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웅산수지

최근 편집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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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평화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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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2> 1901 ||<-2> 1902 ||
|| [[파일:스위스 국기.svg|width=40]] ||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40]] || [[파일:스위스 국기.svg|width=40]] || [[파일:스위스 국기.svg|width=40]] ||
|| [[앙리 뒤낭]] || 프레데리크 파시 || [[엘리 뒤코묑]] || [[샤를 알베르 고바]]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03 || 1904 || 1905 || 1906 ||
|| [[파일:영국 국기.svg|width=40]] || - ||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1896-1908).svg|width=40]] ||
|| 윌리엄 크리머 || 국제법학회 || [[베르타 폰 주트너]] || [[시어도어 루스벨트]]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2> 1907 ||<-2> 1908 ||
||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width=40]] ||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40]] || [[파일:스웨덴 국기.svg|width=40]] || [[파일:덴마크 국기.svg|width=40]] ||
|| 에르네스토 모네타 || 루이 르노 || 클라스 아르놀드손 || 프레데리크 바예르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2> 1909 || 1910 || 1911 ||
||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40]] || [[파일:벨기에 국기.svg|width=40]] || - ||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width=40]] ||
|| 데스투르넬 드 콩스탕 || 오귀스트 베르나르트 || 국제평화국 || 알프레트 프리트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11 || 1912 || 1913 || 1917 ||
|| [[파일:네덜란드 국기.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width=40]] || [[파일:벨기에 국기.svg|width=40]] || [[파일:적십자 기.svg|width=40]] ||
|| 토비야스 아서르 || 일라이휴 루트 || 앙리 라퐁텐 || [[국제적십자위원회]]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19 || 1920 ||<-2> 1921 ||
||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width=40]] ||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40]] || [[파일:스웨덴 국기.svg|width=40]] || [[파일:노르웨이 국기.svg|width=40]] ||
|| [[우드로 윌슨]] || 레옹 부르주아 || [[얄마르 브란팅]] || 크리스티안 랑에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22 ||<-2> 1925 || 1926 ||
|| [[파일:노르웨이 국기.svg|width=40]] || [[파일:영국 국기.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width=40]] ||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40]] ||
|| [[프리드쇼프 난센]] || [[오스틴 체임벌린]] || [[찰스 G. 도스]] || [[아리스티드 브리앙]]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26 ||<-2> 1927 || 1929 ||
|| [[파일:독일 국기(3:2 비율).svg|width=40]] ||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40]] || [[파일:독일 국기(3:2 비율).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width=40]] ||
||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 페르뒤낭 뷔숑 || 루트비히 크비데 || [[프랭크 켈로그]]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30 ||<-2> 1931 || 1933 ||
|| [[파일:스웨덴 국기.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width=40]] || [[파일:영국 국기.svg|width=40]] ||
|| 나탄 쇠데르블룸 || [[제인 애덤스]] || 니콜라스 버틀러 || 노먼 엔젤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34 || 1935 || 1936 || 1937 ||
|| [[파일:영국 국기.svg|width=40]] ||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width=40]] ||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width=40]] || [[파일:영국 국기.svg|width=40]] ||
|| 아서 헨더슨 || [[카를 폰 오시에츠키]] || 카를로스 라마스 || 로버트 세실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38 || 1944 || 1945 || 1946 ||
|| [[파일:국제연맹 기.png|width=40]] || [[파일:적십자 기.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svg|width=40]] ||
|| 난센 국제난민 사무국 || [[국제적십자위원회]] || [[코델 헐]] || 에밀리 발치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46 || 1947 || 1949 || 1950 ||
||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width=40]] || [[파일:Quaker_star-T.svg|width=40]] || [[파일:영국 국기.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width=40]] ||
|| [[존 모트]] || [[퀘이커(종교)|퀘이커 봉사협회]] || 보이드 오어 || 랠프 번치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51 || 1952 || 1953 || 1954 ||
||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40]] ||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width=40]] || [[파일:UN기.svg|width=40]] ||
|| 레옹 주오 || [[알베르트 슈바이처]] || [[조지 C. 마셜|조지 마셜]] || 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57 || 1958 || 1959 || 1960 ||
|| [[파일:캐나다 자치령 국기.svg|width=40]] || [[파일:벨기에 국기.svg|width=40]] || [[파일:영국 국기.svg|width=40]] ||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width=40]] ||
|| [[레스터 피어슨]] || 도미니크 피르 || 필립 베이커 || 앨버트 루툴리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61 || 1962 || 1963 || 1964 ||
|| [[파일:스웨덴 국기.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svg|width=40]] || [[파일:적십자 기.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svg|width=40]] ||
|| [[다그 함마르셸드]] || [[라이너스 폴링]] || [[국제적십자위원회]] || [[마틴 루터 킹]]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65 || 1968 || 1969 || 1970 ||
|| [[파일:유니세프 로고.svg|width=40]] ||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width=40]] || [[파일:국제노동기구 로고.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svg|width=40]] ||
|| [[유니세프]] || 르네 카생 || [[국제 노동 기구]] || [[노먼 볼로그]]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71 ||<-2> 1973 || 1974 ||
|| [[파일:독일 국기.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svg|width=40]] || [[파일:베트남 국기.svg|width=40]] ||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width=40]] ||
|| [[빌리 브란트]] || [[헨리 키신저]] || 레득토 || [[사토 에이사쿠]]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74 || 1975 ||<-2> 1976 ||
|| [[파일:아일랜드 국기.svg|width=40]] || [[파일:소련 국기(1955-1980).svg|width=40]] || [[파일:영국 국기.svg|width=40]] || [[파일:영국 국기.svg|width=40]] ||
|| 숀 맥브라이드 || [[안드레이 사하로프]] || [[베티 윌리엄스]] || [[메어리드 코리건]]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77 ||<-2> 1978 || 1979 ||
|| [[파일:국제앰네스티 로고.svg|width=40]] || [[파일:이집트 국기(1972-1984).svg|width=40]] || [[파일:이스라엘 국기.svg|width=40]] || [[파일:인도 국기.svg|width=40]] ||
|| [[국제사면위원회]] || [[안와르 사다트]] || [[메나헴 베긴]] || [[테레사 수녀]]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80 || 1981 ||<-2> 1982 ||
||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width=40]] || [[파일:UN기.svg|width=40]] || [[파일:스웨덴 국기.svg|width=40]] || [[파일:멕시코 국기.svg|width=40]] ||
|| 아돌포 에스키벨 || 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 || [[알바 뮈르달]] || 알폰소 가르시아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83 || 1984 || 1985 || 1986 ||
|| [[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width=40]] ||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width=40]] || - || [[파일:미국 국기.svg|width=40]] ||
|| [[레흐 바웬사]] || [[데즈먼드 투투]] || 핵전쟁방지국제의사회 || [[엘리 비젤]]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87 || 1988 || 1989 || 1990 ||
|| [[파일:코스타리카 국기.svg|width=40]] || [[파일:UN기.svg|width=40]] || [[파일:티베트 국기.svg|width=40]] || [[파일:소련 국기.svg|width=40]] ||
|| [[오스카르 아리아스]] || [[유엔 평화유지군]] || [[달라이 라마 14세]] || [[미하일 고르바초프]]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91 || 1992 ||<-2> 1993 ||
|| [[파일:미얀마 국기(1974-2010).svg|width=40]] || [[파일:과테말라 국기.svg|width=40]] ||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width=40]] ||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width=40]] ||
|| [[아웅산 수치]] || [[리고베르타 멘추]] || [[넬슨 만델라]] || [[프레데리크 빌럼 데 클레르크]]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3> 1994 || 1995 ||
|| [[파일:이스라엘 국기.svg|width=40]] || [[파일:이스라엘 국기.svg|width=40]] || [[파일:팔레스타인 국기.svg|width=40]] || [[파일:폴란드 국기.svg|width=40]] ||
|| [[이츠하크 라빈]] || [[시몬 페레스]] || [[야세르 아라파트]] || 조지프 로트블랫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95 ||<-2> 1996 || 1997 ||
|| [[파일:캐나다 국기.svg|width=40]] || [[파일:인도네시아 국기.svg|width=40]] || [[파일:인도네시아 국기.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svg|width=40]] ||
|| 퍼그워시 회의 || 카를로스 벨로 || [[조제 하무스오르타]] || [[조디 윌리엄스]]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1997 ||<-2> 1998 || 1999 ||
|| - || [[파일:아일랜드 국기.svg|width=40]] || [[파일:영국 국기.svg|width=40]] || [[파일:국경없는의사회의 로고.svg|width=40]] ||
|| 지뢰금지국제운동 || [[존 흄]] || [[데이비드 트림블]] || [[국경없는의사회]]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2000 ||<-2> 2001 || 2002 ||
|| [[파일:대한민국 국기.svg|width=40]] || [[파일:UN기.svg|width=40]] || [[파일:가나 국기.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svg|width=40]] ||
|| [[김대중]] || [[유엔]] || [[코피 아난]] || [[지미 카터]]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2003 || 2004 ||<-2> 2005 ||
|| [[파일:이란 국기.svg|width=40]] || [[파일:케냐 국기.svg|width=40]] || [[파일:국제원자력기구 깃발.svg|width=40]] || [[파일:이집트 국기.svg|width=40]] ||
|| [[시린 에바디]] || [[왕가리 마타이]] || [[국제원자력기구]] || [[무함마드 엘바라데이]]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2> 2006 ||<-2> 2007 ||
|| [[파일:방글라데시 국기.svg|width=40]] || [[파일:방글라데시 국기.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svg|width=40]] || - ||
|| [[무함마드 유누스]] || [[그라민 은행]] || [[앨 고어]] ||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패널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2008 || 2009 || 2010 || 2011 ||
|| [[파일:핀란드 국기.svg|width=40]] || [[파일:미국 국기.svg|width=40]] || [[파일:중국 국기.svg|width=40]] || [[파일:라이베리아 국기.svg|width=40]] ||
|| [[마르티 아티사리]] || [[버락 오바마]] || [[류샤오보]] || [[엘런 존슨 설리프]]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2> 2011 || 2012 || 2013 ||
|| [[파일:라이베리아 국기.svg|width=40]] || [[파일:예멘 국기.svg|width=40]] || [[파일:유럽 연합 깃발.svg|width=40]] || [[파일:화학무기금지기구 로고.svg|width=35]] ||
|| [[리마 보위]] || [[타우왁쿨 카르만]] || [[유럽연합]] || [[화학무기금지기구]]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2> 2014 || 2015 || 2016 ||
|| [[파일:파키스탄 국기.svg|width=40]] || [[파일:인도 국기.svg|width=40]] || [[파일:튀니지 국기.svg|width=40]] || [[파일:콜롬비아 국기.svg|width=40]] ||
|| [[말랄라 유사프자이]] || [[카일라시 사티아르티]] || [[튀니지 국민4자대화기구]] || [[후안 마누엘 산토스]]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2017 ||<-2> 2018 || 2019 ||
|| - || [[파일:콩고민주공화국 국기.svg|width=40]] || [[파일:이라크 국기.svg|width=40]] || [[파일:에티오피아 국기.svg|width=40]] ||
|| [[핵무기 폐기 국제 운동]] || [[드니 무퀘게]] || [[나디아 무라드]] || [[아비 아머드]]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 2020 ||<-2> 2021 || 2022 ||
|| [[파일:UN기.svg|width=40]] || [[파일:필리핀 국기.svg|width=40]] || [[파일:러시아 국기.svg|width=40]] || [[파일:러시아 국기.svg|width=40]] ||
|| [[세계식량계획]] || [[마리아 레사]] || [[드미트리 무라토프]] || [[안드레이 사하로프|메모리알]] ||
||<rowbgcolor=#663334><rowcolor=#cd9f51><-2> 2022 || 2023 || ||
|| [[파일:우크라이나 국기.svg|width=40]] || [[파일:벨라루스 국기.svg|width=40]] || [[파일:이란 국기.svg|width=40]] || ||
|| [[시민자유센터]] || [[알레스 발랴츠키]] || [[나르게스 모하마디]] || ||


United States Congressional Gold Medal
미합중국 의회 명예 황금 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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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년
1777년
1779년
1781년
조지 워싱턴
소장 호레이쇼 게이츠
소장 앤서니 웨인
사령관 헨리 리 3세
준장 대니얼 모건
1781년
1787년
1800년
1805년
1813년
소장 너새니얼 그린
존 폴 존스
대령 토머스 트럭스턴
준장 에드워드 프레블
대령 아이작 헐
대령 스티븐 디케이터
대령 제이컵 존스
1813년
1814년
대령 윌리엄 베인브리지
대령 올리버 해저드 페리
대령 제시 엘리엇
대위 윌리엄 워드 버로스 2세
대위 에드워드 매콜
대령 제임스 로렌스
대령 토머스 맥도너
대령 로버트 헨리
대위 스티븐 카신
1814년
1814년, 1848년
1814년
대령 루이스 워링턴
대령 존스턴 블레이클리
소장 제이컵 브라운
소장 윈필드 스콧
소장 피터 부엘 포터
준장 엘리저 윌락 리플리
대령 제임스 밀러
1814년
1815년
1816년
소장 에드먼드 P. 게인스
소장 알렉산더 마콤
소장 앤드루 잭슨
대령 찰스 스튜어트
대령 제임스 비들
1818년
1835년
1846년, 1847년, 1848년
1847년
1854년
소장 윌리엄 해리슨
주지사 아이작 셸비
대령 조지 크로간
소장 재커리 테일러
소머스 호의 장교 및 승무원 구출
중령 덩컨 잉그함
1858년
1863년
1864년
1866년
1867년
프레더릭 로즈
소장 율리시스 S. 그랜트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로버트 크레이튼
에드윈 J. 로
조지 C. 스투퍼
사이러스 웨스트 필드
1867년
1871년
1873년
1874년, 1904년
1883년
조지 피보디
조지 F. 로빈슨
대령 재러드 크랜달 그 외
존 혼 주니어
존 폭스 슬레이터
1888년
1890년
1900년
1902년
1909년
조지프 프랜시스
수석 엔지니어 조지 W. 멜빌 그 외
중위 프랭크 H. 뉴컴
중위 데이비드 H. 자비스
소위 엘스워스 P. 버트홀프
새뮤얼 J. 콜 박사
라이트 형제
1912년
1914년
1915년
1928년
선장 아서 로스트론
폴 H. 크라이봄 그 외
로물로 세바스티안 나온
에두아르도 수아레스 무히카
찰스 린드버그
로알 아문센
움베르토 노빌
1928년
1929년
1930년
1936년
토머스 에디슨
최초로 성공한 대서양 횡단 비행사들
소령 월터 리드
준장 리처드 에벌린 버드
링컨 엘즈워스
1936년
1938년
1939년
1940년
조지 코한
리처드 올드 리치 부인
안나 불리니
하워드 휴즈
목사 프랜시스 퀸
윌리엄 시넛
1942년
1945년
1946년
롤런드 바우처
1939-1941년 미국 남극 탐험대 멤버들
미합중국 육군 원수 조지 C. 마셜
미합중국 해군 원수 어니스트 킹
미합중국 육군 원수 존 조지프 퍼싱
준장 빌리 미첼
1949년
1954년
1955년
1956년
1958년
앨번 W. 바클리
어빙 벌린
조너스 소크 박사
남북 전쟁의 참전 용사들
준장 하이먼 리코버
1959년
1960년
1961년
1962년
로버트 고다드
로버트 프로스트
토머스 앤서니 둘리 3세
밥 호프
샘 레이번
1962년
1968년
1969년
1973년
1977년
미합중국 육군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월트 디즈니
윈스턴 처칠
로베르토 클레멘테
매리언 앤더슨
1978년
1979년
중장 아이라 C. 이커
로버트 F. 케네디
존 웨인
벤 아브러조
맥시 앤더슨
래리 뉴먼
휴버트 험프리
1979년
1980년
1982년
미국 적십자
케네스 테일러
1980 미국 하계 올림픽 팀
베아트릭스 여왕
대장 하이먼 리코버
1982년
1983년
프레드 워링
조 루이스
루이스 라머
레오 라이언
대니 토머스
1984년
1985년
해리 S. 트루먼
레이디 버드 존슨
엘리 비젤
로이 윌킨스
조지 거슈윈
아이라 거슈윈
1986년
1987년
1988년
네이선 샤란스키
에비탈 샤란스키
해리 차핀
에런 코플런드
메리 래스커
제시 오언스
1988년
1990년
1991년
앤드루 와이어스
로런스 록펠러
대장 매튜 B. 리지웨이
대장 노먼 슈워츠코프
대장 콜린 파월
1994년
1996년
1997년
랍비 메나헴 멘델 쉬니어슨
루스 그레이엄
빌리 그레이엄
프랭크 시나트라
마더 테레사
바르톨로메오스 1세
1998년
1999년
넬슨 만델라
리틀록 9인
제럴드 포드
베티 포드
로자 파크스
시어도어 헤스버그
2000년
존 오코너
찰스 M. 슐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로널드 레이건
낸시 레이건
나바호족 코드 토커
2002년
2003년
대장 휴 셸턴
토니 블레어
재키 로빈슨
도러시 하이트 박사
조지프 디레인
해리 & 일라이자 브릭스
레비 피어슨
2004년
2006년
마틴 루터 킹
코레타 스콧 킹
터스키기 에어맨
달라이 라마 14세
바이런 넬슨
노먼 볼로그 박사
2007년
2008년
마이클 데바키 박사
아웅 산 수 치
콘스탄티노 브루미디
에드워드 윌리엄 브룩 3세
아메리카 원주민 코드 토커
2009년
2010년
여성 공군 군무원 조종사들
닐 암스트롱
버즈 올드린
존 글렌
아널드 파머
무함마드 유누스
제100 보병대대
제442 보병연대 전투단
군사정보국
2011년
2012년
2013년
몬트포드 포인트 해병전우회
2001년 9월 11일 미국에 대한 테러 공격으로 사망한 남녀들
라울 발렌베리
애디 메이 콜린스
데니스 맥네어
캐럴 로버트슨
신시아 웨슬리
제1 특수임무단
2014년
둘리틀 특공대 멤버들
미국의 공군 에이스들
제2차 세계 대전 민간 항공 초계 부대 멤버들
시몬 페레스
모뉴먼츠 맨
2014년
2015년
2016년
제65 보병연대
잭 니클라우스
셀마 몽고메리 행진
제2차 세계 대전 필리핀인 참전 용사들
OSS
2017년
2018년
밥 돌
래리 도비
제2차 세계 대전 중국계 미국인 참전 용사들
USS 인디애나폴리스의 승무원들
안와르 사다트
2019년
스티브 글리슨
캐서린 존슨
크리스틴 다든
도로시 본
메리 잭슨
2019년
2020년
2021년
무명의 수여자들
그렉 르몬드
미국 국회의사당 경찰 및 컬럼비아구 경찰청 소속 경찰관들
제369 보병연대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서 전사한 13명의 장병
2022년
2023년
미 육군 제23 부대 본부 특수부대
제3133 신호 복무 중대
제6888 중앙우편대대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상선 선원들
에밋 틸
메이미 틸모블리





미얀마 제1대 국가고문
အောင်ဆန်းစုကြည်


파일:41593_32308_3831.jpg

အောင်ဆန်းစုကြည်[1]
Aung San Suu Kyi
아웅산수지

출생일
1945년 6월 19일(78세)
출생지
영국령 버마 랑군 파일:영국령 버마 기.png
국적
미얀마 파일:미얀마 국기.png
학력
지저스 & 메리 고등학교[2] (졸업)
델리 대학교 (정치학 / B.A) (1961-1964년)
옥스포드 대학교 세인트휴스 칼리지 (경제학 / M.A) (-1968년)
런던 대학교 (사회과학 / Ph.D) (-1985년)
가족
父: 아웅산 장군
母: 킨 치
배우자: 마이클 에어리스
슬하: 2남
약력
미얀마 하원의원
민주국민동맹 지도자 (1989년 – )
미얀마 에너지부장관
미얀마 교육부장관
미얀마 대통령실 장관
미얀마 외무부장관
미얀마 제1대 국가고문 (2016년 – )
정당
[[민주국민동맹|

민주국민동맹
]]
재임기간
2016년 4월 6일2021년 2월 1일
직업
정치인
종교
불교
별명
공작새, 철의 난초
서명
파일:아웅산수지_서명.png
SNS
파일:페이스북 아이콘.png 파일:트위터 아이콘.png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민주화 운동
2.3. 영향력
2.4. 총선 승리와 우려
2.5. 대통령 배출 이후 행보
3. 비판
3.1. 정치 스타일
3.1.1. 독재적 성향의 지도자?
3.1.2. 반박: 정권 유지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
3.2. 로힝야제노사이드에 대한 방조
3.2.1. 로힝야족의 특수성
3.2.2. 아웅산 수지에 대한 지지 양상의 특수성
3.2.3. 현재 로힝야족이 걷는 행보의 문제점과 여론
4. 대중 문화에서
5. 기타


1. 개요[편집]


미얀마의 민주화 운동가, 정치인. 2016년 기준으로 미얀마의 국가자문역 겸 외교부 장관이자 소속 정당인 민주국민동맹(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NLD)의 의장 겸 사무총장이다. 2021년 2월 1일 민 아웅 흘라잉 장군의 쿠데타로 사임했다.


2. 생애[편집]



2.1. 초기[편집]


미얀마[3]독립운동 지도자이자 현재 국부로 숭상받는 아웅산의 딸이다. 보조[4] 델리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배우고 옥스퍼드 대학교 세인트휴스 칼리지에서 경제학 석사과정을 공부하였으며, 이때 대학에서 남편인 마이클 에어리스를 만났다.

1985년부터 1986년까지 일본 교토대학의 동남아시아 연구소에서 객원연구원으로서 자신의 아버지인 아웅산 장군과 관련 역사에 대해서 연구하였다. 그 후로 27년 만인 2013년에야 교토대학으로 돌아와 특별 강연을 하게 된다.

수 지는 결혼 후엔 아들 둘을 낳고 교수 일을 하는 남편을 열심히 내조하며 영국 옥스포드에서 철저히 가정주부로 살았었다. 옥스퍼드 대학 출신으로 세계 어디에서도 무시당할 학벌이 아니었음에도 정말 아무 일도 안했던 완전 전업주부였기에, 그러한 생활에 질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랐을 쯤엔 대학원 진학이나 취업 등 자신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고 한다.


2.2. 민주화 운동[편집]


그러나 1988년에 어머니 병간호를 위해 버마로 귀국한 후 군사 통치에 반대하는 집회(통칭 8888 항쟁)에 참여하면서, 영국의 가정주부에서 갑자기 버마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본래 수지에겐 오빠(동시에 아웅산 장군의 아들)도 있었지만, 그녀의 오빠는 민주화 운동을 주도할 만한 정치적 역량은 없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어쨌든 8888항쟁 중에 갑자기 나타나 뛰어난 연설로 대중을 감동시킨 수지가 갑자기 버마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로 급부상하게 된 것이다. 한국으로 치자면 안중근 의사, 홍범도 장군, 백범 김구 주석의 자녀가 전두환 군부 정권에 맞서는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격 인물로 나선 것과 비슷한 셈.

영국에서 돌아온 수지는 버마를 일당 통치하던 사회주의계획 당에 다원적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고 버마 민중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야당 세력을 망라한 민주국민동맹(NLD,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을 창설하고 그 의장이 되었다.

수지가 주도한 민주화 운동은 네윈 장군을 권좌에서 물러나도록 만들었으나 결국 군사정부에 의한 대량학살의 비극으로 끝났으며 수지는 1989년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1990년 5월 미얀마[5]의 군사 정부는 서방의 압력에 의해 총선을 실시하였다. 총선 당시 수지는 피선거권을 박탈당한 상태였으나 수지의 인기에 힘입어 총선 결과는 수지가 이끄는 민주국민동맹(NLD)이 82%의 지지를 얻어 압승했다. 그러나 군사 정부는 선거 결과를 무효화하고 오히려 지도부 등 당원 수백 명이 투옥시켰고 2010년에 이르기까지 정권 이양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탄압을 가해왔다.

1991년 수지는 민주화 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평화상 수상식이 열렸을 때 그녀는 미얀마의 군부독재 세력에 의해 여전히 연금 상태에 있어, 두 아들과 남편이 그녀의 전면 사진을 들고 대신 참석했다.

파일:external/www.tutufoundationusa.org/Suu-Kyis-husband-Michael-Aris-with-their-sons-Alexander-and-Kim.jpg
노벨상 수상식에 대리 참석한 그녀의 남편 마이클 에어리스와 두 아들.

이후 1995년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수지는 가택연금에서 6년만에 풀려났지만, 1999년 남편이 영국에서 으로 사망할 때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우려해 출국을 포기했었다. 그리고 2000년 9월 2차 연금 조치로 양곤 밖으로의 여행을 금지 당했다.

2000년 9월부터 유엔특사 라잘리 이스마일의 중재 아래 수지는 군사정부와 정국 타개를 위한 비밀 협상을 벌여왔다. 그 결과 2002년 5월 미얀마 군사정부를 이끄는 국가평화발전협의회(SPDC)는 수지를 가택연금에서 해제했다.

하지만 2003년 5월 미얀마 군정은 수지가 이끄는 NLD 지지자와 친 군정 지지자들 사이에 유혈 충돌이 발생해 수지를 다시 구금했다.


2.3. 영향력[편집]


2010년 11월 13일, 국제 사회의 압력을 받은 미얀마 군정은 수지의 가택 연금을 해제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는 야당의 손발을 묶어 야당이 보이콧을 선언한 총선에서 여당이 압승을 거뒀기 때문이다. 여당은 25%의 자동의석을 더하여 75%의 의석을 차지했다. 여당이 사회주의 경제를 풀고 경제개발 정책 시늉을 한 것도 있고.

굳이 여기까지 안 보더라도 수지가 그야말로 미얀마 군정의 눈엣가시 같은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껏해야(?) 가택연금 조치에 그친 것은 국제 사회의 눈초리를 껄끄럽게 생각한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녀가 미얀마의 국부라고 할 수 있는 아웅산 장군의 딸이라는 점이 가장 큰 요인. 만일 수지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할 경우 미얀마 군부는 그 날로 국부인 아웅산 장군을 부정해버린거나 다름없기 때문에 오히려 내부에서부터 동요가 발생해 또 다른 쿠데타가 발생하는게 결코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수지의 가택연금 시절 미얀마에 입국해서 몰래 인터뷰했던 미국 언론인 안나 후살스키가 밝힌 바에 따르면, 결국 취재 활동을 미얀마 정부가 눈치채는 바람에 국외 추방 명령이 떨어져 공항으로 압송되어 가던 도중, 한 여경이 작은 목소리로 수지의 안부를 물었다고. 즉 독재정권의 지탱에 가장 중요한 기반 중 하나인 군이나 경찰 내에도 수지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광범위한 국민적 존경을 받고 있었다는 이야기.[6]

2012년 4월 1일에 치러진 미얀마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 85%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그야말로 몰표 또한 NLD는 45개 선거구 중 43곳에서 승리하는 기염을 토했다. # 다만 아직까지는 친군부계 통합단결발전 당(USDP)이나 정부군 소속 땃마도(Tatmadaw)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지라 어떠한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

파일:external/www.asiaone.com/20120616.202523_nobel.jpg
2012년 6월 16일, 노벨평화상 수상 21년 만에 노르웨이에서 수상 연설을 했다. 또한 2012년에 첫 해외 순방을 했다.

2013년 1월 28일부터 2월 1일까지 대한민국을 방문했다. 관련 기사. 2013 평창 동계 스페셜올림픽 세계대회 개막식에서 연설한 후 광주광역시를 방문해 지난 2004년에 5.18 재단에서 수상자로 결정했으나 그동안 받지 못했던 광주인권상을 받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또한 강운태 광주광역시장으로부터 명예시민증을 받고 5.18 국립묘지에 참배해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추념식수를 했다. 이 외에 전남대학교서울대학교에서 강연도 했다.
그러나, 2018년 12월 광주인권상을 박탈당했다. 미얀마내 소수민족인 로힝자/로힝자족에 대한 학살을 방조한 추악함이 들어남으로써 인권운동가로서의 이미지는 거품임을 계속 증명하고 있다.5·18기념재단 아웅산 수지 ‘광주인권상’ 박탈…"로힝자족 학살 방조"


2.4. 총선 승리와 우려[편집]


파일:external/images.indianexpress.com/suu-kyi.jpg

대한민국 시각 2015년 11월 10일 오전 기준, 총선에서 수지가 이끄는 야당의 압승이 확정됐다고 한다. 선거 의석(전체 의석의 75%. 나머지 25%는 군부 몫의 직능 비례대표) 중에 88%를 쓸어담으며 단독 정부 수립(전체 의석 중에 67% 이상)에 성공한 것이다. 53년간 이어져온 미얀마의 군부 독재가 종식 될 가능성이 열렸다. 하지만 1990년 총선 때처럼 군부가 또 불복을 선언할 가능성도 있고, 미얀마의 현행 헌법은 외국인 배우자 혹은 자녀를 둔 국민이 대통령 후보로써 입후보 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기에 영국 국적의 자녀가 있는 수지는 대통령을 출마할 수 없게 된다. 또한, 일각에서는 수지가 이제껏 정국을 운영해 온 경험이 없기에 독재를 종식한 이후, 그녀가 과연 독재의 허울에서 완벽하게 벗어나 미얀마의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국제 여론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녀가 미얀마의 정국을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2015년 11월 11일, 미얀마의 야당인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을 이끄는 수지가 차기 정권이 수립되면 자신이 모든 것을 결정하겠다잠깐!! 이거 누군가 떠오른다.는 발언을 해 논란이 일게 되었다.# 또 대통령은 축하 의전만 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미얀마에서는 앞서 적었다시피 외국인 배우자, 혹은 자녀를 둔 국민이 대통령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그녀는 대통령은 될 수 없고 총리에 오르는 것이 한계다.[7]

미얀마에서 수지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의 단독 집권 가능성이 높아지자 현재의 '미얀마'라는 국호가 1989년 이전의 '버마'로 회귀할지에 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버마는 본래 '브라만'이라는 어원에서 유래된 나라 이름인데 19세기, 영국이 버마를 식민 통치하면서[8] 영국인들이 '버마'라고 발음하고, 현지인들은 '미얀마'라고 발음하는데서 각각의 표기가 굳어졌다. 당시 군부는 국호를 '미얀마'로 바꾸며 이를 두고 "식민지 시절의 서구적인 색채에서 탈피하여 민족의 주체성을 강화한다."는 명분을 내세웠고 비슷한 이유에서 수도 '랑군'을 '양곤'으로 개명했다. 이는 유엔도 승인하여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이를 두고 수지를 비롯한 민주화 운동 세력들은 이러한 개명 조치에 대해 "총칼로 권력을 탈취한 뒤 집권의 명분을 세우기 위해 둘러댄 허울 좋은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며 '버마'와 '랑군'이라는 이름을 고수해왔고,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일부 서방 세력 또한 미얀마 군부의 집권 과정에 대한 정통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취지로 '버마'와 '랑군'의 표기를 사용해왔다.[9]

그러나 민주주의민족동맹(NLD)가 단독 집권하더라도 버마로의 국호 환원은 당장 일어날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김성원 부산 외국어대 아시아 대학 학장은 "1988년, 정치 입문 때의 혈기 넘치던 시절과 달리 지금의 아웅산수지는 자신을 끊임없이 견제해 온 군부의 힘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노회한 정치인이 되었다. 순조로운 집권을 이루기 위해 군부를 자극하는 일을 최대한 삼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본래 미얀마에는 주류인 버마족[10]을 제외하고 샨족[11], 카렌족[12], 중국계와 인도계[13], 그리고 몬족[14] 등이 같이 살고 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과연 주류인 버마족의 이름만을 내세운 국명이 옳은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2.5. 대통령 배출 이후 행보[편집]


2016년 3월 15일 수지가 이끄는 NLD의 대통령 후보로 나온 틴초 대통령이 드디어 당선되었다. 그러자 수지는 외무부 장관과 대통령 대변인을 겸직하게 된다. 맡은 직책이 막중하고 틴쩌가 이전까지는 주목받지 못했던 인물이며, 수지의 측근인 것을 보면 수지가 사실상 대통령의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보인다.

수지는 중국 외교부장(외무장관) 왕이와 제일 먼저 회담해 미얀마에 급격한 외교 노선의 변화가 없을 것임을 보였다. 그 외에 수지는 수감된 학생운동가들의 석방을 추진하고 차별이 우려되었던 소수민족에 자리를 나눠주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최근에는 로힝야족 탄압 방관으로 비판받고 있으며, 이에 따라 노벨평화상 수상 취소 여론까지 생겼다. 아래 참조. 노벨상을 주관하는 노벨재단이 미얀마 실권자 아웅산 수지 국가자문역 겸 외무장관의 행보에 유감을 표명했다. 그러나 이미 수여한 노벨평화상을 박탈하지는 않겠다고 밝혔다.노벨 재단 “아웅산 수지 행동은 유감, 노벨상 박탈은 않을 것” 박탈하면 자신들의 체면과 수준이 구겨지거든 하지만, 사실 로힝야족 문제는 영국미얀마에 대한 식민지배와 직접 연결되는 부분이라서 아웅 산 수지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로힝야족들이 바로 식민지배의 앞잡이이자, 불과 반 세기 전까지는 미얀마 사회의 기득권층이었기 때문에, 전후사정도 안 보고 그녀에게 모든 비난을 뒤집어씌웠다는 주장도 조금씩 나오는 상황이다[15]. 자세한 건 아래에서 후술.

로힝야족 탄압 방관에 실망한 영국의 옥스퍼드시, 아일랜드의 더블린시에서 항의의 의미로 명예시민권을 박탈하였다.아웅산 수지의 굴욕… 더블린, 명예시민권 박탈

국제엠네스티의 '양심대사상'과 광주시에서 선정하는 광주인권상까지 철회되었다.

로힝야족 탄압 국제사법재판소 참석을 한다.# 항변을 하였지만, 거센 반발만 받았다.

3. 비판[편집]


노벨평화상 수상자 중 가장 평판이 안 좋아진 인물로, 과거 민주화 운동가로서 주장했던 여러 철학과 비전들을 이후 자신이 정면으로 어기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사실상 과거의 명성은 대부분 사라진 상태다. 노벨평화상을 반납하라는 얘기도 자주 들린다.

3.1. 정치 스타일[편집]



3.1.1. 독재적 성향의 지도자?[편집]


수지가 이끄는 NLD가 총선과 대선에서 모두 승리한 후 대통령도 아닌 자신이 '모든 것을 결정하겠다.'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는데, 이에 대해 권위주의적이고 헌법을 무시하는 발언이라는 지적이 있다. 그녀가 미얀마의 민주화 투쟁을 한 것은 실로 대단한 공적이지만 이러한 발언들은 그간의 노력을 무색하게 만들 수도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게다가 민주화투쟁을 했었다고 해서 그것이 이제 자신이 모든것을 결정할수 있는 권력을 가지는것을 의미하는것은 아니다. 모든것을 결정하는 자를 무너뜨리기 위해 민주화투쟁을 한 그녀가 한말 치곤 상당히 씁쓸함을 주는 말이다.

독재와 억압에 저항했던 민주투사나 저항운동가들이 막상 독재를 무너뜨리고 기성정치인이 된 후에 타락하거나 무능한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는데 군부가 물러선 후 정권을 잡은 아웅산수지의 경우에도 이런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투쟁시에는 비타협과 굽히지 않는 고집이 미덕으로 작용하지만 민주주의 정치는 타협의 산물이기 때문에 운동가 시절과는 완전히 다른 능력과 품성이 요구되는데, 많은 독립투사나 민주화 영웅들이 이 괴리를 극복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단적인 예로 아프리카의 악명높은 독재자들 상당수가 2차대전이나 내전시기에 저항세력을 이끌었던 인물들이었으며 레흐 바웬사, 넬슨 만델라 등의 저항운동가들도 정치에 나선 후 독재자가 된 것은 아니지만 과거의 명성을 상당히 많이 깎아먹었다.[16]

아웅산 수지의 경우도 현실정치에 참여한 2년 동안 미얀마 시민이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있다.[17] 정치가는 아무리 처신을 잘해도 100%의 지지를 얻을 수 없는 직업이기 때문에 정치인이 된 아웅산수지에게 불만을 갖는 국민들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지만 저항운동가 시절의 개혁성향이 사라지고 기성 정치판에 물든 노회한 정치꾼이 되어 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아웅산 수지에 대한 비판자들은 군부와의 애매한 공존을 유지하려 한다거나 너무 권력집중적인 지도자의 모습을 비판하고 있다.

이미 수지는 전술한 NLD 의장 시절에도 운영에 다소 독단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미얀마가 민주화가 된 후 그녀의 이런 단점은 더욱 부각되고 있어서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불통 정치인이라는 평을 받고 있으며, 군사독재시절 저질러진 군부와 기업들의 부정부패 청산에도 눈을 감고 있어서 개혁 정치가가 아니라 또 한명의 기득권 정치인이 되어버렸다는 비아냥도 듣고 있다. 무너진 우상…미얀마 국부 딸 수지, 탄압·불통 화신 전락

여타 서방의 언론들과 함께 아웅산 수지를 찬양하던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2017년 10월 31일 '아웅산 수지에게 세계가 잘못했나'라는 제하의 해설기사를 통해 수지가 현재 폴 카가메 르완다 대통령, 로버트 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 수준은 아니더라도 독재자들의 성향을 노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수지가 미얀마의 자유민주화를 위한 투사라는 이미지 자체가 세계가 수지를 '확증편향'적으로 해석하며 수지의 긍정적면만을 취사선택한 결과라는 것이다. 수지가 집권하는 과정에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상황이 자주 있었으나 서방은 이를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대니엘 루프턴 콜게이트대 정치학 교수는 수지를 사례로 거론하며 "우리가 자꾸 외국 지도자들을 이상화하거나 악마화하는 상황에 빠진다"고 규정하며 '"자신의 믿음을 강화하는 정보만 무의식적으로 골라 수용하고 어긋나는 정보는 배척하게 된다는 정치 심리학의 개념인 '확증편향'"이 수지와 그 지지자들에게 강하게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또한 뉴욕타임즈는 수지가 권력을 얻는 과정에서 자신을 지원한 시민사회단체의 활동가들을 재빨리 배척하며 자신 주위에 예스맨으로 통칭되는 무비판적인 측근들만을 기용했으며 군부통치 때 반체제 인사들이 투옥된 것과 똑같이 수십명이 수지 정권 하에서 정부 비판을 제약하는 법 때문에 기소됐다는 점을 근거로 들며 수지의 '배신'을 보도했다. 호주 시드니의 로위연구소 연구원인 애런 코넬리 역시 "(수지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의 통치 성향"을 분석한 결과를 바탕으로 굳이 로힝야족 문제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수지라는 인물이 원래 자유민주적인 지도자는 아니었다고 분석한 점 역시 거론되며 아웅산 수지라는 정치 지도자의 이미지가 확증편향의 전형적인 산물이라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2017년 11월 1일 네이버-연합뉴스 '세계가 아웅산 수지에 속았나'…NYT 독재기질 안봤나못봤나 지적

2018년 9월 19일 전 정권 당시 국영 언론사에서 칼럼니스트로 일했던 '응아 민 스웨'에 대해 전날 선동 혐의를 적용해 7년형을 선고했다. 응아 민 스웨는 수지 여사와 그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의 집권 전인 테인 세인 준군사정부 당시 관영 언론 칼럼니스트로 일하며 수지 여사에 대한 비판적 글을 게시해왔다. 미얀마에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이러한 글을 본인의 페이스북에 게시해왔던 그는 지난 7월 페이스북에 수지 여사에 대해 성차별적인 발언을 포함한 비판을 내놔 체포됐다.'아웅산 수지 모욕' 페북 포스팅했다가…'징역 7년'

2018년 10월 11일 미얀마 최대 민영언론 소속의 언론인 3명이 아웅산 수지 여사의 측근을 비판했다는 혐의로 구속되며 미얀마에서 언론 탄압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더욱 거세지고 있다. 이번에 구속된 언론인은 일레븐 미디어 그룹의 주필인 초 조 린과 나이민, 수석 기자 표 와이 윈으로 현지 경찰은 이들이 형법 505조 b항를 위반했다고 밝혔다. 형법 505조 b항은 대중의 공포나 불안을 유발하거나 공공의 안녕을 해칠 수 있는 출판물이나 소문 등을 막는 내용이다.'언론까지 탄압' …미얀마, 수지측근 비판 언론인 구속


3.1.2. 반박: 정권 유지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편집]


그러나 위의 비판은 미얀마의 정치적 현실을 무시하고 지나치게 높은 잣대를 들이대는 이상주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미얀마는 이제 막 민주화가 되었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대한 경험 자체가 부족하고 한편으로 급격한 과거청산은 또 다른 피를 부를 수 있기 때문에 지나치게 급진적인 정책을 기대하는 것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하려는 아기(미얀마)에게 전력질주를 기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가인 김영삼김대중도 3김 시절에 진정한 민주주의를 추구하기보다는 당 총재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권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집권 후에도 군사독재 시절의 유산을 급격하게 청산하기보다는 점진적인 개선을 추구했듯이, 현재 미얀마 정치의 혼란상은 민주주의로 이행되는 과도기에 흔히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며 아웅산 수지 역시 민주주의적 정치에 대한 동경만 있었을 뿐 직접적으로 경험해 본 적은 없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혼란은 불가피하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며 얼마나 빨리 혼란을 추스르는지가 관건인 셈이다. 또한 군부가 권력을 내려놓긴 했으나 여전히 미얀마 내에서 막강한 위상을 갖고 있는 집단이며 군사독재 20여년간 미얀마의 엘리트들이 출세를 위해 대거 군부에 가담하거나 그들과 손을 잡고 있기 때문에 이들과 급격하게 단절을 선언할 경우 나라를 이끌어갈 인재가 태부족해지게 되고 이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킬 우려도 있다.

미얀마의 민주화는 군부를 쓰러뜨려서 이룩한게 아니고, 군부가 외부의 눈치로 그냥 물러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녀에게 많은 걸 바라는거 자체가 굉장히 순진한 생각일 수가 있다.[18] 그녀가 지도자로 집권하는걸 막기 위해 군부는 물러나기 전에 외국 국적의 자녀를 둔 사람은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요상한 법을 제정해놔서 그녀의 출마를 막아서 측근을 대통령으로 올려서 간접적으로 지배할 수 밖에 없었으며, 그밖에 국회의석의 일부를 군부가 가진다던지하는 여러가지 똥덩어리를 잔뜩 만들어놓고, 물러난 상태다. 아래 로힝야족 탄압도 그냥 그녀가 군대를 장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 중 하나이고, 구세대 독재세력이 전혀 청산되지 못한 상태에서 이들의 방해를 물리치면서 점진적인 민주화를 이끌어야 하는 굉장히 어려운 과제에 직면해있는 그녀를 외부 세계는 너무 쉽게 함부로 재단하고 있다.

현재 중앙정부와 군사정부가 따로인 상황에서[19] "진보적 민주혁명가인줄 알았는데, 실망이네" 이런 식으로 주장하면 피곤하다. 그냥 그녀가 아무탈없이 다음 민주적 대통령에게 무사히 정권의 평화적인 이양만 해도 그 자체가 큰 업적이 될 것이다. 혁명 다음에 새 시대가 열렸다는 과도한 주변과 국민의 기대와 거기 부응하고자 하는 무리함, 그리고 본인의 아집, 좁은 시야 등으로 함부로 처신하다가 고작 1대를 못넘기고, 아랍의 봄으로 무바라크가 청산된 이집트처럼 구세력의 반격으로 무너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20] [21] 그것만 막아도 그녀는 크게 평가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군부의 눈치를 봐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군부와 '현실적'인 한계로 타협을 한다는 변명을 100% 수용하더라도, 그 행동 자체가 수지 측이 이야기하던 '민주화'와 '개혁'에 대한 왜곡이며 그 타협의 결과 역시 인종청소라는 결과만을 낳았을 뿐인 실패 그 자체라고 볼 수도 있다.


3.2. 로힝야제노사이드에 대한 방조[편집]


파일:external/www.hrw.org/201304ASIA_Burma_Arakan_01.jpg

로힝야 족이 거주하고 있는 마을에 불을 질러 주민 전원을 살해하는 장면.

인구 대다수가 불교 신자인 버마는 군사 독재 시절부터 불교를 믿지 않는 소수민족들, 특히 로힝야 족의 시민권을 무효로 하고, 방글라데시에서 온 불법 거주자로 규정해 국제적 감시망과 국제법의 빈 틈에서 소수민족들을 학살해 왔다.[22]이 과정에서 수 만 명의 소수 민족들이 끔찍한 인권 탄압 - 살해, 강간, 폭행 -을 당하고 있고, 많은 소수 민족들이 탄압을 피해 방글라데시로 피난을 가는 상황이다. UN은 "심각한 인권 침해"에 대해 전부터 우려를 표해 왔으며, 국제인권감시기구는 로힝야 족에 대한 탄압을 제노사이드로 보고 있다. 미얀마 정부는 전부터 학살 자체를 부인해 왔으며, 현장에 대한 언론과 국제 기구의 접근을 제한하고 정보를 차단해 왔다.

군부 독재가 끝나고 민주 정권이 들어서면서 제노사이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으나, 아웅산수지는 이 문제에 대해 비정상적일 정도로 침묵을 지키고 있다. 제노사이드에 관한 질문이 나올 때마다 수지는 "단순한 조작, 루머일 뿐"이라는 식으로 질문을 웃어 넘기고 있다.# 다른 언론 인터뷰에서는 외신이 조작한다는 말을 했다.#

유엔은 아웅산 수지를 향해 현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직접 확인하라고 주문했고, 미얀마 주재 서방 외교관리들은 사실확인과 피해자인 로힝야족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위한 현장 접근을 요구하고 나섰다.# 결국 아웅산 수지는 아세안 회의에 참석해 해명했다.#또한 이슬람 국가에서도 이에 대한 비판이 강한데, 로힝야 족은 이슬람 교도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아웅산수지의 노벨 평화상을 박탈해야 한다는 시위도 일어났다. 군부에 대항하던 아웅산 수지의 든든한 조력자였던 서방언론에서도 이 문제에 관해서는 수지에 매우 비판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BBC-왜 아웅산 수지는 행동하지 않는가? 워싱턴 포스트-아웅산 수지의 수치스러운 침묵 뉴욕타임즈-노벨평화상의 굴욕 유엔 또한 "미얀마의 학살은 교과서적인 제노사이드" #로 규정하였다.

다만 이 문제는 미얀마 내의 굉장한 특수성이 있기 때문에, 아래의 내용들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이것이 왜 일어났는지를 면밀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이유를 두고서도, 학살이라는 행위 자체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부분인 만큼 무조건적인 긍정도, 맥락없는 부정도 경계해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아웅산수지는 이후에도 로힝야 탄압을 지지하고 제노사이드를 방조해 국제사회는 결국 아웅산수지도 공범자로 보고 있다. 2018년에는 아웅산수지가 수상했던 많은 상과 명예 시민권이 박탈당했고 노벨평화상은 위원회가 박탈이 불가능하다고 밝혔지만 국제사회는 아웅산수지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 중에는 국제엠네스티의 '양심대사상(Ambassador of Conscience Award)'을 철회했다#

2019년 11월 11일에 무슬림 국가인 감비아이슬람협력기구(OIC)를 대신해 미얀마를 로힝야족 집단학살 혐의로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하였다. 동년 12월 11일에 아웅산수지는 미얀마 정부 대표 대리인자격으로 재판에 피고로 출석하였다. 아웅산수지는 재판에서 미얀마군이 로힝야 반군의 공격에 대응한 것으로 집단학살의도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3.2.1. 로힝야족의 특수성[편집]


우선 이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로힝야족의 역사적 특성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로힝야란 말의 첫 언급은 아라칸의 영국 식민지화 이전인 1799년 Francis Buchanan-Hamilton의 "Burma Empire"란 책에서 처음 등장한다. 그 책에서 로힝야를 언급하는 부분은 "아라칸에 오랫동안 정착한 무슬림들은 자신들을 루잉아(rooinga) 혹은 아라칸의 원주민이라고 부른다."라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것이 대중화된 표현은 아니었고, 데렉 토킨의 경우 해밀턴이 이후 출판물에서 루잉아란 표현을 아라칸의 무슬림들에게 쓴 적이 없다고 말하며 이때 로힝야족이 정말 있었느냐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로힝야 자신들도 쓰는 표현이 두개에다가 로힝야란 표현을 해밀턴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만들어내기도 힘들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그리피스 대학의 앤드류 셀스 교수처럼 일부 로힝야는 토착민이지만 대부분의 로힝야가 영국 식민지 시기 이주한 벵골 출신 이주민이라고 보고 있다.

어쨌든, 현재의 로힝야족의 대부분은 영국 식민지 시절 이주 노동자로 버마에 온 인도계 벵골인들, 즉 무슬림들이다. 실제로 1990년대까지 미얀마인들은 로힝야족을 벵골인이라고 불렀으며, 이들의 언어 또한 미얀마어와 전혀 관계가 없어서 미얀마인과는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 이들의 언어는 치타공어와 단어 몇 개가 다른 수준일 뿐 억양마저 동일하여, 벵골어와 거의 같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언론기사에서 종종 다루는 바와 같이 로힝야 난민과 방글라데시, 인도 서벵골 주의 사람들은 자유롭게 의사소통이 된다.

역사적으로 로힝야족, 미얀마인들이 벵골인이라 불리는 이들 집단은 영국 식민지 시절 영국과 결탁하여 스스로의 기득권을 키우려 했던 집단이었으며, 이들의 이주 과정에서 미얀마인들은 자신의 땅을 이들에게 빼앗겼다고 인식하였다. 또 영국은 자신들의 편에 있던 로힝야족을 무장시켰고, 이들을 활용하여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정작 일본인과 싸운 게 아니라 미얀마인들을 학살하였고, 자신들과 종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불교 사원을 부수고 승려를 학살하는 등 종교 갈등을 일으켰다. 즉 일제 강점기 시대를 기준으로 보면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과 일제의 식민지였던 대만에서 살던 중국인 한족 친일파들이 일본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고 한국으로 이주해와 한국인을 학살, 착취하며 지배권을 행사한 것과 비슷한 상황으로 볼 수 있다.

현재는 라카인 주에만 로힝야족이 존재하지만 식민지 시대 당시에는 미얀마 전토에 이런 뱅갈인들의 농장이 널려있었고 따라서 미얀마 일대에 거주하는 모든 민족들에게 자기땅을 빼앗은 원수로 받아들여졌다. 시작부터 이들은 농민에게 농경지를 빼앗는 "불구대천의 원수"의 조건을 가지고 시작했고 끊임없이 문화/종교적 갈등을 일으키던 찰나에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인이 일본과 항전하라고 로힝야인들을 무장시키자 이들이 일본인과 싸우기는 커녕 불교사원을 부수고 불교도를 미얀마 전토에서 25,000 명을 학살해 모든 소수민족에게 원한을 남겼다. 미얀마 독립 이후에 이 벵골인들을 전부 추방시키려고 방글라데시 국경지대로 강제 이주시켰고 그게 현재 라카인 주에 집중되어 살고 있는 로힝야족의 시작이 되었다.

따라서 로힝야족에 대한 증오도는 미얀마 정부에 의한 것보다도 오히려 미얀마인들 내부의 증오가 더 큰 부분이며, 미얀마인들은 로힝야족을 아예 미얀마 내의 소수 민족으로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다. 애초에 로힝야란 단어를 거부하고 벵골인이라고 여전히 이들을 지칭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리고 오히려 이 관계에서, 중심 민족인 버마족은 열외로 빠져 있다. 로힝야족의 거주 지역이 버마족 거주 지역과 상관이 없는 아라칸 지역이기 때문.

실제로 현 시점에서 로힝야족과 직접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것은 미얀마 내의 소수민족인 아라칸인들과 카미족 등이다. 기존 기록에서 먼저 저지른 쪽이 미얀마인들이라고 서술되어 있었는데,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인 1942년 로힝야족에 의한 아라칸인 2만명 학살이 오히려 선행 사건이고, 그 이후 동파키스탄, 지금의 방글라데시에 2차례에 걸쳐 아라칸 합병을 청원하기도 하였다. 즉 IS에 협조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사건이지만, 그전부터 분리주의를 주장하고 미얀마인들을 공격한 집단은 어쨌든 로힝야족이 먼저인 것이 사실이며, 차별을 받았던 게 아니라 차별을 시켰던 쪽이 로힝야족이다.

미얀마 전토에 있던 벵골인들을 모으니 벵골인들은 미얀마인에 비하면 2% 미만의 비중을 차지했던 것에 반해서 라카인 주[23]에 한해서는 30% 이상을 차지했고, 현재는 전체 인구의 약 40% 넘게 차지하여 절반을 살짝 넘기는 아라칸족의 뒤를 바짝 쫓고 있는 모양새다.[24] 이에 라카인 주에 살고 있었던 원주민인 아라칸족과 카미족이 로힝야에 매우 강경한 입장을 보이며 우리에게 짐더미를 떠넘겼다고 버마족 및 다른 소수민족들을 원망하고 있고 버마족과 다른 소수민족들은 이런 원망에 일정부분 책임감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런 측면 때문에 소수민족들끼리 연대하여 버마족을 경계하는 미얀마의 정치상황에도 불구하고 로힝야족은 모든 소수민족 + 버마족의 혐오와 경멸을 사고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로힝야 항목 참조.


3.2.2. 아웅산 수지에 대한 지지 양상의 특수성[편집]


기존 내용에서 이 사건의 문제를 버마족의 민족주의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로힝야족의 특수성 항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절대적으로 오류이다. 애초에 로힝야족을 가장 증오하는 이들이 버마족이 아닌 아라칸, 카미 등 미얀마 내 소수민족들이다. 그리고 정말 의외로, 이 소수민족층이 아웅산 수지에 대한 가장 큰 지지층이다.

동남아시아 지역은 열대우림 지역이라 교통이 편리하지 못해 현재까지도 수많은 소수민족들이 존재한다. 부족적 전통이 강해서 소수민족의 분리독립 문제가 심각하여 미얀마 내에서만 해도 소수민족들은 독자적 반군 활동을 하며 수십년간 미얀마 정부와 투쟁해왔다. 이들의 10년이 넘친 오랜 분쟁끝에 반군의 지역주도권을 어느정도 인정한채로 이들을 미얀마군으로 끌어들여 평화협정을 맺은게 현재 미얀마의 정치적 상황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중요한 인물이 아웅산 수지가 된다.

애초에 이것은 아웅산 장군부터 따지고 들어가야 하는데, 아웅산 장군은 미얀마 독립을 이끌어내기 위해 소수민족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그들의 지지와 미얀마로의 합류를 얻어내기 위해 노력하였던 인물이다. 그 과정에서 소수민족들에 대한 우호적 여론은 물론 그들을 평등하게 대하겠다는 약속을 하였던 것도 그였다. 그러나 아웅산 장군의 사망 이후 군부 독재 시기를 거치면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소수민족들의 독립 운동도 이에 대한 불만에서 출발하였다. 즉 버마 민족주의를 상징하는 쪽은 오히려 군부이며, 아웅산장군의 딸로서 그 유지를 잇는 인물이 되는 아웅산 수지는 소수민족의 대변자로서 미얀마 내에서 위치하고 있었던 형편이다. 실제로 미얀마의 민주화는 국회의석의 25%를 군부가 지정하는 식의 불안정한 상황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민주 정부는 버마족의 표도 우세했지만 소수민족들의 몰표에 힘입어 이루어진 면이 크다.

따라서 아웅산 수지는 자신을 지지해준 소수민족들을 외면할 수 없으며, 그들이 가장 증오하는 대상인 로힝야족을 옹호하는 행위는 바로 실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중대 문제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 정부가 온정적으로 대처한다면 기껏 이룩해놓은 민주주의 정부의 지지율이 바닥을 뚫고 내려가고 군부가 재집권할지도 모른다. 로힝야족에 대한 온정적인 발언 한마디면 누구라도 소수민족들의 공적이 됨과 동시에 매국노로 몰릴 수 있는 상황이라, 미얀마 정치인 중에서 로힝야에 대해 온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발언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버마 민족주의가 그간 나타내온 행보 또한 문제가 된다. 다른 민족을 앞세워서 또 다른 소수민족을 탄압하는 미얀마 정부의 이이제이는 실제로 네윈 군사독재정부 시대에 흔히 시행된 방법이었다. 버마족이 주도하는 미얀마 중앙정부가 로힝야 족에 대한 포용정책을 펼치기 어려운 것은, 아라칸족과 카미족 등의 라카인 주의 토착 소수민족 입장에서는 "버마족 이 개자식들! 로힝야족을 이용하여 원주민인 우리 부족을 몰살한 후에 버마족을 이주시키려 하는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고 실제로 그런 주장을 통해 반군활동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카인 주의 로힝야족을 버마중앙정부가 보호한다면 최소한 카미족은 평화협정을 파기하고 다시금 무장투쟁에 나설 것이다. 이 경우 또 다시 전국적 내전이 벌어질 가능성도 있다. 카친족, 카렌족, 샨족 반군을 진압하는데 20년이 넘게 걸렸는데 카친족 반군이 봉기한 주 원인 중 하나가 카렌족 반군의 봉기로 인한 버마족 군 역량 저하였다. 소수민족의 봉기는 이렇게 연쇄반응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미얀마 정부는 더 경계하는 것이다.

즉 로힝야족 부분에서는 군부든 아웅산 수지 측이든 이해 관계가 일치하고 있는 상황이며, 로힝야족을 제외한 모든 미얀마 민족, 즉 버마족이든 아라칸족이든 카렌족이든 모두가 로힝야족을 증오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어느 정도 로힝야족이 자초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그렇기에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더욱 어려워진다.

더구나 아웅산 수 지 본인의 개인사적 문제도 있다. 로힝야 문제의 국제적 스폰서는 영국이다. 로힝야족 난민 문제가 안보리 의제로 올라가게 된 것도 스웨덴과 영국의 제안 때문이다. 즉 로힝야족을 미얀마에 데려다놓은 영국이 그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문제는 미얀마의 반영감정은 한국의 반일감정 이상이라는 것이다. 애초에 미얀마를 식민지배하며 로힝야라는 문제 덩어리를 안겨놓은게 영국인데, 지금에 와서 로힝야 문제로 미얀마를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는데 나서고 있으니 미얀마인은 영국을 좋아할 수가 없다. 그런데 아웅산 수 지의 남편은 영국인이고 아들들 또한 영국 혼혈에 영국국적자이다. 이것은 노벨평화상을 받고 서방사회의 주목을 받는데는 유리했어도, 미얀마의 통치자로서는 심각한 결격사유가 되는 것이다. 미얀마의 반대세력인 군부도 이 부분을 집요하게 걸고 넘어가고 있고, 실제로 이 문제 때문에 아웅산 수 지는 미얀마의 대통령이 되지 못하고 막후 실력자로서만 활동하는데 그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웅산 수 지가 로힝야족을 옹호하는 발언을 한다는 것은, 미얀마인을 위한 정치인이 아닌 영국인의 꼭두각시로 정치인으로 행동한다는 비난에 정면으로 노출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더욱이 말을 아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아웅산 수지 또한 로힝야족에 대한 증오심을 어느 정도 품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일도 있었다. 수지는 2013년 영국 BBC방송 인터뷰에서 로힝야족을 향한 폭력이 증가하는 상황에 관한 질문을 묵살했다. 스스로 이에 대한 답변을 피하는데 그치지 않고 "불교도들이 무슬림 때문에 거주지를 잃었다고 항변하며, 무슬림 피해자가 왜 더 많냐는 질문에는 불교도들이 세계적인 무슬림들의 힘 때문에 공포 속에 살아가고 있다"고 답변한 바 있다. 군부와의 타협이 아니라, 전 미얀마인이 로힝야족을 미얀마인으로 아예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적어도 지금까지의 행보를 볼 때, 로힝야족 스스로조차도 애초에 자신들을 미얀마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3.2.3. 현재 로힝야족이 걷는 행보의 문제점과 여론[편집]


로힝야족 문제가 있었던 것도 하루이틀 일도 아니지만, 로힝하족 거주지가 버마족의 거주지역과 겹치지 않기 때문에 과거 미얀마 중앙정부는 로힝야족 문제에 대해 거의 방관자적 입장을 취해왔다. 그러나 로힝야족이 이슬람 극단주의 사상에 경도된 테러조직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악화되었다. 노골적으로 IS에 충성맹세를 하기도 하면서 미얀마 정부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고, 라카인 주에서 승려를 참수한 후 로힝야족 시장에 1주일 넘게 걸어둔 사건으로[25] 전국적 조직을 가진 미얀마 불교종단의 어그로를 끌었고 비로소 전국적 문제가 되었다. 단순히 승려참살 수준이 아니라 이들이 집단적으로 불교도 마을 습격하고 방화와 살해를 저지르는 것도 빈발하면서 타지역 불교도들의 불만도 크게 상승했다. 결국 미얀마 정부가 이에 대응조치를 하지 않을 방법이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미얀마 정부는 절대 정당화할 수 없는 제노사이드라는 방식을 택했으며 이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범죄이다. 애초에 학살된 사람들 가운데에는 여성과 어린이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이들도 IS라고 우길 셈인가?

다만 로힝야족이 IS와 이슬람 극단주의와 연계되어 있으며 이들 역시도 미얀마인을 상대로 범죄를 저질러 왔다는게 미얀마 군부의 조직적 제노사이드를 옹호해줄순 없는 일이지만, 미얀마 내부의 여론과 로힝야족의 송환 문제에 있어 아주 중대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애초에 로힝야가 미얀마에 남게 된 이유 자체가 영국이 미얀마의 영토를 정하는 과정에서 로힝야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을 조건으로 이들의 독립을 승인했기 때문이며 이덕에 초기 미얀마 정부에선 로힝야 족의 입김이 거셌다. 법적인 정당성과 국제 조약의 중요성은 차치하고 미얀마인들의 입장에서는 그냥 내정간섭 + 불평등 조약이요, 국토를 지키기 위해 굴욕적으로 "영국의 앞잡이"이자 자신들을 괴롭힌 로힝야족에게 완장을 채워준 채로 독립을 하게 된 것이다.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들어선 새 정부는 미얀마를 탄압한 서방 세계와의 모든 조약을 무효로 돌리고 현재 우리가 아는 로힝야 탄압 정책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즉 미얀마에게 있어 이들은 과격하게 말하면 죽을 만큼 미운 민족의 원수이자 우리나라로 치자면 친일파 앞잡이인 것이다. 이 상황에서 현세대 로힝야족이 선조의 원죄를 자신들이 치르는 것에 대한 반발감으로 테러와 IS 가담이란 과격 방식으로 대응 + 고전적인 종교 갈등에 괘씸죄까지 추가되니, 과격한 민족주의적 여론과 종교적인 반발감까지 더해져 대대적 학살에 이르게 된 것이다. [26]

또한 이들이 로힝야를 다시 데려가기 힘들어진 문제에도 기여를 했다. 물론 학살당한 모든 로힝야족을 잠재적 IS 가해자라고 지목하는 건 무리수이겠으나 이들중 IS의 잠재적 지지자가 얼마나 숨어있을지는 이제 알수 없다. 애초에 로힝야족은 자기들 내부에 IS 지지자가 생겨난 이유로 미얀마가 자기들에게 선조의 원죄를 문 것에 대한 복수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미얀마 군부는 그 반발감에 대해 유례없는 학살로 보복을 한 상황. 원한만 더 커진 상태에서 이들이 귀환했을시 로힝야족 쪽에서 얼마나 더 큰 사고를 칠지는 알수 없으니 미얀마 군부 측에서도 골치 아픈 것이다. 한마디로 복수의 굴레, 즉 악순환의 반복만이 남아있는 셈. [27] 설사 로힝야족의 원죄에 대한 미얀마인들의 국민감정이 가라앉는다 해도 치안에 불안요소가 되는데다 종교 갈등까지 존재하고, 되레 보복을 당해 이슬람 극단주의의 희생양이 될수도 있는 문제까지 더해진 이상 현세대 로힝야족에 대한 여론은 오히려 더 악화될 수 밖에 없어진 것이다. 즉 수치의 입장에서는 역사적 원죄에 대한 문제 뿐 아니라 국민 치안과 난민 수용 문제 특유의 난항까지 더해진 로힝야족을 옹호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워진 셈이다.

3.3. 홍콩 범죄인 인도법 반대 시위 중국 지지 논란[편집]


미얀마에서도 2019년 이번 홍콩 범죄인 인도법 반대 시위의 영향을 받고 있다. 미얀마 청년들은 홍콩 시위대를 지지하며 미얀마에서도 시위를 하고 있다. 그런데 노벨평화상까지 받았던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미얀마 정부는 중국 공산당 및 홍콩 정부를 지지해서 물의를 빚고 있다고 지적했다. 기사

4. 대중 문화에서[편집]


  • 아일랜드의 록 밴드 U2가 2000년에 발표한 곡 《Walk On》은 아웅산 수 지에게 헌정된 곡이다.

  • 2011년 프랑스의 뤽 베송 감독이 수 지의 전기 영화인 'The Lady'를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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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지 역할은 양자경[28] 이 맡았는데 실제 수 지와 상당히 비슷해 보인다는 의견이 많다. 양자경은 깡마른 수 지와 최대한 비슷하게 보이기 위해 5kg을 감량하는 등 상당히 노력했다고.[29] 영화 후반부쯤 가면 반독재운동가로서의 수 지 모습보다는 남편과의 애절한 장거리 연애가 부각되는 느낌도 있지만 전체적으론 미얀마 군부정부의 패악이 잘 드러나 있다.

  • 이보다 앞선 1995년 존 부어맨 감독의 영화 <비욘드 랭군>에서도 초반 단역으로 등장한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웅산 수 지가 처음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1988년 8월을 배경으로 한 영화인데, 총을 겨누는 계엄군 병사들을 향해 걸어가면서 군중들에게 연설하는 장면이 인상적. 한스 짐머가 작곡한 배경 음악까지 더해져 관객들에게 큰 감동을 전해준다.

  • 위에 언급된 영화 The Lady의 미국 시사회에선 힐러리 클린턴과 함께 한국의 기획자 이수만도 참석해서 둘이 같이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 유명한 SM엔터테인먼트의 이수만이 맞다. 이 기묘한 인연은 이수만이 한국에서 출국하는 힐러리에게 영화 'The Lady'의 DVD를 구해준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그리고 미얀마에서 한류는 금지 미얀마는 동남아시아 국가들 중에서도 특히 한류의 인기가 대단히 높은 편이며 한국에 대한 국가 이미지도 매우매우 높다. <동남아의 한국에 대한 인식> 참고.


5. 기타[편집]


  • 외래어 표기법 기준으로는 버마어 이름이므로 음절 단위로 끊어서 '아웅 산 수 치'로 표기하는 것이 옳으나(국립국어원 답변) 한국 내에서는 '아웅산 수치'라는 표기가 일반적이다. 과거에는 '아웅산 수지'라는 표기도 많이 사용되었는데 수지 본인은 이쪽이 본래 발음에 가까운 표기이므로 '아웅 산 수 지'[30]로 표기해 달라고 2013년 1월에 요청했다. 다만 2013년 3월에는 띄어쓰기 없이 '아웅산수찌'로 표기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기사가 있는데 정확히 본인이 원하는 한글 표기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한국어 단어에서 '수치'가 의미하는 바를 듣고 불쾌해 했으며, 본인 이름의 원래 발음에 일치하지도 않는다는 이유로[31] '수치'라고 표기하지 말아달라고 요구한 일화가 있다고 한다. 버마식 이름은 성씨라는 게 따로 없으며 개인별로 이름만 있을 뿐이고 그마저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 보통 인생의 전환점이라 생각하는 때 바꾼다고 한다. 아웅 산 수 치의 경우엔 아버지의 이름인 '아웅 산'에 수 치를 붙여 이름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아웅 산'을 성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냥 전체가 이름인 것이다. 영국 유학 등으로 인해 성씨가 필요해서 아버지 이름에 자기 이름을 붙여서 지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로힝야 인종청소 사태가 벌어지자 '수치'의 요청을 씹고 기존 표기인 '수치'로 표기하는 예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게다가 '수치'는 이 사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취재한 기자들을 구속하는 것을 방조하는 등 말 그대로 '이름값'(羞恥)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 많다.

  • '아웅산'이 '산(山)'을 연상케 하는 탓에 이름의 일부가 지명과 관련되어 있다는 오해를 하는 경우가 있다.[32] 국사 시간에 졸지 않았어도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을 처음 접하면 "아웅산에 있는 묘소에서 일어난 폭탄 테러인가?"라고 오해를 하게 된다. 또한 '수지' 도 'Susie' 나 한국인 인명으로 익숙한 '수지' 와 헷갈리는 경우가 있지만 전혀 관련이 없다.

  • 힐러리가 국무장관 시절 대놓고 그녀와 친목질을 했다. 힐러리가 공식일정으로 직접 자택에서 만나 담소를 나누었으며 이후에도 2012년 보궐선거에서 승리하자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뿐만 아니라 뤽 배송의 수 지 전기 영화 미국 시사회 때에도 참가해 배우, 감독과 사진을 찍었다. 일단 힐러리 개인적으로도 여성 지도력을 강조하여 같은 여성 정치인으로써 이미지 개선을 노리는 점도 있겠지만 현재 미얀마는 중국의 자라나는 영향권을 견제하기 위한 요충지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경제 지원 등의 당근으로 미얀마를 자국 쪽으로 끌어들이면 중국 입장에서는 북한 정도를 제외한 주변국이 모두 중국에 적대적인 모양이 나온다. 중국도 이를 경계하여서 아웅산 수 지가 집권한 후 첫 외교 회담을 위해 왕이 외교부장이 미얀마를 방문했다.#

  • 어린 시절 거의 영국에서 자랐고 영국인과 결혼하여 그 사이에서 자식까지 둘이나 두어 거의 영국 사람이나 다름없다는 점이 약점으로 공격 받고 있다. 때문에 미얀마 군부가 자꾸 영국인이 아니냐며 공격하는 것에 대해 수 지는 "나는 한 번도 영국 국적을 얻은 적이 없는 완전한 버마인"이라고 자신을 변호하고 있다.

  • 남편인 마이클 에어리스는 티베트 불교의 권위자로 원래부터 동남아 문화에 관심이 많았으며 이른 나이에 옥스퍼드 대학에서 교수로 발탁되기도 했다. 수 지가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후부터는 수 지 쪽이 훨씬 더 유명하지만 사실 그 이전엔 남편인 마이클 에어리스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나름 일가를 이뤘었다. 심지어 달라이 라마도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고 할 정도로 티베트 불교에선 나름 정통했다. 그의 무덤은 영국에 있지만 특이하게도 동남아 불탑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다.

  • 오랜 가택연금 생활은 두 아들과의 관계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수 지가 민주화운동을 시작하고 가택 연금을 당했던 1988년 당시, 장남 알렉산더는 15살이었고 차남 킴은 11살이었다. 민감한 청소년기에 어머니를 만날 수 없었다는 것과 나중에는 아버지마저도 사망해서 정신적 버팀목이 사라진 것 때문에 아들들이 무척 힘들어 했다. 더구나 아버지가 사망할 때 어머니를 무척 보고싶어 했지만, 어머니가 영국으로 출국하면 다시는 미얀마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찾아오지 않은 것에 크게 실망한 모양. 현재 미국에서 살고있는 장남은 어머니가 가족 대신 정치를 선택한 것 때문에 수 지와 절연을 한 상태라고 한다. 그래도 영국에서 사는 차남은 어머니를 이해하는 편이라 연락도 하고 가끔 만나기도 한다고...

  •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의 해외순방 일정 중에 미얀마 방문이 있어 수 지를 공식적으로 방문했고 다음날엔 수 지 수지의 아버지인 아웅산 장군의 묘지에 참배하였다. 아웅산 묘소 참배와 관련해선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문서를 참조할 것.

  • 군사독재정권이 한창 극성일 때 미얀마에 자연재해가 생기거나 하면 정부의 행정 능력상 어쩔 수 없이 원조를 받아야 하는데 수 지는 오히려 외국 언론들이나 정부에게 "절대 원조해주지도 말고, 오히려 외면해라. 당신들이 버마를 돕겠다고 나서는 건 오히려 군부를 도와주는 꼴이다."라고 자주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버마에 여행오려는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도 돈을 뿌리는 건 군부의 배를 채워준다는 이유로 오지말라고 한 적도 있다.

  • 아직 군사독재정권에 탄압당하던 시절에 인권단체에서 일하던 젊은 미얀마 이민자 출신 인권운동가가 평소 영웅으로 믿고 있던 아웅산 수 지와 만나 대화한 후 울었다고 한다. 상상하던 것과는 달리 인권에 대해 아주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독설을 퍼붓는 통에 충격을 받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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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버마어 표기를 그대로 쓰면 "아웅산쑤끄라인"(aung hcan: cu. krany) 정도가 되지만, 버마어의 경우 영어처럼 철자와 발음간 괴리가 있는 편이라 실제 발음은 아웅산수지가 된다.[2] Convent of Jesus and Mary School.[3] 당시 명칭은 버마[4] 아웅산 장군의 딸로 15세에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5] 1989년 이후 군부는 버마의 국명을 미얀마로 변경했다.[6] 영화 <더 레이디>를 보면, 민주화 운동 중인 수지에게 총을 겨누고 죽이기 직전까지 갔던 병사를 독재자가 친히 쏴 죽이면서 "수지를 순교자로 만들면 안 된다"고 막 화를 내는 장면이 있다.[7] 다만 현재의 군부가 과거 네윈 장군 시절에 비하면 비교적 유연한 편이기 때문에 NLD와 군부간의 개헌 합의가 극적으로 이뤄져 수지의 대통령 등극이 이뤄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만약 이렇게 되면 군사정권 시절 만행에 대한 사법처리가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될 지도.....[8] 19세기의 버마를 이끌고 있었던 꼰바웅 왕조는 영국과 3차례의 전쟁 끝에 1853년,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8년에 이르러 독립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미얀마/역사 참고.[9] 현재 한국에 망명온 미얀마 민주화운동권 인사나 미얀마에서 한국으로 일하러온 사람들은 전부 '버마'로 불러주길 원하고있다.[10] 전체 인구의 68%, 이하 인구의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B%AF%B8%EC%96%80%EB%A7%88[11] 전체 인구의 9%[12] 전체 인구의 7%[13] 각각 전체 인구의 3%와 2%[14] 전체 인구의 2%[15] 특히 식민지배피해를 극심하게 받은 한국에서는 오히려 아웅 산 수지에 대한 옹호 여론이 더 많은 상황이다.[16] 그나마 투사에서 정치인으로 연착륙에 성공한 예로 대한민국의 김영삼, 김대중이 있다. 다만 대한민국의 두 사람은 군사독재가 끝난 후 바로 집권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혼란이 정리된 후 집권했기 때문에 단순히 비교하기는 어렵다.[17] 다만 기자의 시점이 다소 편향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하는데, 처음부터 기자가 아웅 산 수 지의 중도주의 노선에 대해서 매우 강한 반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여럿 있기 때문.[18] 즉 기존의 기득권들이 새파랗게 살아있다. 그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19] 미얀마 헌법에 따르면 국방부 장관의 임명은 대통령의 권한 밖에 있다.(...) 또한 미얀마군 최고 통수권자도 대통령이 아니다.(...)[20] 이집트의 경우는 얘기가 다르다. 무바라크가 물러난 뒤 이집트를 장악한 것은 세속적인 민주정권이 아닌 이슬람 근본주의에 입각한 폭압적 무슬림 형제단이었고 비록 독재정권이었으나 세속정권이었던 무바라크 정권의 통치하에 있던 이집트 국민들은 이슬람 근본주의에 입각한 테러정권에 저항하였으며 이를 포착한 이집트 군부가 쿠데타로 뒤집어 버린 것이다.[21] 이는 이집트의 경우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아랍의 봄 사태로 촉발된 대부분의 중동국가가 겪은 일로서 독재권력이 붕괴 한 뒤 그 뒤를 이은 것은 민주정부가 아닌 이슬람 근본주의에 입각한 폭압적 테러정권이었고 아랍의 봄 사태를 다소 안일하게 보고 있던 국제 사회에 대해 무조건적인 독재자 제거가 능사가 아니다라는 것을 입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22] 덤으로 힌두교나 기독교 믿는 소수 부족에 대한 차별 또한 마찬가지이긴 하다. 카렌 족도 그 대표적. 그런데 카렌 족은 불교도가 다수 임에도 차별해왔다. 결국 이들의 오랜 저항과 탄압 속에 그나마 불교도 카렌 족은 이전과 다르게 자치도 허락하는 편이지만 기독교가 다수이던 카렌 민족해방군은 불교도 카렌 민병대랑 손잡고 무자비하게 뭉개버렸다. 영화 람보 4에 나오던 소수민족 차별 및 학살장면을 봐도 알 수 있다. 문제는 이 로힝야 족도 참 서글프게도 이슬람이 대다수임에도 이슬람이 역시 대다수인 방글라데시에게 버려져 차별받던 이들이다.[23] 벵골 바로 옆에 있으며 미얀마 영토 중 가장 먼저 영국의 식민지로 편입된 곳이기에 벵골인들이 많이 정착했다.[24] 특히 방글라데시 국경지역은 인구의 96%가 로힝야족으로 전부 로힝야족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미얀마의 다른 민족과의 분쟁으로 100만여 명의 로힝야족이 방글라데시로 도망친 가운데 도망친 이들까지 포함하면 라카인 주 인구의 60% 넘게 차지하는 최대민족이 된다. 참고로 이 수치는 미얀마 정부가 로힝야족에 대해서만 1가구 2자녀라는 산아 제한 정책을 실시했는데도 이렇다.[25] 그걸 보는 일반 로힝야족들은 참수된 승려의 목을 끌어내리거나 신고하지 않았고 오히려 환호했다.[26] 군부 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미얀마인들은 로힝야족의 학살에 대해 오히려 옹호하는 입장이며 "로힝야는 미얀마인이 아니다"에 대해선 한치의 이견도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27] 만악의 근원인 영국과 서방 국가들 역시 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 수치와 미얀마를 비난하지만 아무도 로힝야족을 자신들이 데려가겠다는 말은 꺼내지 않는다. 전세계가 IS와 전쟁을 치르느라 난리 법석인 상황에서 학살의 피해자가 된덕에 오히려 IS와 연계되어 있다고 사방팔방에 소문이 난 민족을 데려갈 사람은 아무데도 없다.[28] 수 지 여사의 이웃나라인 말레이시아인이다.[29] 배우들, 특히 여배우들이 영화나 드라마 촬영을 앞두고 체중 감량하는게 일반적이다 보니 5Kg 정도 뺀 게 뭐가 대단한가 싶겠지만, 양자경은 원래도 상당히 마른 몸매인데다가 다른 여배우들처럼 그냥 마른게 아니라 어려서부터 꾸준히 발레로 몸을 다져서 전신에 잔근육이 붙어 있는 몸이다. 즉, 이미 뺄 살은 다 빼서 몸이 완성된 상태라 식사량을 줄이고 운동을 열심히 한다고 해도 더는 감량하기 힘든 상태인데도 감량한 것.[30] 버마어 표기법에 따라 음절별로 띄어 쓰는 것이 맞다. 아웅산 수지라는 표현은 임의적인 띄어쓰기이므로 지양해야 한다.[31] 버마어 발음을 IPA로 적으면 'àʊɴ sʰáɴ sṵ tɕì'이다. 버마어 자음은 유기음-무성음-유성음 3개로 구분되는데 이를 비슷하게 자음을 구분하는 태국어나 베트남어의 외래어 표기법 식으로 구분해서 적으면 '아웅 상 쑤 찌' 정도가 된다.[32] 2017년 6월 1일 외래어 표기법 개정 이전에는 외래어 산 이름의 경우 띄어쓰기를 하였고, 그 이후에는 띄어쓰기 조항이 없어졌다. 때문에 '아웅산'이라고 쓰든 '아웅 산'이라고 쓰든 오해를 부르기에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