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이 보로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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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Андрей Егорович Боровых.jpg
안드레이 예고로비치 보로비치(Андрей Егорович Боровых : 1921년 10월 30일~1989년 11월 7일)
1. 개요
2. 생애
2.1. 독소전에서 활약
2.2. 경험담
2.3. 전공 논쟁
2.4. 종전 후



1. 개요[편집]


독소전 기간 동안 독일 공군의 각종 항공기를 32대나 격추시킨 에이스 파일럿으로, 그 혁혁한 공로로 인하여 2회나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은 베테랑이었다.


2. 생애[편집]


소싯적에는 안드류샤(Андрюша)라는 애칭으로 불린 안드레이 예고로비치 보로비치는 1921년 10월 30일에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 쿠르스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때마침 세계적으로 붐이 일고 있던 항공 열풍에 휩쓸려 비행기에 빠져들었다. 7학년이 되기 전에 운전면허를 딴 그는 한동안 운전기사로 일하기도 했는데, 이때 쌓은 운전 경험이 훗날 조종 교육을 받을 때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1936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안드레이 보로비치는 정식으로 콤소몰에 가입했고, 행사 활동을 통해 오소아비아힘 항공 클럽에 들어가면서 처음으로 비행기에 타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 첫 경험이란 이름모를 낡은 복엽기 후방석에 쭈그리고 앉아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초라한 비행장 상공을 한 바퀴 돈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땅에 내려선 안드레이 소년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 놀라운 경험을 통해 장차 무슨 일이 있더라도 조종사가 되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소년 안드레이는 1940년에 소련 공군에 입대했다. 생도가 된 안드레이 보로비치가 전투조종사가 되기 위해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위치한 추위프 군사항공학교(Чугуевскую военную авиационную школу)에서 연일 고된 조종 훈련을 받고 있던 도중 나치 독일소련을 침공하여 독소전이 발발하게 된다. 사실 그는 동기들보다 빨리 교육과정을 마쳤으나 특별히 성적 우수자로 분류되어 비행 조교로 선발되는 바람에 6개월 더 항공학교에 남아있어야만 했는데, 이런 사정만 아니었다면 독소전 첫날에 루프트바페의 맹공을 직접 맞닥뜨렸을 것이었다. 생도 과정을 모두 마친 그는 제16항공군 예하 제728전투기 항공연대(728-го ИАП)에 소위로 임관하며 I-16 전투기의 조종사로 배속되었고, 1941년 12월부터 대조국 전쟁의 최전선에 서서 실전에 나가게 된다.



2.1. 독소전에서 활약[편집]


그가 비행에 타고난 소질이 있었다는 것은 자대에 배치된지 몇 개월만에 한낱 신참 조종사에 불과하던 그에게 최정예 파일럿에게만 주어지던 영국제 호커 허리케인 전투기가 주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간단하게 증명된다. 그가 탄 허리케인 Mk.1은 주익에 4정씩 달려 있던 브라우닝 기관총을 떼어내고 대신 20mm ShVAK 기관포 4문을 장비하게끔 특수 개조를 받은 기체였는데, 그는 1942년 3월 8일 하루 동안 이걸 몰고 융커스 Ju 52 수송기 1대와 Ju 88 폭격기, 그리고 1대의 메서슈밋 Bf 109 전투기를 잡아내는 신들린 활약을 선보이기도 했다.

"제가 태어난 고향 쿠르스크 전역을 둘러싸고 참가하게 된 항공전은 역사적인 쿠르스크 전투가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1943년 4월부터 5월 사이에 독일 공군은 그들의 전력을 쿠르스크 부근에 집중시키고 있었고, 우리들은 실로 엄청난 공군력과 맞서 싸워야만 했지요. 저는 그때 제157연대의 조종사들이 하루에도 다섯 번, 많으면 여섯 번까지도 독일 공군기들과 싸웠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명예롭게도 모든 부대원들이 그처럼 무거운 짐을 참고 견뎌냈고, 많은 희생이 따랐지만 용감하고 대담하게 싸웠지요.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영웅들이었습니다. 쿠르스크 전투에서 나는 연대가 출격시킨 편대의 지휘관이었고, 우리 부대의 모든 조종사는 용감하고 이타적으로 싸웠다는 사실에 주목해야만 합니다. 우리들 사이에서는 독일 조종사들처럼 전공을 올리기 위해 임무를 팽개치고 적기 꽁무니만 쫓아다니는 소행은 경멸받는 짓거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충분한 교전 기회가 있었고 저는 제 고향 하늘을 날던 적기들 중에서 8대를 격추해냈는데, 그 사실은 저를 두 배나 기쁘게 했습니다. 그리고 저 또한 한 번 피격 당해 추락했지만, 다행히도 제때에 낙하산 탈출을 할 수 있었지요."


안드레이 소위는 1942년 9월부터는 제157전투기 항공연대(157-м ИАП)로 부대를 옮겨 1943년이 저물 때까지 레닌그라드가 포함된 북서전선과 중앙 전선을 누비며 무려 341회나 실전 출격을 거듭하면서 실로 엄청나게 숱한 공중전을 경험했다. 그 많은 전투를 몸소 싸우며 겪은 안드레이 보로비치는 매우 탁월한 용맹을 보이며 공동 격추 12대와 개인 격추 14대라는 높은 전과를 거두었다. 이에 그의 상관이던 제157전투기 연대장인 빅토르 페도로비치 볼코프(Виктор Фёдорович Волков : 1917~1998 / 6킬) 중령은 안드레이 보로비치를 유독 아꼈고, 부하의 돋보이는 업적을 상부에 보고했다. 1942년 12월 28일부터 1944년 3월 9일까지 제157전투기연대는 볼코프 중령의 지휘 하에 안드레이와 같은 에이스들이 모인 조종사들은 2,458소티를 출격하면서 131대의 적기를 격추해냈다.

독소전 초기의 혼란을 벗어난 소련 공군은 일선 전투기 연대장이 부하의 공적을 증명하는 자료들을 첨부해서 상부에 상신하면, 차례대로 지휘체계를 타고 올라가 확인되는 방식으로 전공을 집계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제273전투기 항공사단장과 제6항공군단장, 제16항공군 사령관을 거쳐 중앙 전선 사령관에게까지 보고된 그의 공적은 최고사령부인 스타프카까지 전달되었고 스탈린 법령에 의거해 1943년 8월 24일에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수여받게 된다.

그렇지만 어떤 의미에서 쿠르스크 전역에서 그가 벌인 전투는 말 그대로 자신의 집과 가족을 지키는 일이었다. 당시 독일군의 점령에서 막 해방된 쿠르스크에는 그의 부모와 형제 자매가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안드레이 보로비치와 전우들은 온 힘을 쏟아부어 힘겹게 침략군을 몰아냈지만, 전투가 끝나고 얼마 후 아버지 이고르 그리고리예비치가 루프트바페의 격렬한 공습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게 된다.


2.2. 경험담[편집]


1944년 10월 21일, 우리는 하루 종일 전투기 조종석에 앉어 기지와 전선을 오가며 아군 폭격기공격기들을 호위하는 엄호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전투기들은 이따금 작은 무리를 지어 우리 공습을 막으려 반격을 가해왔지요. 이날 우리는 제16항공군에 배속되어 스크램블 지령을 여러차례 받으면서 몇 번의 공중전을 성공적으로 치룰 수 있었습니다. 발진 명령을 받은 나는 연대 최고의 윙맨으로 손꼽히던 내 파트너 파벨 P. 칼류즈니(Павел Павлович Калюжным : 1916~2002 / 17킬) 중위와 편대를 짜고 공습 부대를 괴롭히는 한 쌍의 적 전투기를 요격하기 위해 전선으로 발길을 재촉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륙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곧바로 적기와 조우했는데 지휘소의 임무 브리핑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어서 잠깐 당황했습니다. 거기엔 무려 6대의 Fw 190이 윙윙대며 날고 있었던 거죠.

그때 우리 편대의 고도는 800 m로 별로 높지 않았지만 그놈들은 우리 일류신 돌격기들을 덮치려고 더 낮게 날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곧바로 적기의 후방으로 접근해 편대장을 골라 잡아내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우측으로 조종간를 꺾어 강하게 선회한 내가 4도의 완만한 하강 각도로 포케불프 편대장의 100 m 뒤로 접근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앞서 우리 아군기들에게 일격을 가하고 상승하던 적기가 150 m 정도 앞에서 기수를 우리에게 돌리고 있었던거죠! 아마 그놈이 내가 노리던 편대장기에게 무선으로 경고를 해준게 틀림없습니다. 내가 노리던 먹잇감은 우리의 접근을 눈치채고 서둘러 사정거리를 벗어나 버렸으니까요.

곧바로 다른 목표를 찾기 위해 주변을 살핀 나는 다른 4대의 적기들을 찾아냈습니다. 이 포케불프들은 공대지 임무로 출격했던 것이었는지 제각기 폭탄을 달고 있었는데, 4대의 적기들은 아무렇게나 폭탄을 내던지곤 고도를 높이며 산개하면서 방어기동을 펼치기 시작했죠. 하지만 난 여전히 고도의 우위를 지키고 있었고, 즉각 제일 가까운 100~150m 정도 떨어진 Fw 190의 1/4 후방에서 리드거리를 주고 짧게 전탄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내가 쏜 기관포탄의 탄막에 뛰어든 그놈은 파편과 연기를 뿌리면서 갑자기 속도가 뚝 떨어지더니 실속을 하더군요. 다른 적기의 행방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추락하는 그 적기를 끝까지 지켜 볼 틈도 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수색했지만 아마 고도가 낮아 회복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이렇게 칼류즈니와 나 둘이서 포케불프 6대와 싸우는 동안,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4대의 메서슈밋 전투기에 의해 기습을 받았습니다. 임무에서 설명한 그 적기들을 이제야 만난거였지만, 상황이 안좋았습니다. 그 나치 전투기들은 낮게 깔린 구름에 숨어 우리에게 몰래 접근해왔던 거였죠. 독일 전투기들은 몇 차례 연속으로 공격을 가해왔지만 우리가 모는 Yak-3는 저공에서는 그들보다 더 가속이 좋고 민첩하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나도 낮은 구름을 골라 뛰어들었고, 그렇게 우리는 간신히 사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공격기들이 공습을 마치고 돌아간 뒤라서 나는 다시 기수를 돌려 그 적기들을 찾아 나서고 싶었지만, 우리 편대는 연료를 다 써버려 비행장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2.3. 전공 논쟁[편집]


전쟁 동안 안드레이 보로비치는 470회 이상 출격을 계속했고 그렇게 치열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130회 이상 공중전을 경험했다. 그의 통산 전과는 개인 격추 32대와 공동 격추 14대로 집계되는데, 일부 항공 역사가들은 그가 근무했던 연대의 전투보고서를 비롯한 각종 자료들을 종합해 분석한 끝에 당시 소련 에이스들의 개인 격추 공적과 공동 격추 전과는 다르게 계산될 여지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비교적 최근에 발간된 자료에서는 안드레이 보로비치의 전과를 개인 격추 27대와 공동 격추 17대로 기술하기도 한다.



2.4. 종전 후[편집]


2차 세계 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갈 즈음, 그는 중령 계급장을 달고 항공 연대장까지 진급했고 군단장의 유고로 군단급 부대를 권한대행으로 지휘한 경험도 쌓을 수 있었으며 2회의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 외에도 레닌 훈장도 두 번이나 수여받았다. 종전 후에 계속 군에 남기로 결심한 그는 1951년 공군 대학(Военно-воздушную академию)에서 고급 장교 과정을 연마했고, 1957년에는 장성의 등용문이라 할 수 있는 고등 군사 사관학교(Высшую военную академию)를 졸업했다. 1959년부터 1969년까지 그는 공군 항공 협회장을 지냈고, 1968년에야 비로소 대령으로 진급하게 된다. 1969년부터 1977년까지 그는 소련 각지의 방공군 사령관으로 재직하면서 초음속 요격기를 모는 부하들을 지휘했다.

1977년에 공군에서 퇴역한 그는 1988년까지 소련 국방부 산하 기관인 군사역사연구소(Института военной истории)의 고문 직함이 주어졌고, 과거 자신이 전쟁에서 겪은 경험과 냉전 시대 방공군 지휘관으로 재직하면서 연구한 담론을 펴낸 "새로운 기술, 무기와 인간"(1972), "조국의 신뢰할 수있는 방패"(1985) 같은 책을 써내기도 했다.

그는 68세가 되던 1989년 11월 7일에 자신이 살던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는데, 석연치 않게도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정확한 사인과 상황은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가 한 무리의 폭도들에 의해서 살해당했다는 기사가 당시 일간지에 실렸다. 독소전 당시 보로비치의 전우이자 부하였고 전역한 후에는 막역한 선후배가 된 니콜라이 I. 모스크비텔레프(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Москвителев : 1926~2020) 퇴역 대령은 휴일에 그를 만났는데, 함께 거리를 거닐다가 갑작스런 뇌졸중으로 쓰러져 거리 한 복판에서 사망했다고 주장했으나, 안드레이의 시신은 부검되지 않았다. 안드레이 보로비치 공군 소장은 노보데비치녬 군인묘지에 묻혔고 그 무덤에 세워진 묘비와 청동 흉상이 전쟁 영웅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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