋째로 러시아나 이란이 영향력을 잃지 않기 위해 무자비한 독재자를 생각 없이 지원한다는 설이 있으나 이란과 러시아는 2013년까지 사태를 관망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심지어 2013년 8월 도우마시 사린가스 살포사건 때에는 러시아가 아사드 대통령에게 "나에게 거짓말을 한다면 관계를 끊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기까지 했다. 그러나 2013년 들어 사우디와 카타르, 그리고 미국의 개입이 전면 부상하며 국제 대리전이 확실시되자 이란은 아프간/파키스탄 난민으로 이뤄진 의용병 부대(리와 파테미욘/자이바니욘)과 혁명수비대 고문관을 파견하고, 러시아도 무기를 지원하기 시작했던 것. 러시아는 2015년 참전 이전까지는 심드렁한 입장이었고 참전 후 전세를 반전시키고 휴전협정을 성사시킨 후 철수하려고 했으나 반군의 실체를 직접 경험하고 국제 지하디즘 세력이 강해진 것을 파악하고는 참전을 연장하여 2017년의 상황에 이르렀다.

넷째로는 결국 어쨌든간에 아사드를 대체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다양한 이권을 가지고 지역 경제권에 개입하여 반 군벌화된 정부군 부대들이나 친정부 민병대들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구심점인 바샤르 알아사드의 존재가 있기 때문이며 아사드가 사망하면 다른 관료나 당 고위간부로는 그들을 통제할 카리스마가 없고 마헤르 알아사드는 성격이 난폭하여 과격 진압을 남발할 우려가 있다. 심지어 정부군은 반군이 항복하면 무기를 가지고 반군 지역인 이들리브나 알레포주로 버스를 태워 보내주거나, 무기를 반납하고 사면을 받아 시리아 정부군 병력으로 편입시키거나 시민으로 돌아가게 해주는 온건책을 쓰고 있기에 반군이 2016년부터 항복하는 사례가 늘어났는데 마헤르 같은 과격분자가 권력을 잡으면 이런 온건책은 폐기되고 반군도 죽기살기로 싸울 가능성이 높다. 바샤르 알아사드가 사라지면 시리아는 수백개의 개별 군벌로 쪼개져버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아사드를 탐탁치 않게 여기더라도 그에 대한 대안이 없다거나, 그가 피해자라는 시각을 가지고 아사드를 지지하기 때문에 아사드는 현재까지도 건재한 것이다. 그가 직접 승용차를 몰고 시찰을 다니는 것도 이런 자신감에서 나오는 것이다.

한편 철저하게 서구 정서에 맞춘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항상 인터뷰에서는 영국식 영어로 대화, 양복을 갖춰입고 신사적이고 부드러운 말투를 고수하며, 서구 언론과 자주 인터뷰를 하고 심지어 이들을 자주 논파해버리기도 한다.논파 모음영상1 영상2 이로 인해 아사드가 오히려 이슬람 극단주의를 저지하고 서구적 가치, 기독교 수호를 한다는 점이 대안 우파에게 좋게 받아들여져 그들의 상징인 페페 더 프로그로 어레인지된 그림도 돌아다닌다. 또한 대안 우파에겐 아사드를 지지함으로써 그들 공통의 적인 오바마, 힐러리를 비난할 수 있다. 정치적 올바름을 외치면서 국제적으로는 이슬람 극단주의를 발흥하게 만들었다는 모순을 지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전이 장기화되고 아사드 이외의 대안을 찾지 못하면서 서방 국가들은 아사드의 즉각 퇴진을 요구하는 입장에서 물러설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미국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자유 시리아군 지원 프로그램을 중단했으며, 프랑스는 주시리아 대사관 재개관을 추진했다는 보도도 있다. 사실 유럽 국가들은 유럽 난민 사태와 끊이지 않는 ISIL 테러 공격으로 ISIL 격퇴와 내전 종결, 평화 정착이라는 급한 불부터 꺼야 할 상황이다. 또한 지리멸렬하고 민주주의보다는 이슬람 극단주의 국가 건설을 선호하는 시리아내 반 아사드 반군 세력들의 현 실정에 그나마 제대로 된 정부의 틀이라도 갖춘 아사드 정권이 그나마 낫다고 주장하는 여론까지 생겨나면서 시리아 정세는 점점 아사드에게 유리해졌다. 그리고 2018년에 들어서서 반군 대부분이 이슬람 극단주의화되고 시리아 정부가 반군 세력을 연이어 패배시키고 내전 완전 승리를 눈앞에 두면서 아사드의 영향력은 그 어느 때보다 시리아에서 확고한 상황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여 서방과 러시아의 관계가 완전히 파탄난 이후에도, 시리아에서 아사드가 계속 집권하는 것은 양측 모두 이해가 일치할 지경이다.

2023년 5월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은 아랍연맹 복귀로 국제무대에 복귀했다. 이 덕에 시리아 내전 역시 아사드 대통령과 정부군의 유리함이 굳건해지고 있다.#

8. 관련 문서[편집]








9.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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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미국과 서방의 제재 탓인지 현재 계정이 폐쇄되었다.[1]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의 경우 대통령 개인 SNS는 아니다. 다만 영부인의 개인 인스타그램 계정은 존재한다. 추정 인스타그램[2] 국내 언론 대부분이 반군 매체인 시리아 인권관측소(SOHR)나 서방측 보도를 그대로 전달하는 경향이 있으나 잘 찾아보면 수정주의적 시각을 가진 기사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3] 초기엔 그런 부분이 유지가 되었으나 내전 이후로는 사실 반인륜적 업보도 꽤나 쌓여서 평가가 애매해졌긴 하다.[4] 완전히 그의 책임만 있다고 하기엔 후술되어있듯 서방권과 주변국의 삽질 등 무리한 어그로도 있었다.[5] 특히 소수종파 부분에서는 과장 좀 보태 시리아의 기독교인들이 다른 중동국가들을 여행해보고 자신들이 있는 나라에서 얼마나 기독교를 보호해주는지에 대해 깨달았다고 말할 정도다. 다만 중동 국가들 특성상 토착 기독교인들이 보호를 받는다는 성향을 무시할 수는 없다.[6] 특히 여성들. 자유 시리아군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에게 결국 주도권을 내주고(물론 이것 역시 알아사드가 정권을 지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들이 설치도록 유도한 부분이 있기에 비판 요소가 되기도 한다) 세속주의 이슬람을 폐기하면서 그나마 빅똥보다는 똥격인 세속적인 아사드를 지지하는 여성들이 많다.[7] 마헤르는 자기 매형 아세프 샤우카트와 말다툼을 하다 격분한 나머지 매형에게 권총 총탄을 쏘아 총상을 입히는 등 정신적으로 문제가 굉장히 많았다.[8] 사실 이것은 통폭탄 사용 사실 자체를 부인한다기보다는 통폭탄이 기존의 폭탄과 다른 성격의 민중살상무기라는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다. 실제로도 통폭탄은 양민학살을 위해 특수제작된 무기가 아니라 단순히 돈 없어 급조해 쓰는 폭탄에 가깝다.[9] 국내 언론 대부분이 반군 매체인 시리아 인권관측소(SOHR)나 서방측 보도를 그대로 전달하는 경향이 있으나 잘 찾아보면 수정주의적 시각을 가진 기사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10] 이 시기에는 푸틴 정권이 서방에게 아사드 축출을 직접 제안했을 정도였고, 곧 있으면 아사드가 러시아 군함으로 도피해서 러시아 군함에 망명 정부를 세운다는 전망까지 있었던 시기였다.[11]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7세기 초까지 무려 700년 가까이 로마의 지배 하에 있었고 그 전에도 300년간 그리스의 지배를 받았다. 1,000년간 남유럽 세력 하에 있었던 것이다.[12] 다만 리비아는 시리아와 다르게 현재 통합정부를 빠르게 구성하여 IS는 대강 리비아에서 축출되었다.[13] 정작 이자는 자유시리아군 사령관 자리를 고사하고 지휘권을 내버리고 도망다니고 있다. 자유 시리아군 항목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