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로이스 히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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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로이스 히틀러
Alois Hitler


파일:Alois_Hitler_in_his_last_years.jpg

본명
알로이스 시클그루버
Aloys Schicklgruber
출생
1837년 6월 7일
오스트리아 제국 발트비어텔 슈트로네스
사망
1903년 1월 3일 (향년 65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버외스터라이히 주
국적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display: none; display: 오스트리아 제국"
행정구
]]
(1837~1867)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display: none; display: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행정구
]]
(1867~1903)
직업
세무공무원
부모
아버지 요한 게오르크 히틀러
어머니 마리아 아나 시클그루버
배우자
아나 글라슬회러 (1823–1883, 사별)
프란치스카 마첼스베르거 (1861–1884, 사별)
클라라 푈츨 (1860–1907, 1885년 결혼)
자녀
알로이스 유니오어 (1882–1956)[1]
앙겔라 (1883–1949)
구스타프 (1885~1887)
이다 (1886–1888)
아돌프 (1889–1945)
오토 (1892–1892)
에트문트 (1894–1900)
파울라 (1896–1960)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성장과 결혼
2.3. 아들과의 관계
3. 죽음과 그 이후
4. 평가
4.1. 세무서장으로서의 평가
4.2. 아버지로서의 평가
4.3. 의외의 성향
5. 매체
5.1. 드라마
5.2. 기타



1. 개요[편집]


오스트리아세무공무원. 제2차 세계 대전의 주범인 아돌프 히틀러의 아버지다.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1837년 6월 7일, 알로이스는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Johann Georg Hiedler)와 마리아 아나 시클그루버(Maria Anna Schicklgruber)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 때 정식으로 결혼한 상태가 아니어서 어머니의 성인 시클그루버를 썼다. 아버지가 가출하자 삼촌인 요한 네포무크 히들러 아래에서 자랐다. 그러다 아버지인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가 돌아옴과 동시에 성씨를 히틀러(Hitler)로 바꾸면서 그의 이름도 알로이스 히틀러가 된다.


2.2. 성장과 결혼[편집]


알로이스는 초졸 학력으로 어린 시절 구두닦이를 했고 자라서 세관 공무원이 된다. 1873년 연상의 귀족 여성[2]과 첫 결혼을 했으나 자녀가 없었고, 1882년 두 번째 결혼을 했는데 두 번째 아내는 결혼 전부터 알로이스의 아이를 가지고 있었다. 1884년 두 번째 아내 역시 사망한 후 그는 사촌 누나의 딸이자 본인에게는 종질녀가 되는 클라라 푈츨과 결혼했다. 이 3번째 결혼을 통해 알로이스는 6명의 자녀를 얻게 된다.


2.3. 아들과의 관계[편집]


알로이스는 세무서장으로서 먹고 사는 데 충분히 문제가 없는 중산층이었고, 아들 역시 자신처럼 공무원이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큰아들은 가출하고 다른 아들들은 어릴 때 죽었다. 하나 남은 아들인 아돌프도 공부를 잘하는 편이 아니라 아들과의 갈등이 심했으며, 알로이스는 아들을 달래거나 애정을 주기는커녕 성적 문제로 아돌프를 굉장히 많이 구타했다. 거기다 술꾼이라서 항상 술을 마셨으며, 술만 마시면 난폭해져 부인과 아들을 두들겨 팼다. 나이가 어렸던 파울라만 알로이스의 무관심으로 맞지 않았다.

다만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어느 순간 아버지가 자신을 구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어느 날 자신이 책에서 참는 것이 용기라는 것을 보고 아버지가 구타할 때 울거나 빌지 않고 대신 맞은 횟수를 하나하나 세었는데, 그걸 들은 아버지가 자신을 다시는 구타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다만 '나의 투쟁'은 자서전 형태인 만큼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반면 아내 클라라는 막내딸 파울라를 제외하곤 아돌프 이전의 아이들을 모두 병으로 잃어서 아돌프를 애지중지했다. 알로이스는 화가가 되려는 아돌프의 꿈을 무시하고 실업계 학교에 강제로 보냈지만, 아돌프는 적응을 못했기에 그의 죽음 이후 학교를 자퇴했다.


3. 죽음과 그 이후[편집]


1903년 1월 3일, 퇴직한 상태였던 알로이스는 오전에 카페에서 포도주를 마시다가 쓰려져 사망하였다. 당시 아돌프 히틀러의 나이는 14세였고 여동생 파울라는 7세였다. 사인은 지금까지 정확히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히틀러 가문의 개인 주치의였던 에두아르트 블로흐는 뇌일혈로 진단했고, 《나의 투쟁》에도 그렇게 쓰여져 있다. 원인은 극심한 알코올 의존증으로 추정된다.

나는 아버지를 존경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사랑했다.

아돌프 히틀러


그 뒤 클라라는 히틀러와 프랑스로 간 지 몇 달이 안 되어 1907년 사망하고 남편 곁에 묻혔다.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아돌프는 엄하고 무뚝뚝하던 아버지가 미웠는지 아버지의 죽음에는 묵묵했지만 어머니의 죽음에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의 무덤은 제1차 세계대전제2차 세계대전도 무사히 넘기며 보존되었지만 2012년, 네오 나치의 성지가 되는 것을 막고자 철거됐다.

4. 평가[편집]



4.1. 세무서장으로서의 평가[편집]


초졸 학력의 매우 가난한 사람이 세무서장이라는 자리에 올랐다. 당시로서도 흔치 않았던 승진이었다. 표현의 예를 들자면, 하층민인 농부가 자작 작위에 올라간 정도로 자기 능력으로 출세한 것과 맞먹는다. 대신 귀족 처가의 빽이 있었을 거라는 건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정설이다. 괜히 지병이 있어 젊을 때 결혼도 못했고, 살 날도 얼마 안 남은 50살 중년 여성과 결혼했을 리가 없다는 것.

공적으로는 전형적인 19세기 말 공무원으로, 엄격하고 자제심이 강했으며 직무에 성실해서 주변인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입지전적인 출세를 가능하게 해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대해 깊은 충성심을 갖고 있었다. 오-헝제국의 다문화 이데올로기도 충실히 받아들였으며, 특히 '반유대주의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공적인 자리에서 잘 지켰던 자제력이 집안에만 들어오면 망가졌다는 것에 있었다.


4.2. 아버지로서의 평가[편집]


최악의 막장 부모 중 하나로 평가된다. 그가 식구들을 대하는 폭력적인 방식은 아들인 아돌프 히틀러의 인격이 뒤틀리는데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인류 역사상 최악의 학살자이자 독재자를 키워버린 셈이다.

알로이스가 가족을 대하는 태도는 너무나도 폭력적이고 권위적이어서, 아내와 자식들을 대할 때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갔다고 한다. 술집에서 만취해서 돌아올 때가 많았던 것은 물론, 틈만 나면 집에서조차 독한 코냑브랜디를 입에 달고 살 정도로 심각한 술꾼이었다. 특히 퇴직하고 나서는 알코올 중독이 더욱 심해져 재직 때보다 술을 배 이상으로 많이 먹었다.

또한 자기 아들을 손가락질을 하면서 엄청나게 못마땅해 했다. 조금이라도 실수하거나 투정을 부리면 소리를 지르며 어린 아들에게 주먹질, 발길질, 뺨을 사정 없이 갈겼고, 반 죽음이 되도록 두들겨 팼다. 때문에 어린 아돌프는 자주 얼굴과 온몸에 피멍이 들고 심할 때는 코피나 오른쪽 고막이 터져서 피가 나온 적이 있었다. 이를 말리려고 달려온 아내에게도 폭력을 휘둘러서 아내 또한 피를 본 적이 많았다.

아돌프 히틀러의 이복형 알로이스 유니오어도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아예 가출하여 영국으로 간 뒤 다시는 아버지를 보지 않았고 오스트리아로 오지도 않았을 정도였다. 아돌프 역시 아버지의 폭력 때문에 가출하여 집에 들어가지 않은 게 다반사였다. 그나마 아돌프는 꼴에 아버지라고 미워하면서도 그가 죽었다는 것에 슬퍼하기라도 했고, '나의 투쟁'에서는 아버지로서는 존경했다고 말한 바 있다.


4.3. 의외의 성향[편집]


문화적, 민족적으로는 개방된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제국이 표방하는 다민족, 다문화적 그 가치관을 자식들에게 주장했고, 특히 알로이스의 근무지인 린츠는 체코인과 오스트리아인의 접경지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민족적인 가치관을 가졌고 결혼을 통한 혼혈도 많은 지역이었다. 때문에 반대로 히틀러가 극단적인 순수 인종주의를 보이는 이유는 아버지의 다민족적인 가치관 자체에 대한 반항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5. 매체[편집]



5.1. 드라마[편집]


2000년대에 방영한 환상특급에선 게르만 민족 우월론을 믿던 인물로 나온다. 과거로 간 한 여인이 어린 아돌프 히틀러를 유모에게 빼앗아가 강물로 투신 자살하여 역사를 바꾸려고 했지만, 유모가 거지 여인이 데리고 있던 비슷한 나이 갓난아기를 돈 주고 사오고 아돌프라고 알로이스를 속여 알로이스는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게르만 민족다운 모습이라고 좋아라 하는 것으로 나왔다. 그리고 내레이션을 하던 포레스트 휘태커가 나와서 "우리는 역사를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라며 그 거지 여인의 아들이 잔악한 아돌프 히틀러가 된 것도 결국 아버지인 알로이스 탓이 컸다는 느낌을 주며 끝냈다.

5.2. 기타[편집]



This enraged Adolph's father, who punished him severely.

이것를 엄하게 혼낸 아돌프의 아버지를 분노케 하였습니다.[3]

역사 애니메이션 채널 OverSimplified에서 나름 으로 유명하다. 위에 링크된 히틀러 일대기 1편에서 일종의 개그로 나왔는데, 알로이스의 눈 모양 등의 익살스러움으로 인해 채널의 대표 밈들 중 하나가 되었고, 댓글에서도 'Adolph's father'와 'him'을 다른 걸로 바꿔 드립을 치는 댓글도 많이 볼 수 있다. 이후 삼국지 영상에서도 내시들을 학살하는 장면에서도 재등장.

심각한 주당에다 아내와 아들에게 폭행을 일삼고 자신의 사후 아들이 전 세계를 흔든 흉악한 악마가 되었다는 점에서 죠죠의 기묘한 모험에 등장하는 빌런 디오 브란도의 아버지 캐릭터인 다리오 브란도와 비슷하다. 다만 알로이스 히틀러와는 달리 다리오는 돈도 잘 못 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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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1년 영국 거주 당시에 장남 윌리엄 패트릭 히틀러(스튜어트휴스턴)가 태어난 후 제1차 세계 대전 때 첫 아내와 헤어졌고 독일(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맞은 둘째 아내 사이에서 1920년 하인리히 '하인츠' 히틀러가 태어났다. 하인츠는 1942년 전사하고 윌리엄 패트릭은 이복 숙부인 아돌프와는 달리 반(反) 나치주의자였기 때문에 미군에서 활동하였다. 윌리엄 패트릭이 죽고 현재 그의 네 아들은 한 명 빼고 모두 미국에 살아있으나 모두 자손을 남기지 않았다.[2] 어릴 때부터 선천적 지병이 있어 젊을 때 이미 자녀를 낳을 수 없고 장수도 기대하지 않던 건강 상태(단, 생각보다는 오래 살았다.)로 알려진다. 그래서 다른 귀족들 측에서는 사돈 맺을 마음이 없었고, 그녀의 집안에서도 사실상 결혼을 포기한 상태로 살았었기에, 귀족임에도 알로이스 같은 서민과의 혼인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미 결혼할 때 그녀는 50살 정도의 중년 여성이었다. 알로이스의 입장에서는 귀족 집안의 권력과 경제력에 빌붙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중년 여성에게 접근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실제로 결혼 후 몇 년만에 부인이 병세가 악화해 자유로운 거동이 불가능해지자 금방 바람을 피웠다고 알려져 있다.[3] 공식 자막은 '히틀러의 아빠는 또 극대노합니다. 분노의 체벌을 하는군요.'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