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슈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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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슈미트
Anton Schmid

파일:external/www.executedtoday.com/Anton_Schmid.jpg
출생
1900년 1월 9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사망
1942년 4월 13일 (향년 42세)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 빌뉴스
직업
전기공, 군인
가족
배우자
슬하 1녀
명예칭호
열방의 의인

1. 개요



1. 개요[편집]


나치 독일 속에서 빛난 의인

독일 국방군 중사로 복무했다. 그는 슈츠슈타펠로부터 250명의 유대인들을 구해 주다 이 사실이 발각돼 체포되어 그들을 숨겨 줬다는 죄목으로 1942년 4월 13일,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서 처형되었다.

전기 기술자였던 안톤 슈미트는 제 1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였으며 전후 작은 라디오 가게를 운영하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재징집 되었지만 나이 때문에 후방 부대에 배치되어 폴란드와 벨라루스에서 근무하다 1941년 8월 리투아니아의 빌리우스에 배치되었다.
빌니우스는 41년 7월 부터 44년 8월 사이 약 7만명의 리투아니아 유대인과 2만명의 폴란드인 그리고 8,000명 이상의 소련군 포로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포나리 학살'이 일어난 곳으로 슈미트가 부임했을 당시 조직적인 학살이 시행되고 있었고 41년 9월 첫 주에만 약 3,700명의 유대인이 학상 당했는데 그를 목격한 슈미트는 심정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학살을 피해 살아남은 막스 샐링거란 유대인을 도와주게 되면서 슈미트의 인생이 바뀌게 된다.
당시 슈미트가 관리하던 공장엔 빌니우스 게토에 있던 유대인 가운데 150명의 유대인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었는데 10월 게토내 유대인에 대한 대규모 학살을 위해 기존의 노동 허가증을 취소하고 60명에 대한 노동 허가증만을 발급하게 되는데 이에 허가증이 취소된 90여명이 인근 마을의 비교적 안전한 곳으로 이동을 시켜달라 간청을 하자 군용 트럭을 이용해 그들을 게토 밖으로 이동시켜주게 된다. [1]

이 일 이후 슈미트는 본격적으로 유대인 구출 작전에 동참을 하게 된다. 41년 11월 부터 체포되기 직전인 이듬해 1월까지 유대인 저항세력 인사인 헤르만 아들러와 그의 아내를 자신의 아파트에 숨겨 주었을 뿐만 아니라 아들러를 통해 빌니우스 게토 유대인 저항조직의 핵심 관계자들을 알게 되었고 심지어 자신의 아파트를 아지트 삼아 게토의 유대인들을 좀 더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는 계획을 짜게 된다.
이에 슈미트는 다양한 직업의 근로 허가증을 만들어 필수 기술직 유대인 노동자를 가장 필요한 곳으로 옮긴다는 핑계로 약 300여명의 게토내 유대인을 안전지대로 옮기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42년 1월말 슈미트는 유대인을 도운 혐의로 체포 되었고 4월 13일 처형당한다.

가족들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나는 그저 인간으로써 행동했고,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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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슈미터의 도움을 받은 유대인 생존자의 증언에 의하면 슈미터는 책이나 신문들을 읽지 않고 사상이나 이데올로기등이 어색한 인물이였다고 한다. 하지만 위의 믹스 샐링거와의 일화외에 게토 통금시간을 어겨 적발시 총살 당 할 운명에 처한 유대인 여성이 도움을 청하자 자신의 아파트에 숨겨주고 자신의 사무실에서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한 마음씨가 따뜻한 사람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