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투안 라부아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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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투안 라부아지에
Antoine Lavoisier


파일:/image/032/2007/06/19/7f19k06a.jpg

본명
앙투안로랑 드 라부아지에
Antoine-Laurent de Lavoisier
출생일
1743년 8월 26일
출생지
[include:(틀:국기, 국명=프랑스 왕국)] 파리
사망일
1794년 5월 8일 (50세)
사망지
[include:(틀:국기, 국명=프랑스 제1공화국)] 파리 콩코르드 광장
국적
[[프랑스|

프랑스
display: none; display: 프랑스"
행정구
]]

직업
과학자
학력
파리 대학교 (졸업)
소속
세금 징수 조합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종교
가톨릭
서명
파일:Antoine_Lavoisier_Signature.svg

1. 개요
2. 생애
4. 아내 마리 안 라부아지에
5. 평가
6. 기타



1. 개요[편집]


파일:/image/011/2006/04/28/hydefan200604281621022.jpg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앙투안 로랑 라부아지에와 부인 마리
프랑스의 과학자. 학문으로서 화학을 사실상 창시한 인물로 현대화학의 아버지(le père de la chimie moderne)라 불리고 있다. 화학을 연금술과 구별하여 진정한 독립학문으로 분리해 낸 그의 업적을 화학 혁명이라 한다. 하지만 이렇게 나라에 엄청난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징세청부업자로서 당시대 세리 기준으로도 어처구니가 없을 수준의 폭리를 취했고, 이로 인해 프랑스 혁명 기간동안 혁명을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처형되어, 후에 공포정치에 부당하게 희생당한 과학자들이 복권되는 와중에도 저지른 죄가 너무 명백하여 끝끝내 복권되지 못하였다.

2. 생애[편집]


과학계의 엄친아로 그의 아버지는 당시 유명한 변호사였고 집안은 부유했으며 아버지의 영향으로 처음에는 변호사를 지망해 법과 대학에서 공부했다.

산소를 발견하여 기존의 패러다임인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 이론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질량 보존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참고로 다른 학자들도 비슷한 시기에, 혹은 더 빠른 시기에 발견한 경우[1]가 있지만 나중에 프랑스 대혁명과 아내인 마리의 홍보 활동으로 명성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프랑스의 유명한 화학자, 부유한 부르주아로만 알려져 있으나 현대의 미터법(Metric system) 제정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가 1790년 프랑스 혁명 위원회에 도량형 통일을 제안하기 이전부터 이미 영국의 공학자 제임스 와트의 요청에 의해 나름대로 인치, 피트, 엘과 같은 각 지역 및 교구별 단위를 연구하고 계량하고 있었기 때문. 1788년부터 9개의 황동 실린더로 길이와 질량을 십진법 기반으로 연구하며 본인의 개인적인 연구에도 나름대로 정리한 단위들을 사용했으며 동료 화학자들에게도 동일한 단위를 사용할 것을 권유하였다.

탈레랑 페리고르의 요청을 받아들인 프랑스 정부는 다시 해당 연구를 진행할 연구기관을 파리 과학 아카데미로 정했는데, 라부아지에는 1785년부터 파리 과학 아카데미에서 이사직을 맡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때부터 도량형 통일은 제임스 와트가 개인적으로 요청한 것이 아닌 국가지원 사업이 되어버린 것. 라부아지에와 기타 소속 연구원들은 천문학자 중 한 명은 파리 북부 됭케르크로 보내고 한명은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보내 프랑스 남부 지역에서 다시 만나도록 하여 북극에서 파리 노틀담 성당을 통과하여 적도까지 가는 길이의 천만분의 1단위를 검증하도록 지시한다. 이 단위가 바로 오늘날 1미터이다. 장 들랑브르와 피에르 메생으로 이루어진 원정대는 1년 여행을 예상했으나, 강도도 만나고 골절상을 입으면서 총 7년에 걸친 연구를 진행한다. 그러나 그들이 파리로 다시 복귀했을 때 라부아지에는 이미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혁명 정부로부터도 존중을 받았으며 위험에 처한 동료들을 구해내는 공헌을 하기도 했지만, 유명한 징세청부업자였기 때문에 공포 정치 시대에 체포된다. 죄목은 당연히 불법 징세. 그 외에도 혐의 중에는 담배에 해로운 물질을 첨가하여 사람들을 아프게 했다는 것도 있었는데 이건 증거가 없어 무죄 판결. 아무튼 징세 청부업자로 얻은 악명 때문에 라부아지에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당시는 개념 박힌 당원들이 혁명 진행에 대해서 싸우던 상황이었고, 걸핏하면 시민군 사령관이 의회에 들어가서 총으로 협박하던 상황이었으니 더욱...

결국 이런 이유 때문에 1794년 5월 8일 기요틴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와 같이 일했던 세금 징수원들과 같이 처형되었는데 조용히 "유언은 아내에게 편지로 남겼다"면서 차분하게 죽었다고 한다. 죽기 전에 아내에게 보낸 편지로 아직도 못다한 실험이 있는데...하는 아쉬움과 같이 자길 외면한 동료들에 대한 원망, 그리고 잘 살라면서 아내를 걱정하며 사랑한다는 등 모든 마음을 정리하여 남겼다. 그의 죽음에 수학자 조제프루이 라그랑주"그의 머리를 베어버리기에는 일순간으로 족하지만, 똑같은 머리를 다시 만들려면 100년도 더 걸릴 것이다."라고 애통해했다고 한다. 그리고 100년 뒤 태어난 사람은 물리학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3. 징세청부업자[편집]


라부아지에는 부친의 의도로 신분 상승을 노려 세금 징수 조합에 가입해서 징세청부업자로 활동했다. 때문에 대중들의 미움을 받았고, 프랑스 대혁명의 공포정치 때 처형되었다.

징세청부업자에 대한 대중적인 혐오는 역사가 깊다. 성경에 등장해서 모든 이들에게 욕먹는 직업 세리가 바로 이 징세청부업자이다.[2] 성경에도 언급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그 기원은 고대 로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징세청부업자는 국가에 소속된 징세 공무원이 아니라 민간 업자였다. 구체제 당시의 징세청부업은 일단 국왕에게 목돈을 빌려준 다음 돈으로 돌려받는 대신 일정 기간 일정 지역의 세금 징수권을 받아내는 일이었다. 세금을 얼마나 거두느냐는 거의 마음대로 정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들이 거두는 세금은 국왕 직할지에 비해서 적어도 2배가 넘었다.

라부아지에는 이것으로 어지간한 귀족 못지 않은 고소득을 올렸는데 연수입으로 최대 15만 리브로의 수익을 기록한 적이 있다.[3] 그가 다이아몬드를 사서 태워버리는[4] 기행을 펼치거나 개인 실험실을 구입하는 등의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근간이었다.[5] 그는 재산을 아낌없이 연구에 썼기에 그는 징세청부업자들 중에 의외로 재산이 많은 편이 아니었고, 검소한 생활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서민 기준으로는 많은 재산을 모았고 값비싼 기구들로 실험을 하는 행위 자체가 시민들에게는 사치로 비춰졌다.

라부아지에가 특히 많은 미움을 사게 된 것은 그가 파리를 드나드는 통행세를 징수하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6] 라부아지에는 통행세 징세활동에 질량 보존의 법칙을 응용하여, 파리 전체를 성벽으로 둘러싸고 통행세를 걷으면 확실하게 세금을 걷을 수 있다는 이론을 실천에 옮겼다. 돈은 (사람들이 단체로 미쳐서 화폐를 태워버리거나 내부에서 새로 만들어내지 않는 이상) 소멸하거나 생성되지 않기 때문에 파리를 나가거나 들어오는 사람이 없다면 파리 내부의 돈의 양은 일정하다. 그러므로 파리로 들어오는 돈의 양이 파리 전체의 수입, 파리에서 빠져나가는 돈의 양이 파리 전체의 지출로 볼 수 있다. 이런 논리는 물리에서 널리 쓰이는 연속방정식(continuity equation)이나 가우스 법칙과 상통한다. 또한 파리 전체를 감시하는 것보다는 파리 경계만 감시하는 것이 월등히 간편하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만 좋은 것이 아니라 실용적이기도 하다. 현대에는 외화송금을 감시하고 과세하는 데 정확히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이렇게 되면서 통행세 탈세가 사실상 원천 봉쇄되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그를 향한 대중들의 분노 또한 높아졌다.[7]

그러니 프랑스 혁명 기간에 대중들의 미움을 받고 있던 징세청부업자들이 제일 먼저 처형대에서 몰살당하기 시작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혁명정부는 세금을 거두는 것 자체는 범죄가 아니고 오히려 정부에게 필요한 공무를 대행하는 것이었기에 정말 필요한 액수의 세금만 거둔 것으로는 죄를 묻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징세청부업자 중에서 털어서 먼지가 안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혁명은 갈수록 과격화되어 마침내 자코뱅당이 정권을 잡고 악명높은 공포정치를 실시하게 되었다. 혁명재판소에서는 라부아지에의 연수입 15만 리브르 중 10만 리브르, 즉 전체 수입의 2/3가 부당이득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자코뱅당은 모든 위법 행위에 대해 사형을 집행한다는 방침을 천명했고, 공포정치가 극에 달했던 1794년 5월 라부아지에는 다른 징세청부업자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그로부터 두 달 후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당하며 공포정치는 막을 내렸다.

이를 두고 야사에서는 혁명 지도자인 장 폴 마라가 원래 과학계에 진출하고 싶다는 꿈이 있었으나 심혈을 기울여 쓴 논문이 라부아지에에게 까여서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다는 루머가 있는데, 마라는 의학 연구자로 라부아지에와 계통이 달랐고 아무리 서슬 퍼런 국민공회 시절이라지만 혁명가의 개인적인 원한을 갚기 위




한 사람을 처형하는 것은 마라에게도 큰 부담이었다. 그리고 징세업자들은 프랑스 민중들의 공적이었고, 라부아지에는 그 중에서도 가장 대중의 눈에 주목받기 쉬운 통행세 징수자로서 혁명에 직접적으로 불을 붙였으니 목이 잘려서 죽을 이유는 차고도 넘쳤던 셈이다.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등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재판관 중 수석 재판관인 코피나르는 "공화국은 과학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혁명은 신속한 재판을 원하고 있다!"고 말하며 결국 사형선고를 내렸다. 또는 "우리에겐 과학자가 필요하지, 탐관오리는 필요없다!"라고도 한다. 이쪽이 더 말이 된다는 의견이 있는데, 과학자들 중에서도 프랑스 혁명을 지지하고 중용된 인물도 있었기 때문이다. 위에 서술한 몽골피에 형제만 해도 지금은 발명가로 알려졌지만 당시에는 새로운 과학을 만든 과학자로서 우대받았고 위에서 언급한 자크 사를도 혁명이 한창인 1795년에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추천되어 나중에는 국립공예원(Conservatoire national des arts et métiers, CNAM) 물리학 교수까지 지내는 등 혁명정부에서 상당히 우대받았다.

애초에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부르주아 계층은 과학에 호의적이었다. 당시 부르주아 계층 사이에 자리잡은 계몽사상과 자연과학은 상호 간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따라서 부르주아 계층은 자연과학과 친숙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부아지에의 행적은 도저히 눈감고 넘어가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였다.

4. 아내 마리 안 라부아지에[편집]


라부아지에 사후 그의 부인인 마리 안 라부아지에가 남편의 유고를 정리했다. 지금 그의 업적이 알려진 것은 마리의 공로가 컸다. 금슬이 좋아서 같이 실험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이다. 마리는 남편보다 15살 연하로, 라부아지에가 28살, 마리가 13살 때 결혼했다. 물론 그 시절에는 이 정도 나이차 결혼은 어느 국가나 흔했다.

라부아지에는 1771년 어려움에 처한 13세 여자아이를 보살피면서 낭만적 성향을 보여주었다. 친구인 자크 폴즈의 딸인 여자아이가 어마어마한 부자에다 괴물같이 음침한 남자와 강제결혼을 해야 하는 처지였다. 폴즈는 라부아지에의 직장 상사이기도 했으므로 그의 딸 마리 안에게 도움을 줄 만큼 잘 아는 사이였다. 마리 안을 돕는 방법은 그 아이와 결혼해주는 것이었다.

그는 결혼 직후, 공동 농장에서 폴즈를 보좌하며 지루한 회계 일에 파묻혀 지내야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매우 성공적인 결혼이었다. 공동 농장은 진짜 농장 형태가 아니었다. 루이 16세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세금을 징수하던 독점 조직이었다. 세금을 내고 차익이 생기면 그때서야 농장 주인들은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공동 농장은 이익이 많이 남는 사업이었으며, 그런만큼 부패도 심했다.

데이비스 보더니스, 김민희(옮긴이), E=mc2, <생각의 나무>, 2001, pp. 50-51

함께 세금 징수일을 하던(나중에 같이 처형됨) 자크 폴즈의 딸로 결혼 전 이름은 마리 안 피에레트 폴즈였다. 50살(!) 먹은 남자 다메르발(d'Amerval) 백작의 신부가 되게 생기자 이를 막으려던 자크가 동료들에게 딸과 결혼해줄 걸 요청해 이를 받아들인 라부아지에가 신부로 맞이했다. 일종의 정략결혼이었던 셈이지만, 같이 생활한 이야기를 듣다보면 이상적인 부부상으로 여겨질 정도로 금슬이 좋았다. 실험실에서 같이 실험하는 게 연애질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마리는 남편의 사형을 반대하는데 가담하지 않은 남편의 친구, 동료들과는 평생 연을 끊었다고 한다. 뒤늦게 그의 시신을 다시 묻으면서 당시 참석한 화학자 앙투안 푸르크루아(1755~1809)는 라부아지에는 화학의 신이었다며 뒤늦게 애도를 표했지만 그 자리에 있던 아내 마리는 말 그대로 무시하고 대꾸도 안 했다. 그도 라그랑주처럼 외면했기 때문. 위의 라그랑주도 라부아지에가 사형판결을 받을 때 쥐죽은 듯 있었던지라 저 말을 하고도 마리에게 백안시당했다고 한다. 라그랑주로서는 조금 억울한 면도 있었을 것이, 라그랑주는 이탈리아 출생이라는 빌미로 프랑스에서 추방당할뻔한걸 라부아지에의 비호로 프랑스에 남을 수 있었다. 은인인 라부아지에를 외면한 모습으로도 보이지만 보호자였던 라부아지에까지 처형당하는 상황에서 본인의 목소리를 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라부아지에의 죽음을 결사반대하고 자비를 요청한 사람은 대부분 해외에 있거나 외국인, 그것도 영국이나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출신이라서 혁명 정부조차도 쉽게 잡아들이거나 죽일 수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영국 화학자 헨리 캐번디시는 라부아지에를 살려주면 거액으로 보상하겠다는 요청을 했었다. 물론 이 요청은 무시당했지만 부유한 귀족이자 화학자로 명성이 자자한 캐번디시는 이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라부아지에를 영국으로 망명시키는 방안까지 기획했었다고 한다.

참고로 캐번디시는 데번셔 공작 집안 태생이었고 외할아버지는 켄트 공작으로 양가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았다. 그러다 보니 권력과 재산은 상당했지만, 그는 독신으로 살면서 자식도 남기지 않고 죽었다. 대신 화학자들에 대한 교류와 투자, 도움을 엄청 줬기에 라부아지에를 그가 맡았더라면 영국 과학계의 역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캐번디시는 산소를 발견하고[8] 지우개를 발명한 과학자 조지프 프리스틀리가 프랑스 혁명을 지지하다가 왕당파에게 살해당할 위기에 처하자 그를 미국으로 망명시킨 적도 있었다. 이를 볼 때 캐번디시가 라부아지에를 구하려고 한 것은 딱히 정치적인 의도가 없이 정말 동료 과학자를 구하겠다는 순수한 의도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가 죽은 뒤 혁명정부는 모든 재산과 자료까지 압수하여 다 없애려고 했다. 하지만 몇 달 안 가서 자코뱅 정권이 무너지면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마리도 남편처럼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 남편이 죽고 한 달도 안 돼 6월에 구속되어 교도소에 갇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코피나르와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되고 무죄 판결을 받아 두 달 만인 8월 17일에 풀려났다. 다만 혁명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과격했던 자코뱅당만 자른 것이었기에 라부아지에의 유죄는 뒤집어지지 않아 결국 부당이득으로 취득한 재산은 전부 몰수됐고, 다만 기록과 자료만 1796년 마리에게 다시 돌려줬다. 그리고 마리는 이걸 세상에 알리는 데에 남은 평생을 바쳤다.

나중에 공동 장례식으로 아무렇게나 묻힌 라부아지에의 유해도 다시 찾아서 제대로 장례식을 치렀는데 이때 3천 명이 넘는 전 세계 화학자들이 참석했다. 물론 이 자리에 라그랑주와 푸르크루아를 비롯한 이들도 참석했지만 앞서 말한 대로 마리는 대꾸도 하지 않고 무시했으며 그들이 한 남편의 연구자료 및 기록에 대한 공동 연구 제의를 분노어린 얼굴로 즉각 거부했다. 이때 더 이상 남편의 자료를 욕심내지 말라는 말을 한 것이 이들에게 남편이 죽고 난 다음에 유일하게 한 말이었다고 한다.

그런 마리를 위로하던 사람이 미국 출신으로 특이하게 유럽으로 와서 독일에서 백작 작위를 받은 미국 화학, 이공학자인 벤저민 톰슨(1753~1814)이었다. 벤저민 톰슨은 간첩 혐의를 받아서 유럽으로 망명했다 한다. 수여받은 백작위의 이름이 "럼퍼드 백작"이라서 럼퍼드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마찰로 열이 만들어지는 것을 증명한 "럼퍼드의 대포 실험"처럼 말이다. 참고로 이 사람이 남긴 유산으로 만든 학교 중에 하나가 웨스트포인트. 결국 그와 1804년에 재혼하게 되었지만 4년 만에 이혼한다. 톰슨은 마리에 대해 여전히 전 남편을 잊을 수 없었기에 더 이상 같이 살 수 없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마리는 전처럼 그대로 첫 남편 라부아지에를 세상에 알리면서 살아가다가 1836년 향년 78세로 라부아지에를 따라갔다. 이런 기록을 보면 마리는 정말이지 진심으로 라부아지에를 깊이 사랑했던 모양이다.


5. 평가[편집]


본인뿐만 아니라 후대에 끼친 영향 등을 생각해볼 때 엄청난 과학자 중 하나. 거꾸로 산소나 화학 비슷한 이론을 발견한 다른 나라의 학자들은 묻히고 라부아지에의 이름만 남았으니, 허무한 최후를 제외한다면 시대의 덕을 봤던 과학자라는 평가도 가능하다.

라부아지에의 도덕적 자질 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자코뱅당이 몰락한 이후에도 라부아지에는 복권되지 않았으며, 정부에서 압류한 연구결과를 마리 라부아지에에게 돌려주는 데 2년이 걸렸다는 것을 고려하면 온건파 내부에서도 라부아지에에 대해 이견이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에 대한 도덕적 평가는 징세청부업에 대한 시대적 인식과 혁명 과정에서의 광기, 시대적 배경과 인식 등 여러 사안을 고려해야 하는 작업이다. 국왕 입장에서 징세청부업자는 자신에게 금융지원을 해주는 고마운 사람이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징세청부업자는 국왕에게 카드 할부를 제공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카드 할부나 대출을 막아버리면 급전이나 목돈 투자가 필요할 때 실행할 수가 없으니, 민중의 증오에도 불구하고 당시 국왕에게는 징세청부업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왕이 정한 것보다 훨씬 많은 세금을 떼어 이득을 취했던 라부아지에를 비롯한 당시의 징세청부업자들이 민중이 가난에 신음하는 와중에 부당이득을 취해 사치(라부아지에는 그 사치가 과학 연구였다는 변명거리라도 있지만)를 부렸던 것은 사실이다.

Why?, 앗! 시리즈 등 과학 학습 만화에에서 라부아지에의 도덕적 문제에 대한 언급은 잘 나오지 않는다. 보통 그가 징세청부업자였다는 것을 짤막하게 소개하거나, 그 직업때문에 처형당했다는 것을 소개하는 수준에서 그친다.


6. 기타[편집]


한편 프랑스의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후원자였던 혹은 직접 과학연구를 하던 귀족들이 프랑스 혁명때 줄줄이 처형당하자 스폰서가 끊긴 프랑스의 과학자들은 후원자들을 찾아서 영국오스트리아 등지로 넘어가거나, 연구자금이 없어서 그냥 조용히 지내게 된다. 그 당시 과학자들은 라부아지에처럼 부유한 부업을 갖고 있지 않는 이상 과학자 후원을 취미삼는 귀족들 밑에서 일하는 게 보통이었다. 라부아지에의 제자 중 하나인 뒤퐁이 대표적으로 미국으로 망명길에 오른 후 엄청난 화학 회사를 차려 버리는데, 그게 바로 세계에서 2번째로 큰 화학 회사이자 합성고무, 나일론, 테플론 등을 개발한 듀폰 그룹.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 따르면 라부아지에의 처형에는 위의 초상화를 그린 다비드의 복수심이 개입되었다고 한다. 항목 참조.

파일:라부아지에 물 분해 실험.jpg
을 매우 높은 온도로 가열하면 수소산소로 분해된다는 것을 알아냄으로써 물, 불, 흙, 공기가 세상의 모든 물질을 만드는 기본 성분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깨서 물이 원소가 아님을 증명하였다.

사람은 목이 잘려도 몇 초간 의식이 남아있고, 라부아지에가 자신이 사형당하는 순간 친구에게 부탁해 '내가 참수당한 이후에 내 의식이 얼마간 남아있는지'를 실험해달라 했다는 괴담이 유명하다. 실시간 베스트 갤러리에 의해 라부아지에 괴담이 대중들 사이에 급격히 퍼져나갔으나, 이는 과학계의 유명한 괴담으로 사실이 아니다. 라부아지에에 관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전기를 포함해 어떠한 역사기록에도 관련 실험에 관한 내용이 없다. 디스커버리 채널의 TV쇼에서 라부아지에 전설을 처음으로 꺼낸 의사 로버트 핑크도 이 전설을 자신의 친구한테서 들었다고 고백했으며, 그 친구도 "책에서 읽은 적이 있지만 어떤 책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밝혔기에 그저 신빙성 없는 괴담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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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표적인 경우는 러시아의 과학자이자 시인이었던 미하일 로모노소프(1711-1765)로, 독일 유학파 출신으로 많은 학문에 통달하여 오로라에 대한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으나 당시 러시아는 정치/경제/문화적으로 서유럽에 비해 뒤떨어져 있었기에 그의 발견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2] 당시기 힘들다고 여겨지던 직업 투탑 중 하나였다. 참고로 나머지 하나가 바로 창녀였으니, 얼마나 이미지가 안 좋았을지 알 만하다.[3] 이것이 오늘날 화폐가치로 200억원이 넘는다는 주장도 있지만, 프랑스 대혁명 당시 아시냐 지폐 파동으로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발행해 화폐가치가 수백분의 일로 떨어졌다. 하지만 당대 최고액의 연금을 상속받은 라파예트 후작의 1년 연금소득이 12만 리브로였으니 귀족 못지 않은 수입을 올린 것은 분명하다.[4] 그냥 다이아몬드를 태우기만 한 게 아니라, 그걸 위해 거대한 렌즈를 주문하고, 그 렌즈를 지탱하기 위해 2층버스만한 구조물을 설치해서 다이아몬드를 태워버렸다. 그리고 나서 다이아몬드가 탄소의 결정체임을 입증했다.[5] 이러한 점 때문에 라부아지에는 과학에는 재정적 요소(연구 지원금 등)도 분명히 영향을 끼친다는 주장의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6] 통행세는 중세 이래 봉건 시스템에서 가장 중요한 세금 수입원이었다. 중세 후기에 그 유명한 상파뉴 정기시가 호황을 이루게 된 것은 상파뉴 백작이 통행세를 폐지하자 유럽의 모든 상인들이 상파뉴로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상파뉴 백작은 통행세를 걷지 않더라도 지역 산업의 활성화로 세금 수입이 증대될 것이라고 예측했고 그의 예측은 맞아들었다. 그러다가 훗날 상파뉴를 획득한 프랑스 국왕이 여기에 통행세를 다시 부과하자마자 상파뉴 시장은 망했다.[7] 쟈크 샤를(샤를의 법칙을 만든 과학자)도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라고 말하기도 했다.[8] 캐번디시보다 먼저 산소를 발견했지만 스웨덴 출생이라 잘 알려지지 못한 카를 셸레라는 사람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산소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