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오키아 총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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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공통 역사
3. 교회별 총대주교



1. 개요[편집]


안티오키아에 있는 신도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 사도행전 11장 26절


사도행전에도 언급되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시작된 유구한 교회로, 니케아 공의회 체제에서 로마,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삼두 체제를 이루었다. 또한 성서주석학적으로 보자면 마태오 복음서의 저술 장소로 추정되는 곳이다.

현재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는 교회별로 정교회 총대주교시리아 정교회 총대주교, 마론파 총대주교, 멜키트 그리스 가톨릭 총대주교, 시리아 가톨릭 총대주교로 총 5명이 존재한다. 로마는 1명(교황), 콘스탄티노폴리스는 2명,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은 각각 3명인 것을 생각하면 좀 비범하다 생각될 정도로 많은 편이다. 그리고 이 중 세 명이 동방 가톨릭 교회 소속이다. 세 동방 가톨릭 교회들은 교황수위권을 따르는 같은 교회이지만, 분열되어 나온 시점도, 경위도, 교회 조직도, 무엇보다도 전례 양식이 완전히 별개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렇게 됐다.

파일:Five_Patriarchs_of_Antioch.jpg
2017년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5명의 사진. 왼쪽부터…
멜키트 그리스 가톨릭
시리아 정교회
정교회
마론파
시리아 가톨릭
그레고리오 3세 리함[1]
이그나티우스 아프렘 2세
유한나 10세
베차라 부트로스 알 라히
이냐시오 요셉 3세

이 5명 중 현재 안티오키아(안타키아)에 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안타키아 자체가 인구 수 20만의 황량한 소도시로 몰락한 만큼 당연한 것일지도. 3명은 시리아 다마스쿠스, 2명은 레바논 베이루트 또는 그 근교에 있다.

교부 오리게네스의 기록에 의하면 안티오키아의 초대 총대주교는 사도 베드로라 하며, 아래의 다섯 교파가 모두 이 기록을 따라 사도 베드로를 기원으로 두고 있다. 베드로가 안티오키아로 떠나 로마로 가면서 주교직은 에보디오스가 계승했는데, 로마 제국의 박해 시기에 순교했다. 그의 뒤를 이은 이그나띠오스 역시 순교하였다.

2. 공통 역사[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00px-Syriac_Christian_Churches.svg.png
시리아 기독교의 역사
비잔티움 전례
Melkite Greek Catholic Church: 멜키트 그리스 가톨릭
Greek Orthodox Church of Antioch: 정교회
서시리아 전례
Maronite Church: 마론파
Syriac Orthodox Church: 시리아 정교회
Syriac Catholic Church: 시리아 가톨릭
동시리아 전례
Ancient Church of the East: 동방 고대교회
Assyrian Church of the East: 아시리아 동방교회
Chaldean Catholic Church: 칼데아 가톨릭
※ 오류 정정: 1724년 이전의 비잔티움 예법 교회는 로마콘스탄티노폴리스 양측과 모두 친교를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안티오키아 그리스 정교회에서 멜키트 그리스 가톨릭이 분리된 것이 아니다.
[1] 이 사진을 찍고 나서 같은 해 5월 6일에 퇴위하였다.

초창기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의 탄압을 피해 안티오키아로 대거 유입된 것이 안티오키아 교회이며, 한동안은 도시 자체의 성장세를 타고 순항하였다.

그러나 4세기아리우스파가 등장하면서 슬슬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아리우스의 주장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곳이 바로 안티오키아였기 때문. 아리우스의 주장을 추종하는 주교들도 몇몇 나타나고 그 와중에 몇 명이 파문당하기도 했다.

물론 이것은 그저 서막에 불과했다. 360년 멜레티우스가 안티오키아 교회의 수장이 되었는데, 취임 설교 때 아리우스파에 반대되는 의견을 냈다가 추방당했다. 이에 아리우스파 및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규정한 니케아 신경을 따르는 아타나시우스파, 그리고 중립파인 멜레티우스파와 또다른 반아리우스파인 아폴리나리우스파[2], 이렇게 네 개의 파벌로 나뉘어 각 파벌에서 따로따로 주교를 내는 등, 그야말로 전례없는 막장이 펼쳐지게 되었다.

이후 칼케돈 공의회가 열리며 다시 칼케돈파와 비칼케돈파가 극심하게 대립하였으며, 결국 황제권을 동원하여 비칼케돈파를 교회에서 축출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비칼케돈파는 시리아 정교회라는 살림을 따로 차리게 된다. 이후 안티오키아가 온갖 전쟁과 사막화로 인해 이전의 위용을 잃자 결국 14세기 들어 다마스쿠스로 총대주교좌를 옮겼다.

의외의 사실은, 18세기까지는 칼케돈 신조를 따르는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좌는 로마콘스탄티노폴리스와 각각 친교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사이의 상호 파문을 인정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 후 1724년에는 키릴로스 6세가 총대주교로 선출됐는데, 콘스탄티노폴리스 쪽에서 키릴로스 6세의 친로마적 성향 때문에 선출을 불인정-파문 콤보를 때리고 친콘스탄티노폴리스 성향의 수도자를 총대주교로 서임하면서, 로마와 친교를 가진 키릴로스 6세를 지지하는 파벌은 가톨릭으로[3], 콘스탄티노폴리스와의 친교를 유지하는 쪽은 정교회로 합류했다.

3. 교회별 총대주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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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폴리나리우스는 라오디게아주교로서 니케아 공의회 당시 아리우스파에 맞섰으나, 자신 역시 그리스도의 인성을 경시하는 엇나간 주장을 펼치게 되었다.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3] 통칭 멜키트 그리스 가톨릭. 시리아어로 ''을 뜻하는 malkoyo에서 유래한 말로, 왕당파란 뜻. 칼케돈파 기독교인들에 대한 멸칭으로 시작했으나 점차 일반용어가 됐다. 1724년의 분리 이후로는 가톨릭쪽에 대해서만 이 용어가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