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시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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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시아 전투/알레시아 공방전
영어: Battle of Alesia/Siege of Alesia
라틴어: Alesiae pugna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iegeAlesia.png
▲알레시아 포진도.[1]
시기
기원전 52년 9월 ~ 10월
장소
프랑스 중부 디종오를레앙의 구릉지대
원인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
교전국
파일:attachment/mon_256.png 로마 공화정
파일:attachment/mon_256_11.png 갈리아 부족 연합
지휘관
파일:attachment/mon_256.png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파일:attachment/mon_256.png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티투스 아티우스 라비에누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
파일:attachment/mon_256_11.png 베르킨게토릭스
파일:attachment/mon_256_11.png 베르카시벨라우노스
파일:atrebartes_mon_256.png 콤미우스
세둘로스†
병력
군단병: 30,000 ~ 50,000명
보조군: 10,000명
농성군: 80,000명[A]
지원군: 248,000명[A]
300,000명[B]
400,000명[C]
70,000 ~ 100,000명[D]
피해
사상자: 12,800명
사상자: 250,000명
포로: 40,000명
결과
카이사르의 완승, 갈리아 지역 제패.
영향
카이사르의 정치적 입지 상승 및 루비콘 강 도하.

1. 배경
2. 전개
3. 평가 및 영향
4. 창작물



1. 배경[편집]


기원전 59년 집정관에 선출된 카이사르는 임기 이후 갈리아 남부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헬베티족의 침입을 받은 갈리아 중북부의 하이두이족은 카이사르에게 군사 개입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헬베티족의 대이주를 저지하면서 시작된 갈리아 전쟁은 이후 '보호'를 명목으로 갈리아를 지배하려는 카이사르의 목적이 노골화되면서 갈리아족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수차례에 걸쳐 갈리아와 벨가이족의 반격이 있었으나 탁월한 전략가이자 전술가인 카이사르에 의하여 모조리 격퇴되었으며, 겨울의 숙영기간을 노리고 있었던 각개 격파 시도도 좌절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르베르니족의 젊은 족장 베르킨게토릭스가 로마의 압제에 맞서 자유를 쟁취하자고 호소하자 갈리아의 부족장들이 죄다 들고 일어나 대규모 항전을 시작했고 갈리아 최후의 항전답게 그 결집력도 어마어마하여 본래 카이사르에게 복종했던 하이두이족까지도 이에 호응할 정도였다. 이들은 청야전술로 로마군의 보급을 원천 차단해버렸고 게르고비아 공방전에서 로마군을 패배시켜 카이사르를 궁지로 몰아넣었으나, 그냥 몇달 기다리기만 해도 거의 확실히 이길 수있는 전쟁인데도, 어째서인지 최정예 군단병들을 거느린 임기응변의 귀재 카이사르를 상대로 급작스럽게 야전을 걸었다가(빈게네 전투) 허무하게 패배하고 말았다.[2]

이때 패배하면서 대부분의 기병을 잃은 베르킨게토릭스는 알레시아에 입성하여 농성 태세로 들어갔다. 어차피 카이사르가 한 번 이겼다고 한들, 보급도 끊긴데다가 언제 갈리아 측의 구원군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여유작작하게 공성전을 걸 수도 없었기 때문에 누가 봐도 철수하고 재기할 수 없게 될 것이 뻔한 상황이었으나...


2. 전개[편집]


베르킨게토릭스의 농성 전략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졌다고 해도 베르킨게토릭스는 이미 한 번 패배하고도 오히려 더 큰 지지를 받은 경험이 있었다. 게다가 갈리아의 성지인 알레시아에 주둔함으로써 당시 로마군과의 관계를 끊기를 주저하던 부족들을 고취시킬 수 있었고, 카이사르에게 갈리아로부터 즉시 철수할 수 밖에 없도록 강요하는 효과도 있었다. 당시 갈리아 곳곳에서 여러 부족들이 로마에 대항해 봉기하던 상황이었고, 숫자로만 보자면 카이사르의 군대는 알레시아에 농성중인 베르킨게토릭스의 주둔군에 대항하기에도 벅찬 수준이었다. 병력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카이사르의 군대가 알레시아에 포위망을 만드는 것은 배후의 갈리아군이 있기에 매우 위험한 일이었고, 결국 카이사르는 어쩔 수 없이 갈리아를 떠나야만 될 것이었다.

하지만 베르킨게토릭스가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로마 군단이 당대의 가장 유능한 전투 공병 집단이었다는 것이다. 하룻밤 묵을 군단 숙영지도 각잡아서 짓고 필요하다면 현장에서 이동식 공성탑과 공성망치를 제작해 공성전을 수행하는 로마군은 포위망에도 아예 목책과 해자로 도배를 해버려서 쥐새끼 한 마리 못빠져나가게 하며, 외부로부터 적이 더 올 것이 예상되면 배후에도 목책과 해자를 철저하게 발라댔다. 로마군을 숱하게 박살내고 다닌 제2차 포에니 전쟁의 풍운아 한니발 바르카조차도 이 로마식 포위 진지에 대한 배후 공격만큼은 실패했다. 이런 상황에서 식량이 더 부족한 쪽은 오히려 대군을 이끌고 허겁지겁 알레시아에 입성한 베르킨게토릭스 쪽이 되버려서, 로마군을 상대로 공성전을 벌여 이기지 못하면 굶어죽게 되어 있었다. 카이사르의 지시를 받은 로마군이 포위진지를 아예 요새 수준으로 지어대기 시작하자, 언덕 위에 자리잡은 도시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던 베르킨게토릭스는 크게 당황했다. 이 포위진지는 해자와 목책은 물론 방벽 및 망루에 기계식 투사병기, 그리고 유사시에 방벽 방어를 위해 출동할 병력들이 주둔하는 초소까지 갖추고 있었다.

포위망 건설이 시작되자 이것을 저지하기 위해 베르킨게토릭스는 기병을 내보내 로마군을 공격했고, 카이사르 역시 기병을 내보냈다. 양측의 교전은 배신해버린 갈리아인 기병들 대신 투입된 게르만족 용병 기마대의 대활약에 힘입어 로마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를 본 베르킨게토릭스는 기병을 도시 밖으로 모두 내보낸 뒤 보병만 도시에 머물게 하는 한편, 기병들에겐 갈리아인들에게 구조요청을 하게 했다. 이는 어떻게든 식량을 확보해보려는 조치였다.[3] 로마군의 포위망 건설이 아직 완료되지 않은 시점이라 이들은 무사히 포위망을 뚫고 달아났다. 이 소식을 들은 카이사르는 외부의 공격에도 버틸 수 있도록 자신의 전선을 중심으로 안과 바깥 양쪽에 포위망을 건설했다. 이때 로마군은 거기에 이중삼중으로 함정을 파고 꼬챙이를 박았으며, 가시덤불을 깔고 마름쇠를 뿌리는 등의 보강조치까지 취했다.

카이사르가 알레시아를 포위했다는 소식을 들은 갈리아족은 회의를 열어 각 부족들로부터 10,000명에서 30,000명씩의 병력을 제공받아 총 250,000명의 보병, 8,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베르킨게토릭스를 구원하기로 했다. 대병력을 집결한 갈리아인들은 콤미우스와 베르카시벨라우노스 등을 사령관으로 선출하고 알레시아를 향해 이동했다. 특히 아트레바테스족의 족장 콤미우스는 본래 카이사르의 브리타니아 원정을 직접 돕다가 적의 포로가 되기도 하는 등 카이사르로부터 큰 신임을 받았던 인물이어서 카이사르의 사고방식과 전투방식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이런 인물까지 카이사르를 배신한 것이었다.

이러는 동안 알레시아의 곡식은 바닥이 났고, 따라서 베르킨게토릭스는 노약자와 여자, 어린이들을 모두 알레시아 요새 밖으로 내보냈다. 이들은 로마군의 진영으로 가서 항복했으나 로마군은 그들의 수용을 거부했다. 《갈리아 전기》의 해당 대목에서는 수용을 거부한 이유와 받아들여지지 못한 민간인의 운명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4] 대부분의 민간인들은 두 진영 사이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비참하게 아사했을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5][6]

그러다가 드디어 알레시아에 도착한 갈리아족의 대군이 로마군을 포위했다. 즉, 2중 포위전이 된 것이다. 그들은 로마군의 포위망을 공격했고, 이것을 지켜본 알레시아의 갈리아인들도 성 밖으로 나와 로마군을 공격했다.

파일:external/www.greatmilitarybattles.com/Roman_vs_Gaul_Alesia.jpg
로마군은 적지에서 앞뒤로 포위된 어려운 상황에 처했으나 여러가지로 준비가 잘 되어 있었고, 게다가 짧게는 5년에 길게는 7년 가까이 전장에서 싸워온 카이사르의 휘하 정예병들의 전투력은 갈리아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또한 카이사르의 병사들은 이러한 불리해보이는 상황을 극복해내는데 꽤나 익숙한지라 결국 갈리아군의 수차례에 걸친 양면 공격을 잘 버텨냈다. 양측은 정오부터 해질녘까지 싸웠지만 갈리아군은 로마군에게 격퇴되었다.[7]

그날 밤 갈리아군은 다시 대규모로 공격을 감행했고, 베르킨게토릭스도 병사를 내보냈다. 암흑 속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로마군은 다시 갈리아군을 격파했다.

두 차례에 걸쳐 패배한 갈리아인들은 대책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로마인들의 포위망을 이루었던 방책으로 뛰어드는 것은 무모한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들은 지형에 대한 정보를 교환한 끝에 포위망의 북쪽에 언덕이 있는데 이곳은 지형상 너무 넓어 로마인들이 방책을 두르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다만 카이사르는 이곳이 약하다고 보고 2개 군단을 상주시켰는데 갈리아인들은 방책 돌파를 시도하기보다는 차라리 2개 군단을 공격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60,000명의 병력을 뽑아 이곳을 공략하기로 했다.

60,000명의 갈리아군 병력은 밤중에 우회하여 언덕 꼭대기에 이르렀고, 로마군 2개 군단은 이로써 언덕의 경사진 낮은 곳에서 갈리아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정오가 되자 갈리아군은 2개 군단이 머무는 보루를 향해 돌격을 개시했고, 이를 신호로 갈리아군 전체가 로마군의 진영을 공격했다. 베르킨게토릭스 역시 그의 병력을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가 호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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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는 격렬했으며, 특히 2개 군단이 있는 비탈진 경사면에서의 싸움은 매우 치열했다. 로마군의 전투력은 뛰어났으나 갈리아군도 그들의 최정예를 뽑은 데다가 언덕 위에서 공격하는 것이었으므로 밀리지 않았다. 갈리아군은 우세한 병력을 바탕으로 계속 후열의 병력과 전열의 병력을 교체하면서 체력의 저하를 막았다. 이를 파악한 카이사르는 라비에누스에게 6개 대대(0.6개 군단)을 보내 북쪽의 2개 군단을 구원토록 했다.

이러면서 카이사르는 진영 전체를 누비며, 병사들을 격려했다. 그리고 다른 보루들에서의 갈리아군의 공세가 약화되자 그는 각 진영에서 병력을 차출했다. 그 뒤 기병들을 진영 밖으로 내보내 길리아군의 배후로 기동하게 했다.

이윽고 카이사르는 라비에누스로부터 더이상 버티지 못하겠다는 전갈을 받게 되었다. 이 위급한 소식을 들은 카이사르는 이미 차출해 놓은 11개 대대(1.1개 군단)의 군단병을 이끌고, 라비에누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카이사르가 도착하자 그의 진홍색 외투의 색깔[8]로 인해 모두가 그의 도착을 알았고, 양 진영의 병사들은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전투는 더 격렬해지고 오랫동안 우열이 갈리지 않았는데 마침내 카이사르가 내보낸 기병이 갈리아군의 배후에 도착하여 그들의 후방을 향해 돌격했다. 이 공격으로 인해 갈리아군은 급격히 무너지게 되었다.

이 언덕에서의 결전마저 격퇴되자 갈리아인들은 절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들의 의지는 완전히 꺾였고, 따라서 갈리아의 대군은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다음날 베르킨게토릭스는 더이상 버틸 수 없음을 알고, 자신을 카이사르에게 넘기며 항복하라고 제안했다. 갈리아인들은 베르킨게토릭스를 카이사르에게 인도했는데 이때 그는 말을 타고 카이사르의 둘레를 한 바퀴 돈 뒤 그의 앞에 꿇어앉아 가만히 있었다고 한다.


3. 평가 및 영향[편집]


세계 역사상 비슷한 사례조차 찾기 힘든 도넛 형태의 앞뒤 포위 전투였다.[9] 로마군은 갈리아군을 포위하면서 동시에 포위당한채 싸웠다.

베르킨게토릭스의 항복으로 알레시아 전투는 막을 내렸고 이로써 갈리아에서의 로마의 패권이 확립되었다. 이후 로마가 멸망하기까지 갈리아족의 대규모 항전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상 라인 강 이서의 이후 역사를 결정지은 전투로 평가된다.

이 전투에서 베르킨게토릭스와 갈리아족은 로마인의 포위를 풀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다. 그러나 이들에겐 불행하게도 카이사르 휘하의 로마군은 무장 수준이 우수한데다가[10] 7년 동안의 전투 경험이 쌓여 매우 정예화되었으므로 안팎의 공격에도 무너지지 않았다.[11]일반적인 포위 공격에 무너지는 부대가 수두룩하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압도적인 숫적 열세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카이사르 군대의 강철 멘탈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12]

또한 세 번에 걸친 안팎을 동시에 공격한 전투 중 마지막 결전에서는 갈리아인들이 로마군의 포위망의 약한 부분이었던 언덕을 정확히 찔렀고, 로마군은 상당히 난처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로마군은 유연하게 포위망에서 11개 대대를 차출하여 구성을 변화하는 한편, 기병까지 배후로 기동하는 여유를 부려 승패에 결정적인 쐐기를 박았다.

당시 갈리아 전쟁은 기술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기도 했다. 알레시아 전투에서 정교하고 촘촘하게 배치되었던 참호와 말뚝, 장애물과 구덩이 등의 방어시설은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 지속적으로 기술적인 우위를 과시한 것은 겨우 50,000명의 병력으로 프랑스와 베네룩스, 독일 서부까지 포함하는 방대한 땅에 사는 수많은 부족의 복속을 이끌어낸 비결 중 하나였다. 배나 부교를 이용하는 대신 유럽에서 손꼽히는 대하천인 라인 강에 목조 다리를 놓은 일, 바다 건너 미지의 땅인 브리타니아에서 기병과 공성장비까지 포함된 대규모 군단의 상륙작전을 성공시키고, 보급과 전쟁 수행까지 해낸 일 등, 카이사르가 신이 나 《갈리아 전쟁기》에 자세히 묘사했던 조직적, 기술적 작업들은 당대의 로마인들에게 선풍적 인기를 끈 동시에, 현지인들에게는 공포심을 넘어 경외심을 느끼게 할 정도의 대사업이었다.

이렇듯 로마군의 우세한 기술력과 전투력, 갈리아인들의 정교하지 못한 지휘, 그리고 카이사르의 뛰어난 통솔력으로 인해 알레시아 전투는 로마군의 승리로 끝났고, 이로써 전 갈리아는 로마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 군사적인 위업을 바탕으로 카이사르는 내전에서 승리한 뒤 종신독재관에 취임했으며, 로마 공화정의 막을 내리고 제정으로 가는 길을 열게 되었다.


4. 창작물[편집]


아스테릭스》에서 족장 아브라라쿠르식스 등의 골족에게 이 전투 얘기를 꺼내면 그런 건 몰라!!!라는 식으로 대응하는 이들이 많다. 뭐, 이 만화는 골(갈리아 또는 켈트)족 얘기를 다루고 있으니 그럴 법도 하지만...

<토탈 워: 로마2>의 역사적인 전투 중에 이 전투도 있다. 역사적인 전투 중에서 가장 어려운 난이도로 악명이 높다. 질적 차이는 나지만 수적으로는 각각이 카이사르의 부대와 비슷한 갈리아 4개 군단이 시간차를 두고 앞뒤옆에서 쏟아진다. 즉 엄청난 수의 적과 쉴 새 없이 맞서는 전투이다. 그마저도 실제 역사상 병력 비율 차이에 비해서는 적은지라 이 전투를 깨기 위해 몇 번씩 리트라이하면서 카이사르의 위대함을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1> 확장판인 로마의 부흥 카이사르 3번째 시나리오(Ave Caesar)에서 이 전투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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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산정에 틀어박힌 베르킨게토릭스의 갈리아군과 그를 포위한 카이사르의 로마 군단, 그리고 베르킨게토릭스를 구원하러 달려온 갈리아군을 볼 수 있다.[A] A B 카이사르의 기록.[B] 플루타르코스의 기록.[C] 스트라보의 기록.[D] 현재 사가 추정.[2] 이때 카이사르가 거느린 게르만족 기병들이 활약했다.[3] 당시 야전에서는 군마에게 사료로 보리를 먹였다. 더구나 말이니만큼 군마가 먹는 보리의 양은 엄청난데 정작 농성전에선 쓸모가 없다.[4] 《갈리아 전기》, 7년, 78번 기사.[5] 다만 거부한 것에 대해서 역사학자들이 추측한 바로는 카이사르군의 의지 및 보급품 문제 때문에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카이사르의 성격상 이들을 만일 받아준다고 해도 자신의 본진은 갈리아 본토에 있기에 보급품 운송도 확실치 않고, 피난민까지 오면 식량은 더 많이 필요해질 것이며, 또한 이들이 있으면 군사들의 사기 저하나 기강 해이가 생길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 피난민들이 나중에 배신해서 로마인들의 요새 정보를 누설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편 카이사르가 여자와 노약자들을 받아주지 않음으로써 베르킨게토릭스에게 자신이 그렇게 만만한 존재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을 가능성도 있다. 카이사르가 전장에 나섰을 때마다 철두철미한 계산을 하던 성격이었음을 생각하면 이 가설이 가장 신뢰할만하다.[6] 세계 전쟁사 다큐멘터리에서는 베르킨게토릭스가 어쩔 수 없이 주민들을 모두 알레시아 요새 안으로 들여보냈다고 하나 확실치는 않다.[7] 해자 밖에 설치된 함정이 톡톡히 성과를 거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로마인들이 설치한 함정에 갈리아 지원군의 선봉대들이 걸려서 부상당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8] 로마군 총사령관이 입는 망토.[9] 그나마 비슷한 사례로 《삼국지》의 육항이 반란을 일으킨 서릉독 보천을 포위하는 동시에 몰려드는 양호의 서진군을 격퇴한 서릉 전투가 있다. 다만 십수만 명이 넘는 갈리아 병력을 상대로 싸운 알레시아 전투에 비해 규모가 작은 편이다.[10] 로마 군단병은 지중해 세계에서 유래가 없을 정도로 개개인이 중무장했는데 그 유명한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들도 개개인의 무장은 장창을 제외하면 린넨 갑옷에 작은 방패, 짧은 코피스로 가벼운 편이었다.[11] 훗날 내전기에도 카이사르군은 시종일관 폼페이우스군에 비해 수적 열세와 보급 부족이라는 열세를 가지고 전투에 임했지만 갈리아에서의 7년간 쌓은 전투 경험으로 극복해내는데 성공했다. 같은 수준의 무장, 지중해 세계 최강의 로마 군단병간의 전투에서도 경험으로 찍어 누른 카이사르 군단병들의 수준이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12] 사소한 조건이 몇 개 더 붙겠지만 당시 알레시아 전투 직전까지의 전황은 성공적인 역포위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알다시피 카이사르는 오히려 2중 포위를 역으로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