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타기 후유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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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agi_Huyuyasu.jpg
安宅冬康
1528년(?)~ 1564년 5월

미요시 모토나가의 삼남, 미요시 나가요시의 둘째 동생으로서 아와지수군중을 이끄는 아타기 가문의 당주가 되어 형, 나가요시의 정치, 군사, 문화 활동을 물심양면 지원해준 인물. 허나 그의 최후는 비참하기 짝이 없었으며 지금도 그 진실에 대해 명확히 밝혀진 게 없다.

1. 소개
2. 아타기 가문
3. 키나이 진출
4. 주살
5. 기타 매체에서



1. 소개[편집]


아명은 치지요(千々世), 법명은 소한(宗繁)으로 알려져 있다. 동생이었던 소고 카즈마사나 노구치 후유나가처럼 어려서부터 다른 가문의 양자로 보내져 가독을 잇게 되어 미요시 성이 아닌 아타기 성을 쓰게 되었다. 아타기 가문의 세력 내에 있는 해적들을 이끌고 형, 나가요시를 따라 주로 키나이를 전전했으며 카즈마사가 급사하자 대신 이즈미 키시와다 성(岸和田城)주가 되는 등 이미 키나이에서도 세력을 확보해 놓은 상태였다. 이후로도 나가요시를 완벽히 지원해 주었으나 야마시나 토키츠구(山科言継)의 역사서이자 일기인 토키츠구쿄키(言継卿記)에서 말하길 역심이 있다고 판단되어 나가요시의 거성인 카와치 이이모리야마 성(飯盛山城)으로 불려와 살해당하였다고 한다.

흔히 그의 후사를 아타기 노부야스가 이었다고 하지만 그의 이름은 후세의 기록에서만 확인 되고 있으며, 당시의 기록으론 실자 진타로(神太郎)와 양자 진고로(神五郎)[1]만이 확인된다.


2. 아타기 가문[편집]


아타기 가문은 이미 전전대 당주 미요시 유키나가에 의해 미요시 가문과 연결고리가 있는 상태였다. 1528년, 아타기 가문에서 모반이 일어나자 후유야스를 아타기 가문으로 보내었고 아와지의 타케노쿠치(炬囗)와 유라(由良)를 중심으로 아와지 수군중을 형성하여 미요시 가문 군사력의 일각을 담당하였다.


3. 키나이 진출[편집]


나가요시가 본격적으로 호소카와 하루모토와 전쟁을 시작하자 후유야스도 아와지의 군세를 이끌고 이 전쟁에 참가하였다. 전쟁은 대부분이 미요시 가문에게 우세하게 전개 되었으며 칸레이 호소카와 가문, 아와 호소카와 가문, 심지어 쇼군까지 격파하며 미요시 가문은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나가요시는 가히 천하인이라고 해도 될 정도의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나가요시는 당시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와 화친한 다음 외부영토의 확장을 노렸고, 이에 후유야스는 미요시 짓큐를 따라 하타케야마(畠山)-롯카쿠(六角)-키이 네고로슈(根来衆) 연합군과 전투를 벌이나 짓큐가 네고로슈의 습격을 받고 사망함에 따라 짓큐의 군세는 각자의 본거지로 이탈하게 되었다. 짓큐 사후 시코쿠의 미요시 가문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였으나 키나이의 미요시 가문은 아직 건재하였기에 후유야스는 반 미요시 가문의 군세들과 소모전을 반복해 나갔다.


4. 주살[편집]


미요시 가문 내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나가요시의 적자 미요시 요시오키가 사망한지 얼마 되지 않은 1564년. 후유야스는 형이 있는 이이모리야마 성으로 불려갔다. 형과 대면하자 형은 후유야스에게 역심의 죄를 물어 자결할 것을 요구하였고 후유야스는 이를 받아들여 자결, 사망하였다. 추정 나이 약 37세.


5. 기타 매체에서[편집]


파일:安宅冬康.jpg
100만인의 신장의 야망

신장의 야망에선 형제들 중 가장 낮은 능력치를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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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고로의 실부는 후유야스의 둘째 형, 미요시 짓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