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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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안승락(독립운동가)1.png

1935년 11월 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초명
안승렬(安承烈)
이명
이주호(李周鎬)·배신술(裵申述)·안각(安角)·이민(李閔)
안용섭(安龍燮)·안갑술(安甲述)·안전(安田)·안청(安淸)
안창도(安昌道)·배갑술(裵甲述)·안경(眼鏡)
자전거(自轉車)·안승도(安承道)
자 / 호
석준(石準) / 서헌(曙軒)
본관
순흥 안씨[1]
출생
1913년[2] 4월 1일[3]
경상남도 마산부 상남면 퇴촌리
(현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퇴촌동)[4][5]
사망
1943년 8월 6일[6]
경기도 경성부
학력
모 공립보통학교 (졸업)
사립 경신학교 (중퇴)
사립 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제1부 (제적)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1154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안창대는 그의 6촌 재종형(再從兄)이다.

2. 생애[편집]


1913년 4월 1일 경상남도 마산부 상남면 퇴촌리의 평민 가정에서 아버지 안병현(安秉鉉, 1889. 2. 2 ~ 1943. 7. 26)[7]과 어머니 연안 김씨(? ~ 1917. 2. 20)[8] 사이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상경해 경기도 경성부 종로3정목(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3가)에 거주했다.

아버지 안병현은 1922년 7월 사립 숭광학교(崇廣學校)가 남면공립보통학교(현 창원상남초등학교)로 개편되자, 오종수(吳鍾洙)·이창봉(李昌琫)과 함께 당시 석경의(石敬義) 창원군수에 인도를 청원해 창원군 상남면 용지리(현 창원시 성산구 용지동)에 있던 옛 교사에 강습회가 설립되도록 하는 등 평소 민족교육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 사회주의 등 신사상에도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안승락 또한 일찍부터 사회주의 등 신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편, 그는 1928년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곧 상경해 사립 경신학교에 입학했다. 경신학교 재학 시절, 그는 여러 사회주의에 심취한 학우들과 교유하며 사회주의 문헌을 즐겨 읽으며 마침내 공산주의에 감화되었으나 병으로 중퇴하고 귀향했다. 1930년 9월 재차 상경해 사립 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제1부에 입학했다. 그러나 사상사건에 연루, 검거되었다가 곧 학교 당국에 의해 퇴학당했다.

이후 여러 차례 경기도 경성부와 고향을 오가다가 1932년 가을 상경해 아버지 안병현의 집에서 같이 살았다. 그 뒤 강귀남(姜貴男, 1911. 10. 25 ~ ?)[9]의 집에 기거하면서 강수구(姜壽求)와 강귀남의 남편 안종서(安鍾瑞) 등의 지도 아래 공산주의 이론을 깊이 연구했다.

그 뒤 1932년 '적위대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해 4월 1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불기소처분을 선고받고 출옥했다. 출옥한 후에는 경성부 동대문 일대에서 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하고 활동했다.

1933년 10월부터는 약 1개월간 경성부 광화문통(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체신국 앞, 삼청동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의원 입구에서부터 효자동 전차 종점 사이, 효자동 전차 종점 또는 조선총독부적선동 도로 등지에서 '조선공산당 재건 경성준비 그룹'을 지도하던 이재유와 4차례 만나 조선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사 및 그에 대한 구체적 비판, 조선에서의 공산주의 운동과 코민테른과의 관계, 운동통일의 방법, 공장 내 공산주의 조직 방법 등에 대해 토론했다. 이때 많은 점에서 의견의 대립을 보였으나 '룸펜적 생활을 벗어나 실천적 태도로써 자기 직장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이재유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이재유와 실천적 관계를 맺고자 철강 공장에 취직해 활동하기로 협의했다. 그 뒤 이재유의 지휘 아래 동대문·용산 지역을 중심으로 신사회 건설 및 노동자들의 권익 향상을 목표로 하는 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위해 힘을 쏟았다.

또한 1934년 4월 말부터 같은 해 5월 10일까지 경성부 명치정(현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 중국 음식점, 청엽정(현 용산구 청파동)의 아무개 집, 창신동, 광희동 등지에서 사회주의자 권영태(權榮台)를 만나 조선에서의 혁명의 성질, 현 시점에서의 조선 내 공산주의 운동의 정세, 경성부에서의 임무, 통일 전선의 일반적 의의, 현시점에서의 통일 전선의 의의, 통일 전선의 전술적 조직방법, 공산주의 운동의 기술 문제, 공산주의 관련 문서 배포 방법 등에 대한 견해를 듣고 이를 전폭적으로 지지해 협력하고자 했다. 이에 실천할 수단으로 룸펜적 생활을 청산하고 공장에 취직할 것을 협의했다.

1934년 10월에는 김윤생(金潤生)의 소개로 김희성(金熙星)을 알게 되었고, 김희성으로 하여금 당시 청엽정에 있던 이와무라(岩村) 제사(製絲)공장에 직공으로 위장 취업을 하도록 권유했다. 그 뒤 그해 11월 초부터 1935년 1월 말까지 봉래정(현 서울특별시 중구 봉래동) 염천교 등지에서 수십 차례 만나 이와무라 제사공장 내부 사정에 대한 조사 상황과 공장 내부에서의 활동 방침 등을 보고받고, 여자 직공 이병희(李丙禧)와 남자 직공 홍순형(洪淳逈)을 김희성에게 소개해준 뒤 동지로 포섭하는 일을 협의했다. 그리고 김희성 개인에게는 동료 직공들과 인간적 친교를 맺은 뒤 상대방에게 정신적·물질적으로 희생적인 태도를 취하게 하는 한편, 그 취미, 기호 등을 맞춰 일상적인 일에도 도움을 아끼지 않고 사람들의 호감을 사도록 노력할 것을 지시했다.

1934년 12월 말부터 1935년 5월 중순까지는 봉래정 염천교 남대문부 청간 사이의 길, 관수동(현 종로구 관수동) 관수교 부근, 입정정(현 중구 입정동) 80번지 이주몽(李柱夢)의 집, 창신동 안임균(安任均)의 집 등지에서 안임균과 여러 차례 만나 그에게 공산주의 운동에 종사하기 위해 공장 취직을 권유하고, 안승락 자신은 안임균의 취직을 알선해주기로 협의했다. 또 최경창과 남매지간으로 위장해 입정정 241번지에 집을 임대해 동거하게 하고, 이 집을 안승락 자신의 사무실로 쓰도록 협의했다. 또한 안임균에게 적색 노동조합의 의의 및 조직방법을 알려준 뒤 경성부 동대문 부근의 공장에서 적색 노동조합 결성에 힘을 쏟도록 지시했다.

이후 안임균은 서대문 밖 경성부 냉동(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냉천동) 4번지[10]에 있던 대창직물(大昌織物)에 직공으로 취직했고, 안임균이 같이 공장에서 활동할 동기를 소개해줄 것을 요구하자 동지 홍종례를 소개해주어 여공으로 공장에 잠입시켰다. 그리고 안임균에게 김희성처럼 동료 직공들과 잘 지내고 사람들의 호감을 사도록 노력하게 하고, 대창직물 여공들의 지도를 단독으로 전담하게 했다. 그 밖에 백명흠(白明欽)으로부터 공산주의 운동 자금을 제공받는 일을 협의했다.

한편, 1934년 12월 말부터 1935년 7월 중순까지는 청진동 청진책방, 입정정, 상반옥 동정 80번지, 교남동 155번지 등에서 이주몽과 수십 차례 만나 안승락 자신을 비롯한 동지들을 위한 아지트로 쓸 목적으로 방을 빌리게 하고, 이주몽에게 아래로부터의 통일전선이론에 기반해 먼저 공장 노동자들을 포섭하게 했다. 그리고 류해길(柳海吉, 1915. 3. 13 ~ ?)[11]과 부부생활을 위장해 동거하게 하며 빌린 방에 대해 근처에 사는 이웃들의 의심을 사지 않도록 당부했다. 또한 최경창과 남매지간으로 위장해 동거하면서 공산주의 이론을 지도하게 하는 한편, 근처 이웃의 의심을 일으키지 않도록 당부하기도 했다.

1935년 3월 말에는 입정정 80번지에서 류해길을 만나 이주몽과 부부로 위장해 이곳에서 동거하면서 공산주의 운동에 힘을 쏟을 것을 부탁하고 승낙을 받아냈다. 그해 4월 초에는 류해길에게 다옥정(현 중구 다동) 부근에 방을 빌려 안승락 자신에게 아지트로 제공해줄 것을 부탁해 또한 승낙을 받았다. 류해길은 이후 경성부 다옥정 43번지에 방을 빌려 안승락의 6촌 재종형(再從兄) 안창대 등과 함께 살았는데, 안승락은 같은 달 이 집에서 박인선(朴仁善)을 만나 안승락 자신이 속한 국제노선인 '콤그룹'에 참가하도록 권유해 승낙을 받았다. 그해 7월 말에는 이주몽을 안창대에게 소개해준 뒤 안창대에게 이주몽을 지도해줄 것을 권유해 협의를 이뤄냈다.

한편 1935년 3월 창신동 259번지 안임균의 집, 현저동(현 서대문구 현저동) 뒷산 인왕산 등지에서 백명흠과 만나 백명흠에게 공산주의 운동 자금을 제공해줄 것을 부탁해 그해 4월 행촌동(현 종로구 행촌동) 최경창의 집에서 백명흠으로부터 자금 700원을 제공받았다. 또한 6월 10일 송월동(현 종로구 송월동) 경성측후소(현 기상청서울관측소) 부근에서 백명흠을 만나 자금 제공을 재차 부탁했고, 6월 말 수원군 태장면 진안리(현 화성시 진안동) 경부선 병점역 앞에서 자금 200원을 더 제공받았다.

그 뒤 그는 1935년 5월 이후 운동자금 마련을 위해 종로 부근의 중앙의원(中央醫院)에 취직해 회계와 수금을 담당했다. 그해 9월 초에는 중앙의원에서 안창대를 비롯해 강탄구(姜彈求)·박인선과 만나 적색노동조합을 결성하기 까지 자신을 중심으로 준비하기로 협의했다.


파일:안승락(독립운동가)2.png

1935년 12월 3일, 경성부 서대문경찰서에서 촬영된 사진.

그러나 10월 경기도 경성부 서대문경찰서 고등과 소속 일본 경찰에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검거되었고, 12월 16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그리고 12월 26일 경성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되어 12월 28일 끝내 공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약 19개월 간의 예심을 거쳐 1937년 7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미결 구류일수 중 25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1943년 8월 6일 경성부에서 별세했다.

200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당초 창원시 의창구 퇴촌동에 안장되었다가 2009년 4월 3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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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직장공파(直長公派) 27세 승(承) 항렬.[2] 1935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909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3] 음력 2월 25일. 순흥안씨대동보 18권 471쪽에는 2월 23일생으로 오기되어 있다.[4] 순흥 안씨 직장공파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안창대·안용봉도 이 마을 출신이다.[5] 출생지인 마산부 상남면 퇴촌리 829번지(또는 820번지)는 사실 현재 의창구 퇴촌동이 아닌 의창구 사림동의 일부로 편입되어 있다. 1916년 지적원도에 따르면 퇴촌동 829번지 또는 820번지는 당시 모두 큰할아버지 안교우(安敎佑, 1855. 12. 14 ~ 1915. 1. 29)의 소유로 되어 있었다.[6] 음력 7월 6일.[7] 초명 안창호(安昌鎬), 이명 안준(安浚).[8] 김종순(金鍾淳)의 딸이다.[9] 1936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911년 2월 5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姜貴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이명은 김복순(金福順), 강경자(姜京子). 함경남도 홍원군 학천면 풍동리(현 홍원군 부상리)의 평민 가정 출신으로, 상경한 뒤에는 경기도 경성부 낙원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에 거주하면서 종업원으로 근무했다. 안승락과 안창대, 강수구(姜壽求), 김동식(金東植), 정칠성 등 공산주의 운동가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다.[10] 현재 이 위치에는 농민신문사들어서 있다.[11] 이명 류복동(柳福童). 경기도 안성군(현 안성시) 대덕면 진현리의 평민 가정 출신으로, 이후 함경남도 갑산군 혜산읍 혜산리(현 양강도 혜산시 혜산동), 경기도 경성부 익선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익선동) 등지에서 종업원으로 근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