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시앵 레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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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cien Régime구체제(舊體制)
파일:caricature des trois ordres.jpg
앙시앵 레짐을 풍자한 그림(1769년작)[1]
1. 개요
2. 신분제
2.1. 왕가
2.2. 제1신분(기도하는 자)
2.2.1. 갈리아 교회주의
2.3. 제2신분(싸우는 자)
2.4. 제3신분(일하는 자)
3. 정치
4. 경제
5. 행정
5.1. 중앙 행정
5.2. 지방 행정
5.3. 법률
5.4. 일반 행정
5.5. 세금
6. 종교
7. 군대



1. 개요[편집]


프랑스 혁명 발발 이전의 프랑스 왕국의 국가 체제를 부르는 말. 프랑스어로 '구 체제'를 뜻한다. '구 제도'라고도 한다.

앙시앵 레짐을 단순히 봉건제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프랑스의 앙시앵 레짐은 오랫동안 봉건제 아래에서 왕권과 귀족권의 대립이 지속되면서, 그 대립의 결과가 관습법성문법으로 지속적으로 누적되어 형성된 사회구조이다.

프랑스는 1789년 혁명을 거치면서 앙시앵 레짐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근대 국가로 재편되었다. '왕정복고'조차도 혁명의 '제도 개선' 성과는 도저히 되돌리지 못했다.

2. 신분제[편집]


프랑스 왕국은 기본적으로 왕족 밑에 크게 3개의 신분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왕을 정점으로 하는 이 신분제는 안을 들여다 보면 같은 신분끼리도 이해관계가 완전히 일치되지는 않았다.

크게 알려진 것은 소수 특권 지배층과 대다수 피지배층의 갈등이라는 구도지만, 실상은 그보다 좀 더 많이 복잡했다. 앙시앵 레짐의 특권층이 혁명 세력에게 전복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특권층들부터가 분열 상태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덕택에 프랑스 내에서도 특권 폐지 외에 귀족과 성직가 계급의 전면적 숙청에는 반대하는 목소리가 꽤 높았다.[2] 이 덕분에 다수의 특권층들이 혁명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3] 이들은 주로 내세울 게 없는 하급 귀족이나 시골 혹은 소도시 성당의 하위 성직자들이었다. 특히 이들 대부분이 평민 취급을 받아 특권이라고 가질 만한 게 없었던데다 갈수록 상층부가 견고해지면서 오히려 특권이 없어지는게 출세를 쉽게 하는 발판인 상황이 되다 보니 상층부에 대한 불만이 매우 컸으며 대체로 혁명에 협조적이었다. 후일 프랑스 황제가 되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도 당시 동남쪽 변방이었던 코르시카 섬의 이탈리아계 귀족 출신이다.

2.1. 왕가[편집]


왕권신수설을 바탕으로 한 절대왕정루이 13세, 루이 14세전성기를 누렸으나, 루이 15세, 루이 16세를 거치면서 점점 허울만 남은 껍데기가 되어 갔다. 이는 왕실이 초래한것인데 근본적으로 재정 악화로 인해 프랑스 왕가의 절대적인 이 약화된 것이 원인이었다. 일례로 태양왕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을 '귀족들이 왕을 알현하는 장소'로 사용했지만, 루이 16세 대에는 오히려 '귀족들이 권력을 논하는 장소'로 변화했으며, 루이 14세가 사망하자마자 그의 사법권을 충실히 집행했던 파리 고등법원과 기타 여러 지방 법원들은 다시 귀족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러다보니 1789년 혁명 전야쯤에 절대왕정은 이미 이름뿐인 개념이 되어버렸으며 루이 16세 또한 나라를 변혁할 의지뿐만 아니라 능력도 없었다.

더욱이 부르봉 왕조루이 16세를 중심으로 똘똘 뭉치지 못하고, 왕가의 주요 인물들이 서로의 욕심 때문에 분열해 있었던 것은 왕실의 힘을 더욱 약화시켰다. 뒷날의 루이 16세의 동생인 루이 18세샤를 10세도 은근히 왕위에 야심을 품고 있었으며, 루이 13세의 자손으로 왕가의 인척인 오를레앙 공은 이전부터 왕위를 노리고 왕가의 권위를 깎아먹는 반 왕실 활동을 후원하다가 혁명이 일어나자 대놓고 혁명을 부추겼다. 이런 부르봉 가문과 오를레앙 가문의 대립은 무려 프랑스 제3공화국 수립에도 도움을 줬을 정도로 오랫동안 고질적으로 이어졌다.

2.2. 제1신분(기도하는 자)[편집]


성직자/수도자 계층으로 약 13만 명이었다. 프랑스 왕의 영향력 아래에 있지만 가톨릭이라서 교황의 신하라는 이중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교황은 멀리 있고 힘이 없던 탓에 실질적으론 프랑스 왕의 신하나 다름없었다. 1신분의 숫자는 0.8%~1% 미만에 불과했지만 경작 가능 토지의 10%를 차지하고 있었고, 교회의 십일조[4]수도원의 토지 등등 까지 합쳐서 여러 수입원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 당시 프랑스의 교회는 기본적으로 면세라서 대단한 부를 축적했다. 하지만 1신분 모두가 기득권층은 아니었고 일선 성직자들과 고위 성직자, 그리고 고위 성직자 중에서도 상황 돌아가는 걸 파악할 머리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이해관계가 달랐다.

고위 성직자/수도자와 하위 성직자/수도자들끼리도 계층이 갈려서 대주교, 주교, 수도원장이나 수녀원장 같은 고위급 성직자 및 수도자들은 귀족 가문에서 충당되었고, 주요 직위들도 귀족 출신이 독점하였기에 이들도 알고보면 귀족이었다. 이런 큰 성당수도원이 귀족 출신에게 있었고 혜택도 많기 때문에 이런 고위 성직자들은 귀족들과 이해관계가 일치하였다.

반면에 지방의 작은 본당이나 시골의 성직자/수도자들은 당시에 농민시민들과 직접 만나면서 현실에 대해서 인식하고 있었고, 신분도 귀족과 먼 이들이었다. 교회의 자금도 일괄적으로 거두어가서 재분배하는 형태였는데, 최소 단위 교구나 본당에는 자금이 내려오지 않은 데다 내려오더라도 얼마 안 됐고, 일반 백성들과 접촉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하위 성직자/수도자들은 고위 성직자/수도자들과 이해관계가 달랐다.

2.2.1. 갈리아 교회주의[편집]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였지만, 이 당시에는 "프랑스 교회가 교황이 있는 로마 교회에 완전히 종속되어서는 안 되고 어느 정도 독립적인 지위를 가져야 한다"는 갈리아 교회주의가 상당히 널리 퍼져 있었다.[5] 이로 인해 프랑스에서는 이단심문이 일어날 수가 없었고, 교황이 내린 결정사항도 일단 프랑스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만 적용될 수 있었다. 이를 지지한 루이 14세는 어디까지나 프랑스 교회를 자신이 더 통제하기를 원했을 뿐이고 분립을 원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프랑스는 로마 이단심문관의 집행을 필요로 하지 않고 독자적인 종교재판소를 소유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교황도 가장 강력하면서 신앙심이 깊은 가톨릭 군주는 멀리할 수 없는 강력한 동맹이었으므로 암묵적으로 유지되었다.[6] 이는 앞의 고위 성직자/수도자 부분과 시너지 작용을 일으켜 문제가 된다. 신자들로부터 거두어들인 헌금이 교구에서 교구장까지 올라가면, 교구장을 정점으로 하는 귀족 고위 성직자들을 끝으로 흐름이 멈추어 버리는 것이다. 차라리 헌금이 로마 교황청까지 도달한다면, 교구 단위까지 지원을 보내라는 로마 교황청을 위시한 외부의 압력이라도 있을테지만 말이다.

반면 프랑스와 달리 스페인에서는 하급 성직자들과 고위 성직자들의 이해관계가 서로 대립하지 않았다. 교황청에서 17세기 대항종교개혁 이래로 귀족들이 고위 성직을 돌려먹지 못하게 지속적으로 칙령을 내렸고 스페인은 교황청의 칙령에 충실히 따랐기 때문이다.

2.3. 제2신분(싸우는 자)[편집]


귀족으로, 약 35만 명 정도 되었고 프랑스 전체 토지의 25%를 소유했다. 일단 프랑스 귀족들이 가진 봉건 특권은 절대왕권에 짓눌렸다. 그러나 몇 가지 사소한 특권이 있었는데, 교회의 특별석에 앉았고 큰 을 찰 수 있었으며[7] 마차에는 가문의 인장을 그려넣을 수 있었고, 사냥권을 바탕으로 을 관리하였으며 헌금할 때 기다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사소한 특권보다 더 중요한 건 이들이 면세 대상이었으며 성직을 포함한 고위직을 독점하는 계급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프랑스에서 귀족은 크게 둘로 나뉘는데, 부계에서 이어지는 역사를 가진 뼈대 있는 가문의 경우 '대검귀족(La noblesse d'épée)', '혈통 귀족'으로 불리었고 세습되는 작위토지에 기반한 장원의 귀족들이었다. 반대로 왕의 신임을 받은 법관이나 행정 관료로 귀족이 된 자들은 '법복 귀족(La noblesse de la robe)', '종루 귀족'으로 불리었고 고등법원행정을 장악하였다. 이런 후천적인 귀족들은 왕의 신임 외에 관직을 매매함으로써 귀족이 될 수도 있었으며 관직은 매매가의 60분의 1만 내면 세습이 가능했기에 관직은 세습되었다. 이 시기에 고귀한 혈통을 가진 혈통귀족은 소수였고 행정직을 장악한 후천적인 귀족이 다수이었다. 이는 왕이 자신의 친위 세력을 육성하면서 장원을 가진 혈통귀족들을 견제하려고 한 결과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법복귀족들은 배타성이 강해지면서 새로운 구성원의 유입을 차단하고자 이를테면 고위 장교1400년대 이전부터 귀족의 혈통을 유지하고 있었던 자(즉 본인 위로 4대 이상이 정통 귀족인 자)들로 제한하는 식으로 새로운 귀족의 등장이나 출세길을 막고 왕에게 저항하여 귀족이 될 수 없게 된 부르주아 계층의 증오를 받는다. 또한 귀족들도 경제적으로 압박을 받았기 때문에 한때는 사문화되었던 봉건 특권들을 마구 부활시켜서 영지 주민들을 압박했다. 이는 농민들의 증오를 받아 프랑스 혁명 때 귀족들이 농민들에게 학살당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물론 이들도 하급 귀족과 고위 귀족으로 또 나뉘어 있었다. 전자의 경우는 고위 귀족에 대한 불만이 크다 보니, 혁명에 상당히 협조적이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법복귀족과 대검귀족 모두 태양왕 대에 축소되었던 전통적인 귀족세력의 권력을 회복시키려는 대에는 동의하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연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삼부회가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귀족들의 저항은 영국처럼 의회가 중심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 대신에 세습 특권을 가진 고등법원을 중심으로 국왕에 대항하였다. 혁명 초기에 이러한 반 왕실 귀족 계급은 혁명을 일으키는데 상당히 큰 역할을 하였다. 근대적 학문체계를 먼저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도 이 계층들이었다. 소위 혁명파 귀족이라는 자들은 귀족부인들의 살롱에 모여들어서 저명한 학자들을 불러다 놓고 강연을 들으면서 근대적 지식을 쌓았다. 테니스 코트의 맹세에서 3신분 위원들과 합류하기 위해서 찾아오는 라파예트를 위시한 일련의 귀족들이 이들이다. 특히 라파예트는 대검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혁명에 참여한 독특한 인물이다.

다만 귀족들도 완전 면세는 아니었다. 토지세(타이유)는 면세이되 '싸우는 자'답게 사실상의 병역의무가 있었고, 이는 군인을 넘어 군사관료로서도 역할을 기대받았다. 쉽게 말해 전쟁이 나면 귀족은 무조건 참전해야 했으며, 병력을 모집하고 훈련시켜야 했다. 다만 이때 가면 중세와 달리 귀족의 사병이 아니라 국왕의 국가군이므로 급료는 국고에서 지출되었는데, 일단 모집한 귀족이 급료를 주면 나중에 국고에서 주는 식이었다. 귀족 본인이 떼먹는 것도 많았지만 귀족이 떼먹힐 때도 많았다. 당연하지만 귀족들은 이러한 부담들을 적극적으로 3계급에게 전가했다(...)

2.4. 제3신분(일하는 자)[편집]


인구의 2%도 안 되는 왕족과 1,2신분인 귀족이랑 성직자를 제외한 약 98%의 프랑스 국민들이다. 제3신분의 대다수는 농촌의 농민들로 약 2,700만 명이었다. 이 농민들은 가장 많은 부담을 지고 있었으며 가장 큰 억압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농민 대신에 주도층이 된 건 도시에 거주하는 부르주아였다.

당시 프랑스에서 부르주아는 교육을 많이 받았으며 생활수준이 높았고 그 지식이나 능력에 있어서 귀족과 경쟁할 수 있었지만[8] 신분제 때문에 세금을 제대로 내고도 혜택은 하나도 없고 억압을 받고 눌려지내는 것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삼부회 대표를 뽑을 때 다층적 간접선거를 하면 부르주아가 제3신분을 대표하였다. 그러나 제3신분은 숫자가 많은 만큼 다양한 층위를 이루었다.

크게 도시민인 부르주아와 지방민인 농민으로 나누어지지만 사실 농민들도 토지 소유에 따라서 부농과 자영농부터 빈농까지 있었다. 그러나 같은 부담과 일치된 이해관계가 존재하는 농민보다 부르주아의 층위는 더 다양했다. 특히 대농장주, 무역상, 금융업자와 같은 귀족에 가까운 부르주아도 있었고 변호사교수, 의사 같은 학자 계층과 도시의 소상인이나 제조업자 같은 도시 경제의 하층에 속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 다양한 층위는 프랑스 혁명에서 복잡성을 띄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3. 정치[편집]


절대왕권 사상에 따라 왕이 담당했으며, 왕에게는 위원회 격인 참사원들이 붙어 있었다. 참사원들은 왕에게 조언을 할 수 있었으나 실질적으로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반영구적인 의회들이 존재하긴 했고, 실권 또한 쥐고 있었으나, 루이 13세부터 왕의 권력이 본격적으로 강화되면서 상징적인 의미만 보유하게 된다. 그 외에도 일시적인 기관으로는 삼부회가 존재하기는 했다. 그러나 왕이 국민대표에게 자문을 구하는 식이었으므로 의결권은 없었고 소집과 의제 제기권은 왕에게 있었다.[9] 이는 1302년 필리프 4세가 처음으로 연 후 국민의회가 되었으나, 특권 계층 (귀족, 성직자)과 평민(부르주아 등)간의 이해관계가 맞을 리가 없었기에 자주 대립과 항쟁이 발생했다. 그래서 루이 13세 때 마지막으로 열리고 그 후 170년간 소집되지 않았다. 그러나 중앙 삼부회가 없어졌다고 해도 지방 삼부회는 일부 지방에서 건재했다. 이러한 지방들은 지역주의가 강해서 왕권에 반항적이었고 반란을 자주 일으켰다. 물론 삼부회가 없는 지방도 있었다. 이렇게 지방마다 사정이 전부 다른 것이 앙시앵 레짐의 특징이다.

프랑스의 계급사회는 중세 후기 즈음 성직자들에 의해서 구상되었지만, 왕권신수설은 비교적 근대적인 발상이다. 앙리 4세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왕들은 제한적인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영국처럼 왕의 권리를 직접적으로 제한하는 대헌장은 없었지만, 왕의 결정 대부분이 대귀족 가문이나 삼부회, 또는 제1,2계급이 주가 되는 의회를 거쳐야만 했다.

프랑스 왕권신수설은 아이러니하게도 귀족들이나 성직자들의 노력으로 성립된 것이 아니라 제3계급이나 소귀족들의 호응을 얻어 구상되었다 이유는 간단하게, 왕은 자신에게 도전하는 귀족을 견제할 세력이 필요했고, 그 대상인 부르주아들 입장에서도 왕은 멀고 귀족은 가까우니 왕권을 명분으로 귀족권을 억누르는 게 이득이었던 것이다. 16세기 후반, 왕권신수설의 사상가들 중 가장 대표적인 샤를 루아조 (Charles Loyseau)나 카르뎅 르 브레 (Cardin Le Bret)등 법학자들에 의해서 구상되었다. 이때부터 왕은 귀족들을 멀리하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큰 가문 출신이 아닌 법학자들과 관료들을 곁에 두어 군림하기 시작했다. 루이 13세는 본격적으로 콩시니 후작이나 리슐리외 추기경 등 대귀족 출신이 아닌 인물들을 등용해 중대한 권력을 맡기는 총신 정치를 시작한다. 이런 결정은 대귀족들의 심기를 건드리고, 이들은 영국식 의회군주제를 요구한다. 앙시앵 레짐 프랑스 왕의 권력이 막강했지만 전 세대(앙리 4세 이전)에 비해서 강했다는 것이지, 완전한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사회라 전능한 왕은 아니었다.

4. 경제[편집]


18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프랑스의 경제는 다른 구체제적 사회들과 마찬가지로 '불안정으로의 회복'이 이어졌다. 특히 프랑스는 국가 산업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절대적인 비중과 전근대적인 농업 기술로 인한 빈약한 생산물은 불안정한 사회를 구축했다. 즉, 풍년이나 평범한 수확량이라면 사회가 어찌어찌 유지되겠지만, 흉년이나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기반이 불안정한 경제가 심각하게 요동을 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사회가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인구가 감소하면서 사회는 다시 이전의 불안정한 상태로 회귀하게 된다. 사실 이는 비단 프랑스만의 특징이 아니라 전근대 농업국가들 모두에게서 일어났다. 프리츠 하버질소 비료를 개발해내지 않았다면 아직도 이러한 메커니즘에서 전 인류는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전체 사회가 '풍요'로워질 때 경제가 파탄나게 된다. 18세기 초와 말 사이 프랑스는 전체 인구 2천만 명에서 2천 6백만 명으로 증가해 그 당시 유럽에서 인구가 가장 많았다. 경제규모도 확 늘어난 건 말할 필요도 없으며, 이에 따라 전체 사회가 영위하는 부의 총량 역시 증가하게 된다. 하지만 이게 대다수 민중이 누리는 삶의 질이 향상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절대 아니다. 제1, 제2신분 수십만명의 자산이 배로 늘어나는 동안 밑에서는 빈곤층만 수백만명 늘어났다. 당시 프랑스에서 일반적인 농민이 자유롭게 소유하고 있던 땅은 단 1평도 없었다. 소유권은 농민에게 있었을지라도 지대를 귀족에게 납부해야 하는 전통적인 봉건적 관습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타이유'라고 하는데, 무려 국부론에서 애덤 스미스가 '프랑스 놈들은 아직도 중세인 줄 알고 있다 ㅉㅉ' 하며 깔 정도였다. 소유권이 농민에게 있는데 왜 지대를 납부해야 되는지에 대해서는 동양의 식읍 개념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다. 이때문에 라부뢰르(Laboureur)같은 극소수의 독립부농들을 제외한다면 대다수의 프랑스 농민들은 삼중고(교회의 십일조, 영주의 부과조, 국왕에게 내는 세금)를 겪었다. 도시도 예외가 아니라 부유한 대상인을 제외한 중소 상공업자들은 농민과 같이 높은 세금으로 고통받아야 했다. 이들 중에는 세금을 못내어 재산을 압류당하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경제 규모가 확장되면서 농산물의 가격도 상승했지만 이러한 구조 때문에 농민들이 직접 혜택을 보는 일은 사실상 없었다. 오히려 지주들은 농산물 가격 상승을 빌미로 지대를 더 올렸다. 더군다나 이 시기의 프랑스 농업은 가족 규모의 소농 경영 체제로 그 수확물 역시 삼중고로 나가는 것들을 제하면 모두가 가정에서 소비하는 자급자족적 형태였다. 따라서 이들은 시장의 가격 변동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계층이었음에도 지대 상승으로 인한 고통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다. 거기다 18세기 후반, 그러니까 혁명이 일어나기 10년 전쯤부터 포도 가격의 침체가 이어지는데, 귀족들은 이 때문에 일어난 손실을 농민들에게 지워서 탕감했다. 정말 이 정도면 아무리 못 배운 까막눈이라도 빡칠 수 밖에 없다. 정말 흉작이라도 일어나면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전까지 프랑스 농민들은 국왕과 귀족들의 권력에 대해 '하늘이 내려주신 권력'이라 생각하며 신분적 차이를 당연하게 인정했지만, 점점 불만을 갖기 시작했다. 사회의 전체적인 부는 늘어났지만 이에 대한 불균등한 분배가 너무 심해서 혁명을 유발한 것이었다. 제3신분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농민들을 적으로 돌린 귀족들은 결국 단두대로 손에 손잡고 사이좋게 끌려갔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건 1786년 영국과 맺은 무역조약인 이른바 이든 조약(Eden Treaty)이었다. 이 조약은 영국과 프랑스가 서로의 수출품에 관세를 낮추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는데, 조약이 성사되자 영국에는 가격이 낮아진 프랑스 농산물(밀)의 수입이 늘어났고 프랑스에서는 가격이 낮아진 공산품(면직물 등)의 수입이 늘어났다. 그 결과 프랑스에서는 밀 가격은 폭등하고 이로 인해 빵 값이 올라가 사실상 물가가 오르고 비단이나 면직물을 만들던 제조업자가 망하고 그 밑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실업자가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10] 여담으로 영국으로의 수출이 기대되었던 포도주는 별로 수출이 늘어나지 않았다.[11]

5. 행정[편집]


앙시앵 레짐의 행정은 혼란스러웠다는 말로는 다 설명이 되지 않을 정도로 대혼란 그 자체였다.

5.1. 중앙 행정[편집]


왕은 국가의 각 분야에 대해서 '대신'을 임명해서 통치를 했다. 그런데 영국과는 달리 각 대신들 사이에서는 내각 같은 통일된 의사 합의 구조가 없었다. 대신들 간의 업무 분야가 명백하지 않았으며, 대신들은 서로를 견제하고 다투기가 일쑤였다. 결국 통일된 행정이 어려웠다.

5.2. 지방 행정[편집]


이론상으로는 지방행정은 왕이 파견한 행정관이 담당하도록 되어있었으나, 실제로는 봉건 귀족들의 저항으로 현실은 이론대로 되지 않았다. 왕의 말을 잘 듣는 지방도 있었지만, 봉건 특권의 저항이 극심하여 왕의 지배가 제대로 미치지 않는 지방도 많았다.

역대 프랑스의 왕들은 지방 통제권을 강화하려고 여러 차례 다른 형식으로 행정관을 파견했는데 이게 오히려 행정구역의 중복 현상만 극심해지게 만들었고 지방행정의 통일성이 약화되었다.[12] 그러다보니 이 당시 프랑스는 외형상 중앙집권이지 실질적으론 지방분권에다 봉건제나 다름없었다.

봉건적인 지방 구분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아 한 나라인데도 지역들끼리는 아예 다른 나라로 취급했다. 얼마나 심했냐면 각지에 관세있었으며, 도량형의 통일조차 이루어지지 않았고[13] 각지의 관습법이 다 달랐을 정도였다. 언어조차도 지방마다 차이가 컸다. 브르타뉴 지방에는 켈트어가 아직도 남아 있었으며, 프랑스 혁명 당시만 해도 남프랑스에서 온 사람들의 연설을 파리 사람들이 제대로 못 알아들었을 정도였다.

앙시앵 레짐 시절에는 기본적으로 '지방'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고 관습에 의지하고 있었다. 지방의 경계가 상당히 불확실 했던 것인데, 이름까지도 불확실해서 지금의 '아키텐' 부근을 파리에서는 옛 발음 아퀴텐이 변형된 '귀엔'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심지어 '프랑스'라는 나라의 국경조차 명확하지 않았다. 프랑스의 영역 내에서도 나바르 왕국이 잔존하고 있었고[14], 신성 로마 제국과의 국경 지대에는 독일계 귀족들이 여전히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15]

5.3. 법률[편집]


사법적으로는 왕국 전체에 하나의 법이 통용되지 않았다. 몇몇 도시는 세제 특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남부는 성문법화된 로마법의 적용을 받고 있었지만 북부는 관습법(Common Law)의 적용을 받고 있었다. 사실 이 무렵 유럽법률은 로마법이나 관습법을 지방이나 경우에 따라서 다르게 적용하는게 흔히 있는 일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중세 초기부터 왕의 '칙령'이 사실상 법률과 같은 역할을 했는데, 이는 고등법원에 의하여 '등기'가 이루어져야 정식으로 반포될 수 있었고 고등법원은 이를 왕권에 대항하는 무기로 삼았다.

매관매직[16]의 폐단이 가장 심했던 곳이 바로 이 법조계였다. 앙리 4세재무장관 쉴리는 국고를 든든히 하기 위해 관직 세습 세금(Paulette)을 추가한다. 프랑스 판사직위는 모두 매관매직되고 세습되었다. 단적으로 재판관의 숫자는 꾸준히 증가하는데, 이건 재판수요가 많아서가 아니라 더 많은 관직이 있어야 더 많이 팔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직수 증가는 기존 관료들의 반발로 막히는데, 왜냐하면 그래야 자신들이 산 관직의 희소가치가 보장되어서 가격이 상승하기 때문이었다. 앙시앵 레짐 시기 프랑스의 관직, 특히 법관직은 아주 꾸준히 가격이 올랐다. 이 때문에 10대에 중앙재판관이 되는 경우도 존재했고, 재판은 부정부패를 피할 수가 없었다.

5.4. 일반 행정[편집]


교육호적 업무 등의 일반 행정업무는 가톨릭교회가 담당하였다. 아이가 태어나면 성당에서 유아세례를 받고, 조금 자라면 첫 영성체견진성사를 받고, 성인이 되면 성당에서 혼인성사를 하고, 죽으면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했다. 이 모든 것은 성당에 문서 기록으로 남았고(오늘날도 마찬가지), 가톨릭교회의 행정 업무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진행되었다. 가톨릭교회는 이 대가로 십일조를 징수했다.

사실 중앙도 지방도 행정이 모두 체계가 엉망이고 뭐 하나 통일되어 돌아가지 않아서, 가톨릭교회가 없었다면 앙시앵 레짐 프랑스는 아마 국가 체계를 유지하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 이러한 일반 행정 업무는 교회에서 국가로 전면적으로 이전된다.

5.5. 세금[편집]


이 복잡한 행정 체계 중에서도 가장 어지러웠던 것이 바로 세금이다.

세금은 왕, 귀족, 성직자 계급이 각각 거뒀다. 왕은 임의로 신민들에게 전체적으로 토지세, 20분의 1세, 소금세 등 각종 세금을 거둬들일 수 있었는데, 귀족, 성직자에겐 이런저런 면세특권이 있었으므로 결국 평민들에게만 거두는 것이다. 게다가 지방의 농민들에게는 각종 사업에 동원되는 부역까지 추가되었다.

문제는 루이 16세 시대의 프랑스가 오랜 전쟁과 패전, 그리고 심각했던 기근으로 인해서 대대적인 적자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같이 적자를 봐도 영국은 채권을 통해서 자금을 조달해서 일시적으로 경제문제를 해결하는데 반해서[17], 프랑스의 경우는 채권도 잘 팔리지 않았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였다. 프랑스 왕실이 빚을 지고는 먹튀를 한 역사가 유구한 탓에 프랑스의 경우는 이런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2가지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문제는 2가지 모두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방식이었다. 첫번째가 조선시대 공명첩과 같은 수준인 법복귀족을 만들어주면서 돈을 받은 것이고, 2번째가 징세권의 판매였다.

징세권을 넘겨주는 것은 행정기술의 미비와 일시적인 재정문제 해결을 위해서 고대 로마 시대부터 사용된 방법이었다. 내용은 단순한데, 일정지역을 정해놓고 평균적인 수준의 세금을 기준으로 일정기간의 세금을 특정인이 국가에 먼저 헌납하고, 그만큼을 나중에 자기가 거두어 들이는 방식이었다. [18]징세권을 넘겨받은 이들은 이득을 보려고 국가에 낸 돈 이상으로 세금을 거둬들이는 게 너무나도 당연한 수순으로 벌어졌다. 이것이 고대 로마 시대에 등장한 것이 성경에서 만인의 지탄을 받는 존재로 등장하는 세리들이고, 앙시앵 레짐에서는 징세청부업자라는 이름으로 프랑수아 1세 시기에 등장하게 된다.

이건 프랑스 국왕 입장에서는 신용카드사채와 마찬가지의 역할이다. 신용카드처럼 긁기는 쉽고 지불을 유예할 수 있지만, 대신에 기존의 수입이 여기에 빨려들어가는 동시에 부담은 뻥튀기되는 구조인 것이다. 결국 프랑스 국왕들은 당장 먹기는 곶감이 달다고 전쟁과 사치 등에 필요한 돈을 빌리면서 징세청부업자에게 징세권을 차곡차곡 넘겼고, 징세청부업자들은 그렇게 넘겨받은 징세권을 바탕으로 세금을 수탈하기 시작했다. 루이 16세가 즉위하기도 전에 프랑스 전체 영토의 절반 이상에 해당되는 지역의 수십년에 걸친 징세권이 이미 징세청부업자들에게 넘어가 있었다.

이 징세청부업자들이 얼마나 프랑스 재정을 박살내고 돈을 긁어들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앙투안 라부아지에이다. 당시 그의 행적을 봐서는, 100년이 아니라 인류역사에 단 1명만 태어나는 수준의 천재라도 살아남기는 어려웠을 정도다. 당장 구명에 가담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강대국 출신의 외국인이나 해외 거주 프랑스인이었던 것만 봐도 세리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분노를 짐작할 수 있다. 세리들의 만행을 함께 지켜본 프랑스 내국인 과학자들인 자크 샤를과 몽골피에 형제는 라부아지에를 지탄했다. 심지어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자코뱅당이 몰락하고 과도하게 내려진 처벌에 대한 복권이 이뤄지던 시절에조차 세리였던 라부아지에의 판결은 뒤집혀지지 않았다. 단지 죄가 없는 아내는 풀어주고 1796년 연구 자료를 모두 돌려주는 선에서 그쳤을 정도다.

이렇게 좋은 징세청부권이라는 꿀을 업자들만 빨게 할 귀족들이 아니었다. 대놓고 고위 경제관료가 자기가 국가에 돈을 빌려주고 특권을 받았다. 그리고 자기가 국가를 대신해서 빌리고 자기가 빌려주다 보니 이자율이 가관이 되었다. 루이 14세는 정의법정을 열고 이런 재정가들을 부정부패 혐의로 재판에 세웠으며 대상을 고른 것은 루이 14세가 마음대로 고른 것이지만 혐의는 거짓이 아니었다. 프랑스 혁명 시기 징세청부업자들 관련해서 이야기가 나오지만, 징세청부업자 치고 정당한 이율을 받은 사람은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었고, 정의법정에서 처벌할 급인 고위 귀족치고 징세청부업 안한 사람도 없었다. 루이 14세는 역사상 최대규모였던 이 정의법정 한 방으로 프랑스 1년 지출액에 필적하는 금액벌금으로 걷었다. 그러나 그 돈은 전쟁과 상비군 유지비용으로 날려버렸고, 루이 14세가 마음에 드는 파벌은 손을 대지 않았기 때문에 징세청부업의 적폐는 청산되지 않고 그대로였다.

6. 종교[편집]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가톨릭의 세력이 매우 강한 국가여서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갈등이 끊이질 않았다. 프랑스의 개신교는 하급 귀족들과 상인 계층의 지지를 받아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들의 주요 근거지는 프랑스 남서부와 노르망디였다. 그러나 이 지역들에서도 가톨릭이 대다수였고 신교도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신교도, 즉 위그노들은 국가의 통일을 해치는 요소로 보아 극심한 탄압을 받았으며, 위그노들도 불리한 자신의 처지를 극복하기 위해 프랑스의 적인 독일이나 네덜란드 신교도들과 자주 동맹을 맺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이나 프랑스 종교 전쟁이 그 예였다.

앙리 4세가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프랑스의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프랑스 종교 전쟁은 일단 끝났다. 앙리 4세는 낭트 칙령을 발표하여 신교도들과 가톨릭 교도들간의 동일한 권리를 보장하고, 소수인 신교도들을 위해 8개의 무장 도시를 허가하는 등 군사적인 자유권도 보장했다. 그러나 군사적인 권리가 시간이 갈수록 점차 남용되었고 나중에는 프랑스 왕국에서 분리독립을 하려는 움직임까지 일어났다. 이렇게 되자 리슐리외 추기경은 1628년 라 로셸을 포위공격하여 함락하고, 그 결과로 맺어진 조약에서 종교적 자유는 그대로 보장하는 대신 군사적인 자유는 박탈하면서 신교도 세력은 위축되었다.

1610~1635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프랑스의 남부지방에서는 일련의 내전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처음에는 라이벌 귀족 가문간의 싸움으로 보았으나 연구를 더 진행한 결과 이는 종교분쟁으로 밝혀졌다. 프랑스 종교전쟁이 종식되고 낭트 칙령이 발표된 뒤에도 그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었던 것이다.

루이 14세는 신교도들에게 더욱 강경한 대책으로 일관했다. 처음에는 선교사를 보내 개종하도록 했다. 이 때는 개종을 하는 자에게는 금전적인 보상을 주었다. 그 다음에는 형벌을 부과하고 신교도들의 학교를 폐쇄하였으며, 직업에 종사치 못하게 했다. 나중에는 용기병 부대를 보내 신교도들의 집을 약탈하게 해서 강제로 개종시키려 시도했고 이는 낭트 칙령의 폐지 (1685년 10월 18일)로 이어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신교도 18만 명이 프랑스를 떠나 영국네덜란드, 독일남아프리카 등지로 이주했고, 약 4천명은 미국으로 떠났다. 이렇게 떠난 신교도들은 상인, 학자와 같이 사회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이들이었기에 프랑스에겐 뼈아픈 손실이었다. 다만 나머지가 그대로 죽거나 한 건 아니고 무늬상 개종한 것으로 보이면 더 문제삼지 않았기에[19] 대부분 명목상 가톨릭이고 실제로는 신교도였다. 프랑스 혁명 이후 각종 차별이 철폐되자 이들 대부분은 다시 신교도가 된다.

7. 군대[편집]


프랑스는 카페 왕조 이후부터 점차 중앙집권화되기 시작하면서 점차 중앙에서 시작해 지방에 이르기까지 국왕이 모든 군사권을 장악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주변국가들과 달리 상비군의 개념을 만들었고 상비군의 유지비는 국왕이 지불하였고 이는 국왕이 각종 조세를 거둘 명분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전쟁의 규모가 커지고 잦은 전쟁으로 인해 군대의 규모 또한 커지기 시작했다. 특히 루이 14세하에 군대의 규모는 약 40만에 육박했으나 루이 14세의 무모한 정복 야욕으로 끊임없는 전쟁이 지속됨에 따라 군비의 지출이 증가하였고 군대의 규모 또한 40만에서 점차 증가시키면서 군비의 지출을 더욱 부추겨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다. 국경을 따라 요새들 역시 지나치게 축성해 그에 따른 유지비 또한 부담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또한 장교계급 승진 또한 신분에 의해 결정되기 시작, 나중엔 일개 최하위 위관급인 소위마저 귀족자제들이 차지하게 되고, 이로 인해 귀족들이 군 지위를 독점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돈으로 계급을 사는 것으로 대응했지만 이마저도 귀족들 또한 자신들의 재산으로 사는 등의 폐단이 생기기 시작했고[20] 이것이 점점 심화되어 혁명 전의 군대 내에선 평민 출신의 장교가 거의 없었고 대부분이 귀족 출신의 장교들로 되어 있었다.

문제는 귀족 장교들의 질이 좋지 않았는데 루이 15세 때 창립된 왕립 사관학교의 경우 원래 가난한 귀족 자제들을 훌륭한 귀족 장교로 키워내기 위해 만들어진 곳으로 주된 교육은 군사학보다는 수학, 문법, 역사, 지리 등이었고, 그나마 있는 군사학은 요새 구축법이 전부였으며, 군사 훈련도 현실과 동떨어진 승마, 펜싱 등이 대부분이었다. 이러니 군대의 질이 떨어지는 것은 안 봐도 비디오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거라도 있는 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귀족 출신 장교들이 모조리 단두대에 목이 날아가거나 외국으로 도주하거나 강제전역당함에 따라 장교계급의 공백이 생기는데, 혁명정부는 이 자리에 평범한 민간인들을 명망가라는 이유로 임명했다. 게다가 지휘권을 제대로 주면 모르되 그러지도 않았다. 이렇게 변호사 출신 장군, 의사 출신 참모가 넘쳐나는 데다 그나마 이들이 실전경험을 쌓은 뒤 뭔가를 하려고 하면 일반 병사들이 난리치는 판이니, 열정만 가득한 프랑스 혁명군이 프랑스 혁명전쟁 초기에 처참하게 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결국 국민공회가 붕괴된 뒤 새 정부 하에서 앙시앵 레짐의 핵심을 맡은 귀족들과 죄가 가벼운 귀족들을 구분하고 후자를 포용하는 쪽으로 나가면서 일부 귀족 출신 장교들은 신정부에 대한 충성과 특권포기를 조건으로 복귀를 허락받고, 무엇보다도 전쟁이 오래 지속되면서 많은 경험을 쌓은 장교들이 등장하게 되고 나서야 이 상황은 겨우 해결된다.

하지만 이렇게 그나마 상황이 나아지는 것도 육군만의 이야기. 프랑스 해군은 이조차도 불가능해서 상태가 가히 안습이었다. 해군으로서 경험을 쌓으려면 우선 바다 위에서 범선을 운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건 재능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육군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상당한 기간의 교육과 경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별 수 없이 스페인 해군에 의존했지만, 그렇잖아도 프랑스의 반 속국이던 스페인 해군이 잘 싸울 리는 없었다. 그러니 호레이쇼 넬슨에게 호되게 털릴 수 밖에.
[1] 농민이 성직자와 귀족을 업느라 새가 곡물을 쪼아먹고, 토끼가 양배추를 먹는 걸 쫓아내지 못하는 장면이다. 왜 이러한 내용이 있냐면 당시 프랑스에서 귀족들은 토끼장과 비둘기장을 가질 권리를 가졌기 때문에, 이것으로 농민들에게 횡포를 부리는 경우가 있었고, 곡물을 쪼아먹는 비둘기와 양배추를 먹는 토끼는 농민에 대한 수탈을 상징한다. 그림 하단부에 써진 글은 "À faut espérer q'eu jeu la finira bientôt"(이따위 장난질이 제발 끝나길 희망하며)라는 내용인데 이 희망은 20년 뒤 정말로 이루어졌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혁명 이후의 풍자 그림을 그렸는데 거기선 상황이 반대로 되어있다. 문구도 Vive le roi, Vive la Nation(왕 만세, 국가 만세)로 바뀌었다. 깨알같이 죽어있는 토끼와 새는 덤. 그리고 여성버전도 있다.[2] 자코뱅당이 몰락한 이유가 이것이다. 재미있는 건 정작 로베스피에르 본인은 이런 숙청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3] 예를 들면 20세기 프랑스 공화국의 과학자인 루이 드 브로이는 공작 작위를 갖고 있었고, 특권만 없었지 재산은 많았고, 칭호도 허가되었다.[4] 오늘날 가톨릭에서는 '교무금'이라고 한다. 액수 또한 반드시 10분의 1을 낼 필요는 없고, 자율적으로 형편에 맞게 낸다.[5] 아비뇽 유수 등 아예 '애완 교황'까지 만든 걸 보면 감이 올 것이다.[6] 한동안 저 포지션은 스페인이었으나, 루이 14세의 집권 이후 프랑스가 스페인을 제치고 유럽 최강국이 되면서 스페인 국왕이 하던 역할을 프랑스 국왕이 대신하게 되었다. 심지어 18세기에 이르러선 루이 14세의 둘째 손자였던 필리프가 스페인의 왕이 되었고 필리프의 아들들은 스페인 뿐만 아니라 교황령 남부의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 왕국의 왕이 되었기 때문에 교황은 더더욱 프랑스의 왕을 멀리할 수 없었다. 이후 갈리아 교회주의는 종교에 관심 없던 혁명정부와 나폴레옹이 집권하면서 무너지게 되었다.[7] 이는 중세 시절에 기사인 귀족들이 칼을 차는것을 권리로 여겼는데 이 중세적 전통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8] 사실 이미 지식과 능력에서 귀족을 능가하는 이들도 많았다. 이들도 절대왕정이 잘 유지되던 시대엔 자신의 능력과 재산을 바탕으로 귀족이 될 수 있었지만 미리 진출한 부르주아 출신의 법복귀족들이 사다리 걷어차기 하면서 울분이 쌓이게 되며 프랑스 대혁명으로 분노가 제대로 폭발했다.[9] 다만 '자문회의'라는 성격은 대부분 중세 유럽의 의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10] 물론 여기에는 관세가 낮아진 것 이외에도, 영국은 수력 방적기와 방직기로 면직물을 대량생산을 하고 있는데 프랑스는 여전히 수공업 단계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도 한 몫 했다. 쉽게 말해 농산물을 팔고 공업제품을 구입하는 건 전형적인 식민지 무역이었고, 현대에서도 부익부 빈익빈으로 이어지는 구도다.[11] 포도주가 그 당시에도 프랑스산이 좋다는 인식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영국이 프랑스산 포도주만 마신건 아니다.[12] 행정구역과 세금징수 구역(제네랄리테), 군대의 관할구역(프로뱅스), 지방에 설치된 고등법원의 관할구역이 일치하지가 않았다.[13] 이러다보니 혁명 이후 의회가 헌법 제정과 함께 추진했던게 도량형 통일이었다. 이 유산이 오늘날의 미터법.[14] 나바르 왕위는 프랑스 왕이 겸했지만, 어느 정도 독자적인 행정 조직은 유지되었다.[15] 나중에 프랑스 혁명 무렵에 프랑스 정부가 통합을 위해 이러한 지역의 영지를 몰수한 것 때문에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외교 마찰이 벌어진다.[16] 당시의 매관매직을 동양권의 그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동양권은 중앙집권자가 관직을 팔고, 해임하면 관직이 다시 중앙집권자의 손으로 돌아오는 구도인데, 이 당시 프랑스의 매관매직은 A과 관직을 산 다음에 가격이 오르면 B에게 다시 팔 수도 있었다. B는 A에게서 관직을 사고, 중앙집권자에게 일정액을 주는 것으로 관직, 그리고 관직에 수반된 작위를 차지했다.[17] 물론 영국도 빚이 늘어나서 갚는데 고생했다. 7년 전쟁만 해도 영국이 승리했지만 전비조달한다고 국가 빚이 무려 1억 3천만 파운드나 되었다.[18] 차라리 옛날 봉건시대 때에는 최소한의 불문율이 있었다. 추수가 끝난 다음 떨어져 있는 이삭은 그냥 가져가도 눈을 감아준다든지 하는 수준이긴 하지만, 이 당시가 되면 이런 것마저도 모두 절도로 취급해 악형을 가하기 시작했다.[19] 사실 이건 통일 이후 본격적으로 순수주의 떠들기 전의 스페인도 마찬가지였다. 다수의 무슬림이 기독교로 개종했는데 뒤에서는 이슬람을 믿는 게 보였지만 눈감아줬고, 이들 중 상당수는 스페인 외의 유럽 땅에서 그대로 받아줬기에 이후 유럽에서 이름을 날린 자들도 많다.[20] 이건 당대의 영국도 마찬가지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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