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시의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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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좌에 앉은 성모와 성 프란치스코와 네 천사(부분), 치마부에, 1280년, 프레스코
이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Saint Francis of Assisi, Sanctus Franciscus Assisiensis, San Francesco d'Assisi)

출생
1181년, 아시시
(신성 로마 제국 스폴레토 공작령)
선종
1226년 10월 3일 (45세), 교황령 아시시
시성
1228년 7월 16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
축일
10월 4일
직업
수도자, 부제, 프란치스코회 창설자, 증거자
교파
가톨릭, 성공회, 루터교회. 복고 가톨릭교회
상징
십자가, 비둘기, 성흔
수호
동물, 자연환경, 상인, 이탈리아, 샌프란시스코, 필리핀 제도, 밀항자
칭호
하느님음유시인
1. 개요
2. 이름 표기
3. 생애
3.1. 회심하기까지
3.2. 수도자로서의 생활
3.3. 말년
4. 기도
5. 유명한 일화
5.1. 아시시 평원에서의 설교
5.2. 아시시의 장미 가시덤불
6. 동물의 수호 성인
7. 기타
8. 창작물


1. 개요[편집]


그리스도님, 저는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당신의 모든 성당에서 당신을 경배하며, 흠숭(欽崇)하나이다.

성 프란치스코가 성당의 정문 앞에서 바치던 기도


백년마다 한번 성 프란치스코가 태어난다면 세상의 구원은 보장될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


내 형제 죽음이여, 어서 오라.

성 프란치스코가 죽기 전에 남긴 유언.[1]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13세기 이탈리아그리스도교 수도자프란치스코 수도회를 창설한 인물이다. 정확히는 수도원장쯤 되겠지만 스스로 그러한 명칭을 바라지 않았으며, 사제가 아닌 부제 신분이었다.

그리스도교에서 일반적으로 그의 신앙과 영성에 대한 존경심은 교파의 구분을 떠나 있다. 그는 가톨릭, 성공회, 루터회, 독일 개신교[2]성인이며[3] 동시에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와 함께 이탈리아의 공동 수호성인이다. 축일은 10월 4일이며 독일 개신교회의 경우 그가 선종한 10월 3일로 지키고 있다. 별칭은 하느님의 음유시인, 가난한 이들의 친구. 상징물은 비둘기, 오상(五傷), 프란치스코회 수도복, 십자가, 해골. 위 그림처럼 동물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기적을 일으켰다고 전해지기 때문에 동물들의 수호성인이기도 한데, 다른 업적들로도 워낙 유명하다 보니 이 부분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자연 친화주의적 사상은 그리스도교와 생태주의의 연관성, 공존 가능성을 입증하는 사례로 손꼽힌다. 동물들, 특히 새 떼나 사슴 등과 함께 있는 성인이라면 100% 성 프란치스코. 권위주의적이고 권력지향적이었던 중세기 교황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성 프란치스코와 비교당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 점에서 현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 이름을 교황명으로 선택했을 때 더욱 화제가 되었다.

새에게도 설교했다는 일화가 꽤나 유명해서 위에 있는 그림과 같은 성화도 굉장히 많고 프란츠 리스트가 작곡한 동명의 피아노 곡도 있다.


2. 이름 표기[편집]


언어별 명칭
한국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4]
독일어
Heiliger Franz(Franziskus) von Assisi
(하일리거 프란츠 폰 아시지)
라틴어
Sanctus Franciscus Assisiensis
(상크투스 프란치스쿠스 아시시엔시스)
스페인어
San Francisco de Asís
(산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
영어
Saint Francis of Assisi
(세인트 프랜시스 오브 어시시)
이탈리아어
San Francesco d'Assisi
(산 프란체스코 다시시)[5]
포르투갈어
São Francisco de Assis
(상 프란시스쿠 드 아시스)
프랑스어
Saint François d'Assise
(생 프랑수아 다시즈)
현대 그리스어
Ο άγιος Φραγκίσκος της Ασίζης[6]
(오 아요스 프랑기스코스 티스 아시지스)
위 이름들은 라틴어 '프랑키스쿠스(Franciscus)'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프랑크족 사람, 또는 프랑스인이라는 의미이다. '프란치스코'는 한국 천주교외국 성인명 등의 한글표기를 따른 방식이며 프랑키스쿠스(Franciscus)의 교회 라틴어 발음인 [franˈt͡ʃis.kus](프란치스쿠스)에서 유래한다. 여성용 세례명으로 사용할 때에는 '프란치스카'가 쓰인다.

대한민국에서 표기법이 중구난방이었을 시기에는 프란치스꼬, 혹은 방제각(方濟各)의 중국어식 발음인 방지거라고 불리기도 했다.[7] 노년층의 세례명으로도 접할 수 있는데 대표적인 예로 시인 정지용이 있다.

미국의 유명한 도시인 샌프란시스코도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름을 딴 지명으로 유명하다.


3. 생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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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치스코의 탈혼, 호세 데 리베라, 1639년, 캔버스에 유채
성 프란치스코, 카를로 모날디, 1727년, 대리석, 성 베드로 대성당


3.1. 회심하기까지[편집]


속명은 '조반니 디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Giovanni di Pietro di Bernardone)'. 부유한 포목상인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의 아들로, 이탈리아 중부 스폴레토 공국(Ducato di Spoleto) 움브리아주의 도시인 아시시(Assisi)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프랑스로 출장을 갔을 때 어머니 비카는 조반니[8]란 이름으로 세례성사를 받게 했는데, 아버지가 프랑스에 매료되어 돌아온 뒤, 프랑스인이라는 의미의 '프란치스코(Franciscus, 이탈리아어로 Francesco.)'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워낙 집이 부유하여 향락을 추구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흥청망청 노는 것을 좋아했던 10대 때의 프란치스코는, 기사를 꿈꾸며 전쟁에 참가했다 포로로 잡힌다. 그렇게 1년간 감옥에 갇혔고 풀려나온 뒤로는 큰 병을 앓는다. 오랫동안 침대 신세를 지다 회복한 프란치스코는 이 때부터 점점 친구들과 노는 것을 멀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때 프란치스코는 이상한 환상을 보기 시작하였고, 이런 목소리를 듣게 된다.

아버지의 가게 안에 수많은 전쟁 장비들이 있고, 한 여인이 그곳에서 약혼자를 기다리고 있다. 장비들은 너의 병사들을 위한 것이고, 약혼녀는 너에게 예정되어 있다.


다시금 기사가 되길 원하던 그는 1205년, 계속되는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풀리아로 가던 중 스폴레토라는 곳에서 또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는다. "주인과 종 가운데 누구를 택하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주인입니다."라고 대답했고, 다시 "너의 고향으로 돌아가라. 거기에서 네가 할 일을 가르쳐 주겠다"는 소리를 듣고 아시시로 돌아간다. 그 때는 이미 세상의 모든 것이 그의 관심에서 완전히 멀어져 있었으며, 그 때부터 아시시의 동굴을 찾아가 묵상에 전념하곤 했다. 그러던 중 근방의 나환자촌에서 비참한 모습의 나환자를 본 프란치스코는, 피하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즉각 그 나환자를 안아주고 도와주기도 했다.

어느 날 프란치스코는 성 다미아노 성당을 발견하여 그 안에 들어갔다. 거기서 기도하던 도중 "프란치스코야, 무너져가는 나의 교회를 고쳐라."는 음성을 들은 그는, 무너져가는 교회가 이 무너져가는 다미아노 성당인 줄 착각하고[9] 그 길로 자기가 가진 돈과 아버지의 가게 물건을 일부 팔아 성당을 수리하려 하였다. 다미아노 성당을 지키고 있던 늙은 신부는 그 돈을 거절했으나, 프란치스코가 끈질기게 요청하자 결국 성당 수리를 함께 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프란치스코는 이것을 위해 아버지의 가게까지 탈탈 털어 비용을 충당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는 틈만 나면 성당을 지을 벽돌을 구걸하러 마을을 돌아다녔다.

이에 아버지는 격분했다. 아버지는 협박도 하고 얼러도 보고 아들을 원래대로 돌려놓으려 했지만 모든 게 허사였다. 결국 아들의 상속권까지 빼앗으려 시의 승정원에 재판을 의뢰하는데, 프란치스코는 아버지의 돈주머니와 옷을 모두 벗어던지고 군중 앞에 당당하게 고백한다.

모든 사람들은 내 말을 들으십시오. 지금까지 나는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를 나의 아버지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나는 그에게서 받은 돈과 의복들을 돌려줍니다. 이제 나는 하늘에 계신 유일한 아버지 한 분만을 섬길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 광경을 지켜본 모두가 프란치스코를 미친 자로 보았지만, 하나둘씩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청년들이 프란치스코를 따르기 시작하였다. 아시시의 주교는 알몸이 된 프란치스코에게 농부의 망토를 걸쳐주고 십자가를 걸어주었다. 그는 다시 나환자들을 돕다 다미아노 성당으로 돌아온다.

1208년 2월 24일 성 마티아 축일, 포르치운쿨라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던 프란치스코는 마태오 복음서 10장의 말씀[10]을 듣다 "거룩한 복음의 양식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성소(聖召)[11]를 발견하고 그 복음의 말씀대로 살기로 결심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소유하지 않고, 여행길엔 몸에 걸친 옷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으며, 하느님 나라와 회개를 선포해야 한다는 신조였다.


3.2. 수도자로서의 생활[편집]


이렇게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되어 야산을 전전하던 프란치스코는 동료 11명과 함께 '작은 형제들'(프란치스칸 1회)을 조직한다. 작은 수도회칙까지 정한 이 조직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인가를 요청했고 마찰 끝에 인준을 받았다. 이때 인노첸시오 3세는 프란치스코가 다미아노 성당을 재건할 때 꾸었던 꿈과 똑같은 꿈을 꾸었다고 한다. 즉 한 수도자가 무너져가는 라테라노 대성당 건물을 그의 어깨로 떠받치면서 무너지는 것을 겨우 막고 있었던 것이다.[12] 이 조직으로 시작된 프란치스코회는 아시시의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내에 있는[13] 허름한 포르치운쿨라('작은 몫'이라는 뜻) 성당에 본부를 두고 각지를 돌아다니며 선교 활동을 하였다.[14]

그 손길이 이슬람 세력에까지 미칠 무렵, 18세에 혼인을 앞둔 백작의 딸 글라라가 몰래 찾아와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할 뜻을 밝히고 수도복을 입는다. 하지만 프란치스코회는 남자 수도회였기 때문에 일단 근방의 베네딕토 수녀원에 피신시킨 후 추이를 지켜보았다. 그러자 부모가 글라라를 데려가려 찾아오기도 하고, 15세가 된 여동생 아녜스까지 언니에게 와 수도복을 입었다. 프란치스코는 그녀들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따로 꾸리기로 하는데, 그것이 바로 '가난한 부인회'이며 지금의 글라라회(프란치스칸 2회)이다.

그 뒤에도 프란치스코는 선교 활동을 하러 모로코 등지로 가려 했지만 스페인을 떠나지도 못하고 병이 들어 되돌아왔다. 그 뒤 무일푼으로 밀항을 하는 등 3번인가 재시도한 끝에 시리아를 거쳐 이집트까지 도달했는데, 마침 기독교인과 무슬림 간의 격한 충돌이 있었던 시기였다.

순교를 하느님을 향한 제일의 덕이라 여기던 프란치스코는 일루미나토 수사와 더불어 당당히 붙잡혀, 각종 폭력과 모욕을 당하며 술탄 앞으로 끌려갔다. 그는 술탄 알 카밀 앞에서 복음을 전하러 왔다고 밝혔고, 술탄은 그 용기가 가상해 일단 그의 말을 경청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기꺼이 순교하여 기독교이슬람보다 거룩한 신앙이라는 것을 증명하겠다고 말했고, 술탄은 정말 그것이 실현된다면 제사장들이나 백성들 사이에서 올 혼란이 염려되어 거절했다. 대신 프란치스코의 태도에 대한 존경심이 든 술탄은 그저 조용히 물러나 달라는 뜻에서 값나가는 선물들을 보냈는데, 프란치스코는 그 선물에서 신앙의 정신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물리고 나왔다.[15]

자신이 선교 활동에 실패하자, 이번에는 자신이 거두어들였던 형제들을 튀니지, 그리스, 프랑스, 모로코 등으로 파견하기 시작했다. 특히 모로코에 파견된 5명의 작은형제회 수사(修士)들은 프란치스코회의 첫 번째 순교자(franciscan protomartyrs[16])로 유명하다. 원래는 비탈레 수사가 이끄는 6명이 파견되었는데, 비탈레 수사가 아라곤에서 병이 나서 가지 못하게 되자 성 베라르도 신부가 나머지 4명, 즉 성 피에트로, 성 아주토, 성 아쿠르시오, 성 오토네를 이끌고 세비야로 가 모스크 근처에서 설교하다 잡혀 모로코로 끌려갔다. 아부 야곱이란 이름을 지닌 모로코의 왕 '미라몰린'은 기독교에 유화적[17]이었기 때문에 조용히 석방시켜 그 지역의 기독교인인 '돔 페드로'의 집에서 살게 했다. 리더인 베라르도 신부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아랍어를 배워 근처에서 설교했다.

지나가다 이를 본 미라몰린은 돔 페드로를 시켜 5명을 아시시로 다시 돌려보내려 했는데, 귀향하던 5명은 다시 모로코의 마라케시로 돌아가 설교하다 또 붙잡힌다. 미라몰린은 이번엔 체우타로 쫓아보냈지만 다시 마라케시로 돌아왔다. 돔 페드로는 베라르도 신부 일행에게 마라케시에 사는 기독교인들한테 폐를 끼치지 말라고 부탁했지만 고지식한 수사들은 그런 거 모른다. 결국 이슬람의 안식일에까지 거리로 나와 설교하던 베라르도 신부 일행은 그날따라 운도 나쁘게 미라몰린의 매의 눈에 포착됐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미라몰린은 그들을 체포해 고문하고 심문한 뒤, 수사들의 맹랑한 대꾸에 분노하여 그 자리에서 시미터를 뽑아들어 그들의 목을 베어버렸다. 이 때가 1220년 1월 16일이고, 이 날이 성 베라르도를 비롯한 수사 5명의 축일이다. 이들의 시신을 돔 페드로가 포르투갈의 코임브라로 운구했다. 그들의 장례 미사에 참례한 성 십자가 수도회의 수사 페르난도는 이 때 자신도 작은형제회에 입회하여 순교자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 페르난도가 가톨릭 성인 중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유명한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다.

또한 이들의 순교 7년 후인 1227년에는 성 다니엘이 이끄는 7명의 수사, 즉 성 사무엘레, 성 안젤로, 성 레오, 성 돔노, 성 니콜로, 성 우골리노가 모로코체우타로 갔다가 온갖 굴욕을 당하고 순교한다. 이들의 축일은 10월 10일. 어쨌든 결국 이슬람 지역 선교 활동은 2번이나 실패한 모로코 선교활동을 비롯하여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그가 40세가 될 무렵, 작은형제회는 3천 명이 넘는 거대 공동체로 성장하였다. 그에 따라 일부에서 수도회의 규칙을 완화하려 하자 여러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기존 회칙을 재정비했다. 약간 완화된 회칙이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으나 교황 호노리오 3세에게 인가를 받아 쐐기를 박았다. 그는 수도회 장상직을 사임한 후, 다시 소수 동료들만 데리고 라베르나산으로 떠나 수도생활을 계속하였다.


3.3. 말년[편집]


성 십자가 현양 주일이던 1224년 9월 14일 새벽, 프란치스코는 라베르나산에서 기도하던 중 십자가에 못박힌 케루빔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가 받은 다섯 상처를 자신의 손과 발, 옆구리에 똑같이 입었다. 이것은 최초로 공식 확인된 성흔이며, 다른 성흔 체험자로는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 카푸친회 소속이었던 오상의 성 비오 신부 등이 있다.[18] 성흔 현상 이후 건강이 급속히 안 좋아져 눈이 멀었고 심한 병까지 얻었다. 그는 이 때 이탈리아어로 된 <태양의 노래>를 지었다[19].

포르치운쿨라에 온 프란치스코는 1226년 10월 3일 토요일 해질 무렵, 자신에게 죽음이 다가온 것을 알자 동료 수도자들에게 자신이 걸친 옷을 모두 벗겨 잿더미 위에 눕혀달라고 하였다. 그런 뒤 그들에게 요한 복음서의 수난기를 읽어달라고 청하고 나서 시편 141편을 읊은 뒤 선종했다. 프란치스코에게는 죽음도 '자매'였다.

시편 141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님, 당신께 부르짖으니 어서 저에게 오소서. 제가 당신께 부르짖을 때 제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저의 기도 당신 면전의 분향으로 여기시고 저의 손 들어 올리니 저녁 제물로 여겨 주소서.

주님, 제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제 입술의 문을 지켜 주소서.

제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나쁜 짓 하는 사내들과 함께 불의한 행동을 하지 않게 하소서. 저들의 진미를 즐기지 않으오리다.

의인이 자애로 저를 때려도 저를 벌해도 좋습니다. 그것은 머릿기름, 제 머리가 마다하지 않으오리다. 저들의 악행을 거슬러 저는 늘 기도드립니다.

저들이 심판자들의 손에 떨어지면 제 말이 얼마나 좋은지 들어 알리이다.

누가 밭을 갈아 땅을 파헤쳤을 때처럼 저들의 뼈가 저승 어귀에 흩어지리이다.

정녕 주 하느님, 제 눈이 당신을 향합니다. 제가 당신께 피신합니다. 제 영혼을 쏟아 버리지 마소서.

저들이 쳐 놓은 덫에서, 나쁜 짓 하는 자들의 올가미에서 저를 지키소서.

제가 탈 없이 지나가는 동안 악인들은 자기들이 파 놓은 함정에 빠지게 하소서.

성 프란치스코의 유해는 다음 날 성 조르조 성당에 잠시 묻혔다가 1228년 7월 16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된 후, 1230년 5월 25일 그를 기념하여 지은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 또한 1939년 이탈리아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고, 1980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생태학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10월 3일 저녁 오후 해진 뒤에 성 프란치스코가 숨을 거두었는데, 당시의 전례적 기준에 따르면 일몰 뒤라 다음 날로 간주되었으므로 10월 4일을 프란치스코 축일로 정하였다. 지금도 프란치스코회에서는 10월 3일에서 4일로 넘어가는 밤에 전이예식(transitus)라고 하여 성 프란치스코를 기념하고 추모하는 행사를 한다.[20] 전이예식이라는 이름은 성 프란치스코가 그날 지상에서 천국으로 전이(옮겨감)했다는 뜻이다.

그 외에도 프란치스코회에서는 9월 17일을 성 프란치스코 수난상처 축일, 혹은 오상 축일이라고 부르며, 성 프란치스코가 라베르나산에서 성흔을 받았음을 기념한다.


4. 기도[편집]


“주여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 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 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문 중


가톨릭 교회의 미사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축일에 바치는 본기도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 가난하고 겸손한 성 프란치스코를 통하여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저희에게 보여 주셨으니, 저희도 그를 본받아 성자를 따르게 하시고,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 차 주님과 하나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또한, 성 프란치스코는 살아 생전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 표지를 보거든 이렇게 기도하라고 그의 형제들에게 권고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님,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로 세상을 구속하셨기에, 저희는 여기와 온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에서 주님을 찬양하며 흠숭하나이다.


성 프란치스코의 영적 지향과 동일하다 여겨지는[21] <평화의 기도> 역시 가톨릭 교회에서 널리 쓰이며 그 내용과 문장의 아름다움으로 종교를 떠나 자주 사용된다.

오, 주님 저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오, 거룩하신 주님.

제가 위로받으려 애쓰기보다는 위로할 수 있도록

사랑받으려 애쓰기보다는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태양의 노래>는 성인이 눈병을 얻어 치료를 하면서 지은 것으로, 앞이 보이지 않아 구술한 것을 다른 형제 수사가 받아썼다고 전한다. 원제는 <피조물의 찬가(Laudes Creaturarum)>였는데 후에 성가로 작곡되면서 <태양의 노래>라는 제목이 붙었다고 한다.

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주여!

찬미와 영광과 칭송과 온갖 좋은 것이 당신의 것이옵고,

호올로 당신께만 드려져야 마땅하오니 지존이시여!

사람은 누구도 당신 이름을 부르기조차 부당하여이다.

내 주여! 당신의 모든 피조물 그 중에도,

경애하는 형제 햇님에게서 찬미를 받으사이다.[22]

그 아름다운 몸 장엄한 광채에 번쩍거리며,

당신의 보람을 지니나이다. 지존이시여!

자매 달이며 별들의 찬미를 내 주여 받으소서.

빛 맑고 절묘하고 어여쁜 저들을 하늘에 마련하셨음이니이다.

자매 바람과 공기와 구름과 개인 날씨, 그리고

사시사철의 찬미를 내 주여 받으소서.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저들로써 기르심이니이다.

쓰임 많고 겸손하고 값지고도 조촐한 자매

물에게서 내 주여 찬미를 받으시옵소서.

아리고 재롱되고 힘세고 용감한 형제 불의 찬미함을

내 주여 받으옵소서.

그로써 당신은 밤을 밝혀 주시나이다.

내 주여, 자매이자 (또한) 우리 어미인 땅의 찬미 받으소서.

그는 우리를 싣고 다스리며 울긋불긋 꽃들과

풀들과 모든 가지 과일을 낳아 줍니다.

당신 사랑 까닭에 남을 용서해 주며,

약함과 괴로움을 견디어 내는 그들에게서

내 주여 찬양 받으사이다.

평화로이 참는 자들이 복되오리니,

지존이시여! 당신께 면류관을 받으리로소이다.

내 주여! 목숨 있는 어느 사람도 벗어나지 못하는

육체의 우리 죽음, 그 자매의 찬미 받으소서.

죽을 죄 짓고 죽는 저들에게 앙화인지고,

복되다, 당신의 짝없이 거룩한 뜻 좇아 죽는 자들이여!

두 번째 죽음이 저들을 해치지 못하리로소이다.

내 주를 기려 높이 찬양하고 그에게 감사드릴지어다.

한껏 겸손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어다.

최민순 사도 요한 신부 역/엔하위키 미러 편집



<태양의 노래>를 소재로 만든 성가 <태양의 찬가>.

성인은 이 세상 모든 피조물들, 인간이든, 동물이든 심지어는 물이나 불까지도 형제요, 자매라고 불렀다. 하느님의 창조 아래 만들어진 모든 피조물들을 사랑했다는 뜻. 병의 치료를 위해 불에 달군 인두를 몸에 지져야 할 때가 있었는데, 성인이 인두를 달구는 불을 향해 "내 사랑하는 불 자매여, 내가 언제 그대를 함부로 대한 적이 있었습니까? 나의 사랑을 기억해서라도 나의 몸에 닿을 때 조금만 뜨겁지 않게 해 주오"라고 말했더니 성인의 몸에 닿았을 때 살이 타고 연기가 나도 전혀 뜨거움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5. 유명한 일화[편집]



5.1. 아시시 평원에서의 설교[편집]


파일:external/saintleonardchurchboston.org/Saint-Francis-Jpeg-Photo1.jpg
새들에게 설교하는 성 프란치스코
(조토 디 본도네 作,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프란시스코가 아시시 평원에서 새들에게 전도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어느 날 프란치스코는 아시시 평원을 걸어가다가 들이 떼지어 있는 것을 보고 가까이 다가가서 설교하였다.

"나의 자매들이여!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만드신 분을 많이 찬미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분은 여러분에게 옷을 입히시려고 깃을 주셨고, 날아다니도록 날개를 주셨으며, 여러분이 필요한 것은 모두 주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창조물 중에서도 여러분을 특별히 귀하게 만드셨고, 맑은 대기 속에다 집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아무런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늘 여러분을 보살피십니다."

그러자 새들은 프란치스코의 말을 경청하며, 그들의 본성대로 목을 늘이거나 날개를 빼고 입을 벌려 기이한 몸짓으로 흥겨워하며 그를 응시했다. 프란치스코는 수도복 자락으로 새들을 스치며 새들의 한가운데를 오갔다. 그리고는 십자성호를 그어 새들을 축복하자, 새들은 기쁜 듯이 몸짓을 하며 사방으로 날아갔다.



5.2. 아시시의 장미 가시덤불[편집]


파일:external/santuariodesanantonio.files.wordpress.com/the-thornless-roses-in-assisi1.jpg
아시시의 가시 없는 장미

이렇듯 믿음과 수도생활에 투철한 성인이었으나, 남자로서 느끼는 고유한 성욕을 떨치는 일이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결국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느끼는 음탕한 욕망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면서, 틈만 나면 장미 가시덤불 위에서 맨몸으로 데굴데굴 굴렀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사후에 피어난 아시시의 장미들에서는 가시가 없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아시시의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 마당에 피는 장미꽃들은 가시가 없다! 아시시를 벗어나 다른 곳에 심으면 장미 가시가 생겨나고 다시 아시시로 옮겨와서 심으면 다시 가시가 없어진다고.

6. 동물의 수호 성인[편집]


가톨릭 문화권에서는 매년 10월 4일이면 동물의 수호 성인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기념해 동물 축복식을 연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이날 성당에 온갖 반려 동물들이 모여든다.

이처럼 별의별 동물들이 다 모였지만 의연하게 성수를 뿌려 주시는 신부님과 얌전히 축복을 받는 동물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동영상

다만 가톨릭에 무지한 기자들이 이를 동물 세례식이라 잘못 번역해 오해를 자아내는 듯. 게다가 성인 이름도 틀렸다. 이 영상에 나온 신부님은 세인트 프랜시스[23]라고 했는데, 자막에선 성 안토니라고 나왔다. (성 안토니오의 성상과 닮긴 했다) 그리고 목사가 아니라 신부이다. 동영상에 등장하는 성당 정보에 Priest라고 나왔다. 링크 - 아니라 1/17에 성 안토니오 아빠스 또한 동물 수호성인이다. 그래서 동물 축복은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과 성프란치스코 기념일에 한다. 그래서 기사 정보는 맞다.

물론 우리나라 성당에서도 가능하다. 반려 동물 전문 잡지에서 이러한 내용을 다룬 적이 있었다. 링크

새들에게 설교하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일화에 의하면 프란치스코가 새들을 불러 축복하고 진리를 말하자, 새들도 날개를 펼쳐 화답하며 지저귀면서 함께 즐거워했다고 한다. 사실, 성서에 동물과 인간이 교감을 나누는 장면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동물은 희생 제물이나 소유물, 혹은 비유의 대상으로만 나타난다. '창세기'의 뱀이 유일한 예외다. 사악하게 그려진 파충류와 하와의 소통은 그러나 낙원의 상실이라는 파국으로 귀결된다. 동물과 인간의 관계는 시초부터 갈등, 적대, 그리고 기만의 분위기에 휩싸여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성 프란체스코의 일화가 얼마나 독특하고 특이한 사건인지 깨달을 수 있다. 그는 아무런 조건 없이 동물을 귀하게 대우한다. 심지어 동물들과 진리를 함께 나눈다. 기독교의 사랑이라는 가치가 인간의 세계를 넘어 동물의 삶으로까지 확장되어 간다.링크


7. 기타[편집]


...나에게 있어 성 프란체스코는 사람의 본분을 다한 인간의 표본이며, 시련 또한 평화로운 투쟁으로 이겨내 인간으로서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의무를 실천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윤리나 진리 또는 아름다움보다도 더 지고한 차원의 것, 곧 우리를 통하여 하느님이 맡기신 물질을 갈고 닦아 영혼으로 승화시키라는 본질의 의무일 것이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성자 프란체스코중 서문, 오상빈 옮김.

  • 프란치스코를 묘사한 가장 잘 알려진 시는 골웨이 키널(Galway Kinnel)이 쓴 성 프란체스코와 암퇘지라는 시로, 주로 앞 부분이 자주 인용된다.

모든 만물에
봉오리가 선다.
꽃을 피우지 않는 것들조차,
자기 안에서 스스로 축복을 내리며 꽃을 피운다.


가끔 눈에 잘 띄지 않는 당신에게도 사랑스럽다는 말을
전하고 싶을 때가 있다
꽃의 이마에 손을 대어보고 싶고,
그 사랑스러움을
말과 손짓을 섞어 전하고 싶을 때가 있다
모든 것이 자기 안에서 스스로 축복을 내리며 꽃을 피운다.


성 프란체스코가
암퇘지의 주름진 이마 위에 손을 대고
암퇘지에게 땅의 축복을 말로, 손길로 베풀자,
암퇘지는 흙으로 늘 지저분한 자신의 주둥이로부터
먹이와 흙탕물로 뒤범벅된 몸을 거쳐 영적으로 말린 꼬리까지
자신의 둔중한 몸을 앞뒤로 하나씩 기억해내기 시작하고,
단단한 척추가 불뚝불뚝 튀어나온 등허리부터
그 아래 크게 상처받은 심장을 거쳐
꿈틀거리며 젖을 만들어내는 꿈결 같은 푸른 젖통까지,
그 아래 열네 개의 젖꼭지를 물고 빠는 열네 마리의 새끼까지,
하나씩 기억해내기 시작한다.
암퇘지의 길고도 완벽한 사랑스러움을.
-


  •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세상에 환멸을 느끼고 금욕의 삶을 추구한 점에서 석가모니와 비슷하다고 보기도 한다. 실제로 프란치스코 교황미얀마에서 비교한 적 있다.

8. 창작물[편집]


파일:프란체스코.png
징기스칸 4 일러스트

  • 코에이푸른 늑대와 흰 사슴 시리즈에 등장한다. 능력치는 정치 57, 전투 43, 지모 84 내정특기는 건설/외교/등용을 가지고 있다. S1에서 등장한다. 수위권 지모를 지닌 재원이고 등장 시점은 1194년 베네치아.

저자의 이름은 성 안브로시우스. 제목은 어디에도 없지만 이름은 들은 적이 있다. 참새도 설교했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열성적인 성직자로 설교를 너무나 열심히 한 나머지 이단으로 의심받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소녀는 서가의 바다에서 잠든다 2막 中

  • 낭만주의 음악가 프란츠 리스트는 2개의 전설(Two Legends)이라는 피아노 소품을 작곡했는데, 이 중 제1번이 “새들에게 설교하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이다.[24] 새들이 지저귀는 가운데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성 프란치스코의 모습이 잘 묘사된 곡으로,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당시 피아니스트 백건우광화문광장에서 거행된 시복식에 앞서 연주하기도 했다.

  • 영화로도 몇번 만들어졌는데 1972년작 <브라더 선 시스터 문>은 제목에서 미루어볼수 있듯이 위 성가에서 노랫말과 멜로디를 따와 메인 타이틀곡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가톨릭 신문 기사[25]에 따르면 오히려 위 성가의 원곡이 이 타이틀곡이라고 한다. 사실 해당 곡의 제목을 영어나 라틴어 등으로 검색해보면 전혀 다른 멜로디의 곡들이 수두룩하게 나온다. 위 동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애초에 첫부분에 나온 작곡가 r(riz).ortolani가 영화의 음악 담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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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유언을 남기면서 그는 다른 수도자 두 명한테 부축을 받으며 선 채로 죽음을 맞았다고 전해진다.[2] 루터회, 개혁교, 연합 개신교가 통합되어 만든 독일 최대 규모의 기독교 교단 중 하나.[3] 가톨릭성공회성인 개념을 부정하는 성공회를 제외한 개신교에서도 신앙의 모범으로 존중하고 있다는 의미이다.[4] 성공회의 번역명. 이 세례명의 대표적인 예로 4대 서울교구장을 지낸 박경조 프란시스 주교가 있다.[5] 이탈리아어 발음은 [asˈsiːzi\](아시지)에 가까우나 국립국어원이탈리아어 표기법에 따라 아시시로 표기한다.[6] 1982년 이전의 표기법으로는 Ὁ ἅγιος Φραγκίσκος τῆς Ἀσσίζης.[7] 서울지하철 2호선 구의역강변역 사이에 있던 방지거병원의 이름이 여기서 유래했었다. 다만 2016년에 폐업 및 철거된 후 재개발돼 그 때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8] 요한이탈리아식 표기. 정확히 여기선 세례자 요한이다.[9] 원래는 기독교 자체를 말하는 것이었다.[10] 예수가 제자들에게 당부하는 말이다. 요약하자면 무소유.[11] 사제나 수도자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로 이해하면 된다. 물론 '성소'라는 말 자체가 사제수도자에만 국한된 단어는 아니다.[12] 라테라노 대성당은 세계 유일의 교황좌 대성당으로, '모든 성당들의 어머니'라 불린다. 역시 가톨릭교회 자체를 상징한다.[13] 원래는 포르치운쿨라 성당이 있었는데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선종한 후에 순례하러 오는 사람이 너무많아서 포르치운쿨라 성당으로는 부족해서 포르치운쿨라 성당의 부속건물은 헐고 포르치운쿨라성당을 안에넣고 아시시의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을 지었다.[14] 참고로 프란치스코는 이 포르치운쿨라에 어린 1마리를 두고 기르면서, 이 양을 보는 사람마다 '하느님의 어린양(Agnus Dei)'을 떠올리도록 도왔다고 한다.[15] 위의 설명은 다분히 프란치스코측 관점의 서술이다. 실제로는 당시는 5차 십자군이 이집트를 공격해 다미에타를 점령한 상태였고, 술탄은 예루살렘을 넘겨주는 대신에 십자군이 이집트에서 철수할 것을 조건으로 십자군과 휴전협상중이었다. 프란치스코는 십자군 진영을 통해 술탄을 만났기 때문에, 술탄은 이들이 협상사절단의 일원으로 착각하여 정중히 맞이했으며, 따라서 프란치스코 측이 주장한 수난들은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알 카밀은 기독교인들에게 관대한 편으로 유명했다.[16] 그냥 'protomatyr'라 하면 스테파노를 가리킨다.[17] 시기와 아부 야곱(야쿱)이라는 이름, 장소로 봐서 알모하드 왕조의 유수프 2세이다. 이 사람의 어머니는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태도가 나왔을 수 있다.[18] 그 밖에도 많은 사례가 전해지고 있으나 교황청에서 인정하는 성흔은 성 프란치스코의 것 하나뿐이다. 카타리나나 오상의 성 비오 신부도 단지 성흔 때문에 성인이 된 것은 아니다.[19] 이것이 현재 개신교 찬송가에 수록된 '온 천하 만물 우러러'로 남아있다.[20] 단, 카푸친회에서는 전이예식을 10월 4일에서 5일로 넘어가는 밤에 하는 관습이 있다.[21] 성인이 직접 지은 것인지는 불명이다. 프랑스인 크리스티앙 르누의 조사에 따르면, 20세기 초 가톨릭계 프랑스 잡지에 기재된 것보다 이전의 것으로 추측되지만, 성인 본인이 지은 것인지는 말했듯 아직 확실치 않다.[22] 2015년 6월 18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전 과정을 주도한 첫 번째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Laudato Si)>가 바로 이 구절에서 비롯된 이름이다.[23] 성 프란치스코의 영어식 명칭.[24] 제2번은 똑같이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가진 성 파울라 프란치스코가 물 위를 걷는 기적을 선보인 일화를 바탕으로 한 “물 위를 걷는 성 프란치스코”이다.[25] 기사에는 1973년작 이탈리아 영화라고 나오지만 구글에는 1972년 영국/ 이탈리아 합작 영화로 등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