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야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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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체계
3. 이란 신정체제와의 관계



1. 개요[편집]


아야톨라(Ayatollah)란 이슬람 종파 중 하나인 시아파의 성직자 계급의 하나로서, "하나님의 증거"라는 뜻이다. 시아파 중 특히 열두 이맘파에서 종교적 율법에 대한 유권해석(이즈티하드)을 내릴 수 있는 성직자(무즈타히드)에게 붙이는 존칭이다.


2. 체계[편집]


아야톨라 아래 등급의 성직자들은 "호자톨 이슬람(Hojatol Islam)"이라고 불리며, 이슬람 신학교에서 신학과 율법 관련 교육들을 이수하면 될 수 있다. 이 호자톨 이슬람이 신학교에서 더 많은 학식을 쌓아 이즈티하드를 내릴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인정받으면 아야톨라가 된다. 이후 아야톨라들은 학술 및 종교 활동을 계속하며 영향력을 넓히는데, 그 중 특별히 학식과 인품이 뛰어나서 마땅히 추종할 만하다고 인정된 사람은 마르자에 타끌리드(Marja-i Taqlid)라고 불리게 된다. 마르자에 타끌리드란 "모방의 원천"이란 뜻이며, 이들을 부르는 다른 명칭이 바로 대(大) 아야톨라(Ayatollah Uzma)이다. 그리고 이 마르자에 타끌리드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사람을 "유일한 마르자에 타끌리드"로 추대하며, 그는 열두 이맘파 전체에서 유일한 영적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현재 생존 중인 大아야톨라는 56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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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중인 마르자에 타끌리드만 나이 순으로 정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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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호세인 바히드 호라사니
호세인 누리 하메다니
나세르 마카렘 시라지
무사 슈바이리 잔자니
압바스 마푸지
6
7
8
9
10
모하마드 라마티 시르자니
자파르 소바니
알리 알시스타니
무하마드 이스하크 알파야드
무하마드 타키 마즐레시 이스파하니
11
12
13
14
15
무하마드 후세인 나자피
압돌라 자바디아몰리
호세인 마자헤리
모하마드 에브라힘 잔나티
알리 모하마드 다스트게이브 시라지
16
17
18
19
20
미르자 야돌라 두즈두자니
샴소딘 배지
이사 아흐메드 카심
모하마드 알리 제라미 코미
카짐 후세이니 알하에리
21
22
23
24
25
모하마드 메흐디 칼레시
알리 하메네이
알리 아스가르 라히미 아자드
야수베딘 야스테가르 주이바리
모하마드 모하마드 타헤르 알레쇼바이르 카카니
26
27
28
29
30
칼릴 쿠드시 메르 타브레지
사디크 후세이니 시라지
아사돌라 바야트 잔자니
도스티 잔자니
바시르 후세인 나자피
31
32
33
34
35
누리 하팀 사디
모하마드 타키 알모다레시
알리 아스가르 다스트게이브
아흐마드 하사니 바그다디
알라에딘 고라이피
36
37
38
39
40
모하마드 호세이니 잔자니
살레 태에이
알리 알살레
모하마드 레자 네쿠남
자바드 알라비 보루제르디
41
42
43
44
45
모하마드 아민 마마카니
자와드 칼레시
칼릴 모바셰르 카샤니
후세인 에스마엘 알사드르
파젤 말레키
46
47
48
49
50
알리 하사니 바그다디
모하마드 야스레비
카말 하이다리
모하마드 하디 가잔파리 칸사리
무흐신 호자트 카불리
51
52
53
54
55
모하마드 아민 호라사니
모하마드 야쿠비
레자 호세이니 나삽
카셈 태에이
모하마드 바쿼르 모바헤디 나자피
56
모하마드 알사나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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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문 일이지만 여자도 아야톨라가 될 수 있다. 정확히 말하면 아야톨라와 같은 급인 무즈타히데(Mujtahideh).


3. 이란 신정체제와의 관계[편집]


18세기 이후 이란에서 득세하기 시작한 열두 이맘파 내의 신학 사조인 우술리 학파는 미래의 구원자인 마지막 이맘이 없는 현재 상황에서 신자들이 올바른 종교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신학과 율법에 정통한 율법학자, 즉 무즈타히드들의 판단을 추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원래 이들의 영향력은 종교적인 분야에 한정되었으나, 오스만 제국카자르 왕조 등 세속 이슬람 국가의 약화와 서유럽의 침입을 계기로 하여 점차 정치 분야에 대한 성직자들의 문제제기가 자주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61년 마지막 "유일한 마르자에 타끌리드"가 죽자, 그 후임자를 한 명으로 정하는 대신 여러 대 아야톨라들이 집단지도체제를 이루어 각지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당시 강력한 개발독재를 구축하던 팔라비 왕조는 급진적 서구화, 세속화 정책을 추진하며 종교 세력과 갈등을 빚기 시작했고, 이는 종교 세력의 강력한 반발과 정치화를 촉발시켰다. 그리고 이 종교 세력 중 가장 두각을 나타낸 것이 바로 루홀라 호메이니였다. 강경한 반체제 활동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호메이니는 점점 심해지는 팔라비 독재에 저항하기 시작한 사회 내 여러 세력들의 대표자로 부상할 수 있었다.

1979년 이란 혁명에 성공한 호메이니는 위에서 설명한 "무즈타히드의 판단에 대한 신자들의 추종"이라는 종교적 영역의 활동을 정치적 영역으로 확장시켜서, 마지막 이맘이 나타날 때까지 신자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서는 이슬람 신학과 율법에 통달한 율법학자들이 국가의 전 영역을 "독점적으로"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호메이니의 이 같은 논리를 벨러야테 파키(Velayat-e Faqih)라고 한다. 이후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 헌법에서 "율법학자"를 의미하는 파키(Faqih)가 대통령 이상의 절대적 권한을 갖는 최고지도자(Rahbar)로 자리잡게 된다. 루홀라 호메이니와 그의 후임인 알리 하메네이는 바로 이 파키 혹은 라흐바르의 지위에 있는 것이다.

"아야톨라" 혹은 "대 아야톨라"가 그들의 최고지도자 직책의 이름인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어디까지나 종교계 내에서의 직책이지 정부의 관직이 아니다. 보수적인 이란의 대 아야톨라(마르자에 타끌리드)들 중에서도 호메이니의 벨러야테 파키 이론에 반대하거나, 그 이론에 동조하더라도 현재의 정치적 독재 체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즉 성직자로서 아야톨라의 지위와 신정체제 국가의 최고지도자로서의 위치는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호메이니는 대 아야톨라이자 라흐바르였지만, 1989년 호메이니 사후 새 후계자로 임명된 알리 하메네이는 대통령을 역임하는 등 정치적 경력은 출중했던 반면 종교적으로는 호자톨 이슬람에 불과했고, 최고지도자로 임명되기 얼마 전에야 겨우 아야톨라가 되었다. 하메네이는 1994년에 대 아야톨라로 선언되었으나, 벨러야테 파키 이론에 반대하는 일부 대 아야톨라들은 그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하다가 체포, 구금되거나 사적으로 공격당하는 등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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