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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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 6촌
신라 6부
성씨
시조
알천 양산촌
급량부
이씨
알평
돌산 고허촌
사량부
최씨
소벌도리
취산 진지촌
본피부
정씨
지백호
무산 대수촌
점량부
손씨
구례마
금산 가리촌
한기부
배씨
지타
명활산 고야촌
습비부
설씨
호진
삼국사기 기준.# 삼국유사에서는 돌산 고허촌(사량부) 소벌도리를 정씨로 취산 진지촌(본피부) 지백호를 최씨로 기록했다. 또한 6촌의 순서도 셋째가 무산 대수촌(점량부), 넷째가 취산 진지촌(본피부)이라고 기록했다.#







알천 양산촌장
알평 | 謁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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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州李氏始祖諱謁平景慕碑
경주이씨시조휘알평경모비[1]

출생
기원전 117년 이전[2]
고조선[3]
사망
연대 미상[4]
사로국 알천 양산촌
능묘
미상
재위기간
알천 양산촌 촌장
기원전 69년 전후
본관
경주 이씨

알평(謁平)
직위
진한 사로국 알천 양산촌 촌장

1. 개요
2. 상세
3. 경주 이씨 족보의 기록



1. 개요[편집]


경주 이씨(慶州 李氏)의 시조이다. 신라(新羅) 건국의 모태가 된 진한(辰韓) 6부의 하나인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의 촌장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6부 세력은 고조선 유민으로서 진한으로 남하하여 정착하였다고 한다.


2. 상세[편집]


신라 양산촌의 촌장이며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후 신라 유리왕이 사성정책을 하였을 때 다른 촌장들과 함께 이(李)라는 성씨를 받았고, 경주 이씨의 시조이면서 성주 이씨를 비롯한 대한민국의 상당수 이씨 가문의 비조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알평은 하늘에서 진한 땅 표암봉에 내려와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의 촌장이 되었다고 하는데, 삼국사기와 비교하면 신라 6촌장은 고조선 유민으로서 남하하여 진한에 정착한 것을 알 수 있다.

기원전 69년, 6촌장이 알천의 둑 위에 모여 나라를 세울 것을 논하였다. 마침 남쪽 양산 밑의 나정에서 사내아이를 발견하여 왕으로 삼기로 하고 함께 양육하여 기원전 57년에 왕위에 추대하니 이가 신라 시조 박혁거세이다. 양산촌은 유리왕 9년(서기32년) 급량부(及梁部)로 개칭하고 이씨(李氏) 성을 사성(賜姓)받았다고 한다.


3. 경주 이씨 족보의 기록[편집]


경주 이씨 세전보감에 따르면 알평은 기원전 117년에 하늘에서 진한 땅 표암봉으로 내려온 것으로 수록되어 있다. 자(字)는 천서(天瑞), 호(號)는 표암(瓢巖), 성(姓)은 이(李), 시호(諡號)는 문선공(文宣公) 또는 은열왕(恩烈王)이라 전한다. 혁거세 거서간 때에 개국 좌명공신에 녹훈되고 아찬을 역임하였으며 군무를 주관하였다고 전한다. 경주이씨 세보에 의하면 알평은 200세까지 향수(享壽)하였다고 한다. 법흥왕 23년(서기 535년) 시호를 문선공(文宣公)이라 하였고, 태종 무열왕 3년(서기 656년) 은열왕(恩烈王)으로 추봉되었다. 이때 배위인 태화공주 기씨(泰華公主 箕氏)는 성렬왕비(聖烈王妃)로 추봉되었다.

시조 이알평 이후 900여 년간의 후계가 실전되었다가, 고려말 목은 이색이 찬한 익재 이제현 묘지(墓誌)에 신라말 진골(眞骨) 출신으로 소판(蘇判) 관직에 오른 소판(蘇判) 이거명(李居明) 이후의 계보가 밝혀짐으로써, 이거명을 중시조로 한 계보가 전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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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주시 동천동 소재. 1979년 11월 1일 당시 경주이씨중앙화수회 총재였던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성금으로 건립되었다. 비문 전면의 글씨는 이 회장의 친필이다.[2] 경주 이씨 족보에 따르면 진한 땅 표암봉에 내려온 것이 기원전 117년이라고 하므로 출생은 그 이전이 된다.[3] 삼국사기에서는 고조선의 유민이라 하였고, 삼국유사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였다.[4] 향년 200세라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