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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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리아
𒀸𒋗𒁺𐎹
Aššūrāyu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ap_of_Assyria.png

최전성기인 신아시리아 시대[1]의 강역
기원전 2500년 경 ~ 기원전 609년
위치
서아시아, 이집트[2]
수도
아수르(~기원전 879)
님루드(칼후)(기원전 879~기원전 706)
두르샤루킨(기원전 706~기원전 705)
니네베(기원전 705~기원전 612)
하란(기원전 612~기원전 609)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왕(샤르)[3]
주요 군주
티글라트 필레세르 1세(기원전 1114~기원전 1076)
아슈르나시르팔 2세(기원전 883~기원전 859)
샬마네세르 3세(기원전 859~기원전 824)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기원전 745~기원전 727)
사르곤 2세(기원전 722~기원전 705)
센나케립(기원전 705~기원전 681)
아슈르바니팔(기원전 669~기원전 631)
민족
아시리아인
언어
아카드어, 아람어[4]
종교
메소포타미아 종교[5]
멸망 이후
신바빌로니아
현재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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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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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아카드어
𒀸𒋗𒁺𐎹(Aššūrāyu)
/ 𒆳𒀸𒋩𒆠(māt Aššur)[6]
아람어
ܐܬܘܪ(ʾĀṯūr)
아랍어
آشُّور(ʾāššūr)
영어
Assyria

1. 개요
2. 역사
2.1. 초기
2.2. 고아시리아
2.3. 중아시리아
2.4. 신아시리아
2.5. 멸망
3. 정치
4. 군사
5. 기타
6. 현대의 아시리아인
7. 창작물에서



1. 개요[편집]


기원전 25세기에서 기원전 609년 사이에 중동 지방에 존재했던 민족 내지는 그들이 세운 나라. 역사상 최초로 메소포타미아, 레반트, 이집트를 전부 통일했다.


2. 역사[편집]



2.1. 초기[편집]


아시리아인들은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메소포타미아소아시아 지역에서 상인으로 활발하게 활동한 것으로 보이며 기원전 2500년 무렵에도 아시리아인들은 도시 아수르를 중심으로 세력이 존재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독립된 국가라고 할 정도의 세력은 부족했고, 아카드 제국, 우르 제3왕조에 종속되어 통치받고 있었다.


2.2. 고아시리아[편집]


아시리아가 본격적인 독립국가로 발돋움한 시기는 기원전 2025년, 우르 제3왕조로부터 독립하여 고아시리아(Old Assyria)가 건설되면서부터였다. 고아시리아 시대의 대부분 기간 동안 아시리아는 정치적, 군사적 영향력이 거의 없는 작은 도시국가였지만 경제적으로는 중요한 위상을 지녔다. 에리슘 1세(기원전 1974~기원전 1935년) 시대부터 기원전 19세기 후반까지 아시리아는 자그로스 산맥부터 아나톨리아 중부 지역까지 이어지는 대규모 무역로의 중심지였다.

그러다가 기원전 18세기 바빌로니아(바빌론 제1왕조)에 함무라비 대왕이 즉위하여 인근 도시국가들을 정복하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통일하면서 아시리아까지 정복되어 잠시 아모리 바빌로니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때 함무라비는 비문에

"나는 백성을 적절하게 인도하고 아수르에게 자비로운 보호 정신을 돌려주었다"

라는 내용을 썼는데 이는 아시리아를 존중해 준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1430년경 아시리아는 미탄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미탄니의 지배를 받을 때도 어느 정도의 자치권은 유지했다. 기원전 14세기 히타이트의 수필룰리우마 1세가 레반트 지역의 패권을 놓고 미탄니와 전쟁을 치러 승리하면서 미탄니가 큰 타격을 입게 되었을 때 아시리아는 이 혼란을 틈타 미탄니로부터 해방되었다.

미탄니로부터 독립한 이후인 기원전 1363년 아슈르우발리트 1세가 즉위하고 나서 티그리스강 유역과 토로스 산맥 등지를 정복하여 본격적인 영토 국가로 발전했는데 이 시기가 중아시리아의 시작이었다. 즉, 이때를 고아시리아에서 중아시리아로의 전환점으로 여긴다.


2.3. 중아시리아[편집]


이 시기부터 아시리아가 중동 지역의 주요 국가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반복되는 쇠퇴로 정세가 안정적이지 못했고, 기원전 912년 아슈르단 2세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아시리아는 후기 청동기 시대 붕괴 때 멸망을 피한 몇 안되는 국가들 중 하나였으나, 그 피해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일시적으로 정복한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대부분은 아람인들의 공세에 빼았겼고, 아시리아의 영토는 수도인 아수르와 그 인근으로 다시 축소되었다. 중아시리아의 쇠퇴을 보여주듯 이 시기의 기록물은 다른 시기에 비해 비교적 적은 편이다.

2.4. 신아시리아[편집]


아시리아가 오리엔트 지역을 석권하고 최강대국으로 등극하는 전성기이다.[7]

신아시리아 시대는 기원전 911년 아다드 니라리 2세가 즉위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시대부터 아시리아는 뛰어난 관료 체계와 군사 제도를 운영하면서 이전 시대보다 훨씬 강한 국력을 구가했다. 아슈르나시르팔 2세의 치세에는 아시리아가 서아시아 지역의 통제권을 확립하고, 수도를 아시리아의 전통적인 중심지였던 아수르에서 님루드로 천도했다. 이때 님루드를 제국 최고의 도시로 만들기 위해 거대한 궁전과 성벽을 건설하고 수많은 시설을 건립하여 세계 최대의 도시 중 하나로 만들었다.

기원전 8세기부터는 아시리아의 침체기를 기회 삼아 성장하여 라이벌 세력으로 등극한 북방의 우라르투가 위협을 가하면서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가 즉위하고 나서부터 다시 부흥하여 우라르투를 압박했다.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는 군대를 재정비하고 상비군의 규모를 확대했으며, 기병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군사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그 결과 아슈르나시르팔 2세 사후 이어진 아시리아의 침체기를 종식시키고 중흥을 이룩할 수 있었다.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 또한 적극적으로 대외 원정에 나서 시리아 지역과 페니키아, 이스라엘 왕국을 정복하고 바빌론과의 평화 조약을 파기하여 바빌론까지 정복했다. 그 아들인 살만누아사리두 5세 또한 북이스라엘을 침공하여 멸망시키고,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국왕 호세아를 포로로 잡아가는 등의 전공을 올렸다.

이후 사르곤 2세의 시대에는 우라르투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대도시인 무사시르까지 빼앗는 성과를 내면서 우라르투를 몰락시켰다. 또한 바빌로니아 지역에서 마르둑-아플라이디나 2세[《성경》에서]가 반란을 일으키자 몆 차례나 군을 동원해 진압하여 결국 아시리아의 승리로 마무리지었다. 사르곤 2세는 기원전 706년 수도를 님루드에서 두르샤루킨으로 옮겼지만 수도를 옮긴 지 1년 만에 아나톨리아 중부 지역에서 타발과의 전쟁 도중 전사하여 아들 센나케립이 즉위한 후 니네베로 수도를 옮겼다.

센나케립은 즉위하자마자 네르갈의 신전을 재건하고 여러 대외 전쟁을 치루어 신아시리아 제국의 패권을 공고히 확립했다. 이 중에서도 남유다 왕국예루살렘을 침공하여 히즈키야를 포위했던 일은《성경》에 등장하여 잘 알려진 편이다. 그러나 장남인 아르다무리수를 왕세자에서 해임하고, 에사르하돈을 왕세자로 임명하여 장남의 원한을 사게 되었고, 결국 센나케립은 남유다 원정 철수 직후 니스록 신전에서 장남에게 살해되었다. 왕세자인 에사르하돈이 즉위하여 부왕의 암살에 관여한 인물들을 처형했고, 형제이자 암살의 주모자인 아르다무리수와 나부샤르우수르는 우라르투로 망명했다.

에사르하돈은 아시리아를 위협하던 킴메르족들을 격퇴하고 이집트 침공을 계획했다. 기원전 673년 겨울, 처음으로 이집트를 침략했으나 이때는 패배하여 원정 계획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고 본국으로 복귀해야 했다. 제1차 이집트 침공이 실패한 후 에사르하돈은 건강이 악화된 데다 우울증까지 겹쳐 상황이 많이 안 좋았다. 그러나 아시리아에서는 질병을 신이 내리는 형벌로 생각하여 병에 걸린 왕은 신들이 그를 지지해 주지 않는다는 근거로 여겨졌기 때문에, 에사르하돈은 고통을 참아가면서도 건강 상태를 신하들에게 숨겨야 했다. 기원전 671년 에사르하돈은 제2차 이집트 침공을 단행했는데 1차 원정 당시보다 더 많은 군대를 동원했다. 2차 원정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어 이집트의 수도 멤피스를 탈취하고 약탈했다. 그러나 제25왕조의 흑인 파라오타하르카는 남쪽으로 피신했고, 2년 후 멤피스를 다시 탈환하며 점령지를 수복했다. 이에 에사르하돈은 제3차 이집트 침공을 계획하여 다시 원정을 떠났으나 이집트에 도달하기 전에 갑작스럽게 붕어했다. 재위 후기 극심하게 악화되었던 건강이 갑작스런 사망의 원인으로 주로 거론된다.

에사르하돈의 뒤를 이어 아시리아의 마지막 명군이라고 불리는 아슈르바니팔이 할머니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고, 기원전 664년 아버지의 숙원이었던 이집트 정복을 다시 달성했다. 다만 이집트를 직할령으로 통치하는 것보다는 조공을 제공하는 봉신국으로 두기를 원하여 아시리아와 관계가 있었던 프삼티크 1세를 이집트 제26왕조(사이스 왕조)의 파라오로 즉위시켰다. 또한 아슈르바니팔은 무예에도 능할 뿐 아니라 지식욕도 왕성하여 학문에 식견이 높았는데 본인이 수집한 점토판 문서들을 모아 수도인 니네베에 세계 최초의 체계적인 도서관을 세웠다.[8] 한편 각지의 포로들을 잔혹하게 죽였으며, 사자 사냥 등의 블러드 스포츠를 즐긴 것으로 보인다.[9]

아슈르바니팔의 치세에 형인 샤마쉬슈무킨이 다스리던 바빌론에서 반란이 일어나 2년이 넘는 포위전 끝에 바빌론이 함락되었고 샤마쉬슈무킨이 사망하면서 반란이 진압되었다.[10] 그리고 이때 바빌론의 반란을 지원한 엘람도 침공하여 약탈하고 파괴했다. 이렇게 아시리아는 전투마다 승리를 거두는 강대국이었지만 세력을 넓힐수록 더 많은 세력과 대치해야 하고 특유의 가혹한 통치 방식 때문에 적대 세력이 너무 많아져 안정적이지 못한 정세였다. 이 때문에 아슈르바니팔은 세상을 떠날 때, 아시리아가 분란에 자주 직면하는 세태를 두고 통곡하는 말을 남기며 붕어했다. 유언의 내용은 이러했다.

"짐은 신과 인간을, 죽은 자와 산 자를 잘 대접했으나 질병과 고통 그리고 불행이 짐에게 닥친 이유는 무엇인가? 짐의 나라의 분란과 짐의 가족의 불화를 참을 수 없다. 마음을 어지럽히는 창피한 사건들 때문에 늘 괴롭다. 마음과 육신의 고통이 짐을 짓누르노라, 짐은 고뇌에 울부짖으며 삶을 마감하노라, 죽음이 짐을 덮쳐 쓰러뜨리노라. 짐은 비탄과 한탄에 젖어 밤낮으로 울부짖노라. 신이시여, 언제까지 저를 이렇게 다루시겠습니까? 부디 저를 구원해 주소서." 난 하노라고 했는데 왜 이따위야!



2.5. 멸망[편집]


아슈르바니팔 사후, 후계자 지위를 놓고 아슈르바니팔의 아들들인 신 샤리 이슈쿤과 아슈르 에텔 일라니 사이에서 내전이 벌어졌고, 수석 내관인 신 슈무 리시르의 후원을 받은 아슈르 에텔 일라니가 왕위에 올랐으나 다소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11] 내시인 신 슈무 리시르가 잠시 왕위에 올랐다가 후계자 경쟁에서 밀렸던 신 샤리 이슈쿤에게 제거되었다. 아슈르바니팔 왕 후반기부터 시작된 제국의 쇠퇴는 내란을 거치면서 더욱 심해졌고, 계속해서 아시리아의 뒷목을 잡고 있었던 바빌로니아 지방은 이 기회를 틈타 아시리아 세력을 완전히 바빌로니아에서 추방하는 데 성공했다. 이 시기 아시리아는 본토를 지키는 것도 불가능해질 정도의 상황에 이르렀고, 이집트리디아와 동맹을 맺었지만 결국 기원전 612년 신바빌로니아, 메디아, 스키타이, 킴메르, 유다, 엘람, 킬리키아 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멸망할 때 마지막 왕 신 샤리 이슈쿤은 성 전체에 불을 질렀고, 연합군 역시 아시리아에게 당한 그대로 보복하여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되었다.[12] 니네베 함락 이후에도 신 샤리 이슈쿤의 형제가 하란 지역에서 아슈르 우발리트 3세라 자칭하며 저항을 이어갔으나 기원전 609년 하란마저 메디아-신바빌로니아 연합군에 함락되어 아시리아 제국은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후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 시대에 아수르 등의 도시가 재건되어 회복되면서 정체성을 유지하게 되었고, 파르티아 제국과 사산 왕조를 거치면서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에 아시리아의 이름을 딴 아시리스탄 주가 설치되어 아시리아인들의 문화를 이어나갔다. 서기 14세기 이래로는 무자비한 정복군주인 티무르에 의해 주민들이 학살되는 등의 혼란기도 있었지만 오늘날까지도 아시리아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3. 정치[편집]


수사, 훌륭하고 성스러운 도시, (중략) 나는 정복하였다, (중략) 나는 수사의 지구라트를 부숴버렸다. (중략) 나는 엘람의 사원을 파멸로 몰아넣었다. 나는 그들의 신들과 여신들을 바람에 날려버렸다. 그들의 조상과 옛 왕의 무덤을 짓밟았고, (무덤에) 햇빛이 들게 하였으며, 그들의 뼈를 꺼내 아슈르의 영토로 옮겨 갔다.

- 아시리아의 왕 아슈르바니팔엘람 왕국을 정복한 것을 문자판에 새긴 내용.


히스기야 왕 14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의 모든 견고한 성을 쳐서 취하니라

- <이사야> 36:1

아시리아는 다른 민족들에 대한 우월의식이 강하다 보니 피지배민에 대한 정책이 상당히 강압적이고 잔혹했다.《구약성경》에도 당시 이러한 정책이 공포와 증오가 담겨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아시리아인 스스로도 자랑스럽게 점토판에 기록하고 있듯이[13] 저항한 지역은 주민들의 씨를 말려 해골 탑을 쌓고, 항복한 지역의 군주와 귀족들은 짐승처럼 코에 구멍을 뚫고 쇠사슬로 엮어 끌고 가 처형했으며, 평민들은 먼 곳으로 강제 이주를 시키고, 이 과정에서 거추장스러운 아이들은 바위에 머리를 박아 죽였다. 또한 아시리아의 유적에서 출토된 사르곤 2세의 부조를 보면 당시 사르곤 2세가 포로에게 행한 잔혹한 행위가 조각되어 있는데, 포로의 턱에 줄을 연결시켜 사르곤 2세가 그 줄을 당기면 포로가 자연스레 고개를 들게 되고, 그 순간 왕이 들고 있던 창으로 포로의 눈을 꿰뚫어버리는 장면이었다.

그렇게 빈 땅에다 또 다른 곳에서 끌고 온 사람들을 정착시키는 식이었다. 피지배민들에 대한 착취도 가혹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아시리아에 대한 다른 민족들의 증오가 굉장해서 틈만 나면 반란이 일어났다. 특히 점령한 이집트가 곧바로 반란을 일으켜 독립을 시도하는 등 거대한 영토를 확보했음에도 영토를 안정적으로 유지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아시리아인의 인구가 많지 않다 보니 타국을 점령하고도 제대로 된 통치가 힘든 판국이라 영토 유지가 더욱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아시리아 멸망 후에 분열된 오리엔트 지역을 재통일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는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피지배 민족에 대한 관용 정책을 실시해서 광할한 영토를 가진 상황에서도 아시리아보다 오래 갈 수 있었다.

다만 국가 존속 기간 자체로 보면 페르시아도 오래가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불과 220년 만에 멸망했는데 이는 신아시리아 제국의 존속 기간인 300년 가량보다도 짧다. 물론 아시리아와 달리 페르시아는 국가 초창기부터 광활한 영토를 확보하고 있었다는 차이는 있지만 무리한 원정(특히 그리스 원정, 살라미스 해전이나 마라톤 전투)을 지속하다가 경기 침체를 맞고 몰락하게 되면서 전성기를 그리 오래 누리지는 못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신아시리아만큼 피지배민들의 반감을 사지 않은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14]

그리고 바빌론 만큼은 아시리아 제국도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다. 바빌론이 부의 원천인데다가 바빌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정치, 행정, 문화적 관습 등이 많아 위상이 높았기 때문. 아시리아 제국도 바빌론에 대한 절대적 통치를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왕실의 친인척들을 바빌론 왕으로 내세워 대리통치를 시켰다. 바빌론의 체계적인 도시계획은 아시리아인들에게도 인상깊었는지 모티브를 따와 님루드를 건설했다. 센나케립의 재위 기에 바빌론이 반란을 일으키자 바빌론을 철저히 파괴하고 약탈한 적은 있었지만 이는 당시 아시리아 기준으로도 큰 모독이었기 때문에 뒤 이어 즉위한 에사르하돈은 바빌론을 재건하여 민심을 달래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이 바빌론이 여러 반란으로 인해 아시리아가 쇠약해진 틈을 타 신바빌로니아를 건국하고 아시리아를 멸망시키게 된다.


4. 군사[편집]


아시리아의 군대가 오리엔트를 석권할 정도로 강력해진 원인은 분명하지 않다. 히타이트나 이집트 등의 거대 문명들과 아람 등의 지역 경쟁자들이 모두 멸망하거나 쇠약해진 것을 원인으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비슷한 시기에 아시리아 역시 엄청난 타격을 받고 극도로 위축되었던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설득력이 매우 떨어진다.

다른 이유로는 전차를 혁신하고 최초로 기병을 체계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에 강력했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아시리아에서 품종을 개량하고 직접 타는 기마술을 고안하기 이전에는 기병을 운용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단 아시리아가 정말로 기마술을 직접 고안한 것인지 아니면 유목민족이 고안한 기술을 도입한 것인지는 논란이 있다. 다만 적어도 아시리아가 싸운 적들 중에 스키타이를 제외하면 아시리아 정도로 기병을 운용한 나라가 없는 것은 거의 확실한 것 같다.

그 다음으로 아시리아 이전에는 말의 허리 부분이 아닌 엉덩이 부분에 타야 했기 때문에 말을 통제할 수 없었다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아시리아의 미술품 중에도 기병은 말을 통제하지 못하고 대신 다른 말에 탄 마부 한 명이 자신의 말과 기병의 말 두 마리의 고삐를 동시에 쥐고 있는 모습이 발견되어 기마술이 발전하는 과도기적인 형태를 보여주기도 한다.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0360538881377e934c3d5bbc6f008b32.jpg

또한 역사에 기록된 군대 중 병참 부대 개념을 가장 먼저 실천한 군대로, 전투 부대만이 아닌 지원 부대의 개념을 먼저 깨치고 실행에 옮긴 것 또한 아시리아를 군사 강국으로 만든 한 요인이 되었다. 이는 아시리아가 그만큼 뛰어난 관료 체계를 갖추었기 때문이었다.[15]

그리고 활발한 철기 보급으로 인한 장비의 발전도 있었고, 신아시리아 시대에 들어서 상비군 제도를 도입하고 이를 적극 활용하는 등 군사 발전에 많은 투자를 했기에 강한 군대를 보유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5. 기타[편집]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시리아 오리엔트.jpg}}} ||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아시리아 부조(왼쪽)와 라마수 석상(오른쪽). 부조의 인물은 영웅 길가메시로 추정된다.

  • 군사 강국이란 이미지와 잔혹한 지배 정책 때문에 '아시리아인=피에 굶주린 전투종족'이라는 선입견을 가질 수도 있지만 생활상이나 문화 자체는 다른 오리엔트 지역의 주민들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문화적으로는 앞서 잔인한 발언과 부조로 유명한 아슈르바니팔이 최초의 체계적인 도서관을 만들어서 그 유명한《길가메시 서사시》전문은 수메르보다도 아시리아의 도서관 유적에서 먼저 발견되었고, 아시리아의 유적 중 하나인 카네쉬 유적에서 발굴된 편지들을 보면 거래의 독촉에 대한 불만감, 남편에 대한 바가지, 혼인을 해야 하니 빨리 집으로 돌아오라는 것 등 평범하고 현실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지극히 상인스러운 성향을 정복 시기에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시민들이 주고 받는 편지에 폭력적인 이야기가 나올 리가 만무하긴 하다.

  • 아시리아는 여러 번 수도를 옮겼기 때문에 “아시리아의 수도는 어디인가?”라는 질문에는 쉽게 답하기 어렵다. 건국 당시의 첫 번째 수도는 나라 이름과 같은 아수르였으나, 기원전 18세기에 슈바트-엔릴로 수도를 한 차례 옮겼다가 다시 아수르로 돌아왔다. 그러다가 기원전 13세기에 황제의 이름을 딴 도시 카르-투쿨티-니누르타로 천도한 뒤 다시 아수르, 칼후(님루드), 두르-샤루킨(코르사바드)를 거쳐 신아시리아 제국 시기인 센나케립니네베로 수도를 옮겨 멸망할 때까지 니네베가 수도였다. 멸망 이후 신아시리아 제국의 잔여 세력이 하란을 수도로 삼고 메디아-신바빌로니아 연합군에게 저항하기도 했다.

  • 그리스의 스파르타처럼 국민 구성원 거의 대부분이 군인이었다. 그러다보니 상무정신이 강해서 국왕조차 전쟁이 없을 때는 직접 전차에 탄 상태에서 사자를 잡는 사냥에 나서는 것이 관례였다.


  •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의 국가 중에서도 아시리아의 유적이 가장 먼저 발굴된데다가《구약성경》이 기록된 시대상이 겹쳐서 교차검증하기에도 용이하기 때문에 활발하게 연구되었고, 아시리아에서 쓰이던 아카드어쐐기 문자도 수메르의 것보다 먼저 발견했기 때문에 수메르, 바빌로니아 등을 비롯한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의 고고학, 역사, 언어, 문화 등을 연구하는 학문을 메소포타미아학이나 이라크학이 아닌 아시리아학(Assyriology)이라고 부른다. 아시리아의 존속 기간이 매우 길었을 뿐 아니라 국가에서 도서관을 건설하는 등 자료 보관에 힘을 쓴 덕분에 자료가 많이 발굴될 수 있었다.

  • 소설《듄의 신황제》에서 레토가 고대 지구에 대해 설명할 때, 아슈르나시르팔 2세에 대한 언급이 잠시 등장한다.


6. 현대의 아시리아인[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아시리아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아시리아 제국은 오래 전에 멸망했지만 아시리아인들의 혈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7. 창작물에서[편집]



7.1. 게임[편집]



7.1.1. 문명 시리즈[편집]




7.1.2. 악튜러스[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아시리아 제국(악튜러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1.3. 도미네이션즈[편집]


용병 중 아시리아 기마 돌격대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아시리아 기마 돌격대(도미네이션즈)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 기원전 911~기원전 609[2] 신아시리아 시대 정복지[3] '우주의 왕', '왕중왕(샤르 샤라니)' 등 다양한 미칭이 쓰였으며, 딱히 통일된 미칭이 없었기 때문에 황제급 미칭들임에도 황제로 번역되는 경우는 드물다.[4] 원래 아시리아는 아카드어의 북부 방언인 아시리아어를 썼으나 신아시리아 시대에 서부 셈어족에 속하는 아람어로 공용어가 교체되고, 아카드어는 중세 유럽의 라틴어처럼 문어(文語)가 되었다.[5] 수메르로부터 유래된 신들뿐만 아니라 아시리아 고유의 신인 아슈르도 주요 숭배 대상이었다.[6] 둘 다 '앗슈르의 땅'이란 뜻이다. 시리아의 어원이기도 하다.[7] 단순히 국력만 강했을 뿐 아니라 학문, 건축, 문학 등의 문화도 발전하여 남긴 유물도 가장 많은 시대이다.[《성경》에서] 나온 이름으로 메로다크-발라단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반란 실패 이후 엘람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사망했다.[8] 이 도서관은 설립자인 아슈르바니팔의 이름을 따 아슈르바니팔 도서관으로 불린다.《길가메시 서사시》아카드어 판본과 바빌로니아판 창세 신화인《에누마 엘리시》,《수메르어-아카드어 어학 사전》등의 중요한 유물이 이 도서관 유적에서 발굴되었다.[9] 사자 사냥은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등 메소포타미아권의 왕실에서 인기가 있었던 스포츠였다. 사자를 풀어두고 창으로 찔러 죽이는 모습과 죽어가는 사자들이 부조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참고로 당시에는 아시아사자이라크를 비롯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서식했다.[10] 샤마쉬슈무킨이 죽고, 바빌론이 함락될 때 도시에 큰 불이 퍼졌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패배한 샤마쉬슈무킨이 분신 자살을 한 것이라고도 여겨져 왔지만 그의 정확한 사인은 불분명하다. 어느 쪽이었든 잔인한 죽음을 맞았던 것은 사실로 여겨진다.[11] 시해와 찬탈 가능성이 높다.[12] 신 샤리 이슈쿤의 이름이 그리스에는 '사르다나팔루스'로 와전되었는데 멸망할 때 성에 불을 질러 자살했다는 것이 유럽인들에게는 큰 충격을 주었는지 그 후 유럽 문화권에서 사르다나팔루스의 최후를 다룬 미술이나 음악 작품이 상당히 나왔다. 허나 사실 죽을 때 성에 불을 지르고 죽는 일은 꽤 흔히 발생했다. 《성경》에서도 북이스라엘 왕 시므리오므리의 쿠데타로 죽을 때 성에 불을 지르고 자살했다. 예외적으로 중국 5대 10국 시대 후당의 황제였던 이종가는 '성에 불을 지르면 다음 황제는 새로 지으려고 할테고 그럼 백성들이 고생할거라'는 황후의 조언에 전각만 태우고 죽었다.[13] 다만 지구라트를 비롯한 신전 파괴는 고대에 종교가 한 나라의 정체성이기도 했기에 흔히 있는 일이었으며 아시리아만 저지른 일이 아니다.[14] 그리고 페르시아는 페르시아 전쟁 이후 팽창이 멎었을 뿐이지 나라 자체가 크게 쇠하진 않았다. 지중해에서의 패권은 잃었을지라도 광대한 영토는 그대로 남았고 오히려 이후 그리스 세계의 분열을 교묘히 활용해 이오니아를 되찾는 성과도 가졌다. 심지어 마지막 왕중왕인 다리우스 3세도 오랫동안 국정을 농단하던 환관 바고야스를 바로 제거해버렸을 정도로 마냥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단지 상대가 알렉산더 대왕이라는 초희귀 먼치킨과 이 때에 다리우스 3세가 그 때의 다리우스 3세가 아니었기에 박살났을 뿐. 그마저도 아케메네스 왕조의 기반은 헬레니즘 제국으로, 다시 셀레우코스 왕조로 이어진다. 아시리아는 멸망 후 그들의 기반을 이어받은 국가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15] 출처: 《전쟁의 세계사》, 윌리엄 맥닐 지음, 이내주 감수, 신미원 번역, 이산, 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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