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솔제니친

덤프버전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obel_Prize.png 노벨문학상 수상자

20세기 [ 펼치기 · 접기 ]
1901년
1902년
1903년
1904년
1905년
쉴리 프뤼돔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테오도르 몸젠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비에른스티에르네 비외른손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프레데리크 미스트랄, 호세 에체가라이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스페인 국기(1785–1873, 1875–1931).svg
헨리크 시엔키에비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Military_ensign_of_Vistula_Flotilla_of_Congress_Poland.svg.png
1906년
1907년
1908년
1909년
1910년
조수에 카르두치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러디어드 키플링
파일:영국 국기.svg
루돌프 오이켄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셀마 라겔뢰프
파일:스웨덴 국기.svg
파울 폰 하이제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1911년
1912년
1913년
1914년
1915년
모리스 마테를링크
파일:벨기에 국기.svg
게르하르트 하웁트만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파일:인도 제국 국기.svg
수상자 없음
로맹 롤랑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1916년
1917년
1918년
1919년
1920년
베르네르 폰 헤이덴스탐
파일:스웨덴 국기.svg
카를 기엘레루프, 헨리크 폰토피단
파일:덴마크 국기.svg
수상자 없음
카를 슈피텔러
파일:스위스 국기.svg
크누트 함순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1921년
1922년
1923년
1924년
1925년
아나톨 프랑스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하신토 베나벤테
파일:스페인 국기(1785–1873, 1875–1931).svg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브와디스와프 레이몬트
파일:폴란드 국기(1919-1927).svg
조지 버나드 쇼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1926년
1927년
1928년
1929년
1930년
그라치아 델레다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앙리 베르그송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시그리드 운세트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토마스 만
파일:독일 국기(3:2 비율).svg
싱클레어 루이스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1931년
1932년
1933년
1934년
1935년
에릭 악셀 카를펠트
파일:스웨덴 국기.svg
존 골즈워디
파일:영국 국기.svg
이반 부닌
루이지 피란델로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수상자 없음
1936년
1937년
1938년
1939년
1940년
유진 오닐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로제 마르탱 뒤 가르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펄 벅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프란스 에밀 실란패
파일:핀란드 국기.svg
수상자 없음
1941년
1942년
1943년
1944년
1945년
수상자 없음
요하네스 빌헬름 옌센
파일:덴마크 국기.svg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파일:칠레 국기.svg
1946년
1947년
1948년
1949년
1950년
헤르만 헤세
파일:독일 국기.svg 파일:스위스 국기.svg
앙드레 지드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
파일:영국 국기.svg
윌리엄 포크너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버트런드 러셀
파일:영국 국기.svg
1951년
1952년
1953년
1954년
1955년
페르 라게르크비스트
파일:스웨덴 국기.svg
프랑수아 모리아크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윈스턴 처칠
파일:영국 국기.svg
어니스트 헤밍웨이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할도르 락스네스
파일:아이슬란드 국기.svg
1956년
1957년
1958년
1959년
1960년
후안 라몬 히메네스
파일:스페인국 국기(1945–1977).svg
알베르 카뮈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파일:소련 국기.svg
살바토레 콰시모토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생존 페르스
파일:프랑스 국기.svg
1961년
1962년
1963년
1964년
1965년
이보 안드리치
파일: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국기.svg
존 스타인벡
파일:미국 국기.svg
요르기우스 세페리스
파일:그리스 국기(1822-1978).svg
장폴 사르트르
파일:프랑스 국기.svg
(수상 거부)
미하일 숄로호프
파일:소련 국기.svg
1966년
1967년
1968년
1969년
1970년
슈무엘 요세프 아그논, 넬리 작스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파일:독일 국기.svg 파일:스웨덴 국기.svg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가와바타 야스나리
파일:일본 국기.svg
사뮈엘 베케트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파일:소련 국기.svg
1971년
1972년
1973년
1974년
1975년
파블로 네루다
파일:칠레 국기.svg
하인리히 뵐
파일:독일 국기.svg
패트릭 화이트
파일:호주 국기.svg
에위빈드 욘손, 하뤼 마르틴손
파일:스웨덴 국기.svg
에우제니오 몬탈레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1976년
1977년
1978년
1979년
1980년
솔 벨로
파일:미국 국기.svg
비센테 알레익산드레
파일:스페인국 국기(1945–1977).svg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 파일:미국 국기.svg
오디세우스 엘리티스
파일:그리스 국기.svg
체스와프 미워시
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 파일:미국 국기.svg
1981년
1982년
1983년
1984년
1985년
엘리아스 카네티
파일: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국기(1971–1990).svg 파일:영국 국기.svg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파일:콜롬비아 국기.svg
윌리엄 골딩
파일:영국 국기.svg
야로슬라프 사이페르트
파일:체코 국기.svg
클로드 시몽
파일:프랑스 국기.svg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1990년
월레 소잉카
파일:나이지리아 국기.svg
조지프 브로드스키
파일:미국 국기.svg
나기브 마푸즈
파일:이집트 국기.svg
카밀로 호세 셀라
파일:스페인 국기.svg
옥타비오 파스
파일:멕시코 국기.svg
1991년
1992년
1993년
1994년
1995년
나딘 고디머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
데릭 월컷
파일:세인트루시아 국기(1979–2002).svg.png
토니 모리슨
파일:미국 국기.svg
오에 겐자부로
파일:일본 국기.svg
셰이머스 히니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1996년
1997년
1998년
1999년
2000년
비스와바 심보르스카
파일:폴란드 국기.svg
다리오 포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주제 사라마구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귄터 그라스
파일:독일 국기.svg
가오싱젠
파일:프랑스 국기.svg




파일:템플턴상 로고_01.png
템플턴상 수상자

[ 펼치기 · 접기 ]

[ 20세기 수상자 ]
1973
1974
1975
1976
1977
1978
1979

제1회


제2회


제3회


제4회


제5회


제6회


제7회

마더 테레사
프레레 로저
사르베팔리
라다크리슈난

레오 요제프
수에넨스

치아라 루비치
토마스 토렌스
니코 니와노
1980
1981
1982
1983
1984
1985
1986

제8회


제9회


제10회


제11회


제12회


제13회


제14회

랄프 웬델 버후
시슬리 손더스
빌리 그레이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마이클 보르도
앨리스터 하디
제임스 I. 맥코드
1987
1988
1989
1990
1991
1992
1993

제15회


제16회


제17회


제18회


제19회


제20회


제21회

스탠리 재키
이나물라 칸
칼 프리드리히
폰 바이체거

바바 암테
찰스 버치
임마누엘
야코보비츠

한경직
찰스 콜슨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제22회


제23회


제24회


제25회


제26회


제27회


제28회

마이클 노박
폴 데이비스
빌 브라이트
판더랑 샤스리
아프타벨

지그문트
스턴버그

이안 바버
프리먼 다이슨


[ 21세기 수상자 ]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제29회


제30회


제31회


제32회


제33회


제34회


제35회

아서 피콕
존 폴킹혼
홈즈 롤스턴 3세
조지 엘리스
찰스 하드
타운스

존 배로우
찰스 테일러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2014

제36회


제37회


제38회


제39회


제40회


제41회


제42회

미하우 헬레르
베르나르
데스파냐

프란시스코
아얄라

마틴 리스
텐진 갸초
데즈먼드 투투
마시 할리크
2015
2016
2017
2018
2019
2020
2021

제43회


제44회


제45회


제46회


제47회


제48회


제49회

장 바니에
조너선 색스
알빈 플란팅가
압둘라 2세
마르셀로
글레이서

프랜시스
콜린스

제인 구달
2022
2023

제50회


제51회

프랭크 윌첵
에드나 아단
이스마일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Александр Солженицын|Aleksandr Solzhenitsyn

파일:Aleksandr-Solzhenitsyn.jpg

본명
알렉산드르 이사예비치 솔제니친
(Алекса́ндр Иса́евич Солжени́цын)
국적
[ 펼치기 · 접기 ]
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svg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 (1918-1922)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 (1922-1974)
무국적 (1974-1990)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 (1990-1991)
파일:러시아 국기.svg 러시아 (1991-2008)

출생
1918년 12월 11일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 키슬로보츠크
사망
2008년 8월 3일 (향년 89세)
러시아 모스크바
직업
소설가, 수필가, 철학자, 역사학자
서명
파일: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서명.svg

[ 펼치기 · 접기 ]
묘소
러시아 모스크바 돈스코이 수도원
학력
로스토프 주립대학교
사조
리얼리즘, 르포르타주
활동 기간
1962년 – 2008년
종교
무신론러시아 정교회
부모
아버지 이사키 솔제니친(?~1911)
어머니 타이시야 셰르바크(?~1944)
배우자
나탈리야 레셰톱스카야(1940~1956, 1957~1972)
나탈리야 스베틀로바(1973년 결혼)
자녀
3명
주요 수상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obel_Prize.png 노벨문학상 (1970)
파일:템플턴상 아이콘.png 템플턴상 (1983)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중기
2.3. 후기
3. 작품
4. 그에 대한 말들
5. 수상
6. 여담
7. 외부 링크
8.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_solzhenitsin.jpg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러시아를 대표하는 대문호 중 한 명이며 20세기 문학사냉전시대 세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편집]



2.1. 초기[편집]



파일:external/bookmix.ru/authors_1265469354.jpg

1918년 러시아 SFSR 테레크주 키슬로보츠크(Кисловодск, Kislovodsk)[1]에서 유복자로 출생했고 5살에 로스토프로 이주했다. 어머니의 건강과 가정의 열악한 경제 사정으로 아해 모스크바 유학을 포기하고 1936년 로스토프 대학교 물리수학과에 입학해 1941년 6월 졸업하였고 통신대학에서 문학 관련 과정을 이수하였다.

대학 졸업 직후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소련 육군에 자원 입대하여[2] 수송대에서 운전병으로 근무하다가 1942년 11월 포병장교 학교에 입학, 중대장으로 임관하여 여러 전투에 참전했으며 1944년 7월 8일 적성훈장을 받기도 했다.


2.2. 중기[편집]


그러나 그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 중 이오시프 스탈린의 판단력을 의심하는 내용과 조롱하는 표현[3]이 문제가 되어 1945년 2월 스메르쉬에 의해 동프로이센에서 체포되어 심문을 위해 루뱐카로 보내졌고, 이 곳에서 승리의 날을 맞았다. 7월 7일, NKVD에 의해 8년 형을 선고받고 카자흐스탄의 예키바스투즈(Екібастұз)[4] 굴라크로 보내졌다. 굴라크에서 일반 죄수들처럼 지내던 중 수학을 잘하는 것이 발견되어 연구원 전용 수용소[5]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수용소 당국과 마찰을 빚으면서 다시 굴라크로 복귀해[6] 석방될 때까지 다시 카자흐스탄의 수용소 탄광에서 중노동을 해야 했다. 이 생활을 바탕으로 그의 역작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수용소군도를 썼다.

수감 생활이 끝난 후 1953년 3월 2일, 카자흐스탄 남부 비를리크 마을로 추방되어 나흘 뒤 스탈린이 죽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수용소 시절부터 앓던 종양이 도져 이듬해 우즈베키스탄타슈켄트로 옮겨 치료를 받고[7], 유형지에서 교사 생활을 하였으나 다행히도, 니키타 흐루쇼프의 반 스탈린주의로 그는 1956년에 사면되었고 물리학, 수학 교사로 활동한다. 이어 1960년, 노비 미르(Новый мир)지의 알렉산드르 트바르돕스키(Александр Твардовский)를 만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의 초안을 작성했다.

1962년 이후 소련 관료제를 비판한 <유익한 사업을 위하여>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제 1원에서> 같은 수용소 생활을 묘사한 작품들을 발표하며 소련 문단에서 주목받는 작가로 부상하는 동시에, 문단에 파문을 일으켰다.[8] 흐루쇼프의 실각과 함께 소련작가동맹에서는 그의 작품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 반소 작가라고 비난할 정도였다. 심지어 굴라크에서의 노동을 통한 개화를 주장하는 어용 작품과 솔제니친은 사실 죄수가 아니었다는 흑색선전까지 나올 정도였다. 결국 반동으로 찍혀 1969년 11월에는 소련작가동맹에서 쫓겨난다.

1968년 9월, 솔제니친의 <암병동>과 <연옥 1번지>가 사미즈다트 형태로 유통되었고,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로 197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소련 정부와 소련작가동맹은 이를 좌시하지 않았으며 그의 노벨문학상을 인정하지 않고 노벨상 포기와 공개 전향, 추방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요구했다.[9] 하지만 솔제니친은 한번 스웨덴으로 출국하면 다시는 소련에 돌아가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의 우려대로 이때 소련 공산당 정치국은 솔제니친을 처리하기 위한 회의를 소집했었다. 유리 안드로포프는 솔제니친을 스웨덴에 보내서 노벨상을 받게 하고 대신에 소련 국적을 박탈해서 다신 돌아오지 못하게 하자는 방법을 제안했다.[10] 그러나 내무장관 니콜라이 셸로코프가 추방에 반대하였다. 참고로 지금까지 러시아 국적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4명의 작가(부닌, 파스테르나크, 숄로호프, 솔제니친)중에 소련 당국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밀어준 작가는 숄로호프 뿐이다. 부닌은 적백내전 때 공산당이 싫어 조국을 등지고 프랑스로 떠난 망명자였고, 파스테르나크와 솔제니친은 소련 체제를 비판적으로 서술했다는 이유로 모진 탄압을 받았다.

한편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호응을 얻기 전인 1958년부터 굴라크에서 자신이 겪은 일들과 수용소 당국의 현실, 재소자 227명의 사연과 증언들을 정리해 소련 수용소 시스템에 대해 구체적으로 저술하기 시작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쓴 원고를 지키기 위해 매우 조심했지만 1969년부터 소문을 들은 KGB의 주목을 받았고 1973년 8월 결국 KGB에 의해 솔제니친의 원고가 발각되자 남은 원고들을 서방으로 밀반출시켰다. 이 원고가 1973년 12월에 프랑스에서 처음 발표된 <수용소 군도> 제1부였다.

1972년 9월, 닉슨-브레즈네프 정상회담 개최 직전 소련 정치국은 다시 솔제니친 문제를 논의했고 안드로포프와 알렉세이 코시긴이 솔제니친 추방을 주장했으나 결국 정치국은 솔제니친에게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솔제니친은 소련 지도부에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버리고 러시아 정교회 신앙을 통해 나라를 다스리라는 서한을 보냄으로[11] 정면 도전장을 내밀었고, <수용소 군도>의 존재는 기어이 1974년에 서방에까지 알려졌다.

발칵 뒤집힌 소련 정치국은 일단 1974년 2월 13일 솔제니친을 일단 투옥시키고 어떻게 처리할지 논쟁을 벌인다. 안드로프프는 다시 솔제니친을 추방하자고 제안했으나 브레즈네프는 끝까지 이를 거절했다. 정치국은 폭발했고 안드로포프와 그로미코가 솔제니친을 추방하자고 제안한 것에 대해서 소련 지도부는 너무 물러터진 조치라고 반발하고 나섰다. 니콜라이 포드고로니는 마오쩌둥은 공개총살도 불사하는데 언제부터 소련이 이렇게 물러진거냐고 솔제니친을 체포하라고 요구했고 코시긴은 솔제니친을 조리돌린 후 시베리아 광산에 보내서 썩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서방 기자놈들은 추운 시베리아까지 가서 취재하진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안드로포프는 솔제니친을 더 이상 내버려뒀다간 국제관계가 아니라 국내가 끝장날 판이라고 브레즈네프에게 경고했고 재빨리 빌리 브란트로부터 솔제니친을 받아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마침내 브레즈네프는 솔제니친의 추방에 동의하고 솔제니친을 서독으로 추방했다. 솔제니친은 그렇게 소련에서 쫓겨나 서독을 거쳐 스위스 취리히에 체류하다가, 마침내 1976년 10월 미국버몬트에서 은거 생활을 시작했다.

2.3. 후기[편집]


1974년 이후 무국적이었던 그는 1990년 소련 국적을 회복했다. 냉전기가 종결되고 소련이 붕괴된 후인 1994년에 귀국하였는데, 미국 체류 중에도 미국의 천민자본주의를 강하게 비판한 일로 반공단체로부터 미움을 받았었다. 한마디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대표국가 양쪽에 모두 밉보였다

이후 그는 그동안 정리한 수용소 군도를 4부로 출간하였고[12] 필생의 꿈인 러시아 혁명사를 집필하게 되었다.[13]

솔제니친은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의 격변기 당시 러시아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갈 것으로 기대하며 옐친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하지만 1992년부터 1993년 즈음 러시아 정부에서 무리하게 추진한 신자유주의 경제 개혁이 실패해버리고, 이에 대항해 일어난 시위를 유혈 진압하는 모습을 보면서 옐친에게 실망하며 반 옐친파로 돌아섰다. 귀국한 뒤에는 러시아 채널1의 TV토크쇼를 진행하고 <아르구멘티 이 팍티(Аргументы и факты)>라는 신문[14]에 글을 기고하면서 옐친을 비판했다. 결국에 정부 비판적인 성향으로 옐친에게 밉보이면서 아예 프로그램 자체가 날아갔다. 그리고 1998년에 옐친 정부가 준 러시아연방 최고 훈장인 사도 성 안드레이훈장의 수훈도 거부해버렸다.[15] 그러다가 푸틴이 집권한 이후, 러시아의 물질주의 세태 비판과 전통적인 애국주의에 대한 회귀를 주장했으며 푸틴을 강력하게 지지했다.[16]

2008년, 그가 사망하자 러시아 언론은 "러시아를 대표하는 양심 중 1명이었으며, 조국 러시아를 향한 긴 발걸음이 이제 멈추게 됐다." 라고 애도했다. 2008년 모스크바의 "대공산주의자 거리(Большая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ая улица)"가 그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거리(Улица Александра Солженицына)"로 바뀌었다.[17]

솔제니친은 친소련적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에게 대체로 "조국의 어두운 점을 서방에 폭로한 자"라고 미움받고 러시아의 좌파들에게는 소련의 부정적인 점을[18] 터무니없이 과장하고 훗날 또 다른 권위주의 독재 정권을 지지한 위선자라고 미움받는다. 그의 정치적 노선과 행보를 떠나, 적어도 그의 작품 속에서 묘사되는 소련 시절의 굴라크와 이로 대표되는 죄수들의 현실에 관한 묘사에 대해서는 러시아에서도 인정하는 권위자이다. 무엇보다도 솔제니친 본인이 비록 서방에 망명했을지라도 본인 자신의 신념에 따라 굴라크에서 생활하고 목격한 기록을 남겼던 만큼, 작가로서 결코 수준이 떨어지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다.[19]

2006년 러시아 1 채널에서 그의 작품 중 '제 1원에서(В круге первом)'를 드라마로 제작, 방영한 적이 있다. 솔제니친이 해설 역할로 직접 참여했으며, 예브게니 미로노프 등이 출연했다.


3. 작품[편집]


  •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Один день Ивана Денисовича, 1962년)
  • 암 병동 (Раковый корпус, 서방에서는 1967년 출판, 소련에서는 1990년 출판)
  • 제 1권(第一圈) (В круге первом, 서방에서는 1968년 출판, 소련에서는 1990년 출판)[20]
  • 수용소군도 (Архипелаг ГУЛАГ, 서방에서는 1973-1975년 출판, 소련에서는 1989-1990년 출판, 한국에서는 1973-74년 출판)
  • 붉은 수레바퀴 (Красное колесо, 1993년)
  • 200년을 함께 (Двести лет вместе, 2001년 1부 출판, 2002년 2부 출판)


4. 그에 대한 말들[편집]


제국을 멸망시킨 작가.

뉴욕 타임스[21]


솔제니친은 모범적인 고귀함과 극도의 용맹을 지닌 사람이다. 강력한 소설가이자 없어서는 안 될 역사가인 그는 동포들의 고통을 스스로 짊어지고 소련인과 러시아 역사의 이름으로 기괴한 제도를 장엄하게 기소한 예술가, 도덕주의자다.

― 아서 M. 슐레진저 주니어 (미국 역사학자)[22]


솔제니친의 비범한 정치와 지적인 위업은 포로수용소의 지옥에서 나와 현대사에서 도덕적, 기록적 힘이 비할 바 없는 책들에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23]

(페루, 스페인 소설가)[24]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이반 투르게네프, 레프 톨스토이, 막심 고리키와 같은 재능을 가진 문학적 천재다.

― 해리슨 솔즈베리 (미국 비평가)[25]


그는 우리의 유일한 살아있는 고전이다.

예브게니 옙투셴코[26]


진정한 참된 애국자.

블라디미르 푸틴[27]


솔제니친은 러시아 문학의 위대한 도덕적 전통이 끝나는 마지막 러시아 작가다. 앞으로 100년이 지나도 그는 여전히 전세계 문학의 관련이 있을 것이고, 그 후에도 적어도 100년 이상은 지속될 것이다.

― 독일의 소리[28]




5. 수상[편집]


  • 대조국전쟁 훈장 2등급(1943.8.15)
  • 적성훈장(1944.7.12)
  • 1941년에서 1945년까지 위대한 애국 전쟁에서 독일에 대한 승리에 관한 훈장(1957)
  • 쾨니히스베르크 점령 훈장(1958)
  • 프랑스 언론인상(1969)
  • 노벨문학상(1970)
  • 이탈리아 언론인 연합 Golden Cliché 상(1974.5.31)
  • 프랑스 언론 'Le Point' 선정 올해의 인물(1975)
  • 템플턴상(1983)
  • 랴잔시 명예시민(1990.9.20)
  • RSFSR 국가상 문학부문(1990)
  • 로모노소프 황금메달(1998)
  • 사도 성 안드레이훈장(1998, 수상 거부)
  • 성 모스코프스키 왕자의 훈장(1998)
  • 프랑스 도덕정치과학원 대상(2000.12.13)
  •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명예박사(2003)
  • 성 사바 훈장[29](2004)
  • 올해의 러시아 국가 혁신상(2004)
  • 러시아 연방 국가상[30](2006)
  • 불가리아 보테브상[31](2008)
  • 루마니아의 별 훈장 1등급 대십자(2008)


6. 여담[편집]


  • 소련 시절에는 반소 작가로서 명망이 높았지만 어디까지나 공산주의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것이지 조국을 싫어한 게 아니라서 소련 해체 이후로는 러시아 민족주의자의 면모를 강하게 드러냈다. 체첸 사태 당시 체첸 분리주의자들을 강경하게 진압할 것을 주장하기도 할 정도였다. 그의 작품 <수용소군도>에 따르면 비록 유형지였지만 카자흐스탄에서 그가 막 자유의 몸이 돼 사회생활을 재개했을 때 체첸인 특유의 사소한 일로도 수틀리면 대뜸 흉기를 대동하고 다 죽이겠다고 덤벼드는 습성을 직접 목격하는 장면이 나와 체첸인에 대한 나쁜 인식을 가지기 충분한 장면이기도 했다.[32] 사실 체첸인은 역사적 이유로 인해 현재까지도 러시아에서 골치 아픈 취급을 받고 있다.

  • 수용소에서의 삶과 그 속의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와 '암 병동', '제1원에서', '수용소군도' 같은 초기작들과 자신의 정치적 사상 및 역사적 관점에 대해 서술한 '붉은 수레바퀴', '200년을 함께' 같은 후기작들은 어느 정도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를 감안하며 읽는 게 좋다.


  • 공산주의 유머/소련의 하위 문서에도 있듯이 이 사람의 인기작들은 90년대 전까지만 해도 당연히 금서여서 사미즈다트 형태로 유통되었다. 이후 고르바초프의 자유화 조치에 의해 금서가 대거 해제된 1990년 비로소 소련에서 정식 출간되었다.[33]

  • 레프 톨스토이를 상당히 존경해서 여러 작품에 오마주가 나온다. 붉은 수레바퀴 연작은 아예 전쟁과 평화에 바친다고 할 정도였고, 1부인 1914년 8월에서는 아예 앞부분에 노년의 톨스토이가 나온다.

  • 한국에서는 반공 작가로 분류되어 오래 전부터 번역본이 나왔다. 그러나 솔제니친이 사망했다는 뉴스에는 빨갱이가 죽었다는 등의 무식함을 자랑하는 댓글들이 달리며 병림픽이 열렸다.

  • 박노자는 솔제니친을 혹평한다. 당연히 수용소 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거나 문제 삼지는 않았고 주로 그의 반소 우파 민족주의적 관점과 소련 수용소 사망자 수에 관한 과장을 비판했다. 사회주의자로서 노르웨이 적색당 당원이자 한국 노동당 당원인 인사가 솔제니친의 정치적 관점과 통계에 있어서의 오류를 지나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실, 솔제니친의 소련 붕괴 후 우파 민족주의적 행보는 프랑스의 중도좌파 성향 작가 베르나르 앙리 레비 등 다른 좌파 지식인들로부터도 자주 비판받았다. 더군다나 그가 권위주의적 푸틴 정권과 통합러시아당을 지지한 것은 그에 대한 비판을 가중시키기도 했다.

  • 1993년 프랑스 방문 당시 방데 전쟁에서의 학살을 이유로 프랑스 혁명을 비판하기도 했다. # 당연하지만 당시 프랑스 정부에서는 불쾌해하며 연설을 방해하기 위해 압력을 넣었다. 한국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솔제니친은 소련의 반체제 운동이나 우파 성향 반정부 운동을 제외하면 혁명이나 반정부 운동 자체에 일관되게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 사람이다. 한국의 언론 검열을 비판한 것이 오히려 예외적인 사례에 속할 정도. 그는 포르투갈의 카네이션 혁명이나 스페인의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도 우려와 비판을 제기한 적이 있다.

  • 반체제 작품 때문에 추방 형식으로 서독으로 망명한 후 피부에 염증이 나고 죽기 직전까지 갔다. 인위적인 독극물 중독 가능성이 큰데 이 때문인지 러시아에 귀환할 때까지 철저한 은둔 생활을 했다. 나중에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KGB는 실제로 솔제니친이 누구도 믿지 않도록 철저히 고립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공작했다고 한다.

  • 대중들에게 친숙한 그의 모습은 턱수염만 덥수룩하게 기른 모습이지만 맨 위 프로필 사진에서 보이듯이 말년엔 콧수염도 같이 길렀다.

  • 조던 피터슨이 좋아하는 작가이다. 수용소군도를 꼭 읽어야 하는 책으로 꼽은 바 있다.

  • 영화 나의 사소한 슬픔에선 자살을 시도한 피아니스트 욜리에게 어머니 로티가 솔제니친처럼 용감해야 한다며 위로한다.


7. 외부 링크[편집]




8. 둘러보기[편집]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 펼치기 · 접기 ]
상징
국기 · 국장 · 국호 · 노동자 마르세예즈 · 인터내셔널가 · 소련 찬가 · 낫과 망치 · 붉은 별
정치
정치 전반 · 소련 공산당 · 소련 공산당대회 · 크렘린 · 레닌 영묘 · 최고회의 · 소련 장관회의 · 헌법
블라디미르 레닌 · 이오시프 스탈린 · 니키타 흐루쇼프 ·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 유리 안드로포프 · 콘스탄틴 체르넨코 · 미하일 고르바초프
최고지도자(서기장) · 국가수반 · 대통령
군사
소련군(장비 · 소련 육군 · 소련 해군 · 소련 공군 · 소련 방공군 · 소련 전략로켓군) · 스타프카 · 소련 국방장관 · 스페츠나츠 · 정치장교 · 바르샤바 조약기구 · 열병식
소련의 핵개발(RDS-1 · 차르 봄바 · 세미팔라틴스크) · 소련군 vs 미군 · 소련군 vs 자위대 · 대외전쟁
치안
소련경찰(Милиция) · 소련 내무군 · 비밀경찰(체카(펠릭스 제르진스키) · NKVD · KGB
경제
경제 · 경제사 · 소련 루블 ·
인문
민족 · 언어 · 종교
역사
역사 · 러시아 혁명 · 러시아 내전 · 신경제정책 · 대숙청 · 독소 폴란드 점령(카틴 학살) · 대조국전쟁 · 냉전(6.25 전쟁 · 스푸트니크 쇼크 · 쿠바 미사일 위기 ·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 1980 모스크바 올림픽 ·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 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 ·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 소련 존속 여부 국민투표 · 8월 쿠데타 · 소련 붕괴
외교
외교 · 미소관계 · 소련-유고슬라비아 관계(티토-스탈린 결별) · 중소관계(중국-소련 국경분쟁 · 중소결렬) · 독소관계(독소 불가침조약) · 독러관계 · 북소관계 · 한소관계 · 소련-대만 관계 · 친소 · 소비에트 제국 · 브레즈네프 독트린
문화
문화 · 사회주의 리얼리즘 · 사미즈다트
막심 고리키 ·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 미하일 숄로호프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 스트루가츠키 형제
블라디미르 비소츠키 ·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 드미트리 카발레프스키 · 아람 하차투리안 · DDT(밴드) · 키노
소련 요리
우주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 · 세르게이 코롤료프 · 블라디미르 첼로메이 · 유리 가가린 · 발렌티나 테레시코바 · 알렉세이 레오노프
스푸트니크 · 소유즈 우주선 · 보스토크 계획 · 보스호드 계획 · 살류트 프로그램 · 미르 우주정거장
바이코누르 우주기지 · 소유즈-아폴로 테스트 프로젝트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 펼치기 · 접기 ]
상징
국호 · 국기 · 국장 · 국가 · 쌍두독수리
역사
역사 전반 · 루스 차르국 · 러시아 제국 · 러시아 공화국 · 소련 · 소련 붕괴 · 러시아 헌정위기
지리
지역 구분() · 극동 연방관구(하위지역 · 야쿠츠크 · 베르호얀스크 · 오이먀콘 · 아긴스크부랴트 자치구) · 남부 연방관구(하위지역) · 볼가 연방관구(하위지역) · 북서 연방관구(하위지역) · 북캅카스 연방관구(하위지역) · 시베리아 연방관구(하위지역 · 노보시비르스크(하위지역)) · 우랄 연방관구(하위지역) · 도시 목록 · 모스크바 · 중앙 연방관구(하위지역) · 툰드라 · 라스푸티차 · 라도가 호 · 바이칼호 · 카라차이 호 · 한카호 · 돈 강 · 레나강 · 볼가강 · 아무르강 · 예니세이강 · 우랄강 · 우랄 산맥 · 스타노보이 산맥 · 옐브루스 · 나로드나야 산 · 시베리아 (시베리아 트랩) · 러시아 극동 · 유럽 러시아 · 북아시아 · 야말 반도 · 타이미르 반도 · 캄차카 반도 (코만도르스키예 제도) · 노보시비르스크 제도 · 브랑겔 섬 · 콜라 반도 · 축치 반도 · 크림 반도 · 사할린 · 쿠릴 열도 (쿠릴 열도 분쟁) · 세베르나야제믈랴 · 제믈랴프란차이오시파 · 마천루 · 초르노젬
문화
문화 전반 · 레프 톨스토이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 모스크바 음악원 · 안톤 루빈시테인 · 표트르 차이콥스키 ·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 알렉산드르 스크랴빈 · 니콜라이 메트네르 · 볼쇼이 극장 · 마린스키 극장 (마린스키 발레단) · 러시아 국립 교향악단 ·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러시아 정교회 · 러시아 영화 ·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 · 러시아 민요 · 발랄라이카 · 요우힉코 · 미하일 글린카 · 러시아 5인조 ·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 · 게오르기 스비리도프 · 드미트리 카발레프스키 · 아람 하차투리안 ·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 안톤 아렌스키 · 니콜라이 카푸스틴 · 알렉산드르 푸시킨 · 미하일 레르몬토프 · 니콜라이 고골 · 이반 투르게네프 · 안톤 체호프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 일리야 레핀 · 일리야 일리치 메치니코프 · 엘 리시츠키 · 스트루가츠키 형제 · 관광 · 에르미타주 박물관 · 트레챠코프 미술관 · 러시아 박물관 · 세계 유산 · 오스탄키노 탑 · 우샨카 · 사라판 · 마트료시카 · 사모바르 · 빅토르 초이 · Hardbass
스포츠
러시아 출신 올림픽 선수 · 러시아 축구 연합 · 러시아 축구 국가대표팀(FIFA 월드컵 ) ·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 · 러시아 풋볼 내셔널 리그 · 러시아 풋볼 내셔널 리그 2 · 러시아 아마추어 풋볼 리그 · 러시아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 · 콘티넨탈 하키 리그(소속 구단) · 러시아 여자 배구 국가대표팀 · 삼보
언어
언어 전반 · 러시아어 · 러시아어/문법 · 러시아어/발음 · Ё ё · 키릴 문자 · 노어노문학과 · 토르플 · 러시아어권
정치
크렘린 · 정치 전반 · 행정조직 · 정부 · 대통령 · 러시아 대통령 선거 · 총리 · 연방의회(국가두마)
경제
경제 전반 (모스크바증권거래소 · 스베르방크) · BRICS · 러시아 루블
외교
외교 전반 · 여권 · 상임이사국 · G20 · 러미관계 · 미중러관계 · 한러관계(한러관계/2020년대) · 러일관계 · 한러일관계 · 러독관계 · 러시아-폴란드 관계 · 독일-러시아-폴란드 관계 · 러시아-우크라이나 관계 · 러시아-폴란드-우크라이나 관계 · 러시아-체코 관계 · 러시아-슬로바키아 관계 · 러시아 제국주의 · 러빠 · 친러 · 반러 · 혐러 · 신냉전 · 독립국가연합 · 집단안보 조약기구 · 구 소련 국가들과의 관계 · 유라시아 경제 공동체
사회
슬라브 · 러시아인 · 사회 문제 · 고프닉 · ЕГЭ · 러시아 정부 장학금 · 레드 마피아
교통
아에로플로트 · 공항 목록 · 고속도로 · 철도(철도 환경 ·도시철도 · 삽산 · 아에로익스프레스 · 바이칼-아무르 철도 · 시베리아 횡단철도 · 투르케스탄-시베리아 철도 · 환바이칼 철도) · 트롤례이부스 · 트로이카 · 금각교 · 루스키 대교 · 크림 대교 · 백해-발트해 운하 · 볼가-돈 운하 · 북극항로
러시아계
러시아계 한국인 · 러시아계 프랑스인 · 러시아계 독일인 · 러시아계 영국인 · 러시아계 라트비아인 · 러시아계 에스토니아인 · 러시아계 리투아니아인 · 러시아계 핀란드인 ·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 · 러시아계 폴란드인 · 러시아계 스페인인 · 러시아계 미국인 · 러시아계 캐나다인 · 러시아계 브라질인 · 러시아계 아르헨티나인 · 러시아계 카자흐스탄인 · 러시아계 중국인 · 러시아계 이스라엘인 · 러시아계 일본인 · 러시아계 호주인
음식
러시아 요리 · 보르시 · 비프 스트로가노프 · 샤슐릭 · 펠메니 · 피로시키 · 크바스 · 보드카 · 만주 요리
군사
러시아 연방군 (소련군) · 육군 · 항공우주군(편제) · 해군 (발트 · 북방 · 태평양 · 흑해) · 전략로켓군 · 국가근위대 · 해외 주둔 러시아군 · GRU · 붉은 군대 합창단 · 알렉산드로프 앙상블 · 열병식 · 스페츠나츠 · 상하이 협력기구 · 아르미야
역사 · 편제 · 계급 · 징병제 · 병역법 · 러시아 지휘참모대학교 · 러시아 연방군/문제점
러시아군/장비 (소련군/장비) · 전투식량 · 라트니크 · 군복 · 모신나강 · 칼라시니코프 (AK-47 · AKM · AK-74 · AK-12 · AK-47 VS M16) · RPG-7 · 드라구노프 저격소총 · 설계국 · 핵가방 (소련의 핵개발) · 아르마타 · 타찬카 · Su-57
데도브시나 · 러시아군 vs 미군 · 러시아군 vs NATO
치안·사법
러시아 국가경찰 · 러시아 연방교정청 · 흑돌고래 교도소 · 흰올빼미 교도소 · FSB
기타
공휴일/러시아 · 러시아인 캐릭터 · 불곰국



[1] 현재 러시아 북캅카스 연방관구 스타브로폴 지방.[2] 이 때 입대했다고도 하고 서류상 문제로 입대가 지연되어 9월에 로스토프 부근의 중등학교에서 잠시 천문 물리학 교사로 근무했다가 10월 8일에 입대했다고도 한다.[3] 수용소군도에 의하면, 스탈린을 '파한(пахан)'이라는 단어로 지칭했다고 한다. 이 단어는 아버지, 두목, 대빵 등의 의미를 담고 있는 비속어이다.[4] 파블로다르 인근에 있는 소도시.[5] 이런 수용소를 샤라시카(Шарашка)라고 부른다. 당시 소련의 과학, 기술 분야에서 한가락 했던 코롤료프, 투폴레프 등이 바로 이런 곳에서 지냈다. 샤라시카의 분위기는 훨씬 느슨한 편이어서, 다른 일반 죄수들과 같이 중노동에 동원되지 않았고, 가끔씩 면회가 허용되었다.[6]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 제 1원에서(В круге первом)이다.[7] 이 때의 경험으로 쓴 소설이 '암병동'이다.[8] 그 충격이 어느 정도였나 하면 당시 수용소에서 철 지난 잡지를 통해 솔제니친의 작품을 접한 죄수들이 국가가 무슨 이유로 이런 작품이 나오도록 방조했나라고 했을 정도다.[9] 솔제니친은 노벨상 포기는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소련 주재 스웨덴 대사관에서 수상하는 안을 제시했지만 소련 당국은 당연히 거부했다.[10] 스탈린 이후 소련은 심각할 정도로 체제를 위협한 게 아니라면 웬만해서는 기를 쓰고 죽이려 하지는 않았으며 자국 내 반체제인사의 이주 허가를 내주거나, 미국에서 잡힌 스파이와 맞바꾸는 식으로 내보내 평생 소련 땅을 못 밟게 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 과정은 2015년 톰 행크스가 주연한 영화 스파이 브릿지에도 잘 묘사되어 있다.[11] 여기서도 알수 있듯 솔제니친은 러시아의 전통을 중시하는 러시아식 보수주의자였다. [12] 굴라그의 생활과 고문을 그린 1~2부 이후는 대부분 혁명 이후의 소련 사회와 소련 보수작가들의 고인드립이 많다. 그 이유는 앞서 설명한 대로 이 작품 자체가 거대한 연작의 일부로 구상되었기 때문[13] 이 작품은 끝내 미완되었으나 붉은 수레바퀴라는 이름으로 3부작이 출간되었다.[14] 러시아에서 발행되는 신문 중 하나로, 일반적인 뉴스보도 방식과는 달리 의견을 두고 의견을 게재하는 방식으로 발행된다.[15] 수여 거부 사유를 밝힐 때 대놓고 나라를 파멸로 몰아간 지도자가 주는 훈장은 받을 수 없다고 비판할 정도였다.[16] 아닌 게 아니라 그의 러시아 민족주의적인 성향은 옐친 이후 민족주의 성향을 강화하던 푸틴의 입맛에 딱 맞았다. 실제로 솔제니친은 푸틴의 지원을 많이 받아, 장례식도 국가장으로 치를 정도였다.[17] 소공산주의자 거리는 2005년에 스타니슬라프 거리(Улица Станиславского)로 바뀌었다.[18] 수용소 희생자 수[19] 수용소 반도나 붉은 수레바퀴 등의 작품은 아무래도 논픽션 쪽에 가깝다 보니 문학적 묘사가 빈약한 건 사실이다. 허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만 보더라도 솔제니친이 문학 작가라 불릴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건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20] 한국에서는 1973-74년 분도출판사에서 총 2권으로 출판되었다.[21] 출처[22] 출처[23] 2010년 노벨문학상 수상.[24] 출처[25] 출처[26] 출처[27] 출처[28] 출처[29] 세르비아 정교회 최고 훈장[30] 인도주의 활동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인정받은 공로[31] 문명의 도덕적, 윤리적 원칙을 수호하는 창의성의 시민에게 주는 상[32] 반면 체첸인과 더불어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를 당한 소수민족 중 독일계 러시아인, 흑해 그리스인, 고려인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했다.[33] 이 때 조지 오웰1984 등이 처음으로 출간되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8 02:12:41에 나무위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