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그로텐디크 (r20200302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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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xander Grothendieck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lexander_Grothendieck.jpg
파일:Grothendieck-Riemann-Roch (1).jpg
그로텐디크-리만-로흐 정리에 대해 노트에 그린 낙서
표준어 표기는 '알렉산더 그로텐디크'지만 알렉산더 그로센딕이라는 표기도 많이 통용되고 있다.
1928.3.28~2014.11.13


1. 소개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파리에서
2.3. IHES 설립과 은둔
3. 정치적 성향
4. 수학 업적
5. 수학계의 평가
6. 여담


1. 소개


파일:그로센딕 강연함.jpg
프랑스에서 활동한 독일 태생의 수학자로, 필즈상 수상자 중 유일한 무국적자. 1928년 3월 28일생. 20세기 최고의 기하학라고 일컬어지며 함수해석학, 호몰로지 대수학, 대수기하학 분야에서 거대한 업적을 남겼다.[1]
그는 대수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스킴(대수기하학)에탈 코호몰로지와 같은 현대 대수기하학의 필수적인 분야를 혼자서 개발했다. 비유하자면 현대 대수기하학을 수레라고 생각했을 때, 바퀴 그 자체를 이 사람이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영향력이 엄청나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파일:그로센딕 어릴적.jpg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났으며, 우크라이나 태생의 유대인인 아버지 알렉산더 샤피로와 독일계 어머니 항카 그로텐디크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 부모가 혁명적 사회주의자였으며 특히 아버지는 과격 아나키스트였다. 이는 훗날 그로텐디크의 정치관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1933년~1934년에 부모가 파리로 이주한 후 그로텐디크는 함부르크에서 친척의 집에 머물며 자랐으며, 이후 1939년부터는 독일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의 유대인 피난 캠프를 떠돌아야 했다. 이후 아버지는 1942년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하고, 그로텐디크 본인은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의 유대인 강제 수용소를 전전하게 된다. 프랑스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의 가혹한 환경 속에서 신체적 공격까지 받으며 극도로 어려운 생활을 했다. 그는 수용소에서 대부분의 생활을 혼자 보냈는데, 그 때의 시간을 수용소 생활이 준 선물로 여겼다. 고독한 시간은 다른 사람과 전혀 소통하지 않고도 생각을 만들고 개념을 이끌어내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이때 겪은 경험들은 후의 그의 광기 어린 작업 결과 등 생애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후 르샹봉쉬르리뇽이라는 마을로 피신, 현지 학교인 콜레주 세베놀에 다니면서 바칼로레아에 합격했다. 이때부터 수학적 재능을 나타냈다. 그로텐디크는 수학 교과서에 나오는 진부하고 반복적인 문제가 너무 싫어서 스스로 흥미로운 문제를 만들고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완전히 무시해버렸다.
특히 수학 교과서에서 길이·넓이·부피의 정의를 제대로 내리지 않는 것에 불만이었다. 그런 와중에 그로텐디크는 르베그의 측도 이론을 기존의 증명 자료없이 혼자 힘으로 도출해내기도 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는 프랑스의 몽펠리에 대학교[당시]]공부했으며 이 때 그의 수학적 능력에 주목한 교수들의 추천으로 프랑스 파리로 가게 된다.
몽펠리에 재학 당시 그는 미적분을 가르친 술라(Soula) 교수에게 수학계에서 일어난 발견에 대해 물어보았는데, “수학 분야에 남아있던 마지막 공개 문제들은 르베그라는 사람이 모두 풀었다”는 대답을 들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고, 그는 이 말에 전혀 낙담하지 않았다.

2.2. 파리에서


파일:그로센딕 젊음.gif
그로텐디크는 파리에서 유망한 수학자 집단과 교류하며 수학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료 수학자들의 지식의 양과 습득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고, 다른 수학자들과 협력연구를 하는 데에 걸맞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그 이유는 그로텐디크가 다른 수학자들이 '합의를 통해' 참이라고 간주하는 개념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싫어했고, 그 개념들을 직접 증명하면서 나아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또 그는 야심이 매우 커서 쉬운 길을 가기보다는 어려운 문제를 붙들고 늘어지는 것을 좋아했고 모든 것을 무척 힘들게 노력해서 얻었다.
그는 그때의 기분을, 동료 수학자들에게 수학은 아주 손쉬운 것처럼 보인 반면 자신은 '느릿느릿 굴을 파며 산으로 올라가는 것처럼' 느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 집단에서 매우 뛰어났던 사람들은 유능하고 저명한 수학자가 되었다. 그러나 30~35년이 지난 후 나는 그들이 우리 시대 수학에 정말로 심오한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 알렉산더 그로텐디크

파리에서 그로텐디크는 앙리 카르탕, 클로드 슈발레, 앙드레 베유, 장피에르 세르, 로랑 슈바르츠 등과 어울렸으며, 로랑 슈와르츠에게 1950년부터 지도받았다.
그는 함수해석학을 공부, 위상 벡터 공간에 있어 세계적인 전문가가 되었다. 박사과정 당시 슈와르츠는 그에게 자기가 쓴 논문을 내밀었는데 문제의 말미에는 14개의 문제가 있었는데 슈바르츠와 디외도네라는 공동저자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였다.
그런데 그로텐디크는 몇주만에 이 문제의 절반 가까이를 해결했고 일년이 지나기 전에 나머지 것도 해결하였다. 당시 지도교수인 슈와르츠는 그로텐디크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그는 혼자 지내면서 하루에 스물다섯, 스물여섯시간씩 일했다."
그런 노력의 결과물이 300쪽이 넘는 학위 논문이었다. 이 논문에 대해 제출할 때 지도 교수는 엄청난 가치를 지닌 대작이라고 칭찬했다. 하지만 그로텐디크는 1957년부터 대수기하학과 호몰로지 대수학 방면에 뛰어들었다. 당시 대수기하학과 호몰로지 대수학은 난제와 미결 문제가 넘쳐나기로 유명한 분야였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그로텐디크 자신의 수학에 대한 고찰과 사색이 담겨있는 자필 저서인 [추수와 파종(Récoltes et Semailles)] 에서 그가 수학에 대한 여정을 시작하였던 해석학의 땅에서 대수기하학의 땅으로 넘어갔던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나는 아직도 마음을 완전히 빼앗겼던 (물론 내 생각일뿐이다.) 그때 그 기분을 잊지 못한다. 그건은 마치 메마르고 거친 스텝을 지나 갑자기 풍요로운 부가 넘치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선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부는 무한대로 늘어나 아무데나 손만 뻗어도 따고 캐낼 수 있었다.”


2.3. IHES 설립과 은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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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그로텐디크는 수학자 장 디외도네의 지원으로 고등 수학 연구소인 IHES를 창설했다. 이 시기 1966년 필즈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는데, 동유럽에 전개되던 소련군의 군사 활동에 항의한다고 모스크바에서의 시상식에 불참했다. 그나마 그리고리 페렐만과는 달리 IHES 동료인 Léon Motchane이 대리 수상을 했다만... 그러나 1970년, IHES가 프랑스 국방부의 군사용 연구 자금을 받아들인 것 때문에 그는 자신이 설립한 IHES에서 떠나며 잠시 수학 학계 자체를 떠났다.
또한 그로텐디크는 몸소 겪은 끔찍한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어린 시절에 큰 영향을 받아, 아나키즘적·평화주의적인 정치 성향을 보였다. 그로텐디크는 이러한 정치 성향으로 인해 베트남 전쟁 중, 일종의 반전 시위로 미군의 공중 폭격이 가해지고 있던 베트남의 하노이 근교의 숲속에서 범주론 세미나를 연 적도 있었다.
1968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학생 운동이 일어났는데, 그는 이 운동에 영향을 받아 그의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그는 1970년에 연구소에 사표를 내고, 반전 운동·반핵 운동·환경 보호 운동·생태계 보존 운동을 펼치며, 이를 위해 ‘생존’이라는 그룹을 결성했다. 이로 인해 이혼 등을 거치면서 가정은 붕괴됐고, 이들 운동을 위해 캐나다·미국·베트남 등지를 여행했다. 수년 후에는 그룹 내에서 서로의 의견이 맞지 않아 많은 충돌이 일어나면서 결국 해체되었다.
1975년에 그로텐디크는 La Clef des Songes라는 315페이지에 달하는 원고를 쓰는데 거기서 그는 꿈의 근원에 대한 그의 고찰을 통해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결론을 얻었다. 그 원고의 메모 중 일부로 자신이 존경하는 시대를 앞서간 몽상가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예언하는 이들에 대해 묘사했는데 그 목록에 있는 유일한 수학자가 바로 리만 가설로 유명한 베른하르트 리만이었다. 참고로 리만은 매우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고 그로텐디크 또한 말년에 기독교에 심취하였는데 이외에도 이상할 정도로 굉장히 유명한 수학자 중에 독실한 크리스천이 많다.
이후 그로텐디크는 자신이 공부했던 몽펠리에 대학교에서 교수가 됨으로써 다시 학계로 돌아왔고, 1980년대 초반에 수학계에 컴백하려고 anabelian 기하학과 갈로아-타이흐뮐러 이론에 관한 연구 주제를 프랑스 수학계에 제출했으나 그의 연구 테마는 수학계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근데 여기서 재미있는 부분이 abc 추측을 풀었다고 주장하여 현재 검토 단계에 있는 모치즈키 신이치 교수가 여기에 대해 지난 10여 년 동안 계속 연구하고 있었고 실제로 abc 추측을 증명하였다는 수백 페이지 정도 되는 논문에 그로센딕이 창안한 스킴(대수기하학)이론과 tale 및 l-adic 코호모로지 이론을 자유자재로 사용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링크 참조.
파일:그로센딕 은둔.jpg
1980년대 말에 완전히 은퇴하게 되는데, 이는 나이에 의한 자연스런 수순으로 보면 맞을 것이다. 28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환갑 때 학계를 떠났다.
은퇴 후 그로텐디크는 프랑스 남부의 농촌에서 농사로 소일하겠다며 자취를 감추었다. 이때 크라포르드상 수상도 윤리적 이유로 거절했으며, 학계는 물론 거의 모든 지인과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크라포르드상 수상을 거부한 이유로 스스로 작성한 편지 내용(편지)은 다음과 같다.

Ganelius 교수에게

저는 오늘 받은 당신의 4월 13일자 편지와 전보에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스웨덴 왕립 과학 재단에서 주는 (나의 학생이었던) 피에르 들리뉴와의 올해의 크라포르드상의 공동 수상에 대해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상(또는 다른 어떤 상)을 받는 것을 다음의 이유들 때문에 원치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1) 저의 대학교수로서의 월급과 연금은 독립적 생활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물질적 필요도를 충분히 넘습니다. 따라서 저는 더 이상의 돈이 필요 없습니다. 기초적인 부분에서 저의 업적의 뛰어남에 관해 저는 시간이 새로운 개념과 관점의 풍부함에 대한 유일한 결정적 테스트라는 것을 납득했습니다. 풍부한 업적은 후학들에 의해 이루어졌지, 영예에 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2) 더구나 크라포르드상 같은 명망 높은 상이 찾으려고 애쓰는 높은 수준의 연구가들은 대개 권력과 특권을 포함한 과학적 권위와 충분한 물질적 부 이상의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의 초부유함이 다른 이들의 궁핍함의 대가에서 비롯되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3) 재단에서 주목하는 저의 업적은 과학계에 제가 몸담고 있었고 정신과 가치를 근본적으로 공유하고 있던 25년 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저는 1970년에 과학계를 떠났고 저의 과학적 연구에의 열정을 유지하는 동안 마음 속으로는 끊임없이 과학적 환경에서 떠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동료들 사이에서 노골적인 도적질(특히, 자신을 방어하는 위치에 있지 않는 사람들의 희생)이 거의 일반적인 룰이 되어버렸고 가장 명백하고 사악한 상황이 용서받지 못하는 상태가 된 시점까지 (적어도 수학자들 사이에서는) 과학계의 윤리가 떨어졌습니다. 이러한 경우 각종 수상식에 참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건전치 못하며 더구나 사라져야 할 운명으로 봐왔던 과학계의 정신과 경향에 동조하는 것이고 따라서 이러한 정신과 경향은 정신적으로나 지성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자멸되어야 합니다.

이 세 번째 이유가 무엇보다도 가장 필수적입니다. 왕립 학회 기금의 운영에 있어 비판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번 세기가 끝나기 전에 완전히 예측 불가능한 사건이 과학과 목표, 과학적 업적이 이루어졌던 정신에 관한 우리의 관심을 완전히 바꿀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왕립 학회는 사람들과 기관들 사이에서 전례없는 조직 붕괴 후 전례없는 혁신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중요한 위치에 설 것이라 확신합니다.

저는 크라포르드상을 거절하므로서 당신과 왕립 학회가 불편해하는 것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바이며.

(후략) by 알렉산더 그로텐디크

말년에 몽펠리에 대학에서 지도하면서 시골촌에 살았는데, 그때 제자였고 현재 덕성여자대학교에 재직하는 윤석임 교수가 그로텐디크에게 김치 담그는 방법을 가르쳐 줬다고 한다(!). 이후 10 페이지 분량의 김치에 관한 에세이를 쓰기도 했다.. Le Kimchi 또한 이때 신의 존재성을 받아들이며 영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한다.
2014년 11월 13일에 별세하였다. 관련기사

3. 정치적 성향


부모와 어린 시절의 영향 등으로 그로텐디크는 정치적으로 급진 좌파 및 평화주의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다. 마오쩌둥 체제의 중국 공산당에도 관심을 많이 가졌다. 70년대 중후반부터 수학에서 점점 멀어진 이유 중 하나도 그의 정치 방면의 관심이 커졌다는 것. 환경, 반핵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링크
이런 성향 덕에 반전 시위에도 자주 참여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인데 반전시위의 일환으로 하노이 근교에서 세미나를 열기도 했다. 그가 세미나를 열던 때, 미군에서는 하노이에 공중 폭격을 가하고 있었다(...).
더 알고 싶은 사람은 Allyn Jackson의 'As if summoned from the void', 히로나카 헤이스케의 '학문의 즐거움', 존 더비셔의 '미지수 상상의 역사' 대수기하 파트, 혹은 그로텐디크의 자서전을 살펴보길 바란다. 또한 구글을 뒤져 보면 그로텐디크의 일생에 대한 많은 글을 찾아볼 수 있으니 역시 참고 바란다.(#)

4. 수학 업적


1. Topological tensor products and nuclear spaces
2. "Continuous" and "discrete" duality (derived categories and "six operations")
3. Yoga of the Grothendieck–Riemann–Roch theorem (K-theory, relation with intersection theory)
4. scheme 스킴(대수기하학)
5. topoi
6. Étale cohomology including l-adic cohomology 에탈 코호몰로지
7. Motives and the motivic Galois group (and Grothendieck categories) 모티브(대수기하학)
8. Crystals and crystalline cohomology, yoga of De Rham and Hodge coefficients
9. Topological algebra, infinity-stacks, 'dérivateurs', cohomological formalism of toposes as an inspiration for a new homotopic algebra
10. Tame topology
11. Yoga of anabelian geometry and Galois–Teichmüller theory
12. Schematic point of view, or "arithmetics" for regular polyhedra and regular configurations of all sorts
위 업적에서 중심적인 주제는 5번째로 기재된 topoi 이론이고, 첫번째와 마지막 번째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그로센딕이 밝혔다.

5. 수학계의 평가


현대 수학에 있어 그로텐디크의 영향력에 견줄 만한 것은 없다. 20세기의 후반부 50년 동안 가장 중요한 수학자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많은 수학자가 주저 없이 그로텐디크라고 말할 것이다. 그는 혼자서 현대 대수기하학을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수학 전체에 대한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어놓았다. 랭글랜즈 프로그램의 기하학적 재공식화에서 사용한 함수와 시프에 대한 사전은 그로텐디크의 연구를 특징짓는 심오한 통찰을 보여주는 훌륭한 예다.

○ 에드워드 프렌켈, 내가 사랑한 수학: 천재 수학자가 찾아낸 사랑의 공식

사람들은 흔히 수학에 대해서 점점 더 강력한 폭발물로 바위를 깨고 들어가는 터널 공사처럼 점점 더 강력한 도구를 적용하여 점점 더 깊이 미지의 세계에 파고드는 작업이라는 인상을 품는다. 물론 그것도 한 방법이다. 하지만 1960년대와 70년대에 순수 수학의 많은 부분을 자신의 그림에 따라 다시 빚어냈던 그로텐디크는 견해가 달랐다. <우리가 알아야 할 미지의 대상은 흡사 물의 침투에 저항하는 바위나 진흙땅처럼 보였다. ... 바다는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조용히 다가간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것 같고,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으며, 물이 너무 멀어서 우리에게는 소리도 잘 안 들리지만.... 마침내 저항하던 물체를 둘러싸고 마는 것이다

○ 조던 엘렌버그, 틀리지 않는 법: 수학적 사고의 힘

우리(수학자)들은 새로운 결과를 최대한 일반화시켜 설명해야 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있다. 이렇게 하려면 각각의 주제에 관련된 개념과 추상화의 전 세계를 새롭게 건설해야만 한다. 이 과정 후 독창적인 사례는 사라지고, 각 정리에 들어있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명료해질 때까지 이 새로운 우주에서의 진지한 도제 수업은 본질적인 것이 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과정이 얼마나 극적으로 잘 작동하는지 알 수 있었는데, 그로텐디크와 함께 활동했던 대수 기하학자 세대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그로텐디크는 놀라운 천재로 아름다우면서 심오한 아이디어와 전적으로 새로운 담론의 우주, 즉 '스킴' 개념[2]

을 이 분야로 끌어들었다. 많은 사람들, 심지어는 이 분야의 지도적인 수학자들 중 일부마저도 이것을 채택하거나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그로텐디크의 성공은 그러한 거부가 어리석은 것임을 보여주었다.

그는 대수 기하학의 정원에서 자라난 모듈리 공간(moduli space)이라는 꽃에 사로잡혀 있다고 회고한 적 있는데, 이 정원에는 놀라운 사람들이 있다며 대표적으로 날카롭고 뛰어난 베유와 정말로 인간이 아닌 다른 종으로 보이는 그로텐디크를 언급했다.

○ 데이비드 멈포드 (필즈상)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대단히 사소하지 않은 정리가 짠 하고 나타났다.

○ 피에르 들리뉴 (필즈상, 그로텐디크의 제자)

그로덴티크와의 관계는 그리 만족스러운 건 아니었지만 그의 우월함은 압도적이었다. 그의 세미나는 파리의 모든 수학자들을 매료시켰지만 내게는 그들에게 내세울 새로운 것이 없었다. 나는 그로 인해 엄격한 수학의 세계를 벗어나 좀 더 일반적인 개념의 세계로 나아가게 되었다. 누군가가 계산을 하고 있다면, 다른 누군가는 꿈을 꾸어도 좋지 않겠는가?

○ 르네 톰 (필즈상)

창조에는 필요도 있어야 되지만 어느 시점에서는 욕망이 생기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창조 활동을 뒷받침하는 배경에는 "이러한 것을 만들 수 있었으면..."하는 욕망이나 부족한 것을 한결같이 구하는 갈망이 없으면 안된다. 그로텐디크나 자리스키 선생님처럼 상상을 초월하는 역경 속에서 살아온 배고픈 수학자가 뛰어난 업적을 올린 것은, 욕망이라는 정념이 항상 그들을 움직였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은 무엇인가에 열중하고 있을 때는 설사 고생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경우를 그로텐디크가 지나온 가시밭길과 비교하는 것도 송구스럽지만 나의 체험으로 미루어보면, 그도 역시 고생을 실감한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잇따른 역경이 그의 수학에 대한 끊임없는 정념을 만들고 그것이 정열적인 창조 활동을 뒷받침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히로나카 헤이스케 (필즈상)

나처럼 평범한 수학자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 고등과학연구소에 들어설 때의 기분은 아마도 무슬림 순례자들이 메카에 발을 디딘 순간에 느끼는 가슴 벅참과 비슷할 것이다. 이곳은 그로텐디크가 10여년동안 쉬지않고 사도들에게 신성한 말씀을 가르친 곳이 아니던가.~중략

○ 응오 바오 쩌우 (필즈상)

수학은 20세기 전반에 걸쳐 점점 더 추상적이고 일반화되었지만, 이 추세의 가장 큰 핵심은 알렉산더 그로텐디크였습니다. 그의 신비로운 기술은 모든 불필요한 가설을 제거하고 너무 깊게 파묻혀 있는 내부 패턴을 가장 추상적인 수준에서 그들 스스로 드러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마치 마술사처럼ㅡ그 진정한 본성이 드러난ㅡ오래된문제의 해결 방법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보여줍니다.

○그로텐디크 부고 당시 데이비드 멈포드, 존 테이트 (울프,아벨상 수상자)의 기고글


6. 여담


총 55편의 논문과 13권의 학술서적 15권의 일반교재를 서술하였다. 특이하게도, 수학계 3대 저널인 애널스, 저널오브매쓰, 매스매티카에 발표한 논문은 없다. 그가 제출한 논문은 모두 프랑스에서 출간하는 저널에서만 출간되었으며, 모두 프랑스어로 기술되었다. 그로텐디크는 적지 않은 수의 책을 저술했는데, 그 두께가 상상을 초월한다. 대표적인 저술서는 Eléments de géométrie algébrique(EGA), Séminaire de géométrie algébrique(SGA) 로 대수기하 전공자들에게 경전으로 꼽힌다.
1960년대 후반에는 생물학, 물리학에도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주로 리처드 파인만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필즈상 수상자 중 유일한 무국적자.
펜과 종이가 없으면 사고가 되지 않으며 늘 펜으로 적어가며 생각해야 연구가 진행되는 버릇이 있었다. 전형적인 야행성 연구가여서 오전에 푹 자고 밤에 일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눈만 감으면 바로 잠에 빠져들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한창 연구에 매진할 때에는 길바닥이나 방바닥을 가리지 않고 아무 곳에서나 자고 싶으면 잠을 잘 수 있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유대인 수용소에서 복싱을 익혔으며 평생 복싱을 연마했다. 이 실력으로 교수 신분일 때 경찰관 2명을 때려눕혔던 전력도 있다(...).
그로텐디크가 보여준 수학적 퍼포먼스로 인해 당대에 활동하던 많은 수학자들이 본의 아니게 좌절을 맛보기도 했다. 르네톰, 히로나카 헤이스케, 데이비드 멈포드 등 여러 필즈상 수상자들을 좌절시켰다. 그리고 하버드의 대수기하학 학파의 수장인 자리스키마저 그보다 한참 어린 그로텐디크에게 완전히 압도당했다고 한다.
그로텐디크와 같은 연구 모임인 부르바키의 리더 격이었던 앙드레 베유는 그로텐디크를 미친 듯이 질투했다고한다. 하지만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지겔 의외로 장 피에르 세르는 그로텐디크보다 앙드레 베유를 더 높이 평가한다. 그로텐디크의 놀라운 점은 만개했다는 현대의 수학에서 스킴, 에탈 코호몰로지 등 난해하면서도 보편적인 개념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만들어내는 불가사의함이다.
평생 동안 일류 수학 학술지에 논문을 기재하지 않았다.참고로 존 내시의 친구인 존 밀너가 편집장이었던 바로그 학술지였다. 총 논문 수가 60개가 채 안 된다. 그로텐디크가 저술한 책들도 있는데 양이 몇 권 안 되는 반면 두께만큼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가 한창 연구에 전념하던 50~60년대에 그는 본인의 연구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연구의 방향을 잡는 데도 능숙했다고 한다. 한창 때 워낙 영향력이 컸고 존 내시가 정신분열증으로 방황했던 어느 한 시기에도 그로텐디크라는 이름을 여러 번 거론했다고 한다. 사실 그로텐디크가 존 내시 내외에 굉장한 호감이 있었다고 한다.
은퇴 후 한국을 비공식으로 몇 번 왔다 갔으며 히로나카 헤이스케 교수가 서울대에게 강연할 때 같이와서 서울대에도 온 적이 있다. 김치에 관심을 보여 관련 논문을 쓴 적이 있다.
논문지도 받는 학생의 페이퍼를 받으면 어마어마한 분량의 코멘트로 종이를 가득 채워서 돌려 주었다고 한다.(Illusie의 증언)
사실 기행으로 유명한만큼 어처구니없는 미신들도 굉장히 많은데, 그로텐디크는 1990년 63세의 나이에 대학에서 정년퇴임을 하고 그리고 시골로 돌아가 농부가 되었고 아무도 그의 행적을 모른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정년퇴임 후에도 농사 지으면서 다른 수학자들과 교류하며 잘 지내고 있었다고 한다.
음악을 매우 좋아해서 가끔씩 여유시간마다 피아노를 쳤으며 피아니스트나 작가가 되고 싶어했다고 한다.
1970년대 초에 IHES를 그만두고 사회환경운동을 하면서 Bumby라는 럿거스 대학의 대학원생과 함께 살았는데 둘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나중에 하버드 수학과에 진학하였다.
대수기하로 전공을 바꿀 때 대수기하에 관한 지식이 전무해서 많은 부분을 장 피에르 세르에게 질문해서 보충했다. 지식이 의외로 부족하였는지 일례로 세르에게 "리만제타함수의 영점이 무한히 많은가?"하고 물어보았었다고 한다.
뮌스터 대학 수학과 명예교수인 빈프리트 샤를라우는 그로텐디크의 전기를 쓴 사람인데 2008년 3월 27일 그로센딕의 80번째 생일을 맞아 <차이트>지에 그로센딕을 기념하는 샤를라우 교수의 글 [더 높은 차원에서]를 전면에 실었다. 당시 독일정부 학술연구부 국장은 그 글이 게재된 시기가 만우절이 있는 주간이라는 걸 예리하게 언급하며 질문했다. 그런 사람이 진짜 있기는 한겁니까?
수학자였지만 1960년대 후반에는 생물학, 물리학에도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주로 리처드 파인만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어느 수학자가 IHES를 방문했는데 도서관에 책이 매우 적었다. 그래서 그로텐디크에게 도서관에 책이 왜이리 없냐고 물었다. 그 말을 들은 그로텐디크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책을 읽지 않습니다. 책을 씁니다."
그가 한창 연구에 전념하던 1950~1960년대에 그는 본인의 연구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연구의 방향을 잡는 데도 능숙했다고 한다. 한창 때 워낙 영향력이 컸고 존 내시가 정신분열증으로 방황했던 어느 한 시기에도 그로텐디크라는 이름을 여러 번 거론했다고 한다. 사실 그로텐디크가 존 내시 내외에 굉장한 호감이 있었다고 한다.
역대수학자들의 랭킹을 매긴 사이트(http://fabpedigree.com/james/gmat200.htm)에서 무려 11위를 기록했다. 초상화가 걸린 수학자들중에서 유일하게 21세기까지 생존했던 수학자이며 나머지 사람들과 생몰년대가 적으면 수십년에서 많으면 수백년까지 차이난다.
파일:역대 수학자 순위.png

[1] 보통 20세기에 태어난 수학자중 최고의 수학자중 한명으로 여겨진다.[당시] 몽펠리에 대학은 파리의 대학에 비해 교육적으로 낙후된 곳이었다.프랑스에서 학자가 되기 위해 대부분 거쳐가는 에콜 노르말이 아닌 일반대학 출신. 밑에 언급된 앙드레 베유, 장피에르 세르, 카르탕, 르네톰 등은 모두 에콜 노르말의 수학자들이다. 일반대학 출신이었기에 그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은 면도 없지않아 있었을 것이다.[2] 대수 기하학에서 국소적으로 가환환의 스펙트럼과 동형인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