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버트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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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국서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베르트 공자
Prinz Albert von Sachsen-Coburg und Gotha


파일:255131-1558086052.jpg

이름
프란츠 아우구스트 카를 알베르트 에마누엘
(Franz August Karl Albert Emanuel)
출생
1819년 8월 26일
독일 연방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국 로제나우 성[1]
사망
1861년 12월 14일[2] (향년 42세)
영국 잉글랜드 버크셔 윈저 윈저 성
배우자
빅토리아 여왕 (1840년 결혼)
자녀
빅토리아, 에드워드 7세, 앨리스, 알프레드, 헬레나, 루이즈, 아서, 레오폴드, 베아트리스
아버지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
어머니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루이제 공녀
형제
에른스트 2세
종교
개신교
서명
파일:앨버트 공 서명.svg

[군사 경력]
명예 계급
원수 (영국 육군)

1. 개요
2. 작위
3. 생애
3.1. 가계
3.2. 유년기
3.3. 결혼
3.4. 국서로서
3.5. 가정 생활과 자녀
3.6. 정치 관여
3.7. 말년과 사망
4. 가족 관계
4.1. 조상
4.2. 자녀
5. 기타



1. 개요[편집]


영국빅토리아 여왕의 부군(국서)이자 에드워드 7세를 비롯한 빅토리아의 자녀들의 부친. 본명은 프란츠 알베르트 아우구스트 카를 에마누엘(Franz Albert August Karl Emanuel)로, 미들 네임인 '알베르트'의 영어식 '앨버트'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아내인 빅토리아 여왕의 동갑내기 외사촌이기도 하다.


2. 작위[편집]


파일:Coat of Arms of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svg
문장
  •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알베르트 공자 저하 His Highness Prince Albert of Saxe-Coburg-Saalfeld (1819년 8월 26일 ~ 1826년 11월 12일)
  •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베르트 공자 저하 His Highness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1826년 11월 12일 ~ 1840년 2월 6일)
  •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베르트 공자 전하 His Royal Highness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1840년 2월 6일 ~ 1857년 6월 25일)[3]
  • 부군 전하 His Royal Highness the Prince Consort (1857년 6월 25일 ~ 1861년 12월 14일)


3. 생애[편집]



3.1. 가계[편집]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국에른스트 1세와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루이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앞에 '작센'이 똑같이 붙는 데서 알 수 있듯, 그 친가와 외가는 둘 다 작센을 통치한 베틴 가문의 분가로, 그 중에서도 장자 에른스트 계열[4]이었다.

차자 집안인 알브레히트 계열이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선출되기도 하고 선제후에서 국왕으로 승격되며 잘 나간 건 후대의 일이고, 원래 베틴 가문의 영지였던 작센과 튀링겐은 라이프치히 조약으로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의 두 아들 에른스트와 알브레히트 3세가 반분해 다스렸다. 에른스트의 후손을 에른스트 계열, 알브레히트의 후손을 알브레히트 계열으로 부르는데, 에른스트 계열의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슈말칼덴 전쟁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게 패배하고 선제후 작위를 노려 카를 5세에게 붙었던 알브레히트 계열의 6촌 동생 모리츠에게 선제후 작위와 영지 대부분을 빼앗겼고 줄 잘 서기의 필요성. 이후 분할 상속을 택해 수시로 영지가 분리되었다가 통합되곤 했기 때문에 하나의 강력한 가문으로 성장하지 못 하고 중소영지를 통치하는 중소가문의 집합으로 영락한 상태였다.[5]

앨버트 공의 부모가 결혼할 당시 에른스트 계열은 크게 네 가문[6]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외가인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작가가 남자 후손이 없어 단절이 예정된 상태에서[7], 베틴가문 에른스트 계열의 영지 재조정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후계자와 작센 알텐부르크의 딸을 정략 결혼 시킨 것. 결국 1826년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국 계열이 단절되면서, 친가인 작센코부르크잘펠트는 영지 중 비교적 작은 영지인 잘펠트를 다른 친척에게 넘기고, 대신 처가로부터 고타를 물려받아 영지를 재조정, 작센코부르크고타로 통치령명이 변경된다. 그리고 에른스트 3세는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에른스트 1세가 된다.

그리고 카페 왕조가 프랑스의 왕조로 자리잡으면서 대대로 장자가 왕위를 물려받고, 그 이하의 아들들은 각 지역의 영지를 얻어 분가로 독립해나가게 되었다. 즉 '발루아' 지역의 영지를 수여받은 샤를 카페의 후손들은 이후 자신들을 '발루아 가문'이라 일컫게 되고, '부르봉' 지역 영지의 상속녀와 결혼한 로베르 카페의 후손들은 자신들을 '부르봉 가문' 이라 지칭하게 된 것이다[8] 그런데 본가인 카페 왕조가 단절된다면? 분가해 나간 가까운 친척이 프랑스 왕위를 상속받게 된다. 결국 프랑스의 왕조는 카페 왕조-> 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 순서로 바뀌었는데, 이 세 왕조의 국왕들 모두 개인의 성으로 치면 '카페' 이다. 부르봉 왕조의 루이 16세를 보더라도 프랑스 혁명 당시 재판을 받을때는 '시민 루이 카페'로 호명되었던 것. 동아시아씩 성씨 개념으로 친다면 같은 성씨에서 가 다른 것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이 프랑스만의 사례는 아니고, 장미 전쟁으로 유명한 랭커스터 왕조요크 왕조역시 플랜태저넷 왕조의 분가로써 랭커스터요크 영지에서 따 온 왕조명이다.
그리고 작센의 통치 가문이자 독일의 명문가로 앨버트가 속한 베틴 가문도 많은 분가가 파생되었고, 특히 그나마 왕권 강화를 통하여 중앙집권화 수순을 밟은 프랑스나 영국과는 달리 분할상속에 의한 소규모 영방국가들이 분립하고 게르만족 특유의 분할 상속이 오래 남아있던 독일의 특성상 이러한 분가들의 파생관계가 훨씬 복잡했다. 이 문서를 보면 역덕의 머리도 아프게 만드는 복잡한 분가들의 명칭이 대략 정리되어 있는데, 중요한 것은 작센의 통치가문인 베틴 가문 분가들의 영지는 당연히 작센 지역에 몰려있으므로 '작센'이 앞에 붙고, 코부르크, 알텐부르크, 고타, 아이제나흐와 같은 각 영지의 이름들이 그 뒤에 붙어서 가문의 이름이 만들어진다는 것. 당연히 이들 가문의 구성원들의 성은 모두 '베틴'이지만, 한 지역을 다스리는 통치자의 가문은 개인의 성씨가 아닌 영지명을 자신의 칭호로 사용한 것이다.
  • 많은 예외와 변수가 있으니 성급하게 일반화해서는 안되지만, 유럽의 통치가문들을 보면 대체로 사람(창시자)에서 따 온 이름을 가진 가문이 역사가 긴 명문가로써 본가이고, 지역에서 따 온 이름을 가진 가문은 상대적으로 이후에 나타난 분가들인 경우가 많다. 위그 카페카페 왕조, 류리크류리크 왕조, 작센의 베틴 가문, 폴란드피아스트 왕조, 헝가리의 아르파드 왕조 등이 좋은 예. 이런 왕조들은 대체로 그 성립이 10~11세기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이후 많은 왕가들의 시조가 된 가문들이다. 이에 비해 지역명에서 따 온 가문들은 중세 성기~후기 이후 영지를 받아 분가한 가문들인 경우가 많다. 이런 현상은 유럽사의 특수성에 의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인데, 중세 초중기까지 분할상속이 대세라 영토가 잘게 분할되는 경우가 많았고, 중세 후기~근세에 접어들기 이전까지는 봉건제 전통 역시 강했으며, 문화권 내에 동급의 통치 가문들이 여럿 있어 이들 사이에 통혼이 잦았던 점, 그리고 축접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왠만해서는 이혼도 인정받기 힘든 철저한 일부일처제로 인하여 한 가문의 단절이 비교적 쉽게 일어나던 점 등으로 인하여 통치가문 내에서 분가의 발생 및 정치적 의도의 통혼, 이로 인한 방계상속등이 자주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 물론 지역명에서 유래한 가문 중에도 통일 이탈리아사보이아 가문이나 통일 독일호엔촐레른 가문 같이 오랜 역사를 지닌 가문들도 있다.

비록 작은 가문이었으나 베틴 가문은 작센의 통치가문이고, 에른스트 계열은 그 친척으로 최초의 신교도 제후 집안으로 종교 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의 보호자 작센 선제후 '현자' 프리드리히 3세의 후손[9]이며, 슈말칼덴 동맹의 맹주이며 카를 5세의 적대자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의 직계 후손이다. 그러므로 후대에 개종한 신교도 통치 가문에서 한수 접어주며 존경받는 뿌리가 깊은 가문이었기에 작은 통치령에 비해 제법 큰 나라의 군주들과도 통혼이 가능해졌다. 선대 조상대부터 신교도 제후인 네덜란드 오라녜, 호엔촐레른, 헤센카셀 및 다름슈타트, 하노버, 팔츠계 비텔스바흐 가문과 통혼했고 빌헬름 1세의 황후 아우구스타도 베틴 가문의 에른스트 계열인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공국 출신.[10] 게다가 앨버트 공의 아버지 대에서 숙부, 고모, 사촌들이 러시아[11], 포르투갈[12], 영국 왕가[13]와 혼사를 맺는 등, 운이 트이면서 앨버트 공의 운명도 달라지게 된다. 앨버트 공이 결국 대영제국 여왕의 부군으로 간택된 배경도 각주에서 설명했다시피 훗날 벨기에 국왕이 되는 숙부 레오폴드 1세샬럿 공주와 결혼했고, 고모 빅토리아 공녀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와 결혼해 빅토리아 여왕을 낳으며 연달아 영국 왕실과 혼사를 맺었기 때문.

3.2. 유년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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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어린 시절은 매우 불행했다. 앨버트의 부모 에른스트 1세와 루이제는 영지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문 내의 결정에 따라 정략결혼했던 탓에, 차남인 앨버트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각자 애인을 두고 사실상 별거에 들어간 상태였다.

그러다가 루이제의 정부 중 한 명이 유대인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안그래도 손절 각 재고 있었던 에른스트는 이 사실이 밝혀지자마자 공식적으로도 루이제와 이혼하고 그녀를 쫓아낸다. 결국 어머니 루이제는 파리에서 쓸쓸하게 죽고 에른스트 1세는 두 아들이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것은 물론, 장례식에 참여하는 것도 금지해, 두 아들은 부모의 이혼 이후 영영 어머니를 보지 못했다.

당시 어린 두 아들에게 이 사건은 큰 트라우마로 남았으며 장남 에른스트 2세는 여자와 결혼에 대한 불신에 사로잡혀 방탕한 생활을 하다 성병에 걸려(...) 후사를 얻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앨버트는 반대로 나는 아버지처럼은 되지 않을거다.라고 다짐했다.


3.3. 결혼[편집]


1836년 형 에른스트 공세자(훗날의 에른스트 2세)와 함께 고모 켄트 공작부인을 만나러 간다는 핑계로, 영국을 방문해 고종사촌이자 당시 켄트의 공녀였던 빅토리아와 사실상 첫 맞선을 보았다. 처음 빅토리아가 마음에 들어했던 사람은 유쾌하고 명랑한 성격의 에른스트였지만 미남미녀를 너무 대놓고 좋아하는 것으로[14] 유명했던 빅토리아는 얼마 못 가, 자신의 일기장에 "푸른 눈에 아름다운 코, 하얀 치아" 등 온갖 미사여구를 늘어놓았을 정도로 대단한 미남이었던 앨버트 공에게 반해버렸다.[15] 게다가 함께 지내면서 앨버트 공이 겸손하고 뛰어난 인품까지 갖춘 인물임을 알게 되자, 여왕은 즉위 3년 뒤 직접 청혼했다.[16]

낭만적이고 감성적이었던 빅토리아는, 앨버트가 청혼을 받아주자 너무나 기쁜 나머지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천사 같은 앨버트에게 사랑받는 느낌은 인간의 언어로는 결코 표현할 수 없다."고 일기에 적었을 정도였지만, 막상 앨버트는 "빅토리아는 나에게 너무 잘해주고 친절해요. 그녀가 나에게 보여주는 사랑을 생각하면 난감할 때가 있어요."라고 형에게 편지를 썼다고. 심지어 여왕의 시녀조차 결혼 첫날밤을 보낸 직후의 부부에 대해, 여왕은 앨버트에게 깊이 빠져 있지만 앨버트는 행복하지 않은 것 같았다고 증언해 잠시나마 입장이 곤란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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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부부생활은 주로 앨버트 쪽이 인내하는 편이었다고 한다. 처가살이하는 데릴사위라는 입장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앨버트의 성격이 진중하고 이성적이었던 반면에, 빅토리아 여왕은 고집불통에 매우 불 같은 막가파적인 성격이었기 때문. 부부 싸움은 주로 사소한 사건에도 자주 성을 내곤 했던 빅토리아의 신경질로 시작되었다. 이때 앨버트가 전형적인 독일인답게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논리로 빅토리아의 잘못을 열거하며 가르치려 들거나 아니면 아예 입을 꾹 닫고서 그러려니 하는 무심한 태도를 보이면 여왕은 점점 스팀이 오르다가, 결국엔 참다 못해 이리저리 도망다니는 앨버트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짜증을 쏟아부었다가 나중에는 도저히 참지 못한 앨버트가 그만하라고 꽥 고함을 지르거나 뛰쳐나가 버리는 패턴의 반복이었다고.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부부싸움은 거기서 거기인 모양이다.

게다가 주치의들조차 여왕이 할아버지 조지 3세앤 여왕 처럼 하노버 왕조의 광기를 물려받아 피에 굶주린 간악하고 잔악한 정신이상자가 되는 게 아닌가 걱정했을 정도로, 빅토리아 여왕이 한 번 화가 났을 때 부리는 성질은 일반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나마 앨버트쯤 되는 보살급 멘탈이니 그 포악한 성격 감당하고 산다는 게 당대에도 이미 중론.

그러나 이런 더럽고 변덕스러운 성미와는 별개로 일단 흥분이 가라앉으면 상대의 말이 맞고 자기가 너무 지나치게 화를 냈다는 걸 인정하며, 먼저 다가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고 화해를 청하는 쪽도 주로 빅토리아였다고 한다. 하루는 대판 싸운 앨버트가 단단히 삐져 자기 방에 틀어박혀 문을 잠가버리자 빅토리아가 문을 열 것을 명령하며 첫 번째로 "영국의 여왕이에요.", 두 번째로 "빅토리아입니다."라고 했을 때는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빅토리아가 다시 노크하며 "당신의 아내예요."라고 말하자 앨버트가 기쁘게 문을 열었다는 일화는 유명한 에피소드.

빅토리아 여왕은 근세 여성 군주의 한계상, 군주임에도 여느 여염집 아낙처럼 부군에게 순종하고 권력을 공유해야 하는 게 싫다는 이유로 엘리자베스 1세처럼 독신으로 살고 싶다고 처녀 시절 누차 언급했을 정도로 의지가 강하고 독립적인 여성이었지만[17] 앨버트와의 결혼 기간이 길어지면서 남편을 깊이 신뢰하게 되었고, 종국에는 완전히 앨버트 공에게 의존하는 얌전하고 온순한 성격으로 변해버렸다. 비록 여왕 본인이 내색은 안 했지만 스스로도 자신의 결함있는 성격을 알고 이를 묵묵히 받아주며 보완해 주는 앨버트에게 큰 감사함을 느끼게 된 것이다. 심지어 딸 빅토리아에게 보내는 편지에 "앨버트가 하지 말라고 하면 리본 하나라도 절대 함부로 매지 않았다."고 자랑스럽게 썼을 정도. 다만 빅토리아 여왕은 앨버트에게 심적으로 의존하는 것과는 별개로 여전히 매우 독립적이고 강인한 여성이었고 자신의 의지대로 통치했다.[18]


3.4. 국서로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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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만의 '여왕의 부군'[19]으로서 여러 선례를 스스로 만들어야 했으므로 고생이 심했다. 앨버트 이전에 앤 여왕의 부군으로 덴마크의 왕자였던 컴벌랜드 공작 조지가 있기는 했지만 그는 앨버트와 달리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앤 여왕에게 살아있는 후계자를 만들어주는데도 실패하면서 공기급의 존재감을 과시했던 데다[20] 아내가 여왕이 된 지 6년 만에 사망한 탓에 별다른 선례가 없었기 때문.

또한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결혼 초기에는 경계의 대상이 되어 꽤 고독했다고 한다. 숙부 레오폴드 1세가 빅토리아 이전에 영국의 왕위 계승자였던 샬럿 공주와 결혼해 벼락출세를 노린다는 험담을 들은 것처럼, 그도 여왕의 재산을 탐하고 여왕을 조종해 영국을 지배하면서 모국 독일의 이익에 충실하려 한다는 근거 없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여왕과의 약혼 발표가 나자마자 영국 대중들 사이에서는 "새신랑은 의심의 여지 없이 뚱뚱한 영국 여왕의 두툼한 돈지갑을 노리고 왔노라"라고 앨버트를 조롱하는 발라드가 대유행을 했을 정도.

법적 지위를 부여받는데도 앨버트는 푸대접을 받았는데 결혼 후 17년 뒤인 1857년에야 간신히 '여왕의 배우자(The Prince Consort)' 칭호를 받았으며, 그 전에는 원래의 호칭인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Duke of Saxony[21]'에 직계 왕족과 결혼하면 무조건 붙는 HRH(His Royal Highness)이 추가로 붙은 것 외에 어떤 영국의 작위나 공적 지위도 없었다.[22]

빅토리아 여왕은 원래 앨버트 공에게 'King Consort' 호칭을 주고 싶었지만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실패한 이후, 의회와의 줄다리기 끝에 어렵게 남편에게 국서라는 뜻의 'The Prince Consort' 호칭을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해군 제독 지위도 주고 싶어했지만, 이 지위는 기어이 못 받았다.[23][24]

거기다 앨버트는 성격이나 성향도 영국인들과는 별로 맞지 않았다. 농담을 즐기고 재치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영국인들에게 앨버트는 지나치게 진지하고 유머 감각도 없고 우울하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앨버트는 사교생활을 즐기지 않아 영국 귀족들과 사귀는 것이 매우 느렸던 데다[25] 밤늦게까지 호화로운 파티를 열고 춤추며 노는 영국 상류층들의 관습[26]은 아예 이해를 못 하다 못해 경멸해서 성실하게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을 강조했다.

복도 청소를 하는 하녀 옆을 지나갈 때조차 귀부인에게 하는 것처럼[27] 모자를 벗고 "방해해서 미안합니다. 나는 신경쓰지 마세요."라며 정중하게 행동했고, 당시 상류층 남성이라면 흔히 두었던 정부 하나 제대로 만들지 않았던 데다 임신해서 몹시 살찌고 예민해져 있는 아내 빅토리아 여왕을 보고[28] "미래의 어머니가 될 임산부는 너무나도 아름답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내 아내"라고 부르며 옆에서 아주 충실하게 수발을 들어주었다. 19세기 영국인의 기준에 지나치게 도덕적이고 모범적이었던 앨버트의 행실과 마인드는 존경스러운 수준을 넘어서, 왠지 가식적이고 위선적이다 못해 좀 재수없게까지 느껴지는 오버액션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사실 밤새도록 술 퍼마시다 동트면 잠드는 집단 속에 성실남이 왔으니 당연한 반응이긴 했다.

결혼 초부터 약간 어둡고 우울하며 금욕적이던 그의 성격은 죽을 때까지 거의 고쳐지지 않았다. 그는 덕망 있는 성품과 고결한 행실로 가족들과 가까운 지인들에게는 존경을 받았지만 친구는 별로 없어서 영국 귀족층들 사이에서는 배척을 받았다. 안 그래도 외국인 왕족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일반 대중들을 대상으로 한 신문지상에서는 차가운 샌님, 사이비 현학자라며 심심할 때마다 까이곤 했다. 앨버트 공의 도덕률에 깊이 공감했던 데다 열렬한 남편의 지지자였던 빅토리아 여왕은 앨버트가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영국 신민들에게 평가절하 당하는 것에 몹시 분개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


3.5. 가정 생활과 자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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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6년 가족 초상화
이렇듯 안팎으로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 보니, 결혼 초의 앨버트는 자연스럽게 가정 내에서의 문제에만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영국 왕실의 뒤숭숭한 후계 구도 때문에 어머니와 주변 어른들에게 시달리며 불행한 어린 시절을 살았던 빅토리아 여왕과 마찬가지로 앨버트 역시 아픈 가정사를 겪었던지라, 자신의 아이들만큼은 절대 자신과 같은 아픔을 겪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했고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내를 도우며 여왕의 부군이자 아버지로서 큰 역할을 한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아내 빅토리아와 장모 겸 본인의 고모 켄트 공작부인의 사이를 중재해 준 일인데 어릴 적 빅토리아는 집사인 존 콘로이의 부추김으로 자신을 폐쇄적인 환경에서 자라게 한 어머니를 몹시 싫어했고, 대신 가정교사인 루이즈 레젠 여남작에게 의존했다. 이 때문에 켄트 공작부인은 딸의 정적들을 지원했을 정도로 여왕을 괴롭혔고, 레젠 남작은 자신만을 의지했던 빅토리아의 사랑이 앨버트에게 넘어갈 것을 염려해서 젊은 부부 사이를 이간질하는 등, 빅토리아의 가정 환경 역시 앨버트의 가정만큼이나 평범치 않았다. 그러나 사위이지만 동시에 친정 조카라는 이점을 살려 켄트 공작부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앨버트는 공작부인과 여왕을 어느 정도 까지는 화해시키는 데 성공했고, 레젠 여남작을 독일로 쫓아내면서 문제를 해결했다. 이 시점 이후 앨버트는 가정 내의 문제 해결사 혹은 중재자의 역할을 맡게 된다.

한편 여왕과의 금슬이 매우 좋아서 9남매[29]를 낳았다. 이 중에서 앨버트가 가장 사랑한 자녀는 첫째이자 장녀인, 후에 독일황후가 되는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통칭 비키)로 여왕이 내심 질투할 정도로 이 딸을 귀여워했다고 한다. 비키는 6세에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소화하고, 14살에는 정치, 외교, 사회 다방면에서 막힘 없이 대화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갖추었을 정도로 여왕의 자녀들 중에는 가장 탁월한 수재였는데, 이런 딸의 엄친딸 성향과 재능이 교양수준 높고 지적 욕구가 대단했던 앨버트의 구미에 딱 맞았던 것.

맏이의 성취에 감격한 앨버트와 빅토리아는 자식들의 능력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둘째이자 왕세자인 버티에게는 측근 스톡마르 남작마저 기겁할 정도로 빡센 교육 커리큘럼에 더해 왕세자 전용 군사 교육까지 시켰다. 그러나 누나만큼 지적이지 못했던 버티는 이를 따라가지 못 했고 점점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여왕은 게으르고 공부를 멀리하며, 맨날 애인이 바뀔 정도로 사생활도 문란하고, 부모 말도 징그럽게 안 듣는 장남을 매우 못마땅히 여겨 들들 볶았는데, 그런 빅토리아와 버티 사이를 더 나빠지지 않도록 중재했던 것도 앨버트였다. 그러나 앨버트 역시 외가인 하노버 왕조의 왕자들을 닮아 자신과는 성격이 완전히 다른 아들을 이해하지는 못 했고, 버티 또한 냉정하고 도덕적인 아버지의 설교에 그다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후일 에드워드 7세가 되는 버티는 실제로 평범한 재능의 평범한 왕이었다는 평을 듣기는 해도, 빅토리아 여왕이 평한 것처럼 최악의 성품과 지능을 가진 둔재는 아니었으며, 오히려 외교 정책에 있어서는 부모보다 낫다는 평가도 있다. 사실 배경 없는 부군에 성질 있고 전쟁 좋아하는 여왕인지라...


3.6. 정치 관여[편집]


앨버트는 꽤 똑똑했고 의지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여왕에게 조언하는 방식으로 간접적으로 정치에 관여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여왕임에도 여성은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되고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보수적인 여성관을 가지고 있던 빅토리아 여왕은 그의 조언에 잘 따르는 편이었다. 공식 직함은 없었지만, 단순히 여왕에게 조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죽기 전까지 공식 문서는 앨버트가 먼저 읽어서 답변을 써놓으면, 빅토리아 여왕은 앨버트 공이 작성한 답변을 열심히 베껴 써서 문서를 처리했다고 한다. 학식과 지성을 갖춘 데다 자유주의 성향이었는데 신하들은 독일 남자가 여왕을 조종한다고 신나게 깠다고.

조언자라는 한계가 있었지만 앨버트는 여왕에게 있어 상당히 유능한 조언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빅토리아는 자주 서신을 보내 앨버트에게 조언을 구했고, 앨버트도 그녀를 성실하게 보좌했다고 한다. 특히 동인도 회사의 횡포로 인해 세포이들의 반란이 일어나자 병석에 있음에도 일일이 그녀에게 편지로 조언을 보냈다.

업적으로는 수정궁으로 유명한 1851년 영국 만국박람회를 주도했으며, 이 박람회가 성공적으로 치러지자 빅토리아 여왕은 남편의 성공에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3.7. 말년과 사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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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사진
1859년 8월, 앨버트는 위경련을 앓아 병상에 누웠다. 1860년 가을에는 코부르크에 가던 중 타고 있던 마차의 말이 달아나서 타박상을 입기도 했다. 이 때 앨버트는 형 에른스트 2세와 큰딸 빅토리아 공주에게 죽을 때가 된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고 한다.

1861년 3월, 빅토리아 여왕의 어머니 켄트 공작부인이 사망했다. 여왕은 생전 어머니와 갈등했지만 모친상에 매우 깊은 슬픔에 빠졌다. 앨버트는 위가 좋지 않았지만 슬픔에 빠진 여왕을 보좌했다. 그 해 8월에는 여왕과 함께 장남 앨버트 왕세자가 군 복무를 하고있는 아일랜드를 방문했으나 정작 왕세자는 그곳에서 아일랜드 여배우 넬리 클리프던을 만나고 있었다.

1861년 11월에는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의 오촌 조카들인 페드루 5세와 페르난두 왕자가 장티푸스로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앨버트는 왕세자가 여전히 넬리 클리프던을 만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고, 이에 충격을 받아 아픈 몸을 이끌고 직접 왕세자를 찾았다.

하지만 이후 앨버트의 몸 상태는 급격히 악화되어 결국 12월 9일 장티푸스 판정을 받았고, 12월 14일 윈저 성에서 빅토리아 여왕과 다섯 자녀가 곁을 지키는 가운데 사망했다.[30] 당시 주치의는 장티푸스로 진단했으나 지속적인 위경련과 통증 등으로 보았을 때 크론병이나 신부전증, 또는 위암이 사망 원인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많다.

유해는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 안장되었다가 1년 후 프로그모어 영묘로 이장됐다. 앨버트 사후 빅토리아 여왕은 죽을 때까지 상복을 입고 남은 평생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남편이 망나니 아들을 훈계하러 무리해서 움직인 탓에 사망했다고 믿었기에 죽는 날까지 에드워드 7세를 용서하지 않았다.

4. 가족 관계[편집]



4.1. 조상[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베르트 공자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
(Ernest I, Duke of Saxe-Coburg and Gotha)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프란츠
(Francis, Duke of Saxe-Coburg-Saalfeld)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Ernest Frederick, Duke of Saxe-Coburg-Saalfeld)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조피 안토이네테 공녀
(Princess Sophie Antoinette of Brunswick-Wolfenbüttel)
로이스에베르스도르프의 아우구스테 여백작
(Countess Augusta Reuss of Ebersdorf)
로이스에베르스도르프 백작 하인리히 24세
(Heinrich XXIV, Count Reuss of Ebersdorf)
에어바흐쇤베르크의 카롤리네 에르네스티네 여백작
(Countess Karoline Ernestine of Erbach-Schönberg)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루이제 공녀
(Princess Louise of Saxe-Gotha-Altenburg)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작 아우구스트
(Augustus, Duke of Saxe-Gotha-Altenburg)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작 에른스트 2세
(Ernest II, Duke of Saxe-Gotha-Altenburg)
작센마이닝겐의 샤를로테 공녀
(Princess Charlotte of Saxe-Meiningen)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루이제 샤를로테 여공작
(Duchess Louise Charlotte of Mecklenburg-Schwerin)
메클렌부르크슈베른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1세
(Frederick Francis I, Grand Duke of Mecklenburg-Schwerin)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루이제 공녀
(Princess Louise of Saxe-Gotha-Altenburg)


4.2.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녀
독일 제국의 황후 빅토리아
(Victoria, German Empress)
1840년 11월 21일
1901년 8월 5일
프리드리히 3세
슬하 4남 4녀[31]
1남
에드워드 7세
(Edward VII)
1841년 11월 9일
1910년 5월 9일
덴마크의 알렉산드라[32]
슬하 3남 3녀[33]
2녀
헤센 대공비 알리체
(Alice, Grand Duchess of Hesse and by Rhine)
1843년 4월 25일
1878년 12월 14일
헤센 대공 루트비히 4세
슬하 2남 5녀[34]
2남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알프레트
(Alfred, Duke of Saxe-Coburg and Gotha)
1844년 8월 6일
1900년 7월 30일
러시아의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35]
슬하 1남 4녀[36]
3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크리스티안 공자비 헬레나
(Helena, Princess Christian of Schleswig-Holstein)
1846년 5월 25일
1923년 6월 9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크리스티안 공자
슬하 3남 2녀
4녀
아가일 공작부인 루이즈 공주
(Princess Louise, Duchess of Argyll)
1848년 3월 18일
1939년 12월 3일
제9대 아가일 공작 존 캠벨
3남
코넛과 스트래선 공작 아서 왕자
(Prince Arthur, Duke of Connaught and Strathearn)
1850년 5월 1일
1942년 1월 16일
프로이센의 루이제 마르가레테 공주
슬하 1남 2녀[37]
4남
올버니 공작 레오폴드 왕자
(Prince Leopold, Duke of Albany)
1853년 4월 7일
1884년 3월 28일
발데크피르몬트의 헬레네 공녀
슬하 1남 1녀[38]
5녀
바텐베르크의 하인리히 공자비 베아트리스
(Beatrice, Princess Henry of Battenberg)
1857년 4월 14일
1944년 10월 26일
바텐베르크의 하인리히 공자
슬하 3남 1녀[39]

빅토리아 여왕/가족관계 참조.

5. 기타[편집]


  • 영국 런던의 유명 박물관 중 하나인 빅토리아-앨버트 박물관은 부부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 영국의 유명 공연장 로열 앨버트 홀(Royal Albert Hall)도 그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원래는 중앙예술과학홀로 불렸으나 빅토리아 여왕이 1867년 6년 전 사망한 남편 앨버트 공을 기리기 위해 이름이 바뀌었다.


  • 일본 판타지 소설 이상적인 기둥서방 생활의 주인공인 야마이 젠지로가 이 사람을 모티브로 했다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둘을 비교하면 겹치는 부분이 많다. 정부()을 들이지 않고 일편단심 여왕만 바라본다거나[40], 나름대로 뛰어난 재능을 지녔지만 직접 정치에 나서지 않고 아내에게 조언하는 역할만 하는 등.

  • 에른스트 2세바덴의 알렉산드리네 공녀와 결혼하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49년간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을 통치했지만, 앞에서 말한 불행한 가정환경을 본 후유증으로 여자와 결혼에 대한 불신에 사로잡혀 방탕하게 생활하다 성병에 걸려 후사를 얻지 못하고 1893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의 공위는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의 차남인 에든버러 공작 알프레드 왕자가 이어받았다. 하지만 알프레드의 외아들이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면서[41] 알프레드의 사후에는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의 막내 아들인 레오폴드 왕자의 유복자 카를 에두아르트가 공작이 되었고, 1918년 독일 11월 혁명 및 군주제 폐지 이후 가문의 수장 자리는 카를 에두아르트와 그의 후손이 이어가고 있다.

  • 앞의 유년생활에서 언급했듯이 불행한 가정 환경에서 자라났지만 이를 극복하고 훌륭한 아버지이자 남편이 되었던 케이스였기에, 아동 학대 피해자 또는 잘못된 가정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대물림을 끊고 훌륭한 부모가 되는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된다. 빅토리아 여왕 또한 부군 못지 않게 불행한 유년시절을 보냈기에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주고 행복을 준 앨버트 공의 죽음에 대해 누구보다 큰 상실감을 느꼈으며, 앨버트 공의 사후 남은 평생동안 상복을 입고 지내고 윈저 성에 앨버트 공이 사망한 방을 그대로 보존하며 여생을 그를 기리며 살았다.

  • 페니스 피어싱 종류 중에 앨버트의 이름을 따온 것이 있다. 이는 앨버트 공이 그곳에 피어스를 했다는 루머를 따른 것인데 물론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일설에 따르면 그곳의 치료를 위해 했다고 하지만, 검열삭제 시 즐거움을 위해 하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링크 다만 점잖고 엄숙주의적이었던 앨버트 공이 이런 것을 정말 했을지에는 의문이 든다.

  • TRPG 메이지 디 어센션에서는 오더 오브 리즌의 2인자이자, 아내인 빅토리아 여왕과 함께 오더 오브 리즌을 현대의 테크노크라시로 재구성한 위대한 테크노크라트로 묘사된다. 그가 주최한 1851 런던 엑스포는 오더 오브 리즌이 테크노크라시로 재탄생하는 무대가 되었다. 앨버트 공의 죽음 이후 빅토리아 여왕은 테크노크라시의 운영과 후원에 더욱 깊이 관여하게 되었는데, 이는 아마도 테크노크라시를 남편의 유산으로 생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인만큼 여왕을 다룬 매체에선 거의 예외가 없을 정도로 당연히 등장하는데, 실제 역사에서도 미남이었다는 것을 반영해서 앨버트 공을 연기하는 배우들도 전부 다 미남 배우들이다.


  • 크툴루 TRPG 시나리오 수정궁을 둘러싼 모험의 NPC로도 나오는데 그도 그럴게 수정궁과 만국박람회 자체가 그의 주도로 시작된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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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일 바이에른 주 뢰덴탈[2] 17년 후 차녀 앨리스 공주도 같은 날에 요절했고, 34년 후 같은 날에 증손자 조지 6세가 태어났다. 하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하필 남편의 기일이라며 증손자에게 무관심했다. 장남 에드워드 7세가 손자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앨버트라고 지어주고 나서야 여왕이 조지 6세를 예뻐했다고 한다.[3] 아내 빅토리아 여왕과 결혼하게 되면서 His Royal Highness 를 받았다.[4] 베틴 가문의 본가는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이다. 작센 왕국은 오히려 차남인 알브레히트 계열이 통치했다.[5] 작센-코부르크-고타는 에른스트 계열의 막내뻘이다.[6]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작센마이닝겐, 작센코부르크잘펠트, 작센힐그부르크하우젠[7] 독일 왕가는 남계상속만 인정한다.[8] 흔히 귀족을 나타내는 칭호처럼 여겨지는 폰(von)이나 드(de), 디(di) 등은 일종의 전치사로써, 영어로 치면 of에 해당한다. '루이 드 부르봉'이라고 하면 '부르봉(지방)의 루이', '부르봉 지방을 다스리는 루이'라는 의미이다.[9] 프리드리히 3세는 적자가 없었기 때문에 동생 요한이 뒤를 이어 선제후가 되었다.[10] 이후 빌헬름 1세의 장남 프리드리히 3세와 앨버트 공의 장녀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가 결혼하면서 두 사람은 사돈 관계가 된다.[11] 셋째 고모 율리아네가 러시아의 콘스탄틴 대공(니콜라이 1세의 형)과 결혼했었다가 이혼했다.[12] 친사촌 페르난두 2세가 포르투갈 여왕 마리아 2세와 결혼했다.[13] 둘째 숙부 레오폴드 1세조지 4세의 딸이자 후계자인 샬럿 공주와 결혼하고, 넷째 고모 빅토리아조지 3세의 4남인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와 결혼했다.[14] 빈말이 아니라 빅토리아 여왕의 얼빠 기질은 당대에도 유명했는데, 손주들의 외모 품평도 서슴치 않았으며 특히 예쁘고 잘생긴 손주들을 노골적으로 편애했다.[15] 너무 잘생겨서 아버지인 에른스트 1세의 아들이 아니라 어머니인 루이제가 앞서 말한 유대인 정부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라는 헛소문이 돌았을 정도였다. 앨버트의 집안에는 나름 미남미녀들이 꽤 있고, 부친 에른스트 1세도 나름 준수한 미남이다.[16] 빅토리아 여왕은 이때의 청혼에 대해 일기에 자세히 적어놓았다. "앨버트는 내가 기다리고 있는 접견실로 들어왔다. 그에게 접견실로 부른 이유를 알 거라고 하면서 내가 원하는 것에 그도 동의한다면 무척 기쁠 것이라고 말했다. …(중략)… 우리는 서로 포옹했다. 그는 무척 다정하고 친절했다. …(중략)… 나는 내가 그에게는 너무 부족한 사람이고 나와 결혼하면 많은 희생이 따를 거라고 말했다. 앨버트는 결코 희생이 아니며 나와 함께 일생을 보내는 것에 동의하는 것 이상으로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17] 빅토리아 여왕이 앨버트와의 결혼을 결심한 데에는 앨버트의 매력에 굴복한 탓도 있었지만, 당시 수상이었던 멜번과 지나치게 친밀한 모습을 보이면서 그와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괴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어디까지나 아버지 없이 자란 여왕이 아버지처럼 자상한 수상과 손발이 잘 맞아 의지했던 것이었지만.. 그 바람에 의회에서 '멜번 부인'이라는 조롱을 당할 정도로 여왕으로서의 체통에 큰 타격을 입고 있었던 점도 컸다. 적당한 왕족과 결혼해서 성실한 결혼 생활을 보여주는 것 외에는 스캔들을 잠재울 만한 뾰족한 수가 없었던 것.[18] 사실 영국 귀족 사회에서 은근한 따돌림을 받은 앨버트가 정치에 뭐라 할 처지도 아니라서...[19] 메리 1세의 남편 펠리페 2세는 에스파냐의 왕이었기 때문에 여왕의 부군보다는 타국 군주에 더 가까웠고, 엘리자베스 1세는 아예 결혼을 안 했으며, 메리 2세의 남편 윌리엄 3세는 아내보다 서열에서 밀리긴 할지언정 영국 왕위 계승권자였기 때문에 공동 즉위를 할 수 있었다.[20] 명색이 여왕의 정식 남편이라는 신분이었음에도 사망했을 때 장례식조차 개인장으로 치러버렸다. 이런 푸대접과는 별개로 아내 앤 여왕과의 금슬은 좋았고, 남편의 사후 앤 여왕은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했다.[21] 작센 공작 직위는 모든 베틴 가문에게 주어지는데 원래 영지 분할상속을 포기하고 장자 상속으로 전환했음에도 예전 특권을 명목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앨버트 공은 작센 공작이면서 작센 가문의 프린스이기도 하다.[22] 왕이 아니면서 여왕의 부군이 된 또 다른 케이스인 앤 여왕의 부군 조지와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 필립 공은 각각 컴벌랜드 공작, 에든버러 공작이라는 영국 작위를 받았다. 다만 'The Prince Consort'라는 호칭은 액면 그대로 해석하면 '여왕의 배우자'라는 단순한 호칭에 불과하지만, 역대 영국 여왕의 부군들 중 이 호칭을 부여받은 인물이 오직 앨버트 1명밖에 없을 정도로 귀한 호칭이다.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 필립 공조차 'The Prince Philip'일 뿐, 'The Prince Consort' 칭호는 죽을 때까지 받지 못 했다.[23] 대신에 영국 육군 원수 계급은 받았다.[24] 후계자가 아닌 남성 왕족들은 군인으로 빠지는 게 일반적이었던 시대임에도 앨버트 공은 군대 경력이 없었다. 세계 최강의 해군이라는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영국 해군과 신하들 입장에서는, 아무리 여왕의 남편이라 해도 외국 출신 군 미필에게 명예직일망정 제독 지위를 안겨준다는 것은 몹시 타협하기 힘든 일이었던 것도 사실. 엘리자베스 2세의 남편 필립 마운트배튼 공은 그리스 왕족이긴 했어도 영국 해군사관학교 출신에 영국 해군 장교로 2차대전 참전용사이며, 현역일 때 중령까지 진급했기에 원수직을 받는 것에 큰 반발이 없었다. 미필 외국인에게 원수 자리를 준 육군이야...세계 최강이 아니라서 여왕에게 대들지 못한 모양이기에는 영국육군의 정식 명칭은 브리티시 아미이다. 왕을 처형한 권력자가 만든 아이언사이드를 뿌리로 하다보니, 오히려 왕당파다운 행동을 한 것이 영국육군이란 것이 흥미로운 부분이다. 다만 상술한 컴벌랜드 공작 조지는 육해군 총사령관 자리를 받은 걸 생각하면 안습.(…)[25] 결혼 후 1년이 지나고서도 본가의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 친구라고는 코부르크에서부터 함께 온 시종과 애완견밖에 없다고 적었다.[26] 빅토리아 시대 사교계의 여왕으로 꼽혔던 베드포드 공작부인(버트런드 러셀의 큰할머니)은 새벽 4시까지 즐거운 나이트 라이프를 실컷 즐기고 다음 날 낮 11시에 일어나는 생활 방식을 고수했다. 영국 요리의 전 세계 적인 악명에도 불구하고 영국식 아침식사와 함께 쿠키, 케이크가 곁들여지는 애프터눈 티는 양도 많고 맛도 좋은 것으로 유명한데, 애프터눈 티를 즐기는 문화가 그렇게 발전한 것은 애프터눈 티가 간식이라기보다 이렇게 늦게 일어나는 귀부인들의 아점용이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27] 명색이 왕실 하녀인 만큼 하층민 출신들은 아니었지만 사용인들을 하대하지 않고 예의를 갖추는 것과 앨버트처럼 사용인들 하나하나에게 귀족 여성을 대하듯 칼같이 예법을 지키면서 행동하는 건 다른 문제.[28] 원래부터 키가 작고 뚱뚱했던 빅토리아는 임신을 하면 "술통 같이 부풀어오르고 있다"고 표현될 정도로 더더욱 살이 쪘고, 성격 또한 원래의 급함에 더해 몹시 까칠해지곤 했다. 특히 앨버트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매우 화를 냈다고. 자리를 옮기고 싶을 때마다 앨버트로 하여금 자신을 번쩍 들고 옮겨달라고 요구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 안 그래도 빅토리아 여왕이 정신줄을 놓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주치의들은 여왕의 성격이 임신할 때마다 위험 수준으로 괴팍해지자, 어느 정도 자녀들이 태어나면서 후계 구도가 든든해진 뒤에는 더 이상 아이를 갖지 말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들을 몹시 좋아했던 앨버트와 아이들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사랑하는 앨버트의 말이라면 일단 따랐던 빅토리아는 그 권고를 무시했다.[29] (빅토리아 여왕/가족관계 참고)[30] 에드워드 7세, 앨리스 공주, 루이즈 공주, 헬레나 공주, 그리고 아서 왕자가 임종을 지켰다. 빅토리아 공주는 결혼하여 프로이센 왕국에 있었고, 레오폴드 왕자프랑스에 머무르고 있었다. 알프레드 왕자는 바다에 나가 있었으며 막내 베아트리스 공주는 당시 4세로 너무 어렸기에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31] 빌헬름 2세, 작센마이닝겐 공작부인 샤를로테, 하인리히 왕자, 샤움부르크리페의 아돌프 공자비 빅토리아, 그리스의 소피아 왕비, 헤센의 방백비 마르가레테[32] 크리스티안 9세의 장녀이다.[33] 클래런스와 애번데일 공작 앨버트 빅터 왕자, 조지 5세, 파이프 공작부인 루이즈 공주, 노르웨이의 모드 왕비[34] 밀포드 헤이븐 후작부인 빅토리아 마운트배튼,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표도로브나 대공비, 프로이센의 하인리히 왕자비 이레네, 헤센 대공 에른스트 루트비히, 러시아의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35] 알렉산드르 2세의 차녀이다.[36] 루마니아의 마리 왕비, 러시아의 빅토리야 표도로브나 대공비, 갈리에라 공작부인 베아트리스 공주[37] 스웨덴의 왕세자비 마르가레타[38] 애슬론 백작부인 앨리스 공주,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카를 에두아르트.[39] 스페인의 왕비 빅토리아 에우헤니아 등.[40] 비록 그 이전시대보다는 여성의 권리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빅토리아 여왕이 다스리던 시절에도 귀족 부인들이 애인을 만들면, 욕을 먹지만 남성 귀족들이 똑같이 정부를 만드는 건 도덕적으로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던 사회였다. 오스트리아의 여군주 마리아 테레지아, 러시아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도 남편의 정부 때문에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다. 정부를 전혀 만들지 않았던 루이 16세가 오히려 무능력한 남자 취급을 받고 덤으로 그의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프랑스 국민들로부터 투기가 심하다고 비난받았다. 다만 예나 지금이나 권력자 본인을 욕하기는 부담스러우니 주변인을 욕하는데(십상시, 간신, 섭정, 외척 등등. 하다못해 현대에서도 대통령이나 재벌을 욕하고 싶을 땐 비서실장이나 부회장 등을 저격하며 우회한다) 프랑스에선 그게 왕의 정부였다. 왕이 욕받이 정부를 안 두니 욕하고 싶을 때마다 왕비를 욕한 것. 당시 프랑스 경제가 폭망하던 시절로 왕실에 대한 여론이 갈수록 험악해지는 가운데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의 오랜 적국이었던 오스트리아의 공주이기까지 했으니...[41] 알프레드에게는 외아들말고도 딸들이 있었지만, 독일의 극단적인 살리카법으로 공작위를 물려받지 못했다.