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플레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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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플레밍의 수상 및 등재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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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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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1945년

1946년
조지프 얼랜저
허버트 스팬서 개서[1]
알렉산더 플레밍
하워드 플로리
언스트 보리스체인
허먼 조지프 멀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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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2대

토머스 칼라일

3대

제임스 몬크리프
남작


4대

윌리엄 스털링맥스웰
준남작


5대

에드워드 스탠리
백작


6대

스펜서 캐번디시
공작


7대

아치볼드 프림로즈
백작


8대

스태퍼드 노스컷
백작


9대

숌버그 커
후작


10대

조지 고셴
자작


11대

제임스 로버트슨
남작


12대

알렉산더 브루스


13대

프레드릭 해밀턴템플블랙우드
후작


14대

로버트 핀리
자작


15대

리처드 홀데인
자작


16대

조지 윈덤

17대

길버트 엘리엇머레이키닌먼드
백작


18대

허버트 키치너
백작


19대

데이비드 비티
백작


20대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백작


21대

스탠리 볼드윈
백작


22대

존 길모어
준남작


23대

윈스턴 처칠


24대

이언 해밀턴


25대

에드먼드 알렌비
자작


26대

허버트 그리어슨


27대

존 도널드 폴록


28대

앤드루 커닝엄
자작


29대

앨러스터 심

30대

알렉산더 플레밍


31대

시드니 알프레드 스미스


32대

제임스 로버트슨 저스티스

33대

조 그리몬드
남작


34대

제임스 로버트슨 저스티스

35대

맬컴 머거리지

36대

케네스 올솝

37대

조너선 위트니 개리옥 윌즈

38대

고든 브라운

39대

마그누스 마그누손

40대

앤서니 로스

41대

데이비드 스틸
남작


42대

아치 맥퍼슨

43대

뮤리얼 그레이

44대

도니 먼로

45대

맬컴 매클라우드

46대

존 커훈

47대

로빈 하퍼

48대

토머스 디엘
준남작


49대

마크 밸러드

50대

이언 맥워터

51대

피터 맥콜

52대

스티브 모리스

53대

앤 헨더슨

54대

데보라 카옘베





FRS FRSE FRCS
알렉산더 플레밍 경
Sir Alexander Fleming


파일:알렉산더 플레밍.jpg

1943년, 자신의 연구소에서[1]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obel_Prize.png 1945년 노벨생리학·의학상 수상자
본명
알렉산더 플레밍
Alexander Fleming
국적
[[영국|

영국
display: none; display: 영국"
행정구
]]

출생
1881년 8월 6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로스필드
사망
1955년 3월 11일 (향년 73세)
영국 잉글랜드 런던
직업
의사, 세균학자, 생명공학자
학력
로열 폴리테크닉 인스티튜션[2]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 의과대학[3]
(의학 / MBBS) (1906년)
종교
가톨릭
서명
파일:알렉산더 플레밍 서명.svg

1. 개요
2. 어린 시절
3. 업적
4. 관련 인물
4.1. 앨므로스 라이트
4.2. 플로리와 체인
5. 기타



1. 개요[편집]


I have been trying to point out that in our lives chance may have an astonishing influence and, if I may offer advice to the young laboratory worker, it would be this—never neglect an extraordinary appearance or happening.

(저는 확률이 우리의 삶에 미칠 수 있는 놀라운 영향력에 대해 강조해왔고, 젊은 연구원들에게 조언드리죠, 절대 비상한 출현이나 현상을 등한시하지 않는 자세를 가지십시오.)


영국의사이자 생물학자로, 20세기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라고 불리는 페니실린을 발견하여 항생제의 아버지라 불린다. 항생제가 살린 사람의 숫자는 이루 말할 수 없으며,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영국 외에 스페인(투우장)이나 체코에서도 그의 동상을 볼 수 있다. 이 공로를 통해 1944년 기사작위(Knight Bachelor)를 받았으며, 1945년 노벨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한다.


2. 어린 시절[편집]


1881년 8월 6일 스코틀랜드의 시골 마을 로크필드(Lochfield)에서 태어난 플레밍은 평범한 농부 집안의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풍족하지는 못했지만 플레밍은 어렸을 때부터 스코틀랜드의 아름다운 전원에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호기심을 키울 수 있었다. 그리고 플레밍이 7살일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지만 가족의 노력 덕분에 , 누나들과 함께 학교를 다니며 교육을 받으면서 기초 지식들을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다블 중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런던으로 가서 병원을 열고 의사 생활을 하던 형 토머스로부터 런던으로 와서 공부를 하라는 편지를 받게 되고 플레밍은 14세 때 런던으로 가 공부를 하게 된다. 그리고 토머스의 손을 빌리지 않고 생활하기 위해 상선에서 4년간 사무원으로 일하던 플레밍은 삼촌인 존 플레밍이 죽어서 남긴 유산으로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고 런던의 로열 폴리테크닉 인스티튜션(현 웨스트민스터 대학교)에 입학하여 장학금을 받을 만큼 뛰어난 성적을 자랑했다. 이후 플레밍은 여러 의과 대학을 놓고 고민하다가 세인트 메리 병원(현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에서 본격적인 의사가 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4]

이후 세인트 메리 병원에서 후술할 앨므로스 라이트 박사 아래서 연구원으로 활동하면서 엄청난 학구열로 라이트 박사에게 인정받았고, 이후 라이트 박사가 면역 체계에 대해 연구하는 것을 도왔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라이트 박사 및 동료들과 함께 후방에서 군의관으로 활동했는데, 수많은 병사들이 부족한 치료 체계로 인해[5] 패혈증을 비롯한 온갖 질병으로 사망하는 걸 지켜보면서 더더욱 치료약에 대한 집념을 불태우기도 했다.


3. 업적[편집]



3.1. 라이소자임[편집]


1921년에 플레밍은 〈Tissues and Secretions (세포와 분비물)〉라는 논문에서 라이소자임이라는 항생 물질을 발표한다. 앞에서 언급되었듯 1921년 플레밍의 라이소자임의 발견은 소독약 및 방부외과 기술에 전환점을 가져오게 되었다. 플레밍은 라이소자임 발견 이전에는 미생물이 동물의 체내에 들어올 경우, 결코 공격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라이소자임은 플레밍에 의해 콧물 속에서 처음 발견되게 되었는데, 사람과 동물에서 분비되는 점액 속에 포함되어 있는 효소로 인간의 방어 면역 체계 중 하나이다. 라이소자임의 발견에 대한 업적은 대부분 플레밍에 의해 연구되었다. 플레밍은 6년 후 페니실린을 발견한 후에도 여전히 라이소자임이 페니실린보다도 더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앙드레 모루아가 쓴 플레밍의 전기에서 플레밍의 조수의 말을 인용한 바에 따르면 플레밍은 당시 자신이 감기에 걸렸을 때의 콧물을 노란색 군체의 미생물에 첨가하였다. 그는 몇 개의 배양접시를 씻던 도중 노란색 군체의 미생물의 한쪽에 미생물이 없는 부분을 발견하였고, 그 안의 미생물은 반투명으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분해 중인 미생물이 보였다고 표현하고 있다. 플레밍은 자신이 첨가한 점액 속에는 바로 주위에 있는 미생물을 분해시킬 수 있는 물질이 들어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페니실린의 우연적 발견 신화의 이야기와 매우 비슷하다. 하지만 라이소자임의 우연적 발견의 경우는 페니실린의 발견과 정반대이다. 페니실린의 경우는 미생물(포도상구균)이 실험실에서 공급되고 외부로부터 곰팡이(Penicillium notatum)가 공급된 데 반해, 라이소자임의 경우는 미생물을 분해할 수 있는 효소는 실험실에서 공급된 것이고, 미생물이 외부로부터 들어온 오염물질이었다.

라이소자임의 발견에서 플레밍에게 실망스러웠던 점은 외부에서 공급된 미생물은 마이크로코쿠스 리소데익티쿠스(Micrococcus lysodeikticus)라는 독성이 없는 세균이라는 점이었다. 즉, 라이소자임은 독성이 없는 세균에는 효과가 있지만 독성 세균에는 그 효과가 거의 없다. 플레밍은 이후에 라이소자임이 무엇인지 규명하고, 그 기작에 대해서 연구하였다. 라이소자임 발견 경험은 6년 후 페니실린을 발견한 것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라이소자임 자체의 낮은 항생 능력은 플레밍이 화학요법에 대해 좁은 시각을 갖도록 하기도 하여서 페니실린 발견 이후에 페니실린의 가능성을 보지 못하게 한 부분도 있다.

한편 이 무렵 그는 라이소자임의 발견과 함께 인간의 혈액과 다른 체액의 민감성 적정 실험과 정량 방법을 고안하여 나중에 페니실린의 적정에 사용하기도 하였다. 출처


3.2. 페니실린[편집]


스펀지》 때문에 실수로 콧물을 플레이트에 떨어뜨려 발견한 걸로 잘못 알려졌는데, 이는 위 문단에서 언급된 라이소자임이다.[6]

1928년 플레밍은 포도상구균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었는데 연구 도중 휴가를 다녀왔었다. 문제는 플레밍이 실수로 포도상구균 샘플 배양 접시를 제대로 닫아놓지 않은 채 휴가를 떠났다는 것이다. 이전부터 플레밍의 연구실은 지저분하기로 유명했다니 놓고 간 샘플이 오염됐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지사.[7] 돌아온 플레밍은 방치해 뒀던 배양 접시에 있던 균들이 거의 죽음에 이른 것을 발견했고,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여 다시 확인해 본 결과 포도상구균이 있던 자리에는 어디선가 뜬금없이 나타난 괴상한 곰팡이 녀석이 포도상구균을 맛있게 먹어치우고 있었고 "어? 이 곰팡이가 포도상구균을 다 죽였네?" 라고 발견하게 되었다. 이 곰팡이의 이름이 페니실리움이었고, 이를 이용해 만든 것이 바로 항생제의 원료가 되는 페니실린이다.

이 푸른곰팡이가 어디서 어떻게 플레밍의 배양 접시에 생겼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고 여러 가지 이야기가 덧붙여져 오늘날 전해지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바깥에서 날아다니던 푸른곰팡이가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와 플레이트에 앉았다는 이야기다. 창문 이야기 말고도, 플레밍의 연구실 아래층에서는 곰팡이를 연구하던 과학자가 있었는데 아래층 연구실의 곰팡이가 플레밍의 연구실로 올라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플레밍이 1929년도에 작성한 "On the antibacterial action of cultures of a penicillum,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ir use in the isolation of B.Influenzae" 라는 논문에는, ".. these plates were necessarily exposed to the air and they became contaminated with various micro-organisms.", 다시 말해, '배양 접시는 어쩔 수 없이, 혹은 필연적으로 공기 중에 노출되어 다양한 미생물로 오염되었다' 라고 적혀 있다. 휴가 이야기는 쏙 빼놓고, 나름 자신의 실수를 덮으려는 시도로 보인다.

그러나 이 초창기의 페니실린은 너무 민감하여 효력과 수명이 매우 짧았고 이 때문에 학계에서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던 플레밍의 논문에서는 1시간 동안 섭씨 56-80도 정도의 가열은 페니실린의 항생작용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그 와중에 페니실린보다 효과가 좋다고 알려진 설파제(Sulfonamide)가 등장하자 플레밍은 이 설파제를 연구하느라 페니실린을 거의 묻어두다시피 했다.[8]

그러다가 1939년에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플로리와 체인이 라이소자임에 이어 페니실린에 관심을 두고 연구를 하다가, 1940년에 인공 생성에 이어 정제하는 데에 성공했다. 플레밍은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이 보관해 둔 페니실린 표본을 보냈고, 이때 한 사람에게 충분히 쓸 만한 양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다만 플레밍이 페니실린 보급에 관여한 것은 여기까지로, 이후 임상시험 끝에 패혈증에 대한 효과를 검증하고 논문을 써내 세간의 관심과 지원을 끌어내는 데 성공한 것은 플로리와 체인의 업적이며, 그리고 제약의 핵심인 대량생산은[9] 생산 의뢰를 받은 화이자에서 공정에 성공한 마가렛 허친슨 루소의 업적이다. 페니실린 하면 플레밍만이라고 생각하는 건 그리 정확하지 않은 견해인 셈이다. 이후 페니실린이 널린 퍼진 역사는 밑에 플로리와 체인 소항목을 참조. 그래도 플레밍 역시 이 공로를 인정받아 전쟁이 끝난 1945년 12월에 페니실린을 정제한 플로리&체인과 함께 노벨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

1955년 3월 11일 런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3세. 장례식은 일주일 후인 3월 18일에 거행되었으며 유해는 영국의 위인들이 안장된 세인트 폴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4. 관련 인물[편집]



4.1. 앨므로스 라이트[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lmroth_Wright_c1900.jpg

라이트 (1900년) |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앨므로스 에드워드 라이트(Almroth Edward Wright, 1861년 8월 10일~1947년 4월 30일)는 영국의 세균학자, 면역학자이며, 플레밍의 스승이다. 장티푸스 예방 접종 체계를 최초로 마련한 인물이며, 항생물질이 항생제 내성을 일으킬 수 있다면서 예방의학을 강하게 주장한 사람이기도 하다.

1902년에 세인트메리 병원의 의학부를 설립하여 장티푸스 예방 접종 체계를 마련했고, 옵소닌을 인체의 혈액에 주입하는 방법도 고안했다.[10] 또한 라이트는 쉽게 예방할 수 있었던 질병 때문에 수많은 병사들이 사망한 제2차 보어전쟁을 예로 들면서 제1차 세계대전에도 백신 1천만 개를 북부 프랑스군에 전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의학적 주장이 높게 평가되었는지 1906년 5월에 왕립학회의 회원이 된다.

또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항생물질의 위험성을 예지했고, 당시 수많은 학자들의 주장(대강 '혈청 속에 세균을 죽이는 물질이 있다')에 맞서 '미생물은 병의 원인이 아니라 병을 옮기는 매체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학계의 반대파로부터 '앨므로스 뤙(Wrong)'[11]이라며 비판을 들었다. 그러나 라이트가 죽은 지 50년이 지난 뒤에야 현대 과학자들이 그의 이론을 연구한 결과 결국 그가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하지만 꼭 옳은 소리만 했던 것은 아닌데, 루이 파스퇴르와 플레밍을 예로 들면서 의학에 논리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그 두 사람도 우연히 치료약을 찾아낸 것이기에 그 주장만큼은 절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2] 또한 괴혈병의 원인을 식중독으로 보고 이를 주장했지만[13] 이 역시 1932년에 비타민C의 존재가 밝혀지면서 틀리고 말았다. 무엇보다 여성의 뇌는 남성과 다르므로 공적, 사회적 사안을 처리할 수 없다며 여성 참정권에 반대한 적이 있는데, 이 발언은 현대 기준으로 실로 상당한 논란의 소지가 있다.

조지 버나드 쇼의 친구였으며 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쇼 역시 1906년에 작성한 연극인 《의사의 딜레마(The Doctor's Dilemma)》에서 라이트에게서 의학적 지식을 얻었다면서 그의 이름을 올렸으며, 《의사들은 어떻게 다른 의사를 사랑하는가!(How These Doctors Love One Another!)》에서 라이트와 다른 의사와의 논쟁을 다루기도 했다.[14] 물론 라이트의 그 '여성 뇌 발언'에는 반대하면서 무식하다고 표현했다.


4.2. 플로리와 체인[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oward_Walter_Florey_1945.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rnst_Boris_Chain_1945.jpg

하워드 플로리
언스트 체인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하워드 월터 플로리(Howard Walter Florey, 1898년 9월 24일~1968년 2월 21일)는 호주 출신의 의사, 약리학자, 병리학자이며, 언스트 보리스 체인[15](Ernst Boris Chain, 1906년 6월 19일~1979년 8월 12일)은 독일계 영국인 화학자였다. 참고로 체인은 유대인이었기에 홀로코스트를 피하기 위해 1933년 4월 2일에 단돈 10파운드[16]만 들고 영국에 도착했다고 한다.

1938년, 체인 및 노먼 히틀리(Norman Heatley, 1911년 1월 10일~2004년 1월 5일)와 함께 연구를 하던 플로리는 플레밍의 페니실린 연구에 대한 기사를 읽고 라이소자임과 페니실린 연구를 시작했다. 이후 상기한 바와 같이 페니실린의 정제에 성공하여 첫 번째 환자인 앨버트 알렉산더(Albert Alexander, 1897년~1941년 3월 15일)에게 페니실린을 투약했으나 양이 충분치 못해서[17] 사망했다. 이에 플로리와 체인은 상대적으로 양이 덜 필요한 아이들 위주로 실험을 했다.

게다가 이 와중에 제2차 세계대전이 터져 유럽이 난리통이 되어 연구를 진행할 수 있을지조차 불명확한 상황이었으나, 1941년 6월에 운 좋게도 록펠러 재단이 원조를 해주겠다는 연락을 보냈다. 이에 플로리과 연구진은 미국의 일리노이 주, 피오리아(Peoria)로 이동하여 대량 생산을 위해 분투했고, 1942년 말에 썩은 멜론에서 발견된 페니실리움 크리소게눔[18]을 토대로 대량 생산에 성공한다. 이 대량 생산된 페니실린은 임상실험을 거치자마자 곧바로 전쟁 중인 유럽으로 전달되어 수많은 연합군 병사들을 구했다. 게다가 이 페니실린은 5년 뒤인 6.25 전쟁에서도 활약하여 수많은 장병들을 구했다.

그런데 1945년, 플로리는 저 연구는 어디까지나 과학적 관심이었을 뿐이고 약의 발견은 덤이었다고 밝혔다.

사람들은 저와 다른 연구진들이 고통받는 인류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페니실린을 연구했다고 때때로 생각하는 모양이더군요. 고통받는 인류에 대해선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흥미로운 과학 실험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약이 생겨났다는 건 매우 기쁘긴 합니다만, 그걸 위해 연구를 시작한 건 아닙니다.

- 하워드 플로리, 《오스트레일리지언 사이언스》라는 잡지에서



5. 기타[편집]


  • 어릴 때 플레밍의 아버지가 윈스턴 처칠을 죽음으로부터 구해 처칠이 플레밍의 학비를 대 줬다는 소문이 있는데 이는 거짓이다. 처칠이 튀니지에서 병마로 고생할 때에 페니실린이 아닌 위에서 언급한 설파제로 회복되었는데 찌라시들로 인해 말이 와전되었다고. 비슷한 이야기로 몸이 약한 처칠이 요양 온 시골에서 물에 빠지자 지나가던 시골 소년인 플레밍이 구해주었고, 이후 처칠은 학비 지원을 해줬고 플레밍은 훗날 처칠이 처칠이 사경을 헤맬 때 페니실린으로 치료해서 보답했다는 감동적인 이야기도 있지만 물론 사실무근이다. 처칠은 윈스턴 처칠/생애에서 보듯이 '일단은' 귀족 가문 출신이었으니 플레밍이 없었더라도 잘 지냈다. 7살이라는 어중간한 나이 차이(처칠 74년생, 플레밍 81년생)에 착안한 낭설인 듯. "기적의 약 제작자와 최고의 총리가 사실 알고 지냈다더라! 우리 영국 대단해!"라는 애국심의 발로에서 비롯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 의대 시절엔 자동차 경주도 좋아했다고 한다. 실제로 플레밍은 월급이 적었던 젊은 시절에도 무리해서 포드 사의 최신형 모델을 구입해 아내에게 혼나기도 했다고.

  • 페니실린 외에도 살균 물질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많이 했는데, 눈물이 탁월한 효과를 자랑한단 걸 발견하자 누가 올 때마다 레몬즙을 뿌려 눈물을 뽑아냈다 한다. 심지어 어린아이에게도 그 짓을 했다. 물론 나중에 그 대가로 돈을 줬다고 한다. 이는 플레밍만이 아니라 다른 의학자들도 많이 했다. 즉 페니실린이 일종의 대박을 치자, 과학계에 긍정적 한탕주의가 몰아친 셈. 이런 열풍을 타고 발견된 것 중엔 1944년에 셀먼 왁스먼이 발견한 스트렙토마이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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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플레밍의 사진을 찾아보면 이 시절에 찍은 것들이 많은데, 페니실린의 대량생산이 드디어 실현된 이후에야 본격적인 명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후술하듯이 페니실린을 첫 발견한 1928년 무렵부터 '기적의 치료약'으로 유명했지만, 막상 의료 현장에서 마음놓고 쓸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만들기가 어렵다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2]웨스트민스터 대학교[3]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 의과대학의 전신인 St Mary's Hospital Medical School 졸업.[4] 플레밍은 젊어서는 수구와 의용대 생활, 늙어서는 당구 등 학자치고는 사교적인 활동을 꽤 많이 행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만화 위인전 "20세기의 큰 인물 시리즈(웅진출판사)"에서는 학생 시절에 대학 간 수구 경기를 하다가 세인트 메리 병원 팀에게 깊은 인상을 받아서 그 곳으로 진학을 결정한 것으로 묘사되었다.[5] 특히 부상이 발생하면 일단 붕대부터 감았는데, 플레밍이 환자를 관찰하면서 연구해 보니 햇빛을 차단해 상처를 더 썩게 만들어서 패혈증을 초래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당시의 소독약 또한 너무 독해서 이로운 병원균까지 죽여버리기도 했다.[6] 어떻게 된 일인지 앗 시리즈 3권인 《화학이 화끈화끈》에서도 잘못 나와 있다. 이런 비슷한 경우로 피니어스 게이지가 있다.[7] 앞의 콧물 투척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지금이라면 인사고과에서 빨간 줄 그어질 만한 위험한 행위이다. 현대 과학에서 변인통제 제대로 안 한 논문은 그냥 쓰레기 취급받는다.[8] 그러나 설파제는 효능이 좋은 대신 부작용도 너무 심해서 말이 많았다. 과거에는 중요한 항생제였으나 지금은 부작용 때문에 많이 쓰이지 않는다.[9] 이건 빈말이 아니다. 신약 그 자체를 개발하고 이를 검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신약이 환자들에게 널리 보급되도록 만드는 것 또한 중요하기 때문이다. 문서 참고. 특히 이 즈음은 제2차 세계대전이 막 발발한 상황이었고, 플레밍은 이미 제1차 세계대전에서 군의관으로 일하며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적이 있으니 누구보다도 페니실린을 널리 퍼트리고 싶었을 것이다.[10] 플레밍은 1902년부터 근무, 연구를 시작했으니 이 때부터 라이트의 제자가 된 것으로 보인다.[11] Wright가 'right(옳다)'란 말과 동음이의어임을 이용한 조롱.[12] 논리에 관해서 자주 들어봤을 법한 귀납논증연역논증을 비교해보면 잘 알 수 있다. 귀납논증은 오류를 도출할 수 있긴 해도 실수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지만, 연역논증은 철저히 사실에서 사실을 도출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이미 알고 있는) 사실 외에 (모르는) 사실은 밝혀낼 수 없다.[13] 이 가설은 로버트 스콧남극에서 대충 납땜하여 부실해진 통조림을 갖고 갔기 때문에 더욱 옳은 것으로 알려졌다. 자세한 것은 아문센 VS 스콧 문서 참고.[14] 상술한 만화 위인전 "20세기의 큰 인물" 시리즈에서는 이에 착안하여 당시 라이트의 제자였던 플레밍이 (직접 언급되지는 않지만) 쇼에게 "논문에서 시험관들을 병정에 비유한 게 인상적이었다"라는 찬사를 듣는 장면이 나온다. 사실 여부는 불명이지만 플레밍은 라이트를 평생 스승으로 섬겼으니 실제로 쇼를 만나봤을 가능성도 없진 않다.[15] 독일 출신이므로 에른스트 샤인(?)으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16] 당시 환율로 2016년의 632파운드(2016년 6월 15일 기준으로 약 105만원)[17] 정확히는 초반에는 페니실린에 의한 차도를 보였으나, 페니실린의 양이 부족해서 부득이하게 치료를 중단하는 바람에 다시 악화되어 사망한 것이다.[18] 페니실리움 노타툼과 페니실리움 크리소게눔은 현재는 같은 종으로 분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