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케메네스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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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제국
[1]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5px-Standard_of_Cyrus_the_Great_%28Achaemenid_Empire%29.svg.png
군기(왕중왕의 기)[2]

파일: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지도.png
기원전 500년경, 다리우스 1세 시대의 최대 강역[3]
기원전 550년~기원전 330년
위치
서아시아, 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 남유럽, 동유럽
수도
페르세폴리스(명목상, 종교수도)
바빌론(실질적, 행정수도)
파사르가다에(초기 도읍지, 의례수도)
엑바타나(왕실 여름수도)
수사(왕실 겨울수도)
정치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샤한샤[4]
주요
샤한샤

키루스 2세
다리우스 1세
크세르크세스 1세
다리우스 3세
언어
아람어 (공식, 주 공용어)
고대 페르시아어 (왕실, 귀족)
엘람어, 아카드어
그 외 다수의 지방 언어
종교
조로아스터교
바빌로니아 고대 종교
그 외 다수의 지방 종교
민족
페르시아인, 메디아인 (지배층)
그 외 다수의 지방 민족
통화
다릭(아케메네스 왕조 금화)
시글로스(아케메네스 왕조 은화)
성립 이전
안샨
메디아
신바빌로니아
리디아
이집트 제26왕조
이집트 제30왕조
그 외 다수[5]
멸망 이후
헬레니즘 제국
그 외 다수[6]

1. 개요
2. 상세
3. 국호
5. 정치
6. 관용 정책
7. 경제
7.1. 다릭 금화
7.2. 엄청난 경제적 풍요
8. 군대
8.1. 육군
8.2. 해군
9. 종교
10. 의복
11. 건축
12. 민족성
13. 역대 군주
13.1. 안샨 국왕
13.2. 아케메네스 제국 황제
14. 인물



1. 개요[편집]


기원전 550년부터 기원전 330년까지 220년간 존속한 이란의 고대 왕조. 최초로 오리엔트 문명권 전체를 통일하고, 중동 문명의 기본틀을 제시한 인류 역사상 최초의 거대 제국이다.[7]


2. 상세[편집]


흔히 '페르시아'라 하면 이 왕조를 가장 많이 떠올리며, 현대 이란, 아프가니스탄(북부 한정), 타지키스탄의 시조가 되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도 나오는 키루스 대제, 다리우스 1세, 그리스와의 전쟁으로 유명한 크세르크세스 1세, 불사 부대(이모탈) 등으로 유명하다.

아케메네스 왕조를 세운 건국자는 아케메네스지만, 우리가 아는 대제국의 모습으로 성장함은 키루스 2세 대왕 때부터이다. 키루스 2세는 메디아, 리디아, 신바빌로니아, 엘람 등 수많은 지방을 정복하며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 대부분을 일구어냈고, 그를 이은 캄비세스 2세이집트를 정복하며 세계 최강국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캄비세스 2세 사후 명군 다리우스 1세[8][9]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국의 번영을 이끌었다.

다리우스 1세의 뒤를 이은 크세르크세스 1세[10]가 아버지 다리우스 1세가 투입한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어마어마한 대군을 동원한 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페르시아 제국은 잠시 침체기를 겪었다. 허나 크세르크세스 1세의 후계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국내 전쟁 패배의 여파를 수습하고 그리스 도시들 간의 분란을 이용해 오히려 역으로 그리스와의 관계에서 우세를 점하기까지 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가 죽자 잠시의 혼란기가 도래했다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때 다시 안정을 찾았고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재위기에는 철권통치로 각지에서 일어나는 반란을 찍어누르며 제국의 세력을 과시했다.

그렇게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는 키루스 2세부터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시절까지 약 220여 년에 가까운 전성기를 누리며 세계 최강대국으로 군림했다. 하지만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가 환관 바고아스에게 암살당한 후부터 모든 게 꼬인다. 강력한 무력으로 제국을 휘두르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가 죽은 후 다리우스 3세가 겨우 바고아스를 쫓아내고 혼란을 수습했지만 다리우스 3세의 불행은 저멀리 서쪽 마케도니아 왕국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라는 희대의 괴물이 자라나고 있었다는 것.

기원전 334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리스 전체를 통합한 뒤 물밀듯이 페르시아로 쳐들어오기 시작했다. 다리우스 3세도 이를 막으려 들었지만, 알렉산드로스라는 천재를 이기지 못하고 그라니코스 전투, 이수스 전투,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연달아 대패하며 결국 끝장나고야 말았다. 다리우스 3세는 무력하게 도망치다가 파르티아 지방에서 암살당했고 잔존세력마저 모두 알렉산드로스 대왕 앞에 무릎 꿇으며 페르시아 제국은 완벽히 멸망했다.[11] 이후 페르시아 지방에는 마케도니아 계통의 셀레우코스 왕조가 들어섰다.

마라톤 전투살라미스 해전 등 그리스와의 주요 전투들은 오늘날까지 유명하다. 페르시아 제국은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대제국이었다. 페르시아 제국의 예상 인구수는 학자마다 달라서 1천만 명부터 8천만 명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8천만 명이란 설은 신빙성이 너무 없고, 2천만~3천만 명 남짓이리란 것이 정설. 당시 단일 국가로서는 인구가 최대였다.[12] 이는 당시 세계 인구의 약 25%~33%에 해당했다.

동쪽으로는 북인도, 북쪽으로는 중앙아시아, 서쪽으로는 유럽의 그리스, 북아프리카의 이집트에 달하는 대제국이었다. 저 유명한 로마 제국보다도 영토가 넓은 엄청난 제국이었다. 조로아스터교 신앙의 전파, 페르시아 정체성의 확립, 중동 패권국들의 틀을 잡은 왕조라는 면에서 역사적으로 의의가 깊다.


3. 국호[편집]


아케메네스 왕조 당대에 공식 국호 같은 것은 없었다.

'아케메네스 왕조'(Achaemenid Dynasty)라는 이름은 제국의 창건자 키루스 2세의 가문 시조의 이름인 '하하마니쉬'(, Haxāmaniš)를 고전 그리스어로 음차한 '아카이메네스'(χαιμένης, Akhaiménēs)에서 유래했다. 현대 페르시아어로는 '하허마네쉬'(, Haxâmaneš)라고 쓴다. 당대에 '하하마니쉬야'(, Haxāmanišya)라는 표현을 쓰기는 했는데, 이는 왕가 아케메네스 가문을 가리키는 이름으로서 국호와는 상관이 없었다.

고대 페르시아어 '흐샤싸'(, Xšāça / Khshassa)를 개요의 국호 자리에 올려 놓았는데, 이 단어는 아케메네스 왕조 국가의 고유한 국호보다는 영역, 왕국, 통치권 등을 가리키는 일반명사에 가깝다. 흐샤싸는 중세 페르시아어에서 '샤흐르'(, šahr)가 되는데, 사산 왕조는 앞에 이란인을 뜻하는 '에런'(, Ērān)을 붙여 '이란인의 국가'(, Ērānšahr)라는 확실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이름을 만들었다. 하지만 아케메네스 왕조의 는 <베히스툰 비문>에서 아후라마즈다왕중왕에게 수여하는 통치권과 통치 영역을 나타낼 뿐 국호로서의 성격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스어 '아르타크세르크세스'(ρταξέρξης, Artaxerxes)로 음역된 왕호 '아르타흐샤싸'(, Artaxšaça)에도 들어가는데, 아르타흐샤싸는 보통 '진실을 통해 통치하는 이'로 번역한다.

오늘날 알려진 '페르시아 제국'의 어원은 고대 페르시아어 '파르사'(, Pārsa)인데, 파르사는 아케메네스 왕조 국가의 발상지로서 현대 이란퍼르스 주의 범위와 거의 비슷한 지역이었다. 아케메네스 왕조 당대에 파르사는 왕가와 지배 종족의 고향 땅으로서 모든 속주들 가운데 으뜸 대접을 받았지만, 어디까지나 일개 지방과 그곳 출신 종족들의 이름이었을 뿐 제국 전체를 가리키는 국호로 쓰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제국이 멸망한 후 그리스인, 로마인, 유대인, 아르메니아인, 인도인 등이 아케메네스 왕조 국가를 파르사에서 유래한 이름들로 기록하면서 페르시아가 이 제국의 대표 이름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4. 역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아케메네스 왕조/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정치[편집]



파일:audience-scene.jpg

사절들을 알현하는 페르시아 황제
아케메네스 왕조는 황제를 의미하는 샤한샤를 정점으로 하는 전제군주제 국가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워낙 시대가 옛날이었던만큼 확고한 중앙집권제도를 이루지는 못했다. 워낙에 거대한 대제국이었고 수많은 민족들을 포함하고 있다보니 중앙정부에서 이를 다 관리할 능력도 없었고 실제로도 불가능했다. 그래서 도입한 제도가 바로 사트라프 제도다. 사트라프 제도는 명군 키루스 2세가 도입한 제도로, 제국 전역을 20개의 행정구역 '사트라피'로 나누고 이를 지방 총독에 해당하는 사트라프들에게 맡기는 제도였다. 도입 초창기에는 총 26명의 사트라프들이 있었지만 후일 다리우스 1세 시절에 36명까지 늘어나게 된다. 사트라프는 주로 페르시아 대귀족이나 황족 출신으로, 제 관할 구역 내에서만큼은 사법, 입법, 행정, 외교, 군사 등 거의 왕과 똑같은 권한을 누렸다. 대신 일정 분량의 세금을 무조건 중앙정부에 납부할 의무가 있었고 황제가 부를 때 무조건적으로 군대를 소집해 달려가야 할 의무도 있었다.

사트라프의 직위는 겸직이 가능해서 권력이 강한 인물은 2~3개의 사트라피들을 동시에 통치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특히 주로 변방에 해당하는 아나톨리아의 사트라피들이 이런 경우가 많았는데 일종의 변경백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제 구역 안에서는 왕이나 다름없는 사트라프들이었으니 황제로서는 이들이 반란을 일으키진 않을까 신경쓰일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추가적으로 '왕의 귀', '왕의 눈'이라고 불리는 감찰관들을 주기적으로 파견해 사트라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히 감시토록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사트라프 바로 옆에 황제가 직접 임명하는 총비서관을 두어 매달 사트라프의 행적을 담은 보고서를 올려보내도록 만들었고, 재무관도 따로 두어서 사트라프들이 국고를 함부로 남용하지 못하게 시도하기도 했다.

정석대로라면 이렇게 사트라프 곁에서 감시인들이 잘 견제와 균형을 맞춰야 했지만 인간사가 다 그렇듯이 사트라프 제도가 수월하게 돌아가진 않았다. 사트라프들은 중앙 정계가 조금만 혼란스러워지거나 황제가 교체되는 시기에만 이벤트처럼 반란을 일으키거나 말썽을 부렸다. 특히 페르시아가 등장하기도 전부터 유서깊은 문화와 역사를 자랑해오던 이집트바빌로니아 지방에서는 정말 황제가 바뀔 때마다 거의 무조건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또한 사트라프들이 황실 혈통이 섞인 황족들이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이들이 제위를 노려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시대에는 황족 출신 소(小) 키루스가 반란을 일으켜 그리스 용병들까지 모아 제위찬탈을 시도하기도 했고, 마지막 황제 다리우스 3세도 박트리아의 사트라프 베소스에게 목숨을 잃었다.


6. 관용 정책[편집]


만화, 영화 <300>에서 크세르크세스 1세가 "나는 관대하다"라고 하는데 실제로 페르시아 이전에 메소포타미아를 석권했던 사르곤 왕조 신아시리아 제국이나 바빌론 제10왕조 신바빌로니아 제국에 비하면 관대한 편이었다. 원래 페르시아가 들어서기 이전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는 정복 직후 피정복민들을 강제로 이주시켜버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대표적으로 아시리아가 이런 정책을 썼는데, 피정복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아예 뿔뿔히 흩어지게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페르시아는 이 전통을 깨고 원주민들이 제 고향에 그대로 살도록 놔두었다. 피정복민들이 그대로 잔존해 있었기 때문에 한시적으로 반란이 일어나거나 민심이 뒤숭숭해지는 경우는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페르시아는 폭압적인 정책을 펼쳤던 아시리아보다 훨씬 오래동안 안정적인 전성기를 누렸다. 페르시아의 관용 정책이 나름 효과를 보았다는 뜻이다.

페르시아는 기존의 토후들에게 사트라프의 지위를 부여하기도 하면서 민심을 달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간혹 가다가 사트라프가 반란을 일으켜도 국가 전복 기도나 독립 시도 수준의 악질이 아닌 이상은[13] 중앙군을 동원해서 진압하기보다는 사절을 보내서 말로 구슬리는 것을 선호했다. 샤한샤 입장에선 군대를 동원해서 밟아놓는 것보다는 대화로 해결하는 것이 시간과 비용 측면에서 더 효율적이고, 서로 피곤할 일이 없을뿐더러 군대를 동원해서 진압하는 것에 비해 반란 재발의 위험도 낮았다. 물론 반란을 일으켜도 한두 번은 눈감아주는 관대한 지도자라는 인상을 줄 수 있는 것은 덤이다.

이러한 관대한 이민족 정책[14]과 잘 짜인 법령 체제가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 확장과 존속의 결정적인 이유였다고 할 수 있다. 관용 정책의 다른 예시로 제국의 공용어 설정이 있는데, 기존 이란인들의 페르시아어가 아닌 (인구가 많은)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일대에서 통용되던 아람어를 채택한 것이다. 물론 공문서나 종교 문서에서는 페르시아어가 병기되곤 했다. 페르시아는 아람어나 페르시아어를 딱히 피정복민들에게 강요할 생각도 없었고, 기존의 언어를 그대로 쓰도록 허락했다. 덕분에 페르시아 제국 내에서는 이집트어, 페니키아어, 유대어 등 수많은 언어들이 그대로 쓰였다. 심지어 필요할 때는 최대 적국이었던 고전 그리스어도 공문서에 쓰기도 했다.[15] 다만 가끔씩은 언어가 워낙 많아서 군대 내에서 지휘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기기도 했다고 한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관용 정책이 가장 빛을 발하는 분야는 바로 종교 분야였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국교는 조로아스터교였지만 모든 황제들이 신민들을 조로아스터교로 강제 개종시키거나 기존의 사원을 허무는 등 탄압하는 행동은 최대한 자제하려고 들었다. 가장 역사가 깊은 이집트의 경우 오히려 기존의 신전을 확장, 개축하는 데에 국고를 지원해주기까지 했고, 황제를 아문의 아들로 묘사하는 벽화를 그리기도 했다. 바빌론에 사로잡혀 있었던 유대인들을 제 땅인 가나안으로 되돌려보내 준 것도 바로 이 아케메네스 왕조의 시조였던 키루스 2세였다. 뿐만 아니라 키루스 2세는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데 국고를 들여 지원했고, 덕분에 그 외골수 성향이 강한 유대인들이 그를 기름 부음을 받은 메시아라고 여기기까지 했을 정도이니 키루스 2세와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가 얼마나 당시 기준으로 관대한 포용 정책을 펼쳤는지 짐작할 수 있다.[16]

세계 최초의 다민족 국가(제국)였던 아시리아는 폭압적인 통치 때문에 타민족들의 분노를 사서 멸망했다. 하지만 세계에서 두 번째로 다민족 국가를 건립한 아케메네스 왕조는 관용을 중시해서 다양한 민족들의 포섭에 성공했기에 아시리아보다 오래 갔다. 그래서 후에 등장한 다민족 국가들의 성공적인 롤 모델로 평가되며, 아랍 지방과 동방 제국의 기본적인 틀을 닦을 수 있었다. 서양의 보편 제국으로서 로마 제국이 있다면 동양의 보편 제국으로는 아케메네스 왕조를 꼽을 정도이다.[17] 페르시아의 역대 황제들이 모두 이집트어, 산스크리트어, 페니키아어로 따로 왕명을 지어 부르게 했다는 사실[18]은 황제들 역시 다민족 포용에 관심이 많았음을 보여준다. 심지어 마지막 황제인 다리우스 3세는 망명해 온 그리스인들로부터 그리스어를 배웠고, 그리스어를 어느 정도 구사할 줄도 알았다.


7. 경제[편집]


당대 세계 최고의 경제 대국. 페르시아는 정말 부유함 하나만큼은 당대 국가들 사이에서도 압도적일 정도로 경제력이 끝내주는 나라였다. 중국은 아직 전통적인 근거지인 중원에서도 제대로 벗어나지 못했고 풍요로운 강남 지방은 늪지대에 불과했다. 유럽은 말할 필요도 없이 제대로 문명이 세워지지도 못한 야만인들의 땅이었고, 그나마 인도 정도가 대응할만 했지만 인도조차도 수많은 군소 왕국들로 쪼개져 있었고 그나마 페르시아에 대응할 수 있을 정도로 뭉친 정치체인 난다 왕조마우리아 왕조도 페르시아 말엽~멸망 이후에나 등장했다. 정말 인류의 여명기부터 발전을 거듭해온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등을 모조리 장악한 페르시아에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즉 이 당시 페르시아 제국은 압도적인 세계 제1의 경제대국이었다는 것이다.

페르시아 경제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요인들 중 하나에는 왕의 길이라고 불리는 교역로가 있었다. 페르시아 왕도 항목을 참조하는 것도 좋다. 육상에는 왕의 길이 있었다면 해상에는 당시 지중해 무역을 주름잡던 페니키아 상인들이 있었다. 페르시아가 세워지기 이전부터도 이미 지중해 무역을 꽉 잡고 있던 노련한 상인들이었던지라 페르시아 제국 시대에도 페니키아 대상단들이 활동했다고, 참고로 팔레스타인의 특산품은 렌틸콩, 머스타드 같은 주식이었고 바빌로니아에서는 , 참깨, 사과, , 대추야자 등을 재배했으며 시리아아르메니아에서는 포도주가 특산품이었다.


파일:800px-Tribute_in_the_Achaemenid_Empire.jpg

헤로도토스의 자료에 추정한 각지의 세수 비교. 당시 페르시아는 지역 경제력에 기반해 세금을 매겼기에 세수의 양이 곧 경제력이라고 볼 수 있다.
페르시아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다리우스 1세는 제국의 세수구역을 총 20구역으로 나누었다. 1구역은 이오니아, 2구역은 리디아, 3구역은 트라키아아나톨리아 서부, 4구역은 킬리키아, 5구역은 아시리아, 6구역은 이집트, 7구역은 간다라, 8구역은 수사, 9구역은 바빌로니아를 포함한 메소포타미아, 10구역은 엑바타나메디아, 11구역은 코카서스, 12구역은 박트리아, 13구역은 아르메니아, 14구역은 이란 서부의 사르가티아 지방, 15구역은 사카에와 카스피 해 지역, 16구역은 파르티아, 17구역은 발루치스탄, 18구역은 이란 북부, 19구역은 히타이트 등 지중해 동부 연안 지방, 20구역은 인더스 강 유역이었다.

이렇게 총 20개의 지방에서 막대한 세금을 걷어들였지만 가장 부유한 지방은 인더스 강 유역이었다. 다리우스 1세가 정복하면서 페르시아에 편입된 영토로, 이 인더스에서 거둔 세금이 제국 전체 세수의 32%에 달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그나마 제국에서 두 번째로 부유한 구역이 바빌론을 포함한 메소포타미아 구역이었는데 여기서 나오는 세금은 전체 세수의 9% 정도였다. 인더스 강 유역에서 거두는 세금의 3분의 1도 안됐다는 소리. 다리우스 1세의 세수 목록을 살펴보면 인더스에서 거둔 세금은 1년에 총 360 에우보이아 달란트의 금가루. 1 에우보이아 달란트가 약 26kg인 걸 생각해보면 매년 9,360kg에 달하는 금을 인도에서 쓸어갔다는 이야기다. 이 외에도 은과 귀중한 보석들, 거기에 지역의 특산물들까지 걷으면서 엄청난 수입을 올렸다고 한다.[19]

페르시아가 이같은 엄청난 부를 기반으로 발행했던 것이 그 유명한 페르시아의 금화와 은화들이다. 그러나 그 명성에 무색하게도 페르시아 지방은 본디 금화라는 개념이 생소한 지방이었다. 그러나 키루스 2세가 나라를 넓히던 중 리디아를 정복했는데, 이 리디아는 당시 왕이었던 크로이소스의 지시로 세계 최초의 금화를 주조해 쓰던 나라였다.

리디아를 정복한 키루스 2세는 금화가 그럴듯해 보이자 곧바로 이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아직 화폐 주조가 익숙치 않았기 때문에 리디아가 쓰던 사자와 황소 문양을 그대로 새겨넣었고, 금화의 중량 역시 10.7g으로 리디아의 것을 그대로 차용했다.[20] 아나톨리아 정복을 완료한 키루스 2세는 서부의 핵심 대도시 사르디스에 조폐창을 설치, 수많은 금화와 은화들을 찍어냈으며 물물교환이나 기껏해야 은덩어리로 거래를 하던 당시로서는 혁신적 기술이었던 화폐 덕에 페르시아 경제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7.1. 다릭 금화[편집]



파일:Daric_coin_of_the_Achaemenid_Empire_(Darius_I_to_Xerxes_II).jpg


파일:81486p00.jpg

다릭 금화
시글로이 은화
키루스 2세 시절 이래로 리디아의 화폐 디자인을 그대로 베껴쓰던 페르시아는 다리우스 1세 시절에 화폐 디자인을 따로 만들었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다릭 금화'다. '금빛'을 의미하는 고대 페르시아어 '다루이야카'에서 파생된 단어로 맨 처음에는 은으로만 주조되다가 나중에는 황금으로 만들었다. 이전부터 쓰던 리디아식 금화와 다른 점이라면 전에는 양면에 모두 문양을 찍어 훨씬 만드는게 까다로웠다면 새로 만든 다릭은 한 쪽 면에만 문양을 찍어 주조법을 간단하게 개조했다는 것. 그리고 기존의 사자와 황소 무늬를 없애고 대신 황제가 활을 쏘는 모습[21]을 새겨넣었다. 은화도 따로 만들었는데 이건 '시글로이'라고 불렀다. 다리우스 1세와 그 후계자들은 딴 건 몰라도 이 다릭과 시글로이의 제조만큼은 심혈을 기울여서 다뤘다. 세금도 이걸로 걷었으니 다릭과 시글로이의 유통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면 국가 경제가 망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 그래서 화폐 위조범은 반역죄에 준해서 처벌했다.

다만 다릭과 시글로이는 사르디스를 포함, 페니키아와 소아시아 일대 등 제국의 서부 지방에서만 주요 쓰이는 편이었다. 아직 초기 단계의 화폐들의 한계라고 볼 수도 있는데, 물물교환을 아예 제쳐버리고 완벽한 거래 수단으로는 자리잡지 못했다. 특히 수도 페르세폴리스가 있는 제국 동부 지방에서는 여전히 화폐보다는 물물교환을 선호했다.[22] 그래서 대부분의 금화와 은화들은 사르디스에 있는 주조폐창에서만 찍어냈다.

다릭이 워낙 품질이 좋았던 덕에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는 이 다릭을 현대 달러화처럼 썼는데, 문제는 이 다릭과 시글로이 양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다릭 같은 금화는 페르시아를 빼면 주조할 경제력이 되는 국가가 없었기 때문에 지중해권 국가들이 모두 이걸 썼지만 다른 나라에서도 찍어낼 수 있는 은화 시글로이는 거의 소아시아 지방에서만 유통되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리스에서 찍어낸 은화를 썼다. 페르시아는 그리스 화폐의 국내 유통을 썩 달갑지 않게 여겼지만 별다른 대책도 없어서 그냥 썼다고. 일부 사트라프들은 오히려 그리스 화폐를 모방해 은화를 찍어내기도 했다.

다리우스 1세가 기원전 500년대에 발표한 환율에 의하면 1다릭 = 20시글로이였다. 1다릭의 중량은 이전 리디아 금화보다 약간 가벼운 8.10~8.50g 정도였고 순도는 무려 98~99%에 달했다. 후대의 웬만한 금화들보다도 압도적일 정도로 순도가 높았던 것. 워낙에 순도가 높고 보증인이 확실했기 때문에 지중해인들이 이 다릭을 많이 썼다. 그리스 경제의 중심지였던 아테네드라크마의 경우의 환율은 1다릭 = 25드라크마였다. 25드라크마면 숙련된 정예병의 한 달 월급 정도로 생각하면 편하다. 참고로 은화 시글로이의 경우 중량이 5.40~5.60g 정도였다. 순도는 처음에는 다릭과 같은 98~99%에 달했지만 날이 갈수록 순도가 떨어졌다. 그래서 나중에 가면 그 순도가 94~95%까지도 떨어진다. 시글로이와 다릭은 아케메네스 왕조가 망한 이후에도 셀레우코스 왕조, 파르티아, 사산 제국 때까지도 쭉 유통이 계속된다.

이 다릭 금화는 페르시아의 적들한테 뿌리는 뇌물로도 사용되었다. 한 예로 그리스 스파르타의 국왕 아게실라오스 2세가 이끄는 스파르타 군대가 페르시아를 침략했을 때, 페르시아는 다릭 금화 3만 개를 그리스 본토의 도시 국가들한테 뇌물로 뿌리고 그 대가로 스파르타를 공격하게 했고, 그래서 스파르타 본국이 위험해지자 아게실라오스는 서둘러 군대를 이끌고 페르시아에서 철수하면서 "나는 페르시아 궁수 3만 명의 화살에 쫓겨났다."라고 자조적으로 말했다. 다릭 금화에 활을 쏘는 초상이 새겨져 있어서 그런 말을 했던 것이다.


7.2. 엄청난 경제적 풍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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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폴리스의 황궁 복원도
아케메네스 왕조가 누린 경제적 풍요와 부는 실로 엄청났다. 당시 곡창지대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나일강 삼각주, 이란 지역, 인더스강 유역을 모조리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다른 문명권을 살펴보자면 유럽은 로마 제국이 탄생하지도 않아 풍요로운 프랑스의 옥토가 울창한 산림으로 뒤덮여 있었고, 근대를 주름잡게 되는 독일 지역은 게르만족들이 사는 위험한 산림 지역이었다. 중국 역시 과거부터 개발되었던 중원을 제외하면 밀림이 우거져 있어서 경작지가 부족했으며 현재에는 곡창지대인 강남, 양호, 사천 지역 등 장강 유역은 지금의 아마존 같이 정글과도 같은 곳인 데다 이민족이 우글대는 미지의 땅이었던 시대다. 그런 상황에서 오랜 시간 개간과 관개 시설 개발을 마친 매우 부유한 지역 여러 곳을 독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예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의 겨울 수도인 수사를 점령했을 때는 5만 탈렌트어치의 은괴를,[23] 페르시아 제국의 의례적·종교적 수도인 페르세폴리스[24]를 점령하고 나서는 12만 탈렌트어치의 금화를 차지했다. 12만 탈렌트는 기원전 5세기 무렵 그리스의 도시 국가인 아테네의 1년 재정보다 무려 300배나 많은 수치였다. 아테네가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들 중에서 가장 부유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페르세폴리스가 갖고 있었던 경제력은 그리스 전체를 합친 규모보다 훨씬 거대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는 이수스 전투가우가멜라 전투 이후의 일이다. 다리우스 3세가 용병을 고용하고 농민 10만 명 이상을 징집하는 등의 군비로 사용한 돈이 엄청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만큼 국고가 남은 것이다.

여기서 1탈렌트의 가치가 얼마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기원전 431년에서 404년까지 그리스인들끼리 싸운 펠로폰네소스 전쟁 무렵에 1탈렌트의 금화는 200명이 탑승하는 군함인 3단 노선 1척을 1개월 동안 유지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뜨린 시기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보다 약 70년 이후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물가의 가치가 달라졌다고 해도 12만 탈렌트라면 실로 어마어마한 액수가 아닐 수 없다.

실제로 페르시아 제국이 가진 부는 그리스인들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페르시아 제국이 발행했던 다릭 금화의 위상은 오늘날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이 발행하는 달러화와 같았다. 그처럼 다릭 금화는 그리스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고, 그리스인들은 다릭 금화를 갖기 위해 페르시아 제국 군대에 복무하는 용병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심지어 아케메네스 왕조가 다 망해가던 다리우스 3세 시절,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쫓겨다니던 다리우스 3세의 곁에 최후까지 있으며 그를 경호한 상대는 페르시아에 복무하던 2천 명의 그리스인 용병들이었다. 그 밖에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리스를 침공한 페르시아한테 복수를 하겠다며 페르시아로 쳐들어왔을 때에도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따른 그리스인들보다 그에 맞서서 페르시아에서 용병으로 복무하던 그리스인들이 더 많았다.

그에 반해 그리스는 스파르타 왕 데마라토스가 페르시아 황제인 크세르크세스 1세에게 말했듯이, "본래부터 가난을 타고 난 지역"이었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부터 늘 풍요로운 지역인 아시아를 정복하겠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인 헤로도토스는 자신의 책인 <역사>에서 만약 페르시아의 수도인 수사를 점령한다면, 얻을 수 있는 부는 감히 제우스신과도 견줄 수 있을 것이다. 페르시아에는 금과 은과 구리, 곱고 아름다운 직물, 노예와 곡물과 가축 등이 매우 풍부하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했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리스인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지휘 아래, 아예 페르시아 제국을 통째로 정복해서 다릭 금화들을 완전히 차지하려는 야망을 품었고 그것을 실현시켰다. 그래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따라 원정에 동참했던 그리스인 데마라투스는 오늘 이전에 죽은 그리스인들은 알렉산드로스가 다리우스의 왕좌에 앉는 모습을 못 보았으니,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을 모른 채 죽었구나!라고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25] 오랫동안 가난에 시달리다가 당시의 세계 최강대국을 정복하여 그 엄청난 부를 모조리 차지하게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을 것이리라.


8. 군대[편집]



8.1. 육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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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 부대
불사부대의 재현도
페르시아 병사들의 재현도
페르시아군은 그리스에게 깨진 전투들만 지나치게 유명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인식은 '머릿수만 많은 오합지졸'이라고 여겨지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애초에 페르시아군이 약골이었다면 그 바빌로니아, 이집트, 아나톨리아를 싹 정복하고 대제국을 세우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페르시아군은 키루스 2세 시절부터 강력한 전력을 자랑하는 당시 지중해 세계 최강의 군대들 중 하나였고, 키루스 2세 이후 대제국으로 거듭나자 바빌로니아인, 시리아인, 아시리아인, 페니키아인 등 수많은 다민족들을 포괄한 혼성 군대로 변모했다.

다만 지나치게 민족 구성이 다양해서 명령 체계가 어질어질 섞이거나 언어 자체가 통하지 않아 지휘 체계가 엉성해지는 경우는 있었다고 한다. 당시 페르시아 군대에는 페르시아인, 페니키아인, 아시리아인, 바빌로니아인, 메디아인, 파르티아인, 리디아인, 심지어는 마케도니아인이나 그리스인까지 지나치게 많은 민족들이 잡탕처럼 섞여 있었기 때문.[26]

페르시아 보병은 크게 '불사 부대', '스파라바', '타카바라' 이렇게 3개로 나눴고 후대에 가면 '카르다케스'라고 제4의 병종이 새로 생겨난다. 영화 300에서 유명세를 탄 불사 부대는 '이모탈'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데, 실제로는 당연히 영화처럼 살아 있는 오크처럼 생긴 게 아니라 평범한 인간들이었다. '불사 부대'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불린 까닭은 전사나 기타 이유로 결원이 생기면 무조건 딱 그만큼 새로 채워넣어 정확히 1만 명의 정원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긴 나무껍질이나 갈대를 엮어만든 방패에 짧은 창, 칼, 그리고 단검 등을 휴대하고 다녔다. 밖에 걸치는 로브 아래에는 미늘 갑옷을 입었다.[27]

불사 부대의 장교들은 계급을 표시하기 위해 창날에 도금을 했고 일반 병사들은 그냥 은으로 만든 창날을 썼다. 페르시아 자타공인의 최정예병이었고, 황제 직속의 부대여서 황궁 경비나 황족 호위 등을 주로 맡았다. 웬만한 무예는 통달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가려 뽑았으니 그 전력은 엄청났다. 하지만 그리스 중장보병과 격돌한 테르모필레 전투에서는 맥을 못추고 쓸려나갔는데, 이는 불사 부대가 지나치게 가벼운 무장을 하고 있었던 탓이 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갑옷으로 도배하던 그리스의 호플리테스에 상대가 되지 못했던 것. 다만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그리스 군사들의 창을 부러뜨리려고 페르시아 군사들이 맨손으로 달려들었다는 헤로도토스의 저서《역사》의 서술을 볼 때, 정예병답게 충성심과 사기는 매우 높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불사 부대가 최정예병이었다면 그 아래에는 스파라바와 타카바라가 있었다. 스파라바는 일종의 방패병이었고, 앞에서 방패벽을 세우고 최전방에서 적들과 가장 먼저 충돌하는 병사들도 바로 스파라바였다. 당연히 혹독한 훈련을 받았고 페르시아 군대의 척추를 맡았다. 다만 불사 부대가 무예가 뛰어난 귀족 자제들만을 가려 뽑은 상비군이었던 데 반해 스파라바는 모병제를 통해서 징발된 일반 농부나 상인 따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당연히 훈련 정도는 불사 부대에 비해 확연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스파라바 역시 페르시아 병사들이 대개 그랬듯이 가벼운 무장을 하고 있었다. 스파라바는 직사각형 모양의 거대한 크기의 방패를 들고 킬트 장식이 들어간 가벼운 리넨 망토를 둘렀는데, 이 가벼운 무장이 일반적인 국가들에게는 통했을지 몰라도 2m에 달하는 거대한 창을 든 그리스 중보병을 막는 건 불가능했다. 스파라바들의 방패는 화살 정도만 겨우 막아내는 정도였지 그리스군의 거대한 창에는 바로 뚫렸고, 그리스군 특유의 팔랑크스 진영도 제대로 못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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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군인
스파라바보다도 더 가벼운 경무장을 했던 타카바라의 경우 알려진 게 많지 않다. 기록에 의하면 워낙 무장이 없는 수준에 가까울 정도로 가벼웠다고 적었는데, 아마 대규모 전투에서 싸우기보다는 요새를 방비하거나 초소를 지키는 게 주 목적이었을 거라 추정한다. 무장은 물론 복식까지도 통일되지 않아서 각각 제 출신 부족들의 무기를 사용했다고 한다. 주로 이란이나 이라크 지방의 민족들에게서 징집하는 경우가 많았다. 참고로 타카바라들이 가장 많이 썼던 무기는 한 손으로 다루기 쉬운 손도끼 '사가리스'와 방패였다고.

페르시아 제국 말기에 형성된 제4의 병종 '카르다케스'는 그리스 중보병 호플리테스에게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추정된다. 하도 중무장을 한 그리스 병사들에게 깨지니 페르시아에서도 중무장 보병대를 만들었던 것. 주로 그리스 출신 용병단들로 구성되었고, 마케도니아 왕국이 침공하기 바로 직전에 만들어졌던 터라 수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카르다케스는 거의 창설되자마자 나라가 망해버렸기 때문에 전술이나 의복에 대해서도 알려진 게 없다.

기병도 있었다. 워낙 다스려야할 땅덩어리가 커서 군대의 빠른 기동성을 중시하던 페르시아였던지라 기병대도 보병 못지 않게 나름 중요한 병종이었다. 페르시아 기병은 크게 전차 기병대, 말 기병대, 낙타 기병대, 코끼리 기병대로 이뤄져 있었다. 가장 주된 전력은 전차 기병대로 페르시아 제국 성립 초창기에 많이 쓰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규모가 줄었고, 말기에는 거의 예식용이나 퍼레이드 용으로나 썼다. 다만 말기의 대표 전투인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대규모의 전차가 투입된 것을 보면 그래도 실전성은 유지되고 있긴 했던 것으로 보인다.[28] 그래서 나중에는 전차 기병대 대신 많이 사용한 병종이 말 기병대다. 말에게도 기수와 마찬가지로 갑옷을 입혔고 기수는 짧은 창, 미늘 갑옷, 활 등을 썼다고 한다.

독특하게도 낙타 기병대도 있었는데, 키루스 2세가 리디아와 벌인 팀브라 전투에서 처음으로 도입했다. 리디아의 강력한 군마들 때문에 전쟁에 차질이 생기자 키루스 2세는 말들이 생소한 낙타를 전장에 투입했고, 리디아 군마들이 생전 처음 낙타의 냄새를 맡고 혼란스러워하는 틈을 타 승리를 거두었는데 그 이후에도 쭉 쓰였다. 전쟁용 코끼리의 경우 인도 지방에서 도입한 것이다. 지상 최강의 동물들 중 하나인 코끼리가 전장에서 미쳐 날뛰면 웬만한 사람이 멈추기는 불가능했으니 단연 그 효과 하나만큼은 압도적이었다. 문제는 눈이 돌아간 코끼리가 아군도 짓밟을 수 있다는 것이었지만..... 그리스와의 전쟁에서도 이 코끼리가 투입됐다는 기록이 있다. 단 그리스 측 기록에 이 코끼리에 대한 언급이 가우가멜라 전투에 동원된 15마리밖에 없다.

8.2. 해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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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의 트리에레스
안타깝게도 페르시아 해군은 육군보다도 더 이미지가 나쁜데, 워낙 대중들에게 살라미스 해전에서 어이없게 털린 페르시아 함대의 이미지가 크기 때문. 하지만 육군과 마찬가지로 페르시아 해군의 이미지도 지나치게 평가절하된 면이 있다. 페르시아 해군은 기원전 525년 캄비세스 2세이집트를 원정하러 가면서 처음으로 창설되었고 그 이래로 다리우스 1세 시기 급격히 강화됐다. 이당시 페르시아 해군은 살라미스에서의 졸전은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로 강했는데, 기원전 517년에는 사모스 섬을, 트라키아와 스키타이 지방을 공략하기도 할 정도였다. 특히 결정적으로 기원전 494년에는 라데 전투에서 아나톨리아 지방의 그리스 식민도시들이 일으킨 반란을 대파하며 지중해 해상 무역을 좌지우지했다. 하지만 페르시아 전쟁을 거치며 그 많던 함선들도 다 잃어버렸고, 기원전 468년 에우리메돈 전투에서 그나마 남아 있던 함대마저 싹 털리면서 전성기 시절과 비교하면 아예 없는 수준으로 전락한다.

페르시아에서 주 해군 기지들은 하나는 킬리키아, 하나는 포카이아 해안에 있었다. 그 외에도 해상 무역이 발달했던 페니키아의 항구 도시 시돈, 아코, 트리폴리스 등에도 해군 진지들이 하나씩 있었고, 키프로스할리카르나소스 등지에도 해군 기지가 있었다. 페르시아 만 일대의 '샤트 알 아랍'[29]에도 역시 거대한 해군 기지 하나가 세워져 있었는데, 이쪽은 별다른 경쟁자도 없었고 기껏 해봤자 페르시아 만의 해적 소탕이 고작이어서 막강한 그리스 함대를 상대해야 하는 지중해 연안의 기지보단 훨씬 중요도가 떨어졌다. 페르시아의 주요 해상 전략은 킬리키아, 포카이아의 해상 본부 2개를 중심으로 짜여졌고, 트리폴리스 인근에서 레바논의 목재들을 베어와 함선들을 제작했다. 그 외에도 나일 강 일대에도 해군 기지가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중요하진 않았다.

페르시아 해군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압도적인 규모였다. 페르시아는 처음으로 삼중선 트리에레스를 대량으로 찍어낸 국가기도 한데,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의하면 페르시아 해군은 그 규모가 절정에 이르던 크세르크세스 1세 시절 1,207척의 트리에레스와 3,000여 척의 보조 함선을 운용했다고 한다. 당시 이집트의 함대와 사모스 지방의 함대를 모조리 합쳐봐야 고작 300여 척도 안됐던 걸 생각해보면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대함대였던 셈.

페르시아의 트리에레스는 대략 길이 40m, 높이 6m로 한 척도 300명의 병사를 태울 수 있었다. 트리에레스의 디자인 자체는 페니키아의 것을 베꼈지만 대신 3층을 더 높여서 크기가 더 컸다. 대략 한척 당 170명의 노잡이가 있었고 이들은 위쪽 줄에 62명, 중간 줄과 아래 줄에 54명 씩 정말 꽉꽉 채워넣었다. 거기에 추가적으로 병사들까지 실었으니 다른 화물을 실을 견적이 나올 리가 없었고 대부분의 함대는 매일마다 정박해서 식량과 물을 해결해야 했다. 트리에레스는 훈풍을 타면 시속 22km까지 달릴 수 있었다.

트리에레스 말고도 그보다 훨씬 많은 양의 보조 함선들도 운용했다. 이들은 주로 전투가 아니라 해상 경계가 주 임무였다. 일반적으로 배수량은 100~150톤 정도였지만 그보다 큰 350~500톤 짜리 함선도 있었다. 경계뿐만 아니라 식량이나 가축 운송도 떠맡았는데 '히파고고이'라고 해서 군마들만 따로 운반하는 보조선도 존재했다. 한 척당 30마리씩 실을 수 있었다고.

특히 유명한 게 크세르크세스 1세의 배다리다. 수많은 배들을 밧줄로 이어 그 위에 판자를 깔아 만든게 바로 배다리인데, 헤로도토스의 기록에는 이 배다리의 길이가 무려 7스타디움, 약 1,300km 정도 됐다고 한다. 배다리를 만들자마자 폭풍이 불어 기껏 만들어놓은 다리가 부서지자 분노한 크세르크세스 1세가 바다를 채찍질하라고 명령했다는 일화가 유명하기도 하다.[30] 얼마 못쓰고 다 무너지긴 했지만 길이가 몇 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의 배다리를 이을 정도로 페르시아에 배가 많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일화.


9. 종교[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조로아스터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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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페르시아의 종교제례
아케메네스 왕조의 국교는 조로아스터교로 '페르시아 밀교'라고도 불린다. 가장 많이 숭배받던 신은 의외로 빛의 신 아후라 마즈다가 아니라 태양의 신 미트라였다. 그 외에 바루나아그니 같은 다른 하위 신격들도 많이 숭배받았다고. 아후라 마즈다가 아니라 미트라 신앙이 더 인기가 많았던 이유는 이때는 아직 조로아스터 신앙이 완벽히 정립된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의 최고신은 아후라 마즈다가 아니라 미트라에 더 가까웠다.[31] 때문에 대부분의 신전과 축제들은 미트라에게 봉헌된 것이었고 사람 이름도 미트라의 칭호에서 따와서 지었다. 하지만 제국 말기로 갈수록 아후라 마즈다 신앙이 주류로 자리잡았고 아케메네스 왕조가 망하기 직전에는 아후라 마즈다가 명실상부한 제국의 최고신으로 자리잡게 된다.

현대 조로아스터교는 특유의 을 숭배하는 독특한 특징 때문에 '배화교'라고도 불린다. 하지만 아케메네스 시대의 조로아스터교는 불을 숭배하는 관습이 존재하지 않았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시대의 페르시아에 대해 글을 남긴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인들은 신상도 없고, 신의 제단도 없다. 그들은 그리스인들처럼 인간의 형상을 가진 신을 믿지 않는다'라고 썼고, 또 '그들은 제단을 세우지도 않고 불을 지피지도, 기름을 붓지도 않는다'라고 썼다. 현재의 조로아스터교 사원에서는 중앙 제단에 꺼지지 않는 불을 지피고 이를 숭배하는데, 고대 페르시아에서는 아직 불을 숭배하는 의식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조로아스터교에서 불을 숭배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5세기 경, 아케메네스 왕조가 망하고 200년은 더 흐르고 나서 시작한 제례 의식이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가 대제국으로 성장하면서 조로아스터교도 널리 뻗어나갔고, 덕분에 한때는 중동 대부분 사람들이 믿는 종교로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이란 동부 지방에서 발흥한 조로아스터교가 아케메네스 시대를 거치면서 인도, 중동, 아라비아 등 다양한 지방들로 뻗어나갈 수 있었던 것. 특히 아케메네스 왕조의 뒤를 이은 사산 왕조에서도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지정하고 국가권력 강화의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면서 조로아스터교의 위상은 더욱 강해졌다. 비록 사산 제국이 651년 망하고 정통 칼리파 시대가 열리면서 완전히 이슬람교에게 중동의 주류 종교 자리를 빼앗기긴 했지만[32] 종교 자체는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현대에도 남아 있을 수 있었다. 특히 세계 최초의 유일신앙이었던만큼 후일의 유대교, 더 나아가 기독교이슬람교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선과 악이란 개념에 대하여 확실하게 정립했고, 다신교 신앙이 일반적이었던 고대 세계에서 동전의 양면으로 비유되는 이신론적인 관점을 도입한 것도 참신한 교리였다.[33]

페르시아의 국교가 조로아스터교이긴 했지만 기존 토착 신앙들도 굉장히 포용적으로 받아들였던 걸로 유명하다. 페르시아가 거대한 대제국으로 성장해 꽤 오랫동안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핵심 이유들 중 하나. 이걸 못해서 얼마 못가 무너졌던 나라가 바로 이전의 아시리아 제국이다. 페르시아 관용 정책들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게 예루살렘 성전 복원 사업이다. 키루스 2세는 바빌로니아 정복 직후 길었던 바빌론 유수를 끝내고 유대인들을 이스라엘 땅으로 되돌려보내어 주면서 성전 복원에도 지원을 보태줬다. 덕분에 구약성경에도 키루스 2세를 '기름부움을 받은 메시아'라고 표현하기까지 했다.[34] 유대인이 아닌 외국인으로서 이런 극찬을 받은 인물은 키루스 2세가 전무후무하다. 비록 키루스 2세 이후의 페르시아 황제들은 유대인들에게 강압적인 정책을 펴면서 점차 평가가 안 좋아지긴 했지만.... 어쨌든 페르시아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바빌로니아인, 이집트인, 아시리아인 등 다양한 민족들의 신앙을 존중해주었고 이는 제국 안정의 버팀돌이 되었다.

10. 의복[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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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시대의 의복이 현재까지 살아남은 게 거의 없는 탓에 대부분의 자료 조사는 페르세폴리스의 부조, 각종 그림이나 모자이크, 그리고 약간의 그리스 측 기록들로 때우는 중이다. 당시 근동 지방의 사람들은 주름진 치마, 몸 전체를 둘둘 싸는 헐렁한 로브, 드레이프가 있는 느슨한 튜닉 따위를 즐겨 입었는데 페르시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엘람메소포타미아 등 근동 지방들을 정복한 페르시아인들은 이들의 궁정 의상들을 그대로 차용했다. 원래 기병 집단에 가까워 꽉 끼는 옷을 입었던 페르시아인들이 중동 전체를 정복한 이후부터는 격식을 갖추기 위해 선진적인 엘람식 문물을 받아들이며 엘람의 늘어뜨려지는 옷들을 들여왔던 것. 다만 페르시아적인 요소도 그대로 유지하고는 있어서, 바지를 입기도 했고 말을 탈때는 꽉 끼는 조끼나 상의를 걸쳤다. 우리가 흔히 페르시아 복장하면 생각나는 헐렁헐렁한 스커트들은 모두 궁정 옷이다.

아케메네스 시대의 페르시아 남성들의 복장은 크게 5개로 나눌 수 있다. 일단 첫째가 엘람과 페르시아식의 하늘하늘한 궁정식 복장, 둘째가 메디아, 파르티아, 박트리아 등 꽉 끼는 기병 복장, 세 번째가 짧은 튜닉을 입는 그리스식 복장, 넷째가 킬트로 짠 인도식 복장, 그리고 마지막 무릎이나 발목까지 내려가는 기다란 로브식 복장인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이집트식 복장이다. 풍요로웠던 페르시아에 걸맞게 엄청나게 화려하게 색색가지 염료들을 넣어서 만들었고 복장들 모두가 동시대 지중해 국가들에 비하면 지극히 화려했다. 지위가 높을수록 장식이 화려했는데, 황제의 경우 정말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색깔들이 많이 들어갔다. 주로 푸른빛과 백색이 섞인 붉은색 천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었다고 한다.

페르시아인들의 복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들 중에 하나가 머리에 쓰고 있는 높다란 관이다. 페르세폴리스의 부조들을 보면 하나같이 이 관을 쓰고 있어서 유명한 편이다. 이걸 페르시아인들이 뭐라고 불렀는지는 알려지지 않아서 그리스인들이 불렀던 명칭 '키다리스(Kidaris)'라고 부른다. 이 키다리스는 주름 장식이 있는 원통형의 모양으로 생긴 관으로 가죽이나 금속으로 만들어서 단단했다. 황제만이 쓰는 건 아니었고 일반 군사들부터 황궁의 시종들까지 다양한 계급의 사람들이 두루 입었다. 계급이 높을수록 모자의 높이가 높아서 구분이 가능했다.

키다리스 외에도 두건을 머리에 두르기도 했다. 다리우스 3세의 모자이크화에서도 볼 수 있는 모습인데, 턱부터 두건을 감아서 머리쪽에서 묶어서 고정한 다음 어깨 양쪽 아래로 내려뜨렸다. 내부에는 모피나 가죽을 따로 대기도 했다. 이 두건으로 턱이나 입까지도 살짝 가리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는 조로아스터교 신앙에서 인간의 불결한 호흡이 신성한 영을 해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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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의에는 민소매 튜닉을 입고 그 위에 헐렁한 로브나 천을 둘렀다. 하의로는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바지를 입었는데 이 바지는 워낙 당시에도 유명해서 그리스인들은 이 바지를 '아낙시리데스'라고 따로 부르기도 했다. 바지를 입지 않았던 고대 그리스인들은 바지의 존재가 생소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 궁정에서는 바지가 아니라 스커트를 입었지만 말을 타야 하거나 기동성이 필요할 때에는 바지를 입었다고.

아케메네스 시대의 무덤에서 발굴된 바지를 분석해본 결과 주 재료는 부드러운 실크로 만들었고 꽃무늬나 짐승 무늬 등 다양한 문양들을 넣어 장식했다. 그렇게 바지까지 꿰입고나면 신발을 신었다. 페르시아의 신발은 슬리퍼처럼 생겼고 3~4개의 가죽 끈으로 고정했다. 붉은색이나 노란색으로 염색하는 경우도 흔했고, 그리스인의 기록에 의하면 깔창을 슬쩍 끼워넣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인들이 '티나지 않게 키가 커보이게 하는 비술을 갖고 있다'라고 신기해했다고.

남성들의 의복은 이렇게 잘 알려져 있는 반면 여성들의 의복에 대해선 알려진 게 거의 없다. 주로 돌에 새겨진 부조를 통해서 당시 복식을 추정하는데 부조에는 거의 남자들만 새겨져 있기 때문. 그나마 남아 있는 기록들을 분석해보면 페르시아의 여자들도 그리스인들과 비슷하게 주름진 치마와 볼륨감있는 이오니아식 키톤을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외출할 때는 머리와 얼굴을 가리는 얇은 베일을 가리고 다녔고, 머리카락은 길게 길러 뒤에서 한 줄로 땋았다고. 그 외에도 보석이나 반지 같은 각종 장신구를 착용하기도 했다. 파지리크 지방의 한 무덤에서 발굴된 유물에는 여성이 쓰던 황금 허리띠가 발굴된 적도 있다.

한편 페르시아의 남성들은 턱수염을 뺨까지 풍성하게 길러서 머리카락과 연결시킨 후, 마찬가지로 풍성하게 기른 머리카락과 함께 파마하는 헤어스타일을 즐겨 했다. 콧수염도 길러서 끝부분을 둥글게 말거나 턱수염과 연결시켰다. 그래서 전박적으로 얼굴에 털이 매우 풍성해 보인다.[35] 역시 여성들의 헤어스타일이 어땠는진 확인할 방법이 없다. 의복과는 달리 유물도 발굴되지 않으니 더더욱 말이다.


11. 건축[편집]


페르시아에서 가장 발전했고 후대에도 큰 영향을 끼친 분야들 중 하나. 동시대의 고대 그리스 건축에 비하면 유명한 편은 아니지만 후대의 서아시아, 중동 지방에 끼친 영향력을 생각해보면 나름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깊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건축의 특징은 의례적인 성격이 강했으며, 대체적으로 우아한 분위기가 주를 이루었고 건물 외관을 색색의 유약 벽돌로 장식하는 등 굉장히 화려한 편이었다는 것 등이 있다. 뿐만 아니라 바빌로니아, 이집트 등의 영향을 받아 석재와 벽돌들을 많이 썼다는 것도 특징이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가장 대표적인 아케메네스의 건축물들에는 주로 키루스의 무덤, 페르세폴리스의 황궁 유적, 황제들의 무덤이 묻힌 낙쉐 로스탐, 수도 수사의 유적 등이 잘 알려져 있다. 개중에서도 특히 페르세폴리스의 '만국의 문'이 그 독특한 디자인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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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다나 홀
페르세폴리스의 황궁은 정말 엄청나게 화려했던 걸로 유명하다. 지금이야 기둥 몇 개와 돌무더기들밖에 남아 있지 않았지만, 한때는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는 세계적인 대도시였던 것. 특히 황궁의 중심 건물이자 알현실이었던 '아파다나 홀()'은 당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석조 건축물들 중 하나였다. 아파다나 홀의 천장을 떠받치는 72개의 기둥들의 높이만 20m를 넘었고[36] 그면적은 1,000평방제곱미터에 달했다. 세계 각국에서 온 사절들이 만국의 문을 통해 이 아파다나 홀을 통해 들어가면 황제가 안에서 사절들을 접견했다. 아파다나 홀 앞의 계단에 새겨진 석조 부조들에는 총 23개국에서 온 외국 사절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어 그 모습으로 타국의 복식을 추정해볼 수도 있다. 다만 이렇게 화려했던 아파다나 홀도 기원전 331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략으로 불타 사라졌고 그 이후로 다시는 복원되지 못했다.

아파다나 홀보다 더 유명한 게 다리우스 1세가 세운 '만국의 문'이다. 아직도 페르세폴리스 유적에 남아 있는 몇 안되는 유적들 중 하나인데, 아시리아 형식으로 조각된 두 마리의 라마수가 문의 기둥을 이루고 있다. 아파다나 홀이 있는 남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페르세폴리스의 수많은 문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다. 파괴되기 전에는 4개의 기둥이 떠받치는 거대한 문이었고 금속제 장식이 달린 목재 문짝이 달려 있었으나 역시 기원전 331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략으로 사라졌다.

키루스의 무덤도 페르세폴리스나 만국의 문에 비해선 덜 알려졌지만 우아한 페르시아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건축물들 중 하나다. 페르시아 초기 수도였던 파사르가다에에 있고 키루스 2세의 영묘다. 영묘의 전체 높이는 약 11m가 좀 되고 묘실은 길이 3.17m, 폭 2.11m, 높이 2.11m의 널찍한 방이다. 그토록 거대한 영토를 정복했던 대왕의 묘치고는 장식이 거의 없고 단조로운 무덤에 속하는데, 자세히 뜯어보면 굉장히 기술적으로 진보된 면이 있다. 키루스의 영묘는 황백색의 석회암으로 지어졌는데 바위들을 쌓을 때 시멘트를 전혀 쓰지 않았고 대신 금속 묶음과 철사를 주로 썼다.[37] 뿐만 아니라 세계 최초로 면진 설계를 적용한 건축물이기도 하다. 건물 자체와 지면을 분리시키는 base isolation 기법을 써서 내진설계를 했는데, 이덕분에 무려 2,500년이라는 그 오랜 세월을 견디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


12. 민족성[편집]


그리스인들에게 사치스럽고 겁쟁이라고 까였지만[38] 페르시아인들은 화려하고 쾌활하며 상무적인 민족이었다. 다만 군사력에 비해서는 그리스를 상대로는 군사적 성과가 다소 딸리는 것도 사실이다. 후대의 사산 왕조가 체급이 훨씬 거대한 로마를 상대로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인 것과 비교된다.

사실은 무장 측면에서나 당시의 페르시아가 그리스 지역을 잘 몰랐다는 것으로 조금 변호가 가능하다. 페르시아가 일단은 대제국인 것만큼 강한 군사력을 지닌 것은 확실하나 문제점은 그리스와 같이 중무장 보병이 없었고, 무엇보다 산지로 가득한 그리스의 지리 정보가 부족한 면도 있다. 그리고 페르시아 말기에는 정치적 혼란이었기에 이수스 전투와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패배했긴 했으나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고전할 만큼 치열하게 싸웠다는 기록을 보면 대제국의 명성이 그렇게 헛된 것이 아니다.

형이자 황제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황자 퀴로스는 자신이 고용한 그리스인 용병 1만 명한테 "그리스인들이여, 나는 병사들이 모자라서 당신들을 필요로 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들이 페르시아의 수많은 종족들보다 강인하고 용맹하다고 여겨서 데리고 오게 한 것입니다. 나로서는 매우 부끄러운 일이지만 앞으로 우리가 싸워야 할 적들, 즉 페르시아의 백성들은 여러분에 비하면 형편없는 겁쟁이들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자기 나라의 군대보다 그리스인들이 더 강력하고 용감하다고 인정한 바 있다.[39]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따르면, 회의를 할 때 술에 취한 상태와 맨정신 상태에서 두 번 한 뒤 결정을 내리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페르시아인들은 술을 몹시 좋아하지만 남이 보는 앞에서 구토나 방뇨는 허용되지 않는다. 그 점에서 그들은 엄격하다. 그러나 그들은 가장 중요한 안건을 술에 취해 토의하는 습관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결정을 내리건 다음 날 술이 깨면, 회의장으로 사용된 집의 주인이 그 건을 다시 상정한다. 그리고 술이 깨어서도 동의하면 결정된 바를 실행에 옮기고, 그렇지 않을 경우 폐기한다. 또한 맑은 정신으로 미리 상의한 것은 술 취한 상태에서 다시 논의한다.



13. 역대 군주[편집]





13.1. 안샨 국왕[편집]


아케메네스 제국의 전신으로 이 시기엔 부용국이었기에 황제가 아닌 왕을 칭했다.

순서
이름
고대 페르시아어
재위기간
특이사항
초대
아케메네스
Haxāmaniš
기원전 680~기원전 655
왕조의 시조
2대
테이스페스
Cišpiš
기원전 655~기원전 640

3대
키루스 1세
Kūruš
기원전 640~기원전 580

4대
캄비세스 1세
Kambūǰiya
기원전 580~기원전 559

5대
키루스 2세
Kūruš
기원전 559~기원전 550
550년 칭제


13.2. 아케메네스 제국 황제[편집]


559년 페르시아 제국으로 발전함과 동시에 왕에서 황제(샤한샤)로 격상됨.

순서
이름
고대 페르시아어
재위기간
특이사항
추존
아케메네스
Haxāmaniš
-
다리우스 1세 추존
추존
테이스페스
Cišpiš
-
추존
키루스 1세
Kūruš
-
추존
캄비세스 1세
Kambūǰiya
-
5대
키루스 2세
Kūruš
기원전 559~기원전 530
페르시아 제국의 건국자
초대 황제
키루스 대제[40]
메시아[41]
6대
캄비세스 2세
Kambūjiya
기원전 530~기원전 522
[42]
-
바르디야
Brdiya
기원전 522년
비황족인 가우마타가 사칭했다는 논란이 있음
추존
아리아람네스
-
-
다리우스 1세 추존
추존
아르사메스
-
-
다리우스 1세 추존
7대
다리우스 1세
Dārayava(h)uš
기원전 522~기원전 486
베히스트 비문(즉 본인 주장)에 따르면 9대 왕중왕
8대
크세르크세스 1세
Xšayaša
기원전 486~기원전 465

9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Artaxšaça
기원전 465~기원전 424

10대
크세르크세스 2세
Xšayaša
기원전 424

11대
소그디아누스
-
기원전 424~기원전 423

12대
다리우스 2세
Dārayava(h)uš
기원전 423~기원전 404
[43]
13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Artaxšaça
기원전 404~기원전 358

14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Artaxšaça
기원전 358~기원전 338
[44]
15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4세 아르세스
Artaxšaça Aršaka
기원전 338~기원전 336

16대
다리우스 3세
Dārayava(h)uš
기원전 336~기원전 330
아케메네스 왕조의 마지막 군주.
-
베소스

기원전 330~기원전 329
비정통 군주


14. 인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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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흐샤싸', '흐샤카'로 재구성되기도 한다.[2] 크세노폰에 따르면 키루스 2세 때부터 날개를 펼친 수리를 왕중왕(샤한샤)의 군기로 썼다. 위 그림의 문양은 페르세폴리스에서 발견된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의 타일 유물에서 따온 것이고, 색상은 다리우스 3세가 붉은 바탕에 황금색 수리가 그려진 군기를 썼다는 퀸투스 쿠르티우스 루푸스의 기록과 폼페이의 '알렉산더 모자이크' 유물의 색상을 따른 것이다.[3] 크림 반도까지도 진출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지배하지 못하고 정복으로만 그쳤다.[4] 고대 페르시아어 '흐샤야시야 흐샤야시야남'(, xšāyaθiya / xšāyaθiyānām). 대왕(흐샤야시야 바즈라카, / xšāyaθiya / vazraka), 페르시아의 왕(흐샤야시야 파르사이, / xšāyathiya / Pārsaiy) 등의 칭호도 쓰였다. '샤한샤'는 중세~현대 페르시아어 발음 '셔한셔'를 달리 쓴 것이다.[5] 트라키아, 스키타이, 호라즘, 소그디아, 마사게타이, 박트리아, 사카, 간다라 등[6] 비티니아 왕국, 폰토스 왕국, 카파도키아 왕국, 아르메니아 왕국, 콜키스, 이베리아 왕국, 아트로파테네, 다하, 마우리아 왕조[7] 다리우스 1세 시기를 기준으로 하면 중화권 전체를 통일한 진시황진나라보다 250년 이상 앞서며, 멸망 시기 기준으로도 100년 이상 앞선다.[8] 캄비세스 2세의 호위 무사 출신으로 캄비세스 사후 즉위한 캄비세스의 친동생 바르디야를 죽이고 무단으로 즉위했다. 다리우스는 자신이 캄비세스 2세의 6촌이며 자신이 죽인 바르디야는 사실 그로 변장한 가짜라고 우겼지만, 이는 다리우스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실제로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남이 멀쩡한 황제를 죽이고 제위를 찬탈했을 뿐이다. 따라서 키루스 대제의 부계 혈통은 단절되었지만 다리우스가 키루스의 딸과 결혼해서 크세르크세스 1세를 낳았기 때문에 크세르크세스 이후의 아케메네스 군주들은 전부 키루스의 모계 혈통이다.[9] 흔히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서 패배한 이미지가 너무 부각돼서 그렇지, 다리우스 1세는 확실히 명군 축에 끼는 인물이었다. 그리스에서 패배했음은 페르시아로서도 분명 뼈 아픈 일이었지만, 그 이후에도 여전히 페르시아 제국은 세계 최강대국이자 가장 부유한 국가로서 번영을 누렸다.[10] 명군이라는 주장도 있고 대제의 칭호를 붙여서 높여 부르기도 하지만, 역사에 기록된 사실은 대군을 동원한 페르시아 전쟁에서 패배해서 페르시아에 혼란을 가져왔고, 말년엔 패전의 뒷수습은 나 몰라라 하고 페르세폴리스의 궁전에서 하렘을 즐기다가 암살당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보로만 보면 암군으로 욕 먹으면 먹었지 명군으로 불리기는 힘들다.[11]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페르시아 제국은 한 개인에 의해 세워지고 한 개인에 의해 멸망한 나라라는 말도 있다.[12] 당시 인도와 중국은 16대국-전국시대였다. 설령 당시의 인도와 중국의 인구를 다 합친다 해도 페르시아보다 많다고 단언하기 힘들다. 예를 들어 페르시아 제국으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나 기원전 221년 통일된 진나라의 인구가 2천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13] 어차피 사트라프들도 그 정도의 음모를 꾸몄다가는 금방 진압당하고 처형당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트라프의 반란은 보통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한 일종의 쇼에 가까웠다.[14] 특히 피지배 민족의 종교적 자유 같은 면[15] 왜냐하면 페르시아 군대에서 용병으로 복무하던 그리스인 중장보병들이 굉장히 많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다리우스 3세 시절에는 그리스 연합군을 이끌고 쳐들어온 알렉산드로스 3세 휘하 군대에 포함된 그리스인 병사들보다 페르시아 군대에 포함된 그리스인 용병들이 더 많을 정도였다.[16] 물론 키루스 2세 사후 후임 황제들이 그에 비하면 훨씬 배타적인 종교 정책을 피면서 유대인과 페르시아의 사이는 갈수록 악화된다.[17] 페르시아는 내부 반란보다는 알렉산드로스 3세의 침공으로 멸망했고 알렉산드로스만 아니었으면 몇백 년은 더 지속될 국가였다. 당장 페르시아는 알렉산드로스한테 작살나는 그 순간까지도 돈은 엄청 많았다.[18] 예를 들어 다리우스 대제의 산스크리트 이름은 다라야-바후스였다.[19] 게다가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 페르시아는 인더스 지역을 다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정도의 수익을 얻은 것이다.[20] 이 10.7g의 중량은 '페르시아 단위'라고 해서 후일 그리스 화폐 중량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21]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그리스에서는 헤라클레스가 활을 쏘는 모습 등을 화폐에 새겼는데 이걸 페르시아인들이 차용한 것. 이렇게 만들어놓으면 황제를 신격화할 수 있는 효과도 있었다.[22] 이란 등 동부 지방에서도 화폐가 주조되어 유통된 것은 셀레우코스 왕조가 들어선 이후의 일이다.[23] 탈렌트는 무게의 단위로 60파운드=960온스에 해당한다. 즉 5만 탈렌트는 2020-07-27 현재의 가치로 11억 7624만 USD에 해당한다. 고대의 경우 은의 가치가 현재보다 10배 정도 높았음을 감안하면 금액은 더욱 커진다.[24] 아케메네스 왕조는 수도가 여러 곳이었다. 행정 수도 바빌론, 겨울 수도 수사, 여름 수도 엑바타나, 왕도 페르세폴리스가 있었다.[25] 출처: 전장을 지배한 무기전 전세를 뒤바꾼 보급전/ 도현신 지음/ 시대의창[26] 위에서 언급한 대로 알렉산드로스 3세의 페르시아 원정 무렵에도 페르시아 군대에 용병으로 복무하던 그리스인들이 많았다. 심지어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가 패배하고 달아났을 때에도 약 2천 명의 그리스인 용병들이 다리우스 3세를 계속 호위하고 있었다.[27] 저 위의 그림처럼 하늘하늘한 로브에 보석까지 완벽하게 차려입은 건 의례용이었고, 실전에서는 그 옆의 재현도처럼 갑옷을 두르고 싸웠다.[28] 물론 가우가멜라 전투는 다리우스 3세가 있는 힘 없는 힘 모두 끌어모은 군대가 투입된 것이라 예식용으로 쓰이던 전차까지 끌어모았다 해도 이상할 건 없다.[29] 티그리스강유프라테스강이 만나 바다로 빠져나가는 곳이다.[30] 후대 역사학계에서는 당시 크세르크세스의 분노가 상당했다는 걸 강조하기 위한 과장이라고 본다.[31] 사실 미트라가 아후라 마즈다보다 더 오래된 신이다. 미트라의 이름은 무려 기원전 14세기에 만들어진 비문에도 언급될 만큼, 인도유럽어족들이 매우 오래 전부터 믿었던 신이었다. 심지어 아케메네스 왕조가 망하고 500년이 지난 사산 왕조 시절에는 이미 아후라 마즈다가 최고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골 지역에서는 여전히 미트라가 가장 인기가 높은 신이었다.[32] 참고로 조로아스터교와 이슬람교 사이는 선지자 무함마드 시절부터 안좋았다. 한 조로아스터교 사제가 무함마드를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무함마드의 강연을 방해했다는 기록도 있고, 적국이나 다름없던 동로마 제국이 조로아스터 세력을 꺾었다는 기록이 들려오자 무함마드가 엄청 기뻐했다는 일화도 있다.[33] 유일신교의 대표 주자로 꼽히는 기독교도 이신론적인 요소가 있다. 예를 들어 신과 다른 독립 의지를 가지고 악을 추구하는 존재 = 사탄의 존재 등 선과 악의 대립 구도가 너무나도 명확하게 드러난다.[34] 야훼께서 당신이 기름 부어 세우신 고레스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의 오른손을 잡아주어 만백성을 네 앞에 굴복시키고 제왕들을 무장해제 시키리라. 네 앞에 성문을 활짝 열어 젖혀 다시는 닫히지 않게 하리라." 이사야서 45장 1절(공동번역성서)[35] 이는 이전부터 오리엔트 지방에서 유행하던 스타일이었다.[36] 현재는 고작 13개의 기둥들만이 남아 있다.[37] 다만 이때문에 사람들이 비싼 금속을 뜯어가기 위해 무덤을 약탈하며 심각하게 훼손되기도 했다.[38] 바지를 입었다고 우습게 봤다고 한다.[39] 출처: 실업이 바꾼 세계사/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40] 메디아는 기원전 550년, 리디아는 기원전 547년, 바빌론은 기원전 539년에 정복했다. 실질적인 초대 군주는 바로 이 키루스 대제이다.[41] 유대인들을 탄압하던 신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 해방시켜 준 공로로 붙혀준 타이틀이다.[42] 기원전 525년 이집트를 정복했다. 이 시점부터 샤한샤가 파라오를 겸직한다.[43] 다리우스 2세가 죽은 후인 기원전 404년, 이집트가 독립하면서 파라오 겸임도 끊어졌는데, 기원전 525년부터 기원전 404년의 이 시기가 이집트 27왕조이며 페르시아의 1차 정복시대이다.[44] 기원전 343년 이집트를 재정복했다. 그래서 기원전 343년부터 기원전 332년은 페르시아의 2차 정복시대로도 불리며, 이집트 31왕조로도 불린다. 그리고 이집트 32왕조가 바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인 셈이니 기원전 343년 시점에서 이미 이집트의 자주성은 사라져버린 셈이 될 것이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헬레니즘 - 로마(+비잔티움) - 아랍 - 투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