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톤 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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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BT 로고.svg 선정 위대한 브라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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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7월 11일 브라질의 민영 방송사 SBT가 BBC의 BBC 선정 위대한 영국인을 바탕으로 브라질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브라질인 100명’을 선정했다.
1위
2위
3위
4위
5위
시쿠 샤비에르
알베르토 산토스뒤몽
브라질의 이자베우 황태녀
제툴리우 바르가스
주셀리누 쿠비체크
6위
7위
8위
9위
10위
아일톤 세나
오스카르 니에메예르
페르난두 카르도주
펠레
치라뎅치스
11위~100위

[ 펼치기 · 접기 ]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룰라 다시우바
두우시 자매
에지르 마세두
시쿠 아니지우
호나우두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데르시 곤사우베스
지우다 아른스
호베르투 카를루스
주제 알렝카르
네이마르 주니오르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에이키 바치스타
후이 바르보자
프레이 가우방
마누에우 자싱투 코엘류
오스와우두 크루스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실라스 말라파이아
페드루 2세
치쿠 멘지스
루이스 곤자가
헤나투 후수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헤르베르트 지소자
파드리 시세루
지우마 호세프
탄크레두 네베스
루시아누 후키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바우데미르 산치아구
에우데르 카마라
헤나투 아라강
호드리구 파루
슈샤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마샤두 지 아시스
루앙 산타나
이베치 상갈루
엘리스 헤지나
마우아의 자작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하우 세이샤스
레오네우 브리조우라
치리리카
구구 리베라투
호제리우 세니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주제 지파이바 네투
카를루스 드루몽 지안드라지
줌비
R. R. 소아리스
파울루 프레이리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이비 카마르구
몬테이루 로바투
호베르투 마리뉴
마르쿠스
마르셀루 로시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지쿠
아마시우 마자로피
데데
울리시스 기마랑이스
헤이나우두 지아니키니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카를루스 샤가스
조나스 아비비
카시아스 공작
안토니우 에르미리우 지모라이스
칸지두 혼동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루아 블랑쿠
미셰우 텔로
가린샤
람피앙
클라우지아 레이치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루이스 카를루스 프레스치스
마르쿠스 폰치스
페르난두 콜로르
주제 세하
소크라치스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주제 루이스 다테나
호나우지뉴
조엘마
치쿠 부아르키
샤크리냐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아마두 바치스타
윌리암 보나르
카주자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
앤더슨 실바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호베르투 랑데우 지모라
호마리우
조르지 아마두
호나우지 골리아스
이타마르 프랑쿠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호베르투 주스투스
아나 파울라 발라당
바이타우 브라질
조 소아리스
마리아 다페냐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브라질의 前 F1 드라이버


파일:ASRothmans.png

이름
아이르통 세나 다시우바
Ayrton Senna da Silva
출생
1960년 3월 21일
브라질 상파울루 주 상파울루
사망
1994년 5월 1일 (향년 34세)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 주 볼로냐 볼로냐 대학병원
국적
[[브라질|

브라질
display: none; display: 브라질"
행정구
]]

배우자
릴리안 드 바스콘셀로스 수자
신체
키 176 cm
소속
톨만 그룹 모터스포트 (1984)
JPS 팀 로터스 (1985~1987)
혼다 말보로 맥라렌 (1988~1993)
로스만스 윌리엄스-르노 (1994)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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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횟수
162경기
월드 챔피언
3회 (1988, 1990, 1991)
그랑프리 우승
41회
포디움
80회
폴 포지션
65회
패스티스트 랩
19회
첫 경기
1984년 브라질 그랑프리
첫 그랑프리 우승
1985년 포르투갈 그랑프리
마지막 경기
1994년 산마리노 그랑프리
마지막 그랑프리 우승
1993년 호주 그랑프리


1. 개요
2. 드라이버 경력
2.1. 초창기 생애 및 포뮬러 1 데뷔 이전
2.2. 톨만 그룹 모터스포트
2.2.1. 1984 시즌
2.3.1. 1985 시즌
2.3.2. 1986 시즌
2.3.3. 1987 시즌
2.4.1. 1988 시즌
2.4.2. 1989 시즌
2.4.3. 1990 시즌
2.4.4. 1991 시즌
2.4.5. 1992 시즌
2.4.6. 1993 시즌
2.4.7. 알랭 프로스트와의 경쟁
2.5.1. 1994 시즌
2.5.1.1. 사망
2.6. 그의 기록
3. 장례식
3.1. 그의 죽음이 남긴 영향
4. 드라이빙 스타일
4.1. 특이한 쓰로틀 컨트롤
4.2. 역대 최강의 레인마스터
4.3. 역대 최강의 숏런
4.4. 카트 스타일
5. 연도별 성적
6. 여담
6.1. 세나와 혼다의 관계
6.2. 인간적인 면모
6.3. 그의 헬멧
6.4. 모나코 마스터[1]
7. 세나에 대한 말, 말, 말



1. 개요[편집]


파일:Senna.jpg[2]


"If you no longer go for a gap that exists, you're no longer a racing driver, because we are competing. Competing to win."

"만약 당신이 틈새가 존재할 때 파고들지 않는다면, 당신은 더 이상 레이싱 드라이버가 아니에요. 우리는 경쟁하고 있기 때문이죠. 이기기 위해서요."

세나를 대표하는 어록(1990년 11월 3일, 재키 스튜어트 경과의 인터뷰 中)[3]


1984년 데뷔해 1994년까지 활동한 브라질의 F1 드라이버. 요절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위상이 드높은 선수이다.[4] F1에서 월드 챔피언을 3회 획득했으며, 레이싱 드라이버들이 어떤 열정과 철학을 가져야 하는지 직접 가치관을 제시하고 실천해 후대 레이싱 드라이버들과 모터스포츠 팬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5][6]

경기 외적으로는, 당시 경제 위기로 어려움을 겪던 고국 브라질의 가난한 국민들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는 모습을 보여 경기 외적으로도 큰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인물이다.[7][8] 세나가 사고로 사망했을 땐 국장을 치뤄줬을 정도.[9]

누가 더 인기있나를 떠나 축구가 곧 종교인 브라질에서 펠레와 비교될수 있다는 자체가 그의 위대함을 방증하는 사례라 하겠다. 1994 미국 월드컵에서 브라질 축구대표팀이 4번째 우승을 차지한뒤 세나를 추모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세레머니할 정도였다. 또한 1980년대에 펠레와 세나가 같이 찍은 사진도 존재한다. #


2. 드라이버 경력[편집]



2.1. 초창기 생애 및 포뮬러 1 데뷔 이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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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철물점 주인이었던 밀턴 다시우바와 네이드 세나 다시우바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때문에 세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 형제로는 누나이자 장녀인 비비안과 남동생인 레오나르도가 있다. 세나는 놀랍게도 4살 때부터 카트로 운전을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가 손수 만들어준 단순한 카트가 시작이었다.

12세부터 본격적으로 카트 레이싱에 뛰어들었고 1977년 고교를 졸업하고 경영학 전공으로 대학에 입학했지만 3개월만에 중퇴를 하게된다. 같은 해 남미 카트그랑프리에서 우승을 했고 이후 매년 카팅 월드 챔피언쉽 (Karting World Championship)에 출전해 좋은 성적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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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번이 세나, 49번이 퓰러튼)

F1에서 성공한 이후 세나는 이 카트 드라이버 시절을 아름답게 회상하며 이야기한다. 지금까지 경쟁한 드라이버 중 가장 훌륭했던 드라이버가 누구냐는 질문에 당시 같은 카트 드라이버였던 "테리 퓰러튼 (Terry Fullerton)"을 꼽은 것. 그와의 경쟁은 돈도 정치도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레이싱이라고 했다. 이후 세나는 1981년 영국으로 건너가 포뮬러 포드 1600 레이스에 출전함으로 본격적으로 프로 드라이버 생활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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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뮬러 포드 레이스에서 활약하던 세나는 레이스를 극심히 반대하던 부모님의 성화를 못이기고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기로 결심해 레이스를 포기하고 브라질로 돌아갔었다. 그러나 얼마 안가 상위 클래스인 포뮬러 포드 2000 레이스의 팀으로부터 계약 제안이 들어왔고 세나는 바로 영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 때부터 그는 아버지의 성씨인 '다시우바 (da Silva)'가 아닌 어머니의 처녀적 성씨인 '세나 (Senna)'로 레이스에 출전하게 된다. 그리고 1982년 포뮬러 포드 2000 레이스에서 생애 첫 챔피언을 획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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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세나는 브리티쉬 포뮬러 3 챔피언쉽에 West Surrey Racing 소속으로 첫 출전하게 된다. 포뮬러 포드 2000이후 개인 스폰서쉽을 얻은 세나는 탄탄한 지원 속에서 메이저급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 당시 그는 전직 F1 드라이버였고 지금은 F1 코멘터로 유명한 마틴 브런들과 같이 F1을 바라보며 경쟁했다. 여기서 브런들은 처음 세나를 만났고 그의 잔인하리만치 무자비한 휠 투 휠을 처음 경험했었다고. 이 레이스에서 세나는 전체 20 라운드중 15 라운드에서 폴 포지션을 획득하며 그 비범한 퀄리파잉 스피드를보이기 시작했고 페스티스트 랩 12회, 우승 12회로 종합 132포인트로 시즌 챔피언을 달성했다. 2위는 마틴 브런들. 그리고 그 해 챔피언 자격으로 전통의 마카오 그랑프리[10]에 출전해 우승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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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스에서 테스트를 받는 세나)

1983년 마카오 그랑프리 이후 세나는 F1팀들의 주목을 받아 윌리엄스, 맥라렌, 브라밤, 톨만에서 정식 테스트를 받았다. 특히도닝턴 파크에서 치뤄진 윌리엄스에서의 테스트에서는 당시 소속 드라이버였던 케케 로즈버그와 같은 현역 F1 드라이버들보다 빠른 랩타임을 냈었다고 한다. 브라밤에서는 당시 같은 고국 선배였던 넬슨 피케보다 2초 느린 랩타임을 기록했고 윌리엄스, 맥라렌, 브라밤은 세나를 데뷔시키고 싶어 했으나 스폰서들이 반대함으로 1984 시즌에는 남는 시트가 없었고, 결국 세나는 톨만 팀을 통해 포뮬러 1에 입성하게 된다.


2.2. 톨만 그룹 모터스포트[편집]



2.2.1. 1984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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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시즌의 개막전이었던 브라질 그랑프리에서 데뷔한 세나는 완주하지 못하고 리타이어했고, 첫 포인트는 다음 경기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6위로 피니쉬하며 획득했다. 또한 이 시즌에서 세나는 숙명의 라이벌 알랭 프로스트와 첫 대결을 하게 된다. 바로 모나코 그랑프리에서였다. 폭우 속에 시작된 모나코 그랑프리는 폴시터 알랭 프로스트의 리드 속에서 로터스의 나이젤 만셀, 맥라렌의 니키 라우다가 뒤를 잇고 있었다. 세나는 13위에서 출발했지만 세나 특유의 비 속에서 경이로울 만큼의 그립을 잡아내는 테크닉으로 빠르게 차들을 추월하며 알랭 프로스트의 뒤까지 차원이 다른 랩타임으로 따라잡았다. 그리고 29랩째, 사건이 발생하는데 알랭 프로스트가 손을 흔들며 레이스 컨트롤에 경기 중단을 요청한 것이다. 당시 알랭 프로스트는 브레이크 문제를 겪고 있었다. 레이스가 32랩때 중단되면서 프로스트는 결승선 앞에서 차를 세웠다. 동시에 세나가 아슬하게 프로스트를 추월하며 1위로 통과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경기 결과는 최종 2위. 프로스트의 우승이었다.[11] 당시 경기를 중단했던 재키 익스는 레이스 심판인 스튜어드와 상의하지 않았다는 의혹과 함께 레이스를 왜 중단했는지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이 경기로 세나는 F1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이며 팬들과 관계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동시에 알랭 프로스트와의 F1 역사상 가장 강렬한 라이벌전을 암시하게 되었다. F1에 새로운 신성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영국 그랑프리와 포르투갈 그랑프리에서 3위로 포디움에 올랐지만 그 뿐이었다. 당시 톨맨팀은 약체 팀에 속했기 때문에 레이스카는 경쟁력이 없었다. 그렇게 첫 F1 시즌 대부분을 리타이어로 마감하게 된다.


2.3. 존 플레이어 스페셜 팀 로터스[편집]



2.3.1. 1985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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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에서 생애 첫 F1 그랑프리 우승을 하고 환호하는 세나와 로터스 팀원들. 오른쪽은 당시 팀 감독이던 피터 와르 (Peter Warr, 1938~2010)

다음 시즌, 세나는 불만이 많았던 톨맨을 박차고 나와 테스트 때부터 자신을 원했던 로터스와 장기계약을 맺게 된다. 이 시절 로터스 팀은 2010년대에 활동한 로터스와는 다른 팀으로 키미 래이쾨넨이 달렸던 로터스는 톨맨팀이 베네통을 거쳐 로터스의 이름만 빌려 쓴 것이다.[12] 세나가 달린 로터스는 50년대부터 출전한 오리지널 팀. 당시 로터스는 V6 터보를 장착했었고 레이스카는 나름대로 괜찮은 수준이었다. 경쟁력을 갖춘 이 시즌부터 세나는 F1 드라이버로써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시작한다. 시즌 2라운드 포르투갈 그랑프리에서 세나는 F1 첫 폴 포지션을 차지한다. 기록은 1:14:007. 비에 젖은 에스토릴 서킷에서 세나는 쾌조의 스타트로 선두를 유지했다. 비는 계속 내렸고 13랩째 이미 2위와 10초 이상 랩타임이 벌어졌을 만큼 비 속에서 세나는 압도적인 스피드를 자랑했다. 여러 드라이버들이 스핀하며 고전하는 가운데, 재밌게도 이번엔 세나가 레이스 컨트롤에 경기 중단을 요청했다. 그러나 경기는 속행되었고 2시간 룰에 맞춰 레이스를 다 채우지 못한 채 세나가 가장 먼저 체커를 받았다. 그의 생애 첫 그랑프리 우승이었다. 당시 로터스 감독이었던 피터 와르는 세나를 극찬했다. [13] 게다가 세나는 페스티스트 랩[14]까지 기록함으로 헤트트릭을 달성했다.

이후 세나는 1985년 시즌동안 7번의 폴 포지션과 2번의 우승을 함으로 데뷔 첫 해와 비교해 상위권에서 경쟁하는 드라이버로 껑충 뛰어올랐다.
최종 성적은 38포인트 종합 4위.


2.3.2. 1986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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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년 포르투갈 그랑프리에서 사진을 같이 찍은 세나 (88,90,91), 프로스트 (85,86,89,93), 만셀 (92), 피케 (81,83,8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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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헤레스 서킷에서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하는 모습 (세나 뒤로 만셀이 0.014초 차이로 체커를 받았다.)

터보시대의 최전성기, 굿이어 타이어와 피렐리 타이어의 대결, 로터스-르노 조합은 맥라렌-태그 호이어, 윌리엄스-혼다보단 한 수 아래의 성능을 냈었다. 그러나 세나는 놀랍게도 전체 16 라운드중 절반인 7 라운드에서 폴 포지션을 잡음으로 숏런 능력이 비범한 수준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우승까진 많이 연결되지 못해서 시즌 2승에 그치고 만다. 그러나 스페인 그랑프리에서는 나이젤 만셀과의 치열한 배틀 끝에 0.014초로 피니쉬하는 등의 명장면을 여럿 연출했다.

디트로이트 그랑프리에서는 월드컵 8강에서 탈락한 브라질을 위해 국기를 들고 나타났었다. 이 때부터 세나는 그랑프리에서 우승하면 항상 브라질 국기를 흔들게 된다. 또한 폴 포지션을 잡았었지만 일부러 타이어 공기압을 8분의 1을 빼가며 힘들게 포지션을 지켜 우승한 그랑프리였다. 최종 성적은 55포인트 종합 4위.


2.3.3. 1987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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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시즌은 아일톤 세나의 F1 커리어의 전환점이였다. 해당 시즌 팀 타이틀 스폰서가 CAMEL로, 엔진은 당대 최고였던 혼다의 V6 터보로 교체되었다. 자연흡기 엔진과 터보엔진이 격돌했던 시즌. 세나는 이번에도 상위권 경쟁을 했지만 챔피언을 바라보기엔 역시나 로터스의 레이스카는 약간 부족했다. 게다가 디펜딩 챔피언 맥라렌의 알랭 프로스트도 신통치 않았고 레이스카의 포텐셜이 터진 윌리엄스의 두 드라이버, 나이젤 만셀과 넬슨 피케의 정면대결인 시즌이었다. 윌리엄스 레이스카의 성능이 압도적인 덕분에 이 시즌 동안 세나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폴 포지션도 한 번밖에 하지 못했고 그랑프리 우승도 여전히 2번이 전부였다. 물론 이 시즌에 세나는 이후 미스터 모나코라 불릴 시작인 모나코 첫 승을 올렸었다. 2번째 그리드에서 출발한 세나는 레이스 내내 만셀의 뒤에서 달렸으나 30랩때 만셀이 터보 이상으로 리타이어함으로 선두로 올라섰고 그대로 훌륭한 피트 전략을 수행해 타이어 스틴트의 손실 없이 모나코 첫 승을 기록했다. 마지막 그랑프리엔 호주 그랑프리에선 경기 후 브레이크 규정을 어겼다고 판정되어 실격 처리 되기도 했었다. 최종 성적은 멕라렌-TAG의 알랭 프로스트를 제치고 57 포인트 종합 3위. 비록 챔피언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해당 시즌 로터스-혼다의 드라이버로서 혼다와 연을 쌓은 것은 그에게 있어 크나큰 행운이였다. 시즌이 끝나고 론 데니스와 알랭 프로스트가 혼다와의 협업에 앞서 일본을 방문했을 당시 데니스는 프로스트에게 내년의 파트너로 어느 드라이버를 원하냐는 질문을 하게 된다. 이 때 맥라렌에서 프로스트의 파트너가 될 드라이버 후보는 넬슨 피케가 있었는데, 프로스트는 세나를 선택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혼다의 추천과 데니스 자신의 평가로 세나를 맥라렌에 합류 시킴으로 로터스에서의 커리어는 막을 내리게 된다.


2.4. 혼다 말보로 맥라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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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시즌, 세나는 맥라렌과 계약했다. 그리고 당시 F1 안에서 최고의 드라이버로 군림하던 알랭 프로스트와 듀오를 맺었다. 맥라렌은 1987년 이미 뛰어난 엔지니어들이였던 닐 오틀리와 스티브 니콜스에 더해 고든 머레이 또한 새롭게 개발팀에 참가하여 진일보한 MP4/4를 완성했고, 윌리엄스에게서 터보시대 최고의 엔진을 만들던 혼다를 빼와 계약함으로 막강한 전투력을 보유하게 된다.

이는 곧 맥라렌-혼다 외에 챔피언십 경쟁을 할만한 팀이 없었다는 뜻이 되었고, 반대로 멕라렌-혼다 팀 내에서의 F1 역사상 가장 치열한 라이벌 매치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2.4.1. 1988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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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카 서킷에서 선두였던 프로스트를 추월하는 세나)

1988년 아이르통 세나는 당대 최고의 팀 맥라렌에 입단, 동시에 알랭 프로스트와 팀메이트를 맺었다. 1987년 윌리엄스가 FW11라는 명 섀시와 혼다 엔진의 힘으로 타이틀을 획득하는 것을 대책없이 지켜봐야 했던 맥라렌이었지만, 윌리엄스의 내부 사정과 이에 대한 혼다의 불만은 혼다가 새로운 팀을 찾는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혼다의 선택은 당시 윌리엄스에 뒤지지 않는 섀시 설계 능력을 갖고 있던 멕라렌이였고, 이렇게 멕라렌은 당시 F1 그리드에서 최고의 엔진을 만든다고 평가받던 혼다와 계약할 수 있었다. 특히 1988년은 2014년 이전까지 터보 엔진이 허용되는 마지막 시즌이기도 했는데, 당해의 RA168E는 다른 엔진 제조사들이 89년 부터 시작되는 3.5리터 자연흡기 규정에 대비하여 터보 엔진 개발 규모를 최소한으로 제한한 것과는 반대로 전년도의 엔진 대비 크게 개선된 엔진으로서 이미 커다랬던 엔진 격차는 더할 나위 없이 커진 상태였다.

여기에 더하여 맥라렌에서도 당시 로터스에서 활약했던 고든 머레이[16]가 섀시 개발팀에 합류하였고, 그렇게 탄생한 MP4/4는 훗날 F1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달성한 최고의 명기 중 하나로 평가받게 된다. 1988 시즌에서 세나는 16 라운드중 13 라운드에서 모두 폴 포지션을 획득했다. 그리고 이탈리아 그랑프리 하나만을 제외하고 모든 그랑프리를 맥라렌 드라이버 둘이서 나눠 우승했다. 지금까지도 단일 F1팀이 F1 시즌 전승에 가장 근접했던 시즌이다.[17] 정말이지 맥라렌 세상이었고 세나와 프로스트만의 대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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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코 서킷에서 큰 차이로 경기를 리드하다가 사고를 당한 세나의 차.)

시즌 출발은 좋지 못했다. 첫 라운드였던 브라질에서 세나는 기어 변속기 고장으로 레이스 스타트를 하지 못했고 그린 플래그 이전에 스페어카로 바꾸려 했으나 늦어버려 실격처리 되고 말았다. 이렇게 세나는 또 브라질 그랑프리 우승을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산마리노 그랑프리는 우승, 모나코에서는 리타이어하고 말았는데 이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세나와 프로스트가 여기서부터 격돌하기 시작했기 때문. 기량이 만개한 세나는 퀄리파잉에서 1:23:998로 알랭 프로스트보다 무려 1.427초나 빠른 기록으로 폴 포지션을 차지했다. 그리고 그대로 레이스를 시작해 굉장한 페이스로 치고 나가 격차를 50초 넘게 벌려놓은 상태였다. 67랩때 팀은 팀 라디오로 페이스가 너무 빠르니 좀 줄이라는 오더를 내렸으나 세나는 페이스를 줄이지 않았고 이윽고 혼자서 사고를 내고 말았다. 세나는 리타이어하고 말았고 2위로 달리던 프로스트가 모나코 우승을 차지. 문제는 이후 프로스트의 인터뷰인데 그(세나)가 자신과 레이스를 하는 것이 아닌 자신에게 일종의 모욕감을 주려 했다고 주장했다. 세나 또한 자신의 실수를 매우 아쉬워 했다고 하며(리타이어 직후 그의 표정을 보면 자신의 실수를 참을 수 없었는지 일그러져 있다.) 그 레이스를 하는 동안 자신이 무언가 다른 차원에, 거의 무의식 속에서 달린 느낌이라고 말했다. 이 모나코 그랑프리를 이후로 세나는 좀 더 침착해져서 이후 그랑프리들에서 연승을 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둘의 경쟁 구도가 심각해지기 시작했다는 것.

이후 둘의 옥신각신하는 경쟁 후에 챔피언쉽 포인트 선두로 스즈카로 오게 된 세나는 일본 그랑프리에서 우승만 한다면 프로스트의 성적과 관계 없이 월드 챔피언을 확정지을 수 있었다. 그리드 또한 폴 포지션. 레이스가 시작되고 세나 또한 출발했지만 세나의 스타트는 좋지 못했다. 엔진 스톨이 생겼던 것인지 차가 멈칫했고 세나는 두 팔을 흔들었다가 극적으로 다시 출발한다. 그러나 이미 순위는 10위 밖까지 떨어진 상황. 이후 세나는 미친 듯이 달려 2랩만에 6위까지 회복하였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바로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비 먹고 달리는 드라이버인 세나는 압도적인 랩타임으로 프로스트를 추격했고 메인 스트레이트에서 극적으로 추월할 수 있었다. 게다가 프로스트의 기어박스에 문제가 생김으로 선두를 굳힐 수 있었다. 그렇게 세나는 생애 첫 포뮬러 원 월드 챔피언이 된다. 이후 그는 레이스중 신을 봤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프로스트에게 또 불편한 감정을 일으켰고 여러 사람들에게도 갸우뚱한 반응을 이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찌 되었든 세나는 최고의 스피드를 보이며 그 해 월드 챔피언에 등극하게 되었다. 최종 성적 90포인트 종합 1위.

이후 세나는 조국 브라질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환대 받으며 꿈같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전 라운드를 거의 모두 우승한 맥라렌이지만 신기하게도 몬차 서킷에서 열린 이탈리아 그랑프리만큼은 세나가 윌리엄스의 장-루이 슐레서에게 들이받히며 순위가 하락하여 10위, 프로스트는 점화 플러그에 문제가 생겨 리타이어라는 성적으로 마감해야 했다. 게다가 1988년 9월 11일 열린 이탈리아 그랑프리 우승은 당시 페라리 소속의 게르하르트 베르거. 마치 페라리가 우승할 운명이었던 것 같은 경기 내용 때문에 팬들은 죽은 엔초 페라리가 라이벌 놈들이 전경기를 우승하는 꼴을 볼 수가 없어서 하늘에서 도왔다는 얘기를 우스갯소리로 하곤 했다. [18]


2.4.2. 1989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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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랩째, 카시오 시케인에서 충돌한 세나와 프로스트. 그리고 마지막 사진에서의 프로스트의 표정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고 있다;;)

세나와 프로스트의 경쟁이 극에 달한 89년 시즌.

여전히 맥라렌의 퍼포먼스는 압도적이었고 MP4/4만큼은 아니지만 MP4/5 또한 압도적인 스피드를 자랑했다. 엔진은 V6 터보에서 자연흡기 V10으로 변경되었다. 챔피언 등극 이후 세나의 실력은 완전히 무르익어 예전처럼 불안정한 멘탈을 보여주는 일도 없었다. 세나와 프로스트의 관계는 완전히 뒤바뀌었는데 세나의 챔피언쉽 우승 이후 프로스트가 완전히 경쟁심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세나 또한 물러서지 않았다. 둘의 경쟁구도는 나날히 심해져 맥라렌은 어느 그랑프리에서 누가 어떤 엔진을 쓸 것인지 공평하게 하기 위해 제비뽑기를 해야 했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팀 내 분위기는 매우 치열해지고 동시에 빠르게 차가워져 갔다. 프로스트는 세나가 너무 과열적이며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세나에게 불만을 가졌고 세나는 반대로 프로스트에게 항상 이러저러한 이유로 경기 결과에 대해 핑계를 댄다고 불만을 가졌었다. 팀원들도 그런 둘의 주장에 둘로 쪼개지기 시작하며 팀은 더 이상 정보와 인력을 공유하지 않게 되었다. 둘 사이 반목의 주 원인은 둘의 드라이빙 스타일의 차이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세나는 항상 모 아니면 도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승리를 위해 위험도 서슴치 않는 스타일이었고 프로스트는 계산을 통한 레이스를 하며 우승이 힘들 것 같으면 최대한 많은 포인트를 얻는 스타일이었다. 이후 둘은 완전히 틀어져 얘기조차 하지 않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당시 서로를 쳐다보는 표정을 보면 정말 살벌하기 짝이 없을 정도. 어쨌든 세나와 프로스트는 서로 우승을 주고 받으며 챔피언쉽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또 운명적이게도 둘의 챔피언쉽 향방은 일본 그랑프리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프로스트는 리타이어 3번, 세나는 리타이어 5번으로 세나가 포인트에서 많이 불리한 상황이었고 때문에 세나는 반드시 일본 그랑프리를 우승해 챔피언쉽을 끝까지 끌고 가야만 했다. 동시에 프로스트 또한 세나가 좋지 못한 성적을 거두면 자신이 챔피언을 확정 짓는 상황이었다. 그리드는 세나의 폴 포지션, 프로스트가 2위였다. 하지만 스타트에서 프로스트가 세나를 제치며 스즈카 1번 코너로 들어가게 된다. 운명의 45랩째, 팽팽한 꼬리 물기 끝에 시케인 직전에 프로스트 뒤에까지 붙은 세나는 바로 메인스트레이트 직전 시케인에서 프로스트에게 추월을 시도했으나...


11분 48초부터.

47랩, 그들은 거의 마지막 코너에서 충돌했다.

여기서 중요한 일이 발생하는데, 둘 다 모두 시동이 꺼지고 만 것. 만약 여기서 둘 다 리타이어 한다면 프로스트의 챔피언이 확정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로스트는 차에서 내려 리타이어했지만, 세나는 다시 시동을 걸어 시케인 옆 탈출로로 나와 서킷에 복귀했다. 빡친 프로스트는 곧장 심판진에게 달려갔으나, 세나는 프론트윙이 파손된 상황에서 그대로 차를 끌고 가 피트에 복귀해 윙을 교체하고 서킷에 들어왔다. 그 사이 선두를 놓쳐버리게 된 상황이라 랩타임을 끌어올린 세나는 51랩때 똑같은 카시오 시케인에서 아슬아슬하게 인을 파고들어 선두를 차지했다. 그리고 그대로 그랑프리 우승.

여기까지는 좀 찝찝해도 문제가 없는 듯 했으나 이상하게도 시상식이 한참이 지나도 시작되지 않는 일이 생겼다. 세나가 충돌 사건과 관련해서 프로스트와 같이 불려간 것이다. 그리고 면담 끝에 내려진 심판 측 발표는 "세나를 실격 처리한다." 였다. 이유는 시케인 충돌 후, 세나가 시케인을 통과하지 않고 인정되지 않는 코스를 통해 서킷에 복귀했다는 것. 그렇게 알랭 프로스트는 챔피언을 확정지었고 세나는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어야 했다. 여기에 대해선 당시 굉장한 논쟁이 이어졌는데, 시케인으로 복귀하진 않았지만 옆에 장애물이 있는 복귀용 코스를 통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주장(맥라렌 측), 세나가 이미 공간을 선점한 후 라인을 바꾸고 있는 와중에 끼어들어 사고를 일으켰다는 주장(프로스트 측)이 엇갈렸다. 특히 맥라렌이 공식적으로 세나의 처리에 대해 항소함으로 프로스트는 당시 팀에 대한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다.[19]

특히 세나는 당시 FISA[20] 회장인 장-마리 발레스트르가 같은 프랑스인 드라이버인 프로스트를 위해 레이스에 부당한 개입을 했다고 믿고 있었던 듯 하다. 물론 프로스트가 그렇게 비열한 사람은 아니지만 당시 상황을 세나는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이후 세나는 항소에서 패배했고 레이스에서 위험한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추가로 10만 달러의 벌금과 드라이버 면허를 6개월간 정지당하는 중징계도 받았다.

그렇게 세나는 1989 시즌을 굉장히 불쾌하게 마감했다. 퀄리파잉을 거의 휩쓸고 우승도 많이 하며 성적면에서는 나쁠 게 없었지만 정치적으로 휘말림으로 좋지 못한 시즌이었다. 최종 성적 60포인트 종합 2위.


2.4.3. 1990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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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카 1번 코너에서 충돌하는 세나와 프로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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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시즌에는 페라리로 이적한 프로스트와 함께 이어지는 스즈카 결투를 펼치기도 했다.

이후 알랭 프로스트는 맥라렌 레이싱의 라이벌인 스쿠데리아 페라리로 이적했다. 팀 내 반목이 사라져 온전히 맥라렌을 자신의 팀으로 가지게 된 아이르통 세나는 정신적 충격을 추스리고 그리드에 다시 섰다. 세나와 프로스트 사이 경쟁구도는 여전했고 사이 또한 이보다 최악일 수는 없어서 둘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서로를 헐뜯곤 했다. 프로스트는 페라리로 이적해 맥라렌의 위닝카를 잃은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페라리 641은 MP4/5B와 경쟁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알랭 프로스트와의 3차전이기도 했지만 나이젤 만셀도 페라리에서 둘과 삼파전을 벌이곤 했다. 세나는 일본까지 6승에 2위 2회/3위 3회/20위 1회/리타이어 2회, 프로스트는 5승에 2위 2회/3위 및 5위 1회/4위 및 리타이어 2회로 당시 승점 제도[21]에 따라 3번 연속으로 스즈카 서킷에서 챔피언 향방이 결정되게 되었다.

이는 마치 둘의 대결은 숙명적임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이번엔 반대로 프로스트가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면 세나의 경기 결과에 상관없이 세나는 챔피언을 확정할 수 있었다. 경기 전 드라이버 브리핑에서 위험한 행동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넬슨 피케가 "그러면 오피셜들이 원하는 것은 시케인에서 탈출로로 빠지면 거기서 유턴을 해서, 달려오고 있는 다른 경주차들과 마주하며 돌아가라는 것인가? 그게 훨씬 위험하지 않나?" 라며 작년에 오피셜들이 세나에 대해 내린 결정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언급과 오피셜들이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뜻을 비췄다. 이에 대해 세나는 “이것 봐, 나는 아무 말도 안하는데 다른 사람들 조차 이해할 수 없다 하고, 모든 드라이버가 동의 하지 않느냐?” 라며 다시 분노하며 브리핑에서 빠져나가 버렸다.

세나를 힘들게 하는 일은 또 있었다. 바로 폴 포지션의 그리드에 관한 것이었다. 스즈카에서 폴포지션 그리드가 오른쪽 그리드로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맨 앞이지만 스즈카 서킷의 레코드 라인은 메인 스트리트에서 왼쪽 끝에 붙어 달리기 때문에 오른쪽은 당연히 그립이 한참 부족한 곳이었다. 그렇게 되면 스타트에서 보나마나 불리할 게 뻔하니 폴 포지션을 차지한 의미가 없게 된다. 오히려 두번째 그리드가 더 좋은 상황. 세나는 그리드 변경을 위해 적극적으로 항의했었다. 세나로서는 다분히 자신이 정치적으로 피해를 보고 있다고 느껴질 수 밖에 없는 상황...

세나는 폴 포지션을 차지했고 프로스트는 바로 뒤 2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레이스 당일 우려대로 폴 포지션의 그리드는 오른쪽 첫째 자리였다. 그대로 레이스는 시작되었고 프로스트는 스타트에서 세나를 제쳐 선두로 올라섰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1번 코너에서 세나와 프로스트가 충돌한 것이다! 두 사람의 차는 바깥 그래블로 날아갔고 둘 다 리타이어하고 말았다. 세나의 챔피언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그것도 스타트 첫 코너에 들어선 순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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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를 보면 프로스트가 선두를 차지한 후 1번 코너에 들어가면서 인을 닫으려 하자 세나가 그대로 프로스트의 리어 타이어와 충돌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미 프로스트는 차 한대 거리 정도 앞서 있었기 때문에 저런 경우라면 진입 속도를 줄여 세나쪽에서 몸을 사리려 했을텐데 전혀 그런 움직임 없이 바로 충돌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세나는 폴 포지션 위치가 변경된 이후부터 첫 코너에서 감속할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다. 세나는 당시 폴 포지션 그리드 변경에 대해 공공연히 발레스트르를 비난하면서 모두 그가 벌인 일이라 한다. 물론 정말 그랬는지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전혀 자기 레이스카를 지키려 하지 않은 듯한 움직임을 보면 정황상 프로스트와 FIA에게 제대로 엿 먹이려 했던 것 같다. 실제로 FIA는 세나가 그럴 거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경기를 그냥 속행시켜 버렸고 세나의 챔피언은 그대로 확정되었다.

리타이어 직후 인터뷰에서 세나는 폴 포지션 그리드가 바뀐 것 때문에 그렇게 했냐는 질문에 욕까지 사용하며 전혀 거리낌 없이 인정하며 경기의 부조리함을 비난했다.

프로스트는 인터뷰로 세나에게 죽빵을 갈기고 싶다고 하며 치를 떨었으며 세나도 전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 때가 세나와 프로스트 경쟁의 최정점이었으며 F1이 상업적으로 폭발적 인기를 얻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 최종성적 78포인트 종합 1위.

사실 이쯤되면 발레스트르 회장의 행동의 의도가 다분히 느껴지긴 한다. 물론 프로스트가 그와 적극적으로 협조해 스포츠의 형평성을 훼손했는지는 모르지만 발레스트르 회장이 당시 권력을 사용해 프로스트를 간접적으로 도우려 했다는 의도는 프로스트가 세나와 경쟁을 하는 동안은 다분히 느껴진다. 또한 프로스트도 그러한 정치적 이점을 분명 십분 활용했을 것이다. 때문에 세나는 누구보다 발레스트르 회장에 대한 분노가 컸다고 볼 수 있다. 프로스트와의 경쟁은 이후 93년을 끝으로 끝나지만 그때까지 세나가 프로스트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프로스트가 윌리엄스로 복귀했을 때는 나의 친구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그와의 새로운 경쟁을 매우 기뻐했다.[22]


2.4.4. 1991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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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월드 챔피언을 달성하다.

맥라렌에서의 4번째 시즌. MP4/6는 여전히 강력했지만 세나는 혼다의 신형 V12 엔진에 썩 만족하지 못했다. 출력 자체는 르노보다 뛰어났지만, 르노는 이미 80년대 부터 뉴메틱 스프링 같은 신기술들을 적극적으로 채용하여 개발하고 있었고, 이에 반해 혼다는 여전히 상당히 보수적인 엔진 설계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라이벌 알랭 프로스트가 처참한 퍼포먼스의 페라리 때문에[23] 세나와 경쟁하지 못했고 세나와 그나마 경쟁구도를 형성한 것은 윌리엄스의 나이젤 만셀이었다. 사실 나이젤 만셀과는 예전부터 여러 차례 맞붙었으나 제대로 환경이 조성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1991 시즌에서 세나는 오랜 꿈과 같은 일을 해내게 된다. 바로 조국 브라질 그랑프리에서의 우승이었다. 세나는 지난 F1 커리어동안 한 번도 조국에서 우승을 해본 적이 없었다. F1에서 브라질을 알리고 열렬한 애국심에 브라질의 영웅이었던 세나로서는 정말이지 반드시 하고 싶었던 우승이었다. 인터라고스 서킷에는 '올레! 세나! 세나!'를 외치는 수십만명의 브라질 국민이 있었고 여유롭게 폴 포지션을 차지한 세나는 조국 동포들의 응원을 받으며 힘차게 출발했다. 세나는 매우 쉽게 레이스를 이끌어 갔고 이대로라면 염원하던 브라질 그랑프리 우승을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때는 54랩, 세나의 기어박스가 고장나 6단 이외의 기어는 전부 사용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해져 경기 말미엔 2위가 거의 다 따라잡은 상황[24]이었다. 여기서 세나는 포기할 수 없었기에 오직 6단 기어만을 사용해 남은 7랩을 돌기로 결심한다. 이게 얼마나 말이 안되는 상황인가 하면 애초에 자동차가 6단만으로 저속과 고속을 넘나 들며 달릴 수도 없거니와 당시에는 스티어링조차 파워 스티어링이 아니었고[25] 패들 시프트도 아닌 일반적인 H 쉬프터였기 때문에 6단의 엄청난 토크와 힘을 맨손으로 모든 코너마다 견뎌내야 한다는 얘기였다. 시간이 갈수록 세나의 체력도 떨어져 갔고 2위 리카르도 파트레제도 세나를 맹추격하며 마지막 랩에 2.9초까지 차이를 좁혔지만 세나는 그것을 해내고야 말았고, 경기 후반에 비가 내린 덕분에 결국 모두의 환호 속에서 브라질 그랑프리에서 첫 우승을 거뒀다. 단 7랩이지만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그는 경기 직후 팔도 들어올리지 못할 정도로 근육에 무리가 가 있었다. 서킷 한가운데 차를 세웠고 자력으로 장갑을 벗지도 못했다.[26] 그는 비명을 지를 정도로 좋아했고 포디움에서 트로피와 브라질 국기를 간신히 들어올리며 브라질 국민과 기쁨을 나눴다.


AAAAAAH! AAAAAAAAAAAAH!!! AAAAAAH!

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

I DON'T BELIEVE IT! EU NÃO ACREDITO!

말도 안돼! (포르투갈어로) 말도 안돼!

AAAAAAAAAAAAH! PUTA QUE PARIU!

아아아아아아아! X발!

AAAAH! Ah, eu não acredito....ah....ah....ah...

아아아아! 아, (포르투갈어로) 말도 안돼....아....아....아...

결승선을 통과한 세나의 비명. (이후 잠깐동안 실신하기도...)


그의 인생에서 가장 영웅적인 순간이었다.

이후 세나는 그야말로 시즌 내내 날아다녔다. 그를 향한 정치적 억압도 극심한 팀 내 갈등도 없이 그는 8번의 폴 포지션, 모나코 폴 투 윈, 시즌 7승이라는 성적을 기록했다. 만셀과 타이틀 경쟁을 했지만 만셀이 시즌 첫 3경기를 내리 리타이어하고 분수령이었던 일본 그랑프리마저 허무하게 그래블의 먼 지속으로 사라지면서 세나는 여유롭게 시즌 챔피언을 획득했다. 그의 세번째 월드 챔피언 타이틀이었다. 최종성적 96포인트 종합 1위.

시즌 중 사고도 있었는데 멕시코 그랑프리에서였다. 그는 그랑프리 전 제트 스키를 타다가 경미한 부상을 입었었는데, 그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페럴타다 코너에서 그래블에 빠지고 타이어월에 부딛힌 다음 차가 그대로 공중회전을 해서 머리부터 바닥에 꽂혀버렸다. 물론 세나는 의식을 잃는 일 없이 자력으로 탈출했지만 그가 처음 겪어보는 꽤 심각한 사고였다.

시즌 중 해고당한 프로스트는 결국 시트를 구하지 못해 1992년을 쉬어야 했고, 1993년에 다시 윌리엄스로 복귀했다.


2.4.5. 1992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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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1992 시즌은 사실상 미래의 자동차 경주 판도가 바뀌는 정도로 F1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기술이 등장한 시즌이었다.

바로 액티브 서스펜션의 등장이었다. 액티브 서스펜션을 장착하면 차량 안에 탑재된 컴퓨터가 달리는 동안 서스펜션을 조정해 차의 지상고를 자동으로 조정하게 된다. 그렇게 각 상황에 맞는 최적의 그립을 만들어내 어느 코너에서도 가장 빠른 속도를 얻게 하는 기술이었다. 드라이빙의 순수성을 해친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어쨌든 규정 내 허용 범위였고 이를 장착하지 못한 레이스카는 매우 불리한, 경쟁이 아예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안타깝게도 세나의 맥라렌에는 액티브 서스펜션이 탑재되지 못했다. 그 이외에도 맥라렌은 업데이트가 자주 지연되었고, 여러 신뢰성 문제도 있었으며 이미 1992년 시즌을 끝으로 F1에서 철수할 예정이었던 혼다의 V12 엔진은 더 이상 특출나게 강력한 엔진도 아니었고 MP4/6와 MP4/7은 더 이상 위닝카가 아니었다. 그러나 세나는 모나코에서 전설적인 경기를 연출하는 등 몇몇 그랑프리에서 우승할 수 있었다. 물론 거의 모든 폴 포지션은 FW14B를 탄 나이젤 만셀의 차지였고 우승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액티브 서스펜션이 드라이빙의 의미를 해치고 있다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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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그랑프리에선 퀄리파잉에서 사고를 당해 의식을 잃고 서킷 한가운데 반파된 채 있었던 리지에의 에릭 코마스를 구하기 위해 다른 차량이 서킷을 주행을 하고 있음에도 차에서 내려 서킷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코마스를 구출하기도 했었다.[28][29] 이후 2년 뒤 코마스는 세나가 이몰라 서킷에서 사망하자 충격에 빠져 레이스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결국 이듬해 포뮬러 1에서 은퇴하게 된다.

이외에 인디카 테스트를 받고[30] 브라질 그랑프리에선 당시 루키였던 미하엘 슈마허와 말싸움을 하는 둥 여러 사건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타이틀 방어에는 실패해 총 3승, 최종 성적 50점, 종합 4위에 머물렀다.


2.4.6. 1993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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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닝턴 파크에서 우승한 세나, 모두가 인정하는 레인 마스터였다.)

맥라렌 레이싱에서의 마지막 시즌. 명경기를 남기고 떠나다.

맥라렌은 F1에서 철수한 혼다를 대체할 엔진 업체로 당시 혼다와 비슷한 성능의 엔진을 만들던 르노와 협상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동시에 알랭 프로스트가 나이젤 만셀이 은퇴한 자리에 윌리엄스를 통해 복귀했지만 문제는 계약 조항에 얘랑 팀메이트 안함이라고 걸어놔 그것과 연관이 있지 않냐는 추측이 있었다. 맥라렌은 포드의 V8 엔진으로 엔진을 교체했고 뒤늦게 액티브 서스펜션 또한 탑재할 수 있었다. 시즌 5승을 할 정도로 차는 경쟁력을 되찾았으나 이미 강했던 윌리엄스-르노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몇몇 인상적인 경기를 펼쳤는데 대표적으로 도닝턴 파크에서의 유로피언 그랑프리였다. 4번째 그리드였던 세나는 스타트에서 밀려 5위로 밀려나고 말았다. 앞에는 윌리엄스 듀오와 슈마허등이 있었다. 그러나 레인 컨디션이었던 도닝턴 파크에서 세나는 단 한 랩동안 4명을 모조리 추월해 선두로 올라섰다.

이후 서킷이 잠시 말랐다가 다시 비가 내리면서 각 팀의 타이어 전략이 요동치기 시작했고 세나는 거기서 웻타이어가 아닌 슬릭 타이어로 도박을 걸어 많은 랩타임 이득을 보았다. 동시에 우승. 당연하지만 이런 전략은 세나니까 수행 가능했던 전략이다. 이 외에도 브라질과 모나코, 일본 그랑프리등에서 우승하는등 커리어에 남을 만한 경기를 해냈다. 그리고 시즌 최종전인 호주 그랑프리에서 우승하며 자신의 전성기를 보냈던 맥라렌에서의 커리어는 막을 내렸다. 양쪽 모두에게 아쉬운 이별이었지만 챔피언쉽에 대한 세나의 열망은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세나는 시즌 중 꾸준하게 윌리엄스와 계약 협상 중이었다.[31] 결국 프로스트가 가져간 챔피언쉽은 승리하지 못했다. 최종성적 73포인트로 종합 2위.

시즌 중후반부터 세나는 맥라렌과 재계약을 하지 않고 그랑프리별로 계약을 하며 레이스에 나왔다. 바로 윌리엄스와 계약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윌리엄스는 세나를 데려오지 않는 조건으로 프로스트를 데려왔기 때문에 쉽지 않은 계약협상이었다.[32]

호주 그랑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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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디움
포스트 레이스 인터뷰

시즌 마지막 그랑프리인 호주 그랑프리 세레모니를 보면 세나가 월드 챔피언을 한(해당 그랑프리 2위) 프로스트를 1위 자리로 데려오며 축하해준다. 이 당시 둘의 관계는 예전처럼 험악하지는 않았다. 비시즌 동안 세나가 프로스트에게 전화를 해서는 프로스트 없이 포뮬러 원에서 경쟁을 하는 건 의미가 없다면 복귀를 설득하기도 했다곤 한다.[33] 프로스트 말로는 덕분에 예전에는 모르던 세나의 면을 볼 수 있었다고. 라이벌의 빈자리를 느낀 것인지 1994 시즌 산 마리노 그랑프리 때 시범으로 트랙을 주행하며 "A special hello to our dear friend Alain, we all miss you Alain."[번역]라고 라디오에 남기기도 하였다.

2.4.7. 알랭 프로스트와의 경쟁[편집]


1988, 1989 시즌 동안 세나와 프로스트가 펼쳤던 경쟁은 F1 역사상 최고의 경쟁으로 여겨진다. 세나와 프로스트 모두 역대 최고 수준으로 평가되는 기량을 가졌지만 그와 동시에 서로 대비되는 기질을 가지기도 했다. 그런 두 드라이버가 한 팀에서 동등한 차[34]로 경쟁했던 것이다.

차량의 성능을 최대한으로 끌어내 이상적인 주행을 보여야 하는 퀄리파잉에선 세나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하지만 안정적인 운영으로 포인트 관리가 중요했던 본선 레이스에선 치열한 경쟁이 펼쳐졌다. 두 사람이 경쟁했던 두 시즌 동안 우승 횟수에선 세나가 앞섰지만 포인트에선 프로스트가 앞서는 양상을 보였다.

세나

vs

프로스트

17
레이스 승리
13
28
퀄리파잉 승리
4
14
그랑프리 우승
11
26
폴 포지션
4
154
포인트
186


2.5. 로스만스 윌리엄스-르노[편집]



2.5.1. 1994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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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세나를 놓칠 수 없었던 윌리엄스는 프로스트에게 전화를 걸어 이전처럼 같이 세나와 팀을 이룰 수는 없냐고 설득했다. 시즌 중 휴가를 보내고 있었던 프로스트는 당연히 불쾌해했고, 세나를 데려오지 않거나 아니면 전적으로 본인을 퍼스트로 대접할 것 중 하나를 택하라고 윌리엄스에게 전했다. 윌리엄스는 세나를 무조건 데려오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프로스트가 내건 후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가는 세나가 난리를 칠 게 뻔하므로(...) 프로스트에게 1994년 연봉까지 미리 지불하는 대신 은퇴를 하는 게 어떻냐는 제안을 했고 프로스트는 이에 합의했다. 그렇게 프로스트는 1993 시즌에 네 번째 월드 타이틀을 획득하고 F1에서 은퇴하게 되고, 동시에 윌리엄스는 세나를 영입해 데이먼 힐과 함께 팀을 이루게 된다.

그런데 1994 시즌부터 액티브 서스펜션이 전면 금지되면서 사실상 세나가 윌리엄스에 가기 위해 노력했던 것들은 의미가 없어지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액티브 서스펜션이 없어진 후 FW16은 밸런스가 엉망진창이 되어[35] 코너를 돌 때 언더스티어가 나다가도 갑자기 오버스티어가 나는 등 성향을 종잡을 수 없는 괴물 같은 차가 되고 말았다. 당연히 세나는 극도의 불편함을 느꼈으며, 그 여파였는지 시즌 첫 두 경기에서는 모두 리타이어하고 만다.[36]

그 와중에 세나는 첫 두 경기를 모두 이긴 미하엘 슈마허의 베네통에 불법 전자 장치가 달려있다고 의심했고,[37] 세나는 그런 상황이 암암리에 묵인되고 있다고 생각해 큰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38] 그리고 이어진 3라운드 산마리노 그랑프리에서는 퀄리파잉에서 동향 브라질 후배 드라이버인 루벤스 바리첼로가 사고를 당하게 된다. 고속으로 주행하던 중, 코너 출구에서 차가 붕 떠서 그대로 날아올랐고 베리어에 정면 충돌해 빠른 속도로 굴러버린 것이다. 비록 바리첼로는 큰 부상은 없었지만 세나가 직접 메디컬 센터에 찾아오는 등 매우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그랑프리가 이어졌다.


2.5.1.1. 사망[편집]

그리고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고 마는데, 심텍 소속의 롤란트 라첸베르거가 예선전 도중 충돌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라첸베르거는 시속 200km가 넘는 상태로 코너에 진입했으나 프론트 윙이 부러져 있던 것을 미처 알지 못하고 코너에 진입해 부러진 프론트 윙이 차체의 밑으로 들어가 트랙션을 잃고 콘크리트 베리어에 정면 충돌하고 말았다. 그 자리에서 라첸베르거는 의식을 잃었고[39], 구급차가 투입되어 현장에서 응급처치를 하는 장면이 그대로 방송을 타게 되었다. 세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불안해했고 견디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라첸베르거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망해 있었고, 레이스 컨트롤의 발표가 이어지자 이몰라 서킷 안은 패닉 상태에 빠져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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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나의 사고 몇 시간 전 세나의 담당 사진기사였던 코이케 노리오가 찍은, 롤란트의 사고를 피트의 TV에서 시청하고 있는 세나.

그러나 세나는 요동치는 마음을 다잡고 힘들게 차에 올라 다시 폴 포지션을 획득했다. 레이스 당일 많은 드라이버들이 레이스 기권을 고민했으나 세나는 그리드에 서 있었다.[40] 그는 여느 때처럼 레이스카에 탑승한 채 짤막한 기도를 하고 바이저를 내렸다. 그리고 시작된 레이스 스타트에서 일어난 큰 사고로 세이프티 카가 투입되었는데, 세이프티 카가 너무 느린 나머지[41] 세나는 옆으로 달려와서 빨리 달리라고 손짓을 했다.[42] 그리고 다시 시작된 레이스에서 세나는 전속력으로 달리며 뒤에서 압박을 가하는 슈마허를 상대하고 있었다. 세나는 만약 그랑프리에서 우승하면 라첸베르거를 위해 오스트리아 국기를 흔들 예정이었다고 한다.[43]

그런데 6랩째 선두를 유지하던 세나의 레이스카가 완만한 곡선 코너인 탐부렐로에 진입했을 때, 차가 순간적으로 그립을 잃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더니 그대로 트랙을 벗어나 오른쪽으로 돌진해 방호벽과 부딪히고 말았다. 옐로 플래그가 발동되고 마샬들이 달려갔지만 세나는 머리가 축 늘어진 채 의식이 없는 것 같았다. 바로 구급차가 투입되어 세나에게 응급조치를 실시했고, 그때까지는 세나가 단지 기절했을 뿐 큰 부상은 없을 거라고 예상되었고 레이스는 속행되었다.

2년전 나를 죽음으로부터 구해준 남자의 바로 옆에 내가 서있었다는 사실에 몸이 잠깐동안 마비됐었다. 그 순간동안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그 기분은 정말로 끔찍했다.

- 에릭 코마스[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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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로 박살난 세나의 FW16.

그리고 그것이 세나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사인으로 추정되는 것은 총 3가지로, 첫번째는 타이어 한개가 튕겨나가 세나의 헬멧을 강타하여 헤드레스트로 머리를 밀쳐내 두개골 골절을 일으킨 것, 두번째는 구동축에서 파편이 튕겨져 나와 세나의 헬멧을 뚫어 두부에 손상을 입힌 것, 그리고 마지막은 차량 부품이 바이저를 뚫고 세나의 오른쪽 눈 위를 가격한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 세나의 레이스카가 갑자기 그 코너에서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며 충돌했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45] 윌리엄스 팀은 FIA의 조사를 받았고, 여러 관계자가 처벌받거나 F1을 떠났지만 정확히 무엇 때문에 세나가 거기서 그립을 잃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텔레메트리도 모두 정상으로 나왔기 때문.

몇몇 추측으로는 당시 온보드캠에 근거하여 보면 이미 탐부렐로 코너에 진입할 때 스티어링 컬럼이 부러져 있었다는 것이다.[46] 최근에는 당시 온보드캠을 바탕으로 3D 모델링을 해서 시뮬레이션을 통해 코너 진입에 이미 스티어링 축이 흔들린다는 증거를 제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순간적인 다운포스 상실로 그립을 상실해서 코너 바깥으로 밀려나갔다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은 설득력이 가장 높은 가설인데, 실제로 앞뒤에 장착되어 있는 윙보다도 다운포스를 많이 제공하는 것이 차 밑에 장착되는 디퓨저 등의 언더바디 패널이다. 관내유동에서 관의 직경이 작아지면 압력이 낮아지고 유동의 속도가 빨라지는데, 자동차 아랫면을 낮추게 되면 관의 직경이 작아지듯이 공기가 흘러가는 통로의 크기를 줄일 수 있다. 이 원리를 이용한 다운포스 생성에는 일반 차로는 상상할 수 없는 단점이지만 F1 차량에서는 일어날 수 있는 단점이 있는데, 바로 차체의 바닥이 바닥에 닿아버릴 때 일어나는 순간적인 다운포스의 급감이다. 실제로 이 사고가 일어날 당시 F1 차량들을 보면 달리는 도중 바닥에서 불꽃이 굉장히 많이 튀는데, 이는 F1 차량이 가능한 최대한 낮게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몰라 서킷의 열악한 노면 상황 때문에 플로어가 바닥에 닿았고, 차량 하부에서 나오는 다운포스가 일시적으로 사라지며 순간적으로 그립이 금감하여 그대로 코너 바깥으로 밀려 나갔다는 가설이다.[47] 실제로 이 사건 이후 F1 차량의 지상고와 플로어 설계 등에 대한 규정이 많이 바뀌었다. 1994년 이전과 이후의 F1 차량의 디퓨저와 하부 디자인을 보면 거의 완전한 평면에서 굴곡진 형태로 바뀌는 등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세나의 바로 뒤에서 달리고 있었던 슈마허는 세나의 사망 이후 세나를 무리하게 압박했다는 등의 비난과 세나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은 것에 대해 많은 질타를 받았다.[48] 때문에 슈마허는 수년 동안 죄책감과 심적 고통을 겪었는데, 그로부터 6년 뒤 슈마허는 2000년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우승해 세나의 통산 승수와 타이를 이루게 되었음을 경기 직후 기자회견에서 축하받자 말없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당시 인터뷰 영상 같이 포디움에 오른 미카 하키넨 역시 당시 세나와 같이 달렸었기 때문에 하키넨 역시 울먹이며 인터뷰를 넘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49]


2.6. 그의 기록[편집]


  • 역대 승률 TOP 5 (162 레이스, 41승, 25.31%) [50]
  • 역대 최다 모나코 그랑프리 우승자 (6승)
  • 역대 폴 포지션 획득 종합 3위 (162 레이스, 65 폴 포지션) [51]
  • 역대 최대 연속 폴 포지션 (8연속, 1988 스페인 그랑프리~1989 미국 그랑프리)

이 외에도 85~94년동안 산 마리노 그랑프리 폴 포지션을 모조리 쓸었던 기록들이 몇가지 있다.


3. 장례식[편집]


파일:senna 48.jpg

세나! 우린 당신과 함께 질주했습니다. 테트라(월드컵 통산 네 번째 우승)는 우리 것입니다!

(Senna... aceleramos juntos, o tetra e nosso!)[52]

세나의 죽음 이후 브라질은 3일간 국가 추모 기간을 선포했다.

파일:senna 45.jpg



그의 죽음에 브라질 전국이 슬픔에 잠겼었다. 심지어 세나 곁에 묻히고 싶다며 자살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 그의 시신은 바리그 여객기로 이송되어[53] 성대하게 장사를 치뤄줬고, 브라질 국기가 관을 덮는 최고의 영예 속에 상파울루 무롬비 공원 묘지에 묻혀졌다. 사실상 국가가 할 수 있는 모든 예우를 다한 것. 브라질의 모든 국민들이 슬퍼하는 가운데 그의 장례식은 TV로 생중계되고 300만명의 시민들이 상파울루 거리에서 연신 통곡하며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그야말로 구국의 영웅과도 같은 모습.[54]

파일:AyrtonSennaMormbiName.jpg

아이르통 세나 다 시우바

1960년 3월 21일 ~ 1994년 5월 1일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55]

(Nada pode me separar do amor de Deus.)



3.1. 그의 죽음이 남긴 영향[편집]


파일:senna 46.jpg[56]
롤란트 라첸베르거와 아일톤 세나의 죽음 이후 다시 한 번 포뮬러 원 레이스카의 안전성에 대해 심각한 우려가 제기되었다. 이에 FIA는 이후 포뮬러 원 레이스카의 안전 기준을 유례가 없는 정도로 끌어올렸고 레이스카 디자인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300톤이 넘는 충격에도 드라이버를 절대적으로 보호하는 서바이벌 쉘, 목 골절을 방지하기 위한 헤드레스트와 HANS의 도입, 사고가 나더라도 타이어가 이리저리 굴러다니지 않게 하는 타이어 테더가 추진된 것이다.

실제로 이런 노력 덕분에 서킷 위에서 사고로 즉사하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는 드라이버는 20년간 없었다.

한편 이 사고의 여파는 가족에게도 영향을 미쳤는데, 아일톤의 조카 브루노 세나는 아일톤의 사망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까지 오토바이 사고로 사망하면서, 가족이[57] 레이싱 커리어를 금지시키는 바람에 그의 실력 성장에 큰 차질이 빚어졌다. 현재처럼 심레이싱이 생기기 전의 일이었으니 상당히 큰 손해인 셈.


4. 드라이빙 스타일[편집]


파일:senna41.jpg

세나의 차는 코너에 들어갈 때나 탈출할 때 리어가 흔들리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마치 삼바 댄스를 추는 것 같은 이 동작은 사실 그립을 잃고 주춤거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립을 붙잡고 있는 움직임이다. 세나는 평소에 이런 그립을 감지하거나 만들어내는데 재능이 있었고 그런 재능은 비가 오는 상황에 특히 빛을 발했다.


4.1. 특이한 쓰로틀 컨트롤[편집]




스즈카 서킷에서의 혼다 NSX 주행 영상

세나의 드라이빙 스타일을 논함에 있어 빠뜨릴 수 없는 것이 그의 쓰로틀 컨트롤 방식이었다. 보통의 드라이버들은 코너에서 에이펙스 이후 재가속 할 때 쓰로틀을 섬세하게 조절하면서 점진적으로 엔진 출력을 끌어내는 방식으로 주행한다. 이는 저단 기어와 코너에서의 하중이동 상태에서 급격한 쓰로틀링으로 오버스티어 및 스핀이 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반면, 세나의 경우에는 점진적인 쓰로틀링이 아닌 밟았다 떼었다 하는 방식의 상당히 보기 힘든 방식으로 쓰로틀을 조절하였다.[58] 쉽게 말하자면 다른 드라이버들이 아날로그 방식으로 액셀러레이터를 조절하는 동안, 세나는 디지털 방식으로 조절했다고 할 수 있다. 디지털처럼 0과 1, 즉, 액셀을 떼든지 밟든지의 방식으로 쓰로틀을 조절했었다고 할 수 있는데, 세나의 이런 특이한 주행법에 관해서 많은 논의가 오갔다. [59] 코너를 도는 장면에서도 마치 탭댄스를 추는 것처럼 스로틀을 연타하는 것을 보면 이게 왜 세나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여겨졌는지 알 수 있다.

이런 주행법에 대한 설명은 분분하다. 보통 대중적으로 알려진 설에 의하면 그가 터보 시대 때 F1에 데뷔하였기 때문에 당시 터보 엔진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였던 터보랙을 해결하기 위하여 이러한 주행법을 썼다는 것인데, 엔진을 풀 쓰로틀로 밟았다 떼었다가 하는 것을 반복하여 코너 탈출 중 남들보다 빠르게 부스트압을 확보하고, 이를 통해 더욱 빠른 가속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설은 최근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데, 세나는 애초에 카트 시절부터 스로틀을 수시로 뗐다 밟았다 하는 주행법을 고수했으며 터보가 금지된 89년 이후에도 이 주행법을 써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나는 자연흡기든 아니든 간에 상관없이 여전히 트랙에서 가장 빠른 드라이버였다.

최근 몇년 동안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진 설은 이러한 스로틀 조작이 코너에서의 최적 그립을 찾기 위해 체득한 방식이라는 것이다. 차량을 최대한 수평으로 유지하면서 동시에 타이어 그립을 얻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 세나가 가장 독보적인 레인마스터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꽤 일리가 있는 설이다.

4.2. 역대 최강의 레인마스터[편집]


세나가 두각을 드러냈던 레이스는 비가 오는 경우였다. 세나는 레인 컨디션에서 최상의 실력을 발휘하는 드라이버였다. 최근엔 슈마허나 페텔, 그리고 베르스타펜를 향해 레인마스터라는 말이 언론에 의해 너무 자주 쓰여서 이 단어가 가지는 의미가 퇴색되었지만, 세나는 요즘 쓰이는 용례처럼 비가 올 때도 잘 하는 드라이버 정도가 아니라 비가 오는 날에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비가 올 때의 세나는 다른 드라이버보다 더 강력했으며, 불가능해보이는 레이싱을 선보였다. 비 내리는 궂은 날씨를 극복했던, 진정한 의미에서 레인마스터라고 불릴 수 있는 드라이버는 세나 외에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가 톨만의 하위권 차를 타고도 거의 우승할 뻔 했었던, 센세이셔널했던 모나코 레이스 역시 레인 컨디션이었다.

4.3. 역대 최강의 숏런[편집]


아이르통 세나가 동시대 경쟁자들보다 단연 뛰어났던 영역은 퀄리파잉이었다. F1은 서킷을 최단시간에 일주하는 퀄리파잉 기록으로 예선을 치루기 때문에 드라이버들마다 퀄리파잉에 강하거나 레이스에 강한 특성이 있지만 세나는 이 부분에서 당대 최고의 기량을 발휘했다. 보통은 빠른 차를 타는 드라이버들이 퀄리파잉 기록이 좋은데,[60] 그러나 세나의 퀄리파잉 능력은 차를 뛰어넘는 것이어서 1986년 윌리엄스-혼다보다 현격히 느렸던 로터스를 타고 16개의 그랑프리에서 7번이나 폴 포지션을 차지했다. 또한 F1에서 다른 드라이버들과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같은 차를 타고 얼마나 차이를 보이느냐 인데, 1988년 맥라렌으로 이적한 첫 해 모나코에서 프로스트와 같은 차를 타고도 무려 1초가 훌쩍 넘어가는 랩타임 차이를 기록하면서[61] 그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증명했다. 밸런스가 매우 불안정했던 94년 윌리엄스를 타고도 폴 포지션은 놓치지 않았을 정도. 단순히 말해서 소위 말하는 원랩, 숏런에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던 드라이버였다. 이는 위에서 언급된 코너에서 그립이 어디에 있는지 직감적으로 감지하고 그립이 부족한 곳에서 그립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크게 발휘된 덕도 있다.

세나의 통산 65회 폴 포지션은 미하엘 슈마허가 2000년대 들어서 갱신하기 전까진 차원이 다른 수준의 기록이었다. 심지어 루이스 해밀턴이 F1 통산 최다 폴 포지션을 갱신한 지금도 역대 3위를 기록하고 있다. 겨우 162경기만을 치뤘고 25년이나 된 기록인데도. 그리고 이들의 폴 포지션 기록은 대부분 가장 숏런이 빠른 차로 기록한 것으로, 세나처럼 느린 차로 폴 포지션을 밥 먹듯 기록한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프로스트와의 경쟁 기간에도 다른 기록에선 프로스트가 앞서도 퀄리파잉만큼은 세나의 상대가 되질 못했다.


4.4. 카트 스타일[편집]


레이스에서도 세나는 자신만의 철학이 있었는데 바로 비타협적인 휠 투 휠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빠른 속도로 뒤섞여 달리는 모터스포츠에서 나란히 달리게 되는 휠 투 휠 (Wheel to Wheel)은 가장 치열한 경쟁의 순간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위험한 순간이기도 하다. 나란히 달리는 와중에 휠끼리 맞닿아 접촉해서 사고가 날 수 있기 때문. 이런 기본적인 리스크가 큰 휠 투 휠에서 세나는 이전 세대의 드라이버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세나 이전 세대의 드라이버들은 서킷 환경이나 레이스카의 안전장치 같은 것이 상대적으로 열약했기 때문에 보통 이런 휠 투 휠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일은 드물었다.[62] 분위기 자체가 그런 방식의 경쟁이 지나치면 위험을 조장한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세나가 처음으로 고카트 방식의 레이스를 선보였던 것. [63] 물론 세나가 고카트에서 처럼 컨택도 불사하는 레이싱을 했다기 보단 그 기조를 포뮬러 원 레이싱에 가져왔다고 보는 것이 맞다.[64] 때문에 이런 세나의 성향에 완전히 반대되는 성향을 가진 프로스트와는 팀메이트 기간 내내 상극이었고 재키 스튜어트 같은 6,70년대 드라이버들과도 가치관에서 충돌이 있었다.


5. 연도별 성적[편집]



5.1. 포뮬러 1[편집]


시즌

경기
우승
폴포지션
패스티스트 랩
포디움
포인트
순위
1984
톨만 모터스포트
14
0
0
1
3
13
9위
1985
팀 로터스
16
2
7
3
6
38
4위
1986
16
2
8
0
8
55
4위
1987
16
2
1
3
8
57
3위
1988
맥라렌 F1 팀
16
8
13
3
11
90
1위
1989
16
6
13
3
7
60
2위
1990
16
6
10
2
11
78
1위
1991
16
7
8
2
12
96
1위
1992
16
3
1
1
7
50
4위
1993
16
5
1
1
7
73
2위
1994
로스만스 윌리엄스 르노
3
0
3
0
0
0
-


6. 여담[편집]


  • 외래어 표기법대로 적은 이름은 '아이르통 세나 다시우바'지만 국내에선 '아일톤 세나'라고 훨씬 많이 알려져 있고[65], 네이버 인물사전과 본 문서의 표제어도 이를 따르고 있다. 참고로 로망스어게르만어권 인명 및 지명의 관사는 발음 변화를 반영하지 않고 뒤의 요소와 붙여 적기 때문에 '다'와 '시우바'는 붙여 적어야 한다.

  • 포르투갈식 이름에 따라, 첫 번째 성인 '세나'는 외가쪽 성, 두 번째 성인 '다시우바'는 아버지의 성이다. 즉 흔히 알려진 '세나'는 외가쪽 성씨인 것.


  • 사고가 일어나기 불과 1달 전인 1994년 4월에 출시된 신세기 GPX 사이버 포뮬러 ZERO에서 카자미 하야토에게 일어난 사고가 세나의 사고 상황과 비슷해서(좌회전 코너에서의 충돌, 같이 사고를 당한 사람이 오스트리아 출신인 점 등.) 제작진들에게 큰 충격을 주기도 하였다. 하야토 역의 카네마루 준이치와 카가 역의 세키 토시히코는 세나의 사고 소식을 듣고 '사이버 포뮬러 녹음 현장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라고 했다고. 하야토의 경우 세나의 행적을 많이 차용하기도 했다.

  • 2010년, 그의 출생 50주년을 기리는 다큐멘터리 영화 세나 : F1의 신화가 전 세계적으로 공개되었으며 그 이전에 2010년 10월에 일본에서 먼저 공개되었다.[66] 한국에는 「세나 : F1의 신화」이라는 제목으로 2011년 10월 20일에 개봉했다.[67] 고급 시계 브랜드인 위블로에서 아이르통 세나 기념모델을 발매했을 정도.[68]

  • 파일:Senna_008.jpg
파일:motinmotin.jpg
자동차 드라이버면서도 이륜차 브랜드인 두카티바이크를 좋아해서, 당시 연인과 함께 두카티 타고 시내를 달리던 그의 모습은 꽤나 유명했다. 그래서 PPL 효과를 톡톡히 봤는지 F1과는 별 관계 없는 두카티에서 세나를 기념하는 모델을 출시하기도 했다.
무선모형에도 관심이 많았던 걸로 보인다. 자신의 별장에서 RC비행기나 헬리콥터를 날리며 여가를 즐기는 모습도 구글에서 검색하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 파일:senna 33.jpg

포뮬러 1 브라질 그랑프리가 열리는 서킷인터라고스의 1~2번 코너는 세나의 이름을 딴 '세나 S'로 불린다.[69] 직선 주로 끝에 있는 급격한 내리막 시케인으로 서킷 내 최고의 추월 포인트인 동시에 상당한 고난도의 코너로 유명하다. 마지막 코너에서 메인 스트레이트까지 슬립스트림으로 붙은 뒤 세나 S에서 추월을 시도하는 방식. 모멘텀이 약간 모자라면 전부 탈출할 때까지 난타전이 벌어진다. 첫번째 apex와 두번때 apex까지 한계가 다르기 때문에 이 코너를 도는 동안에는 순식간의 차의 템포를 바꿔야 한다. 피트의 출구도 이 코너를 통과해야 나온다.



세가메가드라이브게임기어레이싱 게임 '아이르통 세나의 수퍼 모나코 GP 2'에서 감수를 맡았다.[70] 그는 게임 내에서 얼굴마담 겸 플레이어에게 조언자이자 최고 클래스 레이싱 팀 MADONNA의 드라이버로 등장한다.[71]

  • 또 다른 레이싱 게임 컨티넨탈 서커스에서 플레이어의 차량이 세나가 로터스에 있던 당시의 차량이며, 엔딩에서 보이는 플레이어의 모습은 영락없이 세나.

  • 아이르통 세나 사후 20주기 년도이자 세나의 생일인 2014년 3월 21일에, 구글 에서 메인 화면에 세나의 탄생을 기념하는 로고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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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스 FW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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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스 FW43B)

  • 윌리엄스 레이싱은 세나의 사후 다음해 1995시즌부터 2021시즌까지 세나를 기념하는 로고를 차량 노즈 콘에 부착하는 전통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2022 시즌부터는 로고를 더 이상 부착하지 않게 되었는데, 윌리엄스의 감독인 요스트 카피토가 밝히길,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파일:d04rsm383.jpg

  • 2004년 산 마리노 GP에서는 세나의 사후 10주기를 맞이하여, 미나르디가 PS04B 측면에 브라질 국기와 세나를 기리는 문구[72]와 팬들이 세나에 대한 추억과 생각을 남길수 있는 사이트 주소를 홍보하였다.[73]


아이르통 세나 사망 20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세나 재단에 관한 것으로 세나가 생전 빈민 아이들을 위해 세운 사회 구호 재단으로 그가 사망한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브라질의 많은 아이들을 돕고 있다.

  • 그란 투리스모 6에서는 그의 사후 2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카트 시절부터 F1 입문까지를 돌아보는 아이르통 세나 트리뷰트가 특별 이벤트로 등장했으며, 몬차 서킷브랜즈 해치 서킷의 1980년대 레이아웃과 세나가 타고 우승했던 카트, F3, 로터스 F1 팀 등이 추가 컨텐츠로 수록되었다.

  • 한국의 인디 포스트 락 밴드인 로로스가 2014년 가을에 발매한 2집에서 헌정곡을 만들어 수록하였다. 여담으로 리더인 도재명이 세나의 엄청난 팬이라고 한다.


일본의 퓨전 재즈 밴드인 티스퀘어의 92년 앨범 Impressive의 첫 곡인 'Faces'는 아이르통 세나에게 헌정하는 그의 테마곡이다. 티스퀘어는 이전부터 히트곡 Truth가 후지TV F1 그랑프리 오프닝 테마로 쓰였고 일본 그랑프리 전야제 공연에도 참가하는 등 여러모로 F1과 깊이 관련된 일본 밴드 중 하나였다.
파일:solitude.jpg
티스퀘어는 또한 세나가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94년 동년 10월에 Solitude -Dedicated to SENNA- 라는 추모 앨범을 발매했다. 여태까지의 티스퀘어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무겁고 진지한 곡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No End Run이나 Goodbye Hero 등, 제목을 통해 세나를 어느때보다도 더 기억하고자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위에서 소개한 Faces도 재수록됐는데, Impressive 버전과 비교해서 잔기교가 빠지고 좀 더 진중한 분위기로 변했다. 세나의 열정 그 자체를 상징하던 곡이 애석하게도 세나 사후 그의 추모곡이 된 셈.

  • 브라질 국적자답게 축구에도 애정이 많았으며, 몇몇 대표팀 축구 선수들과도 친분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상파울루 FC의 팬이었다고 알려져있으며, 월드컵 경기와 본인의 레이스 일정과 겹치면 축구 경기를 못 본다며 아쉬워한 적도 많았다. 물론 그럼에도 프로답게 레이스에 임하고 항상 최고의 모습을 보여줬지만. 그리고 1994 FIFA 월드컵 미국에서 우승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은 월드컵 우승 기념 사진 촬영 때 세나를 추모하는 플래카드와 함께 찍기도 했다. 여담으로 세나가 작고한 해에 당시 신인이던 호나우두랑 우연히 공항에서 찍은 사진이 있다.#

  • 맥라렌은 세나를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딴 맥라렌 세나를 출시했다. 발표가 됐을 때에는 이미 499대가 완판된 상태였다. 성능은 이름에 걸맞게 매우 흉악한 차량이다.

  • 전성기를 함께했던 12번 맥라렌 MP4/4는 지금도 최고의 컨디션으로 정태보존중이다. 과거 탑기어에서 세나에 대한 추모 에피소드를 진행할 때 그의 광팬인 루이스 해밀턴이 촬영 차 세나의 MP4/4로 실버스톤 서킷을 주행하였다.

  • 아일톤 세나의 아버지 '밀턴 다 시우바'가 노환으로 인한 자연사로 94세에 2021년 10월 28일 오전 5시 경 별세하였다.

  • 아일톤 세나 사망 당일, 일본 경마에서 한 획을 그을 경주마가 태어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사일런스 스즈카이다.

  • 그의 이름을 딴 경주마도 존재했다. 황제라고 불리던 심볼리 루돌프의 자마 아일톤 심볼리라는 말로 일본 경마에서 나름 괜찮은 성적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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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년 4월 말, 이몰라 서킷에서 개최되는 에밀리아 로마냐 GP에서 맥라렌의 F1 쇼 카로 아일톤 세나를 기리는 아트 카를 공개하였다. 차의 한쪽 면은 아일톤이 거쳐간 팀들 중 세 가지 상징적인 리버리인 로터스 F1 팀, 로스만스 윌리엄스말보로 맥라렌으로 각각 구성되어 있으며 반대 쪽은 세나의 삶과 F1 경력에서 영감을 얻은 프랑스 거리 예술가 지바(Jisbar)와 이탈리아 패션 디자이너 마테오 마키아벨리(Matteo Macchiavelli)가 디자인 하였다. 이 차는 이탈리아 수집가 지안루카 트라몬티(Gianluca Tramonti)가 기증했으며 다가오는 에밀리아 로마냐 GP 기간 중 아일톤 세나 박물관에 전시될 예정이고 또한 마이애미와 모나코 F1 레이스에 등장할 예정이며, 2022 시즌 후반에 베니스와 마이애미에서 열리는 아트 이벤트의 대표작이 될 예정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경매를 통해 아일톤 세나 재단으로 수익금 일부를 기증한다고 전했다.

  • 윌리엄스가 2022년부터 세나 재단의 로고를 더 이상 붙이지 않은 것과 대비되지만, 맥라렌은 모나코 GP부터 MCL36에 로고를 부착하여 세나를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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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cl60senna.png
2022 MCL36
2023 MCL60


6.1. 세나와 혼다의 관계[편집]


현재에 이르러서는 위에서 설명한 맥라렌 세나의 예와 같이 맥라렌이 가장 세나 관련 마케팅에 열심이지만, 정작 세나의 커리어에서 가장 큰 영향을 주고받은 회사는 다름 아닌 혼다였다.

세나의 맥라렌 커리어의 시작 자체가 자신이 운전하던 로터스에 혼다 엔진이 탑재 되면서 물꼬가 트인것이였으며, 이 때 부터 혼다의 엔지니어들은 세나의 레이스에 대한 접근 방식에 반해 있었다고 한다[74]. 당시 맥라렌에서 일하던 관계자가 세나와 프로스트의 차이점의 대해 언급한 것에 따르면 "프로스트는 혼다 엔진을 사용하는 맥라렌의 드라이버였고, 세나는 맥라렌 섀시에 탑재된 혼다의 드라이버였다"고 하며, 이는 알랭 프로스트가 이후 당시를 회상하며 인터뷰한 내용에서도 등장하는 내용으로, 프로스트 역시 이러한 표현에 크게 동의하였다. 특히 당시 혼다 F1의 엔지니어로 활동하던 사람중에는 카와모토 노부히코가 있었는데, 이후 고위직을 거친 그가 90년에는 혼다의 회장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혼다로서도 세나를 노골적으로 편애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특히 카와모토는 프로스트와의 만찬에서 프로스트가 혼다가 세나를 편애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고 전하자, 혼다 엔지니어들이 세나를 더 좋아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고 전해준 바도 있다.

이렇듯 프로스트와 세나가 맥라렌에서 경쟁하던 당시 혼다는 세나를 눈에 띌정도로 우선시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이는 프로스트가 89년을 끝으로 맥라렌을 떠나는데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 혼다가 세나를 사랑한만큼 세나에게 있어서도 혼다와의 관계는 중요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92년 당시 혼다가 몬자에서 열리는 이탈리아 그랑프리 동안 공식적인 철수를 발표하자, 이에 관해 질문하는 기자와의 인터뷰 직후 돌아서며 눈물을 흘린바 있다.



이러한 혼다와의 관계 때문에 멕라렌 시절 혼다의 명차 NSX (NA1)의 개발에 참여해 매우 큰 도움을 주었다. 특히 그가 빨간색 NSX를 하얀 양말과 로퍼를 신고 한계까지 몰아붇히는 영상은 아직도 매우 유명하며, 특히 해당 영상에서는 그의 뛰어난 풋워크와 특이한 쓰로틀 컨트롤 방식을 볼 수 있다. 본인도 마음에 들었는지, 개인적으로 한 대를 소유 했을 정도다. 이런 점에서 NSX는 세나의 헤리티지를 상징하는 명차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혼다에서도 세나 관련 마케팅을 안 하는 것은 아닌데, 가장 대표적으로 위의 브랜드 CM, "Sound of Honda"가 있다. 세나가 달렸던 스즈카 서킷을 빛과 소리로 재현한 영상일 뿐이지만 이 영상은 아직도 그를 기억하고 있는 수많은 F1 팬들을 울렸다.

6.2. 인간적인 면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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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근들의 말에 의하면 굉장히 사려깊고 정의감이 강했다고 한다. 도덕적으로 타격을 입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했다고. 그런데 이건 레이스카 밖에서의 이야기이고 레이스카에만 올라타면 굉장히 공격적이고 호전적인 딴 사람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만약 피트에서 마샬들이 조금이라도 시간을 지체하면 아주 조급해하고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인다. 반면 레이스카가 달려오는 목숨이 위험한 서킷 한 가운데를 달려가 부상당한 드라이버를 구출하고 후배 드라이버들을 위해 진심을 다해 조언하고 챙겨줄 만큼 자신의 신념이 강한 사람이었다.

개인적으로는 항상 하느님 얘기를 할 정도로 독실한 크리스찬이었다. 레이스에서 우승하면 꼭 하는 얘기중 하나가 신에 대한 감사. 그는 항상 레이스에 나서기 전에 차에 앉아서 기도를 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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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조국에 대한 사랑은 남달라서 항상 브라질 국기를 들고 다니며 레이스마다 흔들곤 했다. 또한 그는 당시 막장의 끝을 달리던 브라질의 국가상태[75]와 거기에 고통 받는 아이들을 항상 안타까워 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아이르통 세나 재단. 빈민층 아이들에게 교육과 지원을 베풀고 여러 꿈을 가진 아이들[76]을 뒷받침 해주는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그는 항상 이 세나 재단을 홍보하는 티셔츠를 입고 그리드를 돌아다녔으며 틈만 나면 요트에 가득 먹을 것과 생필품을 실어서 시골의 아이들에게 가곤 했다. 또 그는 자선 기금을 위해 F1 드라이버들을 불러 모아 돔 구장 안에다 카팅 서킷을 만들어놓고 팬들을 불러다 친선 카팅 경기를 열기도 했다. 사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생전에 익명으로 사재[77]를 털어 빈민층 아이들을 위해 기부했다고 한다. 그의 사후 세나 재단은 누나인 비비안느 세나가 맡아서 관리하고 있다.

때문에 그의 죽음 이후 브라질 정부가 3일간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막장도 그런 막장이 없던 브라질의 나라 상태를 생각하면 그의 인간적인 모습과 불안정한 조국을 아끼고 국제 무대에서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은 브라질 국민에게 뜨거운 애정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그는 팬들이나 드라이버들에게 레이싱 드라이버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써 매력적인 면들이 있었다. F1 특유의 정치적인 환경에 대해 불편함을 공개적으로 나타내고 최대한 정치색이 배제된 순수한 의미에서의 경쟁을 추구했다는 점, 모터스포츠가 가지는 태생적 위험을 인식하고 사고로 다친 드라이버들을 챙기는 등 직업정신과 동업자 정신이 투철했다는 점, 당시 국제무대에서 밝히기 꺼려지던 브라질이라는 국적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브라질의 가난한 아이들을 아꼈던 점, 그리고 자신 스스로가 F1 레이싱에 엄청난 열정을 보여줬다는 점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점들이 후대 드라이버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6.3. 그의 헬멧[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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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싱 드라이버들은 저마다 특유의 디자인으로 커스텀한 헬멧을 착용하는데, 빠르게 달리는 서킷 안에선 쉽게 드라이버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눈에 띄게 위함이기도 하고 그 자체로 자신의 상징으로 삼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세일즈 포인트. 아이르통 세나는 조국 브라질 국기의 색상인 초록색과 파란색 노란색을 혼합한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강렬한 노란색 바탕의 헬멧은 어딜가든 눈에 띄였으며 그의 사후엔 완전히 세나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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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캐나다 GP에서 세나와 같은 65번째 폴 포지션을 기록하고 세나가 착용했던 진짜 헬멧을 전달받고 놀라는 해밀턴)

때문에 모든 드라이버들의 존경을 받는 세나여서 그의 헬멧 디자인을 오마쥬하는 드라이버들이 매우 많다. 대표적으로 루이스 해밀턴. 그리고 그의 조카인 브루노 세나[78]. F1을 오랫동안 봐온 팬이라면 왠지 모를 애틋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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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나 재단을 위해 세나의 헬멧과 사진을 찍은 미하엘 슈마허알랭 프로스트.


6.4. 모나코 마스터[79][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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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라렌에서의 마지막 해이자, 마지막 모나코 그랑프리 우승이 된 1993 시즌 맥라렌 MP4/8.

F1 드라이버들은 저마다 하나쯤 유난히 강한 면모를 보이는 서킷이 있는데 세나는 모나코 서킷이 그러했다. 키미 라이코넨이 스파-프랑코샹 서킷에서, 그리고 루이스 해밀턴헝가로링실버스톤 서킷에서 유난히 빠른 스피드를 보이는 것과 비슷한 것. 그러나 비교가 힘든게 세나 현역 10 시즌 동안 모나코에서 통산 6승을 했을 정도로 모나코에서의 세나는 절대적이었다. 심지어 이는 차가 빨라서도 아닌 것이, 경쟁력 있는 차를 가지지 못했던 후기 로터스 시절이나 전성기 맥라렌 시절, 마찬가지로 느렸던 맥라렌 후기 시절에서도 세나는 우승을 놓치지 않았다.

여러 요인이 있지만 퀄리파잉에 목숨거는 모나코 특성상 세나가 퀄리파잉에서 무적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 맞아 떨어진 것이 가장 크다. 일례로 1988 시즌 모나코 예선에서 그는 같은 팀 메이트 알랭 프로스트와 1.427초 차이로 폴 포지션을 획득했다. 같은 차를 탔는데도 무려 1.5초 가까이 차이가 났던 것이다! 게다가 알랭 프로스트는 월드 챔피언 4회의 레전드 오브 레전드 드라이버다. 이 1.427초의 차이는 오늘날의 F1에서 최대 약 10위권 밖인 Q3 이전까지도 밀려날 수 있다. 이때 이후 30년이 지난 2018 시즌 모나코 그랑프리 예선에서의 폴 포지션(다니엘 리카도, 레드불 레이싱 RB14: 1:10.810)과 1.4초 정도 차이 나는 기록은 무려 10위(피에르 가슬리, 스쿠데리아 토로 로쏘 STR13: 1:12.221) 이다.

또한 단순히 퀄리파잉에서 앞섰기 때문에 우승을 많이 한 것이 아닌 것이, 1992년과 1993년에는 예선 3위에서 출발했음에도 기어이 제일 먼저 체커를 받아내고는 했었다.

우승을 놓친 1988년은 프로스트를 크게 앞서다가 스스로 사고를 내 리타이어한 경우였고 1992년에는 한참 닳은 타이어를 끼운 채로 새타이어를 끼운 만셀을 상대로 수십 랩 동안 막아내 만셀의 모나코 우승을 기어코 저지하기도 했다. 이렇게 세운 통산 6승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기록으로 그레이엄 힐, 미하엘 슈마허 등이나 5회 우승을 기록했을 뿐이며, 최근에는 로즈버그 정도가 3회 우승을 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세나는 다른 드라이버들과 달리 딱 10시즌만 달렸기 때문에 이는 엄청난 승률이라 할 수 있다.

세나가 요절한 것 때문에 커리어 면에서는 최강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이버들이 항상 역대 가장 위대한 드라이버로 선정하는 이유가 바로 가장 어려운 드라이빙 스킬이 요구된다는 서킷인 모나코에서 역대 최강의 마스터 오브 마스터로 군림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다른 드라이버들과는 달리 빠른 차를 타서도 아니었으며 만약 같은 차를 탄다면 누구도 그를 이길 수 없었다. 심지어 1992년에는 아예 대놓고 피트인 안하고 버티기로 해 새 타이어 끼고 나온 만셀을 기어코 막고 우승하기도 했다. 그만큼 모나코에서 자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


7. 세나에 대한 말, 말, 말[편집]


Q : 본인이 최고로 생각하는 드라이버는 누군가요?

저는 세나요. 그를 넘버 1으로 두고 싶습니다.

I think senna. I'll put him a Number 1.

페르난도 알론소

제게는 세나가 넘버 1 입니다.

For me senna is a Number 1.

펠리페 마싸

저에게 그(세나)가 넘버 1 이었어요.

For me he was a Number 1.

루벤스 바리첼로

저는 아일톤 세나를 넘버 1으로 두고 싶네요.

I put Ayrton senna as a Number 1.

야르노 트룰리

저는 의심할 것 없이 아일톤 세나가 넘버 1 이었습니다.

For me Ayrton senna undoubtably was the Number 1.

데이빗 쿨싸드

저는 그(세나)를 넘버 1으로 두겠습니다. 당신도 알듯이 그는 분명히 최고의 드라이버였어요.

I'll put him Number 1. You know he was definetely the greatest driver.

미카 하키넨

"저에게 물어보신다면, 저도 세나를 넘버 1으로 놓겠습니다."

If you asked me, I'll put senna as well as number 1.

미하엘 슈마허

"당신이 생각하기에 그 위대한 시대의 모든 드라이버들 중 가장 빛나는 사람이... 세나가 꼭대기에 있군요."

You think that Shining out from all those drivers in that great era... Senna rose to the top.

"세나가 꼭대기에 있어요."

"Senna rose to the top."

루이스 해밀턴[80]

-탑기어에서 제레미 클락슨과의 세나 다큐멘터리 인터뷰 中-


그는 아마도, 판지오만이 동급으로 취급받을 수 있는 경지까지 다다랐다.

He got to a position where he was only equalled probably, by Fangio.

스털링 모스


세나가 올해 월드 챔피언이 될 것 같지는 않지만, 경력을 지속한다면 미래에 틀림없이 월드 챔피언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81]

He's not about to be World Champion this year, he will undoubtedly be World Champion in the future if his career continues.

그는 그랑프리 레이싱 뿐만 아니라, 영원한 세계 최고의 드라이버이다.

The best driver in Grand Prix racing, the best driver in the world by a long way.

제임스 헌트


세나는 역사상 최고의 드라이버 였습니다.

Senna was the best driver who ever lived.

니키 라우다


아이르통은 생전에 다수의 챔피언 트로피를 획득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여러 관중분들에게는 무엇보다도 더욱 특별한 트로피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명예, 존경, 우상, 그리고 사랑으로 만들어진 트로피였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또 감사드립니다.[82]

비비안느 세나[83]

-1994년 일본 그랑프리에서-


여러분도 알듯이 솔직히 말해서, 전 절대 세나의 팬은 아니었어요. 전 항상 질 빌르너브가 세계 최고의 레이싱 드라이버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저는 이 세나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몇 시간 분량의 영상물들을 여러번 봤는데요. 중요한 것은, 빌르너브는 여러 차례 엄청난 모습을 보여줬지만, 세나는 차에 오를 때마다 엄청났습니다.

”You know to be honest with you, I was never a Senna's fan. I always thought Gilles Villeneuve was the greatest racing driver of them all. But, to make this film I watched hours and hours and hours of footage. And the thing is, Villeneuve was spectacular on a number of occasions, Senna, he was spectacular every single time he got in a car.”

제레미 클락슨

-탑기어에서 세나 다큐멘터리를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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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에서는 실제로 쓰이는 말이다.[2] 이 사진은 원본에 있던 왼쪽 가슴의 말보로 스폰서십이 모두 지워진 편집본이다.[3] 문맥을 따지자면 1990 시즌 마지막 두 경기가 남은 시점인 일본 그랑프리 때 프로스트가 월드 챔피언이 되는 확률을 없애려고 고의로(...) 충돌을 일으킨 직후의 인터뷰이다. [4] 미디어에서는 커리어 위주로 평가하기 때문에 세나를 약간 낮은 순위에 놓지만, 현장 드라이버들은 자존심이 센 인간들이고 자신들이 실력적으로 인정하는 사람이 아니면 대우해주지 않는다. 커리어만 보면 별볼 일 없는 짐 클락이나 질 빌뇌브 등을 가장 위대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커리어로 따지면 모터스포츠의 GOAT는 당연히 루이스 해밀턴 경과 미하엘 슈마허겠지만 프로의식, 명성, 서킷 밖에서의 모범된 삶을 합쳐 역사상 그 어떤 드라이버보다도 많은 공헌을 한 사람이기에 요절한지 오랜 세월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드라이버들 사이에서 고평가된다.[5] 2009년경에 전현직 F1 드라이버 217명에게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세나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드라이버로 선정된 바 있다.#[6] 물론 그가 제시한 가치관에 대해선 지금도 호불호가 갈린다. 그러나 그가 당대 모터 레이싱이란 스포츠를 하는 이들 모두에게 혁명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대부분이 인정하는 사실이다.[7] 세계적으로 봤을 때 브라질 스포츠를 대표하는 이미지는 축구와 펠레지만 정작 브라질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스포츠 드라이버를 선정하면 세나가 펠레를 앞서기도 한다. 마라도나는 자국으로 한정해도 세나보다 뒤떨어지면서 어떻게 나보다 낫냐는 식으로 펠레를 자극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아이르통 세나가 특히나 사랑받는 '고향' 상 파울루에서만 실시한 것이며 이 투표 결과로만 아이르통 세나가 브라질 역대 최고의 스포츠 스타라고 하면 곤란하다. 왜냐하면 이는 여론조사의 변수를 고려하지 않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이 투표 결과가 한국에 기사가 나서 각종 커뮤니티, 카페, 블로그 등에 이 투표 결과가 가장 많이 보인다.[8] #[9] 상파울루와 동부의 외곽도시를 연결한 30마일 길이의 고속도로를 그를 기려 아일통 세나 고속도로(Rodovia Ayrton Senna)로 명명했다.[10] 포르투갈령 마카오에서 1954년 처음으로 시작된 레이스. 전세계 F3 레이스 챔피언들이 모여 시가지서킷에서 경주를 치루는데 도로 포장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모나코를 씹어먹을 정도의 극악의 시가지 서킷 레이스이다. 여기서 우승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F3 세계 챔피언. 지금은 위상이 많이 떨어졌지만 이 시기 마카오에서 우승한다는 것은 F1에 데뷔한다는 것을 의미할 정도였다.[11] 레이스가 중단된 상황에서는 중단된 랩의 전 랩 상황을 경기 결과로 사용한다는 규정 때문이다.[12] 현재는 르노 F1 팀이다.[13] 나이젤 만셀이 로터스에 있을 때도 탐탁치 않아 했다.[14] 15랩째[15] 기록을 보면 알 수 있 듯이 80년대 초부터 90년대 초까지 이 4명이서 끊임 없이 경쟁하며 챔피언쉽을 사이좋게 나눠가졌다. 루이스 해밀턴과 제레미 클락슨이 말한 위대한 시대란 보통 이들의 전성기 시절인 80년대 중반에서 90년대 초를 말한다.[16] 후에 맥라렌 F1의 설계를 맡게 된다.[17] 16라운드 중 15라운드 우승, 승률 93.8%[18] 공교롭게도 엔초 페라리가 죽은 날은 이탈리아 그랑프리가 열리기 약 한달 전인 1988년 8월 14일이었다.[19] 이때의 FISA의 행동이 비판받는 이유는 실격 그 자체보다도 실격을 시킨 사유에 있다. 세나가 레이트 브레이킹을 걸어 자리를 억지로 차지했다거나, 사고 이후에 세나 자신이 혼자서 출발한 것이 아닌 마셜들이 밀어주면서 출발했다는 것 등의 실격 사유로 인정될 만한 것들이 있었음이 분명하나 FISA는 굳이 애꿎은 런오프에 빠지지 말고 트랙에 복귀하라고 만들어 놓은 이스케이프 로드를 이용했다는 이유로 실격을 시켜 버려서 억지스러움을 가중시켰다는 것.[20] F1 대회를 운영하는 현 FIA의 전신[21] 9-6-4-3-2-1[22]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땐 썩 마음에 들어하진 않았던 것 같다. 프로스트는 좋은 조건이 주어저야 경쟁할 의향이 생기는 겁쟁이라고 인터뷰에서 말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러고 1994 시즌에 자신도 윌리엄스로 이적하였다.[23] 1991년 프로스트는 우승을 한 번도 하지 못했고 포디움에도 4회밖에 오르지 못했다. 프로스트는 부족한 차량 성능에 대한 불만감을 전혀 숨기지 않았고 페라리도 특유의 자존심(...) 때문에??: Shitbox! 페라리와 프로스트의 관계는 악화되기만 했고 마지막에서 두 번째 라운드인 일본 그랑프리의 인터뷰에서 프로스트가 당시 페라리의 개떡같은 성능에 대해 "끔찍한 트럭을 모는 것 같다"라고 말한 것을 구실로 시즌도 끝나지 않았는데 프로스트를 다짜고짜 쫒아내버렸다.근데 페라리는 다음 해에는 더 떡락해서 침체기에 들어섰고 프로스트는 윌리엄스로 이적해서 챔피언을 한 번 더 했으니 결과적으론 이득 본 거다[24] 2위와 2.9초 차이로 간신히 우승.[25] 발전한 에어로 기술로 인해 견뎌내야 하는 다운포스가 상상을 초월하는 현행 F1 차량에는 파워 스티어링이 탑재된다. 물론 이 당시에도 다운포스를 매우 많이 받았지만 파워 스티어링은 탑재되지 않았어서 쩍쩍 달라붙는 타이어를 장착하고 엄청난 토크를 내뿜는 괴물을 맨손으로 다뤄야 했던 1990년대까지의 드라이버들에게는 상체 근력이 굉장히 중요시됐다.[26] 그 와중에 마샬들은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고 세나의 핼멧을 들어올리며 환호했다.[27] 가장 유명한 모나코 그랑프리. 그는 닳아버린 타이어로 새 타이어의 만셀을 20랩 넘게 막아냈다.[28] 에릭 코마스의 차는 반파된 채로 스트레이트 한 가운데에 있었고 에릭 코마스 본인은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게다가 서킷에 먼지까지 나부껴 자칫하면 뒤에서 달려오던 차와 정면 충돌할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세나는 여기다 차를 세우고 직접 뛰어가 그를 구출한 것.[29] 유튜브 공식 F1 채널에 올라온 영상에 의하면 코마스가 의식을 잃고도 계속 액셀을 밟고 있었는지 엔진소리가 크게 나서 멈춰세우고 구하러 갔다고 한다.[30] 당시 맥라렌의 타이틀 스폰서였던 말보로의 주선으로 역시 말보로가 타이틀 스폰서였던 펜스키팀의 차량을 테스트했었다[31] 이때 세나의 후임으로 영입했던 드라이버가 앞서 언급했던 마틴 브런들이다. 다만 1994 시즌만 출전하고 그 전 소속팀이었던 리지에로 돌아갔다.[32] 물론 이 때까지도 알랭 프로스트의 세나 거부 조항은 유효했다. 때문에 윌리엄스는 프로스트에게 방출 의사를 내비쳤고 프로스트는 다음 시즌 연봉을 받는 조건으로 은퇴했다.[33] 물론 프로스트는 1988-89 시즌 맥라렌 시절처럼 세나와 같은 팀에서 경쟁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어림도 없는 말이었다.[번역] 우리 소중한 친구 알랭에게 특별 안부 전해. 우리 다 널 그리워해, 알랭.[34] F1 드라이버 최고의 라이벌은 팀 동료다. 다른 팀 드라이버에게 졌을 땐 차량과 팀을 탓할 수 있겠지만 동료에게 진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35] 현재 F1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인데, 외계의 기술력을 탑재한 차량은 매우 좋은 퍼포먼스를 보인다. 당연하지만 차량은 전체적으로 그 기술력 하나를 중점으로 밸런스를 맞추어 설계한 것이므로 중심이 되는 기술이 금지당하는 순간 대부분 나락으로 떨어지기 마련이다. 2010년대 초반에 블로운 디퓨저를 이용한 레드불이 블로운 디퓨저가 금지되자 차량의 밸런스가 무너져 우승권에서 바로 멀어진 것을 볼 수있다.[36] 그러나 폴 포지션은 3라운드인 산마리노 그랑프리까지 모두 획득했었다. 차는 굉장히 빨랐지만 그와 동시에 굉장히 불안정했다는 것이다.[37] 실제로 1994 시즌에 출전했던 베네통 B194에서는 규정으로 금지된 트랙션 컨트롤 시스템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베네통 측에선 레이스 중 사용을 부인했다.[38] 사실 세나는 데뷔 때부터 F1 특유의 정치적인 상황에 대해 불편해했고, 커리어 기간 내내 그런 상황에 시달리고 FISA와의 관계가 무척 안 좋았기 때문에 그런 의혹에 대해 큰 절망감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39] 충돌의 충격으로 타이어가 콕핏을 뚫고 라첸베르거를 강타했고 갑작스러운 속도 감소로 롤란트는 대동맥이 파열되었으며, 두개골이 골절되었다.[40] 이때 세나와 친했던 F1 메디컬 닥터 시드 왓킨스는 그에게 이제 그만 F1에서 은퇴하고 낚시나 하면서 여생을 보내자 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나의 대답은 그럴 수 없다고.[41] 속력이 느릴수록 타이어가 느리게 예열되고, 위빙을 하며 타이어의 마찰력을 높이기도 어려워진다.[42] 우습게도 이 당시 이몰라 서킷은 돈이 없어서 고성능 스포츠카도 아닌 일반 승용 세단 복스홀 벡트라를 세이프티 카로 투입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쏘나타를 세이프티 카로 투입한 격이다.[43] 라첸베르거의 죽음은 바로 다음날에 벌어진 세나의 죽음에 묻혀버리고 말았으나, 정작 세나는 누구보다도 라첸베르거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44] 상술한 1992 시즌 당시 세나가 구해준 드라이버로, 레이스에서 투텔 라루세 F1 팀 소속으로서 18위로 시작한 상태였다. 옐로우 플래그가 나왔을 때 피트인하여 차량의 진동 문제를 고치고 나왔는데 그게 팀과 소통이 안되는 바람에 나오는 타이밍이 레드 플래그가 나오고 세나를 실을 헬기가 막 트랙에 착륙했을 즈음이었고 레이스에 다시 참여하기 위해 풀 스로틀을 밟던 코마스는 헬기와 하마터면 충돌할 뻔했다. 공교롭게도 본인이 멈춘 곳의 상황은 본인의 은인이 실려가는 참상이었고, 2년 전 세나가 차량에서 뛰쳐나와 자신을 구해줬던 것과 달리 마샬들의 통제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45] 사고 지점이었던 탐부렐로 코너 자체는 문제가 굉장히 많았으며, 심지어 이미 세나의 사고와 유사한 유형의 정체불명의 원인으로 인한 사고들이 벌어진 적이 많이 있는 상황이었다. 1987년 넬슨 피케의 사고나 세나의 사고와 많은 유사성을 지닌 1989년 게르하르트 베르거의 사고가 대표적인 예. 또 탐부렐로 코너는 메인 스트레이트 직후에 나오는 풀악셀 초고속 코너임에도 노면이 좋지 않고 런오프도 매우 좁았으며 충격을 흡수하는 데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방벽도 일반적인 타이어 방벽 같은 것도 아닌 콘크리트 방벽이었다. 미국의 오벌 코스에서도 훗날 SAFER 방벽(#)이 도입되기 전까지는 원시적인 콘크리트 방벽을 사용했는데, 이 때문에 큰 사고가 나열도 하지 못할 정도로 굉장히 많이 터졌음을 생각해 보자. 이런 안전하지 못한 코너는 큰 사고를 예방하기는 커녕 사고의 충격과 부서져 튕겨지는 부품 잔해들을 흡수해 줄 가능성조차 만무했고 결국 사고의 규모를 가중시키는 것이다. 결국 언젠가는 터질 시한폭탄이었다는 이야기.[46] 온보드캠을 보면 스티어링 휠의 중심축이 틀어지는 것을 볼 수가 있다.[47] 노면이 조금만 안 좋아도, 심지어는 그냥 직선 주로만 달려도 불꽃이 많이 튀는 것이 당대의 F1 차량이며, 실제로 F1 차량의 이몰라 주행 영상을 보면 탐부렐로에서도 불꽃이 자주 튄다.[48] 물론 슈마허와의 경쟁이 세나의 사고 원인은 절대 아니다.[49] 당시 이몰라 그랑프리 우승은 슈마허, 3위는 하키넨이었다.[50] 한 시즌에 약 20경기 가까이씩이나 그랑프리가 개최되는 현재에 와서도 상당히 괴물같은 승률이다.[51] 그가 사망한지 20년이 지났는데 그 위로 있는 사람은 슈마허와 해밀턴 둘 뿐이다... 무엇보다 세나가 한창 활동하던 시기에는 그랑프리가 약 12개 정도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승률과 마찬가지로 확률로 계산한다면 40.12% 라는 괴물같은 확률이 나온다...[52] 브라질의 공용어인 포르투갈어이다. 1994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꺾고 결승전에서 우승한 브라질 국가대표팀은 월드컵 트로피를 손에 넣으며 세나를 추모했다.[53] 당초에는 이탈리아 공군이 직접 관을 옮겨 주겠다고 했지만 유족 측에서 거부했다. 심지어 세나의 관을 운구한 바리그 여객기는 PP-VOQ로 이전에 대통령 전용기로 쓰이던 기체였다.[54] 그리고 비슷한 시기 당시 FIA 회장이었던 맥스 모즐리는 세나의 장례식에는 오지 않고 같은 그랑프리 도중 사망한 롤란트 라첸베르거의 장례식에만 참석했다.[55] 로마서 8장 39절이며, 구절이 다소 생략되어 볼드체로 표시된 부분만 새겨졌다. 후술하겠지만 생전에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56] 1년 뒤인 1995년에 이몰라에서 찍은 사진이다. 좌측부터 나이젤 만셀, 장 알레시, 하인츠하랄트 프렌첸, 미하엘 슈마허, 데이먼 힐, 스즈키 아구리[57] 브루노 세나의 엄마가 아일톤 세나의 누나인 비비안느 세나였다.[58] https://youtu.be/LId5SKxljqs 15초부터. 세나의 쓰로틀 조절이 다른 드라이버들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을 볼 수 있다.[59] 그래서 세나를 진정한 의미의 키보드 레이싱 게이머라고 칭하는 농담도 존재한다. 게임패드나 레이싱휠 페달과 달리 키보드로 레이싱게임을 할 때는 키를 눌렀다 뗐다 하는 방식으로 액셀을 구현해야하기 때문에 풀 쓰로틀과 쓰로틀 오프라는 두 가지 상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60] 그 때문에 F1이 차빨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61] F1에서 원랩이 0.3초 차이가 나면 그 차는 이길 수 없다고도 한다. 그런데 같은 차를 타고도 그것도 역대급으로 꼽히는 선배 레전드 드라이버와 1초 이상의 차이를 냈다는 것이다.[62] 실제로 82년 리카르도 팔레티의 사망 이후 F1 섀시에 카본 기술이 들어가고 안전장치 기술도 발전하면서 94년 산마리노까지 사망 사고는 없었다.[63] 고카트도 바퀴가 노출된 오픈 휠 방식이지만 차량간 컨택이 포뮬러 레이싱보다 훨씬 자유롭다. 속도도 느리고 무겁지도 않아 상대적으로 크게 다칠 위험이 적어서 이기도 하지만.[64] 세나는 카트를 굉장히 오랜 시간동안 탔다. 그리고 프로 레이서가 된 이후에도 카트 레이싱의 환경을 매우 이상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기도 했다.[65] 그의 고향 상파울루에선 아일ㄹ통 쎄나로 주로 발음한다.[66] 2010년 10월 7일 열린 F1 일본 그랑프리에 맞춰 일본 미에현 스즈카 서킷에서 월드 프리미어를 거행.[67] 참고로 일본 개봉이 먼저 이뤄진 것은 일본에서 세나의 인기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세 차례의 F1 월드 챔피언쉽 타이틀 중 두 차례를 일본 GP에서 확정지었다.[68] 위블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기념 시계를 만들기도 했으며, 마라도나 아르헨티나 국대 감독이 양손에 하나씩 두 개 차는 시계로도 유명하다.[69] 세나가 현역이었을 당시 인터라고스는 대대적인 개보수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 세나가 직접 이 코너의 설계에 참여했다.[70] 사실상 그가 마지막으로 감수를 맡은 유작이다.[71] 그런데 이 팀 및 드라이버 가명들이 너무 센스가 없었던지라, 애초부터 실존하지 않았던 가상의 단 한 팀을 제외하고 이름, 사진 등을 모두 실제 팀명 및 드라이버 프로필로 바꾼 해킹롬도 꾸준히 나왔다. 영상으로 올라온 것도 실제 로스터를 반영한 해킹롬.[72] 사우다데는 영국 작곡가인 크리스 레아가 세나를 기리고자 쓴 노래의 제목이기도 하다. 사망 직후 주간에 한 브라질 팬이 Saudade라고 적힌 손수건을 흔드는 게 기억에 남아서 였다 한다.[73] 후에 책으로 정리되어 비비안느 세나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웹사이트에는 1994년 산마리노 경주에서 세나가 사망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DVD의 정보가 있으며 DVD 판매를 통해 모인 금액의 일부는 교육과 스포츠를 통해 도움이 필요한 브라질 어린이를 돕기 위해 설립된 Ayrton Senna 재단으로 전달되기도 했다.[74] 세나에게 반한것은 혼다의 엔지니어들 뿐만이 아니였는데, 88년 이후로 일본에서 세나는 최고의 F1 스타였다. 세나가 일본을 방문했던 당시에는 일본 여성팬들을 몰고다니고는 했으며, 위에 나온 T-Square의 헌정곡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하다.[75] 1990년대 초반 브라질은 군사독재정권이 끝난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천 단위의 인플레이션 상승률로 경제가 막장이 되어 화폐개혁까지 진행하였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고통을 받았다.[76] 가난한 아이들의 안정적 사회 진출을 돕는다.[77] 사망 당시 4억 달러에 달했다고 한다.[78] 누나인 비비안의 아들이다.[79] 일본에서는 실제로 쓰이는 말이다.[80] 참고로 해밀턴은 세나의 광팬이다. 세나의 노란 헬멧을 모티브로 데뷔 이전에 2005년 맥라렌에서 테스트 드라이버였을 때부터 썼을 정도.[81] 전설의 1984년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헌트가 해설을 하는 도중 세나를 극찬하며 한 말.[82] 세나의 전성기가 곧 혼다 엔진의 전성기였고 그의 커리어에서 결정적인 순간이 거의 모두 일본 GP, 스즈카 서킷에서 혼다 엔진의 레이스카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일본은 버블 경제 호황과 맞물려 포뮬러 원의 인기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라 세나을 향한 일본 팬들의 애착은 세나의 모국인 브라질 국민들 다음 가는 정도였다.[83] 아일톤 세나의 누나이자 아일톤 세나 재단과 아일톤 세나 학원가의 이사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