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함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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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阿含經

1. 개요
2. 개론
3. 오해
3.1. 반론
4. 왜 존재감이 없었는가
4.1. 다른 주장


1. 개요[편집]


아함부에 속하는 소승경의 총칭으로 남전(南傳)ㆍ북전(北傳)이 있다. 북방 불교에서 전하는 것은 4 아함 외에 잡장(雜藏)이 있으나 따로 세우지 않았고, 남방불교인 팔리어 대장경에는 디가 니까야(Dīgha-nikāya, 장부), 맛지마 니까야(Majjhima-nikāya, 중부), 상윳따 니까야(Sayutta-nikāya, 상응부), 앙굿따라 니까야(Aguttara-nikāya, 증지부), 쿳타카 니까야(Khuddaka-nikāya)의 5 아함이 있었다.

산스크리트어 '아가마(āgama)'를 소리대로 한자로 차음하여 '아함경'이라 하였다.[1] 그 뜻은 '전승' 즉 부처의 말씀을 기록해 전래됐다는 것이다.[2] 힌두교에도 이름이 같은 문헌이있다.

아함경은 후한(後漢) 시대부터 부분적으로 번역되었다. 안세고로부터 148년 후로 몇 가지 번역이 있었으나 『잡아함경(雜阿含經)』을 비롯하여 여러 아함의 별생경이고 주요한 경전은 되지 못하였다. 173년 이후는 축불삭ㆍ지루가참 등 서역승들이 대승경을 번역했으므로 한때 번역이 되지 않다가[3] 380년쯤부터 점차로 아함ㆍ비담을 공부한 학승들이 중국으로 건너 와서 다시 번역을 시작했다.

  • 전진 건원 20년(384년) 도카륵국의 담마난제가 『증일아함경(增壹阿含經)』 41권,
  • 동진 융안 원년(397년) 승가라차ㆍ승가제화가 『중아함경』 60권을 번역.
  • 동진 의희 9년(413년) 법현(法顯)[4]이 『장아함(長阿含)』ㆍ『잡아함』의 범본(梵本)을 가지고 와서 그 해에 불타야사가 『장아함』을 외워내어, 불념이 번역.
  • 유송 문제(재위:465년 ~ 472년) 때에 구나발타라가 『잡아함(雜阿含)』 50권을 번역.
  • 472년[5] 불념이 『중아함경(中阿含經)』 59권을 가지고 와서 번역.

그리하여 4 아함경의 한문 번역이 완성되었다.

2. 개론[편집]


아함경을 한국에서 접하는 사람들이 범하는 가장 흔한 실수는 아함경이 '초기불교의 문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함경은 '부파 불교의 문헌'이다. 불교는 석가모니 입멸 이후 약 100년간 단일한 교단으로 이어졌는데 이 시절의 불교를 '초기불교' 또는 '원시불교'라고 부른다. 하지만 아마도 약 100년이 지난 뒤부터 계율과 교리의 해석 문제로 승단이 분열하여 '부파불교'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렇게 갈라진 여러 부파의 여러 승려들이 전승한 경전을 모은 것이 '아함경'이다.

각 부파에서 전승하는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경전들을 모았기 때문에, 똑같은 내용이 반복되기도 하고 논리적으로 서로 상충되는 내용이 함께 기재되기도 하며, 똑같은 질문인데도 서로 다른 대답을 하기도 한다. 또한 개별 경전을 내용에 따라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 아니라 적당히 경전의 길이나 주제 등을 보고 적당히 분류하여 문서화한 것이 지금의 아함경이다. 따라서 아함경 안에서 물론 초기불교의 흔적을 엿볼 수야 있겠지만, 분명히 이미 부파불교의 해석이 들어갔음을 유의해야 한다.

학자들이 추측하기에 원시불교에 가장 가까운 경전은 숫타니파타이다. 숫타니파타 내에서도 4-5장은 원시불교에 가깝지만, 1-3장은 부파 불교에 해당한다고 본다. 이는 같은 니까야에 저술된 숫타니파타의 주석서 '닛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참고로 숫타니파타는 팔리어로 '경전의 모음', '닛데사'는 '의미의 해석'을 뜻한다. 숫타니파타 시대의 경전을 모은 것이 숫타니파타, 그것의 주해서가 '닛데사'인 것이다. 그리고 닛데사는 숫타니파타의 4장, 5장과 1장의 3번째 경만 주석했다. 1장의 나머지와 2-3장은 후대에 추가된 내용임을 짐작할 수 있다.

아함경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부처의 가르침을 구전하는 말로 전해듣고 사람들이 불교에 귀의하였다. 대승에서는 이때 귀의한 사람을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는 뜻에서 성문승(聲聞乘)이라고 부른다.[6] 초기불교 입장에서는 석가모니 부처가 오랜 공겁[7]을 깨고 닙바나(열반)의 법을 이전 공겁 이후 처음으로 폈으므로 석가모니는 이 시대의 정등각자이자 부처이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인류의 기억 속에서 남아있는 한 이 시대는 석가모니 부처의 시대이다. 따라서, 이 시대에 깨달은 자는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은 성문 아라한일 수밖에 없다.

석가모니의 깨달음이 전설로든 소문으로든 완전히 잊히는 기나긴 공겁 시대가 있을 텐데, 닙바나의 법을 공겁 이후 처음으로 펴는 부처는 마떼이야(미륵불)이라고 말한다. 대승불교에서 산스크리트어로 '마이트레야'라 불리고 한역하여 '미륵불'이라 불리는 멧떼이야(Metteyya) 부처는 불전에 따르면 인간의 수명이 8만 살일 때 태어난다고 한다. 따라서 궁예를 비롯하여 과거나 현재 미륵불을 자칭하는 사람은 초기불교에 따르면 당연히 가짜일 수밖에 없다.

아함경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뒤 제자들에게 한 설법을 구전하다가 문서화하여 모은 초기 경전집이다. 초기불교의 기본이 되는 경전으로 간주된다. 초기불교 경전은 인도에서 기원전 3세기 아쇼카왕 대에 테라와다가 빠알리어로 제 3차 결집하여 구전되던 것을 스리랑카에서 기원전 1세기에 기록한 팔리어 니까야본이 있고, 이 아쇼카 왕대 이 3차 결집 이래의 구전을 기원후 2세기 중반에 카니시카왕 대에 설일체유부를 중심으로 산스크리트어로 기록한 제4차 결집본이 있다.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된 4차 결집본이 주로 중국에 수입되었지만, 다른 부파들의 경전들도 일부 중국에 수입되었다. 이들 초기 경전이 중국에서 한역되어 아함경이 되었다.[8]

테라와다니까야본과 설일체유부 중심의 아함경이 22% 정도 다르다는 것은 3가지 가능성을 시사한다.
1. 테라와다의 니까야본이 정확하다.
2. 설일체유부 중심의 산스크리트본이 정확하다.
3. 공통되는 부분을 빼고는 두 판본이 다 틀렸다.

1의 입장의 근거로는
가. 팔리어가 현존하는 언어 중 석가모니 부처님이 직접 설법하셨던 언어에 가장 가까운데, 팔리어를 전승의 매체로 삼았다는 점,
나. 문자로 정착된 시기가 제4차 결집보다 훨씬 이른 때라 원형을 더 잘 보존했을 수 있다는 점,
다. 테라와다는 초기 불교의 경전과 율장을 가능한 바꾸지 않고 가장 원형에 가깝게 보존해왔다는 점,
라. 북전에 따르면 인도 북방에서 실천 수행 위주의 테라와다는 불법을 설명하는 데 초점을 둔 설일체유부를 독립시킨 뒤, 히말라야로 들어가 설산부가 된 뒤에 사라졌다는 점,
마. 설일체유부가 '모든 법이 과거 현재 미래에 항상 있다.'고 주장하여 많이 비판받았고, 석가모니가 반복적으로 강조한 제행무상(諸行無常), 제행개고(諸行皆苦),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3특상(特相)을 제행무상/제법무아/열반적정 3법인으로 바꿔서 강조하는 등 교세확장을 위해 교리를 자유로이 바꾸었다고 의심된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상좌부 불교항목에 나오듯 남방불교 니까야의 순수성은 이미 세계 학계에서 부정되었다. 팔리어가 아닌 문헌 중 팔리 니까야보다 오래된 대승 불교 문헌까지 나오는 형편이라, 현재 불교학계는 아함경과 니까야가 석가모니의 친설에 가깝다고 보긴 해도 순수한 친설이라고 보진 않는다. 다만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그래도 아함경/니까야가 한참 뒤 만들어진 후대 대승경전인 화엄경, 대일경 등 경전보단 친설에 훨씬 가깝다는 점에는 모은 학자들의 의견이 모인다.

니까야테라와다가 중심인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등 동남아에서는 매우 귀중한 경전으로 취급받는다. 아함경으로 지칭되는 불경은 한역대장경으로 장아함경, 중아함경, 잡아함경, 증일아함경이 포함된다. 전래되는 장아함경이 가장 적은 권수로 22권이고 나머지는 각각 60권, 50권, 50권으로 그 분량이 방대하다.

이후 설일체유부를 비롯한 기존 부파 불교에 각성을 촉구하며 발생한 대승 불교는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을 구제해 열반에 이르도록 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행동과 주장, 논리를 뒷받침하고 정통성을 부여할 경전을 찾고 만들려고 노력했다. 이런 생각으로 나온 대승의 초기경전이 금강경, 소품반야경(팔천송반야경), 아미타경이고, 이 반야경을 기점으로 대반야경, 반야심경을 비롯한 수많은 반야부 경전이 등장했으며[9] 뒤를 이어 여러 가지 대승경전들이 등장했다. 이런 대승경전들을 당연히 테라와다는 석가모니의 친설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불교의 기존 여러 문헌이 연구되고 재해석됐기에 불교 기존 문헌과 영향을 주고 받은 관계가 자연히 드러났는데, 아함경의 영향이 매우 컸다. 실제로 염불이라든지 불법승 삼보를 향한 수호와 경배 등 대승불교에서 보이는 신앙 형태의 단초가 가장 많이 보이는 경전이 아함경이고, 나가르주나 등 학자들이 대승의 공 사상을 강조하면서 자기 주장의 근거로 든 경전이 또한 아함경이다. 관련논문 그러나 아함경은 오랫동안 동북아 대승불교 문화권에서는 큰 인지도가 없었다.


3. 오해[편집]


세간에서 아함경의 내용에 부처님이 돈을 많이 모으라고 주장하였고, 그렇기에 불교는 사실 부자가 되어도 되는 종교라는 오해가 많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런 오해를 일으킨 원인은 별역잡아함경증일아함경에 있는데 잡아함경에는 벌이 온갖 꽃을 채집하듯이 밤낮으로 재물을 얻으라라는 내용이, 증일아함경에는 재물을 현재에 가지면 한량없는 복을 얻을 것이다라는 내용이 있다고 주장하는 승려및 불교 연구가(특히 불교와 경제를 접목시킨 유사경제학자)들이 있기 때문. 대표적으로 부처님의 부자수업으로 유명한 윤성식이 있다. 그러나 이는 절대 사실이 아니고, 두 아함경에는 그런 내용이 있다는 기록도 없다. 가난으로 인한 고통이 죽음으로 인한 고통보다 무섭다란 유사한 말이 경전에 적혀 있다는 말도 있으나, 이것 역시 사실이 아니다.

물론 불교는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한국에 무소유를 널리 알린 법정 스님 역시 무소유는 불필요한 것을 가지지 않는 것이지 궁색한 빈털터리가 되라고 하지는 않는다고 공개석상에서나 사석에서나 분명히 말씀하셨다고 한다. 참고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불교가 부자가 되라고 강조한 적도 없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애초에 석가모니조차 왕자로 태어났으나 왕위와 제물, 권력을 전부 버리고 출가하였고, 열반에 들때도 아무것도 없이 들었던 분이다.

비슷한 의미로는 옆동네바늘구멍이 있다. 이쪽 역시 '세속적 재물욕을 갖지 말라.'는 주제를 가지고 있으나, 종교인측중에서 낭설을 하는 바람에 "그러니 돈을 악착같이 모아라."라는 의미로 왜곡된 케이스이다. 공통적으로 기독교도 불교도 청렴하게 살아가야 한다를 포교하는 종교인만큼 제물욕에 대해서도 번뇌의 한종류로 보고 있다.


3.1. 반론[편집]


화엄에서는 현실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 자체로 절대라고 한다. 버릴 것도, 더러운 것도 없는 연화장 세계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은 필히 마음 속의 모든 분별심을 버린 자만이 말할 수 있는 언설이리라. 재가자는 속세에 산다. 속세에 살면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고민은 누구나 하게 된다. 설령 그 사람이 불자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것은 속세라는 곳 자체가 구조적으로 현실적이고 물질이 필요로 되는 곳이어서 그렇다. 따라서 속세에 살고 있는 재가자에게 출가자 수준으로 계를 지키라고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속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도 소중한 것이다. 따라서 재가자들에게 행복과 이익을 주려면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되, 그 돈을 남에게 베풀면서 쓰라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석가모니는 아함경에서 이런 뜻으로 말씀을 하신 것이다.


4. 왜 존재감이 없었는가[편집]


한반도에서 아함경은 오래도록 큰 인지도가 없었는데 이것은 한반도뿐만이 아니라 근현대 이전까지 대승 불교 문화권 대부분의 공통된 사항이었다. 그 이유는 중국에 불교가 전해질 때 인도처럼 불교가 자국에서 생겨나 경전들이 순차로 등장하지 않고 외래 종교로서 불교가 유입된 후 다양한 종류의 경전이 실제 생성 연대하고는 무관하게 인도 유학승이나 인도에서 온 포교승들로부터 동시다발로 들어와 경전의 위치와 순서와 중요도를 따지는데 많은 어려움이 생긴 것과 관련이 있다.

이 과정에서 교상판석[10]이라 하여 불경을 여러 범주로 분류하려는 시도가 생겨났는데 문제는 이 교상판석에 따른 분류가 당시 학문의 발달 수준상 실제 역사에 맞게 실증으로 경전을 분류할 능력까지는 되지 않았다는 것과 각 종파에서 자신들의 이론의 정당성의 근거를 찾으려고 각기 나름대로 분류법으로 각자의 교상판석 연구를 내놓은 데서 문제가 생겨났다.

이 과정에서 초기 경전이었기에 사상상/철학상 부분은 후기 대승 불교 경전들보다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던 아함경은 중요도가 낮은, 혹은 석가모니가 전법 초기 방편론상으로 설한[11] 근기가 낮은 경전으로 분류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는 후대에 나타난 대승 불교 경전들이 여타 경전과의 비교에서 크게 부각되었는데 초기 경전인 아함경은 중요도가 낮은 불경으로 분류되었고, 이후 대승 불교가 중국에서 한국과 일본으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각국에서도 나름대로 교상판석으로 경전을 분류하였으나 큰 틀은 중국의 교상판석에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대승 불교 경전 중심의 풍조는 바뀌지 않았다.

이런 구조가 바뀌게 된 것은 근대 일본에서였다. 1차 세계대전 무렵까지 일본은 영국과 우방이었다. 당시 일본 학자들은 영국에서 스리랑카의 빠알리어 니까야를 번역한 "새로운" 불경(PTS본)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역사적인 인물 석가모니 부처님이 친히 설하신 말씀으로 보이는 기록을 동북아인으로서 처음으로 접한 것이다. 요약하면, 근대 일본은 서구의 실증에 기초하고 비판하는 태도로 종교를 연구하는 학문이 들어오면서[12] 기존 교상판석에 근거한 불경 분류 자체를 비판하고 대승경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하신 것이 아니라는 대승비불설이 등장하는 등 기존 연구를 상대로 삼은 반성이 일어났고, 여기에 추가로 고려대장경을 비롯한 기존 대장경들을 저본으로 대승 불교 경전과 아함경을 빠알리어 니까야와 산스크리트어 경전과 대조하여 불교 여러 종파의 경전을 모은 대정신수대장경(다이쇼신수대장경)이 편찬되었다. 그리고 1935~1941년에는 빠알리어 대장경인 《남전대장경》(南伝大蔵経)을 출판하면서 일본 내 불교 연구에서는 황금기를 구가하던 시기였다. 자연히 이 과정에서 아함경은 새롭게 주목받게 되었고 지금도 아함경 성립 관련 연구나 불교 문헌의 객관 편찬 연대 등의 연구는 일본이 나름대로 연구 자료가 있는 상황이다.

결과적으로 아함경은 불경 중에서도 매우 이른 시기에 나왔는데도 나무위키반야심경보다 늦게 등록되었다. 알고 보면 그럴만도 했던게 한국 불교계 자체가 의식 있는 일부 스님과 불자를 제외하면 아함경을 비롯한 초기 경전에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승려들은 한국 불교의 사상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되는 화엄경이나 금강경이 중심이고, 불자들은 사경 시 승려들이 많이 권하는 불경금강경법화경에만 익숙하다. 2006년만 해도 아함경을 생소해 하는 불자가 많았고 지금도 생소해 하는 불자가 많은 게 현실이다.(참조)

하지만 다행히도 현재 한국에는 초기 불교를 향한 불자와 승려들의 인식이 점점 변하고 장아함경, 잡아함경, 증일아함경의 완역이 끝난 상태이다. 이것을 열람하고 싶은 사람은 동국대학교 불교 아카이브에서 무료로 온라인 열람하거나 시중에서 아함경을 쉽게 살 수 있다. 온라인으로 보면 무료이지만 출판본에는 주석과 해설 등이 있어[13] 읽기가 더욱 나으니 직접 사거나 근처 도서관에 신청하자. 요즘 초기 불교의 연구는 동남아시아의 테라와다에서 전해온 니까야 경전을 중심으로 많이 진행되고 있으며 아함경과 니까야의 비교 작업도 진행 중이다. 그러나 경과 율, 논(아비담마), 그리고 위빳사나 수행까지 두루 갖춘 것은 남방불교인 테라와다이므로 테라와다를 중심으로 초기불교 연구와 수행이 진행되고 있다.

2013년에는 조계종에서 사미승을 교육하는 교재에 니까야 번역본이 들어가게 되었다. 북방불교에서 초기 불교의 흔적은 아함경에 일부 남아 있지만, 북방불교에서는 초기 불교 수행 이론에 해당하는 논서가 부족하고 위빠사나 수행의 맥이 끊겼으므로 아함경을 중심으로 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활발하지 않다. 이와 관련된 연구는 과련 논문들이나 학술서들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엄밀히 따져 아함경이 존재감이 없었던 이유는 위의 이유보다는 불교가 수용될때 불교 그자체의 가치 보다는 범인류적인 종교가 지역색을 나타내는 종교와 그 지역의 신앙과 결합한 토호세력들을 누르고 왕권강화와 백성들을 통합하기 위한 도구로서 가치가 아함경의 부파불교가 대승불교보다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 보다 본질적인 이유다.

다분히 정치적인 목적으로 육성된 종교가 대승불교이며 오늘날 불자들이 잊혀졌던 아함경을 보면서 초기불교를 다시 공부하는것도 그 지역의 정치세력과 지역신앙들의 결합을 통해확장된 대승불교의 불교관이 정말 부처가 말한 그것이 맞는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자 하는 욕구가 반영된 것이다.. 다만 이는 대승불교만이 가지는 특성은 아니고 종교가 확장되면서 보여지는 보편적인 모습이다.

4.1. 다른 주장[편집]


대승 불교 경전과 아함경은 문헌학상으로 생성 시기가 차이가 나지 않고 이미 여래장, 중용 등 대승 불교의 가르침을 풍부히 담아 소위 대승 불교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 대승 불교의 경전은 여타와의 비교에서 붓다의 가르침 중 이런 요소가 더욱 집중으로 드러난 경전이고 그것을 이전의 상좌부 불교의 번쇄한 논의보다 핵심답고도 뛰어나게 논과 소를 이용해 연구했다.

아함경이 한국에서 유명해진 것은 대개 일본, 동남아 등 여타 지역과의 비교에서 불교 수행과 연구에서 그동안 밀려나 있던 지역들을 재발견하면서 부터이다. 이 과정에서 이미 지난 수천년 간 충분히 대승 불교의 성립과 발전 과정에서 수많은 수행자, 대중, 논사들에 의해 논의되고 수용되었던 것들이 다시금 논의되기 시작했으며 그런 것 중 하나가 대승비불설이다.

이 과정에서 이른바 '남방불교의 작고 소박한 생활이 불러 일으키는 어떤 아름다운 미감' 같은 출판 마케팅 요소가 부가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자현은 아함경을 비하하고 상좌부 불교를 소승불교로 깎아부르면서 오늘날에 초기불교 수행은 가능하지도 않고 저들은 다 사기꾼이라고 극언을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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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함(含)이 상고한어로는 대충 '컴'이나 '금' 정도로 발음되었다고 추정하므로, 산스크리트어 발음 '아가마'에 좀 더 가까워진다.[2] 아함이란 말을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언덕에서 머금다'가 되지만, 의미와 상관없이 한자의 음만을 빌렸으므로 한자 그대로 뜻을 새기면 안 된다.[3] 다만 삼국시대 오, 위에서 잡아함경의 일부가 번역되기는 했다.[4] 중국에서 최초로 인도로 구법을 떠난 승려로, 그의 기행문인 불국기가 오늘날까지 전한다.[5] 여담으로 이 해에 백제개로왕북위에 국서를 보내 고구려와 전쟁을 벌여달라고 요청했었다. 씹혔지만.[6] 즉, 소리를(소리 성 聲) 들어 (들을 문 聞) 불교에 탄(탈 승 乘) 이란 뜻이다. 승은 승려 승이 아님에 유의![7] 정등각자(正等覺者) 부처가 없는 시기[8] 두 버전(니까야와 아함경)은 내용과 구성이 70% 정도 일치하지만 조금씩 다른 부분도 있다. 예컨대 증일아함경팔리어 경장에서 석가모니제자들을 설명하는 부분이 다르다.[9] 과거에는 내용이 긴 반야부 경전들이 먼저 생겨났다고 보았으나, 현대 서지학적 연구결과에 따르면 짧은 경전들부터 기원전에 생겼다.[10] 敎相判釋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그 말한 때의 차례, 방법, 형식, 의미, 내용 따위에 따라 분류하고 체계화하는 일로서 유의어로는 敎判ㆍ判敎ㆍ判釋이 있다. 원시 형태 교상판석은 인도에서도 있었지만, 상술한 이유로 중국을 비롯한 북방불교 문화권에서 더욱 많이 벌어졌다.[11] 특히 천태종 쪽이 주로 이런 입장이다. 천태종의 소의 경전인 법화경 자체가 다른 경전들은 석가모니가 법화경을 설법하려는 전 단계, 즉 방편론이었다는 것에 기초하기 때문이다.[12] 물론 그 전부터 청대 고증학의 등장과 그 영향으로 불교 문헌과 교단의 성립을 향한 비판은 어느 정도는 있어 왔다. 당장 한반도에서도 승려 백파 긍선(1767-1852)과 추사 김정희(1786-1856) 간의 논쟁이 이것 탓에 벌어졌으니까.[13] 물론 온라인판이라고 주석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