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슈케나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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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디시어
אשכנזים
אשכנזישע יידן
히브리어
אשכנזים
יהודי אשכנז
영어
Ashkenazim
Ashkenazi Jews
1. 개요
2. 분포
3. 역사
3.1. 폴란드 유대인의 황금 시대
3.2. 동부 유대인과 서부 유대인
4. 논란
4.1. 정체성 문제
4.2. 아슈케나짐 가짜 유대인설
4.3. 아슈케나짐-팔레스타인인 동일설
5. 관련 인물


1. 개요[편집]


유럽, 특히 동유럽(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폴란드 등)에 정착했던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표현.

디아스포라 이후 유럽에서 천 년을 넘게 살면서 대대로 혼혈을 거쳐서 외모는 유럽 백인과 별 차이가 없는 사람이 많다. 유대인의 여러 분파가 있지만 아슈케나짐이 전체 유대인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의 주류 분파이다. 오늘날 이스라엘에 재정착한 유대인이나 미국, 혹은 남미 등으로 재이주한 유대인들의 대다수 역시 러시아, 우크라이나, 폴란드 등 동유럽에서 살던 아슈케나짐의 후손들이다.


2. 분포[편집]


파일:Juden_1881.jpg
1881년 중부유럽의 유대인 분포 비율

파일:Jewish_Ethnic_Divisions_map.png
전 세계 유대인 분파 권역
아슈케나짐
세파르딤
독자적 분파
미즈라힘
후(後)아슈케나짐
후(後)세파르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는 약 1,500만 명 안팎으로 전세계 유대인 가운데 90% 가까이를 차지할 만큼 절대 다수였으나, 나치 독일이 동유럽을 침공하면서 벌인 홀로코스트로 인하여 그 수가 80% 정도로 크게 줄어들었다. 현재 전 세계 인구는 1,000만에서 1,120만 명 정도로 추산되며 미국내에 500-600만 명, 이스라엘 내에 280만 명이 거주한다.


3. 역사[편집]


아슈케나짐(아슈케나즈 유대인)이라는 명칭은 성경창세기·예레미야서에 등장하는 '아슈케나즈·아슈크나즈(אַשְׁכְּנַז / Ashk'náz)'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11세기 당시 유럽의 영주들은 자신의 영지에 집단 거주하는 유대인들(게토)을 성경 속 단어들로 엮어서 불렀는데, 마인츠를 비롯한 라인란트 일대의 유대인들에게는 아슈케나즈·아슈크나즈의 이름에서 따온 아슈케나짐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이다.[1] 이후 십자군 전쟁을 거치면서 이 아슈케나짐이라는 명칭은 전 유럽의 상류층에게 퍼져나가게 되었고, 프랑스를 포함한 서유럽 전역에서는 곧 유대인들을 아슈케나짐이라고 부르게 됐다.[2]

원래 유럽은 유대인 인구가 많이 거주하던 지역이 아니었으나, 6세기 이후 동로마 제국에서 유대교를 탄압하자 일부 유대인들이 서유럽에서 그나마 상공업이 가장 발달하고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이 없는 지역인 플랑드르 일대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6~8세기에 해당하는 고대 말 중세 초에는 유럽 기독교계의 반유대주의가 체계화되지 못했기 때문에[3], 도회지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농촌에서 도시로 도망온 기독교인들과 결혼하면서 유대교로 개종시키고 인구를 조금씩 늘려나갔다. 봉건 제도가 확립되면서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과 본격적으로 분리되기 시작한다.

3.1. 폴란드 유대인의 황금 시대[편집]


십자군 전쟁 당시 십자군들은 예루살렘으로 출정하러 가기 전에 가까운 장소의 유대인들부터 학살하고 출발하던 일이 잦았다. 이런 대학살을 피하여 서유럽에 거주하던 유대인 중 상당수가 폴란드로 이주하였다. 1332년 폴란드 왕국의 카지미에시 3세는 당시 폴란드 왕국의 빈약했던 상공업을 부흥시킬 목적으로 유대인 이민자들에게 혜택을 주고 유대인들이 안정적으로 생업에 종사할 수 있는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하였다. 이민 과정에서 반유대주의 폭동이 일어나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 폴란드 왕국은 아무렇지도 않게 유대인 박해와 학살이 종종 일어나던 다른 지역에 비하면 비교적 안전한 지역이기도 했다. 이베리아 반도의 유대인들이 라디노어를 사용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아슈케나짐들은 독일어를 기반으로 하되 히브리어 어휘가 상당수 추가된 이디시어를 사용하였는데, 새로 이주한 폴란드 왕국에서도 상업이나 무역에서 독일어가 흔하게 사용되던 이유로, 동유럽 각지의 유대인들은 모어로 이디시어를 유지하게 되었다.

특히 야기에우워 왕조 시대와 대략적으로 겹치는 1332년부터 1572년 사이의 기간은 폴란드 유대인들의 황금 시대로 불렸다. 14세기 폴란드 왕국이 동유럽에 거대한 영토를 지녔던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동군 연합을 이루고 리투아니아 귀족들이 폴란드인과 동화되어 이해관계가 일치하면서 유대인들은 동유럽 각지로 안정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했다. 특히 지그문트 1세부터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에 이르는 시기동안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유대인의 천국으로 불렸다.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이들을 적극 유치하고 보호했던 까닭은 중세에서 근세까지 동유럽 각국의 발전을 심각하게 가로막던 문제인 인구 부족 때문이었다. 또한 당시 가톨릭이 국교였던 폴란드는 1569년 루블린 조약을 계기로 정교도가 다수인 우크라이나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했는데[4], 이때 폴란드인 이주자를 따라 유대인 이주자들도 우크라이나 각지에 마름 혹은 도시의 소상인들로 정착했다. 스페인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조차 계속해서 의심하고 재산을 몰수한다든지 종교재판에 회부시키자, 적지 않은 세파르딤들이 폴란드로 이주하였다.

결과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일대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일대가 된다. 덧붙여서 아슈케나짐과 세파르딤의 혈통이 나누어지던 11세기 당시만 하더라도 세파르딤의 숫자가 아슈케나짐의 9배로 압도적이었으나,[5] 세파르드 유대인들의 본고장이었던 이베리아 반도를 재정복한 스페인 왕국이 워낙 가혹한 유대인 탄압 정책을 펼친 결과 지속적으로 세파르드 유대인들이 서유럽 및 동유럽으로 이주해나갔고, 16세기 유대인들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세계 유대인 인구의 4분의 3 정도가 폴란드-리투아니아에 거주했다고 한다. 20세기 초반이 되면 11세기와는 정 반대로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의 수가 세파르딤보다 9배 가량 많게 된다. 고대 유대교 학문의 중심지가 바빌로니아의 수라와 품베디타였다면 근세 유대교 학문의 중심지는 폴란드의 크라쿠프와 리투아니아의 빌뉴스가 떠올랐다.

야기에우워 왕조 시절 전성기를 누렸던 폴란드를 중심으로 한 아슈케나짐은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루블린 합동을 계기로 한 나라로 통합하면서 여러차례 격변을 맞이했다. 상술한대로 유대인들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농촌에서 마름 혹은 도시의 소상인들로 정착하면서 루테니아인들의 분노는 폴란드인 뿐만 아니라 유대인에게도 향했다. 흐멜니츠키 봉기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코사크들에게 학살당했으며, 대홍수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영토의 절반을 일시적으로 점령한 러시아는 연방보다 유대인에게 더 적대적이었다. 근세 폴란드와 헝가리 및 동유럽 지역의 상업은 유대인과 독일인들이 양분했었으나, 이후 독일인 상인들이 동유럽 각지에서 유대인들을 누르고 주도권을 더 가져가기 시작했다.

오늘날 아슈케나짐 유대인 중 금발벽안 아니면 이목구비가 동유럽계와 흡사한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아슈케나짐을 하자르 칸국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으나, 폴란드-리투아니아 시절에는 유대인의 권리가 농노보다 높았기 때문에,(심지어 유대인 농민의 경우에도 빈 땅을 개간해주는 대가로 정교회를 믿는 농노들에 비해 세금을 훨씬 더 적게 내는 편이었다.) 부유한 유대인 상인이 현지 농노 여성 사이에서 사생아를 두거나 아니면 코사크들이 유대인 촌락을 약탈하는 와중에 생긴 아이들을 유대교 사회에서 그냥 유대인으로 받아들이는 경우 등등이 많아서 혼혈이 많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정작 하자르 칸국의 구성원 대다수는 하자르 칸국 멸망 이후 유럽으로 이주한 경우보다는 셀주크 튀르크(!)나 아스트라한의 볼가 타타르 등으로 흡수된 경우가 많았다.[6]

3.2. 동부 유대인과 서부 유대인[편집]


18세기 말 폴란드 분할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멸망하고 폴란드 분할이 이루어지면서 많은 유대인들이 프로이센 혹은 합스부르크 제국이나 러시아 제국의 신민이 되었다. 프로이센 왕국의 유대인들은 18세기 말 이후 상당히 많은 자유와 권리를 얻게 되었다. 농노제가 철폐되고 세속적인 부르주아 사회가 자리잡으면서 종교적 소수자들에 대한 사회의 차별이 감소하였던 것이다. 농노제의 철폐가 좀 더 늦었던 오스트리아 제국에서는 그만큼 유대인들의 처우 개선이 늦었다. 1816년 유대인은 프로이센 전체 인구의 1.1%에 불과했으며 1871년에도 1.2% 정도에 불과했다. 프로이센 정부는 유대인들에게 수공업을 권장했으나 유대인들은 이전부터 종사하던 무역업이나 금융업에 종사하던 편이었으며 특히 금융 계통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유대인 고리대금업자에 대한 신화는 어떻게 보면 프로이센 왕국 시절에 생겨났다고도 볼 수 있다.[7] 과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 행상을 하던 유대인들은 프로이센 왕국에서 대거 은행업이나 주식 시장으로 진출하였는데 1882년 기준 프로이센의 금융업, 주식매매 등에 종사자 중 1/5 가량이 유대인이었다. 1880년대 기준 프로이센 대학생의 1/10이 유대인이기도 했다.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아슈케나즈 유대인들은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었으며, 자신이 유대인임을 나타내는 특수한 복장의[8] 착용 및 특수한 세금을 부과받는 것과 같은 차별 대우에 노출되어 있었지만, 계몽주의의 확대와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유대인들 중 상당수는 주류 사회에 동화된다. 이전까지는 아랍인들처럼 부계명을[9] 사용하던 유대인들이 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성씨를 쓰기 시작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 폴란드 분할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프로이센 영토의 유대인들은 상당수가 도시 부르주아지로 성장해나갔으나, 러시아 제국령 우크라이나 일대의 유대인들은 러시아 제국의 산업 발전이 지체된 만큼 부르주아지로 성장하는 속도도 늦었다. 물론 폴리투 내 유대인 소작농들의 경우 새로 황무지를 개간하고 정착한다는 조건 하에서 현지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 농노들보다 훨씬 지대 부담이 적은 편이었으나, 포그롬이 활발해진 이후 사정이 변하였다.

근대 동유럽의 시골에 살던 지주들은 도시에 있는 유대인 부르주아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위협한다고 의심했으며, 라트비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의 농노들은 유대인들이 독일인, 폴란드인의 앞잡이라고 여기며 증오했다고 한다. 산업혁명 시대가 되자 농촌 인구가 도시에 빈민으로 유입되면서 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10] 19세기 초반에는 동유럽 유대인 상당수가 보드카 양조산업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지역 사회 알코올 중독과 관련한 폐단의 원인으로 몰리곤 했다. 19세기 말 키시너우 포그롬을 계기로 러시아 제국 출신 유대인 상당수가 러시아 제국을 떠나 해외로 이민하게 되었다. 하지만 러시아 출신 유대인들은 유럽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고 싶어도 현지 토박이 유대인들의 차별로 고초를 겪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키시너우 포그롬 이후 영국으로 이민한 유대인들의 사례를 들 수 있다. 러시아 제국 출신 유대인 이민자들은 기존에 이미 영국 사회 내 자리잡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가난뱅이라고 멸시와 차별을 받았다. 당시 영국 정부는 러시아에서 이주해온 유대인들을 골칫덩어리로 여기고 영국령 우간다 계획 등을 세우기도 했는데, 여기에는 비러시아 출신 유대인들의 입김이 다소 반영되었다. 프로이센이나 프랑스 등에서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현대의 아슈케나짐 유대인 사회 내에서도 러시아 제국/소련 출신 이른바 동부 유대인과 서유럽의 아슈케나짐 유대인 사이의 갈등은 적지는 않은 편이다. 1970년대 소련의 유대인 이민 허용이나 소련 붕괴 이후 새로 미국이나 이스라엘로 이민한 아슈케나짐 유대인들의 경우 아슈케나짐 유대인은 다 부자일 거라는 편견과 다르게 상당수가 빈곤층이다.

이러한 연유에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 러시아 제국 출신 유대인들은 비교적 동유럽 출신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덜했던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데, 이들은 오늘날 미국 유대인들의 직계 기원에 해당한다. 자세한 내용은 미국 유대인 문서 및 우크라이나계 미국인, 벨라루스계 미국인 문서 참조. 한편 이렇게 이주한 유대인들은 빈민들이 많았기 때문에 범죄에 금새 유혹되어 유대인 마피아폴란드 마피아 중에 아슈케나짐 유대인 출신들이 많다.

벨라루스나 우크라이나 출신 유대인들은 해당 지역의 벨라루스인과 우크라이나인 민족주의자들과 서로 반목이 심했던 편이었고, 당시 미국으로 이주한 동유럽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동유럽에서 찾는 것을 거부했다.[11]

서유럽은 상황이 비교적 나았던 편이었지만 유럽 내 자유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프랑스에서마저 20세기 초반 사회 전체를 뒤흔든 드레퓌스 사건이 터지면서 아슈케나짐 사이에서는 시오니즘이라는 사상이 크게 유행하게 된다.

1930년 초반 당시 아슈케나즈 유대인의 수는 대략 1500만 명 정도로 추정되었으며, 이 중 900만여 명 가량은 유럽에 거주하고 있었다. 폴란드 제2공화국[12]에는 330만여 명, 소련에는 300만여 명, 헝가리와 루마니아에는 120만여 명, 독일에 52만여 명, 오스트리아에는 18만여 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나치에 의해 자행된 홀로코스트는 이 900만 유대인 가운데 약 6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그 중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유대인들이 밀집해있던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우크라이나 일대에서의 피해가 심각했다.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에서는 전체 유대인 중의 90~91%가 쓸려나갔다.

홀로코스트 이후 아슈케나즈 유대인들의 중심지는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동됐고, 현재는 아슈케나즈 유대인의 숫자는 약 1천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 가운데 미국에 거주하는 아슈케나짐이 대략 500만 정도이며, 이스라엘 본토에 거주하는 아슈케나즈계 혈통이 300만 정도, 나머지 국가에 거주하는 아슈케나짐들을 도합한 게 200만 정도로 계산된다. 또한 홀로코스트로 인하여 아슈케나즈 유대인들의 문화는 말 그대로 뿌리뽑히게 되는데, 특히나 약 500만 명의 화자를 가지고 있던 이디시어는 사실상 사어가 된다. 다행히도 문헌이나 음성 자료들이 상당히 많이 남아있어서 보존은 가능하다고 하다.

4. 논란[편집]



4.1. 정체성 문제[편집]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아슈케나즈 유대인을 판가름하는 구분은 일반적으로 (서유럽에 거주한다는 배경 하에) 유대교 신앙의 유무여부였다.[13] 하지만 19세기 민족주의가 전파되면서 상황이 복잡하게 전개되는데, 폴란드 등의 동유럽은 근대까지 민족이라는 개념이 희소했던 만큼, '같은 언어를 쓰면 같은 민족이다!'라는 소위 언어 민족주의가 이 당시의 주류 사상이었고 그 결과 아슈케나짐 사이에서도 이디시어 구사 여부가 중요한 기준으로 자리잡게 된다. 19세기 후반 혈연적 민족주의가 정착한 이후에는, (종교를 공유하는) 문화적 민족 개념이었던 아슈케나즈 유대인 역시 혈연적 민족으로 변모하는데, 혈연적 민족도 아니었을뿐더러 오랜 통혼으로 인하여 외양으로 아슈케나즈 유대인을 다른 현지 유럽인과 구분하는게 사실상 불가능했고[14], 나치의 경우에는 뉘른베르크 법을 통하여 4대 조상 기준으로 50% 이상 유대인의 피가 흐르면 유대인으로 분류했다.

4.2. 아슈케나짐 가짜 유대인설[편집]


아서 쾨슬러가 1976년에 "제 13의 지파" 책을 저술하면서 해당 논쟁이 벌어졌는데 당시 아서 쾨슬러는 아슈케나짐은 다른 유대인에 달리 독창적이고 유럽에서 기원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저술했다. 이는 반유대주의를 반박할 의도로 저술했다.[15]

하자르 왕국이 유대교를 국교로 삼았다는 사실을 근거로 현대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의 주류인 아슈케나짐은 하자르 왕국의 후손이며 모두 가짜 유대인이라고 주장이 존재한다. 아슈케나짐 유대인이 외모가 중동인들보다는 오히려 동유럽인에 가깝고 금발벽안이 많다는 게 이유이다. 이스라엘 작가 슐로모 산드가 이 주장을 계속 하고 있다.하지만 이러한 주장이 아슈케나짐과 세파르딤 간의 해묵은 갈등에 휘발유를 붓는 위험한 주장으로 여겨지면서 하자르 왕국에 대해서도 언급이 자제되는 분위기이다.

여하튼 90년대 이후 DNA 분석기술이 실용화되면서 모든 유대인 지파들은 정도는 차이의 있을지언정 다들 중동지역의 조상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주장이 통설로 자리잡았다.(단 이게 중동 유대지파에 한정되었다는 근거는 없다. 유대인들의 하플로그룹은 중동 전역 및 남유럽에서도 흔히 보이는 유전지표이기 때문이다.)[16] 하자르인은 튀르크어를 사용하는 사실상의 슬라브족으로 봐야 하며, 이들의 직계 후손으로 여겨지는 것은 아슈케나짐이 아니라 우크라이나 크림 반도에서 리투아니아에 걸쳐 극소수로 존재하는 크림 타타르어를 사용하는 카라임 유대인[17] 크림차크(Krymchaks) 유대인이다. 다만 크림차크 유대인과 카라임 유대인들의 수가 수천명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그 많은 하자르족이 다 어디로 갔냐는 의문은 사료 부족으로 인해 아직 풀리지 않고 있다. 카프카스의 소수민족 카라차이인이나 쿠미크인들이 자신들이 하자르인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지만 근거가 부족하다.

따라서 최근에는 이러한 학계의 통설에 반박하는 일부 주장이 나타났다. 2012년, 유대인 유전학자인 Eran Elhaik는 아슈케나짐 유대인의 기원이 하자르 제국의 유민들에 있다는 반론을 폈다. 엘하이크는 아슈케나짐 유대인의 유전자 분석을 통해 아슈케나짐 유대인의 유전자가 중동에서 기원하지 않았으며 투르크계-이란계-슬라브계의 혼혈인 하자르에서 유래했다는 가설을 내놓았다. Haplogroup Q-L275은 중앙아시아에서 기원한 유전자인데, 이 유전자가 상당수의 5%의 아슈케나짐 남성에게 발견되기 때문이다.#

사실 위의 아슈케나지 유대인이 하자르 제국의 유민에게 기원했다는 엘하이크의 주장은 이미 상당수 연구자들에게 유전학적으로 가루가 되도록 까인지 한참 오래다.[18][19]

아슈케나지 유대인의 혈통에 대한 2017~현재까지의 최신 연구결과를 종합해보자면 아슈케나지 유대인의 조상 기원 중 대략 50%는 중동(주로 부계혈통), 34%는 남유럽(시칠리아인과 남스페인인, 주로 모계혈통), 16%는 서유럽과 동유럽이 약 반반을 차지한다. 따라서 아슈케나지의 유대인의 절반 정도는 중동[20]에게서 유래한 것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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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아슈케나짐-팔레스타인인 동일설[편집]


츠비 미시나이 등 일부 유대인들은 시오니즘이 성행한 20세기 초에 팔레스타인인을 보고 그들은 고대에 히브리인이었으며 세월이 흘러 무슬림 지배층의 압력으로 무슬림이 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츠비 미시나이는 유전학적 증거를 제시했다.

우파 시오니스트들은 제3차 유대-로마 전쟁으로 이스라엘의 모든 유대인들은 추방당했고 그 이후로 1700년동안 공터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에 좌파 시오니스트들은 사실이 아니라고 그 당시에도 반박했다. 하드리아누스가 내린 유대인 추방령은 예루살렘의 유대인이 대상이지 이스라엘 전체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좌파시오니스트들은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레반트에서 지리적으로 접근성이 높고 로마 제국의 행정이 못 미치는 중부유럽쪽으로 갔을 것으로 추정했고 이들이 아슈케나짐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21] 2차 유대-로마 전쟁 이전에 유대교를 믿던 세파르딤, 미즈라힘은 이 사건과 연관이 없기 때문에 유전학적으로 팔레스타인인들과 동떨어진 결과가 나온 것이다. 아슈케나짐은 현재 팔레스타인인과 달리 금발벽안이 많은 건 천년 이상 현지 유럽인들과 혼혈해왔고 개종자들의 후손도 아슈케나짐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5. 관련 인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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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고로 세파르딤의 어원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바디야서에서 이베리아반도를 지칭하는 세파라드·스파라드(סְפָרַד / S'farád)라는 표현이 세파르딤으로 변화하게 된 것.[2] 원래 프랑스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표현은 열왕기에 나온 차르파팀(צָרְפָתִים / tsarfatím). 이 영향으로 현대 히브리어에서는 프랑스를 차르파트(צָרְפַת / tsar'fát)라고 부른다.[3] 사실 유대인 차별이 극심했던건 남유럽이나 프랑스, 동유럽 등의 이야기고, 중부유럽이나 북유럽, 네덜란드에서는 현지인들이 유대인들과 잘만 융화해서 지냈다. 19세기 영국에서는 유대인 출신 수상인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배출되기도 했고,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홀로코스트의 총본산으로 악명을 떨쳤던 독일도 아이러니하게도 19세기 초까지는 유대인과 현지의 게르만계 원주민들이 서로 소 닭보듯이 별 일없이 지냈던 곳이다.[4] 처음에는 엄연히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토였던 우크라이나 일대는 루블린 조약 이후에는 대부분 폴란드 왕국의 직할령으로 넘어가며,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리투아니아인 지주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폴란드어를 사용하게 되면서 아예 폴란드인으로 완전히 동화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5] 다른 통계 추정에 따르면 아슈케나짐 인구는 11세기 기준 전체 유대인 인구의 3% 정도에 불과했다.#[6] 사족으로 하자르 칸국의 후예임을 주장하는 유대인 민족으로 카라임 유대인이 있는데, 이들도 중세 초 멸망한 하자르 칸국의 직계 후손보다는 중세 말 십자군 전쟁 시대 이후 레반트 지역에서 크림 반도로 이주한 유대인들의 후손으로 추정되고 있다.[7] 비교하자면 중세 이베리아 반도의 세파르딤들도 금융업을 하였으나 이들의 금융업 규모는 비교하자면 제3금융권(…) 수준으로 이탈리아 피렌체나 카탈루냐 바르셀로나 등의 금융업에 비교도 되지 않는 영세한 수준이었다.[8] 일반적으로 뾰족한 모자를 착용하였다. 다윗의 별이 사용되기도 했지만 이 표식을 가장 애용한 것은 훗날의 나치 독일.[9] 단순히 부계 성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을 변형한 성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아버지의 이름 앞에 ~의 아들이라는 뜻의 벤~을 붙여 성처럼 사용했고, 아랍인들은 같은 의미로 남자는 빈~, 여자는 알~을 붙이며, 벤과 빈은 어원적으로 같은 말이나 히브리어의 'e' 모음이 아랍어에서는 'i'로 변형되었고, 이외에 어원이 같은 다른 단어도 히브리어의 'e'가 'e' 모음이 없는 아랍어에서는 'i'가 되는 경우가 많다. 유럽에서도 러시아에서 (이 경우에는 성씨로 쓰는게 아니라 미들네임으로 쓰는 거지만) 아버지의 이름에 -ович를 붙이거나, 아일랜드계 성씨에서 자주 보이는 O'가 대표적.[10] 원래부터 유대인에 대해 악감정을 가지고 있던 농촌 인구가 도시에 빈민으로 유입이 되었다.[11] 여기에는 당시 미국 사회 내 폴란드계 미국인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도 이유였을 수도 있다. 이 외에도 "우크라이나어는 러시아어의 방언일 뿐이다."라고 말한 레프 트로츠키나 우크라이나 대기근을 주동한 라자리 카가노비치가 우크라이나계 유대인이었던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동유럽 각지의 민족주의와 동유럽 유대인들은 서로 상성이 굉장히 안 좋은 편이었다.[12] 오늘날 우크라이나 서부와 벨라루스 서부를 포함[13] 종교가 생활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약했던 역사를 가진 한국인들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지만 유럽에서 종교는 오랫동안 개인의 정체성을 판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1920년대 신생 폴란드에서는 인구 조사를 위해서 어느 오지 시골마을의 농민들에게 '당신네들은 혈연적으로 어느 민족에 속하냐'고 물었는데, 이 농민들이 '민족 그게 뭔데요? 우린 그냥 가톨릭 신자인데요?'라고 대답한 에피소드가 있다.[14] 보통 유럽에서는 매부리코이면 유대인이라는 고정관념이 있기는 한데, 뭐 매부리코가 유대인한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니까...중동이나 캅카스 이남은 매부리코 비율이 높은데 아랍인보다는 유대인이 유럽에 올 확률이 높아서인 듯하다.[15] 그가 사망한 1983년 이후로 좌우 가릴 것 없이 오히려 반유대주의,반시오니즘을 강화하는 서적으로 악용되고 있다. 이는 사후에 그의 의도와 반대로 가버린 것이다.[16] 스페인에서 탄압받던 세파르딤들이 대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 이주해서 아슈케나짐 유대인들과 동화되었다는 결론[17] 대표적인 인물로는 소련의 전권대사였던 아돌프 이오페(Адольф Иоффе)가 있다.[18] Behar, Doron M.; Metspalu, Mait; Baran, Yael; Kopelman, Naama M.; Yunusbayev, Bayazit; Gladstein, Ariella; Tzur, Shay; Sahakyan, Hovhannes; Bahmanimehr, Ardeshir; Yepiskoposyan, Levon; Tambets, Kristiina; Khusnutdinova, Elza K.; Kushniarevich, Alena; Balanovsky, Oleg; Balanovsky, Elena; Kovacevic, Lejla; Marjanovic, Damir; Mihailov, Evelin; Kouvatsi, Anastasia; Triantaphyllidis, Costas; King, Roy J.; Semino, Ornella; Torroni, Antonio; Hammer, Michael F.; Metspalu, Ene; Skorecki, Karl; Rosset, Saharon; Halperin, Eran; Villems, Richard; Rosenberg, Noah A. (December 2013). "아슈케나지 유대인이 하자르에서 기원했다는 전장유전체(Genome-Wide) 데이터의 흔적이 없음"[19] "연구에서 아슈케나지 유태인에 대한 하자르 출신의 증거를 찾지 못함" 유대인 언론 | 요리 야노버 | 23 Adar I 5774 – 2014년 2월 23일 | JewishPress.com"[20] 최신 연구결과에서는 중동의 민족들을 구분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중동인들이 팔레스타인인만을 의미하는지 아닌지를 알 수가 없다.[21] 문화인류학자들은 헬레니즘 시대에 유대교가 지중해 전역과 중동 전역에 전파가 되었고 이라크 지역에 유대인들도 키루스 칙령에도 불구하고 모두 팔레스타인으로 귀환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유대-로마 전쟁 이전에도 로마인의 유대교 혐오때문에 팔레스타인에서 타지역으로 이주한 유대인들이 종종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