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트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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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 선제후국 베틴 왕조 제16대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
Friedrich August II



파일:August_III_Portrait.jpg

출생
1696년 10월 17일
작센 선제후국 드레스덴
사망
1763년 10월 5일 (향년 66세)
작센 선제후국 드레스덴
재위기간
작센 선제후
1733년 2월 1일 ~ 1763년 10월 5일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1733년 10월 5일 ~ 1763년 10월 5일
서명
파일:아우구스트 3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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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베틴 가문
아버지
아우구스트 2세
어머니
브란덴부르크바이로이트의 크리스티아네 에버하르디네
배우자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요제파[1](1719년 결혼 / 1757년 사망)
자녀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 마리아 아말리아[2], 마리아 마르가레타, 마리아 안나[3], 프란츠 크사버, 마리아 요제파[4], 카를[5], 마리아 크리스티나, 마리아 엘리자베트, 알베르트 카지미르[6], 클레멘스 벤체슬라우스[7], 마리아 쿠니군데
종교
기독교 (루터교회로마 가톨릭)


1. 개요
2. 생애
2.1. 초기 경력
2.2.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2.3. 7년 전쟁 및 죽음
3. 자녀



1. 개요[편집]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겸 작센 선제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을 통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왕이 되었고 7년 전쟁 시기엔 합스부르크 제국과 손을 잡아 프로이센 왕국에 대항했다. 작센 선제후로서는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이다.


2. 생애[편집]



2.1. 초기 경력[편집]


1696년 10월 17일 작센의 수도 드레스덴에서 태어났다. 그는 작센 선제후 겸 폴란드 국왕 아우구스트 2세가 낳은 수많은 자식들[1] 중 유일한 적자였다. 그의 어머니는 브란덴부르크-바이로이트의 크리스티아네 에버하르디네로 호엔촐레른 가문의 프랑켄계 방계 출신이었다. 1712년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이 되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한 아버지를 따라 가톨릭으로 개종한 그는 작센 내 루터파 귀족들의 반란에 직면했으나 어렵사리 진압했다.


2.2.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편집]


1733년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이었던 아버지가 사망하자, 아우구스트 3세는 작센 선제후 직위를 물려받아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가 된 후 자신이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선출되어 한다고 주장했고, 러시아 제국과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대북방전쟁 당시 스웨덴의 지원을 받아 아우구스트 2세를 축출하고 폴란드 왕위에 올랐다가 스웨덴이 패한 뒤 프랑스 왕국으로 망명을 떠났던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가 사위 루이 15세의 지원을 받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이에 프랑스 왕국+폴란드 연합(스타니스와프 1세)과 작센(아우구스트 3세)+합스부르크 제국+러시아 제국 동맹 간의 갈등이 폭발하면서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졌다. 2년간의 치열한 전쟁을 치른 양 세력은 1735년 10월 3일 영국네덜란드의 중재를 받아들여 잠정적으로 전쟁을 중단한 뒤 1738년 에서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는 폴란드 왕위를 포기하고 로렌 공국을 영지로 받았고, 아우구스트 3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대관식을 치렀다.

그러나 아우구스트 3세는 정작 전쟁까지 치르면서 얻어낸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드레스덴에서 사냥, 오페라, 미술품 수집에 열을 올릴 뿐 정치 자체에 손을 뗐다.[2] 그는 30년 동안의 폴란드 통치 기간 중 불과 3년 미만을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보냈고 폴란드 유력 가문들간의 정쟁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이를 수습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는 폴란드-리투아니아 관리의 총체적인 책임을 총신인 하인리히 폰 브륄(Heinrich von Brühl 1700~1763)에게 위임했고 브륄이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난정을 일삼는 걸 방치했다. 이 때문에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갈수록 쇠락해졌고 훗날 폴란드 분할을 당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2.3. 7년 전쟁 및 죽음[편집]


7년 전쟁이 발발한 1756년 8월 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작센을 침공하자, 9월 8일 드레스덴을 떠나 피르나에 주둔한 작센군에 합류했다. 아우구스트 3세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오스트리아군 원수 막시밀리안 율리시즈 폰 브라운은 그에게 10월 11일까지 기다려달라고 응답했다. 그러나 브라운 원수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이 로보지츠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에게 패배하자, 피르나에 주둔한 작센 수비대는 10월 16일에 항복했고 아우구스트 3세는 10월 20일 바르샤바로 도주했다. 10월 27일 바르샤바에 도착한 아우구스트 3세는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서 지냈으나 별다른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저 사냥과 취미 생활에만 열중했다.

전쟁이 끝난 뒤, 아우구스트 3세는 1763년 8월 2일 드레스덴으로 돌아왔으나 불과 2달 후인 10월 5일 뇌졸중으로 67세에 세상을 떠났다. 장남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이 그의 뒤를 이어 작센 선제후가 되었으나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는 러시아 제국 예카테리나 2세의 지원을 받은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가 선출되었다.

그가 죽자, 당시 드레스덴 궁정악장이였던 작곡가 요한 아돌프 하세가 그의 장례미사를 위해 레퀴엠 C장조를 작곡하였다.


3.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남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
(Friedrich Christian, Kurfürst von Sachsen)
1722년 9월 5일
1763년 12월 17일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토니아 여공작[3]
슬하 3남 1녀[4]
1녀
스페인의 왕비 마리아 아말리아
(Maria Amalia, Reina consorte de España)
1724년 11월 24일
1760년 9월 27일
카를로스 3세
슬하 6남 2녀[5]
2녀
마리아 마르가레타 공주
(Maria Margareta von Sachsen)
1727년 9월 13일
1734년 2월 1일

3녀
바이에른의 선제후비 마리아 안나
(Maria Anna von Sachsen, Kurfürstin von Bayern)
1728년 8월 29일
1797년 2월 17일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6]
2남
프란츠 크사버 왕자
(Franz Xaver von Sachsen)
1730년 8월 25일
1806년 6월 21일
마리아 키아라 스피누치
슬하 3남 7녀
4녀
프랑스의 왕세자비 마리아 요제파
(Maria Josepha von Sachsen, Dauphine de France)
1731년 11월 4일
1767년 3월 22일
프랑스의 왕세자 루이[7]
슬하 4남 3녀[8]
3남
쿠를란드 공작 카를
(Karl von Sachsen, Herzog von Kurland und Semgallen)
1733년 7월 13일
1796년 6월 16일
프란치슈카 크라신스카[9]
슬하 1녀[10]
5녀
르미르몽의 수녀원장 마리아 크리스티나
(Maria Christina von Sachsen, abbesse de l'abbaye de Remiremont)
1735년 2월 15일
1782년 11월 19일

6녀
마리아 엘리자베트 공주
(Maria Elisabeth von Sachsen)
1736년 2월 9일
1818년 12월 24일

4남
테셴 공작 알베르트 카지미르
(Albert Kasimir von Sachsen-Teschen)
1738년 7월 11일
1822년 2월 10일
테셴 여공작 마리아 크리스티나 여대공[11]
슬하 1녀
5남
트리어 선제후 클레멘스 벤체슬라우스
(Clemens Wenzeslaus von Sachsen, Kurfürst von Trier)
1739년 9월 28일
1812년 7월 27일

7녀
에센 수녀원장 마리아 쿠니군데
(Maria Kunigunde von Sachsen, Fürstäbtissin von Essen)
1740년 11월 10일
1826년 4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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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설에 따르면 365명에 달하는 사생아를 낳았다고 한다.[2] 귀족들 천국인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난잡한 정치판에 학을 떼서라는 설이 있지만, 이 인간은 애초에 통치에 손을 놓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 살았던 인간이다. 본국인 작센도 통치에 거의 손을 놓은 사람이 폴란드-리투아니아라고 뭐 얼마나 관심이 있었을지.[3] 카를 7세의 장녀이자 요제프 1세의 외손녀.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과는 이종사촌간.[4]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 안톤[5]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 마리아 루이사, 카를로스 4세, 페르디난도 1세[6] 카를 7세의 장남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1세의 외손자로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의 마지막 군주이다. 마리아 안나와는 이종사촌간.[7] 루이 15세마리 레슈친스카의 장남.[8] 루이 16세, 루이 18세, 샤를 10세, 사르데냐의 왕비 마리아 클로틸데, 엘리자베트 공주[9] 폴란드 백작가의 딸이었다. 명백히 귀천상혼으로 간주되는 결혼이었지만 그나마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2세가 Prinzessin 칭호를 내려주었고, 덕분에 딸은 사르데냐 왕국 사보이아 왕가의 분가로 시집갈 수 있었다.[10] 카리냐노 공작부인 마리아 크리스티나, 이탈리아 왕국 초대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할머니이다. 카를로 펠리체를 끝으로 사보이아 왕가의 직계가 단절되면서 남편 카를로 에마누엘레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카를로 알베르토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왕이 되었고, 뒤이어 왕위를 이어받은 카를로 알베르토의 장남이 바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이다.[11] 프란츠 1세마리아 테레지아의 4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