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원왕

덤프버전 :

분류




[ 펼치기 · 접기 ]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동명성왕
유리명왕
대무신왕
민중왕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모본왕
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고국천왕
산상왕
동천왕
중천왕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서천왕
봉상왕
미천왕
고국원왕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소수림왕
고국양왕
광개토대왕
장수왕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문자명왕
안장왕
안원왕
양원왕
제25대
제26대
제27대
말대
평원왕
영양왕
영류왕
보장왕




안원왕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고구려 제23대 태왕
안원왕 | 安原王


파일:호남리 사신총.jpg

안원왕릉으로 추정되는 호남리 사신총 전경.
출생
(음력)

498년 1월 전후[1]
고구려 평양성
사망
(음력)

545년 3월[2][3] (향년 47세 전후)
고구려 평양성
능묘
안원(安原)? / 안강상(安岡上)?[4][5]
재위기간
(음력)

제23대 태왕
531년 5월 ~ 545년 3월 (13년 10개월)[6][7]

[ 펼치기 · 접기 ]
본관
횡성 고씨

보연(寶延) / 연(延)[1] / 보영(寶迎)[2]
부태왕
문자명왕
형제자매
고흥안
누이 고안학[3]
태왕후
정부인[4], 중부인[5], 소부인[6]
자녀
태자 고평성
왕자 1명
종교
불교
신장
173cm[7]
시호
안원왕(安原王)
곡향강상왕(鵠香岡上王)[8]
향강상왕(香岡上王)
안강상왕(安岡上王)
연호
연가(延嘉)(?)[9], 건흥(建興)(?)[10]


安原王 諱寶延 安藏王之弟也.

안원왕(安原王)의 이름은 보연(寶延)이며, 안장왕(安藏王)의 아우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안원왕-에 나오는 첫 문구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삼국사기》 기록
5. 대중매체에서
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고구려의 제23대 태왕.


2. 생애[편집]


문자명왕차남으로 후사가 없었던 형 안장왕으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았다.[8]일본서기》에 의하면 형인 안장왕이 시해를 당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를 근거로 고구려 내부의 혼란이 가속되어 폭발한 것으로 보기도 하며 혹자는 안원왕이 형 안장왕을 시해했다는 설을 제기하기도 하는데 기록의 부재로 근거는 빈약하다.[9] 체격이 매우 장대하여 키가 7척 5촌[10][11]이나 되었다고 하며 도량도 넓었다고 한다.

본격적인 쇠퇴기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지만 의외로 안원왕의 재위기간에는 큰 사건 없이 조용한 치세가 이어졌다. 오히려 중국에서 북위6진의 대란과 이주씨의 난으로 분열하고 화북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는데 고구려는 국경을 맞댄 동위와 화친했다. 한편 535년부터 자연재해가 연달아 일어나는데 535년 5월에 홍수, 10월에 지진, 12월에 우레가 쳤고, 전염병이 돌았다. 536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으며, 8월에 메뚜기 떼가 농사를 망쳤고, 537년 3월에는 기근까지 이어졌다. 이에 안원왕 본인이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위로하고 수습해 해결하기도 했다.

동위와 외교 관계를 맺는 한편 남량과도 교류를 유지하며 남북조 양면 외교 기조를 유지했다. 백제와는 투닥거렸는데, 540년 성왕이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해서 이를 물리치기도 했다.[12] 여기까지만 보면 기근에 시달렸지만 명군까지는 몰라도 안장왕이 회복시킨 고구려의 전성기를 어느 정도 유지한 제법 나쁘지 않은 군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선 행적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사실은 소수림왕고국양왕 때 강성하여 광개토대왕 때부터 전성기를 구가해 온 고구려가 안원왕의 재위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쇠락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13] 나제동맹에게 연달아 박살나며 망신을 제대로 당한 것은 아들 양원왕 때지만 전조는 안원왕 때부터 배경으로 짙게 깔려있었던 것. 무엇보다 후계 계승 문제가 아주 제대로 터지고 말았다.

이 해에 고려(高麗)에 대란(大亂)이 있었다. 많은 사람이 살해당하였다.【《백제본기》에는 “12월 갑오(20일)에 고려국의 세군(細群)과 추군(麁群)이 궁문에서 싸웠다. 북을 치면서 전투를 벌였다. 세군이 패하였으나 3일 동안 군사를 해산하지 않았다. 세군의 자손을 모두 사로잡아 죽였다. 무술(戊戌, 24일)에 코마노쿠니(狛國, 박국)[14]

누타노스오리코케(鵠香岡上王, 곡향강상왕)[15][16]가 죽었다(薨).”고 한다.】

《일본서기》 권38 〈긴메이 덴노〉 6년(545년) 고구려에서의 대란(大亂)


이 해에 고려(高麗)에 대란이 있었다. 무릇 싸우다 죽은 자가 2,000여 명이었다.【《백제본기》에서 “고려에서 정월 병오에 쿠노오리쿠쿠(中夫人, 중부인)의 아들을 왕으로 세웠다. 나이가 8살이었다. 코쿠오리코케(狛王, 박왕)에게는 3명의 오리쿠쿠(夫人, 부인)[17]

가 있었다. 마카리오리쿠쿠(正夫人, 정부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쿠노오리쿠쿠가 마카리요모(世子, 세자)를 낳았다. 그쪽의 외척이 추군(麁群)이었다. 시소오리쿠쿠(小夫人, 소부인)[18]도 아들을 낳았다. 그쪽의 외척은 세군(細群)이었다. 코쿠오리코케가 병에 걸려 위독해지자 세군과 추군이 각각 부인이 낳은 아들을 즉위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세군 측에서 죽은 자가 2,000여 명이었다.”고 한다.】

《일본서기》 권41 〈긴메이 덴노〉 7년(546년) 고구려에서의 대란(大亂)


안원왕의 제1왕후는 아들을 낳지 못했고, 결국 두 소왕후를 들였는데 공교롭게도 모두 아들을 1명씩 낳게 되었다. 결국 고구려의 외척추군 세력과 세군 세력이 자기네 소생의 왕자를 옹립하려고 대판 싸움을 벌이기에 이르렀고 추군 측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 결과 세군 측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이 족히 2,000명이 넘었다고 전한다. 이 기록은 《삼국사기》 등 한반도 측 사서에는 보이지 않으며 《백제본기》를 인용한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내용이다. 하지만 고구려의 왕권이 약화되고 국력이 쇠퇴하는 정황과 일치하기 때문에 다수의 국사학자들은 이 내용을 신뢰하고 있다. 더군다나 《삼국사기》 〈거칠부 열전〉에 의하면 551년 고구려의 혜량법사가 고구려를 정탐하러 온 신라거칠부에게

"지금 우리나라는 정사가 어지러워 멸망할 날이 멀지않았으니 귀국으로 데려가 주기를 바라오(我國政亂 滅亡無日 願致之貴域 於是)."

운운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상기한 정치적 혼란과 관련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여기까지만 보면 단순한 후계 문제로 인한 전쟁인 것 같지만 많은 학자들은 이 전쟁을 후계 전쟁을 빙자한 뿌리깊은 국내성계 vs 평양성계의 갈등이 터진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장수왕이 추진한 평양성 천도로 인해 전통적인 북방귀족+동부여계열 귀족들로 이루어진 국내파낙랑-대방계열 귀족+왕의 친위귀족으로 이루어진 평양파의 갈등이 발생하게 되었다. 당시 자세한 기록은 나오지 않지만 개로왕이 쓴 국서에 고구려가 내부적으로 큰 혼란을 겪고 있음을 암시하는 문장이 나오며 그 외 장수왕-문자명왕 시기 《삼국사기》뿐 아니라 《일본서기》, 중국 사서 등에도 조공 기록을 제외한 별다른 내용이 나오지 않는 공백기가 나타나는데 이를 근거로 거대한 내전이 벌어진 것 아니었냐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19]

거기에 문자명왕 시기에는 할아버지 대와 달리 점점 국제 사회에서 영향력을 잃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고구려 내부 귀족들의 불만이 점점 커짐 → 안원왕이 즉위하고 후계자 문제가 거하게 터지자 이것이 트리거가 되어 갈등이 폭발한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일본서기》에서 나온 세군을 국내파, 추군을 평양파로 보았을 때 이후 양원왕 대에 승리한 평양파가 정국을 주도하여 왕권이 약해졌다가 평원왕 대에 온달처럼 둘 모두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세력을 끌어들여 왕권을 강화했으며 이후 추군은 평원왕 대에 온달 등 친위세력의 성장으로 세력이 약해졌다가 온달의 죽음, 영양왕 대에 고구려-수 전쟁을 계기로 부활한다.

고구려는 이 때부터 사실 쇠락이 본격화되는데 이전까지는 군주를 도와 내각을 통할하는 국무총리, 즉 국상의 역할이 중요했지만 양원왕 이후로는 군주를 견제하는 국회의장, 즉 대대로/막리지가 중요해진다. 즉 왕권이 매우 약해졌다.

삼국사기》에는 그가 승하한 해가 545년 3월로 기록되어 있으나 《일본서기》 〈긴메이 덴노기〉에서는 545년 12월 24일 무술일에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 《양서》와 《남사》에서는 548년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다른 기록들과 3년의 차이가 난다. 선왕들의 연혁을 이용하여 계산해보면 안원왕도 평균적으로는 장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3. 기타[편집]


“원하옵건대 왕의 영혼이 도솔천(兜率天)으로 올라가 미륵(彌勒)을 뵙고 천손(天孫)이 함께 만나며, 모든 생명이 경사스러움을 입으소서.”

- 절골 유적에서 출토된 명문(銘文·새긴 글씨) 금동판 명문 중에서 출처


  • 1988년 6월 함경남도 신포시 오매리의 이른바 절골 유적에서 출토된 명문(銘文·새긴 글씨) 금동판이 외척 세력 간에 발생한 왕위 계승 분쟁 와중에 승하한 안원왕을 위한 추복(追福) 불탑의 탑지(塔誌)가 아니냐는 의견이 있다. 이 불탑을 봉헌한 측은 옛 동옥저(東沃沮) 지역의 유력 가문이었으나 왕위 계승 분쟁에서 패배한 세력일 것이라는게 학계의 추론이다. 특히 명문에는 탑을 건조한 내력과 함께 ‘○和三年 歲次 丙寅 二月二十六日’(○화 3년 세차 병인 2월 26일)이라는 작성 일자가 나와 있다. 여기서 ‘○和’라는 연호는 자획이 떨어져 나가 분명치 않으나 북한 측은 이를 ‘태화(太和)’로 판독하고, 고구려 양원왕(544년 또는 545년∼559년) 때인 546년 2월 26일에 금동판을 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명문 가운데 ‘천손’이라는 말은 중국의 천자(天子)나 일본의 천황(天皇)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그 이전까지 발해 문왕(文王)이 사용했던 ‘천손’이라는 단어가 이웃나라를 모방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금동판의 발견으로 발해 ‘천손’의 원류가 고구려임이 확인되었다.


4. 《삼국사기》 기록[편집]


삼국사기(三國史紀)

[ 본기(本紀) ]
1권 「신라 1권 (新羅 一)」
2권 「신라 2권 (新羅 二)」
박혁거세 · 박남해 · 박유리 · 석탈해 · 박파사 · 박지마 · 박일성
박아달라 · 석벌휴 · 석내해 · 석조분 · 석첨해 · 김미추 · 석유례 · 석기림 · 석흘해
3권 「신라 3권 (新羅 三)」
4권 「신라 4권 (新羅 四)」
5권 「신라 5권 (新羅 五)」
김내물 · 김실성 · 김눌지 · 김자비 · 김소지
김지대로 · 김원종 · 김삼맥종 · 김사륜 · 김백정
김덕만 · 김승만 · 김춘추
6-7권 「신라 6-7권 (新羅 六-七)」
8권 「신라 8권 (新羅 八)」
9권 「신라 9권 (新羅 九)」
김법민
김정명 · 김이홍 · 김융기
김승경 · 김헌영 · 김건영 · 김양상
10권 「신라 10권 (新羅 十)」
11권 「신라 11권 (新羅 十一)」
김경신 · 김준옹 · 김청명 · 김언승 · 김수종 · 김제융 · 김명 · 김우징
김경응 · 김의정 · 김응렴 · 김정 · 김황 · 김만
12권 「신라 12권 (新羅 十二)」
13권 「고구려 1권 (高句麗 一)」
14권 「고구려 2권 (高句麗 二)」
김요 · 박경휘 · 박승영 · 박위응 · 김부
고주몽 · 고유리
고무휼 · 고색주 · 고해우
15권 「고구려 3권 (高句麗 三)」
16권 「고구려 4권 (高句麗 四)」
17권 「고구려 5권 (高句麗 五)」
고궁 · 고수성
고백고 · 고남무 · 고연우
고우위거 · 고연불 · 고약로 · 고상부 · 고을불
18권 「고구려 6권 (高句麗 六)」
19권 「고구려 7권 (高句麗 七)」
20권 「고구려 8권 (高句麗 八)」
고사유 · 고구부 · 고이련 · 고담덕 · 고거련
고나운 · 고흥안 · 고보연 · 고평성 · 고양성
고원 · 고건무
21-22권 「고구려 9-10권 (高句麗 九-十)」
23권 「백제 1권 (百濟 一)」
고장
부여온조 · 부여다루 · 부여기루 · 부여개루 · 부여초고
24권 「백제 2권 (百濟 二)」
부여구수 · 부여사반 · 부여고이 · 부여책계 · 부여분서 · 부여비류 · 부여계 · 부여구 · 부여수 · 부여침류
25권 「백제 3권 (百濟 三)」
부여진사 · 부여아신 · 부여전지 · 부여구이신 · 부여비유 · 부여경사
26권 「백제 4권 (百濟 四)」
27권 「백제 5권 (百濟 五)」
28권 「백제 6권 (百濟 六)」
부여문주 · 부여삼근 · 부여모대 · 부여사마 · 부여명농
부여창 · 부여계 · 부여선 · 부여장
부여의자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 열전(列傳) ]
41-43권 「열전 1-3권」
44권 「열전 4권」
김유신 ,김원술 · 김윤중 · 김윤문 · 김암,
을지문덕 · 거칠부 · 거도 · 이사부 · 김인문 ,김양도, · 김양 ,김흔, · 흑치상지 · 장보고 · 정년 · 사다함
45권 「열전 5권」
46권 「열전 6권」
을파소 · 김후직 · 녹진 · 밀우 · 유유 · 명림답부 · 석우로 · 박제상 · 귀산 · 온달
강수 · 최치원 · 설총 · 최승우 · 최원위 · 김대문
47권 「열전 7권」
해론 · 소나 · 취도 · 눌최 · 설계두 · 김영윤 · 관창 · 김흠운 · 열기 · 비녕자 · 죽죽 · 필부 · 계백
48권 「열전 8권」
향덕 · 성각 · 실혜 · 물계자 · 백결선생 · 검군 · 김생 · 솔거 · 지은 · 설씨 · 도미 · 필부
49권 「열전 9권」
50권 「열전 10권」
창조리 · 연개소문
궁예 · 견훤




《삼국사기》 〈안원왕 본기〉
一年夏五月 안원왕이 즉위하다
二年春三月 북위가 왕을 책봉하다
二年夏四月 양에 조공하다
二年夏六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年冬十一月 양에 조공하다
三年春一月 왕자 평성이 태자가 되었다
三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四年 동위가 왕을 책봉하다
四年 동위에 조공하다
五年春二月 양에 조공하다
五年夏五月 남쪽에 수해가 발생하다
五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다
五年冬十二月 큰 전염병이 돌다
六年 큰 가뭄이 들어 백성을 구제하다
六年秋八月 병충해가 발생하다
六年秋八月 동위에 조공하다
七年春三月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다
七年冬十二月 동위에 조공하다
九年夏五月 동위에 조공하다
十年秋九月 백제의 침입을 물리치다
十年冬十月 겨울에 날씨가 온난하다
十年冬十二月 동위에 조공하다
十一年春三月 양에 조공하다
十二年春三月 큰 바람이 불다
十二年夏四月 우박이 내리다
十二年冬十二月 동위에 조공하다
十三年冬十一月 동위에 조공하다
十四年冬十一月 동위에 조공하다
十五年春三月 안원왕이 죽다


5. 대중매체에서[편집]


채널A의 <천 개의 비밀 어메이징 스토리>에서 안원왕이 태자 책봉을 중부인의 아들 혹은 소부인의 아들 중 하나로 정하는데 고민을 하던 중 중부인이 아들 양원왕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소부인과 싸우면서 그게 내전으로 번지는 스토리가 소개되었다.


6. 둘러보기[편집]




[ 펼치기 · 접기 ]
생애 및 활동
생애
관련 문서
호남리 사신총 | 금동연가칠년명여래입상
연호
연가









[ 펼치기 · 접기 ]
천제

하백






























해모수

유화






























부여/왕사

1대
추모성왕
































2대
유리명왕

비류

온조
백제/왕사


























고도절

고해명

왕녀

3대
대무신왕

4대
민중왕

고여진


























고호동

5대
모본왕

고재사


























고익





6대
태조대왕


























7대
차대왕

고막근

고막덕

8대
신대왕

고인고
























고추안

9대
고국천왕

고발기

10대
산상왕

고계수




























고박위거

11대
동천왕




























12대
중천왕

고예물

고사구
























13대
서천왕

고달가

고일우

고소발

공주
























14대
봉상왕

고돌고
































15대
미천왕
































16대
고국원왕

고무

고림




























17대
소수림왕

18대
고국양왕






























고강

19대
광개토태왕
































20대
장수태왕





고익


























고조다

고승우

공주

고승천


























21대
문자명태왕
































22대
안장태왕

23대
안원태왕

고안학






























24대
양원태왕

왕자






























25대
평원태왕






























26대
영양태왕

27대
영류태왕

평강공주

대양왕




























고환권



28대
보장태왕
























고복남

고임무

고덕남

고덕무

공주
































부흥
보덕왕
[범례]
실재 혈통 기준
세로선(│) 부자, 사위관계
가로선(─) 형제, 자매관계





[1] 출생년도가 501년이라는 위키 백과발 주장이 존재하나(지금은 위키 백과에서도 출생년도가 미상으로 나온다.), 그의 선대 생년 연혁을 보면 신빙성이 없다. 형인 안장왕이 498년 1월에 태자가 된 것을 보면 동생인 안원왕은 498년 1월 전후에 태어난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선대 연혁을 계산하면 5세기 후반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2] 증조할아버지 장수왕의 연혁을 보면 아버지 문자명왕도 거의 80세 전후까지 장수한 것으로 추정되고 나이 차가 제법 날 것으로 추정되는 형인 안장왕 역시 거의 60이 다 되어서 왕위를 물려받았고 10년 정도 살아 사망 당시에는 70세 전후일 가능성이 크기에, 안원왕 역시 형 안장왕의 나이 차가 제법 날 것을 감안하면 거의 60이 다 되어서 왕위를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크고 그 점을 감안하면 사망 당시는 70세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도 증조할아버지보다 먼저 돌아가신 할아버지보단 양호하다. 물론 늦둥이면 이 계산도 틀리긴 하지만 승하 당시 최소 60대 정도었을 것이다.[3] 《일본서기》 〈긴메이 덴노기〉에 따르면 545년 12월 24일 무술일에 사망했다고 하고, 《양서》와 《남사》에서는 548년에 사망했다고 나온다.[4] 이전 태왕들의 장지형 시호와 고국원왕의 사례처럼 原과 崗上이 무덤을 뜻하는 동의어일시[5] 호남리 사신총 추정[6]일본서기》에 의하면 14년 7개월.[7] 《양서》와 《남사》에서는 526년에 즉위하여 548년에 사망했다고 나온다. 이걸 따르면 22년 간 재위했다.[8] 앞서 전성기를 유지시킨 안장왕이 재위 12년만에 승하했을 당시 선대를 이용하여 보령을 계산해보면 꽤 노년의 나이였을 것으로 보이지만 웬일인지 후사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일본 측 기록에 고복귀라고 하는 안장왕의 아들이 등장하기는 한다. 참고로 형인 안장왕과는 나이 차가 제법 날 것으로 추정된다.[9]삼국사기》에는 형인 안장왕이 안원왕을 아꼈고, 사랑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물론 그것이 안원왕이 안장왕을 죽이지 않았다는 근거로 쓰기에는 부족하다.[10] 고구려척은 35.6cm인데 이 경우 거의 2.7m에 육박하는 거인이 된다. 아마 사람의 키를 잴 때는 고구려척이 아닌 후한시대 쓰인 척을 쓰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한나라의 척인 23cm을 쓸 경우 173cm 정도로 현실적인 수치가 나온다.#[11] 아니면 단순하게 생각하여 당시 삼국사기가 이런저런 사서를 인용했으니 후한시대 척이 쓰인 중국의 기록을 갖다 붙였을 수도 있다.[12] 양원왕 대의 일이지만 백제 성왕은 한강 유역을 되찾으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본격적인 공격이 아니라 사전 답사였던 듯하다.[13] 《일본서기》에 따르면 형 안장왕이 시해당했다고 한다. 다만 안장왕이 시해당했다는 기록은 《일본서기》 이외의 당대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고, 무엇보다 안원왕 말엽부터 혼란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무조건 시해당했다고 단정짓기도 어려운 실정이다.[14] 일본에서는 고구려를 '박(狛), '구'(駒)로 표기해놓고 '코마'(こま)라고 훈독했다. 이는 백제에서 부르던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고구려가 백제를 '백잔'이라는 멸칭으로 불렀던 것처럼 삼국은 서로를 오랑캐, 짐승 등 나쁜 의미로 부르곤 했다. 현대 일본에서는 '고려'(高麗)를 '코라이'(こうらい)라고 음독하지만, '코마신사'(高麗神社), '코마씨'(高麗氏)의 경우처럼 전통적인 부문에서는 관습적으로 '코마'라고 훈독하기도 한다.[15] 여기서 '곡향'은 곡림향화(鵠林香火)라는 불교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용어라고 한다. 곡림은 석가모니 부처가 열반에 들었던 사라쌍수가 있는 쿠시나가르의 숲을 가리키며, 석가모니 부처가 열반에 들던 날 숲의 나무들이 부처의 열반을 슬퍼하여 그만 하얗게 말라버렸고, 그 모습이 마치 고니떼와 같았다는 데서 고니 곡 자를 써서 '곡림'이라고 부른 것이다.[16] 이를 근거로 추군은 국내성에 정치적 기반을 두고 있었던 귀족 불교 세력, 세군은 평양성을 중심으로 한 신진 불교 세력이었다고 보는 의견이 있다. 6세기 이후 국왕 중심적인 불교가 쇠퇴하면서, 추군과 세군으로 나누어진 귀족 불교 세력 사이의 갈등을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한 상황이 닥치게 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17] 백제에서 왕후를 가리키던 말인 '어륙'(於陸)과 동일 계통의 단어임이 분명하다.[18] '시무(シム)'로 적혀있기도 하다. 여기에 근거해 '시소'(シソ)를 '신'(シン)의 오기로 보기도 한다. '시소'를 '신'의 오기로 보는 이유는 《일본서기》에 '간'(干)이 '칸'(カン)이 아닌 '카무'(カム)로 적혀있는 경우가 있고, 세군(細群)의 군(群)이 '군'(グン)이 아닌 '쿠무'(クム)로 적혀있는 경우가 있기에 '시무'(シム)에 대응되는 것은 '시소'(シソ)가 아니라 '신'(シン)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의 발음(撥音)으로 '시무'의 원형은 '신'으로 보인다.[19] 대표적으로 임용한 교수가 이 내용을 지지한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7 22:53:10에 나무위키 안원왕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