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리아 풀케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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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아일리아 풀케리아
(영어: Aelia Pulcheria 그리스어: Πουλχερία;)
출생
398년 1월 19일 로마 제국 트라키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사망
453년 7월 로마 제국 트라키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아버지
아르카디우스
어머니
아일리아 에우독시아
형제자매
플라킬리아, 아르키디아, 테오도시우스 2세, 마리니아
남편
마르키아누스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로마 제국 테오도시우스 왕조아우구스타, 로마 황제 마르키아누스의 황후.


2. 생애[편집]


398년 1월 19일 로마 제국 트라키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아르카디우스 황제와 아일리아 에우독시아 사이의 딸로 출생했다. 그녀는 다섯 남매 중 둘째로, 맏언니 플라킬리아는 일찍 죽었다. 그녀는 사치를 일삼고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심한 갈등을 빛었던 어머니를 좋지 않게 여겼던듯 하다. 그녀는 후에 크리소스토모의 유해를 수습하고, 그의 경건한 삶을 기리기 위해 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408년 아르카디우스가 사망한 뒤 새 황제로 즉위한 테오도시우스 2세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친위대 사령관 안테미우스가 섭정을 맡았다.

414년 안테미우스가 죽었다. 이에 테오도시우스는 그해 7월 4일 누나 풀케리아에게 아우구스타 칭호를 수여하고 정치 전반을 맡겼다. 이때 그녀의 나이 16살이었다. 그녀는 이와 동시에 여동생 아르키디아, 마리니아와 함께 고위 성직자들과 백성 앞에서 평생 순결을 지키겠다고 서약했다. 훗날 교황 레오 1세는 이 일에 대해 그녀의 경건함과 신실함을 찬양했다. 그녀가 순결을 지키기로 결심한 건 신앙심이 투철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녀와 자매들이 결혼했다가 어린 남동생이 남편들에게 위협당할 것을 우려해 그럴 가능성을 애초에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던 듯하다.

풀케리아는 방탕하고 사치스럽다는 평을 받던 어머니와는 180도 달랐다. 그녀는 종교적인 삶에 진심으로 헌신하였고, 황궁을 수녀원처럼 만들었다. 풀케리아가 인정하는 성직자 외에는 누구도 회랑 안에 들어설 수 없었으며, 여인들은 단순한 옷을 입고 교회 예배, 금식, 집회, 기도 등에 헌신해야 했다. 그녀들의 여가 활동은 찬송가에 맞춰 제대포(제단을 덮는 천)와 제의를 짜고 기도문을 읊는 것이었다. 풀케리아는 여동생 아르키디아, 마리니아와 함께 교회, 병원, 수도원을 제국 동방에 설립하였고, "어려운 이웃을 도우라"는 성경의 말씀에 따라 굶주리는 이들을 위한 자선 활동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아르카디우스 치세 말기에 불타버린 아야 소피아를 재건하는 데서 큰 즐거움을 느꼈다. 반면, 그녀는 유대인을 혐오했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누나의 조언에 따라 유대교 회당의 건축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고, 현존하는 유대교 회당을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또한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과 기독교인 간의 분쟁이 발생하자, 유대인을 집단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421년, 남동생의 짝을 찾아주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던 풀케리아는 아테네 대학 교수 레온티오스의 딸 아테나이스를 보고, 아름다운 미모에 세련되고 매력적인 그리스어 구사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녀는 곧장 테오도시우스 2세와 아테나이스를 만나게 했고, 테오도시우스 2세는 첫 눈에 반했다. 다만 아테나이스는 부친처럼 이교도였던 게 문제였지만, 아티쿠스 주교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뒤 세례를 거쳐 기독교 신자로 개종하고, 이름도 에우도키아로 개명했다. 이때 풀케리아는 그녀의 대모가 되어주었다. 이리하여 421년 6월 7일, 아일리아 에우도키아와 테오도시우스 2세의 결혼식이 열렸다.

풀케리아와 에우도키아의 사이는 처음엔 상당히 화목했다. 에우도키아는 테오도시우스 2세와의 사이에서 아르카디우스, 플라킬리아, 리키니아 에우독시아를 낳았다. 이후 풀케리아의 추천에 따라 438년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떠났다. 어린 황후는 소아시아를 거닐며 시리아 속주의 수도인 안티오키아에 도착하여 지방 원로원들에게 200점의 금을 기부하고 테오도시우스에게 시립 목욕탕의 복원을 위해 새 성당을 세우고 성벽을 확장하도록 권유하였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는 성지교회에 상당량의 기부금을 헌납했다.

그러나 에우도키아가 성지 순례를 마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온 뒤, 두 사람의 사이는 벌어졌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록이 부족해서 확인하기 어렵지만, 남편을 지배하려는 에우도키아의 행동에 풀케리아가 분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에우도키아의 지지자였던 파울리누스가 처형되고 동방의 친위대 사령관 키루스가 에우도키아를 지지하다 축출되는 일이 벌어진 뒤, 에우도키아는 예루살렘으로 떠나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422년, 갈라 플라키디아가 자신을 해치려는 호노리우스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아들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데리고 라벤나에서 도망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했다. 풀케리아는 두 모자를 따뜻하게 대우하고, 남동생의 딸 리키니아 에우도키아를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 결혼시키게 하였다. 425년 호노리우스가 사망한 뒤 문서담당관 요안네스가 황위에 오르자, 테오도시우스 2세는 누나의 조언에 따라 원정군을 파견하여 요한네스를 제압하고,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서방의 황제로 등극하고 갈라 플라키디아가 섭정이 되게 하였다. 갈라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달라티아 속주와 판노니아 동부 지역을 테오도시우스 2세에게 헌납했다.

431년, 네스토리우스파가 기승을 부리면서 제국이 분열될 기미를 보이자, 풀케리아는 남동생에게 에페소에서 공의회를 열라고 촉구했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누나의 요청을 받아들여 에페소 공의회를 소집했다. 200명의 주교가 참가한 이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파를 단죄하고 그리스도의 2개의 본성, 인성과 신성은 서로 “혼돈과 분리됨 없이” 일치를 이룸을 확인했다. 또한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라고 선언했다. 풀케리아는 공의회의 결정에 전적으로 따랐고, 네스토리우스의 최대의 적인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와 교황 레오 1세와 깊은 교분을 가졌다.

440년, 풀케리아는 정계를 은퇴하고 수녀원에 들어갔다. 그 후 450년, 테오도시우스 2세가 사냥을 하던 중 낙마한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당시 그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누가 제위를 계승할 것인지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테오도시우스는 임종 당시 후임으로 아스파르의 부관 마르키아누스를 지목했다. 풀케리아는 아마도 남동생의 선택에 관여했을 것이다. 그 후 마르키아누스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어디까지나 마르키아누스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한 형식상의 절차일 뿐이고, 성관계는 일절 하지 않았다. 450년 8월 25일 즉위한 마르키아누스는 훈족에 대한 조공을 단호히 거부하고 모든 관계를 단절했다. 이로 인해 훈족이 동로마 제국을 침략할 위험이 커졌지만, 훈족의 왕 아틸라유스타 그라타 호노리아의 결혼 요청을 받고 관심을 서로마 제국으로 돌렸기에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풀케리아는 말년에 블라케르나에의 성모 교회를 포함한 여러 교회를 세웠고, 소피아 대성당 인근에 '길을 가리키는 성모 마리아'상을 세웠으며, 예루살렘에 성모의 이콘을 보냈다. 또한 교황 레오 1세의 동의하에 451년 10월 8일 칼케돈 공의회를 개최하여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구분없이 하나의 본성으로 묶는 가르침을 비난하고 에페소 공의회의 결의를 재확인했다. 10월 25일 마르키아누스 황제와 함께 공의회에 출석한 풀케리아는 주교들로부터 "황후가 네스토리우스를 몰아냈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칼케돈 공의회는 기독교 교회의 신념을 통합하는데 실패했고, 단성론을 지지하는 이들은 그녀를 "악녀 풀케리아"라고 지칭하며 비난했다.

풀케리아는 453년경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유언장에서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라고 했다. 그녀는 후에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축일은 2월 17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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