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안토니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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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라틴어: MARCVS ANTONIVS

파일:Marcus_Antonius_marble_bust_in_the_Vatican_Museums.jpg

출생
기원전 83년 1월 14일
로마 공화국 이탈리아 로마
사망
기원전 30년 8월 1일 (향년 53세)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배우자
파디아
소 안토니아 히브리다 (? / 기원전 47년 이혼)
풀비아 (기원전 46년 결혼 / 기원전 40년 사망)
소 옥타비아 (기원전 40년 결혼 / 기원전 32년 이혼)
클레오파트라 (기원전 32년 결혼)
자녀
안토니아 프리마,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안틸루스
율루스 안토니우스
대 안토니아
소 안토니아(율리아 안토니아)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
아버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크레티쿠스
어머니
율리아 안토니아
형제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종교
로마 다신교

1. 개요
2. 일생
2.1. 초기 행적
2.2. 카이사르 암살 이후
2.3. 내전의 양상
2.4. 몰락
3. 평가
4. 후손 이야기
5. 대중 매체에서



1. 개요[편집]


고대 로마군인이자 정치가. 영미권 명칭은 Marcus(Mark) Anthony(마커스(마크) 앤서니).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측근으로, 카이사르 사후 카이사르의 양자였던 옥타비아누스와의 2차 삼두정치를 통해 로마의 대권에 도전했지만 이어진 내전에서 끝내 패배하고 사라진 인물. 이집트의 파라오 클레오파트라의 연인으로도 유명했다.


2. 일생[편집]



2.1. 초기 행적[편집]


평민 출신[1]이지만, 그의 집안은 집정관과 감찰관을 지낸 조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 때부터 나름 명성을 쌓아올린 바 있었다.[2] 삼촌은 평이 좋지는 않았지만 집정관과 감찰관을 지낸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히브리다였다. 어머니는 유서깊은 귀족 가문인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 사람이며 외삼촌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부계 8촌인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이다. 가문의 역사가 다소 짧은 감이 있지만 부모 양쪽 모두 흠잡을 데 없는 명문가 자제였는데도, 매우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죽는 바람에 젊은 시절 매우 방황했다고 전해진다. 계집질, 도박, 술먹고 패싸움은 기본이고[3]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4]정치깡패로도, 로물루스와 레무스에게 젖을 줬다는 암늑대를 섬기는 컬트의 사제로도 활동했다고 한다.[5] 하지만, 양아버지인 렌툴루스 수라가 카틸리나 탄핵에 휘말려서 키케로에게 목숨을 잃고 돈을 갚을 길이 없자 수사학 등 공부도 할겸 나이 20세에 그리스로 도망친다. 본인의 군대 경력은 혈연 관계인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아니라, 훗날 적대하게 되는 폼페이우스막료였던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휘하에서 복무한 것으로 시작된다.[6] 유대 왕국과 이집트에서 기병 장교로 복무하여 여러 전투에 참가[7], 늘 선두에 서서 굉장한 용맹을 떨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을 시작하자 여기서 경력을 쌓으려고 했는지, 전출 신청을 내서 이후로는 카이사르 휘하에서 종군했다. 장교로서는 제법 훌륭한 경력을 쌓았고[8], 카이사르와 인척 관계이기도 해서 카이사르의 오른팔로 여겨졌다. 물론 안토니우스의 어머니 율리아 및 외숙부인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우리가 아는 그 카이사르의 8촌이고, 공통 조상이 카이사르의 고조부모 대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셈이니 그렇게 가까운 친족은 아니었다지만,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에는 친척이 귀했던 만큼[9] 안토니우스는 이 관계를 출세를 위해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 촌수로 따지면 카이사르 누나의 손자인 옥타비우스가 사실은 카이사르와 훨씬 가까웠다.

다만 그는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데키무스 브루투스처럼 오랫동안 카이사르 휘하에서 종군한 카이사르의 심복은 아니었으며, 처음에는 방대한 카이사르 참모집단 중 중요한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그는 갈리아 전쟁 막바지에서야 참전했으며, 그 당시 입지는 군단장급들 중 막내 정도였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신임을 받으며 2인자 격의 대접을 받았던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가 사망한 뒤 카이사르는 안토니우스를 쿠리오의 자리에 기용하였고, 동시에 안토니우스는 클로디우스, 쿠리오의 배우자였던 풀비아와 결혼하면서[10] 민중파 귀족자제들의 무리인 클로디우스 패거리의 세력을 이어받아 실력자로 부상하였다. 다시 말해 그는 한미한 가문 출신인 트레보니우스나 아예 외국인이었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발부스 같은 인물과는 달리 카이사르에게 전적으로 매인 심복이 아니었으며, 명문가 출신이자 카이사르를 지지하는 소장파 귀족 계파의 수장으로서 독자적인 세력을 갖고 있었다.

아무튼 카이사르를 지지했던 그는 BC 52년 재무관에 선출됐고, 이후 갈리아에서 복무한 뒤 BC 49년에는 카이사르의 도움으로 호민관으로 선출됐다. 호민관으로서[11] 카이사르의 권익을 지키려 애썼지만, 원로원 세력의 강력한 대응에 밀려 본국에서 도망친 뒤 카이사르의 '루비콘 도하'에 동참한 뒤 계속 카이사르 휘하에서 폼페이우스 군대와 싸웠다.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가 패하고 이집트에서 암살된 뒤, 안토니우스는 '기병대장'(부독재관)으로서 카이사르 대신 이탈리아의 통치를 맡았다. 하지만 이때 포룸 로마눔에서 벌어진 시민 시위에 군단병을 투입하여 800명의 시민 사상자가 생기는 등 실정을 하여[12] 카이사르의 실망을 샀고, 한동안 정치 경력에서 중용되지 않았다.

이후 카이사르와 2년간 전혀 왕래없이 지내다가 기원전 44년 카이사르의 다섯 번째 집정관 임기때 동료집정관직에 올랐다. 동료집정관 시절 안토니우스는 로마에 루페르칼리아 축제가 열리던 시기를 이용해 카이사르에게 왕관을 바쳤다. 이때 박수를 치는 사람도 있었지만[13], 대부분은 놀라서 말이 안나온다는 표정이었다. 즉시 카이사르는 시민들의 여론을 알아차리고 왕관을 안토니우스에게 돌려줬다. 마스터스 오브 로마에서는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눈밖에 났을 때 카이사르를 암살하려는 마음을 먹고 트레보니우스와 공모하고 있었으며, 이 퍼포먼스도 카이사르는 전혀 몰랐는데 안토니우스가 마치 카이사르가 시킨 것처럼 꾸며서 카이사르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키기 위한 짓이었다고 묘사했다.


2.2. 카이사르 암살 이후[편집]


BC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되었을 당시 카이사르와 공동으로 집정관 직에 있었기에 정계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처음에는 대규모 숙청을 피하기 위해서 로마에서 도망갔다가,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이 오히려 시민들의 분노를 피해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자기네들 집에 꽁꽁 숨어있다는 사실을 알자 안전을 확신하고 다시 로마로 돌아왔다. 당시 부독재관[14]이었던 레피두스가 군대를 이끌고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을 숙청하기 위해서 로마로 진입하자, 레피두스를 말리고 카이사르파와 카이사르 암살자들간에 화친을 주선했다. 화친의 주요 내용은 카이사르 암살자들이 카이사르의 개혁들을 인정하고, 카이사르파에 더 이상 손을 대지 않는 대신에 안토니우스의 정적이었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가 암살된 카이사르를 대신해서 대체 집정관으로 임명되는 걸 카이사르파가 인정하고, 카이사르 암살자들은 암살에 대한 죄에 대해서 용서를 받고 현재 가지고 있거나 카이사르가 생전에 임명해 둔 관직을 인정받는 것이다.[15] 당시 돈도, 군대도, 시민들의 지지조차 부족했던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은 이를 받아들인다.

그 뒤에 열어본 유언장에 카이사르가 자신을 후계자로 지목한 것이 아니라,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에 대해서 실망했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브루투스와 카이사르의 장례식을 같이 치르게 된다. 이 장례식에서 안토니우스는 시민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나눠주겠다는 카이사르가 유언을 발표하고, 카이사르의 공적을 찬양하는 요지의 연설을 하게 된다. 이 때문에 카이사르의 죽음에 감정적이 된 시민들이 폭발해서 로마 시내에 폭동이 일어났고, 안토니우스는 브루투스 및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에게 그들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면서 총독 자리를 하나씩 주고 쫓아낸다. 이 뒤에 독재관을 법적으로 없애고, 카이사르 베테랑 군인들에게 약속한 토지를 나눠주는 등 원로원과 카이사르파 양쪽에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서 노력하는 한편 카이사르의 군대를 이끌고 있던 레피두스와 협력하여 사실상 레피두스와 함께 로마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오르게 된다.[16][17][18]

하지만 원로원은 자신들을 카이사르파에게서 보호해준 안토니우스에게 호감을 가지면서도 그가 공화정을 위협할 새로운 권력자로 떠오르는 것을 극히 경계했고[19], 이런 움직임 중심에 안토니우스의 정적인 키케로가 있었다. 한편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에 돌아와서 안토니우스에게 카이사르의 유언대로 카이사르의 재산을 자신에게 상속해줄 것을 요구하면서 자신이 카이사르의 후계자임을 대중에게 어필하기 시작한다. 안토니우스가 집정관으로서 카이사르파와 원로원파의 화친을 주선하여 내전을 피했다는 점은 시민들에게 지지를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을 용서한 꼴이 되었으므로 이 때문에 카이사르파 내에서 법적인 후계자이자 양자인 옥타비아누스에 밀려 점점 지지를 잃어가게 된다. 심지어 로마 정규 군단 2개가 옥타비아누스에게 매수당해 현직 집정관인 안토니우스의 명령을 거부하고 관직도 없는 애송이 옥타비아누스를 따를 정도였다. 이 때문에 집정관 임기가 점점 끝나가던 안토니우스는 전임 집정관(proconsul)으로서 카이사르파 군대가 주둔하고 있던 갈리아 키살피나의 총독으로 임명되는 것을 원로원에게 요구했지만, 원로원은 현직 총독이자 카이사르 암살자들 중 한 명인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보호하기 위해서 거절했다. 그러자 안토니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로 직접 쳐들어가서 브루투스를 포위했다. 이를 구실로 키케로는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법을 어긴 국가의 적으로 맹렬하게 비난하고, 원로원을 움직여서 안토니우스를 진압하기 위한 군대를 움직인다. 하지만 이 군대는 카이사르의 군대였고 이 때문에 키케로는 자기가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생각한 카이사르의 후계자 젊은 옥타비아누스를 다른 두 집정관들과 함께 군대를 이끄는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원로원의 군대는 안토니우스의 군대를 무티나 내전에서 물리쳤지만, 그 과정에서 두 집정관들이 전부 죽게 된다.[20][21] 패배한 안토니우스는 갈리아 트란살피나로 남은 군대를 이끌고 도망친다.

이때 원로원은 당면한 위협인 안토니우스를 패퇴시켰으니 그 다음으로 위협이 될 옥타비아누스와 카이사르파를 정리하기 위해 카이사르 암살자들과 폼페이우스의 자식인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에게 군대를 배정하고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옥타비아누스 대신 집정관 군을 이끌도록 지시한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당연히 이 명령을 거부하고, 카이사르파가 대부분이었던 군대 또한 이 지시를 거부하며 옥타비아누스에게 붙는다. 한편, 갈리아 트란살피나로 도망갔던 안토니우스는 히스파니아와 갈리아에서 군대를 이끌고 도착한 레피두스와 합류했다. 입장이 유리해진 안토니우스는 레피두스를 로마에 사절로 보내서 카이사르파와 원로원파 사이의 화친을 주선해 봤으나 원로원은 키케로의 주장대로 화친을 거부한다. 한편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이 이끌고 있는 군의 정식 사령관이 되기 위해 집정관으로 임명해 줄 것을 로마에 요청했으나 이 역시 원로원이 거부한다. 결국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비밀 협상에 임하며 휘하 병력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했고, 아직 준비가 덜 됐고 설마 앞에 적인 안토니우스를 두고 옥타비아누스가 로마로 진격할 줄 몰랐던 원로원파는[23][24] 와해돼서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이 총독으로 정권을 잡은 그리스 및 동방으로 도망간다. 옥타비아누스는 19세의 나이로 카이사르의 조카 퀸투스 페디우스와 함께 집정관 직을 힘으로 따낸다. 로마가 대충 정리되자, 북쪽에서 내려오는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로마에서 올라온 옥타비아누스는 보노니아(오늘날의 볼로냐)에서 만나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하고 카이사르 군대를 하나로 뭉친다.

그 뒤에 로마에 남은 키케로와 카이사르 암살자들을 포함한 반대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한 뒤[25] 그리스에서 브루투스카시우스를 격파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필리피 전투이다.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제국 서방(로마, 갈리아, 에스파니아)의, 레피두스는 아프리카의, 그리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동방의 지배자로 군림한다.(해방자 내전)

흔히 제2차 삼두정치라고 하지만 사실상 이 시점이 '안토니우스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고 최대 경쟁자인 옥타비아누스와 상대적인 전력으로는 이때 가장 큰 격차를 보였다. 필리피 전투에서 군사적 능력이 낮은 옥타비아누스가 격파당한 불리한 전세를 안토니우스가 역전시켜서 군략가로써의 우위를 점했고, 그로 인해 노른자인 동방의 부와 함대 또한 보유하게 됐다. 또한 옥타비아누스가 자리잡은 서방은 사실상 레피두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을 비롯한 정적들이 건재한 상태라 옥타비아누스 입장에서는 상당히 전략적으로 불리했고 또한 이탈리아가 비록 옥타비아누스의 수중에 들어갔다고 하지만 아내 풀비아와 동생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를 필두로한 친 안토니우스 지지파들이 적지 않아서 옥타비아누스를 견제하기 딱 좋은 조건들이 많았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슬슬 성공에 취했는지 안주하기 시작했고 정적인 옥타비아누스를 강제할 완벽히 짜여진 판을 스스로 손을 놓아서 옥타비아누스의 성장을 방관했고 결국 전략적 마이너스를 허용하게 됐다.(페루시아 내전) 필리피 전투에서 고전을 한 '애송이' 옥타비아누스 또한 안토니우스의 방심을 키웠기도 했다. 물론 현실은 옥타비아누스는 예상밖으로 꾸준히 성장을 했지만...
여기서 안토니우스의 부하들 중 대부분은 카이사르파 출신이었기에 카이사르의 오른팔인 안토니우스와 카이사르의 양자인 옥타비우스가 직접 적대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만약 안토니우스가 폼페이우스와 손잡고 옥타비아누스를 처리하는 것은 그의 지지 기반 상당 부분을 이탈하게 만들 정치적인 우려가 있었긴 했다.

동방에서 남은 공화파 세력을 정리하고 행정 체계를 개편하는 한편 파르티아의 시리아 침입을 부하를 파견해 막아내기도 한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대립하자 이들의 평화 협정을 중재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클레오파트라에게 홀딱 빠진 것으로 추정되며[27], 옥타비아누스가 서방에서 착착 세력권을 확대해 나가는 가운데 이집트의 세력과 자기 군대의 힘을 이용해 파르티아 원정을 강행했으나, 기병대를 제공하기로 했던 아르메니아 왕이 전선에서 이탈하면서 기병 전력의 부재로 패배한다. 하지만 군사적으로 유능했기에, 치명적인 병력 손실은 보지 않고 퇴각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아르메니아 왕의 도주를 배신으로 여겨 아르메니아를 공격, 승리한다.

그 이후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개선식을 거행한다. 그런데 개선식은 로마의 수호신들에게 승리의 영광을 바치는 행사였다. 다른 나라, 다른 도시에서 한다는 것은 로마가 아니라 다른 나라나 도시의 신들에게 영광을 바친다는 의미였고, 이는 로마의 수호신들을 배신하는 행위였다. 이건 로마 시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거기에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누이 옥타비아와 결혼한 상태였는데 그녀와 이혼하고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했으며, 이 개선식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자신이 낳은 아이[28]에게 동방을, 카이사리온에게 이탈리아와 서방의 통치권을 물려주겠다고 선언한다. 즉 클레오파트라의 아이들이 로마 전역을 지배해야 한다는 말. 이에 전 로마 시민들이 크게 분노했다.[29] 거기다 유언장에는 사후 로마가 아니라 이집트의 항구 도시 알렉산드리아에 묻어달라고 했는데, 옥타비아누스가 이걸 까발리자 그냥 매국노 겸 배신자로 확정.[30] 옥타비아누스는 이 행동들을 명분으로 원로원에서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한다.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와 결별을 선고하고 새로운 동맹으로 클레오파트라를 맞이한 것이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그가 옥타비아누스와 권력을 양분할 생각이 아니었던 이상 이는 예정된 수순이었을 텐데 다만 새로운 동맹의 대상이 클레오파트라였을 뿐이라는 것. 클레오파트라는 왕가를 신으로 모시는 이집트의 여왕이며, 당시 이집트는 이탈리아와 로마에 곡물을 수출할 정도로 꽤나 비옥한 곡창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를 통해 이집트를 얻는다는 것은, 옥타비아누스와의 내전 도중 기대할 만한 군사력과 곡물 지원, 이탈리아에 대한 압박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이 된다. 클레오파트라에게도 이 동맹은 나쁘지 않았을 터인데, 안토니우스는 경험 많은 장군이며 로마 제국의 절반을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관계는 이해가 맞아 떨어진 적절한 비즈니스 관계라고 볼 여지가 있으므로, 단순히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의 매력에 빠져 호구짓을 한 것이 아니었다는 주장도 할 수 있다.

또한, 안토니우스가 보유한 군사력으로 이집트를 점령하고 부를 빼앗는 건 당시 이집트의 빈약한 군사력을 감안하면 얼마든지 가능했으나 이집트는 로마의 보호국이었으니 당연히 옥타비아누스에게 도움을 요청할 테고, 안토니우스의 행동은 로마의 적으로 간주되는 짓인 만큼 옥타비아누스가 군대를 보내지 않을 리가 없다. 이런 경우 강제 점령당한 이집트인들이 안토니우스에 좋게 협력할 리 없으니, 반발 저지를 위해서도, 물자 약탈을 위해서도 안토니우스는 상당한 병력을 빼두어야 한다. 이런 불리한 상황하에 옥타비아누스군과 싸우느니 이집트 여왕과 동맹을 맺고 든든한 후방 지원과 보급지를 확보하는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한건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를 적대하고 동방의 지배자가 되려는 전제하에서는 이집트와의 동맹은 필요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설령 그걸 감안한다고 해도 너무 많은 것을 클레오파트라에게 퍼줬다는 것은 사실인지라[31]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의 매력에 빠졌다는 점은 역사학자들이 통설로 대부분 인정하는 바이다. 당장 이전의 클레오파트라의 동맹이었던 카이사르와 비교해 봐도, 카이사르 역시 클레오파트라와 동맹 관계긴 했지만 적어도 그는 로마의 지배권의 끝자락조차도 이집트에 허락하지 않았고 서로 철저하게 이득만을[32] 위한 관계였다. 물론 거기에 사랑의 감정도 있긴 했지만 카이사르는 공사 구분은 확실히 해 두어서 클레오파트라가 낳은 아들 카이사리온을 절대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다.[33][34][35]

아무튼 안토니우스 - 클레오파트라의 동맹에서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막대한 재정 지원을 얻을 수 있었고,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강력한 군사력을 얻을 수 있었으며, 둘 다 공동 통치자로서 동지중해 전역을 지배할 수 있었다. 이집트로서는 동지중해의 맹주가 되는 이점이 있었다. 이집트 왕가의 충분한 재정 지원과 20만에 달하는 안토니우스군의 병력으로 옥타비아누스에 비해 물질적으로는 확실히 우위에 설 수 있었으니 안토니우스 입장에서는 충분히 얻을게 많았는지라 여기까지만 보면 이 둘의 동맹은 나름 합리적이긴 한데... 당연한 말이지만 이건 모두 로마의 대손해이다. 안토니우스군은 바로 로마군이고, 이집트와 동지중해는 물론 로마의 지배권이었다. 로마에 대한 매국, 또는 반역이나 마찬가지이니 로마 시민들이 안토니우스를 적대시하는건 당연하고 무엇보다 안토니우스 휘하 로마 병사들 역시 마뜩잖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것이 안토니우스의 파멸을 가져온다.

안토니우스의 이런 행동들은 당시 로마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로마 등에 있던 안토니우스의 지지자들은 처음에는 "미치거나 클레오파트라의 주술에 걸리지 않고서야 설마 그럴 리가?", "이건 조작이다"라며 믿지 않았으나, 모두 사실이었다. 어쨌든 안토니우스가 국가의 적으로 선포되자 그의 지지자들, 그해의 집정관들과 원로원의 약 1/3 정도가 로마를 떠나 안토니우스가 있는 동방으로 왔다. 또 사실 여부가 밝혀지자 안토니우스의 지지율은 상당히 떨어졌다. 그래도 강력한 군사력과 군사적 능력으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36], 악티움 해전에서 패하면서 '안토니우스의 군사력도 이제 별 거 없다'라는 이미지가 생기자마자 지지 세력, 중립을 지키고 있던 세력 대부분이 옥타비아누스에게 붙어버린다.


2.3. 내전의 양상[편집]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열린 아르메니아 원정 개선식에서 자신과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나은 첫째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에게 아르메니아와 메디아, 파르티아를, 딸인 셀레네에게 키레나이카와 리비아를, 막내 아들인 필라델포스에게 시리아와 킬리키아를 준다는 발표를 한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리온에게 다스리던 이집트의 왕과 함께 왕 중의 왕이라는 칭호를 바친다.(알렉산드리아 영토분할령) 이를 지도로 보자면 다음과 같다.

파일:external/www.bible-history.com/map_donations_of_alexandria.jpg

다시 말해,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동지중해 속국, 동맹국 할 것 없이 모조리 클레오파트라와 자기 자식들에게 준다는 말이었다. 당시 로마인이라면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한 일임에 틀림없으나, 이는 옥타비아누스가 조작한 게 아니라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개선식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한 내용이다. 그리고 이 내용은 이집트에서 교역하던 상인들을 통해 지중해 전 지역에 알려지게 된다. 여기에 더해 안토니우스는 로마를 동서로 분할하자는 제안을 옥타비아누스에게 한다.

파일:external/www.fleur-de-coin.com/cleopatra.jpg
[37]

여기에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리온이 카이사르의 유일한 후계자라고 발표했으므로 사실상 옥타비아누스가 장악한 서지중해도 카이사르의 유산으로 보아 상속권을 주장할 수도 있게 되는 셈이었다. 옥타비아누스가 한 일은 안토니우스의 이 발표로 로마인들이 경악한 가운데 안토니우스의 유언을 공개한 것 정도로, 이는 이미 안토니우스에 대한 로마인들의 반감이 활활 타오르는 와중에 장작을 더한 정도일 뿐이다. 동지중해 영토 전체의 지배권과 안토니우스의 무덤 위치 중 어느 것이 국가 대사인지는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물론 옥타비아누스는 당장 원로원들을 모아서 2차 삼두정치를 백지화, 안토니우스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안토니우스가 발표한 사항이 전부 무효라고 공표한 뒤 로마 양분 제안도 단칼에 거절한다.

문제는 안토니우스의 병력은 로마 시민권을 지닌 로마군이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뜬금없이 본 적도 없는 이집트 여왕을 위해 로마의 영토를 갖다 바치기 위해 조국을 상대로 칼을 들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졸지에 아무 명분도 없는 전쟁에 끼어들어 반역자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으니 사기가 오를래야 오를 수가 없었다. 이들을 묶어둘 수 있는 건 이집트 왕가의 재물 뿐이었는데 로마군이 원래부터 돈만 주면 누구하고도 싸우는 용병 집단도 아니고, 이래서야 목숨 걸고 싸울 맛이 날 리가 없었다. 그 결과 탈영병이 속출했고, 심지어 10년 넘게 안토니우스를 따르던 장군인 퀸투스 델리우스는 악티움 해전 직전에 안토니우스의 전쟁 계획까지 홀랑 들고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했다. 사실 악티움 해전의 패배는 안토니우스군에게 치명적인 병력 손실을 가져온 것은 아니라서, 비록 일패도지했더라도 안토니우스군의 주력은 건재했고 자금도 충분히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패배는 안토니우스군에 그나마 남아있던 사기마저 박살냈다는 것이 문제였고,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동방 헬레니즘 세계의 유력자들과 시민, 주둔군 대부분이 옥타비아누스 쪽에 붙는 결과를 낳았다. 그 결과 안토니우스 휘하 19개 군단과 1만 2천이나 되는 기병이 단체로 탈영, 혹은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했다. 병력만이 아니라 지휘관들조차 속속 투항하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안토니우스가 아니라 전쟁의 신이라 해도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38]

여담으로 똑같은 내전이라도 안토니우스군은 카이사르의 내전 당시의 폼페이우스군과 비교되는데, 폼페이우스군에는 로마 공화정의 재건이라는 충분한 명분이 있었고, 다수의 원로원마저 지지했던 상황이었다.[39] 그래서 폼페이우스군은 파르살루스 전투(BC 48년)에서 대참패를 당한 이후에도 쉽게 사기가 꺾이지 않아 북아프리카에서(탑수스 전투, BC 46년), 스페인에서(문다 전투, BC 45년) 다시 패배하고도 포기하지 않고 시칠리아까지 건너가 끈질기게 저항했다. 이들의 저항이 최종적으로 막을 내린 것은 파르살루스 전투 패배에서 12년이나 지난 기원전 36년(나우로쿠스 해전)의 일이었다.[40] 여기에 반해 안토니우스군은 악티움 해전을 겪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산산히 와해되고 만다. 안토니우스가 절망해 빠져 자살한 것은 악티움 해전 패배로부터 1년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명분 없는 전쟁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를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고, 안토니우스의 상황 오판이 심각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2.4. 몰락[편집]


안토니우스는 이탈리아 진출을 시도했고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그리스에서 저지하려 하면서[41] 두 사람은 그리스에서 충돌했는데 이것이 악티움 해전이다. 그리고 여기서 안토니우스는 전염병, 심복들의 배신으로 인한 전략 누출, 군사적 능력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클레오파트라의 패착[42]이라는 3가지의 악재가 겹치면서 처참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그래도 클레오파트라를 위시한 이집트의 막강한 경제력으로 패배를 만회할 수 있을 거라고 여긴 것같지만, 악티움 해전의 패배를 기점으로 가뜩이나 사기가 바닥이었던 안토니우스 휘하의 로마 군인들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전향하면서 순식간에 와해되었다.

그럼에도 안토니우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옥타비아누스에게 장남 안틸루스를 사절로 보내 은퇴한 뒤 아테네에서 소시민으로 살겠다는 협상을 제시하고, 클레오파트라도 이집트의 왕위에서 물러날테니 카이사리온을 비롯한 자식들의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회유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두 사람 모두에게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았다. 휘하의 병사들이 계속해서 탈영하여 옥타비아누스에게 전향하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안토니우스는 다시 군대를 소집해 옥타비아누스의 주력 군과 회전을 치뤘지만 이 싸움에서마저 패배했다. 결국 배를 타고 달아나던 도중 클레오파트라가 죽었다는 비보(혹은 오보)를 듣고 자결을 시도했다. 허나 클레오파트라는 죽지 않았고 빈사 상태의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머물던 영묘로 이송되어 그녀의 곁에서 숨을 거뒀다. 모든 걸 잃은 처지에서 그나마 사랑한 여인의 품 속에서 죽었으니 약간의 위안일지도.

그러나 이 위안도 잠시 클레오파트라는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영묘에서 나와 궁전으로 향하면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탄원하고자 했지만, 그가 자신을 로마에서 개최될 개선식에 전리품으로 내세울 계획이라는 게 분명해지자 결국 모든 희망을 잃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자살하여 생을 마감했다. 이집트에 도착한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까지 죽자 안토니우스의 유언대로 두 사람을 함께 나란히 묻어줬다. 이후 안토니우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유일한 후계자라고 내세운 카이사리온은 옥타비아누스의 로마군에게 허무하게 살해당했고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이 유일한 카이사르의 아들임을 천명하였다. 또한 로마와 그 속주의 통치권을 주겠다고 호언장담하던 클레오파트라와의 자녀들[43]도 옥타비아누스의 개선식에 강제 참석해 온갖 수치를 당하며[44] 로마로 끌려갔다.[45]


3. 평가[편집]


안토니우스의 군사적 재능은 상당한 편이었다. 다만 무모할정도의 대담함과 선두에 서서 무쌍을 찍는 용맹함이 '군단장'까지는 더할 나위 없는 인물이었지만, 모든 상황을 냉정히 아울러야 하는 '총사령관'으로서는 단점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이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 대한 지나친 평가 절하라고 할 수도 있다. 최후의 승자가 옥타비아누스인 만큼 해외 및 국내의 다양한 매체를 통해 다혈질적인 군사광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기록 상으로 보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도 꽤나 절묘하다고 할 만한 정치적 수완을 여러 번 발휘했다. 물론 '황제의 덕목'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에서 카이사르의 안목은 정확했을지 모르지만.[46] 다음은 안토니우스가 싸움밖에 모르는 호전적인 인물이 아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 몇 가지.
  •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다음 레피두스가 군대를 이끌고 로마에 진입했을 때, 오히려 레피두스를 말리고 카이사르파와 원로원파의 화친을 주선했다. 옥타비아누스의 카이사르 군대에 패배해서 갈리아 트란살피나로 퇴각한 다음 레피두스의 군대와 합류해서 전황이 유리해졌는데도 불구하고, 원로원과 화친을 맺기 위해서 최선을 다 했다. 카이사르 암살 이후 상황을 보면 안토니우스는 될 수 있으면 카이사르파 원로원파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며 대화로 풀어나갈려고 했지 무력을 사용한 건 오로지 원로원이 그가 원했던 갈리아 키살피나의 총독이 되는 걸 반대했을 때뿐이다. 그조차도 원로원을 상대로 직접 칼을 휘두른게 아니라, 총독 자리를 주는 것을 거부한 암살자 브루투스를 상대로 했다.
  •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친구이자 보좌관으로 암살 직전까지 신뢰받았으며, 카이사르의 장례식에 참석한 로마인들을 연설 하나로 오열에 빠뜨리고[47] 암살자들을 도망치게 할 정도로 대단한 달변가이기도 했다.[48]
  • 최후의 승자가 옥타비아누스, 즉 아우구스투스이기에 저평가되는 점이기도 하지만 2차 삼두정치 결성 역시 안토니우스의 정치적 안목이 아주 허술했다고 볼 수는 없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 카이사르 사망 당시 18세에 불과한 풋내기가 후계자로 지목된 것은 오랫동안 카이사르 밑에서 종군하면서 군사적 업적을 쌓은 안토니우스의 심사를 충분히 뒤틀 만한 일이었지만 그는 과감하게 옥타비아누스와 손을 잡음으로써 수도 로마에 앉아 국가 정통성이란 명분을 손에 쥐고 힘을 모으고 있던 원로원파들을 손쉽게 몰아낼 수 있었다. 이후 삼두의 영역 분할에서도 당대 헬레니즘 문화와 부의 중심지였던 동방 속주를 손에 넣어 훗날 옥타비아누스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격파하고 레피두스 휘하의 군을 흡수하기 전까지 삼두 중 독보적인 위치에 서게 된다.[49]

하지만 안토니우스가 결국에는 몰락하게 된 이유 역시 정치적 실책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실수들이었다. 군사적 재능이 상당히 빈약해서 전투 국면에서는 평민 출신의 아그리파에게 의존했던 옥타비아누스와 달리 안토니우스는 일찍이 카이사르 휘하에서 군사적 역량을 인정받은 당대의 손꼽히는 군 지휘관이었고 최후의 결전으로 회자되는 악티움 해전 직후까지도 안토니우스의 지상 전력은 옥타비아누스의 전력보다 우세했다.[50] 안토니우스 본인은 악티움 해전의 패전이 자신과 옥타비아누스의 대결 구도에 약간의 균열을 만들었을 뿐이고, 이 정도의 기울어짐은 자신의 군사적 우세로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으리라 여겼겠지만 안토니우스의 정치적 자폭은 그 균열을 폭발적으로 확산시켰고 결국엔 안토니우스가 가지고 있던 이점을 순식간에 모조리 꺾어버리게 된다.
  • 이탈리아 본토와 수도 로마에서의 지지 기반 확보에 지극히도 소홀했다. 삼두의 영토 나눠먹기 이후 안토니우스는 동방으로 떠났지만 원로원파를 절단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안토니우스의 정치적 영향력은 여전히 강력했으며, 그의 아내 풀비아는 로마에 남아 안토니우스 지지 세력들을 결집하여 반 옥타비아누스 활동을 주도했고 이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상당한 압박이 되었다. 결국 이는 옥타비아누스와 그에 대항하여 풀비아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51]가 이끄는 이탈리아 내 안토니우스 지지 세력 간의 내전으로 번졌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안토니우스는 이를 지원하지 않고 방관했다. 결국 옥타비아누스의 반격으로 안토니우스 지지파들은 진압되고 풀비아는 자살한다.[52][53]
  • 2차 삼두정치를 결성하여 카이사르의 정당한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와 손을 잡은 것까지는 좋았지만, 삼두의 영토 분할 이후 사실상 정적이 된 옥타비아누스의 세력 확대를 방관했다. 도리어 옥타비아누스가 지중해의 제해권과 그를 바탕으로 한 수도 로마의 식량 공급줄을 손에 쥐고 있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대립할 때 120척에 달하는 선단을 지원하기까지 한다.[54] 상술한 풀비아와 옥타비아누스의 내전 역시 안토니우스가 휘하 병력과 함께 신속히 이탈리아로 움직일 마음만 먹었다면 옥타비아누스를 끝장낼 절호의 기회였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로마 제정으로 가는 분수령이 된 악티움 해전에서조차 적전 도주를 한 클레오파트라의 뒤를 따라 백중세의 전황에 놓인 부하들을 외면하고 전장에서 이탈함으로써 사실상 옥타비아누스의 승리를 방관한다.[55]
  • 로마의 신들에게 승리의 영광을 바치는 행사인 개선식을 로마가 아닌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치루는 것도 모자라서 그 영광의 자리에서 다른 나라의 여왕이 낳은 아이들에게 로마와 그 속주의 통치권을 나누어주겠다는 공개 선언을 한 것은 동시대의 로마인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정치적 자살 행위에 가깝다[56]고 할 것이다. 여기에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이 죽거든 로마가 아닌 알렉산드리아에 묻어달라는 내용이 적힌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손에 넣어 공개함으로써 불에 기름을 부었다. 이는 당시 로마 법에 저촉되는 행위였고, 야비하다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는 파렴치한 짓이었지만 당대 전쟁 영웅이자 최고 권력자 중 한 사람이 심정적으로 나라에 등을 돌렸다는 충격적인 내용은 옥타비아누스의 불법적인 행동 따위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게 만들 정도의 파급력이 있었다.[57]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와의 내전 동안 안토니우스를 애송이로 여기며 그 능력을 얕보았다고 전해진다.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를 상대로 지구전을 구사하며 싸우지 않고 있을 때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군대를 공격하려고 했고, 카이사르는 번번이 이를 막으러 달려왔다. 당시 폼페이우스 입장에서 애송이가 아닌 장군이 몇이나 있었겠냐만.

결론은 능력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 하필이면 상대가 옥타비아누스였다는 것이다. 사실 안토니우스의 가장 큰 문제는 카이사르 사후 혼란해진 로마를 수습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안토니우스는 삼두정 시절 중요한 이탈리아 정세는 죄다 자기보다 나이도 어린 옥타비아누스에게 미뤄놓고 자기는 부유한 동방에서 탱자탱자 놀기만 했고 그 옥타비아누스가 위기를 넘기고 세력을 확대해도 그러든가 말든가 방치했다. 이런 점을 봤을 때 옥타비아누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없었더라도 과연 그 혼자서 로마를 다스리고 옥타비아누스처럼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 지는 매우 의심스럽다.[58]


4. 후손 이야기[편집]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사후, 안토니우스 가문은 마르쿠스라는 이름을 한동안 쓸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법안 때문이었다. 이 법안을 제정한 사람은 키케로의 아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였는데 플루타르코스는 이에 "이를 통해 하늘은 키케로의 집안이 안토니우스에게 최후의 벌을 내리도록 하였다."라고 평하였다. 재미있게도 안토니우스 가문은 옥타비아누스가 최후의 승리를 거머쥔 다음에도 멸문당하지 않았다. 대가 끊긴 건 키케로 일가였고, 키케로 일가 소멸한 뒤 안토니우스의 증손자 혹은 고손자부터 안토니우스 직계는 마르쿠스를 합법적으로 사용했다. 더 재미있게 된 것은 안토니우스의 피를 이은 후손들이 아우구스투스, 아그리파 등 내전 승리 세력들의 비호 아래 옥타비아누스의 직계후손들이 되어, 네로가 자살할 때까지 로마 제국을 지배했다는 점이다. 여기에 더해 안토니우스가 내전기 당시 아나톨리아 여기저기에 심어 놓은 클리엔테스 후손들은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 고르디아누스 3세의 예처럼 200년 뒤부터 로마 심장부인 원로원에 진출해 3세기부터 안토니우스 가문의 이름을 달고 제위까지 차지했다.

안토니우스의 어머니인 율리아는 카이사르의 친가 팔촌이었고, 안토니우스 본인도 카이사르파의 중요한 구심점 중 하나였다. 때문에 카이사르의 양자지명이 있었을 뿐 카이사르와의 혈연관계가 강한 것도 아니고, 출신 본가와 입양된 율리우스 가문 모두 로마를 쥐락펴락하는 명문대가 출신도 아니었던 아우구스투스 입장에서는 내전 승리 후에도 안토니우스와 유가족들을 무시할 처지가 못 됐다. 더욱이 아우구스투스는 안토니우스의 아내가 누나 소 옥타비아이고,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와의 결혼 전 얻은 아들 중 율루스가 옥타비아의 입양아들로 일찍이 옥타비아 손에서 친아들처럼 자랐던 터라 마냥 안토니우스 자녀들을 내칠 상황도 못 되었다.

더 재밌는 것은 옥타비아누스로 불린 시절부터 아우구스투스라는 사내가, 계산적이고 냉정한 이미지와 달리 본인과 누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피가 흐른 아이들에게 무척 따뜻하고 그들을 친혈육으로 여겼던 부분일 것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아우구스투스가 어릴적 시골에서 자라 여느 로마귀족들과 다르게 핏줄에 대한 집착, 입양으로 맺어진 양자와 누나의 자녀들에 대한 사랑이 지나쳤기 때문인데 이는 안토니우스 자녀들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실제 주인공이 되고 카이사르 가문 사람들로 불린 이유가 됐다. 물론, 안토니우스가 사후에도 그 영향력이 무시할 처지가 안 되어 정치적으로도 유용한 이유도 있다.

어쨌든 옥타비아누스로 불린 시절, 아우구스투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내팽개친 소 옥타비아와 그녀의 두 딸, 풀비아와의 사이에서 얻어 옥타비아가 양자로 삼은 안토니우스의 아들 율루스를 거둬들여 본인의 친혈육과 두 양자 티베리우스, 드루수스 형제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을 주고 보호해줬다. 물론 계산적이고 냉정한 이미지와는 달리 가족들에게는 나름대로 따뜻했던 아우구스투스 본인에게는 고아가 된 안토니우스의 자녀들을 거둬가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풀비아 태생의 장남 안틸루스는 안토니우스와 함께 내전에 참여했기 때문에 이집트에서 살해당했지만, 풀비아 태생의 아들 중 옥타비아가 거둬 양자로 삼은 율루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 태생의 두 안토니아(대 안토니아, 소 안토니아)는 황족의 일원이 됐다.

율루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가 첫 남편과의 사이에서 얻은 딸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와 결혼해, 아우구스투스의 도움 아래 집정관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율루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외동딸 율리아와 불륜을 벌여, 아우구스투스의 분노를 샀다. 그런데 그 불륜이라는 것은 남녀 사이의 바람이 아닌, 율리아가 아들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즉위하길 기다리면서, 정치에 적극 개입하려고 한 시도가 아우구스투스에게 진노를 산 일이었다. 이때 율리아는 율루스 안토니우스에게 접근해, 자신을 도와주고 내 편에 서준다면 원하는 자리를 주겠다는 일종의 스폰서 제안을 했다. 이렇게 되자 율리아와 남녀 사이의 불륜 관계를 맺던 전직 법무관 출신 원로원 의원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59] 등은 추방형 정도에 그쳤음에도, 남녀 사이의 육체적 불륜은 하지 않은 율루스 안토니우스는 홀로 반역재판까지 회부돼 유죄 선고 후 사형 선고를 받게 된다. 이는 아우구스투스 입장에서 볼 때, 문자 그대로 배신이었기 때문에, 당사자 율루스 안토니우스는 본인의 잘못과 양어머니이자 장모 옥타비아의 명예를 실추시킴을 유서에 적고 자살한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율루스 안토니우스의 아내인 자신의 조카 대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와 그 자녀들을 용서하고 이때부터 이들을 보호해준다. 물론, 표면상으로는 자신이 한때 정적이었던 안토니우스 아들을 거뒀더니 배신을 했다는 식으로 말하긴 했다. 그렇지만 아우구스투스는 본인 측근, 원로원 안에서 안토니우스에게 여전히 이를 갈고 있던 사람들이 연좌제로 안토니우스 가문의 씨를 말리라고 함에도, 듣는 시늉만 하고 그대로 무시했다.

이런 이유로 아우구스투스는 누나의 외손자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손자 율루스 안토니우스,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손녀 율라 안토니아의 재산을 뺏지도, 목숨을 거두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사회적 파장을 고려해 당시 살아있던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를, 혹시 모를 궁중 음모에서 떨어트릴 목적으로 오늘날의 프랑스 마르세유인 그리스 식민도시 마실리아로 유학보내고 율라 안토니아에 대한 공식 의견을 밝히지 않고 처분에 대해 언급도 못 내게 했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결혼해 잘 살고 있던 율라 안토니아를 배려해, 그녀에 대한 공격을 입도 못 떼게 했다. 이어 안토니우스 가문을 잇게 된 루키우스를 보호하기 위해 "나이가 어려 추방형에 처해야 하나, 본인 잘못도 없고 아이의 미래도 중요하니 유학보내는 것으로 참작하겠다"고 밝히면서, 루키우스 안토니우스가 안토니우스 가문을 이었음에도 자신의 본가 옥타비우스 가문에도 이중으로 속하고 이를 잇고 있다는 식으로 사면의 명분까지 만들어줬다. 이는 복귀한 티베리우스 역시 비슷했는데, 전처 율리아에게 분노와 딱한 감정을 동시에 느꼈던 이상으로 율루스 안토니우스 숙청을 애석하게 여긴 나머지 티베리우스 역시 그와 그 일가를 보호해줬다. 그래서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는 아내와 마실리아로 건너가 로마법, 수사학을 공부해 학자로 살다가 죽었다. 이후 이야기에 대해 타키투스는, 서기 25년 안토니우스의 손자 루키우스가 향년 45세에 죽었을 때 아우구스투스의 양자 티베리우스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가 소 옥타비아의 손자이고 황족이므로 로마에서 묻혀야 된다며 그 시신을 아우구스투스 본가인 옥타비우스 가문 묘지에 묻힐 수 있게 배려해줬다고 한다.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는 이름 미상의 아내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뒀는데, 이 사람의 아들, 손자, 증손자 모두 갈리아에서 태어났다가 이탈리아로 귀국해 살았다고 한다. 이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안토니우스의 증손자로 베스파시아누스를 도와 플라비우스 왕조가 창건되는데 힘을 보탠 원로원 의원이자 장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는 과거 안토니우스에게 시민권을 받은 갈리아인의 후손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인물로도 유명한데,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의 아들 혹은 손자로, 티베리우스가 키케로 일가의 요구로 아우구스투스가 통과시켜준 "안토니우스 가문은 앞으로 남자 아이 이름으로 마르쿠스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조치를 무효화하면서 안토니우스의 이름을 제대로 물려받은 안토니우스 가문의 직계 남성이다. 그는 이름 그대로 젊을 적부터 자신의 조상 안토니우스를 쏙 빼닮기로 유명했다. 그는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일가가 갈리아에서 생활할 당시 툴루즈에서 태어났다가 로마로 건너왔다고 한다. 그런데 등장 당시부터 직계 조상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후손답게 일찍부터 안토니우스를 쏙 빼닮아 체격이 당당하고, 용장으로 유명했다. 그는 네로 시대때 원로원 의원으로 있다가, 발레리우스 파비아누스의 유언장을 조작했다는 누명을 쓰고 추방됐다가 갈바 즉위 후 복직했다고 한다. 따라서 방계 황족임에도 이후부터는 네로에게 등을 돌렸는데, 장군으로 활동했던 시절부터 용장이면서도 심리전과 협상에 능했다. 그래서 동시대 사람 타키투스는 그를 "행동에 있어서는 용감하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고, 다른 사람들을 심사장에 끌어들이는데 영리하며, 내란과 반란의 시기에 강력하고 탐욕스럽고 사치스러워, 평화기에는 나쁜 시민이 되고 전시에는 멸시받을 수 없는 휼륭한 위인이 된다"고 평했다. 이는 안토니우스가 살아생전 들은 평가와 상당히 유사한 평가인데, 어쨌든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는 이런 능력을 선보이며 비텔리우스를 제거하고 혼란에 빠진 로마시 치안을 정리해 베스파시아누스가 입성하기 전 평화를 가져왔고, 도미티아누스 시대까지 살았다.

안토니우스가 소 옥타비아와의 사이에서 얻은 안토니아 자매는 모두 그리스 아테네에서 태어났다. 자매는 이름이 율리아 안토니아로 똑같아, 첫째는 대 안토니아, 둘째는 소 안토니아로 불린다. 대 안토니아는 기원전 22년 명문 귀족 가문의 자제이자 장군이며 전차 기수로 엄청난 인기를 누린, 젊은 귀족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혼인했다. 그녀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다섯 자녀를 얻었는데, 딸 도미티아는 결혼하기 전에 요절했고 장남 루키우스 역시 결혼 전 요절해 후사를 남기지 못했다. 다만, 1남 2녀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살아남았다. 헌데 안토니우스의 외손자가 되는 대 안토니아의 두 아들 루키우스, 그나이우스는 막장들이 많은 로마 귀족 상류층 내에서도 최악 수준의 망나니로 유명해, 부모와 안토니우스 이름에 먹칠했다. 이중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외사촌형 게르마니쿠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외손녀 대 아그리피나와의 사이에서 낳은 장녀 소 아그리피나와 결혼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라는 아들을 한명 뒀는데, 그가 바로 네로 황제이다.

소 안토니아는 상당한 미녀였음에도 안토니우스의 딸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조카답게 상당한 여장부로 유명했다. 그녀는 아주 어릴적부터 정숙하고 교양이 풍부하면서도 용감해,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는 그녀를 무척 아꼈다. 그래서 리비아 드루실라는 남편 아우구스투스를 매일 설득해, 자신이 첫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차남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대 드루수스)와 그녀를 일찍이 약혼시킨 뒤 결혼시켰다. 소 안토니아는 다른 또래 로마 귀부인들과 달리 공화정 초기의 전통적인 로마, 이탈리아 어머니 같은 성격을 갖고 있어, 남편 드루수스를 따라 험지에서 아이를 낳고 직접 젖을 물리고 훈육을 담당해 큰 존경을 받았다. 그녀는 아우구스투스의 양자 드루수스와의 사이에서 다섯 자녀를 뒀는데, 이중 3명은 성인 이후에도 살아남았고 일찍부터 아우구스투스 부부와 원로원, 민중들에게 카이사르 사람들로 불리며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 부부의 직계혈육으로 공인됐다. 소 안토니아의 장남 게르마니쿠스, 장녀 리빌라, 차남 클라우디우스가 그들인데, 3대 황제 칼리굴라는 게르마니쿠스의 아들이고,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안토니우스의 외손자이므로 네로까지 포함하면 안토니우스의 피를 이은 세 사람이 모두 아우구스투스의 법적 손자, 증손자, 고손자로 제위에 오른 기염을 토했다.

클레오파트라 태생의 두 아들의 운명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딸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는 카이사르에게 반기를 들었다 살해당한 유바 1세의 아들인 유바 2세와 결혼하여 마우레타니아의 왕비가 되었다. 셀레네는 유바와의 사이에서 프톨레마이오스를 뒀는데, 프톨레마이오스는 부국강병을 추진하면서 자기 인맥을 이용해 로마 제국의 내정에 깊숙이 개입했다가 로마 제국을 자극한다.[60] 그래서 이를 갈고 있던 칼리굴라 황제과 원로원은 사이가 껄끄러웠음에도 공동작전을 세운다. 그 결과, 서기 40년 황제가 프라이토리아니를 이용해 로마를 방문한 프톨레마이오스를 암살하고, 원로원은 황제에게 암살 성공 소식을 듣자마자 마우레타니아 왕국을 둘로 쪼개 로마 속주로 편입시킨다.


5. 대중 매체에서[편집]



(1953년 영화에서 묘사된 안토니우스 연설 장면 - 13:16초부터 24분 51초까지)

1953년 영화 줄리어스 시저에서 말론 브란도가 연기하였다.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열연한 1960년대 할리우드 영화 <클레오파트라>(1963)에서 리처드 버튼이 안토니우스 역으로 출연했다, 두 사람은 이 작품에 함께 출연한 것을 계기로 결혼하게 되었다.


(1970년 영화에서 묘사된 안토니우스 연설 장면)

1970년대 영화 율리우스 시저에서 찰턴 헤스턴이 연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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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ROME에서는 영국인 배우 제임스 퓨어포이가 역을 맡았는데 정말 유들유들하면서 호탕한 섹스에 중독된[61] 인물로 나온다. 귀족답지 않게 행동거지가 심각하게 경박한 면이 있어[62] 이상주의적이고 금욕적인 브루투스나 괴물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만사를 이성과 논리로만 바라보는 옥타비아누스와는 사이가 나쁜 편. 그러나 능력은 나름 있고 특히 보레누스가 가정 파탄으로 폐인이 되어버리자 의무감을 심어주어 각성시킬 정도로 사람을 다루는 능력은 수준급이다.

여기서는 역사와는 다르게 옥타비아누스의 어머니인 아티아[63]와 연인 관계로, 옥타비아누스와도 이 덕분에 남남 이상의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카이사르 사망 후에는 보호자와 같은 입장이 된다. 그러나 한 수 위의 정치적 식견으로 안토니우스의 통제를 따르지 않는 옥타비아누스와 감정의 골이 생기다 나중에는 폭력을 휘두르고 적으로 돌아서버린다.

드라마에서는 무력이나 인망을 얻는 면에서는 나름 유능한 군사 지휘관으로 나오지만[64] 상당히 무능한 정치인으로 묘사된다. 옥타비아누스와 사이가 틀어진 것도 아티아와의 관계도 관계지만, 나름 정치적인 야망을 가지고 있어서 카이사르 사후, 법적으로 자신의 것이 된 재산을 이용해 정계에 진출하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핑계를 대면서 카이사르의 유산을 옥타비아누스에게 양도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도 크다. 거기다 카이사르가 죽고 자유를 주었던 노예인 포스카에게 정당한 자유를 주는 일을 차일피일 미루거나 뒤가 구린 일을 같이 할 때 그 몫을 떼어주는 등 당연한 일을 해주지 않아 결국 중요한 순간마다 포스카에게 배신당한다.[65][66]

거기에 더해 공과 사를 전혀 가리지 못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군단기 밑에서 우호우호!하면서 지나가는 양치기 여자를 겁탈하는 따위로(...) 영 규율이 제대로 안 선 모습을 보이는 건 기본이고, 카이사르나 옥타비아누스 등 시종일관 남의 돈을 횡령할 궁리만 한다.

카이사르 사후 잠시 옥타비아누스와 동맹을 맺고 브루투스 일파를 박살낸 뒤 삼두정치의 일원이 되지만, 클레오파트라에게 간 뒤 그녀에게 홀려 완전히 자포자기한 것처럼 행동한다. 이 때 정신나간 사람처럼 행동하는 그를 보고 보레누스는 "당신은 영혼에 깊은 병이 들었다. 나도 같은 병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안다"라고 평하고 안토니우스는 몹시 씁쓸해한다. 이후 역사대로 악티움 해전에서 아그리파에게 발린 뒤 사망한다. 작중에서는 옥타비아누스의 전략을 대충 파악했지만 클레오파트라에게 홀려서 미처 대비를 못하고 역사처럼 클레오파트라의 사망 소식을 듣자 보레누스에게 칼을 들게 한 후 스스로 몸에 꽂아넣어 자살한다.

여담이지만, 화가 나면 오히려 볼에 키스를 하거나 가까이 다가와 친한 척 속삭이는 방법으로 사람을 위협하는 일이 많다. 분명 애정어린 몸짓이지만 가장 공포를 자아내는 장면들인데, 이탈리아 마피아가 사람을 협박하는 제스처를 모방한 것 같다.

대하 역사소설 마스터스 오브 로마에서는 7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주인공. 3부에서 첫 등장했다. 군인으로서의 능력은 출중하지만 자신의 육체적인 욕망만을 우선시하는 짐승같은 인간으로 나온다. 6부에서 카이사르의 눈 밖에 난 것을 알자 본인이 카이사르의 상속자라고 착각해 카이사르를 죽이고 재산을 물려받으려는 생각을 하여 본인이 먼저 암살 시도를 하기도 하고,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을 이끄는 트레보니우스와 미리 공모하여 카이사르가 왕이 되려고 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왕관을 바치는 등의 퍼포먼스를 독단으로 저지르고 카이사르가 시킨 것처럼 여론을 조작하고, 암살 당일에도 공모한대로 암살을 방관한다.

마기아 레코드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 외전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으며 푸엘라 히스토리아 2편 알렉산드리아의 신기루 편에서 언급만 되는 수준으로 나오는데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한 클레오파트라가 옥타비아누스에게 접근했다는 소문을 듣자 국민들 평판이 나빠질 것을 우려한 클레오파트라가 연극을 하겠다면서 한 가지 수를 부리는데 다름이 아니라 클레오파트라의 시녀이자 마법소녀였던 에보니의 마법 매료를 이용해서 클레오파트라가 자살했다는 거짓된 정보를 전하고 흘리게 해서 크나큰 슬픔이 덮치게 만들고 칼을 쥐어주게 해서 자해를 하게 만들고 클레오파트라의 곁에서 숨을 거두었다.

마기아 레코드에서는 안토니우스의 자살이 클레오파트라의 연극과 에보니의 매료 마법이 적용하게 되면서 자해를 하고 생을 마감했다는 식으로 나왔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클레오파트라와 에보니 뿐이었다.

타임 프린세스 클레오파트라 편에서는 카이사르의 부하로 잠깐 등장한다. 게임의 시점은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와 손을 잡기 시작했던 시점을 기준으로 잡았기에 분량은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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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확히 말하자면, 그라쿠스 형제와 같은 평민 귀족(Nobiles) 출신이라 할 수 있다.[2] 안토니우스 씨족은 원래 유서깊은 가문으로 본가인 귀족집안은 머렌다라는 코그노멘을 썼다. 다만 현 문서에서 언급되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방계 가문으로 평민 집안 출신이 맞다. 이 집안 사람들은 초기 공화국 이후로 언급이 거의 사라진 본가의 귀족들과 달리 호민관 등으로 꾸준히 역사에 등장하지만,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서 이름을 떨치게 된 건 집정관을 지낸 그의 할아버지 때부터다. 참고로 이 사람은 키케로의 저작에서 메인 웅변가로 등장한다.[3] 이때 파산을 했는데, 훗날 정적들이 이걸 가지고 정치공세로 쏠쏠히 써 먹었다. 특히 키케로[4]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키케로 및 다른 로마 정치인들 항목에서 이 사람 이름을 자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람은 공화정의 실세 귀족 가문들 중 하나였던 클라우디우스 가문 중에서도 가장 위세가 높았던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 출신으로, 본래는 키케로와 가까운 사이였으나 사이가 틀어지자, 키케로에게 엿을 먹이기 위해 평민만이 될 수 있는 호민관의 자리를 노리고 평민의 양자로 들어가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에서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가 된다.[5] 키케로는 여기에 동성애를 저질렀다고 주장하지만, 근거가 빈약하고 전형적인 정치적 공세에 가까워서 신빙성따윈 없다.[6] 다만 가비니우스는 카이사르 내전 때 카이사르군에서 종군했다.[7] 두 나라 다 오랫동안 여러 갈등이 쌓인데다 하필 왕도 암군인 헤로데 2세, 프톨레마이오스 13세로 상황은 가면 갈수록 악화되어 내내 세력다툼과 봉기, 심지어는 반란까지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당연히 이 두나라의 지배자였던 로마는 수시로 토벌을 해야했다.[8] 다만 이때부터 카이사르는 안토니우스에 대해 '군단장으로서는 차고 넘치지만 총사령관으로서는 다소 부족하다'라 평했다. 카이사르 사후 안토니우스의 삽질들을 보면 과연 천재답구나 싶은 안목.[9] 독재관 카이사르 사망 이후 카이사르 가문의 직계는 단절된다.[10] 풀비아는 그라쿠스 형제의 후손이다.[11] 이때 원로원이 카이사르를 해임하려 하자, 호민관 자격으로 거부권을 사용하고,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계속 해서 반복하다 빡친 원로원이 거부권이 안먹히는 원로원 최종권고를 사용한다. 참고로 카이사르는 원로원 최종 권고를 예전부터 싫어했다. 자세한 내용은 카틸리나 탄핵 참고[12] 게다가 뇌물과 여색을 굉장히 탐했다. 물론 고대에는 당연한 것이었지만 그 당연시했던 시대에서조차 욕을 먹을 만큼 탐했다고 한다. ROME에서 이 점을 잘 표현했으니 꼭 보자.[13] 안토니우스가 매수한 사람들이라고 한다.[14] 정확히는 마스터 오브 호스, 기병 대장. 명칭은 기병 대장이었으나 실질적으로 부독재관의 역할을 수행했다.[15] 드라마 Rome에서 묘사되는 관련 에피소드는 역사적으로 아주 정확하지는 않으나 기본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내용이기에 참고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16] 이런 점만 봐도 안토니우스의 정치 감각이 완전히 꽝이라고는 볼 수 없다.[17] 하지만 결국은 문제를 잠시 덮어둔 것에 불과했다. 달리 보면 안토니우스의 우유부단함이라고 해야 할 지도. 무엇보다 민중들은 자기들 편을 들어줬던 카이사르가 암살당했는데 이 정도 조치로 만족할 리가 없고 반대로 원로원파는 어떻게든 모처럼 기둥이 꺾인 카이사르 일파를 숙청하고 싶을 게 뻔한데 역시나 이 정도로 만족할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18] 결국 종합적으로 따지고 보면 결단력과 정치적 능력에서 보면 안토니우스보다 옥타비아누스가 더 낫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옥타비아누스는 이런 식으로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으니까. 물론 옥타비아누스도 필요하다면 얼굴에 철판을 몇 장은 깔더라도 적과 손을 잡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긴 해도 이건 어디까지나 옥타비아누스 자신이 불리한 상황에서 시간을 끌고 세력을 회복하기 위함인 만큼 안토니우스와는 결이 다르다.[19] 사실 안토니우스의 아내 풀비아는 그라쿠스 형제의 직계 자손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할 듯.[20] 집정관들이 죽으면 옥타비아누스 한 명에게 군대 지휘권이 완전히 넘어오는 상황이었기에, 옥타비아누스가 전투라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이들을 암살했거나 혹은 죽음을 방관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옥타비아누스에게는 행운이었다.[21] 라고는 하지만 이 둘은 원래 카이사르 지지파였으며로 옥타비아누스에게도 비교적 우호적이었다. 다만 안토니우스와 다시 손을 잡는데까지 우호적이었을지는 조금 의문스러운 구석이 있다.[22] 물론 옥타비아누스는 키케로의 이런 생각을 잘 알고 있었고, 설령 몰랐다손 치더라도 군권은 자기 목숨을 지켜주는 보루나 다름없으므로 절대 원로원파에 넘겨줄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물론 로마군은 카이사르를 지지하고 있가도 했거니와 자기들 봉급을 빼돌렸던 주제에 지금도 당연히 받아야 할 봉급을 또 깎으려 드는 원로원에 붙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을 테고.[23] 키케로는 옥타비아누스를 조종해서 카이사르의 군대로 안토니우스를 쳐부순 다음 옥타비아누스에게서 군권을 빼앗고 허수아비로 만들 계획이었는데, 이걸 대놓고(...) 밝히고 다녔고 당연히 새로운 카이사르인 옥타비아누스의 귀에도 들어갔다.[22] 여기에 더해서 안토니우스가 비록 무티나 전투에서 패하긴 했지만, 여전히 세력과 힘은 남아있었으니 옥타비아누스 입장에서는 안토니우스와 연합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이었다. 자기 휘하의 군대가 해산되면 정말 위험해지기 때문.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넌 것도 군대 해산 논란 때문이었다.[24] 웃기는 건 이 때 키케로와 원로원은 이 상황에서도 자기네 군대에게 줄 봉급을 반으로 깎으려 들었다는 것이다. 2배를 올려줘도 모자랐을 판국인데 말이다. 해방자 내전에서도 브루투스는 급박한 상황임에도 군대에 고작 삼두파의 5분의 1밖에 안 되는 봉급만을 약속했다.[25] 술라의 숙청과 성격이 약간 다른데, 술라의 숙청은 민중파의 씨를 말리기 위함이었고 제2차 삼두의 숙청은 군자금 확보를 위함이었다. 그래서 카이사르파든 반대파든 돈만 있으면 숙청 대상에 이름을 올렸고, 돈만 순순히 바치면 다 살아남았다. 물론 신랄한 탄핵 연설로 안토니우스를 실각시켜 원한을 산 키케로는 예외. 애시당초 키케로는 원로원파 잔당의 우두머리라 타협의 여지도 없는 데다가 살아남기에는 카이사르 파의 어그로를 너무 많이 끌어버렸다.[26] 키케로가 안토니우스를 디스하는 말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풀비아와 결혼하는 사람들은 전부 불행하게 죽었다는 것인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또한 풀비아는 원래 그라쿠스 형제 중 동생인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후손이라서 민중파 내에서도 결코 비중이 적지 않았다. 당연히 키케로가 그녀를 걸고 넘어진 데에는 이런 배경도 있었던 것. 물론 클로디우스와 쿠리오, 안토니우스가 그녀와 결혼한 것 역시 상술한 그녀의 배경때문이기도 했을 테지만.[27] 안토니우스에게는 원래 풀비아라는 괄괄한 성격의 아내가 있었다. 풀비아는 키케로의 정적이었던 클로디우스의 아내였으나 클로디우스가 죽으면서 카이사르의 오른팔이었던 쿠리오와 재혼했는데 쿠리오 역시 카이사르의 내전에서 전투에 패배해 죽었다. 그 후 풀비아는 안토니우스와 재혼했다.[26] 그리고 안토니우스가 동방에서 머무르게 되었을 때 로마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정치전을 걸었다가 패배해서 자살했다. 이때 안토니우스가 풀비아를 지원했다면 옥타비아누스도 위험했겠지만 안토니우스는 대놓고 옥타비아누스를 적대하는 선택은 하지 않았다.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삼두정치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누이 옥타비아를 안토니우스에게 시집보냈다.[28]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 이 중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는 나중에 마우레타니아 왕 유바 2세의 왕비가 된다.[29] 로마 영토를 미녀 여왕에게 홀라당 넘겨준다고 하니 화를 내지 않는 게 이상할 것이다. 게다가 아직도 서방에는 옥타비아누스가 남아 있었는데 옥타비아누스의 서방 지배권까지 넘보고 있으니 아무리 봐도 너무 나갔다고밖에는 할 말이 없다. 하다못해 왕조 국가에서조차도 이런 짓을 하는 군주는 결코 끝이 좋지 않았다.[30] 남의 유언장을 미리 까발리는 건 로마의 상식, 전통, 법에 어긋나는 일인데, 안토니우스의 행동들이 워낙 가관인지라 묻혔다.[31] 정작 풀비아와 가이우스 안토니우스가 도움을 요청했을 때는 씹고 가만히 있다가 이들 사후 알렉산드리아에서 멀쩡한 로마 땅을 죄다 클레오파트라의 자식들에게 나눠준다고 하니 누가 봐도 클레오파트라에게 호구잡혔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32] 이 동맹으로 인해 카이사르는 동방의 안정을, 클레오파트라는 왕권을 얻었다. 즉, 로마에게 충분히 이익이 되는 동맹이었기 때문에 카이사르가 클레오파트라와 놀아났다고 해도 로마인들은 이걸 즐거운 스캔들거리로 입방아에 올렸을 지는 몰라도 딱히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33] 카이사리온 문서에도 나오지만, 정치적으로나 카이사리온을 위해서나 이게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 만약 카이사르가 카이사리온을 제 아들로 여기고 애틋해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자기가 이미 정치적으로 다 정리해놓은 이집트에서 왕 노릇 하며 풍요롭고 편하게 살기를 바랐을 법하고, 그런 마음이 없었다면 어차피 자기 자식으로 생각하지도 않는 아이를 부각시켜 로마를 뒤흔들어놓을 이유가 없었으므로.[34] 물론 카이사르정도의 정치가가 단순히 정때문에 그러지는 않았겠지만 누가 봐도 카이사리온을 인지하는 것보다 인지하지 않는 편이 훨씬 더 정치적으로 이득이기 때문에 제정신이라면 할 짓이 아니었다.[35] 다만 카이사르와 달리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리온을 내세우는 편이 자기 입장상 좋았다. 이유는 물론 카이사르의 아들이라는 입장상 옥타비아누스의 정통성을 훼손할 수 있을 거라고 봤기 때문. 물론 소용은 없었다.[36] 사실 정치가로서는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장군으로서는 정반대로 옥타비아누스의 군사적 능력이 형편없어서 양부인 카이사르가 살아 생전에 옥타비아누스에게 아그리파라는 친구를 붙여줬을 정도였다. 이는 분명 카이사르의 신의 한 수긴 하지만 이 시점에서 아그리파는 아직 안토니우스의 적수가 되긴 부족했다.[37]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발행한 은화 - 안토니우스 쪽에 새겨진 "Antoni Armenia devicta"는 안토니우스가 아르메니아를 정복했다는 뜻이므로 그러려니 해도, 클레오파트라 쪽에 새겨진 "Cleopatra Reginae regum filiorumque regum"는 클레오파트라는 왕 중의 여왕이자 왕자들의 여왕이라는 뜻으로 이는 당시 로마, 그리스의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모를리 없는 고대 페르시아 황제의 칭호다. 안토니우스는 이런 엄청난 칭호를 로마의 속국이나 다름없던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에게 바쳤다. 로마인들이 어이없다고 생각했다 하더라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38] 이미 악티움 해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안토니우스의 가장 핵심적인 참모가 튀어서 옥타비아누스에게 안토니우스의 작전에 대해 죄다 불었을 정도였다.[39] 물론 카이사르 역시 나름대로 충분한 명분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탈리아 본토를 확보할 수 있었고 몇 번 폼페이우스군에 패했어도 쉽게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40] 처음에는 옥타비아누스가 나섰으나 역시 군사적 재능은 없었던지 패하고, 아그리파가 나서서야 이길 수 있었다.[41] 라고는 하지만 사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의견을 받아들여 알렉산드리아에서 옥타비아누스군을 요격할 생각이었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후퇴하는 안토니우스군과 이를 저지하려는 옥타비아누스군의 전투였다.[42] 정확히는 지휘권 혼란. 로마군은 클레오파트라의 명령을, 이집트군은 안토니우스의 명령을 각각 무시했다. 거기에 상반된 명령을 내리는 일도 부지기수. 안 망할래야 안 망할 수가 없었다. 다만 악티움 해전에 나와 있듯 패배의 직접적인 원인은 클레오파트라의 상황과 전혀 맞지 않는 도주였다. 또한 상반된 명령이라곤 하나 군사적 업적이 사실상 없었던 클레오파트라와 당시 지중해 최고의 군 지휘자 중 하나인 안토니우스의 명령이 상반됐다면, 누구의 잘못이 더 컸는지는 분명하다.[43]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44] 어머니 클레오파트라가 독사를 붙잡은 채 자살하는 모습이 새겨진 조각상 뒤로 끌려갔다.[45] 그러나 로마에 당도하기 전에 요절한 걸로 추정되는 필라델포스를 제외한 나머지 두 아이는 옥타비아누스의 누나이자 안토니우스의 전처인 소 옥타비아가 친자식처럼 길러주었다. 다만 헬리오스도 로마에 온 지 몇년 안되어 요절한 걸로 추정된다.[46] 사실상 카이사르 대에 시작되어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실체화된 로마 제정의 황제 자리는 현대 한국인들이 익숙할 중국의 중앙 집권적 황제와 달리 시민 중 1인자라는 권위 위에 거부권이 포함된 호민관 특권과 군 지휘권 및 군의 지지, 비옥한 식량 창고인 이집트 속주의 지배권을 바탕으로 수도 로마의 여론을 좌지우지할 만한 경제력 등이 복합된 이질적인 최고 권력이었다.[47] 다만 안토니우스의 웅변으로 알려진 카이사르의 장례식 연설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출전이다.[48] 정확히는 집정관인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죽음에 분노한 시민들로부터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로마에서 쫓아낸 것이다. 당시 로마 내에서 암살자들과 키케로는 그들의 신변을 보호해줄 사병화된 군대를 가지고 있지 못했기에 그의 말에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49] 다만 먼저 옥타비아누스가 손을 내민 걸 잡았기 때문이지 당시 안토니우스는 손을 먼저 내밀 만한 처지도, 옥타비아누스의 손을 거절할 처지도 아니었다. 이미 로마에서는 국가의 적으로 선포받았기 때문. 그런데도 삼두 중 독보적인 위치에 서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군사적인 능력이 뛰어났고 가장 부유한 동방을 차지하고 로마 본토의 일에서는 손을 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50] 거기다 이 시점에서 그 아그리파마저도 군사적 능력으로는 안토니우스를 완전히 따라잡진 못했다.[51]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동생.[52] 반면 카이사르는 로마 밖에 있을 때도 로마 안의 정쟁에 결코 무심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1차 삼두정치 때도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의 사이가 벌어지는 일이 발생하자 카이사르는 갈리아에 눌러앉아 있었는데도 이들을 화해하도록 주선했고 또 갈리아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로마의 동향과 집정관 선거를 위한 표 다지기를 위해 미리 안토니우스(이 문서의 주인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본인 맞다.) 등을 전역시켜 호민관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도록 공작했다.[53] 사실 풀비아는 생각보다 정치적 상징성이라는 면에서 그 카이사르에 필적할 정도였는데, 왜냐하면 풀비아는 바로 민중파의 효시인 그라쿠스 형제의 직계 자손(외손녀)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녀의 전남편들이었던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와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였는데 이들은 둘 다 민중파에서 카이사르 다음가는 젊은 거물급 정치가가 되었는데 이는 풀비아의 영향이 컸다. 즉, 그라쿠스 형제의 직계 자손과 카이사르 휘하 최고의 장군이 손을 잡은 것이니 원래는 명분과 실력의 결합이었겠지만 정작 안토니우스는 동방에 눌러앉아 이를 쌩깠다.[54] 이는 향후 안토니우스가 파르티아 원정을 떠날 때 2만의 로마 군단병을 지원하겠다는 옥타비아누스의 약속을 믿고 보낸 지원이었지만, 정작 섹스투스를 제압하고 난 뒤 안토니우스가 약속의 이행을 요구했을 때 옥타비아누스는 원래 약속의 10분의 1에 불과한 2천 명의 군단병을 보낸 뒤 입을 씻는 것으로 화답한다.[55] 사실 2차 삼두정치에서 옥타비아누스를 견제하면서 동방의 안토니우스와의 관계를 중재할 역할은 옥타비아누스와 같이 서방을 맡은 레피두스의 몫이었다. 하지만 레피두스 휘하의 군대가 어이없게도 자신을 따르라는 옥타비아누스의 한마디에 일제히 배반하여 옥타비아누스의 휘하에 들어가면서 레피두스 역시 너무도 간단히 항복했기에 이 견제 장치는 작동할 수 없었고 삼두는 붕괴된다. 레피두스가 이끌고 있던 군단이 카이사르 생전 카이사르 휘하에서 사실상 사병화된 군대였으며 옥타비아누스가 자신이 카이사르의 정당한 유산 상속자임을 줄기차게 내세웠다는 점을 감안하면 군단의 배신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사실 이는 안토니우스도 마찬가지였으므로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하면서 안토니우스의 군대는 죄다 탈영하여 옥타비아누스 쪽으로 투항하면서 완전히 와해되었다.[56] 동시대의 로마인 뿐 아니라 시대에 상관없이 받아들이기 힘든 결정이다. 타국 군주에게 자국인들의 역량으로 확보한 영토를 분할한다는 발상은 그 누구도 받아들이기 힘들다.[57] 이게 얼마나 당시 로마인들에게 충격적인 행동이었냐 하면, 약 100여 년 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아들 티투스가 유대 공주 베레니케와 혼인을 하려고 하자 로마 시민들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생각하며 경기장에서 일제히 야유를 터뜨렸고, 그로 인해 티투스는 결혼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100년이 지나도 전혀 사그러들지 않았던 충격이었던 셈.[58] 옥타비아누스는 가장 까다로웠던 전역병의 보상 문제를 이집트와 북아프리카에 황제 직할령을 건설하고 거기서 나오는 밀을 전역병들에게 퇴직금으로 나눠줌으로써 해결하였고 이를 아예 법으로 못박아놨다. 이로 인해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전역병의 퇴직금 지급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였다.[59] 일설에는 그라쿠스 형제 중 고결한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클라우디아 부부의 세 아들이 요절했다는 식으로 소개됐는데, 이 사람은 그 유명한 그라쿠스 형제의 후손으로 강하게 추정된 인물이다. 상당한 미남으로 율리아와는 아그리파 생전부터 연인 사이였다고 하며, 티베리우스가 충격을 받고 로도스 섬으로 가출한 사건의 원인을 제공했다. 따라서 뒤늦게 진실을 알게 된 아우구스투스는 크게 화를 내면서, 티베리우스에게 용서를 구하고 율리아를 직접 간통죄로 고발하게 된다.[60] 마우레타니아 왕국에게 유리한 결정을 얻기 위해 벌인 내정 개입이 아니라,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서 황제, 황실, 황제파 인사 및 프라이토리아니 모두 가장 민감하게 여긴 부분과 원로원의 의사결정 자체를 가지고 조종하려는 문제였다.[61] 극중에서 가장 많은 정사신을 할애받는다(...) 심지어 성기노출도 있다![62] 평민 출신 귀족이다. 평민 출신이란 점 때문에 호민관을 역임할 수 있었다.[63] 드라마에서는 괄괄한 여장부이지만 실제로는 옥타비아누스가 다칠까 두려워 카이사르의 후계자 자리를 버리라고 권한 소극적 여성이었고, 그가 첫 집정관 임기를 보내던 기원전 43년에 이미 사망했다.[64] 아그리파의 지휘 아래의 옥타비아누스의 군대에게는 연패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위협적인 수의 군사가 그를 따르고 있었고, 브루투스와의 전투에서는 전황을 따라잡지 못하는 옥타비아누스에 비해 훨씬 여유롭게 전투에 대처하는 모습도 보였다.[65] 포스카는 아그리파와의 전투에서 패전할 때까지만 해도 안토니우스와 함께 했지만, 이후 2차 삼두정치때 헤롯 왕에게 받은 뇌물의 정보를 마이케나스에게 몰래 흘린다던가, 악티움 해전 이전 안토니우스의 몰락의 징조가 보이자 이집트를 탈출하는 등, 결국 안토니우스의 운명이 결정되어지는 순간에는 그를 변절한다.[66] 특히 마지막 이집트 탈출 당시에는 안토니우스의 (사망시 공개하게 되어있는) 유서를 빼돌려 옥타비아누스에게 바침으로써 옥타비아누스가 그에게 선전포고를 할 명분을 제공한다. 원래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곡물 수출을 거부하는 등 노골적으로 전쟁을 유도하는데도 시민들이 안토니우스를 더 좋아하는 탓에 선전포고를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 유서 한 방으로 안토니우스에 대한 여론을 적대적으로 돌리는데 성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