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야쿠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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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yacucho
아야쿠초

국가
파일:페루 국기.svg 페루

아야쿠초주
면적
2,981.37km²
인구
180,766명[1]
시간대
UTC-05:00
아야쿠초 행정 사이트


1. 개요
2. 역사
3. 교통



1. 개요[편집]


페루 아야쿠초주의 주도이다.


2. 역사[편집]


약 15000년전부터 사람이 거주한 흔적이 있다.

기원전 200년부터 기원후 600년 사이에는 나스카 문화가 이 지역의 남서쪽에 자리잡고, 와르파 문화가 아야쿠초 중심지에 자리잡았다.

500년부터 900년까지 와리 문화가 주변 문화와 교류를 하면서 이 지역에서 형성하였다. 1000년경 와리 제국은 멸망을 했고 페루 산악지대의 인구수는 급격히 감소하게 된다. 케추아인의 한 갈래인 찬카족을 비롯한 여러 부족들이 이 지역에서 활동을 했으나 잉카 제국이 이 지역을 합병을 하게된다. 잉카는 이 지역 근처에 빌카슈아만이라는 도시를 세웠고, 빌카슈아만은 크게 성장하여 잉카 제국 내에서도 가장 큰 도시 중 하나가 된다.

1540년 4월 25일, 스페인 제국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 지역 근처에 우아망가를 세우고 망코 잉카 유판키가 주도한 반란을 피해 이 지역에 이주하게 된다. 1677년 7월 3일, 산 크리스토발 우아망가 대학교가 설립된다.

1825년 2월 15일, 시몬 볼리바르페루 독립 전쟁의 마지막 격전이었던 아야쿠초 전투를 기리기 위해 이 지역의 이름을 아야쿠초로 바꾼다.[2] 이 전투로 인해 많은 군인들이 전사했으나, 이 전투를 주도한 안토니오 수크레가 승리로 이끌면서 페루를 비롯한 남아메리카의 독립을 이끌게 된다. 참고로, 볼리비아의 수도인 라파스 또한 이 전투를 기리기 위해 라파스 데 아야쿠초로 명칭이 바뀌게된다.

독립 이후, 경제적 성장은 오히려 악화되었고, 경제를 살리기 위해 철도를 깔고 1968년에는 고속도로도 깔았으나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도시 내 경제는 대부분 농업과 경공업 위주였으며, 도시 내 예수의 생애 33년을 기리는 33개의 교회가 지역 내 대표적 관광지로 자리잡게 된다. 1959년, 산 크리스토발 우아망가 대학교가 다시 문을 열면서 인구성장률도 증가하게 되나, 이와 함께 정치적인 분쟁 또한 증가하게 된다. 아야쿠초는 이후 페루 정부군과 이에 반발하는 시위대들의 격전지로 변모하게 되고, 많은 시민들이 죽어나가게 된다. 1980년에는 페루의 사회주의 게릴라 조직인 빛나는 길이 이 곳을 근거지로 두고 활동을 하면서 정부와 더 큰 마찰을 일으키는 지역이 된다. 1982년에는 아야쿠초 교도소 폭동을 일으키면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2022년 들어서는 페드로 카스티요쿠데타 시도와 이에 대한 실패, 그리고 카스티요 지지자들의 디나 볼루아르테에 대한 불신 등 여러가지 요인들로 인한 시위가 격해지면서 다시 한번 아야쿠초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결국 12월 15일, 코로넬 FAP 알프레도 멘디빌 두아르테 공항에서 페루군이 민간인을 상대로 헬기를 동원해 사격을 해 학살을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3. 교통[편집]


코로넬 FAP 알프레도 멘디빌 두아르테 공항이 이 곳에 위치해으며, 페루군이 주둔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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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5년 기준.[2] 아야쿠초 지역 방언에 따르면 아야(aya)는 죽음을 뜻하고, 쿠초(kuchu)는 외딴 곳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