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북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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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북성전투
安北城 戰鬪

시기
고종 19년(1231년) 1231년 10월 20일
장소
고려, 안북성 (現 평안남도 안주시)
원인
몽골의 1차 침입.
교전국
고려 파일:고려 의장기.svg
몽골
지휘관
채송년(蔡松年)
대집성(大集成)
이자성(李子晟)
이언문(李彦文)
정웅(鄭雄)
채식(蔡識)
푸타우
디쥬
탕꾸
왕릉쭈
일라
마이누
삐맨
병력
불명
10,000명 + @[1]
피해
3군(중앙군) 절반 이상 손실
피해 규모 불명
결과
몽골의 승리
영향
몽골군, 개경 포위
1. 동선역 전투 이후
3. 전투, 그리고 패배
4. 전투 결과
5. 기타
6. 같이보기



1. 동선역 전투 이후[편집]


동선역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몽골의 남로군은 살리타이가 이끄는 본대가 있는 안주까지 퇴각했다. 채송년, 이자성 등이 이끄는 고려 3군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안주의 안북성까지 진격을 했다. 이에 몽골군은 고려의 주력인 3군과 맞붙을 준비를 했고 1231년 9월 말, 안북성 인근으로 병력을 집중시켰다.

안북성은 고려의 북진 정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교통의 요지였다. 서경의 외곽 요새 기능도 담당했으며 이 때문에 고려 태조의 재위 때부터 중요시 했던 성이었다. 전투가 벌어지기전, 몽골군은 안북부 북쪽 40리에 위치했던 고을 박천을 박살내고 청천강을 건너 안북성 서쪽과 동북방 일대에 병력을 배치해 안북성을 포위했다.

고려 중앙군 3군의 총 사령관인 대장군 채송년은 몽골군의 핵심이 기병인 것이 알게 되었다. 그래서 성 밖으로 나가 싸우는 야전이 아니라 공성전을 대비할 것을 주장했다. 좁은 고개에서 싸워 이길 수 있었던 동선역 전투와 달리, 이 넓은 곳에서 싸운다면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 하며 자칫 잘못했다가는 완전히 패망할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채송년이 완전히 성에만 짱 박혀있자고 한 것도 아니였다. 채송년의 계획은 아직 몽골에게 점령되지 않은 곽주성(郭州城)과 힘을 합쳐 몽골군의 전면 공세를 막아낸 후, 몽골의 힘이 좀 빠지면 곽주성 병력이 몽골군의 퇴로를 막고,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안북성 병력이 성문을 열고 나가 공격을 하겠다는 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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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북성 전투 전황도출처

2. 공대 내부의 적[편집]


하지만 이러한 전략을 일부 강경파가 반대하고 나섰다. 특히 우군진주(右軍陣主)[2] 대집성(大集成)이 "우리 이미 야전에서 몽골군을 발랐음! 뭐가 무섭냐? 겁쟁이마냥 웅크리지말고 싸우자!"라며 강력하게 주장했다.

결국 그의 말에 따라 고려 3군은 성 밖에 나가 진을 치게 되었는데, 이 때 다른 진주(陣主)들과 지병마사(知兵馬事)는 성 안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이를 본 대집성은 병사들을 놔두고 혼자 성 안으로 들어갔다.

3. 전투, 그리고 패배[편집]


三軍乃與戰 蒙兵皆下馬 分隊成列 有騎兵突擊我右軍。

양 군이 맞붙자 몽고군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부대별로 대열을 지은 후 기병(騎兵)이 우리 우군(右軍) 쪽으로 돌격해 왔다.

고려사》 고종 18년 10월 기사

몽골군은 고려군이 성 밖에 진을 친 것을 보고 의아해하기도 했지만 넓은 곳에서는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고 공격을 감행했다. 결국 지도부가 없는 고려 3군은 갑작스레 들이 닥친 몽골군과 맞붙게 되었다. 그런데 몽골군이 말에서 모두 내려 부대별로 대열을 지은 후, 이를 어리둥절하게 쳐다 보던 고려 우군에게 말에서 내린 몽골군 사이로 기병들이 돌격해왔다. 유목 민족들의 전통적인 전략 중 하나였는데 이미 지도부가 없는 상황에서 고려군들은 우왕좌왕했고 이를 구원하려던 고려 중군도 혼란에 빠졌다.

결국 고려군은 황급히 성 안으로 도망치기 시작했고 몽골군은 이 기세를 타고 추격해 공격했다. 이 때문에 엄청나게 많은 사상자가 났고, 장군 이언문(李彦文), 정웅(鄭雄), 우군판관(右軍判官) 채식(蔡識) 등도 전사하였다.

4. 전투 결과[편집]


고려의 중앙군인 3군은 병력의 반 이상이 궤멸되어 전투를 수행할 능력을 상실했고, 이로 인해 고려는 개경으로 진격하는 몽골군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물론 북쪽의 귀주에서는 박서김경손의 활약으로 몽골의 북로군 1만이 귀주성에서 발이 묶여있었다. 하지만 몽골에겐 여전히 살리타이가 이끄는 본대 1만과 동선역 전투 패배 후 재정비한 남로군이 남아있었다. 살리타이는 극소수의 병력만 안북성에 주둔시켜 고려군의 동태를 살피게 했고 주요 병력들은 모두 개경으로 내려보냈다.

고려 고종은 이를 물리치기 위해 스님 3만명을 개경으로 불러모아 밥을 먹이며 기도를 시켰다.(親飯僧三萬 凡三日)[3] 개경에 도착한 몽골군은 흥왕사 등에 방화를 저지르며 약탈을 일삼았고, 중앙군이 궤멸된 이상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던 고려 조정은 결국 회안공 왕정을 보내 몽골과 강화 조약을 맺게 된다.

채송년이 대집성의 말을 무시하고 성 안에서 버티며 저항만 했더라도 고려는 몽골의 제1차 침입을 성공적으로 막았을 것이다.

5. 기타[편집]


고려사》에는 이날 귀주성에서 군민이 힘을 합쳐 몽고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고 있다는 기사 바로 아래에 안북성 전투의 패전 소식을 기록했다.

내부의 트롤링도 그렇고 여당전쟁기의 주필산 전투와 유사하게 흘러간 전투이다.

6. 같이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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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만명의 남로군 뿐 아니라 살리타이의 본대 병력도 일부 합류했었다.[2] 우군의 총 지휘관[3] 고려 중앙군의 주요 병력 충원 수단이 사찰이라서 유사시 상비군으로 쓸 의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