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무스탁피
덤프버전 :
1. 개요[편집]
아바스 왕조 22대 칼리파.
2. 생애[편집]
908년 11월 11일 아바스 왕조 17대 칼리파 알 무크타피와 동로마 제국에서 끌려온 여노예 후순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3개월 전에 사망했다. 연대기 작가들은 그가 나비드(nabīdh, 발효음료)를 매우 좋아했으며 스포츠와 게임을 즐겼고, 시아파에 동조했으며, 바그다드의 아야룬(ayyārūn, 도시 방랑자 및 투사)와 긴밀한 접촉을 유지했다고 서술했다.
944년 9월 튀르크 대장군(아미르 알 우마라) 투준이 알 무타키를 폐위한 후 칼리파에 옹립되었다. 그는 즉위 직후 궁궐 구석에서 11년간 유폐되고 있던 알 카히르를 석방시켰다. 하지만 알 무크타디르의 남은 자식들을 잠재적인 경쟁자로 여기고 박해했다. 특히 알 파딜과 그는 어렸을 때 타히리드 궁전에 머무는 동안 서로를 증오했다고 한다. 알 파딜은 두려움을 느끼고 잠적했고, 그는 알 파딜의 집을 불태웠다.
944년 가을, 이란의 부와이 왕조군이 이라크를 침공했으나 투준은 알 무스탁피를 대동하여 출정해 이를 격퇴했다. 그러나 945년 8월, 투준이 사망한 후 바그다드는 혼란에 휩싸였다. 투준의 후계자인 아부 자파르 무함마드는 정국을 장악하지 못했고, 더구나 그해 가을 이라크에 흉년이 들어 민심 역시 흉흉해졌다. 이에 부와이 왕조군은 재차 진군하여 바그다드를 봉쇄하였고, 시민들은 개와 고양이를 잡아먹고 쓰레기를 뒤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굶주림에 시달리던 민중이 폭동을 일으켜 상점들을 약탈했다. 상황을 통제할 수 없던 아부 자파르는 북쪽의 함단 왕조에게 자신의 아미르 직을 걸고 지원을 청했으나, 모술의 지도자 나시르 앗 다울라는 캅카스에서 남하하는 루스인들과 맞서느라 정신이 없었고, 알레포의 사이프 앗 다울라는 익시드 왕조과 맞붙느라 역시 바그다드를 도울 수 없었다.
그때 와시트의 총독이 부와이 측에 항복한 후 함께 바그다드로 진격했다. 이에 아부 자파르는 숨었고, 알 무스탁피 역시 항복하기로 하고 부와이 측이 협상을 위해 보낸 관료를 맞이했다. 알 무스탁피는 부와이 조의 군주 무이즈 앗 다울라 아흐마드에게 아미르 알 우마라 직을 내렸고, 946년 1월 17일 그는 바그다드에 무혈 입성했다. 이후 무아즈의 이름은 칼리파와 함께 쿠트바와 동전에 새겨졌다. 하지만 그들의 공존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무이즈 앗 디올라는 튀르크 군부에 의해 옹립된 칼리파를 경계했고, 그 역시 무이즈를 축출하기 위해 음모를 장교들과 음모를 꾸몄다. 결국 946년 1월 29일 또는 3월 9일, 무이즈는 그를 체포해 실명형에 처한 뒤 폐위시켰다.
부와이 왕조는 시아파 정권이었지만, 무이즈는 시아파 칼리파를 세운다면 바그다드 주변의 수니파 세력이 가만두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았다. 그래서 은신처에 숨어있던 알 파딜을 모셔와서 알 무티라는 이름으로 칼리프로 세웠다. 물론 실권은 전혀 없었고, 무이즈가 실권을 행사했다. 이후 바그다드에서 재차 폭동이 일어나 궁전이 약탈당했지만, 부와이군이 곧 진압했다. 그는 칼리팔 궁전에서 조용히 지내다 949년 9월에 사망했다.
알 무스탁피의 일족들은 바그다드를 탈환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조카 중 한 명인 아부 알 나스르 이샤크는 960년 아다르바야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그곳을 다스리던 총독에게 패배했다. 967년 무이즈가 사망한 뒤에는 알 무스탁피의 아들 아부 알 하산 무함마드가 이라크로 이동하여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마흐디(구원자)를 자처해 상당한 지지자들을 모았으나, 당국의 추적으로 체포되었다. 그는 비록 탈출에 성공했지만, 이후로 다시는 역사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리하여 부와이 왕조는 바그다드를 완전히 장악하고 100여 년간 아바스 칼리파를 꼭두각시로 삼은 채 이라크 일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8 00:49:56에 나무위키 알 무스탁피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