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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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Henri Cartier Bresson


파일:external/images.smh.com.au/an-Frenchman-20Henri-20Cartier-Bresson-20121031112311813485-300x0.jpg
[1]

출생
1908년 8월 22일
프랑스 셩뜰루-엉-브히
사망
2004년 8월 3일 (향년 95세)
프랑스 알프드오트프로방스
국적
[[프랑스|

프랑스
display: none; display: 프랑스"
행정구
]]

직업
사진가, 화가
학력
리세 콩도르세
수상
그랑프리 내셔널 데 라 포토그래피 (1981)
핫셀블라드 상 (1982)
배우자
라트나 모히니 (1937년 ~ 1967년, 이혼)
마틴 프랭크 (1970년 결혼)
자녀
멜라니 카르티에 브레송

1. 개요
2. 상세
3. 기타



1. 개요[편집]


나에게 사진은 순간과 영원을 포착하는 세심한 눈으로부터 오는 자발적인 충동이다.

Photography is, for me, a spontaneous impulse coming from an ever attentive eye which captures the moment and its eternity.

-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카르티에 브레송은 사진계의 톨스토이라 할 수 있다. 인류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보여줬던 그는 20세기의 증인이었다.

- 르몽드

프랑스의 전설적인 사진가.


2. 상세[편집]


20세기 세계 사진계에서 최고의 명성을 누렸으며 로버트 카파와 함께 포토저널리즘의 선구자로 기록된다. 자연스러운 캔디드샷과 길거리 스냅의 고수 등 많은 수식어가 붙어 다니는 그야말로 전설적 포토그래퍼. 또한 자신이 원하는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끝까지 자리를 지켰던 사람. 사진가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비영리 단체 매그넘 포토스의 공동 창립자이기도 하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가톨릭 집안에 태어나 가톨릭 신자였지만 후에 불교로 개종하였으며 그의 인생과 삶의 태도, 사진 작업은 불교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결정적 순간'으로 유명한데 이는 영문 The Decisive Moment를 그대로 번역한 것이라 실제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말하고자 했던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찰나의 순간'이라는 의미로 말하였으며 이는 위에서 서술한 대로 불교에서 말하는 '찰나'의 개념과 일맥상통한다. '순간'이라는 개념으로 그의 사진을 대하는 것과 '찰나'의 의미로 사진을 대하는 것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다.

또 50mm 단렌즈만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약 90%정도는 50mm 렌즈만 사용하여 촬영한 것들이지만 35mm나 90mm도 종종 사용했다고 한다. 앙리 까르띠에의 50mm 렌즈 선호에 대해서 여러가지 잘못된 인식또한 많으며, 대표적으로 50mm가 인간의 눈의 시야각과 제일 비슷하니 렌즈는 판형 상관없이 50mm로 통일하고 '줌은 발로(위치를 옮겨서)' 한다는 속설이 있는데, 이는 요점을 잘못 짚은 것이다. 브레송은 포토저널리즘에서 포토그래퍼의 민첩함을 매우 중시했기 때문에 소형 레인지파인더와 (휴대성이 허용하는 한에서) 높은 조리개값(=최대 노출감도)를 고집했고, 뷰파인더를 왜곡 없는 wisiwyg로 사용 가능하고 크기 대비 높은 개방 조리개값까지 챙길 수 있는 화각인 50mm를 주로 채용하면서 버릇이 들었을 뿐이다.[2] 물론 렌즈의 화각은 사진의 느낌 자체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원하는 결과물에 따라 화각을 결정하고 줌을 발로 한다는건 사진 좀 찍는다면 이미 각인된 상식이긴 하다.[3] 1970년대에는 (당시 기준) 그 작은 라이카를 들고 다니면서 찍고 인화하는 과정 마저도 귀찮아져서(...) 사진작가를 그만두고 아예 종이에 연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정도였다. 사진기는 기록을 남기는 도구일 뿐이고 눈에 보이는 것과 '찰나' 그 자체를 더 중시한 그의 철학을 엿볼수 있는 부분이다. 따라서 그의 말년에는 렌즈의 화각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촬영하고 결과물을 바로 볼수 있는 DSLR과 그 외 디지털 카메라에도 꽤나 호의적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다만 생전 그는 자동초점에는 회의적인 편이었다. 자동초점 성능과 속도가 훌륭한 현대 디카는 조리게를 열고 배경을 날리면서 보케를 가져가는게 쉽긴 하지만 '찰나'를 중시하는 브레송은 자동초점 센서가 가동하고 모터가 돌아가는 그 찰나도 아쉬워서 조리개를 조이고 넓은 초점거리 범위를 가져가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

유명해진 계기도 조금 독특한데 전쟁에 군인으로 참가했다가 포로로 잡혀있는 동안 죽은 것으로 알려져 회고전을 준비하였는데 회고전 준비 과정에 살아있다는 것이 확인되어 주목받게 되었다. 거의 40세가 다 되어서야 사진가로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이다.


3. 기타[편집]


  • 성 때문에 영화 감독인 로베르 브레송과 친인척 관계로 오해하는 사람도 많지만 사실이 아니다.

  • 영화감독 장 르누아르의 조감독으로 일한 적이 있다. 참여한 영화는 시골에서의 하루와 게임의 규칙이 있다. 당시 영화 제작에 참여하는 스태프들 또한 카메라 앞에서 연기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장 르누아르의 신념 때문에, 조감독으로 일하던 카르티에 브레송 또한 작품 속에서 신학교의 학생 역이나 영국인 하인 역 등 단역을 맡아 직접 연기에 참여하기도 했다. 장 르누아르에게서 많은 걸 배우고 두터운 친분도 쌓으며 프랑스 공산당 의 선전 영화 촬영을 돕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카르티에 브레송을 영화판에 끌어들인 것도 장 르누아르였으며 카르티에 브레송 스스로 영화에 소질이 없음을 깨닫게 하고 영화판을 떠나게 만든 인물도 장 르누아르였다.

  • 많은 사람들이 간디 사진을 그가 찍은 걸로 아는데 이는 오해다. 이 사진은 마가렛 버크화이트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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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고있는 카메라는 RF카메라 최고의 명작이자 브레송이 즐겨 사용한 라이카 M3.[2] 가격대가 저렴한것도 이유중 하나일거라고 알려져있다. 50년대쯤까지만 해도 35mm는 아마추어의 판형, 즉 지금의 APS-C와 비슷한 인식이 많았고, 그당시 프로들의 표준이던 듀얼렌즈 리플렉스에 비하면 브레송의 장비는 매우 저렴했다.[3] 카메라가 보급화된 현재에도 아마츄어와 실력자를 나누는 대표적인 시험 중 하나다. 상에 피사체가 충분히 크게 잡히지 않는다면 아마츄어는 줌을 땡기지만 프로는 발로 더 가까이 간다.[4] 사진계에서 (주로 미러리스 지지자들 위주로) 농담반 진담반으로 후지필름 X 시스템이 출시될때까지 앙리 까르띠에가 살아 있었더라면, 후지 X-Pro 바디에 수동초점 RF 렌즈 콤비로 갈아탔을거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또한 후지 X가 라이카 디지털 M에 비해서도 무게와 휴대성 하나는 월등했기 때문이다. 아예 한술 더 떠 앙리 까르띠에는 m4/3나 콘탁스 똑딱이 디지털 들고 판형과 렌즈성능차는 실력빨로 만회했을거라는 주장도 있다. 브레송의 전성기 이전에는 중형판형 듀얼렌즈 카메라가 "전문 사진기"의 최소 요건이였고, 그와 로버트 카파가 35mm 포토저널리즘을 선두하기 전까지만 해도 35mm는 장난감 취급을 받는 판형이였기 때문. 요즘은 스마트폰 카메라 성능이 워낙에 좋기 때문에 2020년대까지 살아 있었더라면 그냥 폰카로 찍으면서 행복했을 거라는 의견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