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도 카리카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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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의 前 축구선수


파일:external/www.museodesanlorenzo.com.ar/carricaberry.jpg

이름
알프레도 카리카베리
(Alfredo Carricaberry)
본명
알프레도 데메트리오 카리카베리
(Alfredo Demetrio Carricaberry)
출생
1900년 10월 8일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아르헨티나 콜론
사망
1942년 9월 23일 (향년 41세)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국적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아르헨티나
포지션
아웃사이드 라이트, 스트라이커
신체조건
불명
등번호
-[1]
소속팀
CA 산 로렌소 (1919-1930)
스포르티보 팔레르모 (1931)
우라칸 (1932-1933)
에스투디안틸 포르테뇨 (1934-1935)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1936)
국가대표
12경기 / 4골 (1922-1931)

Vasco

1. 생애
1.1. 클럽
1.3. 사망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3. 뒷이야기
4. 수상
4.1. 클럽
4.2. 국가대표
4.3. 개인


1. 생애[편집]



1.1. 클럽[편집]


어린 시절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플로레스타와 라모스 메히아의 에스투디안틸 포르테뇨 에서 활약했다. 1919년에 그는 산 로렌소에서 데뷔하였고 1930년까지 297경기에 출전 104골을 기록하였다.[2] 이는 산 로렌소 역사상 8번째로 많은 득점 기록이다.

그의 데뷔전은 1920년에 라싱 클루브전이었는데 팀의 유일한 득점을 기록했지만 팀은 1대2로 패배하였다. 1923년과 1924 시즌이 카리카베리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데 팀은 리그 연속 우승을, 카리카베리는 1923 시즌에 팀 내 최다 득점자로 올라선 한 해였다.

1930년까지 산 로렌소에서 활약한 카리카베리는 잠시 라이벌 팀 우라칸에서 뛰기도 했지만 여기서는 1골밖에 넣지 못하는 극심한 부진을 보였다. 그 이후 어린 시절을 보냈던 에스투디안틸과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에서 남은 선수 생활을 보냈다.


1.2. 국가대표팀[편집]


국가대표팀에는 1922년 우루과이를 상대로 데뷔하였다. 여기에서도 1골을 넣었지만 팀은 1대2로 패배하였다. 프로 데뷔의 데자뷔 카리카베리의 국가대표팀 최고의 순간은 1927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의 우승이었다. 카리카베리는 이 대회에서 3골을 기록하여 공동 득점왕이 되었다. 또한 대표팀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친선 경기를 하였는데 카리카베리는 2번째 게임에 출전, 2골을 넣어 3대2 승리를 이끌기도 하였다.

카리카베리는 1928년 올림픽에서 아웃사이드 레프트로 출전, 은메달을 따는 데 공헌했지만 월드컵에는 참가하지 못하고 대표팀에서 은퇴하였다.


1.3. 사망[편집]


1942년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생전 자주 피우던 담배가 원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편집]


빠른 스피드와 강력한 슈팅으로 명성을 날렸다.


3. 뒷이야기[편집]


  • 카리카베리는 종종 산 로렌소의 팬들과 카페에서 함께 차를 마시기도 하였다.


4. 수상[편집]



4.1. 클럽[편집]




4.2. 국가대표[편집]




4.3. 개인[편집]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2] 다른 기록으로는 330경기 출전 106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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