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둘라 아마드 바다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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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제5대 총리
압둘라 아마드 바다위
عبد الله احمد بداوي


파일:external/1.bp.blogspot.com/Tun_Abdullah_bin_Haji_Ahmad_Badawi.jpg

이름
압둘라 아마드 바다위
Abdullah Ahmad Badawi
YAB Tun Dato' Sri Haji Abdullah bin Haji Ahmad Badawi
عبد الله احمد بداوي
출생
1939년 11월 26일 (84세)
말레이시아 바얀 르파스
학력
말라야 대학교
약력
말레이시아의 제5대 총리
정당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


파일:external/www.pmo.gov.my/T_PakLah.jpg

정부의 공식 초상화.

1. 소개
2. 생애
3. 정치 활동
4. 총리
5. 가족



1. 소개[편집]


말레이시아의 정치인으로 말레이시아의 제5대 총리이자 제8대 부총리. 다른 역대 말레이시아 총리들에 비하면 가장 존재감 없는 사람인데 문서를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또한 후세인 온과 더불어 독재자로 잘 분류되지 않는 총리 중 하나이다. 종종 "팍 라(Pak Lah)"라고도 불린다.


2. 생애[편집]


1939년 11월 26일 풀라우피낭바얀르파스에서 태어났다.[1] 독실한 무슬림 집안 출신인데, 역대 총리들 중 유일한 아랍계이다. 친할아버지인 셰이크 압둘라 바다위 파힘사우디아라비아메카에서 온 예멘인으로 유명한 종교인이었다.[2] 물론 이 사람은 훗날 이슬람 근본주의 정당인 범말레이시아이슬람당(PAS)을 창당하는 데 큰 역할을 하지만, 정작 압둘라 본인과 그의 아버지는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을 택했다는 것이다. 외할아버지인 하수치앙(哈蘇璋)은 하이난산야에서 온 회족 출신 무슬림이었다.

부킷머르타잠[3]부킷머르타잠 고등학교를 나왔으며, 말레이시아의 서울대 격인 말라야대학교에서 이슬람학을 전공했다.


3. 정치 활동[편집]


대학 졸업 후 정부기관에서 일하다가, 풀라우피낭 주 본토 지역의 크팔라바타스[4] 선거구의 UMNO 후보로 출마, 당선되었다.

하지만 UMNO는 곧바로 분열 위기에 처하는데, 텡쿠 라잘레이프 함자를 주도로 한 A조와, 당시 총리 마하티르 모하마드를 축으로 하는 B조의 갈등 속에서, 압둘라는 B조에 합류한다. 이후 UMNO는 헌법재판소에서 위헌정당 판결을 받아 해산 크리를 먹지만, A조는 정신 46을 창당하고 B조는 신UMNO를 창당하면서 위기를 모면한다.[5]

1998년 안와르 이브라힘 부총리가 파멸되고, 이듬해 압둘라는 새 부총리로 임명된다. 명실공히 후계자가 된 압둘라는 2003년, 마하티르가 사임하자 총리직을 승계한다.


4. 총리[편집]


내각책임제 국가인 말레이시아에서 총리는 한국의 대통령에 해당되지만, 정작 이 사람은 최규하처럼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최규하하고 비교할 대상은 아니다. 지금까지 말레이시아의 총리들 상당수가 독재를 감행했으나, 이 사람은 독재자라고 보기는 힘들다.

취임하자마자 부패 척결을 내세운 압둘라는 마하티르 시기 부패에 연루된 수많은 정치 스타들에게 대규모로 코렁탕을 먹인다. 사실 말레이시아의 부정부패가 은근 심해서인지, 주민들 사이에서 정부의 부정부패가 너무나도 유명한 건 사실이다. 이 덕에 주민들의 불만을 일차적으로 돌렸으며, 종교 부문에서는 이슬람 하다리 사상을 제창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고르바초프김영삼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이 사람도 역대 총리들과 마찬가지로 개인숭배를 시도했는데, 스스로를 "인적자원개발의 아버지(Bapa Pembangunan Modal Insan)"라고 칭했다. 그리고 그를 "팍 라"라는 별명으로 부르는 일이 일어나자 공식 석상에서 이 별명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시켰다.[6] 물론 전임들보다 덜하기는 했지만.

말레이시아에 대대적인 무상의무교육을 도입했는데, 초등학교와 중학교(하급)[7]의 무상의무교육을 도입했으며, 이 덕분에 돈이 없어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던 가난한 아이들도 학교를 무사히 다닐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논란의 여지가 있는게, 이 정책은 사실상 말레이인 특권층에게만 주어졌으며, 인종차별적이라고 비판을 받는다. 뭐, 이 사람이 그렇다고 전통적인 인종차별 정책인 부미푸트라 정책을 폐기하거나 한 건 아니다.

또한 외국인들에게 문호를 개방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폐쇄적으로 돌린 것에 대한 비판은 존재한다. 2005년에는 외국인 투자를 제한하는 해괴망측한 법안이 통과되었고, 이 무렵을 전후로 외국인들은 말레이시아에서 사실상 살기 힘들어졌다. 물론 이러한 정부의 제노포비아적 정책은 사실상 압둘 라작 시절부터 있었으나, 후에 차츰 강화된 것인데, 이 사람은 이를 폐기하기 보다는 더 강화했으니 무슨 소리가 나올까. 후에 나집 라작이 집권하면서 좀 풀리는 듯 했지만, 나집은 되려 더 빡세게 돌리면서, 외국인들의 불만은 저만이 아니다.

그리고 툰쿠 압둘 라만을 오마주하는 행동을 했는데, 2007년 8월 31일 독립 50주년을 맞아 쿠알라룸푸르독립광장에서 툰쿠가 했던 "독립!"을 연달아 외쳤다. 이것은 애국심을 강조하기 보다는 툰쿠를 오마주해서 노년층의 향수를 끌려 한 게 아닌가 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다소 개혁개방을 약속했으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국 주민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으며, 총선이 있던 2008년은 더더욱이나 안와르의 집행유예가 풀리는 해라 민주화를 이행하라는 국민들의 압박을 지속적으로 받았다. 결국 동년 총선에서 UMNO는 사상 최초로 개헌선에서 한참 밀리는 대대적인 참패를 당했다. 뭐, 그래도 여전히 1당독재를 하는 데 법적인 하자는 없으니 본인은 더 해먹으려고 작정했던 모양이지만, 마하티르를 비롯한 여권 내 실세들의 사퇴 압력이 이어지자, 이듬해 사임하였고 부총리인 나집 라작이 승계했다.

현재는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한 모양이다.


5. 가족[편집]


파일:external/photos1.blogger.com/pm01.jpg

일본인 엔돈 마흐무드와 결혼했으나, 2005년 사망했고, 후에는 크리스탕 출신인 잔 압둘라와 재혼했다. 4명의 아이를 두고 있는데, 이 중 둘은 입양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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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항 소재지이다.[2] 근세 이래 말레이시아는 인도양을 통하여 예멘과 교류가 활발하였고 그 결과 말레이시아 무슬림 대다수는 예멘 내 순니파의 주요 법학파 샤피이파를 따른다. 의외로 말레이시아 전통 문화와 예멘 전통 문화가 겹치는 편이다.[3] 이 사람의 고향이다. 헌데 두 사람은 아예 다른 길을 걸었으니...[4] Kepala Batas; kepala가 '머리통'을 뜻하고 'batas'가 '끝'을 뜻한다. 즉 '머리 끝'으로, 이름 그대로 북쪽 끝에 있다(...). 스브랑프라이(풀라우피낭의 본토지역)에 속하며 우리로 치면 순안구역 정도가 되겠다.[5] 후에 신UMNO는 UMNO로 복귀한다.[6] 하지만 역대 모든 말레이시아 총리들이 스스로를 별명으로 부르지 못하게 하긴 했다. 왜냐하면 개인숭배에 어긋나니깐(...).[7] '하급'과 '상급'으로 구분하지만, 한국으로 치면 하급은 그냥 중학교에 해당되고, 상급은 고등학교에 해당된다. 말레이시아는 고등학교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