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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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루소(Henri Rousseau)
(1844년 5월 21일 ~ 1910년 9월 2일)

1. 생애
2. 화풍
3. 여담


1. 생애[편집]


프랑스의 화가이다. 1844년 5월 21일, 프랑스 마옌 데파르트망(Department) 라발에서 배관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사정이 어려워 고등학교를 중퇴한 뒤 앙제에 있는 법률사무소에 취직해 일했다. 20세 때 지원병으로 육군에 입대하여 군악대에서 클라리넷 연주자로 근무, 안지애에 주둔한 51보병 연대음악대에서 복무했다.

군 복무 5년째 되던 해 부친이 사망하여 제대하였고, 파리에서 모친과 함께 살며 서기로 있다가 71년 첫 번째 아내 클레망스의 처가의 소개로 파리시 입시세관(入市稅關) 직원으로 입사했다. 세관원이 된 이후 자신의 오랜 꿈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미술을 배우기 위해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한번도 없었던 탓에 루브르 박물관에서 작품을 모사(模寫)하거나 그림엽서의 사진을 베끼면서 실력을 쌓았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원근법이나 인물의 구도에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경향을 보였다.

1885년 이후부터는 열정적으로 전시회에 참여하는데, 살롱 드 샹젤리제에 2점의 작품을 출품한 것을 시초로 1905년부터는 3년에 걸쳐 계속 살롱 도톤에 출품하였다. 1886년부터는 매년 자신의 작품을 앙데팡당전에 출품했다.[1] 이 당시 폴 고갱, 오딜롱 르동, 조르주 쇠라 등과 친교를 맺었다. 1893년에는 세관을 퇴직하고 가난한 연금생활을 하게 되었다. [2] 그래서 생계에 보탬이 되도록 아이들에게 음악과 그림을 가르치는 학원(學院)을 차려 예술활동을 했다.

그가 생존해 있을 때인 1905년경부터 파블로 피카소,기욤 아폴리네르, 빌헬름 우데 등이 그의 작품에 주목하여 재평가하기 시작하였으나, 그에 대한 실질적인 재평가는 그의 사후에 이루어졌다. 루소는 발의 괴저(壞疽)로 인해 파리의 자선병원에서 사망했다.


2. 화풍[편집]


루소의 화풍은 전문적인 기교는 부족하지만 대신 소박하고 환상적인 모습을 잘 구현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밀림과 이국적인 동물들을 묘사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재밌게도 루소는 단 한번도 밀림을 본 적도 없었기에 파리에 있는 식물원과 동물원, 자연사 박물관을 방문해서 자신만의 상상력을 발휘해 그림을 그렸는데 바로 그 상상력 덕분에 몽환적인 분위기와 꿈을 묘사한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초상화를 그릴 때 실제보다 거대하게 그렸고 비율도 맞지 않게 그렸는데 이때문에 의뢰인들이 그림 수령을 거부하거나 없애버리기까지 했지만, 훗날 그의 방식에 따라 탄생한 초상화는 콜라주 기법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3. 여담[편집]


  • 2015 개정 교육과정 천재교육 고등학교 영어Ⅰ 교과서에 그의 그림과 일생에 대한 이야기가 실렸다.
  • 본래 세관 직원이었기 때문에 일주일 중 직장이 쉬는 날인 일요일에만 그림을 그렸으며 이에 따라 "일요일의 화가"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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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99년, 1900년 두 해를 제외하고는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2] 퇴직금은 50프랑이 전부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