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 하메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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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이슬람 공화국 제3·4대 대통령
이란 이슬람 공화국 제2대 라흐바르
세예드 알리 호세이니 하메네이
سید علی حسینی خامنه‌ای | Sayyid Ali Hosseini Khamenei


파일:세예드 알리 하메네이.jpg

출생
1939년 4월 19일 (84세)
이란 제국 호라산 주 마슈하드
재임기간
제3대 대통령
1981년 10월 13일 ~ 1985년 8월 16일
제4대 대통령
1985년 8월 16일 ~ 1989년 8월 3일
제2대 라흐바르
1989년 6월 4일 ~ 현직
링크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 파일:이란 국장.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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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
178cm
학력
호라산 종교학교
나왑 종교학교[1] (졸업) (? - 1955년)
나자프 신학교 (법학, 철학 / 중퇴) (? - 1957년)
콤 신학교 (법학, 윤리학, 철학 / 졸업) (? - 1964년)
배우자
코자스테 바겔자데 (1964년 결혼)
자녀
4남 2녀
종교
이슬람교 (시아파)
소속 파벌

소속 정당

약력
이란 마줄레스 의원
지도력 전문가 회의 의장
국정조정위원회 위원장
이란 제3대 대통령 (1981년1985년)
이란 제4대 대통령 (1985년1989년)
이란 제2대 라흐바르 (1989년 – )


1. 개요
2. 생애
3. 영향력
4. 샤리아에 의한 폭정과 독재
6. 가족
7. 앞날
8. 기타
9. 소속 정당



1. 개요[편집]


이란의 제2대 라흐바르(최고지도자)이자 독재자.

제3, 4대 대통령이기도 했다. 호메이니1989년 6월 4일 사망한 이후 종신직인 이란의 최고지도자 자리를 34년째 유지하고 있다.

특이하게도 이란 주류 민족인 페르시아인이 아니라 소수민족아제리인[1]이다. 아제리인은 튀르크족의 일파로 옆나라 아제르바이잔의 주 민족이다. 이란은 페르시아인 이외의 무슬림 계열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 탄압이 크지 않은 편이다.[2]

이란 이슬람 공화국 특유의 신정 체제에서는 라흐바르가 국가원수로서 정부수반에 불과한 대통령보다 높은 지위에 있으며 국가 내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따라서 이란의 최고권력자는 대통령[3]이 아니라 하메네이다. 하메네이도 (간선제) 선거로 선출된 인물이지만, 이란의 선거제도는 중간에 최고지도자가 인사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헌법수호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개혁파 후보들을 다 떨구고, 이것을 견제할 수단이 별로 없기 때문에 민심 반영이 잘 안 된다.

2020년 3월 3일 하메네이의 정치자문이 코로나로 사망했는데 대한민국 언론은 이것을 하메네이 본인이 병사한 줄 알고 오보를 낸 바 있다.


2. 생애[편집]


1939년 이란 북동부 호라산 주의 마흐샤드에서 아버지 자바드 하메네이(1895년 ~ 1986년)와 어머니 카디제 미르다마디 사이에서 8자녀 중 둘째로 태어나 4세 무렵부터 막탑(maktab)이라 불리는 종교 초등학교에 다녔다. 졸업 후 마슈하드의 호라산 종교학교에 진학하였고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Soleiman Khan 종교학교와 Nawwab 종교학교를 5년만에 수료하면서 이슬람 법학, 철학, 논리학 등을 모든 학문의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이 후 저명한 이슬람 학자들에게 darse kharij로 불리는 고급 교육을 받은 뒤 1957년 이라크 나자프로 떠나 대학교에 해당하는 신학교에 들어가게된다. 하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인해 이란으로 돌아왔고 이란에서 가장 큰 신학교인 콤 학교에서 1964년까지 공부하게된다.

졸업후에는 여러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한때 무명의 성직자로서 돈을 받고 기도를 해 주거나 코란을 읽어주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세속주의를 표방하는 팔레비 왕조 치하에서 그는 이란이 이슬람 국가로 거듭나야 한다며 이슬람 근본주의를 강조했다. 하메네이는 이슬람사원, 대학 학생 모임 등에서 근본주의를 설파했고, 이로 인해 경찰에 체포, 구금되기도 했다. 그렇게 1960년대 초반부터 호메이니를 추종하며 이란 이슬람 혁명에 참여했고, 이라크와의 전쟁이 한창이던 1981년 당시 대통령 모함마드알리 라자이인민전사기구의 테러로 암살당하자[4] 대선에 출마해 대통령을 지냈다.

파일:대통령 시절의 알리 하메네이.jpg
대통령 시절의 알리 하메네이

그렇게 1981년부터 1989년까지 이란의 3, 4대 대통령을 지내다가, 1989년 호메이니가 사망하자 이슬람 성직자 회의를 통해 호메이니의 뒤를 계승하며 라흐바르로 추대 되었고, 이때부터 명실상부한 이란최고지도자로 등극했다.

본래 호메이니의 후계자는 호세인 알리 몬타제리라는 이란의 그랜드 아야톨라이자 시아파 이슬람의 최고위급 성지자가 자리매김하고 있었는데, 몬타제리는 호메이니가 독재국가를 세우고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것에 반발해 스스로 후계자 자리에서 물러나 죽을 때까지 가택연금을 자처하였다. 이후 상대적으로 정통성이 낮았던 하메네이가 집권한 뒤, 자신의 취약한 권력기반을 샤리아 폭정으로 메우려 하였다.

2009년 선거에서는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압승했다는 개표 결과가 발표되고 몇 시간 뒤에 하메네이는 신의 뜻이라며 아마디네자드의 당선을 추인했는데 이러한 신속한 추인은 이란 내부에서도 뜻밖이라는 반응이 많았는데 왜냐하면 선거관리위원회는 패배한 측에 3일간 반론 기한을 주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이를 무시했기 때문이였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6월 12일은 하메네이가 이란의 역사를 결정한 날로 기록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문제는 이 선거가 부정선거라는 의혹이 일었다는 거고, 결국 반발한 시민들이 무효를 주장하며 시위에 나섰고 이 시위가 반정부 시위로 이어졌다.

그러자 2009년 6월 19일 하메네이는 부정선거 의혹을 강력히 부인하며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개혁파에도 사실상 최후 통첩을 보냈다. 알리 하메네이는 테헤란대에서 열린 금요예배에서 “지난 대선에서 이란 국민은 자신들이 원하는 인물을 뽑았다”, “이란의 법은 결코 투표 조작을 허용치 않는다”고 말했으며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이번 대선에서 전체 40,000,000표 중 24,500,000표를 얻어 당선됐다"라고 아마디네자드를 옹호하며 시위대를 비난했고 결국 이 시위는 어찌저찌 마무리되었다.

문제는 이렇게 허락한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과 하메네이는 2011년 정보장관 인사를 둘러싸고 맞선 뒤 사사건건 대립을 했었단 거다. 그래서 2012년에는 하메네이가 하도 짜증난 나머지 “아예 대통령제를 없애야 한다”는 말을 했을 정도다.

그래서 2013년 선거에서는 알리 하메네이가 사실상 선거를 좌지우지 하며 자신의 친정체제를 구축했다. 2013년 선거에서 후보로 나온 마샤이는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는데, 마샤이는 2009년 대선 당시 야당 후보를 지지하고 미국 등 서방사회와의 관계 회복을 주장했으며, 종교의 정치 개입이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에 하메네이는 그가 자신의 신정체제를 흔들 수 있는 위협적인 존재로 판단했고, 마샤이를 비롯한 당선이 유력시됐던 주요 후보들이 대선 후보에서 줄줄이 탈락하면서 하메네이와 가까운 보수파 인사들이 최종 후보들만 명단에 들어가게 되었고 결국 하메네이와 가까운 사이인 하산 로하니가 대통령이 되었다. 물론 로하니도 온건파였기에 상당히 갈등했고 하메니이의 성에 차지 않았는지, 결국 이후에는 초강경파인 에브라힘 라이시가 대통령에 올랐다.

한편 그는 외교에서 현실적이라 계속 적으로 선포했던 미국과도 화해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란 협상 과정에서도 그가 상당한 역할을 했다. 월스트리트 저널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 간의 물밑 서신외교가 이란 핵 협상 타결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2014년 10월 제네바에서 핵 협상이 시작될 시점에 오바마는 하메네이에게 비밀 편지를 보내 협상 타결에 최선을 다하자는 뜻을 전했으며, 하메네이 역시 답신을 보내는 등의 물밑 교감을 이어왔다고 한다. 기사

2015년 9월 4일에는 이란 핵 합의안의 의회 승인 절차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기사

메카 인근 미나에서 성지순례(하지) 도중에 발생한 압사 사고에 대해 알리 하메네이는 “사우디 당국의 실수와 부적절한 대응이 재앙을 낳았다”면서 “참사의 책임은 사우디아라비아가 반드시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사고로 이란은 자국민 131명이 사망하고 6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기사

2014년 9월 6일에는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가 전립선 수술을 받았다는 기사가 나왔다. 수술은 잘 끝났고 평범한 수술이였다고 하메네이가 연설도 했다. 기사

하지만 2015년 12월 14일에는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의 후계자에 대해 “이슬람 성직자 회의 내에 후보자를 검토할 그룹이 설치됐다”며 후보자 인선을 시작했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기사 사실 체력에 무리가 갈 정도로 나이가 들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미 75세를 넘긴 고령이며, 2019년에 그의 나이가 80세가 되기 때문이다. 건강 또한 좋지 못해 수술을 받을 정도가 되었다.

2016년에는 시아파의 지지를 받던 알님르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처형당하며 사우디아라비아-이란 분쟁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시아파 맹주인 알리 하메네이는 "탄압받았던 순교자의 피가 뿌려졌다. 신의 분노가 사우디 정치인들에게 내려질 것"이라 주장했으며, 이란 외무부도 "사우디가 테러리스트와 극단주의자를 지원하면서도 국내에선 압제와 처형으로 비판 세력에 대응한다. 이런 정책은 큰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현재 이란사우디아라비아는 서로 국교를 단절한 상태다.


3. 영향력[편집]


이란은 명목상 삼권분립이 확립된 민주정이지만, 하메네이는 라흐바르(최고지도자)로서 3권 위에 군림하여 정부가 통과시키는 어떠한 법에 대해서도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대통령 인준과 군사령관 임명권 등을 갖는다. 또한 대통령과 국회의원 및 라흐바르를 선출하는 율법 전문가 회의의 후보를 심사하는 헌법수호위원회의 인사에 절대적 영향력을 미친다. 따라서 이란의 대통령도 하메네이가 승인하지 않으면 대통령이 될 수 없고, 그래서 그는 사실상 이란의 실제 통치자로 평가 받고 있다. 실제로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2009년 초에 선정한 각국의 최고 권력자 명단에서도, 이란의 권력자로 뽑힌 인물은 마무드 아마디네자드가 아니라 하메네이였다. 뉴스위크는 선정 기준을 "국가의 현실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 이"로 삼았다고 한다.

현재 신정 체계인 이란의 최고 권력자인 하메네이는 직접 정책을 입안하거나 추진하지는 않지만 이슬람 율법 전문가 회의(Assembly of Experts)에서 선출된 그의 승인 없이는 어떤 결정도 집행되지 않는다. 그의 글과 연설은 이란의 국내외 정치 목표와 행동을 가장 정확하게 반영한다. 그의 힘을 보여주는 사례로 2000년 8월에 하메네이가 보낸 서한 한 통에 의회에서 논의되던 언론개혁법안이 철회됐으며, 2003년 6월 개혁파 학생들이 시위를 벌이자, 하메네이는 "적(미국)의 사주를 받는 용병들에게는 일말의 동정의 여지가 없다"면서 시위 진압을 지시했는데 고작 한마디만에 모든 이란 내의 정부조직들이 긴밀하게 움직였다.

2020년 1월 3일 미국의 공격으로 암살당한 가셈 솔레이마니가 그의 수제자이며 이슬람 혁명 수비대의 유력 인사였다. 그가 죽은 후 장례 예배에서 하메네이는 매우 슬퍼하였고 진행 도중 오열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4. 샤리아에 의한 폭정과 독재[편집]


하메네이는 이란 내의 언론 자유를 탄압하며 이란의 반(反)정부 기자들을 고문하도록 명령하며 강력한 독재를 펴고 있는데 실제로 현재 이란에는 수많은 언론인과 수많은 학생과 민간단체 회원들이 감옥에 들어가 있는 상황이다. 2009년에 경제난과 실업, 신정정치로 인한 억압에 분노한 이란 국민들이 벌인 시위를 잔혹하게 진압하여 전 세계에 비난을 받았다. 독일 경제지 파이낸셜 타임스 도이칠란트(FTD)에서도 장기 집권으로 인권을 탄압하는 2012년에 물러나야 할 지도자북한김정은과 함께 하메네이를 지목할 정도다. 2008년 워싱턴 포스트에서도 세계 최악의 독재자로 선정될 정도. 한편 2014년 들어 이란에서는 하루에 3명 꼴로 처형이 이뤄질 정도로 사형이 늘었는데, 그중에는 범죄자도 있지만 상당수가 양심수이거나 정치범이라고 노벨 평화상 수상자 에바디가 증언했다. 현재 이란에서는 샤리아로 인한 인권 유린이 가장 심각하게 일어나고 상황이다.

게다가 이란의 대통령들이 아무리 개방적이라 해도 실권자인 하메네이가 워낙 수꼴이다 보니 하메네이의 결정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이란 대통령들은 실권이 적은 존재이다. 특히 정책 결정을 두고 대통령들과 갈등이 심했기에 짜증나서 대통령 직책도 총리 직책처럼 헌법을 개헌해서 아예 없애버리거나[5], 대통령과 최고지도자를 다 같이 겸직해서 통치하겠다는 발언까지 했었다. 물론 측근들의 만류와 완강한 반대로 이 생각을 단념한다. 특히 하메네이는 악명높은 광신자라서 뭐든지 신의 이름을 팔아서 폭정을 정당화시킨다. 하메네이의 친위대라 할 수 있는 이란 혁명 수비대[6]와 종교경찰들은 광신과 인권침해 범죄를 저질러대는 것으로 악명높다.

파일:external/www.gatestoneinstitute.org/1162.jpg

미국영국증오하지만 미국의 경우 워낙 세계 초강대국이라 비난만 하지 함부로 대항할 생각은 하지 않으나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만은 포기하지 않아 틈만나면 이스라엘을 갈아먹겠다며 도발하는 언행을 한다. 특히 팔레스타인에게 우호적이라서 파타와 하마스 대표가 오면 성대하게 대접한다. 그중에서 이스라엘의 골칫거리인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들과 레바논 헤즈볼라의 공식 후원자다.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의 하마스를 족칠때도 하메네이 본인이 앞장서서 하마스와 가자지구 주민들을 도와준다. 그러다보니 미국은 테러단체 후원자로 비난하고 이스라엘에게선 악의 세력 통치자로 증오받는다.

2019년 11월에는 반(反)정부 시위에 대한 무자비한 진압으로 최소 180명, 최대 450명이 나흘 사이에 학살된 것도 하메네이의 명령에 의한 것으로 판단된다. 하메네이는 시위자들을 제국주의의 사주를 받은 폭도로 규정한 바 있다.

2021년 경제난과 물부족 사태의 미해결과 각종 문제를 일으키고, 자기가 스스로 2022년 식량·에너지 위기 중 독단적으로 인플레이션으로 만드는 등에 행보를 보여 결국 그동안 쌓여왔던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2021년과 2022년 연쇄적으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이에 테헤란에 치안 유지를 목적으로 하여 군을 배치하고, 이란의 다른 도시에서는 심지어 군이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기도 하는 등 피해가 커졌다.


5.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편집]


2020년 3월 24일, 알리 하메네이의 사돈(인척)인, 하메네이 넷째 아들 메이삼의 장모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에 감염되어 사망했다고 발표하였다. 또한 이란 정부가 코로나19 확산을 막으려고 이동 제한과 모임 최소화에 총력을 기울이는 가운데, 3월 23일 테헤란 도심에서 열린 혁명수비대 사령관 호세인 아사돌라히의 장례식에 수백명이 모여 비판에 휩싸였다. 기사

드디어 마스크를 착용하고 연설하는 장면이 나왔다. 사돈댁이 감염 되어 사망한 것도 그렇고 국민들에게 마스크를 써서 감염을 방지하라는 차원에서 쓴 것으로 보인다. # 사실상 과학적으로나 의학적으로 봤을 때 코로나19가 사람 간의 접촉으로 인한 대규모 감염이라는 것을 이란의 정치와 종교를 아우르는 최고 지도자인 하메네이도 결국 사태의 심각성을 대놓고 인정한 셈이다.

6. 가족[편집]


아들들은 모스타파(1965년생), 모즈타바(1969년생), 마수드, 메이삼이 있고, 딸들은 호라, 보쉬라가 있다. 하메네이의 아버지 자바드(1895 ~ 1986) 역시 성직자였고 하메네이의 형 모하메드(1935년생)는 혁명 이후 잠시 국회의원을 지내기는 했다.

팔라비 왕조와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극심한 인권탄압 독재국가이지만, 명목상으로는 그래도 이슬람 민주 공화국 정부인 만큼, 자녀들이나 가족들에게 직접적인 라흐바르 세습은커녕 어떤 요직에도 앉히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비밀기업 세타드의 사실상의 경영권은 자식들에게 넘기겠지만.

가족들 중 남동생 하디(1948년생)개혁주의 성향의 정치가였고, 여동생 바드리 호세네이는 오빠 알리와 다른 성향을 지닌 인물로, 남편(동서)이 1979년 이란 혁명에 반대한 성직자 알리 테라니[7]이며, 슬하 자식(조카)들도 반(反)정부 행보를 보이고 있다. 특히 딸 파리데가 2022년 11월 25일 유튜브를 통해 현 정권을 살인 정권이라 규탄하다 구금당했고, 바드리 자신은 12월 현 정부를 규탄하는 서한을 아들로 하여금 트위터에 공개했다.#

7. 앞날[편집]


초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는 너무 늦은 나이에 집권해서 1980년대 당시 약 10년 정도 집권하다 1989년 노환으로 사망해서 50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의 하메네이가 2022년 현재 33년째 장기집권하고 있다.

2022년 이란 시위에서 두문분출하고 있는데 2022년 9월 28일 이미 사망해서 장례식이 혁명 수비대 국장으로 치러졌고 이라크 나자프에 관이 도착했다는 설이 떠돌고 있었다. 그러나 10월 3일 연설장에서 아주 정정하게 연설하는 모습을 보이며 뜬소문을 불식시켰다.

그리고 차기 최고지도자 1순위로 거론되는 에브라힘 라이시 역시 하메네이 못지 않은 강경파이기 때문에 하메네이가 죽어도 크게 바뀌는건 없을 거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다만 라이시 역시 대통령 임기가 4년이기 때문에 과연 하메네이가 사망하기 직전까지 최고지도자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또 거기에 2022년 이란 시위의 여파가 만만찮기 때문에 호메이니의 손자인 하심 호메이니가 다시 지도자로 대두되고 있기도 한 상황이라 라이시의 라흐바르행이 쉽지는 않다. 다만 하심이 조부와 달리 개혁적인 성향을 드러내고, 이란 보수파와 대립하고 있는 모습을 보아 하심의 라흐바르행이 될지는 의문이다.


8. 기타[편집]


  • 하메네이는 국제 테러단체인 알 카에다 등의 사상적 기초를 마련한 이슬람 극단주의자 사이드 쿠틉의 저서를 페르시아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물론 지지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이런 위험한 사상이니 조심하라고 하기 위해서이다. 대부분의 반근대 국가 지도자들이 그렇듯이 여러 언어를 구사하고 교육도 충분히 받은 엘리트임은 확실하다.

  • 독재자들이 항상 그렇듯이 약 100조 원대에 달하는 거대 비밀기업 ‘세타드’를 운영하며[8]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돈을 바탕으로 권력을 유지해온 것으로 드러났는데, 금융 석유 통신 등을 주 사업원으로 운영 중인 세타드의 총자산 규모는 약 950억 달러[9]으로 이는 한 해 이란 석유 수출액의 40%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라고 한다.기사

  • 1994년에는 아슈라 때 피 흘리며 자해하는[10] 걸 금지하는 파트와를 발표했다.# 이란에서는 이 파트와가 잘 지켜지나 이란 밖 시아파들은 잘 지키지 않는 편이다.참조

  • 2020년에 아이폰을 금지시키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전 세계 정치인들 중에서 도널드 트럼프와 함께 헤비 트위터리안이다. 그러나 트위터에 트럼프에게 솔레이마니의 복수를 암시하는 이미지를 올려 2021년 1월 22일부로 영구정지를 먹게 되었다. # 물론 하메네이 측은 트위터가 미국 기업이라 미국 편을 들어주어 자신을 영구정지시켰다고 주장했다.

9.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이슬람공화당|

이슬람공화당
]][11]
1979 ~ 1987
정계 입문
[[전투적 성직자회|

전투적 성직자회
]]
1977 ~ 1989
창당

[[무소속|
무소속
]]

1989 ~ 현재
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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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페르시아인과 아제리인의 유전적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은데, 오늘날의 이란 북서부와 아제르바이잔 땅에서 살아가던 페르시아계 주민들이 튀르크족 치하에서 튀르크화된 게 오늘날의 아제리인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튀르키예 서부(아나톨리아 반도 서부 및 동트라키아) 주민들이 유전적으로 그리스인들과 차이가 크지 않고 오늘날 스페인 남부(특히 안달루시아)의 주민들이 유전적으로 모로코인들과 차이가 크지 않은 것과 비슷하다.[2] 다만 몽골 계통의 하자라족에 대한 인종차별은 심각한 수준이다. 하자라인은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란 그리고 파키스탄에 정착한 몽골 제국 군인의 후손인데, 몽골 제국의 페르시아권 침략에 따른 역사적 악연 때문에 하자라인이 세 나라에서 인종차별을 당하는 것이다. 파키스탄의 경우 무굴 제국의 후예를 칭하는 만큼 몽골 제국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이는 주로 인도계 민족인 펀자브인과 힌두인에게 해당될뿐더러 이들 또한 몽골 제국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별개로 하자라인에 대한 인식은 영 좋지 않으며, 몽골 제국에 대한 인식이 나쁜 페르시아계 민족들(파슈툰족, 타지크족 등)은 특히 하자라인을 싫어하는 경향이 강하다.[3] 현임 에브라힘 라이시[4] 이때 하메네이 본인도 오른팔에 중상을 입었고 이후 오른팔이 마비되어 지금도 잘 움직이지 못한다. 하메네이의 평소 사진들을 자세히 보면 늘 오른팔을 옷으로 가리고 있거나 보이더라도 늘어져있는데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5] 1989년 전임 최고지도자였던 호메이니 사후 헌법이 개정되어 이슬람 공화국 정부 초기에 존재했던 총리직이 폐지되었다.[6] 나치SS와 비슷하게 기존 군부를 믿지 못해 창설된 일종의 사병이다.[7] 본명은 알리 모라드카니 아랑게, 생몰년도는 1926년 ~ 2022년[8] 이슬람 교리상 성직자는 재물을 탐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이 있기 때문에 대놓고 사업을 할 수는 없다.[9] 약 101조7450억 원[10] 아슈라 축제 자체가 알리의 아들인 후세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목적인데 문제는 그 애도 방식이 자해라는 것이다. 그것도 피를 철철 흐르게 할 정도로 매우 잔혹한데 심지어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한테 강요하기도 하여 이전부터 문제가 많았다. 오죽하면 시아파 내에서도 이전부터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을 정도다. 물론 금지한 후에도 자해가 없어진건 아니지만 그래도 가슴을 치는 정도로 끝난다. 정 피를 내도 헌혈을 하지 자해는 하지 않는다.[11] 1979년 혁명을 주도한 인사들이 혁명 성공 직후 호메이니의 지시에 따라 이슬람공화당을 창당했고,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란이 아무것도 얻지 못하자 내분이 일어나 해체됐다. 호메이니와 하메네이를 위시한 지도부는 전투적 성직자회라는 정당을 창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