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이 타르콥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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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이 타르콥스키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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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베니스 국제 영화제
파일:goldenlion.png
황금사자상
제 25회
1961년


제 26회
1962년


제 26회
1963년

지난 해 마리앙바드에서

이반의 어린 시절
가족일기

도시위에 군림하는 손


역대 칸 영화제
파일:칸 영화제 로고.svg
심사위원특별그랑프리[1]
제24회
(1971년)


제25회
(1972년)


제26회
(1973년)

탈의
자니 총을 얻다

솔라리스

엄마와 창녀

제38회
(1985년)


제39회
(1986년)


제40회
(1987년)

버디

희생

월드 아파트
감독상
제 35회
(1982년)


제 36회
(1983년)


제 37회
(1984년)

위대한 피츠카랄도
(베르너 헤어조크)

노스텔지아 /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 로베르 브레송)

시골의 어느 하루
(베르트랑 타베르니에)


역대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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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 영화상
제40회
(1987년)


제41회
(1988년)


제42회
(1989년)



희생

바베트의 만찬




Андрей Тарковский
안드레이 타르콥스키|Andrei Tarkov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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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안드레이 아르세니예비치 타르콥스키
Андре́й Арсе́ньевич Тарко́вский[1]
출생
1932년 4월 4일
소련 러시아 SFSR 야로슬라블 주 자브라지예[2]
사망
1986년 12월 29일 (향년 54세)
프랑스 파리
국적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3]
직업
영화 감독, 작가, 연극연출가, 영화 이론가
수훈
레닌훈장 (1990년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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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기간
1958년 – 1986년
신체
171cm
종교
러시아 정교회[1]
묘소
프랑스 셍뜨쥬느비에브데부 러시아인 묘소
혈통
폴란드계 러시아인, 루마니아계 러시아인
부모
아버지 아르세니 타르콥스키[2](1907~1989)
어머니 마리아 이바노브나 비슈나코바
배우자
이르마 라우쉬(1957년 결혼 / 1970년 이혼)
레리사 타르코브스카야(1970년 결혼)
자녀
아들 아르세니 타르콥스키(1962년생)
아들 안드레이 타르콥스키(1970년생)
아들 알렉산드르 타르콥스키(1986년생)


1. 개요
2. 생애
3. 작품의 특징
4. 그에 대한 말들
5. 필모그래피
6. 기타
7.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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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활동한 소련영화 감독.

역사상 최고의 영화감독 중 한 명으로 평가 받으며, 특히 롱테이크를 통한 몽환적이고 명상적인 영상으로 유명하다.

불우한 가정 형편, 소련 정부의 지속적인 탄압, 54세로 요절한 짦은 생애 속에서도, 그리스도교적 주제의식을 담은 탁월한 걸작들을 배출해 '영화예술의 순교자'라고 불리우며,[4] 현대 러시아 영화를 논할 때 절대 빠지지 않는 감독 중 한 사람이다.


2. 생애[편집]


1932년 4월 4일, 자브라이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아르세니 타르콥스키 감독은 소련의 유명한 시인이며 모스크바 대학 교수였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 이바노브나 비슈나코바는 인쇄소 교정공이었다. 불행히도 1936년 두 사람은 별거에 들어갔고, 타르콥스키 감독은 그의 여동생 마리아와 함께 유년기를 보냈다. 이 시절, 그의 어머니는 레프 톨스토이의 책을 자주 읽어주셨다고 한다.

그는 여기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학교를 다녔고, 음악학교 과정도 함께 이수하였다. 3년간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고, 동양어 전문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공부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일본어에 특히 관심을 가졌으며, 고대 일본 시 양식인 하이쿠를 즐겨 읽었다. 그의 졸업 성적은 보통 수준이었으나, 문학과 음악에서만큼은 두각을 나타냈다.

1954년부터 1956년까지 시베리아에서 지질학을 공부했다. 그는 이 시기가 자신의 `단련의 시간'이었으며, 이때 `관찰의 훈련'을 쌓았다고 말한다. 1956년, 국립영화학교 VGIK 에 입학했으며, 1961년, 〈증기기관차와 바이올린〉을 졸업작품으로 낸다.

1962년, 첫 장편 데뷔작인 〈이반의 어린 시절〉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면서 소련 영화계의 주목 받는 신인감독이 되었으나, 〈안드레이 루블료프〉를 기점으로 소련 당국으로부터 '자본주의적이고 반동적인 예술성향을 가졌다'고 비판 받기 시작하며, 향후 활동에 큰 차질을 겪었다. (※ 자본주의 시장에선 기획 하나가 무산되면 다른 회사를 찾아다녀서라도 영화를 만들 수 있지만, 공산권에서는 영화 투자를 모두 정부에서 단독 승인하므로, 기획 자체를 엎어버리거나, 이미 엎어진 기획을 몇 년 뒤에 갑자기 승인하는 방식으로 영화 제작을 방해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타르콥스키는 감독 생활 대부분을 사실상 실업자 신세로 살았는데, 타르콥스키의 일기장을 출간한 책 《타르코프스키의 순교 일기》를 보면 당시 그의 괴로움을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다.[5]

1970년 9월 7일

좋은 시절이라면 나도 백만장자가 될 수 있을 텐데! 내가 만일 일 년에 영화 두 편씩을 찍을 수 있다면 1960년대부터 시작해서 이미 20편을 찍었을 것이다. 바보 같은 놈들이 결재를 하고 있는 판에 무슨 영화를 찍을 수 있단 말인가! (p.41)

1972년 2월 15일

나는 지쳤다. 4월이면 마흔 살이 된다. 이 나이에 접어들면서도 내 인생에는 안정과 평화가 없다. 푸시킨은 자유는 누리지 못했어도 그 대신 최소한 유토피아와 내적인 평화는 누렸었는데 나에게는 그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p.87)

1973년 1월 27일

요즘같이 산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국가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일을 해나갈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부럽다. 영화와 연극 부문을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부럽다. 돈으로 주는 보수에 대해서도 역시 말하고 싶지 않다. 최소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란 점이 부러울 뿐이다. (중략) 내가 바라는 것은 그저 일하는 것뿐이다. 더 이상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일! 작업! 이탈리아 언론으로부터 천재감독이라고 격찬을 받은 일이 있는데, 그가 일거리 없이 빈둥대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그로테스크하지 않은가? 솔직히 말해서 이런 현상은 권력을 잡은 중간치기들의 복수라고밖에는 볼 수 없다. 이 평범한 중간치기들은 예술가를 증오하며, 우리 소련의 지도층은 예외없이 이런 중간치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p.99)

1973년 1월 29일

아! 나와 5년 계약을 맺고자 하는 누군가를 찾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5년 동안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마음껏,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가져 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난 한 순간도 허비하지 않고 일곱 편의 영화는 확실히 만들어낼 수 있을 텐데. (p.101)

1973년 10월 20일

불길한 생각들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우리 문화에 낯설기 그지없다. 나는 우리 문화에 아무런 기여도 한 바 없다. 나는 가련한 무용지물이다. 그러나 유럽 또는 기타 나라에서 누가 소련 최고의 영화감독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되면 모두들 타르콥스키라고 한다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모두들 입을 다물고만 있다. 나라는 존재는 도대체가 없는 것이다. 한 점 얼룩에 불과할 뿐이다... (p.113)

《타르코프스키의 순교 일기》 김창우 역, 1997, 두레

지속적인 소련 당국의 압박과 그로 인한 생활고에 견디지 못한 타르콥스키는 결국 1984년, 소련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기자회견과 함께, 아내와 아들들을 남겨두고 서방으로 망명하였다.

1985년, 판정을 받은 타르콥스키 감독은 1986년 파리에서 사망하게 된다.[6] 생이별해야 했던 아들과는, 다행히도 소련 당국의 허가를 받아 투병생활 중이던 1986년 재회하였다.[7] 유작이 된 〈희생〉이 칸 영화제에서 수상할 때에는 아들이 대리수상 했다.[8]

장례식은 파리에 위치한 정교회 성당에서 치뤄졌으며,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가 참석해 평소 좋아했던 바하의 무반주 첼로를 연주했다고 한다. 로베르 브레송크리스 마르케도 참석했으며 알렉산드르 솔제니친도 왔다고.


3. 작품의 특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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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배출한 세계적인 영화감독이자, 미조구치 겐지 감독,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과 더불어 롱테이크의 상징으로 꼽히는 거장. 미조구치가 롱테이크를 통해 미학적 탐구를, 앙겔로풀로스가 정치적·역사적 문제를 다루었다면, 타르콥스키 감독은 종교적·철학적 문제을 주로 다루었다.

누벨바그를 비롯한 여러 감독들이 편집, 몽타주와 같은 기존 영화 문법에 집중해 영화미학을 발전시킨 반면, 타르콥스키는 시청각을 아우르는 총체적인 '시간'을 체험하는 것에 영화의 성질이 있다고 보았으며,[9] 그 독특한 미학을 통해 세계영화사에 한 획을 그었다.[10]

1990년대, 한국 극장가에 예술영화 붐이 일었을 때, 정성일의 《키노》와 함께 그 상징과도 같았던 존재. 물론 그의 작품들을 찬양하는 관객들도 많았던 반면, 취향에 맞지 않는 이들은 낯선 구성, 느린 전개, 잦은 롱테이크 등에 힘들어 하기도 했다.


4. 그에 대한 말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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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영화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건 타르콥스키 같은 감독 덕분일 것이다."

"타르콥스키는 저에게 있어 모든 감독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이자, 새로운 언어를 발명한 사람입니다. 영화의 본질에 맞는 말입니다. 그것이 삶을 반영으로, 삶을 꿈으로 포착하기 때문입니다."

잉마르 베리만[11]


"그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기적으로서의 영화 체험."

장뤽 고다르


"그의 특이한 감수성은 압도적이면서도 놀랍다. 거의 병적인 강도에 다다른다. 아마 지금 살아 있는 영화감독들 사이에서는 견줄 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난 타르콥스키의 모든 영화를 좋아한다. 나는 그의 성격과 모든 작품을 사랑한다. 그의 영화의 모든 컷은 그 자체로 멋진 이미지이다. 그러나 완성된 이미지는 그의 아이디어의 불완전한 성과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생각은 부분적으로만 실현된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극복해야 했다."

구로사와 아키라[12]


"안드레이 타르콥스키는 최근 몇 년간 가장 위대한 감독 중 한 명이었다."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13]


"타르콥스키의 작품은 나를 육체적 삶으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키고, 내가 본 가장 영적인 영화들이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14]


"러시아 영화사를 아주 과도하리만큼 단순하게 말한다면 그것은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이 있었고 그런 다음, 안드레이 타르콥스키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정성일



5. 필모그래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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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킬러 Убийцы (1956)

타르콥스키가 영화학교 학생 시절에 만든 단편 영화. 같은 학교에 다니던 두 친구와 함께 제작했으며,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단편소설을 토대로 만들었다. 타르콥스키가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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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데어 윌 비 노 리브 투데이 Сегодня увольнения не будет... (1959)

영화학교의 제안으로 만들게 된 단편으로, 전작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예산으로 제작되었다. 1959년 대독 승전일에 소련 중앙 텔레비전에서 연속으로 방영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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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증기기관차와 바이올린[15] Каток и скрипка (1961)

바이올린을 켜는 소년과 로드롤러를 모는 노동자 청년 사이의 우정을 다룬 단편영화. 졸업작품으로 만든 영화지만, 제작은 모스필름의 아동영화부에서 맡았다. 작품을 제출하고 가장 높은 등급의 점수를 받았다는 일화가 있다. 참 잘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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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의 어린 시절 Иваново детство (1962)

이반이라는 소년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독소전쟁 영화. 타르콥스키 특유의 느린 리듬이 만들어지기 전이라, 빠르고 긴장감 있는 전개가 돋보인다. 베니스 국제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 영화의 몇몇 대목을 두고 소련 당국과 이탈리아 공산당에서 비판을 가했는데, 실존주의자이자 공산주의자인 장폴 사르트르가 그에 대해 변론을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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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이 류블료프 Андрей Рублёв (1966)

15세기 러시아의 이콘 화가 '안드레이 류블료프'의 전기 영화. 말만 '전기 영화'지, 영화 전체가 거의 픽션이다. 총 9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으며, 삶과 현실과 예술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던진다. 사이트 앤 사운드 선정 역대 최고의 영화 27위,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선정작, 스크린 선정 20세기 100대 영화 3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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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라리스 Солярис (1972)

SF 심리 좀비 로맨스 예술영화. 렘 스타니스와프의 동명소설이 원작이며 그 특유의 우주적인 리듬으로 동유럽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몇 년 뒤 타르콥스키는 이 영화를 자신의 작품 중 최악으로 꼽았다(...) 사이트 앤 사운드 선정 역대 최고의 영화 154위,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선정작,스크린 선정 20세기 100대 영화 69위이다. 2002년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에 의해, 헐리우드에서 리메이크를 했으나.....비평과 흥행 모두 처참하게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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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Зеркало (1975)

영화 전체가 회상과 꿈으로 진행되는 타르콥스키의 역작. 이로 인해 촬영과 편집이 무척 현란한 작품이 되었으며, 당대 러시아의 상황에 중점을 두고 영화가 진행되기에 타국 관객들에게는 타르콥스키 영화 중 가장 난해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사이트 앤 사운드 선정 역대 최고의 영화 19위,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선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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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커 (잠입자) Сталкер (1979)

근미래 SF 영화. 제목 그대로 금지구역에 잠입하는 이야기. 타르콥스키의 시간 미학이 선명히 드러나는 작품이며, 타르콥스키도 이 작품을 만들며 확신을 느꼈는지 그의 일기장에서도 이 작품을 두고 자찬했다. 타르콥스키가 러시아에서 찍은 마지막 작품이다. 사이트 앤 사운드 선정 역대 최고의 영화 29위,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선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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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텔지아 Ностальгия (1983)

이탈리아 망명을 결심한 즈음에 만든 작품으로, 온갖 이론적 논쟁에 지쳐가던 유럽 영화계에 커다란 충격을 준 작품이다. 1983년 칸 영화제 공개 당시 극찬을 받으며 유력한 황금종려상 후보로 꼽혔지만, 영화제 소련 심사위원의 뒷공작으로 감독상을 받았다. 로베르 브레송과 공동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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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여정의 시간 Tempo di Viaggio (1983)

노스텔지아의 시나리오 작가인 토니노 게라[16]와 함께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내용의 다큐멘터리이며, 이 여행은 노스텔지아 제작의 토대가 되었다. "여행의 계절"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영문 제목은 Voyage in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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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 Offret (1986)

타르콥스키의 유작. 제목 그대로 '희생'에 대한 영화이며, 잉마르 베리만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만들어졌기에[17] 베리만의 느낌도 살짝 난다. 암 치료를 받으면서도 영화 후반작업을 진행하였다. 타르콥스키의 아들이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대리 수상했으며, 그로부터 몇 달 뒤 타르콥스키는 세상을 떠났다.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도 개봉하여, 당시 기준으로 11만명이라는 대흥행을 기록했다.


6. 기타[편집]


  • 생전에 로베르 브레송을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감독으로 꼽았다. 물론 브레송도 이를 알았으며, 말년에 서로 만남을 가지기도 했다고 한다. 이 인연 때문인지 브레송은 타르콥스키의 장례식에 얼굴을 비추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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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타르콥스키와 브레송[18][19]


1986년, 타르콥스키 장례식 뉴스 中[20]

  • 앞서 말했듯이 소련 당국의 탄압, 투자 난항, 순탄치 않은 가정사 등으로 인해 작품을 많이 남기질 못했는데, 타르콥스키 본인도 일찍이 이를 감지한 듯 하다. 타르콥스키가 남긴 일기장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973년 2월 16일

파스테르나크와 주고 받은 이야기가 있다. 내가 앞으로 영화를 몇 편이나 더 만들 것 같은가 라는 내 질문에 그는 네 편이라고 대답했었다. 나는 즉각 "겨우 네 편?"이라고 소리쳤고 그는 곧바로 "그러나 아주 좋은 네 편"이라고 말했었다. 네 편 중 한 편은 이미 만들었다.[21]

그것이 좋은 영화라고 불릴 만한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 내 작품을 사랑한다. (p.103)

1985년 12월 21일

매일 매일 폐암 증세가 악화된다. 심령술사 보리스 레오니도비치 파스테르나크의 예언대로 되는 것인가? 내가 네 편의 영화밖에 더 만들 수 없을 것이라고 했던 그의 예언 말이다. 그러나 그는 셈을 잘못 헤아렸다. 그는 내가 모두 일곱 편의 영화를 만들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계산에 넣지 말아야 할 나의 모스크바 영화학교 졸업작품인 〈증기기관차와 바이올린〉까지 함께 계산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의 말은 틀린 것이 아니다. (p.335)

《타르코프스키의 순교 일기》 김창우 역, 1997, 두레


  • 상단의 일기 내용에서 가리키는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과연 누구인지에 대해 논란이 조금 있는데, 같은 이름의 작가를 가리킨다고 하기엔 생몰연도가 맞지 않기 때문. (타르콥스키는 〈루블료프〉 촬영 이후 심령술사에게서 예언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작가 파스테르나크는 그보다 몇 년 앞서 죽었다) 일단 연구자들은 작가 파스테르나크가 맞다고 짐작하는데, 크리스 마르케의 다큐멘터리 〈안드레이 아르세네비치의 어떤 하루〉에서도 작가의 젊은 시절 사진을 가져오며 위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 비슷하게 당국으로부터 탄압을 받고 있었던 감독 세르게이 파라자노프와도 사적으로 친했다. 파라자노프가 날조된 혐의를 뒤집어쓰고 투옥당했을 때에는 타르콥스키가 당국에 탄원서를 보내기도 했지만, 당국이 무시해서 별 효과는 없었다(...) 어쨌든 그만큼 서로 아껴주던 사이였던 지라, 파라자노프가 1988년 뮌헨 영화제에서 타르콥스키를 추모하는 뜻에서 1분 간 침묵을 제안하기도 했다.[22]


타르콥스키를 추모하는 파라자노프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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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르콥스키는 SF 소설의 팬이 아니었으며, 대부분 "만화책"의 왜곡과 저속한 상업주의 때문에 그것을 무시했다.

  • 영화 〈터미네이터〉를 보고 미래비전과 인간운명의 관계를 예술의 경지로 밀어붙이고 있다고 말했다. # 잔인함과 수준 낮은 연기력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이 영화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 박평식이 존경하는 영화 감독 중 하나이며, 이동진이 역사상 가장 좋아하는 감독으로 꼽은 인물이다.# 특히 이동진의 경우, 타르콥스키를 자신의 평론가의 길을 걷게 해준 감독이라며 언급[23]했으며 〈안드레이 루블료프〉를 올타임 베스트 3편 중 하나로 선정했다.

  •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감독의 인터뷰 젊은 감독들에게 해주는 조언 #


  • 2021년 한국에서 그의 책 《시간의 각인》이 출간됐다. 자신의 영화 이론을 저술한 타르콥스키의 주저이자 영화사에서도 그 중요성에서 손꼽히는 책이다. 이 에세이는 러시아어로 작성되었지만 처음 출간된 것은 독일에서 발간된 독일어 역본인데, 국내에서도 《봉인된 시간 (분도출판사, 2005)》이라는 제목으로 독일어본을 중역한 책이 나왔다가 절판된 후, 세월이 흘러 러시아어 원본 번역으로 다시 나온 것이다.

  • 다만 여기서 제기된 의견에 따르면, 타르콥스키가 《시간의 각인》에서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의 〈이반 뇌제〉에 대해 언급한 대목에서 누락된 내용이 존재하고 이것은 영어 번역본pdf에서도 똑같이 누락되었지만, 러시아어 원문에는 있다는 점에서 이번 《시간의 각인》 번역본이 "러시아어 원본 번역"이 과연 맞는지 의심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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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러시아어 원문#을 보면, 해당 대목은 다음과 같이 비교할 수 있다. 러시아어 원문에서 볼드체로 강조된 것이 누락된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다.
There is not a single detail that is not permeated with the author's intent. (I have heard that Eisenstein himself once spoke ironically in a lecture of these hieroglyphics and arcane meanings: Ivan's armour has a picture of the sun and Kurbsky's of the moon, since the essence of Kurbsky is that he 'shines with reflected light'.) The characterisation, the harmonious composition of the images, the atmosphere, take Ivan the Terrible so close to the theatre (the musical theatre), that it almost ceases—in my own purely theoretical view—to be a cinematic work. ('Day-time opera', as Eisenstein once said of a colleague's film.) The films made by Eisenstein in the 'twenties, above all Potyomkin, were very different; they were at Andrey Rublyov Audrey Tarkovsky on the set with his principal adorn. 67 Andrcy Rublyov Boriska, the bell-caster (played by Kolya Burlyaev, who also had the title role in Ivan's Childhood), kneels before his patrons. least naturalistic visually.

Sculpting in time. Texas: University of Texas Press, 1987.
Фильм этот не только в своем целом представляет иероглиф, он сплошь состоит из иероглифов, крупных, мелких и мельчайших, в нем нет ни одной детали, которая не была бы пронизана авторским замыслом или умыслом. (Я слышал, что сам Эйзенштейн в одной из лекций даже иронизировал над этой иероглификой, над этими сокровенными смыслами: на доспехах Ивана изображено солнце, а на доспехах Курбского — луна, поскольку сущность Курбского в том, что он «светит отраженным светом»?..) Тем не менее картина эта удивительно сильна своим музыкально-ритмическим построением. Чередование монтажных кусков, смена планов, сочетание изображения и звука — все это разработано так тонко, так строго и так закономерно, как разрабатывает себя только музыка. Поэтому «Иван Грозный» и действует так убедительно: во всяком случае, на меня эта картина именно своим ритмом произвела совершенно ошеломляющее, завораживающее действие. А в построении характеров, в конструкции пластических образов, в атмосфере «Иван Грозный» настолько приближается к театру (к музыкальному театру), что даже перестает, с сугубо моей точки зрения, быть произведением кинематографа; фильмы, сделанные Эйзенштейном в 20-е годы, и прежде всего «Потемкин», были совсем иным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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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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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러시아식 이름이므로, 가운데 이름이 아버지 이름이다. 즉 아버지가 "아르세니 타르콥스키"[2]러시아 연방 코스트로마 주 자브라지예[3] 소련 성립 후에 태어나 소련 해체 전에 죽었다.[4] 애초에 타르콥스키도 창작활동에 온 열정을 쏟겠다는 다짐으로, 생전 자기 일기장 제목을 "순교록(Мартиролог)"이라고 지었다. 어느 정도 의도된 별명인 셈.[5] '러시아 영화' 문서를 봐도 알겠지만, 당시 소련 영화계는 할리우드에 맞먹을 정도로 흥행과 비평 모두 최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이럴 때 소련 당국이 직접 나서서 타르콥스키만 유독 괴롭혔으니 더더욱 억울하게 느꼈을 법하다.[6] 여기에 대해서는 한때 소련 당국이 암살한 게 아니냐는 음모론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스토커〉에 스태프로 참여했던 부인과 배우가 같은 폐암으로 사망했다는 점 때문에, 〈스토커〉를 촬영했던 장소 근처의 공장 탓이 아니겠느냐는 설도 있다.[7] 다큐멘터리 〈안드레이 아르세니예비치의 어떤 하루〉에 아들과 만나는 당시 모습이 담겨 있다.[8] 당시, 롤랑 조페 감독의 가편집 상영작 "미션"이 황금종려상을 받아 논란이었다.[9] 이에 걸맞게, 타르콥스키 감독이 쓴 책 제목도 "시간의 각인"이다.[10] 다만, 타르콥스키의 시간 미학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건 〈거울〉부터다. 이전 작들에선 그 낌새만 관찰될 뿐이다.[11] Title quote of 2003 Tarkovsky Festival Program, Pacific Film Archive[12] #[13] #[14] #[15] 원 제목은 〈로드롤러바이올린〉인데, 무슨 이유에선지 국내 영화제나 네이버 영화 등에선 〈증기기관차와 바이올린〉이라는 제목으로 표기되었다.[16] 이탈리아 출신의 시나리오 작가. 타르콥스키는 물론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테오 앙겔로풀로스, 페데리코 펠리니 등 거장들과 작업한 것으로 유명하다.[17] 영화 스태프와 촬영지를 통째로 빌려줬다.[18] 제36회 칸 영화제 감독상을 공동 수상하며 찍은 사진. 당시 수상자가 오슨 웰스였기에, 관련 사진을 찾다보면 웰스-브레송-타르콥스키 세 사람이 모두 찍힌 사진도 찾을 수 있다. 영화사에 다시 없을 전설의 트로이카[19] 황금종려상은 이마무라 쇼헤이의 〈나라야마 부시코〉. 이때 경쟁작들이 쟁쟁했던 지라, 수상결과를 두고 정치적 논쟁이 이는 등 뒷소문이 많았다.[20] 마지막에 잠깐 브레송과 그의 아내 밀렌이 포착된다.[21] 〈솔라리스〉 개봉 직후에 쓰여진 일기이므로, 〈솔라리스〉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22] (하단 영상 1분 24초부터) 침묵 후 정교회 성호경과 함께 아멘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23] 출처: 옥탑방의 문제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