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브레히트(프로이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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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 초대 공작
알브레히트
Albrecht von Preußen
[1]

출생
1490년 5월 17일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국 안스바흐
사망
1568년 3월 20일 (향년 77세)
프로이센 공국 타피아우[2]
재위기간
튜튼 기사단 기사단장
1510년 ~ 1525년
(14~15년)
프로이센 공작
1525년 4월 10일 ~ 1568년 3월 20일
(42년 11개월 1주 3일, 15,68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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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 프리드리히 1세
어머니 폴란드의 조피아
배우자
덴마크의 도로테아 (1526년 결혼 / 1547년 사망)
브라운슈바이크칼렌베르크괴팅겐의 안나 마리 (1550년 결혼)
자녀
안나 조피,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
형제자매
카지미르, 마르가레테, 게오르크[1], 소피, 안나, 요한, 엘리자베트, 바바라, 빌헬름, 요한 알브레히트, 굼프레히트
가문
호엔촐레른 가문
종교
로마 가톨릭루터교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생애
2.2. 루터교회로의 개종과 프로이센 공국 성립
2.3. 말년과 최후
3. 여담



1. 개요[편집]


튜튼 기사단의 마지막 기사단장(Hochmeister)[3]이자 독일 기사단국을 세속화한 프로이센 공국의 초대 공작이다. 그가 세운 프로이센 공국은 나중에 호엔촐레른 가문 본가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동군연합을 이루어 프로이센 왕국을 형성하였고, 먼 훗날 독일을 통일한다.


2. 생애[편집]



2.1. 초기 생애[편집]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 프리드리히 1세(Friedrich II. von Brandenburg-Ansbach-Kulmbach 1460~1536)와 폴란드 왕국 출신 공주 조피아 야기엘론카(Zofia Jagiellonka 1464~1512)의 3남으로 안스바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프리드리히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알브레히트 3세 아힐레스의 차남으로, 부친이 발표한 칙령에 따라 형 요한 치체로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본토를 물려받고 차남이었던 프리드리히는 프랑켄 영지인 안스바흐를 물려받았다. 어린 시절 알브레히트는 쾰른 선제후국으로 건너가 쾰른 선제후 헤르만 4세(Hermann IV. von Hessen 1442~1508)의 궁정에서 교육받았고, 쾰른 대성당의 수사로 임명되기도 했다.

프리드리히는 매우 낭비벽이 심했던 사람으로 결국 맏아들 카지미르와 둘째 게오르크에 의해 축출당해 반 은퇴상태로 몰렸고, 카지미르는 쿨름바흐-바이로이트를, 게오르크는 안스바흐를 나누어가졌다. 부친을 몰아낸 쿠데타를 주도한 두 형이 프랑켄 영지를 몽땅 나눠먹었기 때문에 알브레히트와 그 동생들은 생존을 위해 타지로 나가야했고, 알브레히트는 머나먼 발트해 연안 지역에 있던 독일 기사단국으로 건너가 튜튼 기사단에 가입했다. 1510년 작센의 프리드리히[4]로부터 차기 튜튼 기사단장으로 지명받았고 12월 14일 튜튼 기사단장이 되었다. 그가 튜튼 기사단장으로 지명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튜튼 기사단과 갈등을 빚던 폴란드 왕국의 국왕들[5]이 그의 외숙부였기 때문으로 폴란드와의 갈등을 좀 더 용이하게 중재할 수 있을것이라는 믿음에서였다. 실제로 그는 독일과 폴란드간의 갈등 중재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폴란드의 종주권을 강요한 외숙부 지그문트 1세와의 갈등이 해결되지 못하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협의하여 전쟁을 시작했지만 이는 오히려 위축되었던 독일 기사단국을 더욱 황폐화시켰다. 결국 1521년, 알브레히트는 폴란드와 4년의 휴전 협정을 맺고 물러났다.


2.2. 루터교회로의 개종과 프로이센 공국 성립[편집]


당시 독일 본토의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마르틴 루터로 인하여 종교 개혁이 촉발되기 직전이었고, 알브레히트는 형 게오르크와 더불어 루터의 신학에 흥미를 보였던 몇 안되는 세속 독일인 군주였다. 1522년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 카를 5세를 만나 폴란드와 전쟁을 재개하고자 지원을 얻으려 했다. 이때 뉘른베르크에서 루터의 지지자였던 안드레아스 오지안더(Andreas Osiander 1498~1552)를 만났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루터교회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후 작센 선제후국의 수도 비텐베르크로 건너가 루터를 만났고 루터는 그에게 성속 독일 기사단국을 세속 국가로 전환시키는게 어떻겠냐는 제의를 받았다. 독일 기사단국으로 돌아온 그는 외숙부 지그문트 1세의 협의를 구한 끝에 폴란드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1525년 10월, 독일 기사단국을 세습 프로이센 공국으로 전환시켰다. 지그문트 1세와의 협정에 따라 프로이센 공국은 알브레히트의 남계 후손만 계승하기로 합의되었으며 쾨니히스베르크가 수도가 되었다. 폴란드의 종주권을 인정해야 했지만 대신 반대급부로 프로이센 공국만의 군대, 폴란드에서 통용되던 굴덴 외 자체 화폐 주조권, 독자적인 외교 활동을 허락받았다. 그리고 프로이센 지역 의회를 세워 주민들의 자치를 허용했다.

폴란드의 종주권을 인정한 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지그문트 1세의 보호 덕분에 당시 서유럽에서 강대한 세력을 자랑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동유럽에서 세력을 확장해나가던 동생 페르디난트 1세로부터 공국을 지킬 수 있었다. 카를 5세와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이를 두고 크라쿠프의 젖소 거래라며 비하했으나 이미 가톨릭 신앙을 이탈한 알브레히트에게는 쇠귀에 경 읽기였다.

쾨니히스베르크로 돌아온 그는 루터교회로의 개종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튜튼 기사단 내부에서는 반대하는 세력이 없지 않았으나 쾨니히스베르크 시민들은 그를 지지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기사단원들에게 개종을 강요했으나 대부분은 가톨릭 신앙을 지키겠다며 기사단을 탈퇴하였고 최종적으로는 기사 55명만 남았다.

세속 공작이 된 그는 농노를 해방하여 농노제를 혁파했고 모든 마을에 학교를 세워 기존의 농노 신분이었던 자유민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다. 또한 이를 위해 가톨릭을 유지하는 시민들에게 세금을 왕창 뜯고 가톨릭 수도원을 몰수하여 재정을 확보했다. 1526년 덴마크-노르웨이 국왕 프레데리크 1세의 딸 도로테아와 결혼하여 외교적인 지원[6]을 확보하였고, 형 게오르크와 함께 뉘른베르크, 안스바흐, 오버슐레지엔에 루터교회 교회를 설립하였다. 1544년 크라쿠프의 야기엘론스키 대학교를 롤모델 삼아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Albertus-Universität Königsberg)를 세웠다. 가톨릭교회로부터 몰수한 재산을 바탕으로 독일어 교육 서적과 루터교회 신학 서적을 보급했으며 1549년에는 본인이 직접 천문학 관련 서적을 출판하기도 했다.


2.3. 말년과 최후[편집]


말년에 그를 루터교회 신앙으로 끌어들였던 안드레아스 오지안더를 초청해 쾨니히스베르크 대학 교수이자 자신의 조언자로 임명했는데, 이는 프로이센 공국 내에서 불화를 일으키는 빌미가 되었다. 오지안더는 정통 루터교회 신학에서 이탈해 당시까지 살아있던 루터의 가장 큰 지지자 필리프 멜란히톤과 갈등을 빚었다. 알브레히트는 오지안더의 편을 들었으나 귀족들은 정통 루터교회 신앙을 지지했고, 이때쯤이면 가톨릭교회로부터 몰수할 토지도 남지 않아 회유할 수단도 없어서 귀족들로부터 신망을 잃었다.

오지안더가 죽은 후 그는 요한 풍크(Johann Funck 1518~1566)라는 신학자를 고문으로 임명했다. 풍크는 알브레히트의 총애를 바탕으로 많은 재산을 축적하는 한편 많은 정치적, 종교적 분란을 초래했다. 어린 아들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의 섭정 문제로 인해 공국 내의 혼란이 극에 달하자 결국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가 직접 개입했다. 풍크는 1566년 10월 28일, 궁정 음모 사건으로 처형당했고,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의 섭정으로 조카인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 게오르크 프리드리히(Georg Friedrich von Brandenburg-Ansbach 1539~1603)[7]와 본가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아힘 2세 헥토어가 선임되었다.

사실상 권력을 박탈당한 알브레히트는 방구석 늙은이로 전락하여 2년을 더 살다가 1568년 3월 20일, 타피아우 성(Burg Tapiau)[8]에서 흑사병에 걸려 사망했다. 그의 두 번째 부인이자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의 어머니인 브라운슈바이크의 안나 마리아(Anna Maria von Braunschweig 1532~1568)도 그가 흑사병에 감염된 지 불과 16시간 만에 사망하는 바람에 생전에 귀족들이 우려한 대로 섭정이 필요해졌고, 호엔촐레른 가문의 친척들이 어린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를 대신해 프로이센 공국을 대리로 통치했다.


3. 여담[편집]


  • 엄격한 루터파 신자로서 가톨릭을 탄압했으나, 당시까지도 남았던 고대 프로이센의 토속신앙은 그냥 내버려두었다. 이런 민간신앙은 국가 차원에서 일일이 탄압할 필요조차 없다고 안중에도 두지 않았을 것이다.

  • 기존의 유럽 국가들은 교회에 관심이 없더라도 형식상으로나마 가톨릭을 국교로 삼았는데, 그의 개종과 세속 공국 전환은 당대 유럽 군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후 그의 사례를 따라 튜튼 기사단의 리보니아 기사단 지부장 고트하르트 케틀러(Gotthard Kettler 1517~1587)는 쿠를란트 공국을 설립했다.

  • 쾰른에서 살던 시절부터 수학과학에 흥미를 보였고, 코페르니쿠스지동설을 지지한 몇 안 되는 군주였다.[9]

  • 유해는 쾨니히스베르크 대성당에 안장되었는데 제2차 세계 대전 막바지에 벌어진 동프로이센 공세에서 영국 공군의 폭격을 받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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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신을 강조해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 알브레히트(Markgraf Albrecht von Brandenburg-Ansbach)로 표기하기도 한다.[2]러시아 칼리닌그라드주 그바르데이스크(Гварде́йск).[3] 독일 기사단국을 이끌던 기사단장으로서 마지막이라는 의미이다. 그의 개종에 반발하고 가톨릭을 유지하려 한 소수의 기사단원들은 발터 폰 크론베르크(Walter von Cronberg 1477~1543)를 따라 뷔르츠부르크로 건너가 가톨릭 기사단의 명맥을 이어나갔다.[4] 베틴 가문 출신으로 작센 선제후 에른스트의 조카이자 마르틴 루터를 지지한 프리드리히 3세와는 사촌지간이었다.[5] 얀 1세 올브라흐트, 알렉산데르 야기엘론치크, 지그문트 1세.[6] 프레데리크 1세까지는 가톨릭을 믿었으나, 프레데리크 1세는 루터교회를 탄압하라는 덴마크 귀족 및 성직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맏아들 크리스티안 3세덴마크 국왕으로 즉위해 덴마크,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페로 제도에 종교 개혁을 실시했다.[7] 형 게오르크의 아들.[8] 칼리닌그라드주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튜튼 기사단의 성채인데 현재 교도소로 사용 중이다.[9] 이외에도 지동설을 주장한 군주는 대표적으로 교황클레멘스 7세가 있다.[10] 후손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게오르크 빌헬름의 유해도 함께 날아갔다. 이 폭격으로 임마누엘 칸트의 유해만 살아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