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흘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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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1. 개요[편집]


튀르키예 동부 비틀리스도에 속한 소재지.

2. 역사[편집]


아흘라트. 고대와 중세 시기 아르메니아어 이름 칼라트 / 킬라트
고대 브즈누닉 군의 일부. 동로마 지배, 칼리파 우스만 시기인 645년, 당시 시리아 총독이던 무아위야 1세가 (혹은 칼리파 우스만의 직접 지시로) 파견한 하비브 빈 마슬라마 알피흐리에 의해 이슬람 정복 이루어짐. 이후 4세기간 아랍 총독 혹은 카이스 부족의 아랍인 에미르 혹은 아르메니아 왕공들이 통치
8세기 초 일대에 아랍 부족들이 정착, 카이스 부족의 토후국 들어섬
10세기 지리가 이븐 하우칼이 마야파리킨 ~ 우르미아간 무역로 상의 중요한 중간 거점이라 묘사
바스푸라칸 공국, 983년경 쿠르드 부족장 바드 (아르메니아어: 바트)가 통치, 10여년 후 디야르바크르 점령하여 마르완 왕조 세움.
998년 겨울 바그라투니 가문의 이베리아 왕국 (조지아 왕국의 전신)의 군주이자 쿠로팔라테스인 다비드 3세가 클라트를 포위했으나
그의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차별 때문에 주민들이 무슬림 수비대와 협력하여 항전하였기에 점령에 실패하였다.
1057년 동로마 제국에 반기를 든 노르만 용병대장 에르베 프랑코포울로스 토벌군에 패한 후 3백의 동료 기사들과 아흘라트로 피신했으나 에미르 아포노사르 (아부 나스르)에게 배신당하여 미카일 6세에게 넘겨졌다. 만지케르트 전투 후 셀주크 제국의 술탄 알프 아르슬란이 친히 나아가 점령한 후 튀르크멘 맘루크 지휘관 쇠크멘 엘쿠트비에게 영지로 하사. 이후 그의 후손들이 봉토를 세습하여 샤 아르멘스 혹은 아흘라트 샤 왕조로 불림. 11세기의 지리가 나시르 호스로는 자신의 저서 사파르나마에서 아흘라트 (اخلاط)는 하란 다음 도시로 언급되며, 무슬림과 아르메니아 인들의 경계이고 왕공 나스룻다울라는 백살이 넘었는데 아들들에게 영토를 분할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나시르 호스로는 또한 지명에 대해 성내에서 아랍어 & 아르메니아어 & 페르시아어 등 다양한 언어가 쓰이기에 아랍어로 '섞인'이란 의미인 아흘라트로 명명된 것이라 추정하였다. 마지막으로 무역 거래는 동로마 화폐 혹은 아르메니아의 로텔로 이루어지며, 후자는 300 디르함과 같다고 덧붙였다.
셀주크 조의 쇠퇴와 호라즘 및 몽골 제국의 서진 속 혼란이 가중되던 13세기, 아흘라트는 아이유브 왕조와 룸 셀주크, 조지아 왕국 사이의 분쟁 지역이었다. 12세기 조지아가 지배할 때에는 아르메니아어 지명 칼라트를 변형한 칼라티로 불렀다. 13세기 후반부터 일 칸국 령이 된 아흘라트에서는 칸들의 동전이 주조되었다. 함달라 무스타우피 (~1349) 에 의하면 당시 아흘라트의 세수는 51500 디나르였다. 일 칸국의 와해 후 일대는 잘라이르, 티무르 조에 이어 백양 왕조에 속하였다.
16세기 초엽 찰디란 전투로 오스만 제국이 일시 장악한 이래로 오스만 vs 사파비 제국 간의 변경 지대로써 쟁탈전이 벌어졌다. 1526년 아흘라트는 재차 사파비 령이 되어 델루 몬타샤 우스타즐루가 총독이었으나 1533년 오스만 대재상 이브라힘 파샤의 타브리즈 원정 시에 재점령되었다. 이후 1548년 사파비 조가 수복하고 약탈했으나 1554년 쉴레이만 1세의 친정 시에 정복된 후 공고히 오스만 령으로 남았다. 다만 실질적으로는 19세기 중반 오스만 제국의 중앙 집권화 전까지 현지 쿠르드 족장들이 다스렸다.
19세기 말엽 중동을 여행한 프랑스인 지리가 비탈 퀴네는 당시 아흘라트 인구를 23700명으로 추산하였고, 그중 70%는 무슬림이며 나머지는 기독교도 (대부분) 아르메니아계라 추정하였다. 또한 옛 아흘라트는 버려져 '폐허 도시'란 의미인 카라브 셰히르라 불렸고, 동쪽 2km 지점의 반 호숫가에 새 도시가 세워졌다. 20세기 초엽의 혼란 후 1961년 아흘라트의 인구는 5천여명이었다. 19세기 러시아 제국의 체르케스인 학살 시에 일부 체르케스인 난민들이 일대에 정착하였다. 그들은 후일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돌변하여 현지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가담한다. 한편 오스만 제국기인 1846년의 문서에서 이미 쿠르디스탄의 중심부에 위치한 아흘라트를 쿠르드 인들에 대한 통제 거점으로 삼자는 시안이 있었는데, 이는 1916-34년의 쿠르드인 강제 이주 시에 실현되어 당시 현지 쿠르드 주민들은 통합 진보 위원회에 불복한 죄로 디야르바크르로 이주되었다. 이로써 아흘라트의 인구는 3만에서 5천 미만으로 급감하였다. 현대 들어 아흘라트 시는 아흘라트샤 시절 세워진 옛 묘비들과 우라르투-오스만 시기 시타델을 묶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우선적으로 잠정 목록에는 오른 상태이다. 최근 들어 아흘라트 지역은 질 좋은 감자를 생산하며 농업 부문에서 수익을 올리고 있다.


쇠트멘 엘쿠트비 (Sökmen el-Kutbî)
셀주크 제국의 튀르크멘 노예 에미르
샤-이-아르만 / 샤-아르멘스 / 아흘라트샤 / 쇠크멘르 왕조

셀주크 왕공 쿠트뷧딘 이스마일 일아르슬란 (말리크샤의 사촌)의 길만 (노예 장수). 주군이 전사한 후 아흘라트 주민들 요구로 마르완 조를 축출하고 셀주크 제국의 명으로 도시 장악 (1100년). 이후 정복 활동에 나선 그는 반 호수 서쪽과 북쪽을 점령하며 영향력을 확대하였고, 특히 실반 (마야파리킨)까지 수중에 넣으며 자지라 지방의 주요 세력 중 하나로 부상하였다. 그럼에도 쇠크멘은 셀주크 술탄 무함마드 1세에 충성하며 십자군 전선 등에서 활약하였고, 그 대가로 1110년 아흘라트를 이크타 (영지)로 하사받았다. 이로써 쇠크멘은 아흘라트를 중심으로 한 세습 왕조를 확립했다. 1111년, 재차 에데사 백국 공격에 참가한 쇠크멘은 그해 8월 투르베셀 포위 사망하였다. 그의 관은 아흘라트로 보내졌고, 아들 자히렛딘 이브라힘이 계승하였다.아흘라트 샤들은 셀주크 제국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다만 북쪽의 살투크 왕조와 연합하여 조지아 왕국을 공격하는 등 자체적인 활동에 나설 때도 있었고, 서남쪽 마야파리킨의 아르투크 왕조와도 좋은 관계를 맺어 아나톨리아 동부와 메소포타미아 북부 간의 연결로 역할을 하였다. 아흘라트샤 왕조는 쇠크멘 2세 (1128-85년)의 57년 치세에 전성기를 맞았다. 그는
살투크 2세의 딸과 결혼해 양국의 동맹을 굳혔으나 자녀를 남기지 못하여 사후 왕가의 시작과 마찬가지로 길만 장군들이 집권하였다. 그렇게 20여년이 흐른 후 1207년 아흘라트샤 왕조는 오랫동안 아흘라트를 탐내던 아이유브 왕조에게 병합되었다. 아이유브 조는 룸 술탄 카이쿠바드 1세의 동생이자 에르주룸의 멜리크 투으룰샤가 룸 셀주크의 명의로 마지막 아흘라트샤 이젯딘 발라반을 살해한 후 아흘라트 주민들의 초대를 받아 도시를 접수하였다. 나시룻딘 쇠크멘 2세
에르주룸의 살투크 왕조 공주 샤흐바누와 결혼, 함께 여러 건설 사업 벌임. 1164년 샤흐바누는 폐허 상태이던 아흘라트 시타델과 인근 도로 복구하였고, 낡은 목조 다리를 석조로 교체하였으며 시내에 큰 여관 (카라반사라이)을 세웠다. 또한 그녀는 건축가 카라쿠쉬를 고용하였고, 그는 불과 몇달 만에 여러 건축물을 완공하였다. 다만 이들은 1229-30년 화레즘샤 잘랄웃딘의 포위 시에 파괴되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쇠크멘 2세는 아흘라트 ~ 타브리즈간 카라반 교역로 상에 있는 코이의 서쪽에 자신의 이름을 딴 수크마나바드를 세웠다. 다만 아직 그 유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쇠크멘 2세가 자녀 없이 사망한 후 아흘라트샤 왕조는 1207년까지 혼란을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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