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오키아의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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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안티오키아의 마리아.jpg
이름
안티오키아의 마리아
(Maria of Antioch)
출생
1145년
사망
1182년
아버지
푸아티에의 레몽
어머니
안티오키아의 콩스탕스
남편
마누일 1세
자녀
알렉시오스 2세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동로마 제국 콤니노스 왕조아우구스타,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의 황후.

2. 생애[편집]


1145년경 푸아티에의 레몽과 안티오키아의 콩스탕스 사이에서 출생했다. 레몽은 일찍 죽었고, 어머니의 재혼 상대인 르노 드 샤티용의 보살핌을 받았다. 1159년 줄츠바흐의 베르타 황후가 사망하자,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는 후계자를 한시바삐 낳기 위해 십자군 국가들에 잇달아 사절을 보내 신부감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던 1159년 4월 12일, 마누일은 안티오키아에서 르노 공작과 함께 마상창시합을 관전했다. 이때 그는 르노에게 결혼 적령기가 된 딸이 있냐고 물으면서 결혼 의사를 은근히 내비쳤다. 이후 트리폴리의 멜리센데와 안티오키아의 마리아를 놓고 고심하던 그는 1160년 말 안티오키아의 마리아를 신부감으로 확정지었다. 이리하여 1161년, 마리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아야 소피아에서 열린 결혼식에서 신부로서 참석하였고, 아우구스타 칭호를 수여받았다.

니키타스 호니아티스는 마리아의 외모가 아프로디테에 비견할 만하며, 진주빛 얼굴을 가졌다고 평했다. 라우펙토스 수도원의 수사 콘스탄티노스 마나스에 따르면 그녀의 피부가 눈이나 대리석처럼 하얗고, 혈색이 좋으며, 몸매가 대칭적이고, 머리카락의 숱이 많고 짙은 금발이며, 눈썹이 둥글고 눈꺼풀은 짙었고, 눈매는 부드럽고 반짝 반짝 빛났으며, 입술은 빨갛고 입은 잘 다듬어져 있고, 코도 예뼜다고 한다. 또한 걸음걸이는 품위가 있었고 성품도 훌륭했다고 한다. 티레의 윌리엄은 멜리센데를 동로마 제국의 황후로 뽑히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던 트리폴리 공작 레몽의 노고를 소개하며, 마리아가 '훌륭한 인격과 능력을 가진 처녀' 멜리센데를 제치고 황후가 된 건 순전히 아름다운 외모 때문이라고 묘사했다. 트리폴리 공작 레몽은 딸이 거절된 것에 원한을 품었고, 이때부터 동로마 제국을 적대했다.

마리아는 외국의 사절들을 접견하는 일에 관여하였고, 종교 행사에 종종 참석했다. 하지만 전 황후인 줄츠바흐의 베르타와는 달리 문학 작품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않았고, 정치에도 별다른 관여를 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치에 유일하게 관여한 건 1167년 코린토스에서 서방 국가들의 사절단과 황제가 접견했을 때였다. 라틴어를 배운 통역관 아론 이사키오스는 서양 사절들에게 "황제의 요구에 너무 빨리 응하지 말라"라고 라틴어로 충고했다. 마누일은 이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마리아는 그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황제에게 설명했다. 그러자 마누일은 격노하여 아론에게 실명형을 내리고 모든 재산을 몰수했다.

마누일과 마리아 부부의 사이는 원만한 편이었지만, 결혼 후 7년이 지나도록 후계자를 얻지 못했다. 마리아는 1166년과 1167년 사이에 아기를 임신하였지만 불행히 유산하였다. 이 때문에 마누일의 조카 마리아의 남편인 알렉시오스 악수흐가 황제가 후계자를 갖지 못하도록 저주를 걸었다는 비방이 돌기도 했다. 그러던 1169년 9월 14일, 마침내 마누일과 마리아 부부의 유일한 아들인 알렉시오스 2세가 출생했다. 마누일은 고대하던 아들의 출생에 기뻐하면서도, 아들이 어릴 때 자기가 사망할 것을 염려했다. 알렉시오스가 태어난지 18개월이 지난 1171년 3월 24일, 그는 신하귀족들, 세계 총대주교주교들에게 자신과 아들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하였다. 이에 그들은 만약 알렉시오스가 성년이 되기 전에 자신이 죽는다면, 알렉시오스를 황제로 받아들이겠다고 맹세했다. 또한 마리아는 수녀가 되어서 재혼을 못하게 해, 알렉시오스의 왕위 계승권이 위태로워지지 않도록 하였다.

1180년 9월 24일 마누일 1세가 사망하자, 마리아는 마누일의 생전 지시에 따라 수녀가 되어 '세네(Xene)'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이후 그녀는 마누일의 조카 알렉시오스 콤니노스를 필두로 한 섭정단과 함께 아들을 보필했다. 그러나 서방인들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았던 민중은 섭정단에 서방인이 많고 친라틴적인 정책을 추진한다며 불만을 품었으며, 여러 구혼자가 그녀와 결혼하길 희망하는 걸 불안하게 여겼다. 심지어 마리아가 섭정단 대표 알렉시오스와 사랑을 나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렇듯 불안감이 고조되던 1181년 2월, 마누일 1세와 줄츠바흐의 베르타의 장녀 마리아 콤니니는 남편인 몬페라토의 레니에르와 함께 반란을 꾀했다. 그러나 음모는 조기에 발각되었고, 마리아 황태후가 직접 재판을 주관하여 음모의 주동자들을 유배하거나 처형했다. 하지만 몬페라토의 레니에르와 아내 마리아는 아야 소피아로 숨었고, 세계 총대주교 테오도시오스가 비호한 덕분에 체포되지 않았다.

레니에르는 아내 마리아와 함께 아야 소피아에서 민중을 선동했고, 친서방 정책에 불만이 가득했던 민중은 이에 호응했다. 그들은 동료 공모자들을 석방하고 섭정단을 퇴진하라고 요구했다. 마리아 황태후는 이러한 요구에 응하지 않았고, 레니에르와 마리아는 아야 소피아를 요새로 전환하고 외국인 용병을 고용했다. 알렉시오스 콤니노스는 이에 맞서 부활절을 기념하여 황궁에 방문했던 테오도시오스 총대주교를 전격 체포하고, 새 총대주교를 세우려 했다. 하지만 마리아 황후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고, 테오도시오스는 석방되었다. 민중은 이 사건에 분노하였고, 곧 황태후와 섭정단 지지파와 레니에르와 마리아 지지파 간의 시가전이 벌어져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며칠간의 시가전 끝에 양측은 화해하기로 했다. 마리아와 레니에르는 황궁으로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었고, 반란군은 사면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너그러운 조치에도 불구하고 마리아 황태후의 인기는 갈수록 떨어졌고, 민중의 서방인에 대한 적개심은 증폭되었다.

한편, 지난날 마누일 1세에 맞서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으나 번번이 실패한 뒤 흑해의 해안지대에서 요양 생활을 하던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는 수도에서 벌어진 상황을 전해듣고 오래도록 고대하던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1181년 5월, 안드로니코스는 테오도시오스 총대주교에게 알렉시오스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편지를 보내면서, 자신이 수도에 가서 모든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무리를 끌어모아 봉기를 일으켰고, 여러 도시와 마을을 들려 자원자들을 수용했다. 민중이 열렬히 호응한 덕분에, 칼케돈 해협에 이르렀을 때 그의 병력은 수만에 달했다. 그는 마리아 황태후와 섭정단이 황좌의 순수성을 훼손했다고 비판하였고, 마리아 황태후가 수도원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요구했다. 함대 사령관 안드로니코스 콘토스테파노스는 반란군에 가담하였다.

1182년 4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라틴인 학살이 일어나 성내에 거주 중이던 서방인 수만 명을 학살했다. 이제 대세를 거스를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알렉시오스 2세는 안드로니코스에게 수도로 들어와서 질서를 회복해달라고 요청했다. 안드로니코스는 즉시 수도에 입성한 뒤 알렉시오스에게 절했지만, 마리아 황태후에게는 형식적으로 대했다. 1182년 5월 6일, 안드로니코스는 테오도시오스 총대주교의 지원에 힘입어 공동 황제가 되었다. 그 후 알렉시오스와 마리아 황태후의 일거수일투족은 철저히 통제되었고, 누구도 두 사람과 어떠한 국가 문제를 논의할 수 없었다. 또한 안드로니코스는 레니에르와 마리아를 독살했고, 총대주교에게 마리아 황태후를 궁궐에서 쫓아내는 데 동의하라고 협박해 동의를 받아냈다. 결국 마리아 황태후는 궁궐에서 강제로 끌려나와 성 베드로 수도원에 감금되었다.

마리아 황태후는 헝가리에 구원을 호소했고, 헝가리 왕이자 마리아의 처남인 벨러 3세는 군대를 파견해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침공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여론의 지지를 완전히 잃어버렸고, 안드로니코스는 그녀를 반역죄고발했다. 마리아는 적대적인 재판관들로 구성된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고, 디오메데스 수도원 근처에 있는 좁은 지하감옥에 수감되어 간수들에게 학대와 조롱을 받았다. 안드로니코스는 알렉시오스 2세에게 어머니를 처형하는 문서에 서명하도록 강요한 뒤, 아들 마누일과 처남 게오르기오스에게 처형을 감독하라고 명령했다. 두 사람 다 말을 듣지 않자, 그는 콘스탄티노스 트리키쿠스와 내시 프테기오네트에게 마리아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결국 1182년 말, 마리아 황태후는 살해당했다. 니케타스에 따르면, 마리아는 목이 졸려 죽었으며 근처 해변에 묻혔다고 한다. 일설에는 그녀가 자루에 넣어진 채 바다에 던져졌다고 한다. 얼마 후 알렉시오스 2세도 활줄에 목이 졸려 죽임을 당한 뒤 바다로 던져졌다. 안드로니코스는 마리아에 대한 동정여론이 생길 것을 우려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소재한 모든 마리아의 상을 훼손하거나 파괴하였다. 그 후 그는 황위에 올라 심각한 폭정을 일삼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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