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하캄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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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하캄의 디나르 금화

أَبُو الْعَاصٍ الْمُسْتَنْصِرِ بِاللهِ الْحَكْمِ بْن عَبْدِ الرَّحْمَنِ

아부 알 아스 알 무스탄시르 빌라 알 하캄 빈 아브드 알 라흐만


재위 961년 10월 15일 ~ 976년 10월 16일
생몰 915년 1월 13일 ~ 976년 10월 16일

후우마이야 왕조의 2번째 칼리파. 아브드 알 라흐만 3세의 아들로, 961년 가을 부왕이 사망하자 계승하였다. 즉위 직후 그는 부왕이 개입한 레온 왕국의 제위 계승 분쟁에 직면하였다. 오르도뉴 4세와 대립하던 레온 국왕 산추 1세는 압브드 알 라흐만 3세에게 지원을 대가로 국경의 성채 10개를 할양하겠다고 약속하였다. 한편 코르도바로 망명한 오르도뉴 역시 같은 제안을 하였고, 962년 4월 알 하캄은 오르도뉴를 돕기로 하였다. 이에 산추 역시 재차 같은 제안을 반복했는데, 마침 오르도뉴가 죽어버리자 오리발을 내밀고는 오히려 나바라 왕국, 바르셀로나 백국과 연합하여 안달루스를 침공하였다. 분노한 알 하캄은 963년 여름 친히 대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고르마즈와 아티엔자를 점령하였고, 사라고사 총독 야흐야 이븐 무함마드 알 투지비는 나바라를 공격하였다. 슬라브계 장군 갈립 앗 시클라비는 나바라령 칼라호라를 점령하고 나바라 국왕 가르체아 1세 사노이츠를 격파하였다.

그후 알 하캄은 기독교 세력들과 평화 협정을 맺었다. 이어진 안정기에 그는 관개 시설의 확충으로 농업을 진흥시켰고, 도로를 확장하거나 시장을 세워 경제 성장을 독려하였다. 과학에 조예가 깊던 그는 다마스쿠스, 바그다드, 콘스탄티노폴리스, 카이로, 메카, 메디나, 쿠파, 바스라 등지에서 책을 사들였다. 지식의 후원자였던 알 하캄의 영향력은 (명목상으로) 압바스 왕조의 영토인 페르시아에서 쓰여진 책이 그에게 헌정될 정도였다. 기록마다 다르지만 코르도바의 도서관에는 무려 60만권의 장서가 소장되어 있었으며 그 도록만 해도 44권에 달했다고 한다. 알 하캄 본인도 알 안달루스 역사서를 집필했다고. 또한 그의 치세에 번역 활동 역시 활발히 이루어졌고, 개종한 무왈라드 무슬림과 아랍화된 모사라베 기독교도들이 라틴/그리스 서적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데에 고용되었다. 다만 알 하캄의 사후 알 하집 알 만수르가 수많은 과학서를 불태워버려 그의 장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알 하캄은 또한 수학자이자 문학가인 루브나를 개인 비서로 고용하였는데, 그녀는 기하학과 대수학 분야에 출중했다고 한다. 그녀 외에도 코르도바에는 170여명의 학식 있는 여성들이 필사 분야에서 일하는 등 여성들의 사회 참여가 활발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저명한 의사이자 과학자인 아불 카심 앗 자흐라위와 초창기 수피 학자 이븐 마사라 역시 알 하캄의 궁정에서 활동하였고, 무타질라 학파 역시 번역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건축 분야에서 알 하캄은 코르도바 대사원 (메스키타)의 확장 (962-966년)과 부왕이 건설하기 시작한 궁전도시 메디나 앗 자흐라의 완성 (976년)을 이룩하였다. 치세 후반부에 들어 정치에 흥미를 잃은 알 하캄은 학문 분야에 열중하며 정사를 재상 자파르 알 무샤피와 스페인계 아내 숩흐에게 일임하였다. 후자는 연인 관계라는 의혹이 있는 무함마드 이븐 압둘라 이븐 아비 아미르로 임명하였다. (미래의 알 하집 알 만수르)

그러던 971년 장군 갈립 앗 시클라비가 재상에 오르며 두각을 드러내었다. 같은해 7월 3일 알 하캄은 그를 소환, 대서양 연안에 출몰한 바이킹에 대한 수륙 양면 작전을 맡겼다. 9일 후 메디나 앗 자흐라에서 성대한 축하와 함께 출정한 갈립은 레온 왕국의 사절로부터 바이킹들이 이미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7월 말엽 그는 알메리아의 함대와 수색에 나섰지만 추적에 실패하고 한달 후 귀환하였다. 다만 알 하캄은 그를 위해 성대한 개선식을 열어주었고, 알카자르까지 깃발들이 세워졌다. 다만 이듬해 대바이킹 대응에는 다른 장군이 배치되었다. 그럼에도 972년 갈립은 알 카이드 알 알'라 (최고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한편 973년 모로코로 파견된 그는 958년 파티마 왕조에 복속한 이드리스 왕조를 재차 복속시키고, 그 군주 알 하산 이븐 가눈을 사로잡아 974년 9월 귀환하였다. 그 직후 갈립은 중부 변경의 영주들에 대한 지휘권을 얻었다. 975년 그는 북방 원정에 나서 6월 28일 고르마즈를 포위하던 레온 국왕 라미루 3세를 격파한 후, 7월 8일 두에로 강 남쪽 랑가 부근에서 카스티야 백작 가르시아 페르난데스를 격파하였다.

알 하캄은 갈립에게 두 개의 도금된 검을 하사하며, 둘 사이핀 (두 검의 주인) 호칭을 내렸다. 이는 883년 압바스 조의 섭정 알 무와팍크가 장군 이샤크 이븐 쿤두즈에게 내린 전례가 있다. 검을 하사할 때에 알 하캄은 아들 히샴과 재상 자파르 알 무샤피만을 대동하였다. 갈립의 활약과 함께 알 하캄은 북방 기독교 국가들과 모로코 일대에 대한 종주권을 확립하는 업적을 이루었다. 하지만 45세에 얻은 장남을 일찍 잃은 알 하캄은 976년 10월, 찬바람으로 인해 뇌줄중을 앓아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다. 알 하캄은 제대로된 후계자 양성을 하지 못하고 고작 11세의 둘째 히샴 등 어린 아들들을 남기고 사망하였고, 그의 죽음과 함께 후우마이야 칼리파의 실권은 붕괴되었다. 갈립과 그의 부장이자 사위인 알 하집 알 만수르가 함께 어린 히샴 2세 알 무아야드의 섭정을 맡았는데, 내전 끝에 알 만수르가 집권하여 칼리파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실권을 행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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