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 살리흐 아이유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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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어
الملك الصالح نجم الدين ايوب
알말리크 앗 살리흐 나짐 앗 딘 아이유브
영어
Salih
생몰년도
1201년~1249년 11월
재위
1240년~1249년

1. 개요
2. 생애
2.1. 후계자
2.2. 술탄 즉위
4. 사후
5. 맘루크 개편



1. 개요[편집]


아이유브 왕조의 제7대 술탄이다. 아버지는 제5대 술탄 알 카밀이다.

살라흐 앗 딘과 구분해 살라딘 2세라고도 불린다.

아이유브 왕조의 말기에 몽골의 침략에 대비해 군을 키웠으나 자신이 키운 군의 쿠데타에 아들이 죽고 왕조가 끝나고 말았다.


2. 생애[편집]



2.1. 후계자[편집]


1201년 알 카밀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후계자로 성장한다.
아버지의 쿠르드계 혈통보다 수단인이었던 어머니의 피를 진하게 이어받아 진한 곱슬머리였다고 하며 거만하고 과묵하고 냉혹했으며 문예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약속은 반드시 지켰고, 항상 장군들과 의견을 절충하고서 결단을 내렸다.
1229년 알 아딜이 다마스쿠스를 점령할 때 협상대표로 파견되었고, 1232년 아루두크 왕조와 전쟁 후 하산 케이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폭력적이고 맘루크 기병을 다수 모으는 것 때문에 1238년 아버지 알 카밀이 죽을 때, 동생 알 아딜 2세가 이집트를 상속받았다.


2.2. 술탄 즉위[편집]


1240년 사촌 앗 나시르와 동맹하여 알 아딜 2세를 몰아내고 7대 술탄이 된다.
1243년 앗 나시르가 점령했던 예루살렘을 내전을 이유로 십자군에 반환한다.
1244년 멸망한 호라즘 왕조의 군벌들과 연합해 예루살렘을 점령한다.
1248년 루이 9세의 침공소식을 듣고 방어 준비에 나선다.
1249년 6월 나일강 하구의 다미에타가 함락된다. 소식을 듣고 즉시 책임장교들을 처형하고, 만수라로 출병한다.
1249년 11월 20일 루이 9세는 나일강의 범람기를 다미에타에서 보내고 카이로를 향해 진군한다.
1249년 11월 22일 알 살리흐 병사[1]


3. 제 7차 십자군 전쟁[편집]


1249년 루이 9세의 침공을 받아 다미에타를 잃고 만수라에서 전투를 앞두고 알 살리흐가 병사하고 만다.
알 살리흐의 죽음은 왕비였던 샤쟈르 알 두르[2]와 군사령관 파크루딘 등 몇몇이 숨기고 전쟁에 나섰다.
알 만수라 전투는 십자군의 기습공격으로 파크루딘이 전사하는 등 십자군이 유리했으나 바이바르스의 활약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아이유브왕조가 승리한다.


4. 사후[편집]


제 7차 십자군 전쟁 종전 후 알 살리흐의 아들 알 투란샤가 술탄에 즉위한 지 2개월만인 1250년 5월 2일 맘루크, 바이바르스와 이쿠타이 장군이 알 투란샤를 죽이고 샤자르 알 두르를 1대 술탄으로 하는 맘루크 왕조가 시작된다.[3]


5. 맘루크 개편[편집]


알 살리흐는 후계자시절 몽골을 접하고, 이를 경계해 맘루크를 모았다.
술탄 즉위 후 선왕의 친위대였던 맘루크들을 자신의 맘루크로 전원 교체하였다.
투르크 민족 중, 킵차크인, 그 중에서도 쿠만족을 특히 선호했다. 쿠만족이 기마민족이고 활을 잘 쏠 뿐 아니라, 특히 몽골에 대한 복수심이 강하다는 이유에서라 한다.

알 살리흐는 카이로를 지나는 나일강에 있는 섬, 라우다에 맘루크 양성기관을 설치했고, 사람들은 이 맘루크를 바흐리라고 불렀다.
아라비아어로 바흐르는 바다, 카이로에서 바흐르는 나일강, 바흐리는 강 사람이란 뜻이다.

살라흐는 바흐리 부대에 몽골의 전술을 훈련시키고, 그들과 같은 장비, 같은 편제를 적용했다.
인도-유럽 향신료 무역의 통행세를 바탕으로 1만 정예맘루크를 술탄 개인친위대로 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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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랜 병으로 1248년에 이미 병상에 있었다.[2] 진주 나무라는 뜻[3] 알 투란샤는 알 살리흐의 전처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