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탈 비하리 바즈파이

덤프버전 :




아탈 비하리 바즈파이 관련 둘러보기 틀


[ 펼치기 · 접기 ]





인도 공화국 제10대 총리
아탈 비하리 바즈파이
अटल बिहारी वाजपेयी


파일:Atal_Bihari_Vajpayee_tribute_image_(cropped).jpg

출생
1924년 12월 25일
인도 제국 괄리오르
사망
2018년 8월 16일 (향년 93세)
인도 공화국 뉴델리
재임기간
제10대 총리
1996년 5월 16일 ~ 1996년 6월 1일
제10대 총리2기
1998년 3월 19일 ~ 2004년 5월 22일
서명
파일:Atal_Bihari_Vajpayee's_Autograph_in_Hindi.jpg

[ 펼치기 · 접기 ]
학력
빅토리아 대학교[1] (영문학, 인도어문학 / B.A.) (1941-1945년)
아그라 대학교[2] 대학원 (경제학 / M.A.) (1945-1947년)
종교
힌두교
신체
168cm
소속 정당

약력
인도 외교부장관
(1977년 - 1979년)
인도 인민당 초대 당대표
(1980년 - 1986년)
인도 하원의원
(1986년 - 1991년)


1. 개요
2. 생애
2.1. 인도 총리
2.1.1. 내각 1기
2.1.2. 내각 2기
2.1.3. 내각 3기
2.2. 2004년 총선 패배
3. 기타



1. 개요[편집]


인도정치인. 제10대 총리처음으로 장기집권에 성공한 비-인도 국민회의 출신 총리다. 인도의 핵개발을 통한 파키스탄과의 극한 대립으로 이그노벨상을 수상하기도 한 인물이지만[1] 인도인들 사이에서는 경제 개혁과 사회 개방을 이룩했다는 평을 듣는 인물이다. 반대 정당인 인도 국민회의 출신 만모한 싱 총리가 연설 도중 '위대한 분'이라고 치켜세워줄 정도로 좌우 모두에게 나름 존경받았던 총리였다.

1925년 인도 제국에서 태어나 힌두 우익 단체 RSS에 가입해 정치 활동을 시작했고, 1940년대에는 반영 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잡혀가기도 했다. 이후 RSS를 기반으로 한 정당 '바라티야 자나 상'을 창당해 원내에 입성하는 데도 성공했지만 마하트마 간디자와할랄 네루의 휘광을 등에 업은 인도 국민회의에 밀려 별다른 성과를 내진 못했다. 바즈파이가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인디라 간디 총리가 1975년 부정선거를 덮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한 이후부터였다. 바즈파이는 인디라 간디 총리의 계엄령 해제를 촉구하며 반-인디라 간디 세력의 구심점으로 떠올랐고, 1977년 계엄령이 해제된 이후 꾸준하게 체급을 쌓다가 1980년 창당한 인도 인민당을 이끌어 1996년 총선에서 대승을 거두며 그해 5월에 처음으로 인도 총리에 취임한다.

하지만 연립정부를 구성할 만한 의석수를 채우지 못해 의회를 조기 해산, 잠시 사퇴했다가 1998년에 다시 총리직에 복귀한다. 그는 총리직에 오른 직후인 5월 전격적으로 핵실험을 실시해 핵무장 방침을 공식화했고, 대립 관계에 있던 파키스탄도 얼마 후 핵실험으로 응답해 국제적인 파장을 일으켰다.[2] 이를 계기로 악화된 파키스탄과의 갈등은 1999년 카길 전쟁으로 이어졌지만, 이 카길 전쟁에서 인도가 침략군 파키스탄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자 바즈파이 총리의 인기는 압도적으로 높아진다. 바즈파이 총리와 인민당은 카길 전쟁의 승리를 내세워 1999년 총선에서도 전체 543석 가운데 330석을 차지하는 대승을 거두었고, 바즈파이 총리는 무난하게 총리직을 지켜낸다.

그의 재임 기간 도중 2001년의 인도 항공편 IC 814 납치 사건, 2002년의 구자라트 폭동 등이 일어났다. 특히 이 힌두교도들과 무슬림 간의 종교갈등이 폭발해 수 천의 희생자가 발생한 구자라트 폭동의 경우 최악의 유혈 참사들 중 하나라고 불릴 정도로 최악이었는데, 이때 바즈파이 정부가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했다고 까이기도 했다. 이후 바즈파이 총리는 집권 후반부인 2002년부터 2004년까지 경제 성장에 올인하며 개혁 드라이브를 걸었다. 덕분에 인도는 연 7%에 달하는 고공 성장률을 기록했고 지지율도 썩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이면서 2004년 총선에서도 무난하게 이기는 듯 싶었지만..... 정작 2004년 총선 투표함을 까보니 인도 인민당은 고작 543석 가운데 138석 밖에 차지하지 못하며 145석을 차지한 인도 국민회의에게 정권을 넘겼다. 총선 패배와 함께 사임한 바즈파이 총리는 이후 좌우 양측의 존경을 받으며 살다가 2018년 사망했다.


2. 생애[편집]


아탈 비하리 바즈파이는 1925년 크리스마스 당일에 영국의 식민지배 하에 있던 인도 제국 괄리오르에서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유한 학교 교사였고, 인도 카스트의 최상층인 브라만 출신이었던 덕분에 상당한 교육을 받으면서 살 수 있었다고 한다. 1942년 아버지가 우자인 지방의 중등학교에 교장으로 부임한 후 그 곳에서 중등 교육을 받았고, 이후 괄리오르 빅토리아 대학에 입학해 힌디어, 산스크리트어 등에서 학사 학위를 땄다.

바즈파이는 16세에 불과한 어린 나이였던 1942년에 우익 힌두 단체 RSS에 가입해 열성 당원이 되었고, 같은 해에 마하트마 간디가 시작한 반영 독립 운동인 Quit India(인도를 떠나라)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바즈파이는 이 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1942년 8월에 영국 군경들에게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3]

바즈파이는 이후 뛰어난 언변과 능력으로 RSS 내에서도 승승장구하면서 1951년에는 RSS의 2인자 자리까지 올라간다.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자 RSS도 기존의 정치 단체에서 벗어나 제도권 정당인 '바라티야 자나 상'을 창당하고 총선을 준비했다. 바즈파이는 바라티야 자나 상의 북인도 총책을 맡고 델리를 거점으로 선거를 이끌었다. 결국 바즈파이는 1957년 치러진 제2회 로크 사바[4] 선거에서 당선되어 하원으로 입성하는 데 성공, 이후 원내에서도 타고난 입담과 연설 능력으로 빠르게 몸집을 불려나간다.[5] 1968년에 바즈파이는 바라티야 자나 상의 당대표에 취임했고 이후 나나즈 데쉬무크, 발라즈 마드혹, L. K. 아드바니 등과 함께 당을 이끌어나간다.

다만 이때까지는 아직 마하트마 간디자와할랄 네루의 후광을 등에 업은 인도 국민회의가 독주하고 있던 시점이었기에 야당에 불과했던 바즈파이와 바라티야 자나 상이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상황은 1975년 인디라 간디 총리가 총선에서 이뤄진 부정을 덮기 위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독재정치를 감행하면서 달라진다. 국내외로 이 계엄령에 대한 비판이 쏟아져나오자 이를 비판하는 야당의 체급이 급속도로 커졌고, 자연스레 바즈파이의 체급도 커지게 된 것. 바즈파이는 앞장서서 인디라 간디의 계엄령 해제를 촉구하다가 방갈로어 지방의 자택에 연금당하기까지 했다. 2년 후 인디라 간디 총리가 계엄령을 해제하고 1977년에 총선을 다시 치르기로 하자, 바즈파이를 포함한 기타 야당 인사들도 풀려나 인도 국민회의에 대항할 야당 연합을 꾸리니 이게 바로 '자나타 당'이다. 자나타 당은 1977년 총선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자나타 당 연합을 이끌었던 모라르지 데사이가 새 총리로 취임한다.

바즈파이는 데사이 내각 아래에서 외무부 장관을 맡았다. 하지만 자나타 당이라는 정당 자체가 4개에 달하는 야당들이 오직 반-인도 국민회의라는 명분 하나만으로 모여있던 것에 불과했으니 정작 국정을 잡았을 때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2년 동안 자나타 당 내부에서는 내분이 극도로 심해졌고, 수많은 의원들이 당을 탈당해버렸다. 데사이 총리는 불신임 의결을 막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취임 2년 만인 1979년 사임을 발표했고 그렇게 야당 연합은 허무하게 무너진다. 이때 바즈파이도 함께 국정에서 일시적으로 물러났다. 장관직에서 물러난 바즈파이는 이후 기존 자나타 당의 잔재에서 제 세력들을 끌어모아 1980년 인도 인민당을 창당한다.

하지만 인도 인민당은 창당 초창기만 해도 딱히 두각을 드러내는 정당이 아니었다. 바즈파이는 인민당이 자나타 당을 계승한 후계 정당이라는 걸 내세워 유권자들에게 어필했지만 국민들은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특히 인디라 간디가 암살당하면서 전국적인 동정여론이 일어 인도 국민회의가 총선에서 의석들을 쓸어가버리면서 인민당은 고작 2석 밖에 챙기지 못하며 대패를 거둔다. 바즈파이는 총선 참패에 책임을 지고 잠시 동안 당대표직에서 물러나 자숙했고 이후 1986년에 하원 총선에서 당선되어 다시 잠깐동안 당대표직을 맡는다. 바즈파이의 당대표직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강경론자인 L. K 아드바니가 당권을 잡았고, 라마의 탄생지에 기존의 바브리 모스크[6]를 헐어버리고 힌두 사원을 세우는 것을 당론으로 밀어붙였다. 인민당이 이렇게 과격한 종교정책을 내세우자 여론의 호응을 얻었고 덕분에 인민당은 1989년 총선에서 86석으로 급성장하는 데 성공한다.


2.1. 인도 총리[편집]



2.1.1. 내각 1기[편집]


파일:vajpayee_oath-647x1855.jpg
1996년 5월 16일 총리 취임사를 발표하는 바즈파이 총리.

86석이라는 적지 않은 의석수를 장악한 인도 인민당은 무시할 수 없는 정치세력으로 급성장했다. 1995년 11월, L. K 아드바니는 바즈파이를 총선에서의 총리 후보로 지명했고,[7] 1996년 총선에서 인민당이 대승을 거두며 인도 국민회의를 꺾고 최대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며 바즈파이는 인도 총리라는 최고의 자리까지 오른다. 바즈파이는 1996년 5월 16일 인도의 제10대 총리로 취임했지만 그의 앞길은 험난했다. 인민당이 비록 최대 정당이긴 했지만 의회에서 과반을 차지하진 못했기에 타 정당들의 연립이 필수적이었는데 연립 정부 구성에 필요한 정족수를 제대로 채우지도 못했던 것. 결국 바즈파이 총리는 취임 후 16일만에 사임하고야 만다.


2.1.2. 내각 2기[편집]


1996년부터 1998년까지 군소 정당들이 난립하며 그 어떠한 정당도 주도권을 쥐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상태가 이어지자 결국 의회는 조기 해산을 결정하고 1998년에 새로 총선을 치르기로 합의했다. 이 1998년 총선에서 또다시 인민당이 승리를 거두었고, 인도 인민당은 힌두주의와 보수주의를 추구하는 정당들을 싸그리 긁어모아 '국민민주동맹(NDA)'를 결성한다. 바즈파이는 국민민주동맹을 기반으로 다시 총리직을 맡았는데, 이번에는 처음과 다르게 나름 탄탄한 의석수를 확보했고 의원들도 잘 관리하면서[8] 13개월 동안 연정을 이끌었다. 다만 1999년 중반에 전인도 안나 드라비다 무네트라 카자감(AIADMK)당이 연정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면서 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연정이 붕괴해버리고야 만다. 하지만 인도 국민회의를 포함한 야당 세력들 역시 독자적으로 연정을 구성할 의석수는 차지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또다시 의회가 해산되고 새로 총선을 실시하게 된다.

참고로 이때는 파키스탄과의 군사 충돌과 인도의 핵개발이 가속화되던 시기였다. 1998년 5월에 라자스탄 주에서 1976년에 실시된 '미소짓는 부처 프로젝트(Smiling Buddha Project)' 이래 처음으로 5번에 걸친 핵실험이 이뤄졌고, 이에 격분한 파키스탄은 똑같이 핵실험을 감행하며 핵무기를 손에 넣었음을 과시했다. 한창 탈냉전으로 평화 무드가 이뤄지고 있던 시점에 이짓거리를 저질렀으니 당연히 전세계적으로 비난이 쏟아졌고 유럽, 미국, 일본 등 주요 국가들이 인도에 기술, 정보 관련 제재를 때렸다고 한다. 이로 인해 인도는 약간의 경제적 타격을 입긴 했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내수 시장으로 잘 버텨냈고, 여론 역시 핵무기 보유에 압도적으로 찬성했기 때문에 인도는 끝끝내 핵무기 보유를 밀어붙여 결국 전세계의 묵인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다.[9]

서로 핵무기를 쥐게 된 인도와 파키스탄은 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덕에 1998년 말부터 1999년 초까지 해빙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1999년 2월에 델리라호르를 잇는 버스 노선 개통과 함께 '라호르 선언'의 발표로 인도-파키스탄 간의 경제 협력을 촉진하기로 합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평화무드도 3달도 못가 박살나는 데 그 이유는 바로 카길 전쟁이 터졌기 때문. 카길 전쟁은 핵무기 보유국들 간에 일어난 최초의 전쟁으로, 1999년 5월에 파키스탄 군대가 카길 지방에 침투해 강제로 점유하면서 발발했다. 파키스탄은 핵무기 보유국이라는 타이틀을 업고 함부로 세계가 개입하거나 인도를 도와주지 못할 것이라 믿었지만 현실은 파키스탄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격분한 인도 정부가 무려 3만에 달하는 대군을 투입해 대대적인 공격을 펼쳤고, 중국 등 전통적인 우방국조차 명백한 침략국인 파키스탄을 외면하면서 외교적으로도 수세에 몰리고야 만 것. 결국 파키스탄의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은 군대 철수를 지시했지만 이 사태로 인해 인도와 파키스탄의 관계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2.1.3. 내각 3기[편집]


앞서 말했듯 전인도 안나 드라비다 무네트라 카자감(AIADMK)당이 끈질긴 설득에도 불구하고 1999년 중반에 연정을 때려치고 나가버리자 그 어떠한 정당도 정부를 구성할 만큼의 우세를 쥐지 못해 1999년에 새 총선이 실시되었다. 1999년 총선은 카길 전쟁 바로 직후에 치러졌는데, 카길 전쟁에서 파키스탄군을 성공적으로 격퇴해내며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바즈파이 정부와 인민당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정점에 달해있던 덕에 인도 인민당은 전체 543석 가운데 330석을 차지하며 대승을 거둔다. 바즈파이 총리는 1999년 10월 13일 세 번째로 총리 취임선서를 하고 임기를 시작한다.

카길 전쟁에서의 승리를 발판으로 무난하게 총리로 취임한 바즈파이였지만 역시나 여러 국내외적 난관에 봉착한다. 가장 대표적인 건 취임 후 몇 달도 안되어 터진 인도 항공 IC 814편 납치 사건이었다. 탈레반 등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1999년 12월 카트만두에서 델리로 향하던 비행기를 납치한 후 이들을 볼모로 잡고 테러리스트들을 인도 감옥에서 석방할 것을 요구한 것. 딱히 뾰족한 수가 없었던 인도 정부는 이에 굴복해 테러리스트 일부를 석방하고 대신 승객들을 돌려받았다. 카길 전쟁으로 급격히 관계가 나빠졌던 파키스탄과도 관계회복을 위해 나름 정상회담을 진행하려 시도하기도 했지만 카슈미르 문제에 이견이 터져나오면서 별다른 해법은 거두지 못했다. 다만 나쁜 것만 있는 건 아니었고 2003년에는 미국빌 클린턴 대통령이 22년 만에 처음으로 미국 대통령 신분으로 인도를 국빈방문하기도 했다.

집권 2년차인 2001년에는 인도 국회의사당이 무장한 괴한들에게 점거되는 사건이 터졌다. 괴한들은 국회 경비원들을 죽이고 건물을 죽이고 건물을 장악했지만 인도 군경이 총동원되어 제압한 덕에 얼마 못가 사살되거나 체포된다. 문제는 이들이 파키스탄 국적의 젊은 남성들이었다는 것. 이로 인해 안그래도 카길 전쟁으로 악화되어있었던 인도-파키스탄 관계는 급경색에 들어갔고 바즈파이 총리는 50만~75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대군을 파키스탄 국경에 배치하며 노골적으로 파키스탄을 위협했다. 자칫하면 정말 또다른 전쟁이 터질 위기였기에 전세계가 나서서 인도와 파키스탄을 뜯어말렸고, 결국 국제사회의 중재를 받아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평화협정이 체결되어 군대를 물리는 데는 합의했지만 양국 간의 관계는 여전히 최악이었다. 이후에도 바즈파이 총리의 재임기간 내내 인도와 파키스탄의 외교 관계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뭐니뭐니해도 그의 재임기간 내에 인도에서 일어난 최대 사건은 2002년 구자라트 폭동이다. 때는 바야흐로 2002년 2월 27일,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던 힌두교도들이 기차를 타고 가던 중 고드라 마을에 정차했는데, 이와중에 힌두교도들과 무슬림들간에 싸움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화재가 발생해 수 십여 명의 힌두교도들이 불타사망한 사건이었다. 희생자들의 시신은 그대로 아마드바드에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 전시되었으며 이 무책임한 조치는 해묵은 인도의 힌두-무슬림 사이의 악감정에 불을 붙이고야 말았다. 격분한 힌두교 폭도들이 구자라트 주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수 천명의 무슬림들을 죽이고 여성들을 강간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최소 1,000여 명의 사람들이 살해당했으며 더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 그와중에 구자라트 주 총리였던 나렌드라 모디는 상황을 방관하기만 했다는 지적을 받았고,[10] 바즈파이 총리 역시 폭동 직후 '무슬림들은 타 종교인들과 공존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라는 발언을 내뱉으며 상황을 전혀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욕을 들어먹었다.[11]

폭동이 가라앉고 난 후 바즈파이 총리는 집권 후반기인 2003년부터 2004년까지 경제성장에 집중했다. 주로 외국인 직접투자 장려, 정부 소유 기업의 민영화 정책, 국가 부정부패 일소 밑 경제 개혁 정책들을 중점으로 펼쳤고 덕분에 인도는 2003년부터 2007년까지 매년 7%에 가까운 고공성장률을 보였다. 열악한 인도의 도로 사정을 해결하기 위해 전국에 국도를 깔고 정비하는 국책사업도 벌였으며 초등, 중등 학교의 교육의 질 개선에 앞장서기도 했다. 특히 집권 후반부에 중국과의 관계가 크게 개선되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그가 2003년 7월 중국을 국빈방문해 티베트를 중국의 영토로 공식 인정했던 덕이 컸다. 중국은 보답으로 시킴 지방의 인도 영유권을 인정했고 중인관계는 급속도로 호전된다. 그외에도 집권 말까지 파키스탄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긴 했고 군사적 적대행위도 일시적으로 중지했다.


2.2. 2004년 총선 패배[편집]


전문가들은 바즈파이 총리와 인도 인민당은 높은 경제성장률을 내세우면서 무난하게 2004년 총선에서도 승리할거라 예측했다. 인민당은 '빛나는 인도'라는 슬로건 아래에서 경제성장률을 최대 치적으로 발표하면서 선거 운동을 벌였다. 바즈파이 총리는 파키스탄과의 일시적인 평화 분위기를 이용하기 위해 일부러 선거를 6개월 앞당기면서까지 총선을 조기 실시했고, 대부분의 예측 조사의 결과 인민당의 압도적인 승리를 예상했다. 그러나 투표함을 막상 까보니 인민당은 543석 가운데 고작 138석만을 겨우 수비했다. 이전의 330석과 비교하면 초라할 정도로 반절에도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인민당이 주도하는 보수정당연합 국민민주동맹(NDA)를 다합쳐봤자 185석 밖에 되지 않았다.

반대로 소냐 간디가 이끌던 인도 국민회의는 145석을 획득하며 최대 단일 정당으로 급부상했다. 국민회의는 좌파 계열 정당들을 모아 총 220석의 '통합진보동맹(UPA)'를 구성했고 연립정부를 수립할만한 의석수 획득에도 성공한다. 선거에서 패배한 바즈파이 총리와 인민당 각료들은 모두 사임했고 이후 경제관료로 이름이 높던 만모한 싱 총리가 소냐 간디의 추천을 받아 새로운 인도 총리로 취임한다. 바즈파이 총리와 인민당이 경제 성과를 내세웠음에도 선거에서 패배한 까닭은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굳이 꼽아보자면 일단 사람들이 국가적 문제보다 물 부족이나 가뭄 같은 지엽적인 문제에 더 신경을 많이 썼고, 정권교체 열망이 생각보다 강했으며 긍정적인 메시지를 주로 한 인민당의 선거 캠페인이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는 것[12], 그리고 RSS가 딱히 인민당의 선거 캠페인을 열성적으로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 등이 있다.

파일:Vajpayee-1.jpg
바즈파이 전 총리를 조문하러 온 정치인들.[13]
2004년 5월 22일 바즈파이 총리는 총리직을 사퇴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2005년 12월에 다시는 총선에도 출마하지 않겠다고 밝히며 완전히 정계은퇴를 한다. 바즈파이 전 총리는 그 썩어빠진 인도 정치계에서 그 흔한 구설수 하나 없었던 인물로, 인도의 경제개혁의 앞장선 인물로서 카길 전쟁의 승리 등 나름 많은 업적을 남겨 퇴임 후에도 좌우를 가리지 않고 존경을 받았다. 심지어 반대 정당 소속인 만모한 싱 총리가 연설 도중 그를 서사시 마하바라타에 등장하는 인물에 비유하며 '위대한 분'이라고 추켜세워줬을 정도. 그러나 바즈파이는 2009년 뇌졸중으로 심각하게 건강이 악화되었고 이후에도 치매, 당뇨 등 온갖 병에 걸리면서 시름시름 앓았다.[14] 결국 바즈파이는 2018년 6월 11일 신장 감염으로 급히 입원했고, 2018년 8월 16일 오후 5시 5분에 별세했다. 나렌드라 모디 총리와 람 나트 코빈드 대통령 등이 그를 조문했다.[15] 그 외에도 파키스탄을 포함한 수많은 나라들에서 조의를 표했다.

하원의원 시절부터 인도의 경제개혁에 앞장을 선 인물이며 사후에도 좋은 평가를 받은 인물로 정치인들에겐 흔한 구설수 하나 안 나온 위인이다. 인도인들은 "나쁜 당에서 나온 좋은 인물"이라 평가한다.


3. 기타[편집]


  • 아탈리는 인도인들이 부르는 애칭이다.
  • 입양한 자녀는 있지만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왔다.
  • 총리로 재임한 1990년대 시절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지각한 일이 있었다. 외교적 결례이긴 하지만, 그의 민족주의적 입장을 엿볼 수 있는 일화이기도 하다. 또한 시기상으로 인도의 핵실험으로부터 얼마 안되었던 때였으므로, 양측의 불편한 입장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그래도 클린턴의 임기 마지막해인 2000년에는 백악관의 초청을 받아 방미, 정상회담을 갖기도 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7 13:03:56에 나무위키 아탈 비하리 바즈파이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평화를 위해 경쟁적으로 핵폭탄을 터뜨려댔다는 게 이그노벨상의 수여 이유였다. 참고로 이때 파키스탄 대통령이던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도 이그노벨상을 공동으로 수여받았다.[2] 인도와 파키스탄은 NPT(핵확산 금지조약)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에서 핵무장에 나섰는데, 이스라엘도 비슷한 경우다. 이 점에서 1) NPT가 등장하기 전에 핵무기를 개발한 미국 등 5대 핵보유국, 그리고 2) NPT에 가입했다가 탈퇴한 후 핵무장에 나선 북한과 차이를 나타낸다.[3] 이때 바즈파이는 자신이 군중 속에 섞여있었을 뿐 시위에는 가담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각서를 풀려났는데, 이는 두고두고 그가 정적들에게 공격당하는 원인이 된다. 바즈파이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게 거짓이라는 증거라는 것이다.[4] 인도의 하원에 해당한다.[5] 그의 연설을 직접 들은 자와할랄 네루 총리가 바즈파이의 연설 실력에 감탄해 '언젠가 저 자가 인도의 총리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기도 했다고.[6] 무굴 제국의 초대 황제인 바부르가 세운 모스크였다. 주변 무슬림들에게는 역사적, 종교적 가치가 큰 모스크들 중 하나였다고 한다. 결국 1992년 헐려나간다.[7] 바즈파이는 개인적으로 이 지명을 싫어했다고 한다. 선거를 이기는 게 먼저지 총리 지명부터 하는 짓은 김칫국 마시기라고 생각했기 때문.[8] 이게 까다로웠던 이유는 타 군소 정당들이 인민당의 과격한 힌두 중심주의에 동조할 생각이 별로 없었던 탓이 크다.[9] 미국이 핵실험을 이유로 인도와 파키스탄에 부과한 제재도 몇 달 안가서 풀렸다.[10] 모디가 강경 힌두 성향이었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그가 일부러 상황을 방치했다는 말까지 나왔다.[11] 바즈파이 총리는 2004년 총선에서 인도 인민당이 대패하자 구자라트 폭동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으며 나렌드라 모디 총리를 해임하지 않은 것은 실수였다고 후회했다.[12] 그래서 훗날 나렌드라 모디가 주도하는 인도 인민당은 2014년 총선에서 철저한 네거티브 전략으로 갔다.[13] 나렌드라 모디 총리와 람 나트 코빈드 대통령의 모습이 보인다.[14] 이때 즈음에 이미 휠체어를 타고 다녔고 사람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는 말이 있다.[15] 그의 유골은 8월 19일 갠지스 강에 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