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카가 요시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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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로마치 막부 제13대 정이대장군
아시카가 요시테루
足利義輝

파일:282px-Ashikaga_Yoshiteru.jpg
생몰년도
1536년 3월 31일 ~ 1565년 6월 17일
재임기간
제13대 정이대장군
1547년 1월 11일 ~ 1565년 6월 16일




1. 개요[편집]


무로마치 막부의 제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의 장남,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형. 무로마치 막부의 질서 자체가 붕괴해 가던 시기에 쇼군에 올라, 다이묘 간의 분쟁 조정, 막부 역직 재배분, 만도코로(政所, 정소) 정리 등의 개혁을 통한 막부 재흥을 노렸으나, 미요시 요시츠구의 기습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


2. 생애[편집]


1546년 원복. 초명은 아시카가 요시후지. 같은 해 호소카와 하루모토와 대립하여 자주 싸우던 아버지 요시하루로부터 쇼군직을 양도받았으며, 2년 후 하루모토와 화해하면서 교토로 귀국, 정식으로 쇼군에 취임한다.

그러나 하루모토의 가신인 미요시 나가요시가 호소카와 우지츠나를 내세우며 세력을 확대해나가자 오미 사카모토로 피신한다. 1552년 우지츠나의 간레이 직 취임을 조건으로 화해, 교토로 귀국한다. 그러나 1553년 다시금 나가요시와 적대하였으나 패배, 롯카쿠 가의 오미로 피난하였다.

이후 1558년 롯카쿠 요시카타의 지원하에 나가요시와 다시 싸웠다. 초반에 선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나가요시가 병력을 증파하고 배후 공작을 통해 롯카쿠가 지원을 그만두게 만들자 미요시와 협상하게 된다.

협상 이후 요시테루는 미요시 나가요시와 그 후계자 요시오키,[1] 마츠나가 히사히데 등과 함께 협력하였으며, 1561년 롯카쿠와 하타케야마 연합이 미요시와 싸울 때도 미요시를 도왔다. 이는 쇼군의 노선이 미요시와의 무력 투쟁에서 협력으로 바뀐 것을 보여준다. 거기에 더하여 여러 다이묘들을 중재하며 쇼군의 존재를 알렸다.

굳건해보이던 미요시 정권이 소고 카즈마사의 급사와 미요시 짓큐의 전사와 함께 균열이 가기 시작하더니 미요시 요시오키가 급사하고 나가요시가 병사하면서 무너지게 된다. 이에 요시테루는 쇼군 친정을 위한 바탕을 깔기 시작했다. 그러나 쇼군 요시테루를 방해물로 여기던 미요시 요시츠구미요시 3인중과 함께 1565년 니죠어소를 습격하는 에이로쿠의 변을 일으킨다.[2]

어머니 케이쥬인이 도망을 권했으나 거부하고 근처에 있던 시녀의 기모노 소매에 사세구를 썼다. 검성 카미이즈미 노부츠나, 츠카하라 보쿠덴에게서 사사해 검호쇼군이라 불린 요시테루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중과부적으로 살해되고 만다.[3] 향년 30세.

무로마치 막부의 역대 쇼군 가운데 가장 패기 있고 무사다웠던 쇼군으로 평가받는다. 활발한 정치 활동으로 일시적이나마 쇼군의 권위가 회복된 점은 높이 살 만한 점이지만, 그가 피살됨으로써 쇼군의 권위는 다시 실추되었다.

요시테루의 죽음은 각종 미디어에서 장렬한 것으로 그려진다. 수많은 명검을 복도에 꽂아두고, 다가오는 적을 상대했다.[4] 적을 베어 칼이 무뎌지면, 버리고 새 검을 뽑아 베기를 연속하다 상처가 깊어 곧 죽을 것임을 알고 불길 속에 뛰어들어 산화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단 예외로,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만화 오다 노부나가에서는 할복자결한 것으로 나온다.

사세구

봄의 장마는 이슬인가, 눈물인가. 두견새야, 내 이름을 읊어다오. 구름 위에 닿도록.

五月雨(さみだれ(つゆ(なみだ不如歸(ほととぎす (((あげ(くも(うへまで



3. 대중 문화[편집]



  • 전국요호 2부에서도 꽤 중요한 비중으로 등장한다.



  • 반요 야샤히메의 주인공 히구라시 토와가 소지한 검 국십문자(키쿠쥬몬지)의 원래 주인이라고 언급된다. 원래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지니고 있던 명검 모토치카츠쿠루(基近造)의 별칭인 후쿠오카이치몬지(福岡一文字)가 모티브로 보인다.


3.1.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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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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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의 야망 창조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전형적인 무장형 장수로 나온다. 대체로 능력치가 낮은 아시카가 쪽 군주들 중에선 유일하게 준수한 편. 특히 쇼군 역직과 산기 관직을 가지고 있어서 그에 따른 보너스를 받으면 더 강해진다. 모사형인 동생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조합하면 쓸 만해지지만, 시리즈에 따라서는 요시테루가 죽어야 요시아키가 나오도록 되어 있어서[5] 둘을 동시에 활용할 수 없다.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에서는 아시카가 요시후지[6]라는 이름으로도 등장.

노부나가의 야망 혁신에서 능력치는 통솔 74 무용 97 지략 25 정치 56 족경 A 궁 B(나머지는 D)이고 검호답게 고유전법 '난전'을 쓸 수 있다. 노부나가의 야망 천도에서는 통솔 74 무력 95 지력 45 정치 56에 창금지극.

창조 기준으로도 80대 중후반을 마크하는 통무와 5~60대의 지정의 능력치를 가진다. 전법은 난전시 혼란 효과를 상승시켜주는 '일태도'. 덤으로 본인부터가 검호쇼군이라 칭해졌던만큼 검호들과 같이 '분신'과 '검호'를 보유하고 있어 난전에 매우 유리하다. 군웅집결 시나리오를 제외하고 요시테루로 플레이할 때 메리트는 시작부터 가지고 있는 최고위 역직 정이대장군. 전국 다이묘들에게 역직을 수여할 수 있어 외교 관리가 타 가문보다 수월하게 진행된다. 상급일 경우 그 역직의 효과를 잘 보는 AI 특성상 잘못 판단하여 애를 먹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기 때문에 역직을 마구 퍼 줄 필요는 없다. 시작 보유 성인 니조고쇼는 전국 최고의 인구 밀도를 가지고 있어 플레이어가 잡으면 발전도가 무시무시하며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이미 7만이상 인구가 상주하는 거성이 된다. 전국전을 켜놔도 플레이어의 쇼군가가 커져버리면 거짐 다 무시해버리기 때문에 걱정할 일이 줄어든다.

쇼군가 플레이 시 휘하 장수가 많지 않아 얼마나 활용을 잘 하는가가 관건이며, A급 만능 무장인 호소카와 후지타카와 A급 내정머신인 텐카이, 요시아키가 키플레이어가 된다. 특이한 경우로 특전무장들 중 S급인 미나모토 요리미츠 및 A급들로 이루어진 요리미츠 사천왕은 시작 지점이 니조고쇼로 고정되어 있어 이들을 등장시키고 플레이할 경우 난이도가 확 줄어버린다. 아시카가 가문이 겐지의 후예인 만큼 이들을 등용할 경우 일문이 되기 때문에 충성 걱정할 일도 없다.

예외로 천하삼십장 시나리오의 경우는 난이도가 상당히 높다. 당장에 서쪽으로는 올스타즈를 가지고 있는 히데요시가 있고, 북동쪽으로는 아자이를 병합해 인재풀이 올라간 아사쿠라에 남서쪽에는 미요시가 포진했다. 다행히 이 시나리오는 츠츠이 가문을 병합한 상태이므로 휘하에 S급 무장인 시마 사콘이 있고 쓸만한 무장들인 호소카와 일문의 무장들이 있는 상태. 그리고 동쪽의 롯카쿠와 키타바타케는 약소 가문이고 남서쪽의 미요시는 세력은 크지만 시코쿠와 사카이 셋츠 일대로 세력이 양분되어 있으므로 이들을 최대한 빨리 병합한 후 사이카 스즈키 가문까지 병합하여 인재들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하면 된다. 시간이 늦어지면 히데요시, 아사쿠라, 동쪽의 오다에 밀리게 된다. 영웅집결 시나리오는 츠츠이가 독립한 것은 물론 호소카와 가문도 북쪽의 탄고 국에 독립세력으로 떨어져 있으므로 인재풀이 훨씬 더 부족하다. 동쪽에는 아케치가 가까이 있고 히데요시도 바로 옆에 붙어 있다. 정면대결로는 승산이 없고 다른 세력이 서로 싸울 때 요시테루 자신의 전투능력만 믿고 뒷치기 하면서 영역을 늘려나가는 방법 뿐이다. 또한 이 시나리오에서도 시작부터 정이대장군으로서 나오기 때문에 외교 관리를 철저히 하는 것이 좋다.


3.2. 태합입지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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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에선 기본무력부터 92인데다가 무력+13보정이 있는 무라마사까지 들고 있는 무력깡패에 매력은 100이고 역시 매력+15 보정이 있는 다기 마황반을 들고 있는 등 좋은 능력치에 아이템까지 더해진 모습. 통솔이 60정도로 평범하고 병과쪽 기능이 별로긴 하지만 궁술이 4인지라 족경대로는 그럭저럭 쓸만하다. 1562년 5월 이후에 이벤트로 미요시 3인중+마츠나가 히사히데에게 암살 당하지만 플레이어가 잡을 경우 암살을 피할 수 있다. 조건은 1 VS 5 전투에서 4번 연속 승리할 것. 각 전투는 이와나리 토모미치+아시가루4, 미요시 나가야스+검술사범4, 미요시 마사야스+닌자4, 마츠나가 히사히데+상급닌자4의 순서대로 일어나며 한번이라도 지면 당연히 게임오버. 모두 승리할 경우 이와나리, 나가야스, 히사히데를 황천으로 보내버리고[7] 살아남으며[8], 히사히데의 가보를 얻는것과 동시에 요시아키가 부하로 들어온다. 1560년 시나리오로 시작해도 2년이란 충분한 시간이 있으니 필히 의술을 3이상까지 올려서 지혈을 배우는 것이 중요. 요시테루의 무용이 워낙 출중하기 때문에 지혈만 배워놓는다면 난이도가 많이 낮아진다. 이 이벤트의 발생조건중 하나는 요시테루의 소유 성이 오직 니조성이어야 하는 것이니 1562년 5월이 되기전에 주변 성 아무곳이나 공략해 두었을 경우에도 죽음을 피해갈 수 있다.

태합입지전 5에서는 플레이어가 정이대장군, 태정대신, 관백 중 한 직위에 임명받는 것으로 엔딩을 볼 수 있지만 요시테루는 시작부터 정이대장군이므로 관작 임명을 통해서는 엔딩을 볼 수 없고 모든 다이묘를 종속시키거나 멸망시켜야만, 또는 부직업 엔딩으로만 엔딩을 볼 수 있다.

요시테루도 엄연히 검호 칭호를 가지고 있는 인물 중 한명이라 다른 인물을 플레이어블로 잡고 악명이 높은 상태에서 교토 근처에 어물쩡거리면 "쇼군인 내가 직접 처단해주겠다"라며 시비를 건다. 문제는 다른 검호들과는 달리 닌자 1명, 경호원 1명을 대동하고 싸운다는 점. 핸디캡 매치 요시테루를 이기면 "나는 악을 용서하지 않는다. 그러하기 위해 검술을 연마해 막부를 강하게 만들겠다"는 대사를 남긴다.


3.3. 전국 바사라 4[편집]


아시카가 요시테루(전국 바사라) 참조.


4. 여담[편집]


  • 요시테루는 쇼군이라는 드높은 신분이었음에도 흉흉한 세상물정에 호신 겸해서 배웠던 검술(유파는 카토리 신토류라고도 함)의 면허개전을 받을 정도의 달인이었다고 한다.[9]

  • 카미이즈미 노부츠나가 마루메 쿠란도 나가요시를 데리고서 요시테루 앞에서 검술을 시연하고, 이에 천하제일의 검호라며 감사장을 준 것까지는 감사장이 현대에도 마루메 가문에 남아있는걸로 봐서 확실하나, 요시테루가 노부츠나에게 검술을 사사했는지는 확실치 않다.[10]

  • 츠카하라 보쿠덴에게 오의인 히토츠노타치를 배웠다는 말이 있으나, 사실 증거는 없다.[11]

[1] 특히 요시오키와 요시테루 쇼군은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젊은 나이의 요시오키에게 나가요시와 같은 대우를 해주었을 정도.[2] 이 사건은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일으켰다고 알려져있지만,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히사히데는 쇼군과 가까웠다.[3] 일본외사에 따르면 이때 다다미 위에 여러 개의 명검을 꽂아놓은 다음 칼날이 무뎌질때마다 다른 칼로 바꾸었고 수십명을 도륙내며 분전했다.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 여긴 습격자들은 일제히 문짝을 던져 요시테루를 넘어뜨린 뒤 다다미로 덮어 누른 후 그 위에서 창을 찔러댔다고 한다. 물론 일본외사는 19세기 초에 쓰였고, 군담 작품을 참고 문헌으로 사용하는 등 역사소설의 면모가 강하니 그냥 그런 얘기도 있다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다만 잘 드는 칼을 무수히 세워두고 바꾸어가며 베었다는 기재는 사료로도 쓰이는 아시카가 계세기에도 등장하는 걸 보면 실제로도 꽤나 격렬히 저항했을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4] 대표적으로 전국 바사라 4 스메라기에서 이 장면이 나온 바 있다. 검의 언덕무한의 검제도 이 고사를 오마주했다.[5] 승려로 출가했던 요시아키는 요시테루 사후 환속했다. 이를 고증한 것.[6] 1554년 요시테루라 바꾸기 전까지 쇼군이 쓴 이름.[7] 미요시 마사야스는 목숨을 건져 달아난다. 마사야스는 사나다 십용사의 일원이기 때문에 이벤트를 위해 여기서 죽지 않는 것으로 추정.[8] 마지막 싸움에서 히사히데는 조총을 들고 등장하며 검호의 시대 따윈 끝났다고 비웃는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총은 한발 쏘면 두턴이나 대기해야 해서... 이런 조총을 든 상대에게 주인공 보정을 받은 플레이어에겐 히사히데보단 닌자가 더 성가신 상대.[9] 부차적으로 당시에 검술 같은 류의 '예능'은 궁술에 비해 천시받았다는 말이 있으나 사실 그렇지는 않았다. 검호 국사 등 쇼군만 검술을 배운 것도 아니고, 다이묘들과 무장들은 실전과 수양을 위해 검술을 갈고닦았으며 덕분에 검호들도 칼 한자루 들고 상식 이상의 입신양명을 하던 시대였다. 정확하게 시기를 따지자면 1387년 출생한 카토리 신토류의 개조인 이이자사 이에나오=飯篠家直를 일본 검술 중흥의 시조로 보며, 그가 카토리 신토류를 창시한 1447년 이전에는 검술이 천대받았다고도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후에는 중흥이라는 말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위대한 검호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전국 시대 검술이 대유행한 것만 봐도 절대 천대받지 않았다.[10] 그렇다고 제자가 절대 아니라는건 아니고 그냥 천하 제일이라고 한거보면 정황 증거로 노부츠나에게 직접 사사하지 않았을까.. 하는 정도. 노부츠나를 만났을때가 에이로쿠 7년이었는데, 요시테루는 에이로쿠 8년에 사망했으니 배웠다고 쳐도 많은걸 배우진 못했을 듯 하다.[11] 다이묘 격에서 오의를 전수받았다는 기록이 있는 인물은 키타바타케 토모노리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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