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폰 프로이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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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독일 제국의 프리드리히 3세와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의 2남으로, 독일 제국 해군의 대제독이다.
2. 생애[편집]
2.1. 초기[편집]
1862년 8월 14일, 하인리히는 베를린에서 프리드리히 황태자의 셋째이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872년, 15세의 나이에 하인리히는 독일 제국 황립 해군에 사관 후보생으로 입대하였고, 1878년부터 1880년까지 전세계를 여행하며, 1884년부터 1886년까지 프로이센의 해군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2.2. 독일 제국 해군[편집]
하인리히는 프로이센 왕국의 왕자로서 금방 독일 제국 해군에서 계급을 올렸고, 1887년 어뢰정을 지휘하였다. 정장을 거쳐 어뢰정 편대가 신설됐을 때 초대 편대장도 맡았다. 1897년부터는 여러 해군 기동 부대를 지휘했다. 동아시아에 배치되었던 부대에 하인리히도 포함되어 있었다. 청나라에도 파병되었으며, 이곳에서 외교적인 성공도 거두었다. 이후 의화단의 난 이후 독일에 사죄하러 온 순친왕과 만나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법 등 여러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1899년에 그는 공식적으로 동아시아 함대의 사령관이 되었으며, 동년에 대한제국을 방문하여 한국 역사상 두 번째 서양 국빈이 됐다.[1][2] 실록에는 영어식으로 발음해 헨리 친왕이라고 나온다.# 그에 대한 대접은 극진했고, 하인리히 왕자도 고종 황제에 대해 호평을 했지만 동시에 여러 사건 때문에 동정심을 자아낸다고 평하기도 했다. 이후 하인리히 왕자가 출국할 때 고종황제는 여러가지 선물을 줬다.# 1904년에는 대훈위 금척대수장을 수훈받았다.
나중에는 주력 함대의 사령관이 되었고 1903년에는 발트해 해군기지의 사령관이 되었다. 1906년부터 1909년까지 대양함대의 사령관이었으며, 1909년에는 대제독으로 진급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하인리히는 발트해 함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하인리히는 러시아 제국 해군에게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독일 해안을 향한 공격을 저지하였다. 전후 군주제가 사라지자 하인리히는 해군을 떠났다. 이후 혁명을 피해 살다가 아버지처럼 후두암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3. 성격과 사생활[편집]
하인리히는 독일 제국에서 가장 먼저 파일럿 면허를 받은 사람 중 한명이었다. 그는 자동차에 관심이 많았으며, 노년에도 자동차를 이용한 스포츠를 즐겼다고 한다. 하인리히는 동시에 용감하고 우수한 선장이었다고 한다. 현대 기술에 능통하였으며, 요트 타기를 즐겼다. 이외에도 하인리히는 '하인리히 왕자' 모자를 유행시켰다.
4. 가족관계[편집]
자세한 내용은 호엔촐레른 가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둘째 이모 헤센 대공비 앨리스의 3녀로 이종사촌인 헤센의 이레네 공녀와 결혼했는데, 이레네는 외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에게 물려받은 혈우병 보인자여서 장남과 3남이 혈우병 환자로 태어났다. 참고로 이레네의 둘째 언니 헤센의 엘리자베트 공녀는 하인리히의 형인 빌헬름 2세의 구애를 받았으나 거절했다. 만약 둘이 결혼했으면 겹사돈이 될 수도 있었다.
슬하에 3남을 두었는데 앞서 말했다시피 장남 발데마어와 3남 하인리히는 혈우병 환자였다. 하인리히는 4살에 요절했고, 발데마어는 56세까지 비교적 장수한 편이지만 자손이 없었다. 자녀를 둔 건 혈우병이 없던 차남 지기스문트 뿐이지만 코스타리카로 이민 가서 살았다.
차남 지기스문트는 에른스트 2세(작센알텐부르크)의 맏딸 샤를로테와 결혼해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지만 장남 알프레드가 자녀 없이 죽어서 대가 끊겼다. 장녀 바바라는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마지막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4세의 2남 2녀 중 차남 크리스티안 루트비히와 결혼해서 슬하에 2녀를 두었는데, 프리드리히 프란츠 4세의 장남 프리드리히 프란츠는 자녀 없이 사망했고, 바바라와 결혼한 크리스티안 루트비히 역시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메클렌부르크슈베린 가문 역시 단절된다.
하인리히 왕자의 직계 자손의 대가 끊어지면서 빌헬름 1세 이후의 호엔촐레른 가문은 빌헬름 2세의 자손들만 대를 이어나가게 된다.[3]
그리고 메클렌부르크 가문 역시 슈베린의 직계 자손의 대가 끊어지면서 메클렌부르크 가문은 슈트렐리츠 계열의 자손들만 대를 이어나가게 된다. 다만 아들부자 호엔촐레른 가문과 달리 이쪽은 남자 계승자가 3명[4] 밖에 없어서 자손 수가 별로 없다.
얼굴을 보면 알겠지만 형인 빌헬름 2세와는 달리 친척들인 조지 5세, 니콜라이 2세와 닮았다.
4.1. 조상[편집]
4.2. 자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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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 번째는 1895년 방한한 이탈리아 왕국의 [2] 하인리히는 이때 조선의 전투 기술을 보여달라고 청하였는데, 이 중 궁술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고 조선의 국궁을 쏴 보기도 했다. 다만 하인리히 일행에 대한 평판은 별로 좋지 않았다. 독일에게도 이권을 달라며 땡깡을 부리고 폭력사태까지 일으키는 등, 많은 물의를 빚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참고 하인리히 왕자와 이레네 공녀 부부는 모두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주들이었기에 영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잘 구사했지만, 정작 대한제국 측 통역관(민상호)의 한계 때문인지 대화는 피상적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방한 중에 정신병자 한 명이 난입해 고종에게 자신은 천주교 신자인데,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하늘의 소리를 들었다며 국가를 자신에게 인계하라고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3] 프리드리히 3세와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의 아들들 중 비교적 오래 살았지만 대가 끊긴 하인리히나 일찍 요절한 지기스문트와 빌데마르와 달리, 빌헬름 2세는 거꾸로 엄청난 아들 부자(6남 1녀)였고 빌헬름의 아들들과 손자들도 아들을 많이 낳아 현재까지 후손이 이어지고 있다.[4] 아들 2, 손자 1[5] 파벨 1세의 3녀이다.[6] 조지 3세의 4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