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르 찬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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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 제21대 총리
알렉산더르 촐로프 찬코프
Александър Цолов Цанков


파일:Aleksandar_Tsankov.png

출생
1879년 6월 29일
불가리아 공국 오랴호보
사망
1959년 7월 27일 (향년 80세)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벨그라노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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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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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력

직업
교수, 정치인
정당
민주연합[2]
불가리아 국가사회운동
서명
파일:빈 가로 이미지.svg

1. 개요
2. 생애
3. 참고문헌
4. 대중매체



1. 개요[편집]


불가리아 왕국의 정치인.

2. 생애[편집]



2.1. 초기[편집]


1879년 루마니아-불가리아 접경지대의 오랴호보(Оряхово)에서 출생한 찬코프는 1910년부터 소피아 대학교의 정치경제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2.2. 전간기[편집]


1923년 알렉산더르 스탐볼리스키 내각을 무너뜨린 쿠데타가 발발했을 때 찬코프는 이 쿠데타의 주역으로 활동하였으며 쿠데타가 성공한 뒤 6월 9일 살해당한 스탐볼리스키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다.[3] 총리 재임 시기 그는 공산주의 조직들을 불법화하고 계엄령을 선포하여 사회 분위기를 극도로 억압적으로 만들었다. 때문에 코민테른은 찬코프 재임기의 불가리아에 대해 "승리한 파시즘 정권"이라 비난하고 불가리아 공산당 대신 농민연합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러나 그리스국경 분쟁이 벌어진 후 조기대응에 실패한 찬코프에 대한 비난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으며, 설상가상 사건으로 인한 국가 부채를 해결하지 못한 찬코프는 총리에서 사임해야 했다.

정계에서 물러난 후에는 파시즘 지지자로 활동하였으며, 특히 아돌프 히틀러를 지지하였기에 1932년 나치당을 모방한 불가리아 국가사회운동을 창설하였다. 하지만 나치는 불가리아 국민군단연합을 더 지지하였고, 무엇보다 1934년부터 불가리아의 정권을 잡은 즈베노가 이들을 지지하지 않아 큰 세력을 만들지는 못했다.


2.3. 제2차 세계 대전[편집]


2차 대전 시기에 찬코프는 불가리아 정부의 반유대주의 정책에 대한 중단을 요구하는 디미터르 페셰프의 편지에 서명하였다.[4] 하지만 나치 독일은 이를 몰랐는지 1944년에 그를 독일에 설립된 친독 망명정부의 총리로 임명하였다. 이는 1944년 9월 9일 이후로 불가리아의 정권을 잡은 불가리아 조국전선에 대응한 조치였다.[5]

2.4. 전후[편집]


2차 대전이 추축국의 패배로 끝난 후 찬코프는 아르헨티나로 망명했고, 1959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마을 벨그라노에서 사망했다.

3. 참고문헌[편집]




4. 대중매체[편집]


Hearts of Iron IV에서는 Battle for the Bosporus DLC 이후 불가리아의 장관으로 등장하며 불가리아가 파시즘 정권을 수립하고 나서 국가사회주의 운동을 통합하면 디시전으로 지도자로 만들 수 있다. 성능은 안정도가 쭉쭉 떨어지는 점만 제외하면 상당히 좋다고 평가받으며 만약 섭정의회가 수립될 때 지도자로 있었으면 섭정의회 의장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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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망명.[2] Демократически сговор[3] 이 쿠데타는 불가리아 공산당이 중립적인 태도를 보였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평가받는다.[4] 이 편지에는 30명이 서명하였는데, 우익 정치인들은 찬코프를 포함해 단 두명이 서명하였다.[5] 웃긴 건 조국전선의 총리 키몬 게오르기에프는 찬코프의 쿠데타에도 함께한 인물이었고, 즈베노 쿠데타로 한번 총리가 되었던 인물이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