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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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김의 주요 수훈 및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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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파일:문화금관.jpg
연도
2010년
이름
앙드레 김
분야
패션 디자이너
금관문화훈장(1등급)
파일:문화보관.jpg
연도
2008년
이름
앙드레 김
분야
패션 디자이너
보관문화훈장(3등급)



대한민국의 패션 디자이너

파일:fashiondesigner_andrekim.jpg

파일:fashiondesigner_andrekim_logo.jpg
앙드레 김
André Kim

본명
김봉남 (金鳳男)
본관
개령 김씨(開寧)[1]
출생
1935년 9월 21일[2]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구파발리
(現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3]
사망
2010년 8월 12일 (향년 74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묘소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광덕로 383 천안공원묘원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신체
178cm
자녀
아들 김중도[4]
학력
서울신도초등학교 (졸업)
고양중학교 (졸업)
한영고등학교 (졸업)
국제복장학원[5] (졸업 / 1기)
종교
불교
브랜드
André Kim

1. 개요
2. 생애
2.1. 유년기
2.2. 대한민국 패션 디자인의 선구자
2.3. 사망
3. 디자인 특징
4. 브랜드
5. 본명에 대한 이야기
6. 오해와 진실
7. 마이클 잭슨과의 인연
8. 옷 로비 사건의 억울한 피해자
9. 사생활
10. 저서
11.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라는 이름은 '외국인이 쉽게 부를 수 있는 이름'이라며 프랑스 대사관의 한 외교관이 지어줬다.


2. 생애[편집]



2.1. 유년기[편집]


파일:attachment/andrekim-past.jpg
(1960년대 사진, 서울 반도호텔에서 열린 웨딩패션쇼에서 모델로 등장했던 젊은 시절 앙드레 김(좌측): 참고로 앙드레 김은 평생 독신이었다)

1935년 9월 21일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구파발리 (지금의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에서 태어났다, 현재는 그의 고향이 서울시로 편입되어 있지만 '서울 사람'이 아닌 '고양 사람'이라는 지역 정체성을 가졌다.[6]

아버지는 농사를 지었고, 다섯 남매와 함께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땅바닥에 하루종일 그림을 그리며 놀았는데 고양중학교 재학 때부터는 미술 자체에 깊은 흥미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한국 전쟁으로 부산에 피난가 있던 시절, 극장에서 외국 영화[7]를 접하며 배우들의 패션에 강하게 매료되고 본격적으로 의상과 관련해 진로를 결정하게 된다. 본래의 장래 희망은 배우였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국내에서 예술로서의 패션을 가르치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는 외국 책을 뒤지면서 독학을 하다 1961년 국제 복장학원이 문을 열면서 1기생으로 입학했다. 그리고 이듬해 우리나라 남성 디자이너 1호[8]란 말을 들으며 의상실을 열고 반도호텔[9]에서 첫 패션쇼를 열었다.


2.2. 대한민국 패션 디자인의 선구자[편집]



파일:앙드레김 1988년.jpg

1988년 서울 패럴림픽 기념 패션쇼


파일:앙드레김 1999.jpg

1999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앙드레김의 날 선포식


파일:2004년 앙드레김.jpg

2004년 베이징에서 열린 패션쇼에서 이영애, 이서진과 함께


파일:앙코르와트 패션쇼.jpg

2006년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서 열린 패션쇼 피날레 中


파일:2009년 앙드레김.jpg

2009년 자신이 디자인한 롯데시네마 티켓을 들고 웃고 있는 앙드레김

척박한 대한민국의 패션계에 이미 1960년대부터 돌풍을 불러오며 패션계를 이끌어 온 공로가 있다. 2010년 7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권위있는 패션 쇼나 시상식 등에는 항상 등장하며 그 위용을 과시했다.

사실 해외 쪽에서는 워낙에 뛰어난 의상 디자이너들이 많은지라 지명도는 뒤지지만, 한국에서는 일단 패션 디자이너의 대명사. 한국 최초의 남성 패션 디자이너였기 때문이다. 다만, 앙드레 김 본인은 한국 최초의 남성 패션 디자이너라는 호칭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2.3. 사망[편집]



파일:앙드레김 2010.jpg

2010년 3월 29일 베이징에서의 패션쇼를 지휘하는 앙드레 김. 이 패션쇼는 그가 생전 참여한 마지막 패션쇼가 되었다.

2010년 8월 12일 19시 40분 경, 대장암이 악화되어 숨을 거뒀다. 향년 74세.(관련기사) 사후 최고 등급의 문화훈장인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별세로 인해 "대한민국 패션계가 텅 비었다"라고 말하는 도 있을 정도였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말년에 그는 거동이 불편해져서 신사동에 있던 자신의 의상실로 출근할 때 주변에서 거들어 주는 사람이 2명이나 붙을 정도였다고 한다. TV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내색하지 않았지만, 힘든 투병 생활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앙드레 김이 생전에 독실한 불자였기 때문에, 장례식도 불교식으로 치러졌다. 장지는 천안공원묘원이며, 모델 박영선TV조선의 프로그램인 인생다큐-마이웨이에 출연했을 때 그의 묘소를 찾는 모습이 나갔다.


3. 디자인 특징[편집]


파일:external/4.bp.blogspot.com/0%2Bng7.jpg
(1979년 내셔널 지오그래픽 표지에 실린 사진) 그의 옷을 입고 같이 사진을 찍은 여성은 배우 장미희와 유혜영[10].

파일:external/contents.dt.co.kr/2009102902019922732134.jpg

말년 디자인 (2009년)
파일:fashiondesigner_andrekim_show.jpg
사진 속 모델은 배우 송창의이유리

흰색을 엄청나게 좋아했다. 평소에도 흰 옷을 입고 다녔으며, 타고 다니던 자동차도 기사가 딸린 흰색 현대 에쿠스를 타다 이후 흰색 벤츠 S500으로 바꾸었으며[11] 생전 마지막 타던 차량도 하얀색 롤스로이스 팬텀 1세대였다.[12][13] 생전 자신의 방을 공개했을 때는 옷장에 평소 입는 흰 옷이 수십 벌 걸려있는 모양이 나왔을 정도. 자신의 자서전은 물론이요 의상 디자인에도 흰색을 많이 썼다. 이 때문에 흰색증이라고 까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백의민족이라는 한국인의 컨셉을 나타냈다는 평이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서 흰색을 선호하게 되었다고 한다. 1980년대에 똑같은 디자인의 검은 옷을 입고 방송에 출연한 사진이 있다.

사실 흰색에 대한 집착은 그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그의 어머니는 가난한 살림살이에도 늘 자식들에게 순백색의 옷을 입혔다. 그런 그의 어머니가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앙드레 김은 매일 밤 베개를 적실 만큼 울었다.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하는 흰색의 옷에 애착을 갖기 시작했다. 즉 앙드레 김에게 흰색은 변하지 않는 순수함의 상징이자, 어머니의 사랑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흰 옷에 얼룩이 묻기라도 하면 진저리를 치며 곧바로 옷을 갈아입을 정도로 흰색에 집착했다. 그리고 현명한 예술가로서, 그는 자신의 흰색에 대한 애착을 아름답게 승화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것은 영원한 순수함의 상징인 순백의 웨딩드레스였다. 앙드레 김의 어머니에 대한 깊은 사랑은 결혼하는 신부에 대한 축복으로 승화된 것이다.

흔히 앙드레 김의 옷은 일반인들은 소화하기 힘들 거라는 의견도 많지만, 강남구에 있는 작업실에 가면 의외로 입을 만한 옷들도 있다. 웨딩드레스는 약간의 철면피가 있다면 입어볼 만한 수준의 작품. 물론 상당한 고가이지만.

화려한 의상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실용복 입장에서 봐도 앙드레 김의 작품은 매우 높은 점수를 얻고 있다. 앙드레 김은 정부사업에도 많이 참여했는데 그 예로 1988 서울 올림픽 대한민국 선수단 유니폼이 있다.

해외에선 아방가르드 디자이너로 평가받기도 하는데 정작 앙드레 김은 지나친 아방가르드는 품위가 없다며 싫어했다고 한다. 아방가르드를 추구한다고 누더기처럼 만든 옷이나 히피 패션은 싫어했다고 한다. 사실 해외에서 앙드레 김이 아방가르드 디자이너로 평가받게 된 건 당시 한복이 세계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아 한복에서 영감을 얻은 앙드레 김의 디자인이 생소하면서도 새롭게 보인 탓이 있다. 그렇다고 앙드레 김이 아방가르드를 모르냐면 그것도 아니고 외국 책을 보면서 독학을 해 당연히 알고 있었고 아방가르드 패션 디자인도 만들었다. 오히려 아방가르드가 뭔지도 모르던 시절의 대한민국에서 아방가르드를 하던 몇 안 되는 패션 디자이너였다. 과한 걸 싫어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4. 브랜드[편집]


앙드레 김 선생이 디자인한 상품들에 붙는 브랜드 André Kim. 앙드레 김 사후 현재까지 아들 김중도 씨가 대표로 있는 앙드레 김 아뜰리에가 디자인실에서 제작한 옷을 전문으로 생산하고 있고 실질적인 앙드레 김과 관련된 곳은 이곳이 끝. 다만 앙드레 김 브랜드를 널리 알리고자 일부 사업에 라이센싱 방식으로 브랜드를 빌려주고 있다. 벽지, 타올, 우산, 속옷, 화장품 등에 앙드레 김 이름이 박혀있다면 100% 라이센싱. 다만 앙드레 김 골프웨어의 경우 부도나면서 앙드레 김 브랜드에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


5. 본명에 대한 이야기[편집]


고양군 출신이라 자신의 고향은 서울이 아닌 고양군이라고 했으나 그의 말투는 서울 사투리를 잘 사용했었다.[14] 사실 경기 중북부 방언이나 서울 방언이나 별 차이가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

앙: 앙녕하세요우. 저는

드: 드~자이너에용

레: 레(내)이름은

김: 김봉남 이에요우

그의 이름 사행시가 유명하다. 국민의 정부 시절 옷로비 사건 관련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했을 때 증인 이름을 말하시라는 질문에 "앙드레 김입니다."이라고 답했는데, 본명을 말씀해 주시라고 요구받자 잠깐 조용하다 "...김봉남입니다." 라고 다시 대답했다. 앙드레 김과 토속적인 김봉남이라는 두 이름 사이의 이미지 간극이 너무 컸던지라 세간에서는 위와 같은 사행시가 유행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정치 평론가들은 "옷로비 사건 수사는 결국 아무도 알고 싶어하지 않았던 앙드레 김 선생의 본명만 알렸을 뿐"이라고 시니컬하게 비평하기도 한다.

6. 오해와 진실[편집]


한국의 대중들은 앙드레 김을 알게 된 것이 그의 패션 디자인이 아니라, 여러 매스컴에의 출연과 연예인들이 출연한 패션쇼, 그리고 남녀 커플이 함께 하는 유명한 패션쇼의 피날레 때문인 것이 사실일 것이다. 사실 앙드레 김 옷 디자인의 예술성에 대해서는 논쟁이 많은 편이며, 일부에서는 미디어가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라는 혹평도 있다.

옹호하는 측에서는 앙드레 김의 옷은 패션으로써 보는 게 아니라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한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드는 것들로는, 일단 앙드레 김의 옷은 슬림화라든지 디테일이라든지 테일러링이라든지 하는 세계적인 트렌드를 따라가지 않고 있다. 예로 앙드레 김 패션쇼에서의 김연아의 옷(참고자료)을 들 수 있다. 물론 같은 것을 반대 시각에서는 늘 거기서 거기인 비슷한 디자인에서 탈피하지 못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앙드레 김은 "자신의 옷을 상품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패션을 상품화하고 돈과 연결시키는 것을 싫어했다. 그 때문에 앙드레 김이 만든 옷은 노출이 없다. 게다가, "남성 디자이너 1호"라는 수식어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가 있다.

게다가, 한국의 패션 디자이너들이 모여 정기적으로 여는 서울 패션 위크에 참가한 경력이 없다. 대신 지자체나 기업의 후원을 받아 비정기적으로 자주 패션쇼를 열었다. 여는 횟수는 1년에 약 10여회. 일반적인 패션 디자이너들이 1년에 2번 패션쇼를 여는 것에 비교하면 매우 많다. 이런 것들을 보면 앙드레 김의 패션은 프레타 포르테[15]보단 오트 꾸튀르[16]의 특징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거식증에 시달리다가 사망한 패션모델들이 점점 많아지자 한국의 전설적인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 김은 패션모델들의 건강을 배려하여, "나의 패션쇼에서는 이제부터 지나치게 마른 모델을 고용하지 않겠다." 라고 공개선언을 한 적도 있었다.#

또한 수입원단을 절대 쓰지않고 국산원단만을 고집하는 등, 우리가 그에 대해 가지는 서양문화 선호적인 이미지(아마도 영어를 자주 써서)와는 달리 한국적인 면이 많았다.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겹옷 드레스 (8~9벌 가량의 여러벌의 드레스를 겹쳐 입는 것)은 한국여성의 을 상징한다고 밝힌 적도 있다.


7. 마이클 잭슨과의 인연[편집]




파일:michael-jackson-london_angryshot.jpg


파일:마이클 잭슨 컴백 - 2009년.jpg

2009년 컴백 기자회견에서 입은 앙드레 김의 의상이다. 마이클 잭슨이 입고 나온 앙드레 김의 의상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다.

특히 1990년대 들어서는 해외의 스타들에게 옷을 디자인해서 주기도 했는데, 나스타샤 킨스키, 브룩 실즈같은 유명 배우도 포함된다. 또한 마이클 잭슨이 생전에 그의 옷을 특히 좋아했다고 하는데, 화려한 무늬의 자수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어느 정도였냐하면 유명한 시상식에는 물론이요, 외출할 때도 입고 나갔다. 특히 잭슨의 공식석상에서의 마지막 인터뷰가 되었던 This Is It 콘서트 발표회 때 입었던 위의 사진의 의상이 바로 앙드레 김이 제작한 의상이다.

실제로 마이클 잭슨은 여러 번이나 앙드레 김에게 자신만의 전속 디자이너가 되어줄 것을 요청했지만, 앙드레 김은 "나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단 한 사람만의 의상을 만들 수는 없다." 라고 정중히 거절했다. 그 대신에, 앙드레 김은 마이클 잭슨을 위해 언제든지 원하는대로 주문을 받아 직접 수제로 제작한 맞춤복을 보내줬는데 무려 200벌 이상이나 넘었다고 한다. 그리고, 앙드레 김은 마이클 잭슨 사후 개봉한 2010년에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마이클 잭슨의 디스 이즈 잇> VIP 시사회에도 참석했다.

그리고, 마이클 잭슨이 세상을 떠난지 거의 1년 만에 앙드레 김도 세상을 떠났다.

8. 옷 로비 사건의 억울한 피해자[편집]



김대중 정부 초기인 1999년 일어난 옷로비 사건 때 증인이자 피해자로 나온 적이 있었다. 이 사건은 헌정사상 최초 특별검사제도가 시행된 로비 사건이기도 했으나 그 요란한 재수사, 특검 등 노력에 비해 실제로는 흐지부지 끝났던 사건으로, 그 사건의 증인[17]으로 나와서 선서를 할 때 김봉남이라는 본명이 이 사건을 계기로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졌다. 법정에서 증인으로 선서를 할 때는 예명이 아닌 본명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본명이 다소 '촌스럽게' 들린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놀림을 받았기에 본인은 굉장히 상처를 받았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이때 언론들은 "검찰이 밝혀낸 건 앙드레 김의 본명뿐이다." 라는 비아냥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그러나, 오히려 본명이 알려지면서 신비주의가 점점 옅어졌고 친근한 이미지로 바뀌기도 했으며 아울러 사업상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는 얘기도 나왔다.

물론 앙드레 김의 입장에서는, 굳이 본명이 알려진 문제가 아니더라도 자신이 수많은 시간을 공들여서 만든 작품이 더러운 정치권 로비에 쓰이는 꼴을 봤으니 당연히 분노할 정도로 몸서리가 쳐지고 불쾌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앙드레 김은 청문회에 참석하여 공개 증언을 할 때, "이 현실을 개인 디자니어로서는 한국인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일해 나오면서 정말 슬프게 생각합니다. 대단히 실망스럽고 슬픈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억울함에 눈물을 흘리면서 울분을 토했고 대중들로부터 안타깝다면서 수많은 동정을 받았다.

그리고, 훗날 앙드레 김은 언론에서 이 사건에 대해 인터뷰를 하면서 "정직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인지를 잘 배웠다." 라고 인터뷰를 하기도 했는데, 어떻게보면 지극히 당연한 발언이다. 앙드레 김 본인은 그냥 평범하게 옷을 제작하여 판매했을 뿐인데, 졸지에 원치않던 정치계에 엮여서 검찰에 증인으로 출석했으니 뭔가 많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본인 입장에서는 당연히 기분이 좋지 않았겠지만 얻은 건 그래도 있다. 앙드레 김이 신비주의에서 친근한 이미지로 바뀐 것과 사생활이 매우 깨끗한 사람인 것을 무려 검찰을 통해 인증받았다. 실제로 앙드레 김은 사생활 문제라든가 탈세같은 범죄에 연루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데다 오히려 성실 납세자로 표창을 받은 경력도 있다. 그리고, 자선 복지단체에다 수 억 단위의 돈을 기부도 많이 했고, 고액 기부자 모임으로 유명한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에 등록되기도 했다.


9. 사생활[편집]


평생 결혼도 하지 않은 독신이었지만 입양한 외아들 김중도를 소중하게 키웠고[18] 남 모르게 기부 활동을 하는 등, 대인배적인 면모가 많은 사람이었다.[19] 아들인 김중도 씨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앙드레 김 아뜰리에를 운영하며 패션 디자인 사업을 하고 있다.[20]

생전에 나이 70이 넘어서 화장을 하고 다녀 기괴한 모습과 흰옷 + 프랑스에서 살아서 그런지 희한한 한국어 발음과 묘한 영단어 사용[21] 때문에 주로 개그의 소재로 활용되는데, 개그맨 이혁재와 정종철이 대표적이다. 특히 정종철은 2006년 KBS2 <개그콘서트> '봉숭아 학당'에서 패션 옥 캐릭터로 연기를 했으나 그전에 했던 옥장군에 밀려 인기를 못 끌었다. 2010년에 앙드레 김 본인이 사망하면서 성대모사 개그마저 자취를 감췄다. 사실 발음이 독특했다 뿐이지 영어와 프랑스어 실력이 매우 유창하긴 했다.

머리가 벗겨졌었는데, 하고 다닌 머리는 샤넬 마스카라 1통을 한꺼번에 칠한 것. 문신이라는 소문도 있지만 그와 친분이 있거나 그의 패션쇼에 출연해 본 몇몇 연예인들이 방송에서 한 발언을 보면 "여름에 뵈었을 때 땀을 많이 흘리시다가 시간이 지나니 머리에서 검은 물(?)이 흐른 적이 있었다"든가, "시간이 없을 때 직접 거울을 보시며 빈틈(?)을 매직으로 잠깐 칠하시는 걸 봤다"든가 하는 이야기들이 있어서 칠하였던 게 맞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디자인숍 막내들이 마스카라를 구비하는 게 일과 중 하나였다고 한다.

이미지만 보면 상당히 작은 양반이었을 것 같지만, 사진상에서 작아보이는 것은 옷이 펑퍼짐해서 그런 것뿐. 실제로는 키가 178cm로 30년대생 한국인 치고는 굉장히 크다, 그래서인지 크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고 한다. 특히나 즐겨 입던 옷이 흰색에 넉넉한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시너지로 인해 실제로는 180 중반대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게다가 모델 출신이기도 하며, 후에 본인 스스로 밝힌 일화에서는 청년기에 방송이나 영화계 관계자에게 아예 전업 배우를 해 보라는 제안도 받았지만, 본인이 직접 연기라는 분야에 자신이 없어서 거절을 했었다고 한다. 젊었을 때 사진을 보면 당시로선 훤칠한 키에 준수한 외모를 가진 것을 볼 수 있다.

교보문고 본점에서 교보 직원이 사인을 요청하자 유성매직이 옷의 팔부분에서 나왔다고. 누군가가 같이 사진 찍어달라고 하면 들어주기도 했다.

그의 명성과 사회적 지위와는 달리 소탈하고 검소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주로 식사는 분식집에서 해결했다고 하며 떡볶이를 즐겨 먹었다고 한다. 관련 기사. 여기에 분식집에서 같이 식사하던 중, 고등학생들의 기념 촬영과 사인 요청을 친절하게 받아주고 그들의 식사비를 모두 자신이 지불했고 계산할때 팁도 줬다고 한다. 그 분식집은 다름아닌 신당동에 유명한 마복림 할머니 떡볶이 가게의 단골손님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가게에는 빨간색 앞치마만 있었는데도 흰색 앞치마도 같이 준비해줬다고 한다.[22]

그리고 매년 여름마다 모 호텔의 노천 카페를 방문해, 옛날 팥빙수를 먹고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오직 팥, 연유, 얼음만 쓴 기본 팥빙수를 주문하곤 했다고. 그 외에 들리는 말로는 진열된 자기 옷을 간절히 갖고 싶어하는 여성을 보고 "가진 돈만 주고 가져가도 좋다"고 하며 사게 해줬다는 훈훈한 이야기도 전해진다.

파일: F443F5B1-3511-4260-8DD1-7C3C9F5F8D9C.jpg[23]
자신의 자택에 텔레비전이 5대가 있는데, 각 방마다 있는 것이 아니라 TV방이라고 해서 한 방에 텔레비전 5대를 놓았고, 지상파 방송 4개 채널(KBS1, 2, MBC, SBS)과 케이블TV 채널이 각각의 TV에서 나온다고 한다. TV를 볼 때, 5대의 TV를 한꺼번에 켜고 TV시청을 한다고 한다. 주로 사극과 다큐멘터리를 시청한다고 하고, 자신의 패션쇼에 참여하는 연예인들의 모습을 모니터링한다고 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뛰어난 인재들이 만드는 방송프로에서 패션에 필요한 자료들을 찾기 위해서라고 한다. 또한, 신문을 15가지나 정기구독하고 있었다. 보수성향/진보성향/경제지/스포츠신문 등을 가릴 것이 없이 모든 신문을 보면서 자료를 수집한다고 한다. 전체 내용을 다 읽지는 못하더라도 최소 헤드라인 뉴스는 본다고 한다.

본의 아니게 희화화가 자주 되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이미지를 폄하하는 것을 상당히 싫어한 듯하다. 이혁재가 앙드레 김 성대모사로 인기를 끌었을 때, 대놓고 불만을 표시했을 정도. 인터뷰에서 이혁재의 성대모사에 대한 질문에 약간 불쾌한 태도의 무표정으로 '조금 불편해요. 저는 그런 저질 영어 단어를 쓰지 않아요.'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당시 그런 질문에 이덕화이주일처럼 성대모사의 대상으로 자주 써먹히던(?) 연예인들이 이런 질문에 가볍게 '재미있다'거나 웃으며 '너무 이상하게 하지는 말아줬으면 한다' 정도로만 말하는 경우가 많은 방송계 특성상 '저질 영어 단어'라는 명백히 부정적인 단어로 단호한 태도를 보인 것이 흔한 일이 아니라, 당시 나름대로 연예계 이슈였다. 이혁재도 추후 이 소식에 '선생님께서 화나셨구나'라고 생각해서 걱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폄하가 아니라는 걸 알고는 후에 이혁재를 격려해줬다고 한다.[24]

재한 외교관 부인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우리나라 관련 이야기들을 들을 때마다 정보 당국에 귀띔을 해준 일화가 있다. 나름대로 국익에 이바지하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한글문화연대에서는 '우리말 해침꾼' 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인터뷰 등을 보면 앙드레 김이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를 많이 섞어 쓰는 편이기는 하다. 외국에서 발달한 분야에 외국어를 섞어 쓰는 경향은 많지만 앙드레 김은 불필요한 맥락에서도 사용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런데, 요새 패션 프로그램들을 비롯하여 요리, 연예 등등을 보다보면 앙드레 김의 외국어 오남용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다. '쉬크한 필로 필링해 준 블링블링한 액세서리... 라이징 스타로서 블랙 칼라와 매칭한... 매쉬드 포테이토에 피넛과 올리브 오일을 어쩌구 플레이팅하면...'

그가 가장 많이 옷을 만들어준 사람은 다름 아닌 성악가 조수미였다. 생전에 조수미에게 20년 동안 드레스 약 200여 벌을 제작해주었다고 한다. 또한 개인적으로도 조수미의 열렬한 팬 중 하나였다고. #

굉장히 인자한 성격과 좋은 매너로 많이 사랑받았던 디자이너였다. 특히 말투가 매우 부드럽고 상대방을 위해주는 스타일이라 친근감이 느껴진다. 다만 일을 할 때는 엄청난 완벽주의자로 상당히 까다롭게 지휘를 했다고 하며, 굉장히 무서운 느낌이었다고 한다. 앙드레 김의 생전 단골고객이었던 엄앵란이 말하길, 2004년 앙코르 결혼식 의상을 제공받기 위해서 딸에게 의상실에다 심부름 보냈는데 마침 앙드레 김이 직원에게 소리지르며 무섭게 욕을 하면서 혼내는 바람에(...) 딸이 놀라서 결국 중간에 도망갔다고 한다.

또한, 엄앵란 본인이 의상실에 찾아갔을 때도 앙드레 김이 커피를 한 잔 따라준 뒤에 잠깐 나가더니 실수한 직원을 상대로 무섭게 욕을 하면서 다그치는 것을 봤다고. 그리고, 직원을 혼내고 난 뒤에는 다시 그 특유의 상냥한 말투와 표정으로 다시 돌아오면서 "앵란씨~?" 라고 부드럽게 맞이했다고 한다. 엄앵란을 이러한 모습을 두고 "앙드레가 아니라 욕할 때는 봉남이 진짜..." 라고 생각했고, "그래도 이렇게 완벽주의적인 모습 때문에 국내 최고의 위치까지 올라간 것이 아닐까?" 라고 평하기도 했다. 생전의 앙드레 김을 회고하는 엄앵란

특이한 교복이 나올 때마다 흔히들 앙드레 김이 직접 디자인한 교복이라고 학교마다 도시전설이 전해진다. 네이버 지식인 같은 곳만 봐도 당시의 소문을 확인할 수 있다. 허나 실제 본인이 직접 디자인해준 교복은 용인시에 위치한 용인한국외국어대학교부설고등학교의 것이 전부였다. 아들이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한 것과 인연이 있어서였다. #

그의 아들이 외대를 졸업한 후 2005년 외대 재단 측에서 앙드레 김에게 교복 디자인을 부탁했고, 이 제안을 앙드레 김이 흔쾌히 수락하였으며 디자인 비용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관련 기사. 그런데 "교복을 앙드레 김이 디자인했다!"했는데 교복이 다들 아는 앙드레 김의 그 복장으로 교복이 바뀌었다는 유머로 만든 웹툰도 존재한다.

동복은 웨스턴/오리엔탈, 하복은 웨스턴/사파리 2종류가 있다. 웨스턴은 정장, 오리엔탈과 사파리는 간편복 개념으로 입는다고. 외대부고생들 말에 따르면 웨스턴이 간지나지만 오리엔탈과 사파리가 무척 편해서 이쪽을 선호한다고. 과연 앙샘. 여담으로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 나오는 교복은 이것을 고친 것이다.

마지막 유작은 국내 최대 버스 회사인 KD 운송그룹의 승무원 제복으로, 앙드레 김이 디자인한 최초이자 유일한 회사 제복이다. 처음에 허명회 KD운송그룹 회장이 비서진에게 앙드레 김에게 승무원 제복 디자인을 승낙받으라고 이야기하고 승낙 못 받으면 회사에 복귀할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결국 비서진의 설득이 안 먹히자 결국 회장이 직접 나서서 "승무원에게 최고의 대접을 해 주고 싶다."라고 소신있게 설득한 끝에 5년 만에 승낙 받았다고 한다. 이 승무복은 KD 내에서는 승무예복이라 부른다.

3억 원의 비용으로 디자인을 받고 KD 운송그룹 자체 피복 공장인 KD 어페럴에서 생산하고 있으며 현존하는 앙드레 김의 디자인 중에서 비교적 쉽게 볼 수 있다.

꾸준한 리뉴얼로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몇몇 KB국민카드의 카드상품은 앙드레 김 디자인이다. 예전에는 포인트리 3종 시리즈가 앙드레 김 디자인이었지만 리뉴얼되었고, 2012년 3월 현재 남아있는 것으로는 금융포인트리 체크카드. 그리고 2009년에 롯데시네마 티켓 역시 그가 디자인했는데, 2011년경 이후 로켓 사진이 나오는 티켓으로 바뀌었다가 현재는 영수증형 티켓으로 나온다.

뜬금없이 앙드레 김의 사무실에 리볼버 권총이 배달되면서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을 당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 사건은 방송에서 언급된 적이 있었다.# 실제로, 앙드레 김의 패션쇼 무대에 올라간 적이 있었던 안정환[25] 이 사건을 듣자 뭔가 기억났다는 듯이 "언제부턴가 앙드레 김 선생님에게 수많은 경호원들이 모여있었던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라고 증언했다.

2010년 12월호 엘르 부록으로 앙드레 김 전기인 《나는 앙드레 김 입니다》가 나왔는데 단행본으로 팔아도 될 정도의 퀄리티를 가지고 있다. 앙드레 김 자서전인 《앙드레 김 My Fantasy》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도 남는 훌륭한 서적이니 구해 읽어보면 좋다.

2009년삼천리자전거에서 Andre Kim이라고 따로 브랜드를 만들어 미니벨로, 부인용을 포함하여 자전거 12종을 내놓았다. 원래 다음 해에도 내놓을 예정이 있었던 것 같으나 별세로 인해 결국 2009년 한 해만 나오고 단종.

또한 같은 해 공군을 위해 빨간마후라를 특별 제작하기도 했다. #

2008년 한국도자기에서 앙드레 김 홈세트, 예단용 칠첩 반상기, 디너, 커피, 머그세트를 출시하였다. ##

2004년경 지나가던 도중에 우연히 서울 코믹월드 행사를 발견하고, 행사장 외부를 방문하여 직접 돌아다녔다는 목격담이 있었고, 언론에서도 직접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다. 앙드레 김은 40회 행사에서, "비록 학생들이 만드는 옷이지만 만화 속 상상을 현실에서 재현하는 것이라 창의적이고, 신선하기 때문에 코스프레 행사가 열리는 곳이면 거의 빠지지 않고 방문하고 있다" 라고 전했다.# 아무래도, 코스어들이 이상한 옷이랑 가발을 쓴 사람들이 줄줄이 모여있었으니 뭔가 신기하게 바라본 듯 하다. 그리고, 2008년에도 코믹월드를 다시 방문했다는 목격담도 존재한다.

10. 저서[편집]



파일:앙드레김 - my fantasy 커버.jpg

앙드레김의 자서전 <My fantasy>

앙드레 김이 생전 발행한 자서전은 2002년 발매된 <My Fantasy> 가 유일하다. 동아일보의 이승재 기자가 4개월동안 진행한 심층인터뷰 연재가 시초로, 책의 내용은 인터뷰 형태로 구성되었다. 2010년, 사후 개정판이 발매되었고 위에 서술된 엘르 부록 <나는 앙드레김입니다> 가 추가로 발매됐다. 이 자서전을 제외한 나머지 책들은 제3자가 앙드레 김에 대해 서술한 책으로 앙드레 김이 저술에 직접 관여한 책들은 없다.

11. 대중매체에서[편집]


우리나라 패션업계의 아이콘이다보니 여러 매체에서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캐릭터에 그의 이미지를 채용하는 경우가 많다.

1930년대 출생임에도 키가 178cm으로 상당히 큰 편이었다.


  • 이원복 교수의 교양만화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 2탄에서 에도시대 상업에 대한 부분에서 그의 패러디인 재단사 '앙도레 친'이 등장한다. 본명은 친복돌.

  • 안녕, 프란체스카에 나오는 앙드레 대교주는 원래 앙드레 김을 모티브로 따와 만들어진 1회성 카메오 캐릭터로 앙드레 김을 배우로 섭외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그 후 교주, 마왕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가수 신해철이 해당 배역을 맡게되었으며 이후 고정 출연을 하게된다. 원래는 간지폭풍의 캐릭터일 예정이었으나 신해철로 배우가 변경된 뒤에는 허당 속성이 추가되었다.

  • 2013년 중에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가 나오기로 했고, 젊은 시절의 앙드레 김을 맡을 배우는 하정우로 결정된 상태로 촬영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으나, 중간에 촬영 중단이 되었는지 엎어졌는지 소리소문없이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결국 무산된 듯. #

  • 영화 국제시장에서 부산에 왔었을 당시의 모습으로 등장했다. 영어를 중간 중간 섞어 주변 인물을 당황시킨다. 별 헛소리를 한다는 투로 말하는 주인공 고모는 덤.

  • 만화 다이어트 고고의 등장인물 앙드레 쵸도 말투나 본명을 보면 그의 이미지를 차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디자이너와는 상관이 없다.

  • 주호민 작가의 웹툰 신과함께 이승편에서 언급된다. 월직차사 이덕춘이 "이승 최고의 디자이너가 이쪽으로 오셨잖아요."라고 말하고 단물 차사와 탄석 차사가 입은 옷의 색이 흰색 정장인 것을 보면 앙드레 김을 묘사한 내용이 맞다. 해당 내용이 나온 이승편 51화가 연재되기 전 쯤에 앙드레 김이 타계했는데, 그에 대한 조의의 표시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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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0년대에 새로 생긴 성씨이며, 인구는 3명으로 확인됐다.[2] 음력 8월 24일. #[3] 하지만 앙드레 김 본인은 고양시민으로의 정체성이 더 강해서 항상 고양시 출신이라 밝히고 다녔다. 실제로 구파발 일대가 서울로 편입된 것은 1973년이다.[4] 1981년생. 앙드레 김이 1982년에 입양한 아들이다. 참고로 앙드레 김은 평생 독신이었다. 무엇이든 물어보살에 의뢰인으로 출연한 바 있다.# 2004년에 결혼해서 현재는 쌍둥이의 아버지이다.[5]국제패션디자인아카데미[6] 정치인 손학규도 비슷한 케이스로, 지금은 서울 금천구로 편입되어 있지만 태어날 당시 행정구역대로 '시흥 사람'이라는 지역정체성을 갖고 있다.[7] 앙드레 김 회고록에 의하면 오드리 햅번 주연의 영화 화니 페이스였다고 한다.[8] 하지만 당시 재봉은 여성의 일이라는 인식이 강했고 디자이너라는 말 자체가 퍼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앙드레 김 여사로 소개된 해프닝도 있다.[9] 롯데호텔 서울자리에 있던 곳으로 1939년에 세워져 해방 뒤 교통부, 국제관광공사가 각각 운영하다 1973년 호텔롯데에 부지가 팔려 1975년에 철거되었다.[10] 1970년대 대한민국의 탑 모델이었다.[11] 1세대 에쿠스에서 S클래스(W221 페이스리프트 이전의 S500L)로 변경했다. 지금이야 S클래스는 도로에서 상당히 흔한 차지만, 당시에는 수입차 자체가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고, 억대 가격의 S클래스는 보기도 힘들었으며 대부분 검은색 또는 은색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당시 국내에서 유일한 흰색 S클래스였다고. 그 외엔 스타크래프트 밴을 타기도 했다.[12] 이 차량은 정비 유튜버 메르카바의 영상을 통해 처음으로 대중에 공개되었다. 아마 현 소유주일 아들 김중도씨의 지인이 맡긴 듯.[13] 참고로 본문에 쓰여진 1세대는 BMW 인수후의 현행 롤스로이스의 1세대라는 뜻으로 팬텀 통합으로 따지면 7세대 초기형 모델이다.[14] 지금의 지축동, 삼송동은 02 지역번호를 쓰듯이, 당시 경기도 고양군 신도읍 지역은 서울 사투리를 사용한 지역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유튜브 등에서 그의 생전 말투를 들어 보면 전형적인 서울 사투리를 들을 수 있으며, 특히 지금을 지끔, 먼저를 먼처라고 하듯 서울 사투리를 사용하여 서울 토박이가 아니냐는 의혹도 있지만, 뼛속부터 고양시 사람이라고 강조하였다. 이는 또한 손학규와도 상당히 비슷한데, 현재의 금천구에서 태어났으나, 그렇다 할지라도 뼛속까지 경기도 시흥군 사람이라고 강조했듯이 말이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은평구의 전신인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과 고양군 신도면 일대는 대대로 살아온 토박이가 많았고, 지금의 서울시 은평구도 그렇다. 다만, 현재의 삼송동지축동과 은평구 진관동은 각각 삼송지구 개발과 은평 뉴타운으로 인하여 토박이들이 상당히 많이 사라졌다.[15] pret-a-porter, 실용성에 중점을 둔 고급 기성복 [16] haute couture, 예술성에 중점을 둔 고급 맞춤복 [17] 사건 관련자인 부인들에게 옷을 판매했었다. 그리고 부인은 그 옷을 로비용으로 썼다.[18] "앙드레 김 아들에 대한 지독한 사랑" #[19] 아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것에 반해, 특유의 말투와 억양으로 인해 오해도 많이 받았지만, 아들의 이름이 '철수'인데, 너무 굴려서 주위 사람들은 모두 '찰스'라고 알고 있다는 둥의 헛소문이 있었다.[20] 주변 지인들의 말에 의하면 김중도 씨도 유복하게 자라긴 했지만 출생과 입양의 과정 때문에 청소년기에는 잠시 일탈도 했다고 한다. 앙드레 김 선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극정성으로 외아들을 양육했고 대학 들어간 후 개심했다고. 다만 예전에 워낙 놀았던 전적(...) 탓에 졸업 성적은 평범했다는 뒷얘기가 있다.[21] 방송에 나와서 fashion을 프랑스식으로 "빠숑"이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fashion이라는 말 자체가 영어 단어이기 때문에 프랑스에서도 대체로 "패션"이라고 한다. 참고로 "파송"이라고 불리는 불어 façon(방법)은 영어 fashion의 어원이 되기는 하지만, "옷차림"이라는 특정한 뜻은 없다. 본인은 '옥스퍼드 영어'라 주장하였으나 실제와는 거리가 있다. 하지만 물론 제대로 된 영어 학원이 없던 시절에 한참이나 나이가 들어서 영어를 배웠으니 억양을 완전히 없애긴 힘들었을 것이라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22] 2011년 마복림 할머니는 91세의 나이로 고인이 되었다. 뒤를 이어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마복림 할머니의 며느리가 2021년 유 퀴즈 온 더 블럭 방송에 출연해서 이야기한 내용이다.[23] 앙드레 김의 사생활을 다룬 기사로, 출처는 여성동아 1999년 10월호이다. 앙드레 김이 사진 속에서 읽고 있는 신문동아일보.[24] 그러나 어느 정도 좋은 분위기로 이슈가 마무리되며 시간이 흐른 이후에도 연예 정보 프로그램 단독 인터뷰에서 그의 패션쇼에 대해 주로 묻던 리포터가 여담으로 이혁재에 대한 질문을 하자, 웃으며 부드럽게 대답은 하였지만 "이혁재 씨가 제 흉내를 내는 것 자체는 괜찮지만 저는 절대 저질 영어 단어는 쓰지 않으니, 흉내내실 때 제발 저질 영어 단어는 쓰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다" 고 다시 한번 성대모사 시 사용된 영어에 대한 불만은 남아있음을 확실히 했다.[25] 참고로, 안정환은 앙드레 김 패션쇼의 피날레 무대에서 아내 이혜원을 처음 만난 인연으로 2년간 연애를 했고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