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시오스 필란트로피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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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알렉시오스 두카스 필란트로피노스
(영어: Alexios Doukas Philanthropenos, 그리스어: Ἀλέξιος Δούκας Φιλανθρωπηνός)
출생
1270년
사망
미상
직위
트라키아 테마의 군사총독
반란 대상
안드로니코스 2세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동로마 제국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반란자, 명장. 안드로니코스 2세 휘하에서 투르크군과 맞서서 상당한 성과를 거뒀으나, 황제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한쪽 눈을 잃었다. 그 후 다시 동방 전선으로 보내져서 죽을 때까지 투르크군과 싸웠다.


2. 생애[편집]


1270년경 메가스 도메스티코스 직책을 역임하던 미하일 팔레올로고스 타르카네오티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마리아는 미하일 8세 치세에 메가스 둑스와 프로토스트라토르 직책을 역임한 알렉시오스 두카스 필란트로피노스의 딸, 할머니는 미하일 8세의 여동생인 마르타 팔레올로기나이다. 그는 콘스탄티노스 아크로폴리티스와 딸이자 역사가 게오르기오스 아크로폴리트스의 손녀인 테오도라 아크로폴리티사와 결혼하여 미하일 필란트로피노스를 낳았다.

1290년대에 안드로니코스 2세로부터 트라키아 테마의 군사 총독을 맡아서 이오니아 해안을 제외한 아시아의 모든 동로마 영토를 통치했다. 이후 미안데르 강 계곡에서 투르크군을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뒀으며, 멘테세 토후국으로 진격하여 멜라노디온 요새를 공략했다. 그가 2년여 간 원정을 떠나는 동안 수많은 투르크 포로가 양산되었는데, 그 수가 너무 많아서 "양 한 마리가 무슬림 죄수보다 더 비싸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1295년 가을 안드로니코스 2세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동기는 불분명하지만, 팔레올로고스 왕조 창립 이래 소아시아에 대한 왕가의 관심 부족과 심한 수탈에 분노한 민심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반란을 일으키자 각지에서 호응했고, 황제의 동생인 테오도로스 팔레올로고스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체포되었다. 그는 굳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하지 않고 황제와 협상하여 카이사르(부황제)로 선임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해 크리스마스에 안드로니코스에게 충성하던 네오카스트라 총독 라바다리오스에게 회유된 크레타 출신 병사들에게 붙들려 한쪽 눈이 뽑히고 유폐되었다.

그 후 요안니스 타르카네오티스가 그를 대신하여 동방 전선의 지휘관이 되었고, 그는 30년간 역사속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그의 후임자들은 투르크군을 상대로 연전연패했고, 1323년 무렵엔 소아시아 대부분이 투르크 세력에게 넘어갔다. 예사이아스 총대주교는 보다못해 안드로니코스 2세에게 그를 소환하라고 촉구했다. 황제는 어쩔 수 없이 1324년 그를 사면했다. 그는 오랫동안 포위되어 함락될 위기에 몰린 필라델피아를 구출하는 임무를 맡았다. 어떤 군대도 주어지지 않았지만, 그가 지원자를 모집한 뒤 필라델피아로 접근하자, 30년 전 자신들을 상대로 탁월한 활약을 벌였던 그를 기억하고 있던 투르크군은 포위망을 풀고 물러났다. 그는 1327년까지 필라델피아의 총독으로 지냈다.

1328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한 그는 1335년 포카이아의 제노바 출신 영주 도메니코 카타네오가 이끄는 라틴 함대가 레스보스 섬을 점령하자 황제의 명을 받들어 1336년 6월 83척의 함대를 이끌고 출진했다. 그의 함대는 수도 미틸렌을 제외한 섬 전체를 신속하게 확보한 뒤, 미틸렌을 포위하고 5개월간 공성전을 벌였다. 결국 도메니코는 11월에 항복했고, 레스보스 섬과 포카이아는 제국에 귀속되었다. 1337년, 그는 투르크군이 레스보스 섬을 노리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뇌물을 줘서 이를 무마시켰다. 이후 레스보스 섬에서 죽을 때까지 통치했는데, 아마도 1340년대까지 살았을 것이다. 역사가 니키포로스 그리고리오스는 그를 "팔레올로고스 시대의 벨리사리우스"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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